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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제6회 청소년문학캠프
참가학생 작품집
(2016년 8월 6일/국립 세종도서관)
세종문학회
2016년 제6회 청소년문학캠프
* 일시 : 2016년 8월 6일 (토요일) 오전 9시~
* 장소 : 국립 세종도서관 3층 대강의실
* 참가학생 : 세종특별자치시 소재
7개 고등학교 학생 25명
* 지도강사 :
세종문학회를 중심으로 활약하는
시인·소설가·문학평론가 등 문인
최광 소설가
임관수 평론가
안휘 소설가
조민식 소설가
이인옥 시인
이영 시인
진영대 시인
김세인 소설가
성배순 시인
민경란 시인 등 (10명)
= 목 차 =
◎ 콩트
현기증-이혜수(종촌고) -04 / 기억-장연지(양지고) -10 /
머리에서 손까지는 너무 멀어-권종환(한솔고) -16 /
무언가 빠진 장례식-이예림(고운고) -20 /
퍼즐 게임-김건두(도담고) -22 /
용기를 막는 오해-정현(도담고) -27 /
붉은 마법-이자호(한솔고) -31 /
오해와 진실-장다연(도담고) -35 / 첫눈-오승미(도담고) -38
◎ 시
열일곱-이은우(고은고) -40 / 머피의 법칙-조현정(도담고) -41 /
잉크 펜-이기일(종촌고) -42 / <포토 앨범> -43
배꼽-박민하(도담고) -44 / 친구-송수영(세종여고) -45
별을 박은 자리-유소리(세종여고) -46 / 의자-이자경(도담고) -47 /
복숭아벌레-임나현(세종여고) -48 / 적도 위에서-정예림(두루고) -49 /
하얀 담장-하현서(세종여고) -50 /
과거는 꿈이 되었다-이정화(도담고) -51
◎ 창작지도 후기 -52
-문학캠프 참가 학생들에게
◎ 세종문학회 연혁 -53
[콩트]
현기증
이혜수 (종촌고등학교)
“우리 기증이가 좋아하는 열무김치 했다.”
엄마가 만든 김치는 향기롭다. 아삭하고 신선한 물기를 배고 있는 통통한 열무부터 쌉쌀한 생강, 풋고추, 마늘을 넣어 양념한 열무김치. 나는 열무를 밥에 말아 먹을 셈으로 열무 통을 들어 선홍빛 투명한 국물을 밥그릇에다 붓고 싹싹 버무렸다. 달착지근한 냄새가 났다. 입에 잔뜩 침이 고여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숟가락으로 밥을 푹 퍼서 입에다 갖다 대었다. 엄마가 그 말을 하기 전 까지는.
“이거 먹고, 공부 열심히 해야지?”
입 안에 이미 들어간 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혀끝에 낱낱이 분리된 밥알이 허무하게 돌아다녔고, 새콤했던 국물은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 시큼하게 변해있었다. 내장이 공부라는 말에 긴장을 하고, 오장육부가 성적이라는 마취제에 들큼히 썩어가는 것이다. 몰아치던 식욕에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렸다. 나는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천천히 식어가는 내 얼굴을 보면서 엄마는 그제야 아차 한 듯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살살 달래는 듯하더니, 종내 엄마가 그런 말 하나 자식에게 못하냐며, 살쾡이가 눈 부라리듯 어미를 노린다고 내게 바락바락 화를 내는 것에 이르렀다. 결국 오늘도 죄인은 나인 터였다. 나는 천천히, 밥의 찰기가 녹아 진득해진 열무김치를 들어 입에다 쑤셔 넣었다. 울 것 같이 눈앞이 흐려졌다.
고등학교 2학년, 남자, 문과생, 국어 3등급, 영어 3등급, 수학 5등급, 성적 종합 3등급 후반, 이름 현기증. 그리고 수포자.
이 정도면 나에 대한 설명은 거진 끝나 있다. 다른 말로 견적이 대충 나왔다는 것이다. 내 손을 움켜쥔 엄마의 손이 축축했다. 나보다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드름 두어 개가 볼 께에 솟은 볼품없는 나를 건너다보는 학원 선생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이름이…, 현기증이라고 했지?”
“예.”
“기증이는 수학을 싫어하니?”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내 팔뚝을 꼬집듯 쥐어뜯는 엄마의 손이 없었더라면 틀림없이 사실을 말했을 거다. 나는 멍청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요. 그러면? 열심히는 하는데 성적이 잘 안 올라서. 흐음……. 간을 보듯 선생이 엄마의 애가 탄 표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가고 긴장은 곧 탁 풀렸다. 선생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우리 모자를 굽어보았다. 우리 학원은 열심히 하는 학생은 마다하지 않아요. 이렇게 의지가 있는 학생은 환영이죠. 그 이래로 몇 번을 전전하며 몇 번을 아니 몇 십번을 몇 백번은 들었던 것 같은 설명이었다. 다만 이미 학원 선생의 열렬한 신봉자가 된 엄마는 그런 것이 눈에 뵐 리가 없었다. 마치 마약이라도 거듭 삼킨 듯한 황홀한 표정이 되어 학원 선생의 뻔한 말에 무릎을 치며 공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회색 벽, 노란 조명, 사무적인 책상과 보여주기 식으로 놓인 책장 안에 빼곡히 쌓인 전공서적들. 눈앞이 노래졌다. 현기증이 절로 일었다.
내가 좋든 싫든 나는 그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당연스러운 결과였다. 나는 저번 기말고사에서 애매하기 짝이 없는 수학 49점을 맞았고, 앞에 이미 게시했듯 영광스런 5등급의 주인이었으니까. 다른 애들도 다 하니까 나도 해야 했고, 학원을 가서 무엇을 하던 일단 거기 앉아있으면 내 성적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어찌되었든 조금이나마 안정이 되었다. 집중이 되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날은 수업진도가 너무 빨라서 쫓아가기 힘들거나, 아니면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때 빼곤 없었다. 매일 커피나 고 카페인 에너지음료 같은 것을 들이켜 수업시간에 조는 일도 거의 없었다. 눈 밑에 그늘이 조금 패이더라도, 선생님들로부터 그래도 나는 열심히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별 수 없었다. 성적이 안 되는 제겐 정말이지 노력 빼고는 승부를 걸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리고 꽤나 열심히 살았다. 남들 하는 것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 결과로서 보답할 수 없다면 과정이라도 선물하고 싶었다. 노력해서 안 되는 건 없다는 선생님들의 말을 믿고서 그렇게 몇 밤을 새웠고, 매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났다. 엄마는 간간이 뒤에서 내 등을 도닥여주었다. 내가 새로 중간고사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
완전히 망했다. 첫 번째 문제를 보자마자 의식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한 문제라도 똑바로 보자고 다짐하고 또박또박 글씨를 눌러쓰는데 시간은 거의 반 넘게 지나가 있었다. 마음이 허둥대니까 마킹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땀에 젖은 손바닥으로 펜을 쥐고 손끝을 덜덜 떨며 마킹을 해 나가는데 시험 종료 1분 전에 끝 번호를 모조리 밀려 썼다는 걸 알아챘다. 서술형은 5문제 중 3문제가 공석이었다. 완전히, 망했다. 시험 마침종이 치는데 그렇게 내 인생이 끝이 난 것 같았다. 나는 목각인형처럼 차갑게 굳어 의자에 화석처럼 응고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수학이 정말 싫었다. 혀 밑에서 뜬금없이 신 김치 맛이 났다.
갈 곳이 없어 시험이 끝나자마자 곧장 독서실로 직행했다. 다른 과목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학이 이렇게 망하다니. 나는 분명 노력을 안 한 게 아닌데 말이다. 철저한 결과주의자인 엄마는 내가 아무리 돌이켜 푼 문제집이나 오답노트 따위를 가져와도 코를 팽 풀 것이 당연하다. 네가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안 나올 리가 없다고 할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내가 수학 자체에 재능이 없다는 것은 하등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결론이다.
