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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26일(주일 낮 예배)♣
성경:에스라1:1-11(구711P)
제목:감동받은 사람
1.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5.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6.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7.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8.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9.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10.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11.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서론
새벽기도하고 오는 길에 사진과 함께 붙여놓은 벽보를 보았습니다.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 벽보였습니다.
저도 강아지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멈추어서서 읽어보았습니다. 자기 집 강아지를 찾아주는 분에게 200만원을 사례하겠다고 하면서 이 개는 16년생이기에 얼마 살지 못하는 수명이 거의 다 끝나가는 개이고 다친 곳을 치료해주기 위해 털을 깎은 흔적이 있는데 함께 식구처럼 지내는 개이기에 꼭 찾고 싶으니 확인이 되면 연락을 주십사 하는 애절한 마음을 담아 사진을 부착해 놓은 문구를 보고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젖게 됨을 경험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그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감동케 한 일이 얼마나 되십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으로 인해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후회하지 않을 뿌듯한 삶을 사신 것이지만 그러나 만약 지나온 한 주간, 한 달, 1년, 지나온 한 평생 동안 나로 인해 감동한 사람이 없다면 그 삶은 재고해 보아야할 삶입니다.
감동은 커녕 짜증만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실망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런 인생은 주님이 가룟 유다에게 한 말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생'인 것입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감동케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물질이 넉넉해서나 보이는 것이 다채로워서 세상이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물론 감동은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감동이 선동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을 감동시켜야겠다는 생각은 더러운 겁니다. 감동은 강요로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감동은 인위적인 향수처럼 풍기는 게 아니라 자연적인 향기처럼 그렇게 우러나는 겁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가슴이 열려 공감의 아름다움이 일어날 때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감동이 있는 인생이 바로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누군가가 감동한다고 하는 것, 참으로 기분 좋은 일 아닙니까? 목회의 기쁨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 속에서 감동을 주는 교우들을 만납니다. 그 기쁨, 그 즐거움을 무엇으로 맛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참 묘해서 냉수 한 그릇으로 감동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금덩어리로도 감동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감동은 아무나 끼칠 수도 없고 아무나 경험할 수도 없는 하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것이 어렵고 감동을 받는 것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는 점점 감동은 없고 자극만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편리하고 화려하고 넉넉하지만 감동을 맛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불편하고 수수하고 가난했던 옛 시절에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모든 일이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장사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가르침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심지어 예배도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감동을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논지:하나님은 감동받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에스라서는 역대기의 후편이요, 포로 후기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이스라엘민족이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 장은 바벨론에 포로 되어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하여 포로생활 70년 만에 포로에서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때는 고레스 왕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바사)제국을 세워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바사 왕 고레스 원년'이란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주전 539년 9월), 바사 제국을 창건하여 초대 왕위에 등극한 해로, 주전 538년을 가리킵니다.
고레스는 새로운 페르시아제국의 왕으로 등극하자마자 이스라엘민족을 해방시키고, 고국 땅으로 귀환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어떤 이는 '고레스'라는 이름이 바사어로 '태양'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름대로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민족에게 자유와 소망의 빛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민족은 스룹바벨 총독의 주도 하에 1차 귀환을 하여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이스라엘민족 전체의 귀환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땅에서 70년을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민족들은 나름대로 그 땅에서 생활의 터전을 닦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0-300만명으로 추산되는 유대인들 가운데, 스룹바벨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1차 포로 귀환자의 인원은 5만 명 가량에 불과했던 것입니다(에스라2:64절:42,360명).
이들 귀환자들은 바벨론 땅의 안일한 안주를 버리고, 오직 언약의 땅 예루살렘을 사모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어쨌건 이스라엘 민족은 그렇게도 고마운 바사의 고레스 왕에 의하여 해방을 얻고 조국 땅으로 귀환을 하고 다시금 성전재건과 함께 이스라엘나라를 재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고레스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유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다고 하며,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렸는데 이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도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귀환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감동에 대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What:감동의 정의.
