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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4월 23일 경오 2번째기사 1770년 청 건륭(乾隆) 35년
한광회가 단종조의 6신과 선조조에 순절한 심대의 증시에 관한 일로 아뢰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한광회(韓光會)가 아뢰기를,
"단종조(端宗朝)의 6신(六臣)은 일찍이 무인년117) 에 증직(贈職)·증시(贈諡)되었으나 박팽년(朴彭年) 집 외에는 모두 시호(諡號)를 내리지 못하고, 시호와 관교(官敎)118) 를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에 보내 안치(安置)시켰습니다. 하위지(河緯地)의 봉사손(奉祀孫)이 관직에 제수된 자가 있어 이제 연시(延諡)119) 하고자 하나, 관교가 영월에 있어 거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별도로 시호와 관교를 작성하여 낭관(郞官)을 보내어 시호를 내리라고 하였다. 한 광회가 또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의 경기 감사(京畿監司) 심대(沈垈)는 임진년120) 에 순절(殉節)하였습니다.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증시(贈諡)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나,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곧 해조(該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7책 114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352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註 117]무인년 : 1698 숙종 24년.
[註 118]관교(官敎) : 교지(敎旨).
[註 119]연시(延諡) : 시호(諡號)를 받들고 나온 선시관(宣諡官)을 그 본가(本家)에서 시호받는 이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나와 의식(儀式)을 행하고 맞아들이는 일.
[註 120]임진년 : 1592 선조 25년.
153.영조실록 119권, 영조 48년 9월 11일 계묘 2번째기사 1772년 청 건륭(乾隆) 37년
융무당에서 협련군을 시사하여 반상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협련군(挾輦軍)을 시사(試射)하여 반상(頒賞)하였다. 승지가 흑단령(黑團領)으로 입시하였는데 행수(行首) 선전관(宣傳官) 박성협(朴聖浹)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니, 고 충신 박팽년(朴彭年)의 11대손이기 때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79책 119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435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군사-병법(兵法) / 의생활(衣生活)
154.
영조실록 125권, 영조 51년 11월 13일 병술 1번째기사 1775년 청 건륭(乾隆) 40년
영의정 한익모가 박팽년의 자손에게 정려할 것 등을 청하다
국역
원문 . 원본 보기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박팽년(朴彭年) 자손이 지금 사판(祠版)206) 을 받들고 서울에 와서 산다고 하는데, 특별히 정려(旌閭)를 허가하시어 격려하는 방법을 삼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귀한 일이다."
하며, 곧 그렇게 하라고 명하고 그의 봉사손(奉祀孫)이 상복을 벗기를 기다렸다 조용(調用)하라고 하였다. 한익모는 또, 조성복(趙聖復)을 개장(改葬)할 때에 별치부(別致賻)207)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늘 조성복에게 잔인(殘忍)하였다고 느낀다. 곧 부의를 내려 주라."
하였다.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 이의철(李宜哲)을 빈객(賓客)의 직임에 처하게 하여 주연(胄筵)에 출입하게 하도록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82책 125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502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註 206]사판(祠版) : 신주.
[註 207]별치부(別致賻) : 정(正)·종(從)3품 이하의 시종(侍從)이나 대시(臺侍)가 상사(喪事)를 당하였을 때 임금이 따로 돈이나 물건을 하사하는 일.
155.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5월 30일 갑오 2번째기사 1777년 청 건륭(乾隆) 42년
고 충신 하위지의 여문에 정표하다
고(故) 충신(忠臣) 하위지(河緯地)의 여문(閭門)에 정표(旌表)하였다.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아뢰기를,
"단묘조(端廟朝)의 육신(六臣)에게 선조(先朝) 때 특별히 작호(爵號)와 시호(諡號)를 추증한 것은 세교(世敎)를 부지하고 풍성(風聲)을 수립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 상신(相臣)의 주달로 인하여 또 박팽년(朴彭年)에게 정려(旌閭)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제 듣건대 하위지의 봉사손(奉祀孫)이 능히 문호(門戶)를 세웠다고 하니, 작설(綽楔)149) 의 은전(恩典)을 박팽년과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5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672면
【분류】
윤리-강상(綱常)
[註 149]작설(綽楔) : 정문(旌門).