성적을 물어보는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아 나는 스마트폰 전원을 그냥 꺼버렸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도 암전되고 침몰되었다. 늘 맡아둔 자리에 앉아 있는데 낡은 나무 벽면에 온갖 수학 공식, 훌륭한 격언들이 가득했다. 눈물이 콱 쏟아졌다. 나는 그것을 모두 뜯어 휴지통에 밀어 넣었다. 나는 수학교과서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풀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듯 문제를 푸는 내 모습은 어쩌면 정신병자의 집착처럼 처절해보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세 번째 장을 공격적으로 넘기는데 평소 잘 오지도 않던 잠이 말 그대로 쏟아지듯이 밀려왔다. 아마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눈앞에는 풀지 못한 함수 그래프가 요단강처럼 어른거렸다. 풀어야…하는…데……. 몽유병 환자처럼 중얼거린 나는 그대로 책상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깜박 졸았다. 일어나니까 책에 피가 흥건했다. 손가락으로 코 밑을 훔쳐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뻘건 피가 진득하게 묻어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잔 거야……. 입을 다시면서 시계를 쳐다보는데 웬걸, 새벽 두시 반이었다. 뒷감당은 어쩌자고 이렇게나 많이 잔 건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자고 일어났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코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좀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지끈거리는 두통 속, 나는 돌연 초연한 기분이 된 채로 피로 얼룩진 책, 책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페이지의 가장자리가 검붉게 말라붙어 쪼글쪼글 쭈그러들었다. 뚝, 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콧마루 끝에 맺혔다가 뚜르륵, 인중을 타고 입술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깔깔한 혀를 내밀어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피 맛이 혀끝 자잘한 돌기에 역겹게 달라붙었다. 나는 속에서 콱콱 복받치는 욕지기를 애써 억누르며 주섬주섬 책을 챙겨들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피가 바짓가랑이로 뚜욱 뚝 떨어졌다. 독서실에는 나 빼고 몇 사람 없었고, 그 마저도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고 있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휴대폰에서는 아까부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확인해보니 부재중 통화 알림이 몇 개씩 밀려있었다. 액정 상단에 찍힌 무미건조한 이름, 엄마. 카카오톡 아이콘에 알림 메시지가 마치 핏방울처럼 어려 있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클릭했다. 메시지는 딱 세 개 와 있었다. 발신인은 엄마였다.
‘기증아, 언제 오니?’
‘너 오늘 학교에서 중간고사 보지 않았니?’
‘오면 성적표 책상에 올려놓고 자라.’
어디선가 희미하게 김치냄새가 났다. 옆 사람이 컵라면을 먹고 신 김치를 안 치웠나 싶었다. 그런데 그렇다기엔 냄새가 너무 진하고 독했다. 시큼하고 씁쓸한 냄새였다. 때문에 아까 애써 잠재웠던 구토기운이 다시 밀려올라왔다. 우웁, 위장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짭조름한 땀 냄새, 화장품 냄새, 먹다 남은 음식물 냄새, 습기 어린 공기……. 소금을 과도하게 찍은 삶은 달걀을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숨이 탁, 막혔다. 입덧하는 사람마냥 속이 거북해졌고, 나는 흘린 피를 닦을 여유도 없이 도망치듯 밀폐된 독서실에서 빠져나왔다.
갈 곳이 없다. 몇 점을 맞았는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 이 비참한 성적을 받아줄 너그러운 곳은 이 사회에 없었다. 수고했다며 등을 토닥여줄 곳도 없었고, 지친 몸을 편히 뉘일 곳도 없었다. 이제 내게는 잔소리와 핍박, 한심한 듯이 노려보는 눈초리와 악악거리는 윽박지름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방이 무거웠다. 만날 매고 다녔던 무게였는데도 그랬다. 머리는 아팠지만 졸음은 오지 않았다. 다만 이상스레 피곤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아득히 멀었다. 너무 멀었다. 너무 멀어서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 것처럼.
나는 비척비척 병든 생선처럼 멍든 팔 다리를 휘저었다. 걷는 동작이 몸이 반쯤 썩은 좀비처럼 어수룩하고 뒤틀려있었다.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그래, 나는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그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뜨겁고, 경멸스럽고, 혐오를 잔뜩 머금고 있는 시선이. 나는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로는 고요했고 신호등은 꺼져있었으며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은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돌연 괴이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정적에 지쳐 숨을 할딱거렸다. 썰물처럼 밀려오는 고독함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차가운 공기가 숨통을 바짝 조였고, 꺼끌하게 마른 입술이 건조한 허공 속에서 애처롭게 달싹거렸다. 그때였다. 섬뜩한 감각이 발가락 말초신경 끝부터 자잘하게 끓어올랐다. 아주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뱀의 독니 아래 멈춰선 멍청한 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공포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숨을 도무지 쉴 수가 없었다. 나는 순간 고개를 뒤로 크게 젖혔다. 오랫동안 혹사당한 목 관절에서 뿌득 하는 소리가 났고 나는 얼어붙었다.
하늘에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얼굴들이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화가 난 표정들이었다. 그것은 표독스러운 양계장의 닭들이 모이를 쪼려고 고개를 한데 들이미는 모습 같기도 했고, 멍청한 돼지새끼들이 어미의 젖을 찾아 무식하게 머리를 치미는 모습 같기도 했다. 나는 넋이 나간 채로 하늘을 빙 둘러보았다. 얼굴들만 가득했다. 빠져나갈 틈 없이 붉으락푸르락 피가 쏠린 성난 얼굴들만 꾸역꾸역 내게로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 대부분이었다. 학교, 학원 선생님, 친한 친구들, 안 친한 친구들, 내가 좋아하는 애, 내가 싫어하는 애, 가족, 동생, 아빠, 엄마…….
나는 그만 맥이 탁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잘근잘근 씹고 있는 두툼한 입술이 저마다 침에 젖어 번들거렸다. 그들의 새까만 눈동자 안에선 지옥불 같은 광기가 번뜩거렸다. 나는 농아처럼 더듬거렸다. 살…살려 주……. 순간 피가 몰린 얼굴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땡땡하게 부풀어 오른 뺨들이 징그럽게 일그러졌다.
“5등급! 5등급! 5등급! 5등급! 5등급!”
그들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 나를 잠깐 보더니 곧 신랄하게 비웃어댔다. 수천 개의 입술이 저마다 모멸감을 잔뜩 안고 저주와 조롱의 말을 내게 퍼부어댔다. 귀를 막고 싶었는데, 몸에 힘이 풀려서 막을 수가 없었다. 아까 멎은 줄 알았던 코피가 다시 주륵 흘러나왔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그 누구 하나 민원신고를 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이 쿵쾅댔고,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파왔다. 아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낙오되었고, 종자부터 천하여 태생부터 있는 대로 멍들고 상해버렸다는 것을. 도축되어 판매장에 올라가더라도 그 누구도 쳐다봐주지 않을 고깃덩이인 나는 신랄하게 난도질당한다. 퉤엣 퉤! 나를 모멸하는 수천 수백 개의 얼굴들이 일제히 내게 침을 뱉었고, 나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염산 같은 침 폭우가 퍼부어졌다.
가슴이 어릿하게 아파왔다. 내가 이렇게까지 아플 수가 있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아플 수도 있구나. 중얼거리는 동시에 눈알이 뚜륵,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고, 동시에 아주 지독하고 끔찍한 현기증이 일었다. 시야가 거꾸로 뒤집혀진다. 나는 수많은 얼굴들의 풍랑 위로 추락했다.
희미하게 김치 냄새가 났다. 토할 것 같이 빈속이 뒤틀렸다. *
[콩트]
기억
장연지 (양지고등학교)
나와 그녀는 정말 행복한 사이다. 아름다운 그녀가 웃으면 온 세상이 환히 보이고 아는 노래를 습관적으로 허밍하듯이 부르는 소리는 어떤 노래보다도 아름답다. 그녀가 내 품에 안길 때는 차가웠던 몸이 그녀의 온기로 덥혀지고 사랑한다 말할 때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된다. 그랬던 그녀가 요즘은 뭔가 이상하다.
내 몸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 차갑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없는 서늘한 내 몸을 싫어한다. 하지만 오히려 시원해서 좋다던 그녀를 나는 너무나도 사랑한다. 그렇게 내 품에 폭 안기던 걸 좋아하던 그녀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을 느낀 건 몇 주 전이었다.
그녀는 뒤에서 소리 없이 꼭 안아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그녀를 안았다. 그러고 나서 곧 들려올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무언가 달랐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나를 팔꿈치로 밀어내며 “놀랐잖아. 기척 좀 내고 다녀.” 라고 답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오늘따라 기분이 좋지 않구나, 하며 그녀를 다시 안으며 사과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다시 밀어내며 “추워. 저리 좀 가.”라고 말했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서늘한 내 체온이 좋다던 그녀가 왜 저럴까? 아직도 나는 내 서늘한 체온을 사랑한다던 그녀의 표정을, 웃음을, 목소리를, 그녀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내 가슴은 늘 설레었고 내 귀에는 그녀의 그 말이 맴돌았다. 그러니 그녀가 나를 거절했을 때의 충격은 매우 컸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그녀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나보네.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뭘 했는지 당신한테 다 일일이 알려줘야 해? 아, 몰라. 나 다녀올게.”