본문1절에"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본문의 "감동"이란 "하나님이 흔들다", "앉아 있는 사람을 벌떡 일어나게 하다", "강하게 자극하다", "잠자는 자를 깨우다". "가만히 있는 자를 움직이게 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감동시키다"는 "깨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이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백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고레스의 마음을 각성시켰음을 뜻합니다.
감동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감정이나 기력(氣力) 등을 포함한 총괄적인 용어라고 합니다.
일종의 미적‘혼합감정"이 감동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쾌, 불쾌가 감동 때문이라고 합니다. 감동이 있으면 쾌감을 느낍니다.
감동이 없으면 불쾌를 느끼게 합니다. 영어의 감정이란 단어는‘emotion’입니다. 이 말은‘motion’에‘e’를 첨가한 말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늘 일정치 못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늘 변하는 것이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동도 일정치 못하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적인 감동의 순간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감동은 얼마 후가 되면 다 잊혀지게 마련입니다. 감동이 있는 순간은 보고 또 봐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뻔히 그 결과를 알지만 또 봐도 감동이 살아납니다(2002년 월드겁경기 4강신화 경기는 보고 또 봐도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들은 보면 볼수록 불쾌감만 더해 갑니다(국회의원들이 싸우는 모습은 체널을 돌려버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당시를 감동이 없는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17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라고 한탄하십니다.
아무 감동이 없이 사는 사람들,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감동이 없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이 저주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마음에 와닿지 않으면 무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감동은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있고 말씀에 깨달음이 있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다면 이것이 곧 은혜입니다.
성경은 감동을 원하는 시대에 참감동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예화)
어떤 그림이 한 박물관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그림 저런 그림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때 독일의 젊은 백작 중의 한 사람이 여러 그림을 보다가 어떤 구석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그림을 보았습니다. 전에는 무심히 성화를 많이 보았지만 그 날은 이상하게 무심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말하자면 그 젊은 사람의 마음을 붙잡아서 물러 갈래야 물러갈 수가 없어서 오래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그 글자가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생각되어 그 자리에 앉아서 "오, 주님이시여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생을 당하시고 죽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고 온전히 그 몸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이 분이 우리가 잘 기억하는 모라비안 교회의 진젠돌프라는 사람입니다.
18세기에 많은 피난민을 모아 가지고 그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며 그 사람들과 같이 교회를 조직하여 몇 사람 안되지만 온 천하에 선교 운동과 경건 운동을 일으킨 유명한 백작 진젠돌프입니다.
2.Why:왜 하나님께서 고레스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까?
본문 1절을 보면,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감동시키셨습니까? 그것은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70년 전에 하나님의 종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그 약속을 이루시려고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실 때에 한 지도자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소련이 무너질 때, 그 나라의 대통령 고르바쵸프의 마음을 하나님은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소련 연방 제국이 해체되기 시작했고, 동유럽의 위성국들이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1989년 12월 고르바쵸프와 미국 대통령 부시가 몰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냉전 종식을 했습니다. 한사람의 지도자의 마음이 움직이니까 세계 역사가 변한 것입니다.
그 이듬해 1990년 3월 이후부터 소련 연방이 무너지고 위성국가들이 모두 독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련이 개방정책을 펴면서 문이 열리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누가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니시면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자기의 뜻대로 하실 때 한사람의 지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고레스 왕이 그렇게 이스라엘민족을 해방시켜주고, 본국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라고 칙령을 내린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고레스 왕 스스로가 그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방인 고레스 왕의 마음도 움직이시고 역사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바다를 가르고 길을 내시는 하나님! 반석에서 샘물이 흘러나게 하셔서 백만이 넘는 이스라엘백성들과 수많은 가축 떼로 하여금 흡족하게 마시게 하신 하나님!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셔서 굶주린 그 백성들의 배를 채워주신 하나님!
성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하여도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신 하나님! 보잘것없는 소년 다윗의 물매 돌에 그렇게도 대단한 거인 골리앗이 쓰러지게도 하신 하나님! 참으로 그분은 전능하시지 않습니까?
