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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6장25~40절
제목 : 바알의 단을 헐다
‘여호와의 단’을 쌓은(24절) 기드온은 이제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알의 단’을 파괴합니다.
하지만 그는 군대를 재차 소집하고 확신을 위한 표징을 구합니다.
1. 우상척결과 번제(25~27절)
1)기드온에게 다섯 가지를 명령합니다(25~26절)
“[25]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1) 칠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오라.
본절의 '수소' 는'칠 년 된 둘째 수소'와 동의어로 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굳이 번제물로 7년 된 수소를 취하라고 하신 까닭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7년간의 미디안의 압제(1절)로부터 벗어나게 하려 하신 당신의 의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2)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라.
이 단은 본래 오브라에 모여 살던 아비에셀 사람들(11절)의 공동 소유이나 특별히 기드온의 아비가 관리 책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근거로
①기드온이 자기 아비의 바알. 단을 훼파하면서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했다는 점(27절),
②'단'이 단수로 사용되었다는 점,
③이튿날 아침에 백성들이 바알의 단이 훼파된 것을 알 정도로 그 단에 관심이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28절).
(3)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아세라 상은 가나안의 최고 신인 엘(El)의 아내이자 바알(Baal)의 어미입니다. 간혹 '아스다롯'(Ashtaroth)과 동일 신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엄연히 구별됩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레 26:1-13 강해, '가나안 땅의 신들'을 참조하라.
(4) 이 산성 꼭대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아라.
이 산성 꼭대기에 - 추측컨대 이곳은 성읍 사람들이 모두 다 쳐다 볼 수 있는 성읍의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규례대로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정돈되게'라는 의미로서,
기드온이 단을 쌓음에 있어서 정성을 들였음을 보여 줍니다(Lange).
(5)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아세라 나무. - 이로 미루어보아 아세라 여신상은 통나무로 만들어 세운 목상(木像) 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왕하 21:7).
번제. -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과 정상적인 관계 유지를 기구(祈求)하는 마음에서 드리던 자발적인 제사입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레 1:3-9 강해, '번제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2)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합니다(27절).
“[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기드온이...두려워하므로 - '바알'은 농경물의 수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신입니다(2:13).
따라서 바알 우상 훼파 소식이 그 신봉자들의 귀에 들어갈 경우, 자신들의 소득이 격감되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그들이 격노 할 것은 자명합니다.
기드온이 두려워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태였을 것입니다.
2. 분노와 쟁론(28~32절)
1)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 되어 있었습니다(28절).
“[28]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장소는 동네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26절 주석 참조.
그렇지 않았다면 성읍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 단이 훼파되었는지를 금방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기드온과 그의 종들이 밤중에 신상과 산당을 훼파하여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을지라도(26,27절)그곳이 마을 가까이 위치했다면 성읍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함을 알았습니다(29절).
“[29]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서로 물어 가로되...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 이로 보건대 기드온의 종 열(27절)중에 누군가가 마을 사람들에게 기드온이 바로 범인 임을 자백하거나 고해 바친 것 같습니다(Pulpit Commentary).
3) 요아스에게 네 아들을 끌어내라 합니다(30절)
“[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를 훼파한 일 때문에 성읍 백성들이 그를 죽이려 한 점은 기드온의 부친이 소유한 바알과 아세라가 그의 가족에게만 속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증거해 줍니다.
한편 이들 성읍 주민들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우상을 숭배하여 십계명을 범했으면서도 무너진 우상의 제단과 신상을 보고서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 상을 훼파한 기드온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정작 죽임을 당할 자들은 자신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처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4) 요아스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고 합니다(31절).
“[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바알이...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 마을 사람들은 우상을 파괴한 기드온에게 분노를 품고 그 아버지에게 사형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아버지 요아스는 그 아들의 행위를 꾸짖기는 커녕 도리어 그를 위해 변호하였습니다.
기드온의 심령을 비추었던 하나님의 영이 그 아버지의 마음을 감화시켰던 것 같습니다.