그 말만 남겨둔 채 그녀는 집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단지 기분이 많이 나쁘구나, 요새 안 좋은 일이 있나보다-하고 지나갔다. 아니, 사실은 변명을 하면서 초조함을 지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 일도 아닐 거라고 받아들이며 초조한 가슴을 내리눌렀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불안해하면 안 돼-라고 되뇌며 이 마음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꼭꼭 묻어버렸다. 그렇게 오늘이 지나갔다.
우리가 팔짱을 끼고 함께 걸으면 모두가 우리를 부러워한다. 선남선녀라면서 우리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우리는 못 들은 척 도도하게 점잔을 빼다가 우리만 남게 되면 서로를 마주보고 사고를 친 악동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많은 여성들이 내 외모를 칭찬하면서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나를 제외하고는- 으쓱해했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그녀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다가도 내가 일부러 다른 여성들에게 눈길이라도 줄라치면 그녀는 나를 새초롬한 눈으로 쏘아보고는 잡고 있던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그녀가 질투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그래서 나는 종종 그 장난을 쳤다. 물론, 그 뒤에 집에 오면 그녀의 투정을 받아주어야만 했지만. 하지만 내게는 그 투정마저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그녀와 나 사이에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벽이 세워졌다. 함께 쇼핑하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고 내 외모를 칭찬하는 여성들에게 내가 눈길을 주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선남선녀라는 칭찬을 들어도 그녀는 별 감흥 없다는 듯 행동했다. 그때쯤 되니 묻어두었던 불안이 싹을 틔우고 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그녀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그래서 내 외모를 보고는 얼굴에 홍조를 띤 여성들에게 일부러 활짝 웃어주었다. 내 미소를 본 그녀들이 탄성을 지르며 소란을 피우자 그제야 그녀가 나를 보아주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내가 원하던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좀 있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가슴이 서늘했다. 이상했다.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불안의 싹은 내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남겼다.
불안은 의심이 되어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이제는 더 이상 권태기라고 변명만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바뀌었다. 아름다운 그녀는 웃지 않았고 습관적으로 허밍 하듯이 부르던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내게는 안기는 것을 거부했고 내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니 나는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간이 많아진 만큼 쓸데없는 생각도 많아졌다. 아니다, 이제는 쓸데없는 생각이 아니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왜 그녀가 나에게 그럴까. 내가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있었나. 내가 그녀에게 무엇인가 상처를 주었던가. 내가 그녀에게 잘못을 빌면 이 상황이 끝날까. 그녀가 나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던 그때 그전에 내가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있었나? 하지만 그전까지는 괜찮지 않았던가, 아니었나? 그전에 그녀가 수상쩍은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나? 몇 번을 생각해봐도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밖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나? 그게 아니라면…그녀에게…설마……. 아니다, 깊게 들어가지 말자. 아닐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니 미칠 것 같다. 제발 그녀와 대화를 좀 하고 싶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너무나도 괴롭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앞이 캄캄하다. 사랑스러운 그녀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늘 설레었고 얼굴을 마주보며 하루 종일 이야기만 해도 행복했던 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때는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눈만 마주쳐도 부끄러워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 은근슬쩍 손을 잡으면 둘 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 서로를 쳐다보지 못하고 손만 꼭 잡고 있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다 슬쩍슬쩍 곁눈질로 서로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다시 얼굴이 빨개져 서로 고개를 홱-하고 돌려 헛기침 몇 번하다가 다시 눈 마주치면 갑작스레 웃음보가 터져 하루 종일 웃고 있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고 그녀가 나를 꼭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속삭여줄 것만 같다. 사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슬프게도 내가, 내가…제일 잘 알고 있다.
삐삑-
현관 도어록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녀다. 이번에는 그녀와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아야 한다.
나를 보지도 않고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잡았다.
“이야기 좀 하자.”
“나 피곤해. 들어가서 쉬고 싶어.”
“제발! 잠깐만…좀.”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 들어갈지 몰라 전전긍긍해하자 막혔던 말문이 터지듯 말이 속사포로 나왔다.
“피곤한데 잡아서 미안해……. 그러니까…그…요즘 당신 많이 달라졌어. 내가…내가 당신한테 잘못한 게 있었어? 있으면 내가 고칠게! 그러니까 말해줘. 내가 뭘 잘못했어?”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무슨…무슨 일 있어? 많이 안 좋은 일이야? 그게 아니면…….”
뒷말을 마저 내뱉을 자신이 없다. 그녀가 정말 긍정을 표할까봐. 뒷말을 삼킨 채로 그녀의 말을 기다린다. 숨이 턱턱 막힌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할까.
“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한숨이 더 무겁게 다가왔다. 한숨 뒤의 말을 기다린다. 그 말이 너무나도 두렵다.
“미안해.”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만 숙이고 있던 차에 뜬금없는 사과가 들려온다. 영문을 몰라 그녀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본다. 그러자 그녀가 나를 웃으며 안아준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잇는다.
“요새 밖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나봐. 예민해져서 괜히 애꿎은 당신한테만 뭐라고 하고. 미안. 용서해줄래?”
그 말 하나가 보상이라도 되는 양 안도가 되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실제로는 울지 않았지만. 그러다가도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밖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아니야. 많이 힘든 것도 눈치 못 채주고 뭐라고 해서 미안해.”
“들어와. 오늘은 화해의 의미로 같이 안고 자자. 왜, 그 옛날에 많이 그랬잖아. 바라만 보고 자도 행복해서 잠도 잘 못자고 밤새 바라만 보고 있었잖아.”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는 그녀는 내가 알던 그녀가 맞다. 내 사랑스러운 그녀다. 우리의 추억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의 그녀다.
“응. 그러자.”
꿈이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다. 그랬다.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행복한 연인이었다.
“으음…….”
창밖으로 들어온 햇빛이 눈부시게 밝다. 일어나보니 그녀가 없었다. 거실에 있나? 문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거실에서 대화소리가 난다.
끼익-
문이 열리면서 내가 본 것은 두 남녀였다. 현관에서 진한 포옹을 나누는 남녀. 그리고 여자는…바로 나의 그녀였다. 슬프게도, 외면하려 애쓴 그 답이 맞았다. 아니라고 부정한 그 답이 맞았다. 문 여는 소리에 나를 본 두 남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왜…?”
왜 그랬나요?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지 않았나요?
“왜…왜 그랬어?”
그녀의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애원했다. 제발…제발 알려달라고. 나의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냐고.
퍼억-
남자가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잡아 빼더니 나를 있는 힘껏 밀친다.
“…어?”
그러나 나는 다음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몸이 이상하게도 바닥에 부딪쳐 깨져버렸던 것이다.
“감히 인형 주제에-!”
남자가 분노어린 목소리로 지금 상황을 깨닫게 해주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린다.
감히 인형주제에……․
감히 인형주제에…….
감히 인형주제에…….
그녀가 날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표정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랬다. 나는 인형이었다. 나는 마녀의 저주에 걸린 인형이었다. 마녀의 저주에 걸린 아름다운 도자기 인형. 아름다운 도자기 인형이 아름다운 인간 그녀를 사랑한 것이었다. 그것을 지금에서야 기억해냈다. 나는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웠으며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차가웠고, 나는…나에게는 사람의 영혼이 없었다. 영혼이 없기에 눈물도 없었고 사랑한다 말해도 그 속은 공허했다. 나는 움직이는 아름다운 도자기 인형이었다.
그래도…그래도 아무리 움직이는 도자기 인형이라도…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를 그토록 애절하게 사랑했다. 인형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도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를 사랑하면 안 되는데도 그녀를 사랑한다.
아아…그들이 떠나간다. 나의 아름다운 그녀가 떠나간다. 나의 부서진 파편을 밟고 그녀가 떠나간다.
마지막까지도 당신을 사랑한 나를 용서하세요.
사랑하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축복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
[콩트]
머리에서 손까지는 너무 멀어
권종환 (한솔고등학교)
수업이 끝났다. 일주일간 쌓인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온 탓에 집을 향하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무겁다. 그렇지만 내일이 주말이라는 안도감이 내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집에 가서 한숨 자고 일어나 숙제해야지!
각오를 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머릿속에서 방금 푼 수학문제를 다시 한 번 상기해보고 있었다.
‘학원 끝났어?’