그분이 바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좋으신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레스 왕의 마음도 움직여서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과 소망을 주신 전능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왜 낙심하십니까? 왜 좌절하십니까? 왜 의심하십니까? 왜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십니까? 왜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십니까?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사 49:14-16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37:5-6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잠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찬송가 538장(통327장)
1. 죄짐을 지고서 곤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새사람 되기를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2. 정결케 되기를 원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생명수 마시기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3. 진실한 친구를 원하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네 맘에 평안을 원하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4. 즐거운 찬송을 하려거든 네 맘속에 주 영접하며 평안한 복지에 가려거든 네 구주를 영접하라
<후렴> 의심을 다 버리고 구주를 영접하라 맘 문 다 열어 놓고 네 구주를 영접하라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백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구원 사역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세속으로 기울어진 우리의 마음을 깨우고 계십니다.또한 이 깨움을 감지하고 여호와께로 마음을 돌리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하십니다.
이방인까지도 자기의 사역을 위해 마음을 깨우셨던 여호와께서는,택한 성도들을 소명의 길로 돌아서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이 부르심에 성령을 통해서 각성한 자는 그 마음 속에 오직 여호와의 명령에 대한 순종뿐입니다.그리고 이 순종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깨워주신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을 감동시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감동하도록 성령을 통하여 오늘도 감동하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How:어떻게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누구에게, 어떨 때에 마음을 감동시키실까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부류의 사람에게 마음의 감동을 일으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파사에 고레스라고 하는 왕입니다.
이 왕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나라의 왕이요. 하나님을 믿거나 섬기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게 하시는 것입니다.
1절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입니다.
마음의 감동을 일으켜 기쁨으로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일에 참여하게 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하나님의 감동함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 고레스 왕은 일회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해서 그를 감동시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르기 위해서 잠깐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2-3절에 고레스 왕은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이 정도면 그는 최고의 성도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산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느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이방나라 왕인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일회용으로 사용하시고 끝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경우는 일회용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자이고, 또 중요한 시기에 마음을 감동시켜 사용하시고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때 마음에 감동된 사람은 모두 42,360명이었습니다(2:64)
오늘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고레스 왕과 같이 일회용이 아닌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헌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레스의 경우를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 뽑힌 42,360명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어떻게 저들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어 기쁜 맘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유다백성 전체 가운데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42,360명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하나님께서 무작위로 선출하셨을까요? 물론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일회용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이들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포로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기회가 주어질 때 하나님께 헌신하리라고 기도하며 준비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들에게 마음의 감동을 주셔서 사용하십니다. 비록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나는 언젠가는 헌신할 수 있어! 하면서 기도하고, 말씀에 귀기울이고, 어떻게든지 하나님께 쓰여짐 받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습니다.
준비하는 것은 우리 몫이고,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하기 싫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사용하실 것을 믿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헌신할 자신이 없더라도 주저하지 마시고 헌신을 위해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헌신하지 못한다고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헌신하고 있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한다는 마음으로 틈틈히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치피 하나님께 헌신은 내 의지로나,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동시켜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은 할 수 없어! 하면서 아무 준비 없이 사는 자들, 하고 싶지 않는데 억지로 어떻게 하면서 손놓고 있다든지, 때가 되면 나도 하겠지 하면서 어슬렁거리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께서 마음의 감동을 시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매를 들어 정신차리게 해서 사용 하실지 모릅니다.
준비 된 자는 기회가 주어지면 곧바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쁨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이 저주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무언가 하나님과 관계에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감동은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있고 말씀에 마음이 깨달음이 있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다면 이것이 곧 은혜입니다.
성경은 감동을 원하는 시대에 참 감동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사실 진정한 감동은 순수함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감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깁니다. 진정한 감동은 잔잔함에서 우러나옵니다.