156. 정조실록 13권, 정조 6년 6월 2일 정묘 2번째기사 1782년 청 건륭(乾隆) 47년
첨지중추부사 정술조의 내수사를 혁파하는 것 등에 관한 상소문
첨지중추부사 정술조(鄭述祚)가 상소하기를,
"제왕(帝王)이 정치를 하는 방법은 그 요점이 단지 잘 계술(繼述)해 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즉위하신 지 5년 기유년099) 에 이어 대제학 신(臣) 이덕수(李德壽)를 명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을 찬집하라고 명한 다음, 드디어 숙종 대왕(肅宗大王)을 존숭하여 세실(世室)에 들이고 세실로 들인 것에 대한 칭경(稱慶)으로 임헌(臨軒)하여 시사(試士)하였는데, 이는 특별히 찬수청(纂修廳)에서 선조(先朝)의 《보감(寶鑑)》을 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인하여 부지런하고 공경하는 마음가짐으로 선왕의 지극한 덕을 계술하고 선왕의 큰 공렬을 아름답게 드날렸다는 것으로 크게 선제(璇題)로 내어걸어서 도와주기를 바라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정령(政令)과 시조(施措)에 있어 번번이 선조(先朝)를 본받았는데, 성수(聖壽)가 이미 노년(老年)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주야로 겨를이 없어 미처 못다 할 듯이 걱정하였으니, 더할 수 없이 부지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학(聖學)이 이미 고명한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억시(抑詩)100) 의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공부를 지니고 계셨으니, 더없이 돈독한 조심스런 마음가짐이었습니다만, 아! 교릉(喬陵)의 세월이 여러 번 바뀌었고 명산(名山)의 사첩(史牒) 속에 영원히 보관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殿下)께서 즉위하신 지 5년인 신축년101) 에 다시 장사신(掌史臣)에게 명하여 열조(列朝)의 《보감(寶鑑)》을 찬술하여 완성하라고 명하였으니, 여러 조정에서 겨를을 내지 못했던 법전이 이때에 이르러 크게 완비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선왕의 성대한 덕과 큰 공렬이 또한 장차 끝없는 장래에 그 빛이 전하여지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전하의 신축년은 또한 선대왕의 기유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대왕께서 ‘부지런하고 공경한다.[克勤克敬]’는 네 글자를 선왕의 뜻을 계술하는 요체로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 성조(聖朝)에서 전수(傳授)하는 심법(心法)인 것입니다. 대저 상천(上天)이 경계를 보여 하토(下土)에 재해(災害)가 발생할 경우에는 번번이 수성(修省)하는 하교를 내려 두렵고 조심스런 마음가짐으로 화목하게 해 나가는 방도를 극진히 힘썼으니, 이럴 때의 성심(聖心)은 공경스러웠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시일이 점점 오래 되어 세월만 보내는 마음이 습관으로 굳어짐에 이르러서는 이때의 성심(聖心)이 과연 전일에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했던 때와 같았습니까? 