남인과 서인의 예론정쟁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쟁화되었다. 이무렵 조선 조정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과 인조의 중립에 정책으로 기용된 남인 세력으로 양분 되어 있었다. 인조, 효종 대에 남인은 주로 영남학파의 주리론을 주장하고 서인은 기호학파의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 문적인 대립을 벌였으나, 현종 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일삼곤 했다. 예론 역시 처음에는 학문적인 대립 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정쟁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일반 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도화 된 '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인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 상을 해야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기년상(1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서인과 남인의 이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 싸움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결국 효종의 상중에 일어난 이 논쟁에서 서인의 기년상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남인 의 반발이 심상치 않자 1666년 현종은 기년상을 확정지으며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고, 만약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그러나 복상 문제는 1673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이번에도 서인측은 효종이 차남이 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공설(9개월)을 내세웠고, 남인측은 그녀가 비록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긴 하나 중전을 지 냈으므로 큰 며느리나 다름없다면서 기년설(1년)을 내세웠다. 현종은 이 때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남인측의 기년설을 받아들여 자의대비로 하여금 기년 복상을 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서인은 실각하였고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1674년 8월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의 종래 주장이 옳았음을 피력하다가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 후 서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 예론 정쟁의 파 장은 '현종실록'에까지 영향을 미쳐 숙종 대의 경신대출척(1680년)이후 다시 집권한 서인에 의해 실록이 개수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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