그녀에게서 카톡이 왔다. 카톡에 목소리가 묻어있는 듯했다. 피로의 무게에 눌려있던 눈이 금세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손가락이 먼저 난리를 쳤다. 어서 답장을 하자고. 한쪽 머리에서 다른 지령을 내렸다. 곧장 집에 가서 눈 붙이고 숙제해!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고 뭐라고 쓸까에 조바심이 났다. 보채는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민했다.
뭐라고 쓰지…….
특별한 건 없다, 그냥 그녀가 보고 싶다는 것 밖에는. 그녀도 내 대답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밖에는. 손가락이 그것 봐, 별것도 없으면서 하면서 본연의 업무수행에 들어가 버렸다.
‘응. 지금 끝났어. 넌?’
사실은 ‘넌?’ 이라고 물을 필요도 없다. 나는 학원이 10시에 끝나고 지나는 나보다 삼십 분 후에 끝나니까. 그렇지만 ‘응. 지금 끝나고 집에 가고 있어.’ 라고 하기는 싫다. 의문형으로 물어서 그녀에게 다음 카톡을 유도하고 싶기 때문에 말이다.
열 시가 넘었으므로 도로 위의 신호등은 이미 주황색 점멸등으로 바뀌었다. 인적은 드물고 차들은 제 속도를 초과하면서 무섭게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내린 지 오래되어 먼지가 앉은 회색 눈을 발로 툭툭 차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학원에서 집까지는 불과 오 분이면 닿는다.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나에게 오 분은 동방삭이 숨넘어갈 정도로 길다. 그런데 내 발은 어느새 내가 십년 동안 지겹도록 보아온 우리 집 앞의 붉은 벽돌계단을 밟고 있었다. 그새 오 분을 따 써버린 것이다. 그녀의 답도 못 받았는데. 나의 시계는 물리적 시간과 내 정신적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곧바로 내 방으로 직행했다. 침대만 보면 몸을 날려 그 위로 돌진 하는 것은 이제 거의 본능에 가까운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안경을 벗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종일 피곤이 누적되어 따끔거리는 눈을 감고 그 위에 팔을 올려놓고 쉬었다. 그러면서도 정신은 집요하게 휴대폰 쪽으로만 가고 있다. 혹시 중간에 답이 올까봐, 진동이 울릴까봐. 그 생각만 했고 내 방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거리지 않아서 아무런 잡음이 없었는데도 결국 나는 화면을 켜봤다. 그러나 특유의 노란색 아이콘은 보이지 않았다. 진동이 확실히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팔을 올려놓고 하루 종일 사용해 과열된 뇌를 식히고 있었다.
“아들? 잘 다녀왔어?”
내가 지금까지 제일 많이 들어왔던 인사말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내가 문을 열 때 현관에서 가방을 벗기며 하셨는데, 아마 설거지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엄마의 앞치마는 약간 구겨진 채 물기가 남아있었다.
눈 위에 올려놓은 팔을 치우고 엄마를 보며 말해야 옳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갔다 왔고 그동안 무고하다는 것을 실물로 보여드려야 마땅하니까. 그러나 나는 내 팔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져서 눈을 가린 채 어깃장을 놓아버렸다.
“아니, 못 다녀왔어!”
“오늘은 또 왜 못 다녀오셨어?”
“그냥.”
나는 너무 피곤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하나마나한 소리이고 엄마도 이미 내가 피곤에 절어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도와주지 못해서 늘 안타까워하고 계셨다.
“알아, 피곤해서 그렇다는 거. 근데 잘 땐 창문 닫고 자. 넌 안 춥니?”
나를 쉬게 내버려둬야 하니까 엄마의 말이 막 두서가 없어졌다. 그렇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어서 내 방에서 나가 달라는 듯이 옆으로 누워버렸다.
엄마가 이불을 덮어주고 내 방을 나가셨다. 나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직도, 안 와있었다. 답답하고 초조했다. 그동안 주고받았던 카톡 대화들을 다시 보았다. 다른 한 쪽에서 내가 나를 꾸짖었다.
이런 써먹을 데 없는 생각들을 하니까 숙제할 시간이 없지!
맥이 풀려버렸다. 내 의식이 나도 모르게 빠져나가 잠깐 잠이 들었었나보다. 카톡이 와있었다.
‘지금 만날 수 있어?’
40분에 보낸 것으로 찍혀있었다. 지금은 45분. 나는 부랴부랴 카톡을 보냈다.
‘미안. 깜빡 졸았어. 지금도 될까?’
답장이 올 때까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안 될 것 같아. 엄마아빠한테 걸려.’
나가고 싶었지만 서로의 가족들에겐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에 참기로 했다. 집으로 곧장 온 게 후회스러웠다. 그녀가 주말인 내일 만나자고 했고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주말엔 학원 숙제랑 밀린 과제 때문에 오히려 더 시간이 없다. 하지만 나는 열일을 제쳐두고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주말이라 가족들이 모두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아빠도 왔다 갔다 하고 계셨다. 외출하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내 방을 나섰다. 재활용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아빠와 부딪쳤다.
“어디 가니?”
“그냥 친구들 만나러.”
아빠는 눈치가 빠르기 때문에 내가 당황한 것을 알아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서 한 마디 더 했다.
“왜 전에 말했던 애들 있잖아요.”
“그래. 잘 다녀와라. 들어올 때 연락 한 번 넣고.”
아직 시간이 10분 남았는데 벌써 지나가 아파트까지 와있었다. 우리는 공원 쪽으로 걸었다. 그녀와 함께 걸으니 좋긴 한데, 가슴이 답답했다. 공원을 두 바퀴 돌았다. 밖이 추웠으므로 마땅히 할 것도 없어서 우린 그만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가 지금 열어보지 말라며 내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주머니 속의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데려다주고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어쩐 일인지 집엔 아무도 없었고, 내 책상에 포스트잇이 하나 붙어있었다.
‘나한테 거짓말을 할 정도의 각오가 있는 것 같으니 엄마한텐 말 안한다. 그 친구, 나중에 꼭 집에 데려와야 한다?’
아버지의 글씨체에서 준엄한 명령이 느껴졌다. 내 머리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라 시키는데, 내 손은 그 뜻을 거역하면서 그녀가 준 편지를 펼치고 있다. *
[콩트]
무언가 빠진 장례식
이예림 (고운고등학교)
예전에도 많은 분들이 나의 곁을 떠나가셨지만 나는 때마다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내가 깨달았던 것은 장례식장에선 육개장을 먹는다는 것 정도였다. 그래서 중학교 때 수학을 가르쳤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도 비슷할 반응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장마비였던가 라고 하는, 건너건거 아는 친구의 말에 곧바로 준비를 하고 나섰다.
함께 가기로 한 친구들과 만나서 부속병원 안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갈 때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눈물이라도 날까 싶었는데 끝내 그렇지는 않았다. 친구들은 저마다 참 안됐다, 안타깝다는 말을 한 마디씩 하긴 했지만 내 귀에는 그저 의례적인 소리로만 들렸다. 나는 그 실없게 느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과거의 일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꺼내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선생님은 나에게 있어선 의미 있는 분이셨다. 그때 우리 학년을 담당했던 수학 선생님은 숙제를 안 하면 종아리를 한 대씩 때리셨는데 나는 그것이 너무 싫었다. 그랬던 선생님이 육아휴직으로 한동안 학교에 못 나오시게 됐다. 그래서 돌아가신 선생님, 그러니까 내가 지금 회상하고 있는 선생님이 오신 것이다.
반 아이들을 포함해 다른 반 아이들은 그 선생님의 수업이 지루하다고 한 마디씩 불평을 했으나 나는 초임으로서 노력하는 그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던 나에게 연필을 쥐어주었던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나는 꽤 많이 변하게 되었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공부도 하고 사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졸업 전까지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변명이라면 변명일지는 몰라도 나는 그 당시엔 누구든 여자라면 가까이 가지도 못했던 숫기 없는 남학생이었을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나하나 천천히 꺼내면서 나와 친구들은 대학 부속병원에 도착했고, 곧바로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다른 학교 학생들도 와있었다.
절을 올리고 나오던 도중 나와 친구들이 들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심장마비가 아니라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수술을 받던 도중 뇌사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평소에 장기기증을 신청해놓으셔서 다른 생명을 구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말은 잘못된 소문이었다. 선생님은 삶의 마지막까지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했던 분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에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무슨 일에도 감동받아 운 적이 한 번도 없던 나는 무너졌다.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다시는 볼 수가 없는 그 공허함 때문이 아닐까. 내 기억 속에 따뜻한 분으로 남아있는 선생님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됐다는 생각에 가슴 깊이 절망이 스며들었다. *
[콩트]
퍼즐 게임
김건두 (도담고등학교)
“똑 똑”
사무소의 정적을 깨는 문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고 말끔히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온다.