여민(黎民)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굶주려 죽은 시체가 잇따랐을 경우에는 부지런히 구휼하는 유지(有旨)를 자주 내려 돌보아 구제하는 방책을 끝까지 다하고 있으니, 이럴 때의 성심(聖心)은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진휼하는 정사를 막 끝마쳐 상처가 겨우 완쾌되고 나면 이럴 때의 성심이 과연 지난날 걱정하면서 부지런히 했던 때와 같았습니까? 《보감(寶鑑)》이 처음 완성됨에 선왕(先王)을 사모하는 마음이 바로 간절하고, 선열(先烈)이 영구히 전하게 됨에 선왕의 업적을 계승할 책임이 바야흐로 급하니, ‘부지런하고 공경한다.[克勤克敬]’라는 네 글자가 더욱 전하께서 마땅히 복응(服膺)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 전하께서 이렇게 가뭄이 드는 때를 당하여 상세하게 자신을 꾸짖는 하교와 간곡하게 간신(諫臣)을 나오게 하시는 덕은 곧 선대왕께서 가뭄을 안타깝게 여겨 한데서 기도하시던 정성과 더불어 씩씩하게도 차이가 없었으니, 신이 이미 마음에 쌓아오고 있던 것을 어찌 감히 명주(明主)의 앞에서 한번 진달(陳達)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제갈 양(諸葛亮)이 후주(後主)에게 고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일체(一體)입니다.’ 하였고, 주자(朱子)가 송(宋) 효종(孝宗)에게 고하기를, ‘옛 성왕(聖王)들은 음식(飮食)·차사(次舍)·기용(器用)·재유(財賄)에 대해 모두 유사(有司)의 법에 의거 통제하였으므로 털끝만큼의 사사로움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제 무릇 내수사(內需司)를 설치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이고 명석(名碩)들이 건의하여 파기시킬 것을 청한 것이 또한 한두 번이 아닙니다. 참으로 왕자(王者)는 사사로운 저축이 없어도 부고(府庫)의 재물이 모두 임금의 재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야흐로 큰 일을 할 때를 당하여 불세(不世)의 치적(治績)을 이루려 한다면 오직 의당 신충(宸衷)으로 결단을 내려 혁연(赫然)히 파기시킴으로써 공평하고 광명한 덕을 밝히시고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폐단을 제거시키소서. 그리하여 내간(內間)의 수용(需用)에 관계된 모든 것은 아울러 밖에서 진공(進供)하게 한다면 회탕(恢蕩)시키는 정치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수어(守禦)·총융(摠戎) 양청(兩廳)은 본래 외장(外將)이어서 사체(事體)가 경아문(京衙門)과는 다른 것으로 당초에는 다만 서리(胥吏)와 군관(軍官) 약간명만을 두어 부서(簿書)를 봉행하는 데 대비하게 했었습니다만, 중년(中年) 이후 지망(地望)이 높은 신하가 이 직위에 있는 경우가 많아지자 그 규모가 더욱 확장되어 엄연(儼然)히 경중(京中)의 큰 군문(軍門)으로 이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조그만 도성(都城)이 다섯 군문(軍門)으로 나누어져서 긴요하지 않은 병액(兵額)이 점점 불어나서 생령(生靈)들의 고혈이 더욱 고갈되고 있으니, 이것이 전하께서 지난번 변통시킬 마음을 품으시고 열심히 순자(詢咨)하시는 거조가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광주(廣州)·수원(水原)은 본래 사체가 중하지만 참으로 혁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전곡(錢穀)을 유사(有司)에게 붙여 흉년을 만나면 백성을 구제하는 자료로 쓰고 풍년을 당하면 병무(兵務)를 넉넉하게 하는 것으로 쓴다면 국가에서 회보(懷保)하는 도리와 미연에 대비하는 계책에 있어 둘 다 제대로 되어 손실이 없게 될 것입니다.