적과 동조하리라 예상했던 아버지가 지금 자기편이 되어 주니, 기드온의 감사한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이렇듯 하나님의 편에 서서 진리를 위해 싸우는 자는 언제나 그분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의와 악한 세력은 생각보다 약하고, 정의와 진리는 무쇠처럼 강합니다.
요아스는 참신과 거짓 우상, 진리와 오류를 구별하는 길을 마을 사람들에게 제시한 것입니다.
즉 참 신은 징계하나 거짓 우상은 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진리는 그 자신을 증명합니다.
후에 바리새인으로서 뭇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았던 교법사 가말리엘도 같은논법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였습니다(행 5:34 이하).
5)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습니다(32절).
“[32]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은 '바알에게 대항하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에는 기드온이 바알을 쳐부쉈으되 바알은 기드온에게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못한 사실을 조롱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바알은 허구의 산물이며 헛된 우상임이 밝혀진 셈입니다.
한편 삼하 11:21에서는 '여룹바알'이 '여룹베셋'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때 '베셋'은 바알의 별명인 '보셋'과 동일한 말로서 '부끄러움', '수치'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룹베셋이라는 이름도 바알의 수치를 드러낸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 여호와의 영과 군대소집(33~35절)
1) 그 때에 미이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33절).
“[33]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 '이스르엘 골짜기'는 요단 강에서 길보아 산(삼상 28:4)부근을 거쳐 갈멜 산(사 33:9) 부근을 지나며 지중해에까지 뻗쳐 있는 비교적 큰 계곡입니다.
따라서 이 골짜기는 므낫세 반 지파와 잇사갈, 스불론, 아셀지파의 땅에 걸쳐 있는 셈인데, 그곳에는 기손강이 흐름니다. 4:7 주석 참조.
한편 본절에서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기 위함 이라기보다 이스라엘을 약탈하기 위한 준비를 갖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먼저 기습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전혀 그에 대한 방어나 어떠한 군사 행동(34,35절)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였습니다(34절).
“[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본절에는 성령이 임한 기드온의 신호에 따라 '아비에셀 족속'이 순종하면서 모여 그를 좇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심하게 우상을 숭배했던 자들이었으나 성령이 강하게 임한 기드온을 따랐습니다.
초대 사사 옷니엘도 하나님의 신이 임했을 때 구산 리사다임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3:10).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강림하시니'로 번역된 원어
'라바쉬'는 '옷을입히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옷 입히시듯 혹은 무거운 장비로 온통 감싸시듯 하여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셨음을 의미합니다.
(11:29;13:25;14:6;사 11:2;요 20:22;행 13:2;고전 12:4).
이처럼 신앙생활에서는 붙잡는 것보다 붙잡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도륵 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지혜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신앙의 열매도 하나님께로 부터의 은혜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신이 특별히 임하였을 때에는 명철과 지혜(창 41:38,39), 예언(민 11:25,26), 비상한 체력(14:6,19)등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이 보혜사로서 함께 하십니다(요15:26).
따라서 우리는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해서는 아니 되며, 육신의 정욕을 누그러뜨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보다 충만히 받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엡5:18).
본절에서는 바야흐로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므로서 그가 때마침 침략한 대적들로부터(33절)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로 세움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3) 기드온이 사자들을 므낫세, 아셀과 스볼론과 납달리에 보냅니다(35절).
“[35]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의 아비에셀 족속 출신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속한 므낫세 지파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취해 그들의 힘을 규합했습니다.
그러자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와 접경지대를 기업으로 받은 므낫세 지파는 기드온의 부름에 쉽게 응했습니다. 33절 주석 참조.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 - 이들 역시 이스르엘 골짜기와 인접해 있고 적들의 약탈과 위협에 처해 있었기에 기드온의 부름에 응했습니다.
그런데 이 중 '아셀'은 드보라 시대에는 압제자의 영향권 내에 있으면서도 출전치 않아 드보라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는 지파입니다(5:17).