“이영훈 탐정님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살인사건입니다.”
“일단 차나 한 잔 하며 이야기하시죠.”
김 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다급해보였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내게 설명했다. 이 지역에서 돈이 많기로 유명한 부자 박상록을 누군가 독살했다는 것이다.
“혹시 이 사장에 대해 조사해보셨습니까?”
“아뇨, 저도 사건을 받고 바로 탐정님께 온 것이라 현장상황밖에 모릅니다.”
“돈이 많은 박 씨는 이 지역 유명한 사채업자인 이 사장과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역 뒷골목 세계를 꽉 잡고 있는 이 사장은 과거 사채 문제로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돈을 뜯어내어 우리 가정을 곤경에 빠지게 했던, 이 바닥에선 유명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이 사장이 범인이든 아니든 일단 조사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일단 이 사장을 조사해주십시오. 저도 나름대로 정보를 가지고 수사를 해보겠습니다.”
“네, 그럼 내일 이 맘 때쯤 찾아와도 될까요?”
“그러도록 하시죠.”
형사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문이 열렸다.
‘오늘은 손님이 많구만.’
“오랜만이야.”
나의 옛 애인인 강지윤. 가난뱅이 무명 탐정이던 시절 나를 떠나 박상록에게 간 여자. 아마도 박 씨가 죽었으니 나를 찾아온 게 분명하다.
“박 씨가 죽었으니 다시 나한테 오는 건가? 속이 너무 뻔히 보이는 거 아니야?”
“내가 미안해.”
“일단 돌아가. 이 살인사건 해결하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여자는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강지윤은 아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구나.’
머리로는 그녀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음날, 누군가가 사무소 문을 두드렸다. 문만 두드리고 들어오질 않아 직접 나가 열어 주었더니 무언가를 한 아름 안고 김 형사가 들어왔다.
“이게 다 뭡니까?”
“아, 자료들입니다. 이 사장을 조사하면서 여러 가지를 알아냈어요.”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커피로 한 잔 부탁드립니다.”
형사는 여러 가지 종이 뭉텅이와 손수건 하나를 내려놓았다. 박상록이 죽기 몇 시간 전, 이 사장은 박 씨를 만났고 그 곳에 두고 간 손수건도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박 씨가 독살 당했다는 정황 상 개인적인 돈 문제도 있었던 이 사장이 범인일 확률이 크다는 게 김 형사의 추리였다. 하지만 물증이 아직 나오지 않았고 또 다른 용의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도 나에게 해주었다.
“또 다른 용의자는 누굽니까?”
“박 씨와 가까이 지내던 강지윤이라는 사람입니다.”
“아니요. 그 사람은 아닙니다.”
“어떻게 확신하시죠?”
“그 여자는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박 씨와 결혼을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닌 그저 애인일 뿐인 여자가 박 씨가 죽는다고 무슨 이득을 보겠습니까?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도 못되는데…….”
나도 모르게 그 여자를 감쌌다. 어쩐지 어제 만난 것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형사님, 형사님!”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이 사장 패가 다른 지역 조폭들과 패싸움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서 와주십시오!”
“탐정님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김 형사는 가져온 자료도 다 내버려 둔 채로 뛰어 나갔다.
나는 김 형사가 가져온 자료들을 찬찬히 읽다가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분명한 그의 이름과 조직의 이름이 자수로 새겨진 손수건. 좋은 증거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 형사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한 손에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어떻게 수사에 진전이 있었습니까?”
“네. 거의 이 사장이 범인으로 추정되지만, 이상한 증거가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무슨 증거 말씀이시죠?”
“탐정님. 사건 당일에 발생한 박상록 씨 집의 도난사건 문제로 박 씨를 만나러 가신 적이 있죠?”
“네 그렇습니다.”
“그 증언과 함께 이런 것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형사가 꺼내놓은 것은 내 만년필과 나와 박 씨가 사용했던 찻잔 세트였다.
“이게 뭐죠?”
“탐정님의 만년필과 찻잔 세트입니다. 탐정님이 사용하시던 것은 깨끗하지만 박 씨가 사용하던 것에는 독성분이 남아있었습니다. 박 씨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사람이 탐정님이었다고 박 씨네 집 집사가 증언해주었지요. 그런데 강지윤 씨는 또 이 사장과 박 씨의 돈거래 관계를 증명하는 서류와 박 씨가 보낸 협박 편지를 증거로 가져왔더라고요.”
“차 한 잔 하며 말씀을 더 나누시죠. 홍차 괜찮으십니까?”
“네, 좋습니다. 탐정님도 이제 용의자의 한 분이라서 맘 놓고 있으실 수는 없겠습니다.”
차를 타왔다. 내 것과 형사의 것. 다시 커다란 소파에 마주 앉아 말을 이어나갔다.
“홍차 맛은 어떻습니까?”
“달달하네요.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이 손수건 어제 두고 가셨더라구요.”
난 이 사장의 손수건을 건넸다.
“이 손수건이 뭐가 중요합니까? 장난칠 시간이 없습니다.”
“거기 묻어있는 가루를 보십시오. 알아본 결과 박 씨를 죽인 독과 같은 성분입니다.”
“그렇습니까?”
형사는 가방을 뒤져 서류를 꺼내 보며 가루를 유심히 봤다.
“그렇군요! 역시 이 사장이 범인이었던 게 맞았어요.”
“이 사장을 미리 불러놨습니다. 천천히 차나 마시고 계시지요. 마지막 티타임이 될 테니까요.”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이십니까?”
“박 씨는 제 돈을 갚아준다는 명목 하에 제 여자는 물론이고 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는 이 사장으로부터 저를 구해준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저를 이용해먹을 계획으로 돈을 갚아주는 척 한 겁니다. 사채놀이에 투자한 돈도 실은 모두 박 씨의 것이었기 때문에 이 사장은 박 씨의 충직한 부하였던 셈이죠.”
“그 이야기를 왜 지금하십니까? 그것보다도 방금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죠?”
“제가 일처리를 제대로 못했나 보네요. 그런 증거를 남겨 의심을 받을 짓을 하다니 말이죠. 그냥 간단하게 이 사장만 감옥에 처넣으면 될 것을…….”
“당신……. 설마?”
“아, 곧 이 사장이 올 시간이군요. 물증은 이걸로 충분합니다. 저는 나가 있을 것이고 형사님은 죽은 채로 이 사장을 맞이하게 되겠죠. 아니라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형사님과 제 애인이 마련해준 증거들과 그의 평소 평판이면 무려 두 명을 죽인 살인자로 지목되겠죠. 안 그렇습니까?”
“너……. 이 새끼…….”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나는 사무실 안쪽에 있는 칸막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 나와. 우린 이제 이 무대에서 퇴장하자구.”
나는 칸막이 안에서 나온 지윤을 데리고 유유히 일어섰다. 이미 독 기운이 퍼져 말조차 하지 못한 채 나를 쏘아보는 증오와 혐오가 담긴 핏발 선 형사의 눈빛을 잘라버리듯 출입문을 쾅 닫았다. *
[콩트]
용기를 막는 오해
정현 (도담고등학교)
“얼른 준비해! 너 머리 감는데 오래 걸리잖아.”
오늘도 정연주네 아침은 엄마의 닦달로 시끄럽다.
“그냥 대충하고 가면 되지 뭐! 모자 쓰고 갈래. 제발 5분만 더…….”
연주는 이불을 끝까지 덮는다.
“이 기집애야,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데. 어서 필통이랑 가방도 챙겨!”
“상담하는데 뭘 챙기고 그래, 귀찮게.”
“오늘 수업도 한 번 해보기로 했으니까 너랑 잘 맞는지 하고 와봐.”
“아악 싫어. 3시간 동안이나 거기 앉아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를 듣고 있으라고?”
“이제부터 알아들으라고 배우러가는 거잖아. 너 곧 고3이야. 정신 차려!”
“아 알았어요. 알았어! 하면 되잖아.”
연주는 드디어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왔다~ 딸~.”
“가요 가.”
“아이구, 우리 딸 씻으니까 얼마나 예뻐. 가서 대답 잘하고 알겠지?”
“네…….”
연주는 툴툴대며 학원으로 들어간다. 카운터 선생님이 연주에게 다가온다.
“네가 연주니?”
“아, 네!”
“그래 반갑다. 3클래스로 가면 돼. 5분 후면 수업시작이야.”
“네 감사합니다.”
‘아 저기 있네. 3클래스……. 집에 가고 싶다…….’