들[野]을 나누고 주(州)를 나누는 법은 이것이 바로 저쪽 경계와 이쪽 경계를 가지고 책임을 나누어 완성을 책임지우기 위한 방법인 것이니, 옛 선왕(先王)의 제치(制治)하는 법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지금 제도(諸道)에 혹 지방(地方)이 너무 넓어서 명령이 잘 선포(宣布)되지 않고 백성들이 관장(官長)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있으며, 혹 지역이 너무 작아서 관부(官府)가 모양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물론 하민(下民)들이 치우치게 고통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곳에는 의당 손익(損益)하고 분합(分合)하는 방도를 두어 양쪽이 온편하게 되는 정사를 해야 합니다. 예컨대 강릉(江陵)은 지경이 대관령(大關嶺)에 가로막혀 있어서 동서가 현격하게 동떨어져 있는가 하면, 성주(星州)는 경계가 수백 리나 되어 남북이 너무 머니, 오직 의당 나누어 둘로 만들어서 백성들의 왕래를 편리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또 기내(畿內)의 양천(陽川)과 호서(湖西)의 음성(陰城), 호남(湖南)의 용안(龍安), 영남(嶺南)의 언양(彦陽)은 가까운 데로 합치면 부역(賦役)도 점점 고르게 되고 백성들의 곤란도 조금은 펴질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절서(節序)가 이미 늦어서 초복(初伏)이 가까워오고 있고 큰 흉년임이 이미 판가름났으니, 앞으로의 민사(民事)는 떠돌다가 쓰러져 죽는 것이 사세상 반드시 이르게 되어 있으니, 대저 안집(安集)시키는 데 관계되는 방도에 대해 미리 두루 상세하게 강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영(御營)과 금위(禁衛)의 군졸에 대해 상번(上番)을 반으로 감하면 그 보인(保人)이 행장을 꾸려 보내는 것도 절로 견감하는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병조의 기병(騎兵)·보병(步兵)의 포(布)와 훈련 도감의 포보(砲保) 및 각 아문(衙門) 공장(工匠)의 요포(料布)와 각사(各司) 노비(奴婢)의 신역(身役)은 우선 똑같이 반을 정봉(停捧)하게 한다면 거의 곤궁한 백성들에게 일푼이나마 은혜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신은 듣건대 조종조(祖宗朝)에서는 각 고을의 환곡(還穀)을 단지 호조(戶曹)의 원회부(元會付)만 두고 모곡(耗穀)은 아울러 본 고을에 돌려주었고 무릇 포흠(逋欠)과 유망(流亡)이 있으면 모두 이것으로 충당시키게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백여 년 전에 김응조(金應祖)의 상소에 의거하여 그 모곡을 빼앗아 상평청(常平廳)의 곡식을 만들었는데 모곡에 또 모곡이 생겨 그 숫자가 점점 많아졌기 때문에 비록 평년(平年)일지라도 실로 생민(生民)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를 당하여 전수를 봉납하도록 독책하려 한다면 그 형세가 장차 인족(隣族)에게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류는 상평(常平) 회록(會錄)의 모조(耗條)와 아울러 그 숫자를 헤아려 감함으로써 인족에게까지 널리 징수하는 데 이르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이 또한 회보(懷保)하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규모(規模) 가운데 변통시켜야 하는 데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전례를 말하고 있는데,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비록 털과 살이라도 아낌이 없어야 하고 의리에 해로운 것이면 종사(鍾駟)라도 취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경아문(京衙門)의 전포(錢布)를 반으로 감하는 것과 외읍(外邑)의 적곡(糴穀)을 옮겨서 충당하는 것은 어느 것인들 때에 따라 바로잡아야 할 계책이 아닌 것이 있겠으며, 어느 것인들 전례의 유무(有無)를 논하지 않을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조지(朝紙)를 얻어 보았는데 1천 석(石)을 내어 사사로이 사람을 진구(賑救)한 경우에는 법전에 의거 직책을 제수하라는 하교를 내리셨는데, 조가(朝家)에서 은상(恩賞)을 반드시 미덥게 하면 부실(富實)의 격권(激勸)이 응당 많게 될 것이니, 이는 참으로 오늘날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하지만 1천 석 이하 1백 석 이상을 낸 사람은 애당초 거론한 일이 없는데, 이들은 직책을 제수하는 한계에는 차지 못하였더라도 공상(功賞)을 바라는 마음에는 반드시 다른점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내년에는 이런 등등의 권의(權宜)에 관한 정사가 또 반드시 전과 같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참으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지난해의 사람이 미처 상(賞)을 받지 못했는데 금년의 사람이 또 반복되어 곤란하게 된다.’