시인 박노해는“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이 나날이 새롭다는 것을 깨닫고 감동하고, 울타리에 피어난 개나리꽃에 스며든 새 봄에 감동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뜻한 밥상을 대하며 감동하고, 잊었던 파랑새 소리를 들으며 감동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창조력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사람들이‘나를 감동시켜 달라!’ 외쳐보지만 정작 감동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창조력을 잃어버리고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시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동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감동할 것을 감동할 줄 알고, 감동할 때 감동할 줄 알고, 작은 것에 감동하고, 순수한 것에 감동할 줄 압니다. 어떻게 감동이 되살아날까요? 우선 주님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는데 첫째 날 빛을 만드신 다음“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은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그 빛을 보시면서 감동하셨다는 것입니다.
“야! 좋다”“야! 멋지다”엿새 동안 하루에 하나씩 만드시면서 매일 감동을 연발하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드시면서 모든 창조를 끝내시고는 더욱 크게 감동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야! 너무 좋다”“야! 너무 너무 멋지다!”하나님은 당신의 걸작품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시고 감동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감동하실 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을 보고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에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정성을 다하는 봉사와 헌신에 감동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동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을 닮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동하고, 하나님의 솜씨를 보고 감동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의 파노라마를 보고 크게 감동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술의 대가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에게 감동이 되살아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성경 구약에서“하나님의 신이 감동했다”든지 신약에서“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자극하시고 격려하셔서 그 마음이 움직이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감동이 없는 시대에 살면서도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오셔서 만져주시고 자극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면 우리 마음이 움직입니다. 마음이 열립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받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감동적인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감동을 되찾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감동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감동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란 감동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감동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감동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감동의 내용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하나님의 숨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에 흙으로 만든 사람의 모습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살아있는 영이 되었습니다. 흙에 숨을 불어넣지 않으셨다면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아무리 흙이지만 하나님의 숨만 있으면 감동이 있습니다. 아무리 질그릇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숨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하나님의 숨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죽었던 영도 다시 삽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있으면 날마다 기뻐 뛰면서 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숨을 내쉬면 성령을 받습니다. 주님의 숨을 받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주님의 숨은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주님의 숨을 받고 주님과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을 받고 감동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시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4.what then:결과:
하나님이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킨 결과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렸습니다.
1) 유다 백성들은 귀국하라[3]
하나님 앞에 우상을 섬기며 범죄한 유다를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게 하셔서 70년 동안 포로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70년이 차면 고국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대로[렘29:10]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유다 백성을 모두 귀국하라고 조서를 내렸습니다.
고레스는 유다의 해방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감격적인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만국을 고레스 왕에게 주셨습니다.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3]
그리고 유다백성들을 축복하였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3]
고레스는 70년 포로로 살던 유다 민족에 하나님이 함께 해주셔서 잘 귀국 하라고 축복하였습니다.
2). 유다 백성들은 성전을 재건축하라[2,3]
하나님이 이방 나라 왕 고레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하신 것입니다.
70 여 년 전에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면서 성전이 허물어지고 성전 기명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파사 왕 고레스를 하나님의 대언자로 쓰셔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3). 파사인은 유다인들에게 건축 기금을 주라[4]
고레스 왕은 자기 백성들에게 유다 백성들이 돌아갈 때 금, 은, 짐승, 물건을 주어 성전을 건축하는 기금을 주라고 명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돈을 주되 즐거운 마음으로 주라고 명했습니다.
파사 전역에 사는 현지 사람들은 유다인들이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헌금을 드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이 건축되기 위해 헌금이 드려졌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역사하십니다.
70년 포로생활을 한 유다 인들은 실제로 돈이 없었지만 성전을 재건할 재정을 현지인들을 통해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심으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옛날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금은보화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겼고 성막도 지어드렸고 바베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4). 유다인들을 감동시키신 하나님[5]
파사에 살던 유다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다 일어나 고향으로 올라갔습니다.
파사에서 살던 모든 터전을 미련 없이 남겨두고 고국으로 올라갔습니다.