올라와서 - 이 말에 해당하는 원어 '알라'는 반드시 '올라가다'란 의미만
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이는 어느 중요한 지점으로 나아가거나(스 7:6) 전쟁을 위해 진군하는 것(왕하 17:3;24:1;대하 36:23;나 2:1)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중 본절에서는 '알라'가 전쟁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양털 시험(36~40절)
1) 기드온은 하나님이 표적을 구했습니다(36~37절).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 기드온은 자신의 요구를 하나님께 아뢰기 전에 이미 이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셨던 바를(16절) 먼저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자신의 요구가 앞서의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불렀음을 표징으로 보여 주셨던 적이 있습니다(20,2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이 다시 하나님께 표적을 구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한 의심 때문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약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Keil).
이미 그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충만히 임해 있었으나(34절), 그는 자신의 연약한 힘으로써 메뚜기 떼 같은 대적들과(5절) 싸워 이긴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그에 따라 좀 더 확실한 하나님의 표적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 근동지방은 강우량이 적은 대신 밤에 이슬이 많이 내려 식물을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기드온 자신이 준비한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사면 땅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으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기적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대로 되었습니다(38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 밤새 이슬이 사면 땅에 내리는 대신에 기드온이 준비한 양털에만 비가 와서 젖은 것처럼 많이 내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마치 어린애 장난과 같은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개념하지 않으시고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셨는데 이로써 기드온은 어느 정도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분이 덧입혀 주실 능력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두 번 째는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여 달라고 하였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39~40절).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양털만 마르고...하옵소서 - 이러한 기드온의 요구는 앞에서 언급한 요구와 정반대 입니다(38절).
그렇지만 이 요구가 앞의 표적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서 기드온이 하나님께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 이는 앞의 이적을 보다 더 확증하기 위한 목적에서 청한 요구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용된 신(神) 명칭 중 '여호와'가 고유 명사라면
'엘로힘'(하나님)은 보통 명사입니다.
이 중 '여호와'란 명칭은 다른 이방신과 구별된 하나님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반면 '엘로힘'은 보다 더 넓은 범위로서 이방신까지 포함한 모든 신중의 신이신 하나님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는 장면(36-40절)에서는 '여호와'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대신 '엘로힘'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을 부르신 여호와께서(12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까지도 주장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표현인 듯합니다(Goslinga).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은 그날 밤(24절), 기드온에게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상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십니다(25~27절).
이 땅의 주인이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우상으로 얼룩진 이 땅을 하나님께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상숭배의 허망함을 드러내어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경각심을 주십니다.
우상의 허위를 폭로하고 우상이 주는 혜택을 거부하며 우상을 파괴하는 일은 “예배의 회복”(24절)dp서 시작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현현을 대면한 기드온이지만 오랫동안 믿어온 바알의 단을 허무는 일은 두려웠을 것입니다(27~30절).
훼파된 바알의 단을 보고 분노한 사람들은 그의 목숨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왜”보다는 “누가”이 일을 행했는지만 추궁합니다.
압제의 고통을 초래한 자신들의 패역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습니다.
“우상척결”의 주범은 찾아냈지만 정작 자신들이 “우상숭배”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 기만입니다.
2) 바알의 “무능”이 폭로됩니다(31,32절).
자신을 위해 변론할 수도,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는 거짓 신임이 드러납니다.
지금도 우상과 그 세력이 늘 우세할 것 같고 이미 우세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상에 더 기대고 싶은 유혹을 받지만 그건 “착시”일 뿐입니다.
3)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기드온은 거듭(35절) 군대를 소집합니다(33~35절)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음에도 자기 힘(내 손)을 의지하려는 불신앙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두 번의 징집은 결국 두 번의 해산(7:2,4)으로 끝나고 맙니다.
내게도 하나님의 힘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인간적인 힘을 모으는 데 몰두한 적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4) 기드온은 거듭 표징을 요청합니다(36~40절).
앞서 바알과 쟁론하더니 이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3:1).
시험의 의도는 감춘 채 자신이 원하는 결과만 기다립니다.
내 신중함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불순종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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