는 것과 너무도 근사하게 됩니다. 의당 각도(各道)로 하여금 그 곡수(穀數)의 다과(多寡)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시상(施賞)한다면 또한 은혜를 베풀어 구제하게 하는 정사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소·술·소나무 이 세 가지에 대한 금법[三禁]은 바로 국가에 항상 있는 법인 것인데, 이렇게 곡식이 귀한 때를 당하여는 모든 미비(靡費)에 관계되는 폐단은 더욱 마땅히 엄히 방금해야 됩니다. 팔도(八道)에서 술을 빚는 데 허비되는 것을 통틀어 계산하여 보면 이를 백성의 식량에 견줄 경우 삼사분의 일은 될 것 같습니다만, 경성(京城)을 가지고 말하여 보건대 의당 반의 숫자에 해당이 될 것입니다. 방금 만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어 낱알 하나가 금(金) 같은 때를 당하여 어떻게 함부로 무익한 곳에다 곡식을 허비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대소의 사향(祀饗)과 상장(喪葬)에 소용되는 것 이외에 몰래 술을 많이 빚어서 여러 점포에서 판매하는 부류들은 일체 아울러 엄금하게 되면 거의 폐단을 구제하는 데 일조(一助)가 되겠습니다.
과거 신해년102) ·임자년103) 큰 흉년이 들었을 적에 팔도(八道)의 떠돌아 걸식(乞食)하는 사람들이 성중(城中)에 가득하였었는데, 선조(先朝)께서 일소(一所)·이소(二所)의 죽을 쑤는 곳을 설치하여 먹였었습니다. 일소는 탕춘대(蕩春臺)이고 이소는 만리창(萬里倉)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때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받아먹는 사람이 근 3천 인이었는데 봄에서부터 여름까지 하였으며, 보리가 익고나서야 파하였습니다. 선조(先朝)께서는 도신(道臣)과 수령(守令)이 잘 안집(安集)시키지 못하여 이렇게 이산(離散)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여겨 매양 흉년을 당하면 반드시 도신과 수령을 엄히 계칙하여 만일 한 명의 백성이라도 제 곳을 잃고 떠도는 사람이 있으면 도신과 수령에게 마땅히 중률을 시행하겠다고 하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령이 된 사람들은 거개가 모두 분주히 뛰면서 걱정하였으며 한 사람이라도 다른 곳으로 전입(轉入)할까 두려워하여 심지어는 자기가 먹을 것을 가져다가 먹이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진구(賑救)하여 구제하기에 급급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실상은 또한 죄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제도 미리 더 신칙(申飭)하여 가을을 기다리는 동안 한 말 곡식 한 되 쌀이라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수합(收合)하여 저장하여 두었다가 내년에 접제(接濟)할 방도로 삼게 한다면 수령들이 각기 마음을 써서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여 힘써 준절(撙節)히 하는 것을 따르게 될 것이니, 이 또한 효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도 의당 몸소 절검(節儉)하는 것을 하후(夏后)가 검소한 옷과 거친 밥을 먹고 위(衛) 문공(文公)이 대포(大布)와 대백(大帛)을 입은 것처럼 하시어 표솔(表率)하는 방도로 삼으신다면 성교(聖敎)에서 이른바 부귀한 집의 반찬 비용이 만전(萬錢)이라는 것과 천례(賤隷)들이 초서(貂鼠)를 입는다는 것도 절로 금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사치하는 풍습이 너무 치성한 것 때문에 조정에 나아와서 탄식을 드러내니, 상신(相臣) 황희(黃喜)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청컨대 그것을 금단시키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뒤 며칠이 지나 거친 베로 공복(公服)을 만들어 입고 백료(百僚)의 위에 앉아서 말하기를, ‘성상(聖上)께서 바야흐로 사치한 것 때문에 걱정하고 계시므로 수상(首相)이 이런 공복을 입었으니, 감히 공복을 이와 걸맞지 않게 할 경우에는 마땅히 무거운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니, 이에 백료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하루 안에 사치스런 풍조가 갑자기 변하여졌으므로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하여 오고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조화(造化)시킬 수 있는 권한을 쥐고서 도솔(導率)하는 책임을 맡고 계시니, 만일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이루려고만 하신다면 이는 단지 한번 전이(轉移)시키는 사이의 일인 것입니다. 