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3일 제주시청 광장에 마련한 6.25한국전쟁 영웅 고 백선엽 장군 추도식에 제주4.3진실규명도민연대 임원진들 참여하다.
구국영웅 고 백선엽 장군 추도 분향소 조문
백선엽(한국 한자: 白善燁, 1920년 11월 23일(음력 10월 13일) ~ 2020년 7월 10일[1])은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합동참모의장 등을 지낸 군인이자 교통부 장관 등을 지낸 관료이다. 본관은 수원(水源), 호는 우촌(愚村)·운산(雲山)이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하여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복무하였다. 1945년 만주군 중위로 있을 때 광복을 맞아 평양에 돌아왔고, 독립운동가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소련이 이북 지역에 진주하자 그해 12월 월남했다. 1946년 군정기 남조선국방경비대 제5연대 중대장을 맡았고, 1949년 제5사단장이 되었으며, 1950년 제1사단장으로 승진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한국 전쟁 중 다부동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우며 32세에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대장에 올랐고,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2] 1952년 휴전 회담 때 한국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휴전 문서 조인식에 참석했다. 예편 후에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고, 중화민국·프랑스·캐나다 대사 등을 지냈으며, 한국종합화학∙한국에타놀 사장도 역임하였다. 동생 백인엽과 인천대학교 등 선인재단을 설립했다. 2020년 7월 10일에 별세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1948년 6월 18일 제11연대장 박진경 암살 사건에 대하여 백선엽(조선경비대총사령부 정보처장 및 정보국장)은 "실록 지리산"에서는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은 제9연대의 남로당 세포였던 문상길 중위의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그 이후의 좌익계 색출은 사실상 숙군인 셈이었다. 당시 통위부 정보국 차장으로 제주도에 지원차 파견돼 11연대 정보고문으로 활동했던 김종면 소령(육군준장 예편, KBS 이사 등 역임)은 박 대령의 암살과 문상길의 체포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박 연대장의 진급을 축하하는 파티가 6월 18일(※ 17일) 저녘 제주읍 소재 옥성정 요정에서 열렸다. 일선 지휘관들이 모두 참석했고 나와 백선진 소령 등 통위부 파견장교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아주 여러차례 술잔이 돌았고 한껏 거나하게 취했었다.
19일(*18일) 새볔 1시께 박 연대장은 현재의 KAL호텔 맞은 편 자리에 있던 연대본부의 숙소를 돌아와 곧장 잠에 빠졌다. 나는 바로 그 옆방에 자고 있었는데 , 백선진, 서종철과 함께 였든 것으로 기억된다. 범인이 바로 문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연대장 호신병마저 잠든 틈을 타 박 연대장를 내려갈기고 도망가는 소란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깊이 곯아 떨어져 있었다. 새벽녘 연대장 호신병의 놀란 비명소리를 듣고서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범인이 조금만 총구를 틀었어도 얄팍한 칸막이로 갈라놓은 옆방의 우리들도 그대 당할 수밖에 없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즉각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 군 내부의 소행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범인은 M1소총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막 M1소총이 일차적으로 군에 보급되기 시작한 때였다. 탄환이 총신을 빠져나올 때 강선과의 마찰로 긁히는 흔적은 총마다 다르다는 점에 착안, 모든 병사들의 M1소총을 한발씩 쏘게해 탄환을 대조하는 치밀한 수사가 진행됐다. 미군 범죄수사대(CID)의 전문가들이 직접 1주일간에 걸쳐 도내의 모든 M1소총을 검사했으나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수사가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한장의 투서가 날아들었다(모슬포의 처가집에 청병하고 누워있는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인 최모 상사를 잡아보면 암살사건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문상길은 즉각체포됐고, 그의 처와 최 상사 등도 함께 체포됐다. 문상길은 처음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으나, 계속된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암살 사건 전모와 연대내 좌익계보를 자백했다. 문상길의 심문과정에는 나도 참여했는데, 그가 지니고 있던 부적의 붉은 칠이 손에 묻어나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사건은 11연대의 적극적인 토벌로 국방경비대(* 조선경비대)와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했던 상황에서 연대장을 암살해 토벌작전의 예봉을 피하려던 제주도 인민유격대가 문상길과의 긴밀한 연락하에 행한 일종의 기습이었다.
공교롭게도 6월 18일 11연대의 주번사령은 역시 남로당 세포였던 1중대장 정모 대위, 주번부관은 앞에 언급한 최상사였다. 실로 문상길로서는 절호의 최상사에 포섭된 경상도 출신의 한 사병이 자신의 총으로 박대령을 살해했었다.----<중략>----. 김종면 소령은 문상길에 대한 기초조사가 끝난 다음 바로 서울로 돌아왔는데, '제주도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어 정보국에 사건보고도 할 겸 상경해버렸다' 고 회상한다. '일단 서울로 돌아와 백선엽 국장에 보고했더니 백 장군은 대뜸 <문상길을 제주도에 그대로 두면 위험하니 서울로 호송해서 다시 정밀하게 취조해야 할 것>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갔는데, 미 고문관 존 리드 대위와 함께 갔다. 문상길은 비행기로 옮겨와 군기사령부에 넘겼다. 그 이후 문상길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는데, 재판장은 통위부 감찰총감 이응준 대령이었다. 이 총감은 <사형>판결문을 낭독하면서 손을 떨었다는 예기를 들은 바 있다. 한편 문상길의 총살형이 집행되던 현장에는 조선통신사의 조덕송 기자가 립회기자로 참석했었는데, 처형장면을 감상적으로 보도해 한때 좌익으로 지목되는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