3클래스 안으로 연주가 들어가자 도연이가 일어나 연주를 반긴다.
“정연주!”
“어? 김도연, 여기 다녀?”
“응 여학생이 나밖에 없어서 심심했는데, 잘 왔어!”
“나도 친구가 있으니 다행이네. 사실 나는 엄마 때문에 억지로 온 거야.”
그 때, 안이준과 우진규가 들어온다.
“어? 쟤 누구야? 되게 잘생겼다.”
“아, 쟤? 이슬고등학교 ‘안이준’ 이라고 전교 1등이래.”
“와……. 얼굴도 잘생겼는데 공부까지 잘해?”
“반했냐? 쟤 음악도 잘하고 운동도 잘한대. 국가대표 제의까지 받았다던데? 근데 키가 170밖에 안될 걸? 그리고 솔직히 잘생기진 않았다.”
“에이 외모가 뭐가 중요해. 다 완벽하구만. 나 학원 다닐 이유가 생긴 것 같아.”
수업이 끝나고 연주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간다.
“딸, 어땠어? 콧노래까지 부르는 것 보니 괜찮았구나!”
“응, 엄마 거기 나랑 정말 잘 맞아. 좋은 것 같아!”
“다행이다. 드디어 우리 연주가 영어에 흥미를 느끼는구나.”
다음날 아침, 연주는 일찍 일어나 꽃단장을 한다.
그리고 도연과 만나 계획을 세운다.
“일단 안이준이 오기 전에 걔 자습실 책상에 쪽지를 붙여놔!”
“뭐라 써서 붙여놓지?”
“음……. 일단 네가 누군지 밝히고 번호를 주고 연락 달라고 써.”
“그래! ‘나 정연주야. 너랑 친해지고 싶은데 010.2016.0806 여기로 연락 줘.’ 이거 어때?”
“좋아. 빨리 붙이고 오자!”
“아 떨려. 언제 연락 올까?”
“받자마자 오겠지~. 기다려봐.”
안이준이 자습실 책상에 붙은 쪽지를 발견한다.
“어? 이게 뭐지? 야, 우진규. 너 또 장난쳤냐?”
“엥? 이게 뭐야. 이번엔 나 진짜 아니야! 정연주 번호를 내가 어떻게 알아?”
“아, 그래?”
“안이준 인기 많네~. 얼른 연락해봐.”
“그럴까? ‘안녕. 나 안이준이야.’ 어때?”
“괜찮다.”
김도연이 정연주에게 다가온다.
“아직도 연락 안 왔어?”
도연이 정적을 못 참고 묻는다.
“응.”
“어? 걔 학원 들어온 지 2시간이나 지났는데…….”
“아, 진짜 안이준 이 사람 애타게. 남자답지 못하게 밀당이나 하는 거야?”
“나 싫은가봐. 좋았으면 바로 연락 왔겠지.”
“됐어. 그런 애 때문에 마음고생 하지 마! 잊어버려! 세상의 반이 남자야!”
“맞아. 나쁜 놈. 내가 용기를 내서 표현했는데…….”
우진규가 안이준에게 온다.
“야 답장 안 오냐?”
진규가 궁금하다는 눈으로 물어본다.
“응. 먼저 연락 달라고 했으면서 왜 답장이 없지?”
“밀당하는 거 아니야? 한 번 찔러보고 그만인가. 사람 마음이 장난도 아니고. 그냥 잊어버려!”
“사정이 있겠지. 잠깐 산책이나 가자.”
정연주와 김도연은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서 뻐근해진 몸을 풀기위해 밖으로 나간다.
저 만치 나무 밑 벤치에서 안이준과 우진규가 쉬고 있다. 진규가 이준의 어깨를 툭 친다.
“어? 야, 안이준! 저기 정연주다!”
“야, 그냥 못 본 척해!!”
도연이 안이준을 발견하고 연주에게 말한다.
“정연주! 저기 안이준 있는데?”
“아, 우리 그냥 돌아가자.”
연주와 이준은 서로를 의식한 채 피하기만 한다.
며칠 후, 연주는 학원 앞에서 도연을 기다린다. 도연이 빨리 나타나지 않자 연주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금방 나온다더니. 왜 이렇게 안 와. 더운데.”
그 때 이준이 연주를 부른다.
“정연주! 너 왜 내 문자 답장 안 해?”
“어? 무슨 문자?”
“네가 내 책상에 쪽지 붙여놓은 거 아니야?”
“맞아. 난 네가 연락이 없길래 기다리고 있었지.”
“엥? 나 쪽지 보자마자 문자 보냈는데?”
“아 진짜? 왜 나한텐 문자가 안 왔지? 제대로 보낸 거 맞아?”
“거기 씌어있는 그대로 보냈는데?”
“쪽지 다시 봐봐!”
“엥? 내 번호는 010.2016.0806이 아니라 010.2016.0808인데? 내가 왜 잘 못 썼지? 아 뭐야!”
“으이구 정연주 바보. 다행이다 네가 문자 씹은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해. 나도 내가 잘못 쓴 줄 모르고 네가 연락 없다고 혼자 슬퍼했네.”
“다시 제대로 연락 시작하자! 나도 너랑 친해지고 싶어.”
“그래! 고마워.”
연주와 이준은 오해를 풀고 꾸준히 연락하고 만나다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
[콩트]
붉은 마법
이자호 (한솔고등학교)
이 이야기…즉 이 스토리는 저희 가족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굳이 더 밝히자면, 저희 가족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이라고 해야 되겠군요. 할아버지는 지금 연세가 80세 가까이 되십니다. 지금은 하루의 16시간을 침대에 누우셔서 보냅니다. 이 이야기는,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시도 때도 없이 말해주셨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지겹도록 들으셔서 이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셨지만, 저는 제 유년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옛날에 A마을과 B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두 마을을 두르고 있는 산들은 푸르고 아주 깨끗해서 다람쥐들과 노루, 사슴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워낙 산골이라 세상과는 단절되었으나, 두 마을 사람들은 서로가 친했다고 합니다.
A마을에는 감성적인 사람들이 많았고, B마을 사람들은 모험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극과 극을 달리는 두 마을이었지만, 두 마을 정확히 중앙에서 두 마을을 이어주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깨끗한 맛이 일품인 샘물이었습니다.
이 샘물에서 두 마을은 물을 받고, 음식이나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샘물은 A마을과 B마을이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두 마을 사람들은 샘물에서 만나게 되어있었습니다.
A마을과 B마을사람들은 이 샘물을 팔면 결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마을은 물맛이 좋다는 소문을 듣고 온 이방인들이 오래 된 샘물을 먹고 실망하지 않도록 물을 팔지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물을 채워오는 것은 가능했고, 그 물로 요리를 해서 손님들을 먹일 수는 있었지만 그 샘 자체는 절대 이방인들에게 내주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두 마을은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언제나 활기가 넘치고, 서로 돕고 서로를 즐겁게 만드는 두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가끔씩 큰 새가 날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항상 푸르고 밝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자, 감성적인 사람이 많은 A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불친절해졌다고 합니다. 그날 이후 서로 왕래하는 일이 끊어지면서 두 마을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이렇게 두 마을의 관계가 점차 차가워지고 있을 때, B마을의 외곽에 있는 동굴 안에서 갑자기 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먹었었을 때는 그 물맛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먹다보니까 그 물맛이 더 좋다는 의견이 생겨났습니다. 톡 쏘는 맛이 느껴지는 동굴의 물맛은 이제껏 먹어본 샘물과는 거의 ‘정반대’의 맛이었습니다.
그 동굴의 물맛은 정말 이상한 느낌으로 사람의 기분을 행복하게 만드는 맛이었습니다. 그 물을 찾은 사람들이 물을 병에 담아서 B마을 사람들에게 맛보게 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B마을 사람들은 오직 그 물만을 찾기 시작했고, 점차 두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샘에 찾아오는 B마을 사람들은 줄어들었습니다.
B마을 사람들은 동굴의 물 말고는 찾지 않았습니다. 그 물만 마셨고, 물을 마시고 기분이 붕 뜬 상태로 살았다고 합니다.