지난 계미년104) ·갑신년105) 에 신이 춘방(春坊)에 대죄(待罪)하고 있었는데 마침 문의(文義)에 따라 삼남(三南) 기민(饑民)들이 누더기에 부황이 든 얼굴로 장차 구렁텅이에 죽어 나뒹굴게 된 정상을 전하(殿下)께 진달하였더니, 전하께서는 그 말을 듣고 측연(惻然)히 마음 아프게 탄식하시면서 그날 저녁의 수라(水刺)에서 고기를 버리고 들지 않으셨습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전하께서 강관(講官)이 삼남의 기민에 대해 진문(陳聞)하였기 때문에 저절로 슬프고 마음이 아파서 차마 수저를 댈 수 없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선대왕께서는 이에 의거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강관이 매양 이와 같이 진계(陳戒)한다면 도리어 동궁(東宮)이 식음을 폐기할까 걱정스럽군.’ 하고, 천안(天顔)의 웃음이 일신된 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은 그 덕의(德意)를 흠앙하게 되었고 스스로 천설(賤說)도 버려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대저 우리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는 덕으로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나간다면 인(仁)을 이루 다 쓸 수 없는 것은 물론 정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방금 난역(亂逆)이 비록 제거되기는 했지만 거괴(巨魁)가 아직도 대부분 평안히 살아 숨쉬고 있고 조저(朝著)가 약간 평안하여지기는 했지만 백성들이 아직도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을 받고 있으니, 외면의 기상(氣象)은 편안하고 한가한 세계(世界)같을 뿐만이 아닙니다만, 실상은 아침 저녁도 보존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이때가 바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손발을 물에 적시고 모발(毛髮)을 불에 그을려 가면서 경황없이 서둘러 불에 타는 속에서 구해내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내는 것처럼 할 때인데, 어떻게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 곁에 서서 구경만 하면서 앉아서 성패(成敗)가 판가름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인후(仁厚)함이 뛰어나시지만 분발하는 것이 조금 부족하고 온공(溫恭)함은 여유가 있으시지만 진작(振作)하는 것은 부족하시어 호령을 발하여 시행하는 즈음에 천둥이 치고 태풍이 불듯이 만회(挽回)하고 알선(斡旋)하는 거조가 없으시니, 신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장차 나태하여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데로 귀결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힘써 행하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방금 가뭄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때를 당하여 경근(敬勤)이란 두 글자를 제일의 의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비록 노생(老生)의 상담(常談) 같기는 합니다만 실상의 지극한 이치는 본디 이를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 당(唐)나라 정관(貞觀)106) 연간에는 쌀 한 말의 값이 3전(錢)이 되게 한 정치를 이룩했었습니다만 태종(太宗)은 이를 위징(魏徵)이 인의(仁義)를 행하도록 권면한 데서 온 공효로 돌렸습니다. 전하께서도 참으로 부지런하고 조심하는 마음가짐으로 오랫동안 연마하여 공을 이루신다면 뒷날 쌀 한 말의 값이 3전이 되는 아름다운 정치가 없을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함흥(咸興)의 본궁(本宮)은 곧 우리 성조(聖祖)께서 용잠(龍潛)하시던 구기(舊基)입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울울 창창하여 아직도 당일의 수택(手澤)이 남아 있고 궁전(宮殿)이 엄숙하고 근엄하여 아직도 유민(遺民)들이 우러러 의지하고 있으니, 상재(桑榟)의 고향은 거의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풍산(豊山)·패수(沛水)와 같고 활과 삿갓을 보장(寶藏)한 것은 주(周)나라의 홍벽(弘壁)·완염(琬琰)과 같으니, 이것이 얼마나 지중(至重)하고도 지경(至敬)스러운 곳입니까? 