5). 뺏어온 성전 기명들을 돌려준 고레스 왕[7-11]
금반 30, 은반 일천, 칼 29, 금대접 30, 은대접 410, 기타 기명 일천, = 금은 기명 도합 5400, - 세스바살이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6). 파사인들을 감동하신 하나님 [6]
고레스 왕의 조서대로 유다 족장들, 제사장들, 레위사람들이 귀환할 때 파사 사람들이 금, 은, 물건, 짐승, 보물들을 예물을 즐거이 드렸습니다.[6]
그 사면 사람들 - 유대인들 주변에 사는 파사인들은 그릇과 황금 - 귀한 예물, 비싼 물건
짐승[베헤마] - 장거리 이동시 짐을 운반할 말, 노새, 나귀
보물 - 귀금속, 보석, 장신구
"즐거이 드렸더라"-자원하여 드리다. 아낌없이드리다.
파사 사람들은 유다 사람들에게 귀한 할 때 아낌없이 재물을 주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귀국할 때 하나님의 감동으로 많은 재물을 얻어가지고 기쁨으로 귀환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거나 선한 생각을 넣어 주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순종하여 따라가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즉시 순종합니까? 미적미적 하다가 받은 감동을 사라지게 합니까?
감동을 받지 않은 것처럼, 못들은 척, 못 느낀 척 합니까?
감동에 순종하는 사람은 생각지 않은 복을 누리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지만, 감동을 무시하고 소멸하는 사람은 힘든 삶을 살게 되고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며 선한 길을 제시하시면, 민감하게 반응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레스 왕은 주시는 감동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마음만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포로 되어 바벨론에 끌려가서 70년을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하셨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고레스의 명령을 들은 바사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기쁨에 가득차서 열심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국을 떠나온 지 70년이 넘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포로로 끌려왔지만 그때까지 노예나 포로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폭넓은 정치인이어서, 포로로 끌려왔다가 총리가 된 다니엘에게서 보듯이 포로출신도 능력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6.25때 북에서 피난 온 분들 중에는 믿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한에 와서 자리를 잡고 성공한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유대인은 율법 지키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는 달리 대부분 성공하였을 것이고, 이미 기반을 다 닦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닦아놓은 기반을 다 버리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생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들은 주시는 감동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선교의 명령은 누구나 다 받은 명령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은 열두 제자에게만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주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을 받은 모든 신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명령을 자기에게 하신 명령으로 알고 전도에 생명을 바칩니다.
오지에 선교사로 나가서 자기 평생을 터도 안 나는 일에 바칩니다. 그러나 누구는 평생을 가도 전도 한사람도 안하고 선교를 위해서 선교헌금 한 번도 힘써 하지 않고, 하는 체 하기만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느끼는 사람과 감동을 받고도 받지 않은 체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선교사가 된 사람들은 우리와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반응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감동을 받고도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모른 체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저요,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서 그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라고 나섰습니다. 그들이라고 그 일이 어려운 줄 모르겠습니까? 아무 연고도 없는 그 땅에 가서 사는 일이 어찌 부담스럽지 않고 두렵지 않겠으며 어찌 노후가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자식 교육 망칠까 염려 되지 않겠습니까? 서울에 살면서도 남들 다 보내는 학원 한 두 개만 덜 보내도 자기 자식 망치는 것 같아서 강남으로 이사를 가려고 그렇게 머리를 싸매서 강남 집값 올려놓는데, 선교사라고 자기 자식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오지로 눈물 짜는 자식들 앞세우고 간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모른 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바사에서 겨우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터전 다 털어버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떠나려고 감동에 순종하여 일어섰습니다.
감동을 주시면 일어서야 합니다. 감동을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감동을 주실 때 마음과 행동이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감동에 반응해야 합니까?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설교를 듣다가 말씀에 따른 깨달음과 감동이 오는 대로 순종하고, 어떤 것은 직접 묻거나 가르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거기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밤새 머리 싸매고 고민 안 해도 하나님이 준비하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한번 살아볼 생각 없으십니까? 그게 잘 사는 것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세우시고 그 예언의 성취를 위해 이방나라의 왕의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의지대로 감동시키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단순히 해방만 시켜 준 것이 아니라 고국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면서 감동을 받으십니까? 예배 가운데 감동을 받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감동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감동이 없는 이 시대이지만 그러나 오늘 성도 여러분은 감동을 받으시고 다시한번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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