A마을 사람들은 가끔씩 보이던 B마을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B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동굴 물만을 찾아 먹기 때문에 샘이나 A마을에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B마을에 가본 A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의 B마을 사람들이 동굴의 물을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A마을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정말로 실망했습니다. 서로의 관계가 차츰 망가지는 것을 알았지만, A마을 사람들은 두 마을이 다시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었습니다. 그랬기에, A마을 사람들의 실망감과 허탈감은 훨씬 더 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B마을 사람들은 동굴의 물을 팔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A마을과 B마을은 분명히 물을 팔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B마을 사람들은 서로 약속했었던 ‘그’ 물이 샘물을 뜻하는 것이었고, ‘동굴’의 물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우겼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갈등은 서로의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불화는 서로를 싫어하게 만들었습니다. 서로의 악감정은 각 마을 사람들이 다른 마을 사람들을 오지 못하게 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샘물 터 중앙에는 선이 그어졌습니다. 한쪽은 A마을이, 한쪽은 B마을이 가지는 구역이었습니다. 그들은 샘물에다가 선 대신 벽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려면 샘물자체를 막는 방법 말고는 없었습니다.
결국 벽을 만들지는 못했으나 두 마을 사람들은 서로 만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A마을 사람들은 ‘B마을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한탄했습니다. B마을 사람들은 ‘A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대체 왜 두 마을의 사이가 나빠졌을까?”
증조할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증조할아버지는 그 말을 하실 적마다 동굴의 물이 문제라고 항상 덧붙였습니다.
증조할아버지는 큰 제철소를 운영하셨습니다. 할아버지네 가족은 돈을 많이 벌었지만, 두 마을 사람들 사이가 나빠지자 증조할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갑자기 제철소를 닫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증조할아버지는 밤마다 어딘가에 가시기 시작했습니다.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가 어디 가시는지 알고 싶어 하셨지만, 그때마다 증조할아버지는 ‘알거 없다.’는 식으로 말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중조할머니가 몰라서 물었답니다.
“여보, 왜 갑자기 그러시는 건가요?”
마을을 떠날 거라는 증조할아버지의 말에, 증조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말리셨다고 했습니다만, 증조할아버지는 결국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할아버지네 가족은 멀리 떨어진 C마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할아버지가 쉰 살이 넘으셨을 때, 증조할아버지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신다는 말만 하고 혼자 떠나셨습니다.
증조할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은 약간의 돈, 제철소와 집, 그리고 유서였습니다. 유서에는 갑자기 마을을 나오게 해서 미안하고, 용서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었고, 숨겨서 미안하다는 말도 들어있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까 한 가지 빼먹은 이야기가 있었군요. 동굴에서 흐르는 물을 팔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동굴의 물을 가지러 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 사람이 동굴에서 물을 뜨려고 들어가자마자 소리를 지르면서 나왔다고 합니다.
“동굴에서 핏물이 흐른다!”
동굴의 물을 팔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동굴에서 흐르는 물은 적색을 띄고 있는 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물에 입을 대자마자 구역질을 했다고 합니다. 쓴 맛 때문에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물이었다고 합니다.
아, 증조할아버지. 그 분은 두 마을의 평화를 원하셨습니다. 동굴의 물은 지금도 쇠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쇠 냄새와 섞여있는 ‘이상한 냄새’도 여전하다고 합니다.
두 마을이 화해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화해했길 바랍니다. 증조할아버지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B마을 사람들이 ‘붉은 마법’에 걸려버린 ‘환각’에서 깼으면 좋겠습니다. *
[콩트]
오해와 진실
장다연 (도담고등학교)
다희와 은지는 친한 친구 사이다. 고등학생이 된 후로 더욱 친해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함께 알고 지내던 윤주 언니를 만나기 위해 언니가 일하는 카페로 가게 되었다.
“어, 여기야!”
“언니! 오랜만이야.”
다희와 은지는 윤주 언니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러게……. 잘 지내?”
“음……. 그냥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
“요즘 공부하느라 힘들지. 그래도 너희들 열심히 하고 있는 거지?”
“응! 당연하지!”
“으이구, 그래그래. 너희들 믿는다! 뭐 마실래?”
“아…나는 복숭아 아이스티.”
“나는 망고 스무디. 근데 언니…….”
“응? 왜?”
“저 사람 누군지 알아? 아까부터 계속 우리를 흘끔흘끔 쳐다봤어.”
“어디?”
“아는 사람이야? 너무 무섭게 쳐다본다.”
“언니,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냥 쳐다보는 건데 뭘……. 내가 음료수 가져올게.”
“아……. 응!”
음료수를 가지러 가는 윤주의 다리가 조금 떨리는 듯 했지만 다희와 은지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은지야, 저 사람 아직도 여기 쳐다보고 있어. 얼굴도 까맣고, 너무 험악하게 생겨서 더 무섭다.”
“그러니까. 언니는 왜 신고하지 말라는 거지?”
“글쎄……. 우리가 너무 과민반응 하는 건가?”
“흠……. 근데 아무래도 언니 오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그래. 언니 오면 일단 나가자.”
윤주가 음료수를 가져오자 다희와 은지는 컵을 든 채로 윤주의 등을 떠밀며 서둘러서 가게를 떠났다.
그 후, 두 차례 정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자 참을 수 없었던 다희는 언니에게 다그치며 물어본다.
“언니! 그 사람 진짜 모르는 거 맞아? 아무래도 수상해. 신고도 하지 말라고 하고, 말도 못 걸게 하고…….”
“모른다니까.”
“언니. 진짜 솔직하게 말해줘. 그래야 무슨 일인지 우리가 알고 도와주든지 하지.”
“하……. 그게…….”
윤주는 다희와 은지에게 과거에 있었던 일을 털어 놓는다.
“전에 만났던 지호라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나한테 항상 돈을 많이 빌려갔었어. 나는 ‘나중에 갚겠지.’ 하고 그냥 오래 만났던 남자친구니까 빌려줬어. 근데 항상 빌리기만 하고 갚지를 않는 거야. 그래서 빨리 갚으라고 재촉했었는데 안 갚더라고. 그래서 그냥 내가 그만 만나자고 했어. 더 이상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 작년 일이야. 그 사람이 바로 그 남자야.”
“헐……. 근데 왜 갑자기 나타난 거야?”
“그건 나도 모르겠어. 이제 와서 빌려간 돈을 갚겠다는 건지 뭔지.”
“어! 언니 이쪽으로 오는데? 뭐야, 뭐야!”
“언니 무서워……. 그냥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돼?”
“그래 나가자”
윤주, 다희, 은지는 나가기 위해 서둘러 준비한다. 지호가 다가와 윤주의 앞에 선다.
“윤주야.”
“아! 깜짝이야!”
“윤주야 미안해."
지호는 갑자기 윤주 앞에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그 때 내가 잘못했다며 사과를 한다.
“뭐야 왜 이래?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야?”
“그 때 너무 미안했다고……. 염치없지만 이제라도 내 돈 받아줘.”
“됐어. 그냥 가. 이런 모습 보이지 말고.”
다희와 은지가 차례로 나서서 윤주를 설득한다.
“언니 그냥 받아줘.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래 언니…….”
윤주가 메모지에다가 뭔가를 써서 지호에게 건넨다.
“하…여기로 보내. 나 갈게.”
“알았어. …고마워.”
며칠 후, 연주에게 특급택배 하나가 도착한다.
“올게 없는데……. 뭐야?”
상자를 열자, 돈 봉투와 편지 한 장이 놓여 있다.
“웬 편지지?”
편지에는 지호가 간경화증에 걸려 지난 2년 동안 시한부로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뭐야……. 그럼 나랑 사귈 때도 시한부 인생이었단 말이야? 왜 나한테 말도 안하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했네. 미안하게…….”
연주는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지호가 미웠지만 그런 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연주는 그 길로 장례식장을 찾았다. 지호가 마지막으로 보내온 돈을 모두 부조금으로 내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
[콩트]
첫눈
오승미 (도담고등학교)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아이들의 발자국이 찍혔다.
“야, 빨리 와!”
은수가 밝게 웃으며 달렸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 어두운 면이 없는 아이. 은수는 항상 웃는 밝은 아이였다. 희주는 그런 은수를 교실 창문 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짜증나.”
아무도 듣지 못한 그 한마디가 허공에 흩어졌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어린 동생 둘을 먹여 살려야 하는 희주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몸을 파는 것. 어제만 해도 사창가에서 일하느라 밤을 새워서 온몸이 뻐근했다. 누구는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해도 되는데 누구는 당장 오늘 저녁에 뭘 먹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희주는 머리가 지끈 아파와 눈을 감았다.
“희주야, 너 어디 아파? 괜찮아?”
은수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신경 꺼.”
차갑다. 원래도 따뜻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요즘 따라 유독 차가워진 희주가 신경 쓰였다. 은수는 희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희주야, 너 정말…….”
“아, 저리 가라고!”
희주가 은수의 손을 날카롭게 뿌리쳤다.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런…….”
“얘들아 종례하게 자리에 앉아라!”