그런데 삼가 듣건대 향사(享祀) 때에는 단지 내사(內司)의 소임(所任)으로 하여금 관천(祼薦)하는 예(禮)를 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신은 의당 전주(全州)에 있는 경기전(慶基殿)의 예(例)와 같이 인근에 있는 수령을 택차(擇差)하여 제향을 지내게 하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치된다고 여겨집니다. 국가의 사전(祀典)은 오세(五世)가 되면 조천(祧遷)하게 되어 있는데 세자(世子)의 묘(廟)에 이르러서도 그 예(禮)는 이를 따른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 소현묘(昭顯廟)107) 는 이미 신위(神位)를 철거하고 묘향(廟享)을 파하기에 합당한 것인데 더구나 처지가 제향할 바가 아니고 또 불경(不經)스러운 것인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순회 세자(順懷世子)108) 의 신위(神位)가 아직도 봉은사(奉恩寺)의 한 칸 방에 봉안되어 있는데, 매양 기일(忌日)이나 명절(名節)을 당하면 치곤(緇髡)들이 제향을 지낸다고 합니다. 당초 이 절에다 이 신위를 봉안하게 된 경로가 매우 의아스럽고도 괴이합니다. 세상에서는 혹 그 묘(墓)가 있는 것을 인하여 원당(願堂)109) 을 세우는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미 묘의 곁이 아니니 원당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리고 이미 원당이 아니라면 향사(享祀)를 지내는 것이 또 불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예전 대로 보존되어 있으니, 실로 설만스러운 폐단이 있습니다. 의당 파거(罷去)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대저 원(園)의 뜻은 능(陵)의 버금이고 묘(墓)보다는 중한 것입니다. 삼가 한(漢)나라와 송(宋)나라의 고사(故事)를 상고하건대 모두 성인(聖人)을 낳으시어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주인이 되게 한 데 대한 공을 갚고 덕에 보답하기 위한 방도였던 것인데, 아조(我朝)에서 봉원(封園)하는 것도 또한 이를 모방하여 행하는 것으로 실로 조상에게 제사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명원(仁明園)을 창설한 데 이르러서는 끝내 고례(古例)가 아닙니다. 원과 묘가 다른 것은 단지 한 글자 사이를 다투는 것이지만 융쇄(隆殺)하는 즈음에 있어서의 예의(禮義)는 절연(截然)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비록 묘라고 일컫더라도 다른 빈어(嬪御)의 산(山)에 견주어 보면 이미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인명원(仁明園)의 원(園)자는 이를 그대로 보존시켜 후세에 보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모든 예제(禮制)에 관계된 것은 이전(彛典)을 따르시어 그 척도(尺度)를 어기지 않게 해야 하고 따라서 이렇게 예법에 없는 예(禮)는 의당 재처(裁處)가 있어야 합니다. 지난번 전하께서는 특별히 고(故) 충신(忠臣) 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 등의 절의(節義)를 생각하시어 증직(贈職)하고 사시(賜諡)하라는 명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백세(百世) 뒤에 지사(志士)들의 감동을 흥기시키고 충신(忠臣)의 눈물을 빚어내게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영월부(寧越府)에 대죄하고 있을 적에 그때의 사적(事蹟)을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니,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수립(樹立)이 더욱 우뚝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비추었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이미 공조 참의에 추증하였습니다만, 그의 우뚝하고 큰 충절(忠節)을 논한다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사람들과 백중(伯仲)이 된다고 해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네 신하에게 추증하고 사시하는 때를 당하여 오직 이 엄흥도만 누락되는 것은 실로 흠전(欠典)이 됩니다. 