때맞춰 들어오신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은수의 목소리가 묻혔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빈 교실에 희주는 홀로 남아있었다. 집에 가려던 은수는 뭔가를 결심한 듯 희주 옆에 다가가 앉았다.
“희주야, 너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나한테만 말해봐.”
은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됐어. 너랑 상관없어.”
“우리 친구잖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 나한테만 말해줘. 응?”
“…너 정말 아무한테도 말 안 한다고 약속할 수 있어?”
“당연하지! 약속할게.”
희주의 마음이 변할세라 은수가 얼른 대답했다.
“정말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니까 나랑 피의 맹세를 해야 해. 할 수 있지?”
은수가 한동안 망설인다. 희주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빛을 날린다. 은수가 결심을 한 듯 입을 연다.
“알았어. 맹세하자 우리.”
은수의 대답을 듣자마자 희주가 필통에서 칼을 꺼냈다. 투둑. 칼로 베어진 희주의 손가락에서 피가 떨어졌다.
“자, 여기.”
희주는 은수에게도 칼을 내밀었다. 무언가 불길하고 섬뜩한 느낌이 은수를 훑고 지나갔다. 은수는 희주를 두려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꼭…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응. 꼭 해야 해.”
희주의 확고한 대답이 들려왔다. 은수는 마지못해 칼을 건네받고 눈을 꼭 감았다. 따끔. 칼이 지나간 자리가 아파왔다. 상처에서는 붉은 피가 흘렀다. 은수와 희주의 손가락이 맞닿고, 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피의 맹세를 맺었다. 뚝. 뚝. 서로의 혈액이 섞이고 흘러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 맹세했으니 이제 됐지? 빨리 말해줘.”
잠시 망설이던 희주는 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 에이즈야.” *
[시]
열일곱!
이은우 (고운고등학교)
하나, 둘
호출되는 로봇
알람 속에 잠을 묻어버린다
반복되는 일과
책가방 속에 나를 구겨 넣는다
하늘로 쏘아 올리는 공
자로 잴 수 없는 정상
어둠의 시계가
비포장도로를 달린다
하나, 둘
조련되는 토끼
책 속의 글자들을 갉아먹어도
먼지만 날리는 털들
장거리를 달리는 연필
멀미나는 성적표
책상 위에선 K-POP의 공연이 열리고
히프노스의 주술에 걸린 눈꺼풀
열일곱의 절정은 블랙홀!
[시]
머피의 법칙
조현정 (도담고등학교)
깔깔대는 잿빛도로
벌레 먹은 가로수 등굣길을 반긴다
얼굴을 쏘아대고 도망치는 벌 한 마리
음표를 빨아대던 이어폰이 귀를 깨문다
교실 문턱을 넘어뜨리는 발목
절뚝거리는 하루가 책상 위에 펼쳐진다
헛소리를 하는 교과서
복도 밖에서 서성이는 칠판
성적은 만화 속에서 향상되고
머릿속에 펼쳐지는 패러렐 월드!
엉거주춤 별빛에 매달린 한숨이
운동화 속으로 숨어든다
달빛처럼 창백해진 열여덟,
그 이름은 ‘청춘’이 길 위에 방치된다
[시]
잉크 펜
이기일 (종촌고등학교)
성장하려면 자극을 받아야 한다
잉크 펜을 꼭 눌러야 잉크가 나오는 것처럼
그러나 너무 많은 자극은 필요치 않다
잉크 펜을 세게 누르면 새버리는 것처럼
성장하려면 잉크 펜이 되어야 한다
적당한 자극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청소년문학캠프 포토앨범]
[시화)
박민하 (도담고)
송수영 (세종여고)
유소리 (세종여고)
이자경 (도담고)
임나현 (세종여고)
정예림 (두루고)
하현서 (세종여고)
이정화 (도담고)
창작지도 후기 -문학캠프 참가 학생들에게
꿈을 지키는 자만이 행복한 미래를 일궈냅니다
학교공부 하느라고 많이 바쁘고 힘들 텐데도 불구하고 ‘2016년 제6회 청소년문학캠프’에 참가하신 학생 여러분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대중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요즘처럼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시대에 문학에 대한 가득한 호기심으로 청소년문학캠프를 찾은 여러분 모두는 아주 특별한 학생들입니다.
문학작품 창작 실기라는 생소한 과제 앞에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시와 콩트의 창작과정에서 훌륭한 자질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시간이 좀 더 넉넉하고, 여건이 좋았더라면 창작지도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러분들이 제출한 원고를 지도강사들이 부분적으로 첨삭 교정하는 방식으로 완성도를 높여 이 작품집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제출했던 원고와 비교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대다수는 앞으로 대학입시 준비에 쫓겨서 문학공부에 시간을 투자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고자하는 꿈을 아주 접지는 마시기를 당부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아직도 수많은 기회가 있고, 정진하면 성공할 가능성 또한 높습니다.
꿈을 지키는 자만이 행복한 미래를 일궈냅니다. 틈틈이 좋은 작품들을 읽고 습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종문학회의 작가들이 여러분들을 응원하고 돕겠습니다.
청소년문학캠프에 참가하신 학생들 모두의 문운을 빕니다.
-‘2016년 제6회 청소년문학캠프’ 지도강사 일동
[세종문학회 연혁]
*1994. 1-연기문학 창립총회 및 초대 장시종 회장 취임
*1995. 5-신동엽 생가 및 백제유적지 순례
*1996. 6-제1집 출간(1.000부) 및 기념식 개최(43명)
*1996. 10-제2집 출간(1,000부)
*1996. 11-시와 무용의 만남 품바공연 주관(500명)
*1997. 10-제3집 출간(1.000부)
*1997. 10-무용인 홍신자 초청강연회 개최(500명)
*1998. 10-제4집 출간(1.000부)
*1998. 10-제1회 군민 시낭송대회 개최(150명)
*1999. 11-제5집 출간(1.000부)
*1999. 11-제2회 군민 시낭송대회 개최(120명)
*2000. 1-제2대 최광 회장 취임
*2000. 11-제6집 출간(1.000부)
*2000. 12-제3회 군민 시낭송대회 개최(100명)
*2001. 11-제7집 출간(1.000부)
*2001. 12-제4회 제1회 시화전 개최(130명)
*2002. 11-제8집 출간(1.000부)
*2003. 4-도원문화제 학생백일장 대회 주관(450명)
*2003. 12-제9집 출간(1.000부)
*2003. 12-출간기념회 및 제2회 시화전 개최(80명)
*2004. 4.-도원문화제 학생백일장 대회 주관(380명)
*2005. 5-제10집 출간(1.000부)
*2005. 12-제11집 출간(1.000부)
*2006. 1-제11집 합평회 및 총회 개최(18명)
*2006. 4-제3대 김일호 회장 취임
*2006. 12-제12집 출간(1.000부)
*2007. 4-도원문화제 학생백일장 주관(320명)
*2007. 12-제13집 출간(1.000부)
*2008. 12-제14집 출간(1.000부)
*2009. 4-도원문화제 학생백일장 개최(280명)
*2009. 8-제1회 청소년문학캠프 주관(30명)
*2009. 12-제15집 출간(1.000부)
*2010. 8-제2회 청소년문학 캠프 주관(30명)
*2010. 11-제14회 가을예술제 제3회 향토시화전 개최(420명)
*2010. 12-제16집 출간(1.000부)
*2011. 4- 도원문화제 백일장 주관 주최
*2011. 8- 제3회 청소년문학캠프 개최(50명)
*2011. 10-‘세종문학동인회’로 동인회 명칭 변경
*2011. 12-세종문학 17집 발간(1,000부)
*2012. 1 -제4대 최 광 회장 선출
*2012. 4 -도원문화제 백일장 개최(350명)
*2012. 9. 1. - 제4회 청소년문학캠프(40명)
*2012. 12. 20 - 세종문학 18집 발간.
*2013. 8. 24 - 제5회 청소년문학캠프 개최.
*2013. 12. 20. - 세종문학 19집 발간
*2014. 11. 8~16 - 제3회 가을예술제 연합전시회 시화 12점 출품
*2014. 12. - 세종문학 20집(특집호) 발간
*2015. 3. 6 - 제5대 최 광 회장 선출
*2015. 4. 18 - 세종문학 동인 MT(대천시 오천항)
*2015. 12. - 세종문학 21집 발간
*2016. 3. 4 -정기총회
*2016. 8. 6 -제6회 청소년문학캠프 개최
* 세종문학회 문의처
회장 최 광 (HP. 010-5052-4610)
첫댓글 안선생,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