만일 네 사람의 예(例)에 의거 거행하는 은전을 받게 된다면 성조(聖朝)에서 표장(表章)하는 도리가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에 절실한 말이 많아 바야흐로 깊이 유념하려 하고 있다. 그 가운데 품처(稟處)할 만한 것은 유사(攸司)로 하여금 복주(覆奏)하게 하겠다. 내수사를 혁파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그대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미 헤아리고 있었다. 병신년110) 초부터 절수(折受)를 헤아려 줄이고 있고 쇄관(刷官)을 영원히 혁파하였으니, 장차 이를 인하여 본사(本司)를 혁제(革除)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출입(出入)에 관한 장부(帳簿)를 상세히 조사하여 들어온 것은 내지 않게 하고 있는데, 이제 그대의 말을 따르면 모두 공인(貢人)에게 내도록 책임지운다면 내탕(內帑)은 도리어 유익함이 있게 되고 탁지(度支)에는 도리어 해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이는 이른바 고금의 사의(事宜)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때문에 삼가 선정(先正)의 차자(箚子) 내용을 취하여 전부(田賦)의 거래는 이조(吏曹)에 맡겼고 노공(奴貢)의 비총(比摠)은 비국(備局)에 예속시켰고 세곡(稅穀)의 봉용(捧用)은 호조(戶曹)에서 맡게 하였는데, 특별히 그 명칭을 파기하지 않은 것은 경용(經用)을 절약하기 위한 데서 나온 조처이다. 혹 미처 들어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부설(敷說)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310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식생활-주류(酒類) / 정론-정론(政論) / 윤리(倫理) / 왕실-종사(宗社) / 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 구휼(救恤)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재정-상공(上供) / 재정-역(役)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註 099]기유년 : 1729 영조 5년.
[註 100]억시(抑詩) : 위 무공(衛武公)이 나태해지는 마음을 경계하기 위해 지은 시. 위 무공이 이 억시를 지어 사람을 시켜 날마다 자신의 곁에서 외게 하여 스스로 경계하였다고 함.
[註 101]신축년 : 1781 정조 5년.
[註 102]신해년 : 1731 영조 7년.
[註 103]임자년 : 1732 영조 8년.
[註 104]계미년 : 1763 영조 39년.
[註 105]갑신년 : 1764 영조 40년.
[註 106]정관(貞觀) : 당 태종(唐太宗) 연호.
[註 107]소현묘(昭顯廟) : 인조(仁祖)의 장자.
[註 108]순회 세자(順懷世子) : 명종(明宗)의 아들.
[註 109]원당(願堂) : 죽은 사람의 화상(畵像)이나 위패(位牌)를 모셔두고 그 원주(願主)의 명복(冥福)을 빌어 주는 법당(法堂)임.
[註 110]병신년 : 1776 정조 즉위년
157.정조실록 17권, 정조 8년 윤3월 10일 을축 2번째기사 1784년 청 건륭(乾隆) 49년
예조 판서 엄숙이 박팽년의 부 박중림과 성삼문의 부 성승의 복관 가자를 아뢰니 품처하다
예조 판서 엄숙(嚴璹)이 아뢰기를,
"고 충신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 이조 판서 박중림(朴仲林)과 성삼문(成三問)의 아버지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은, 사육신(死六臣)과 같은 날 사형을 당하였으니 충절(忠節)이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박중림은 선조(先朝) 기미년123) 에 복관(復官)이 되었습니다만, 성승의 경우는 아직까지 복관이 되지 않았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입니다."
하니,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다. 엄숙(嚴璹)이 말하기를,
"총관(摠管)은 본래 겸함(兼銜)이니, 박중림과 성승에게 아울러 한 자급(資級)을 올려서 증직(贈職)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 아뢰기를,
"예조 당상관이 아뢴 바는 진실로 그의 직분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무 품계에 아무 관직으로 더하여 증직(贈職)하도록 곧장 주청한데 이르러서는, 일이 미안(未安)한데 관계됩니다."
하니, 추고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38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註 123]기미년 : 1739 영조 15년
158.정조실록 18권, 정조 8년 8월 21일 갑진 2번째기사 1784년 청 건륭(乾隆) 49년
고 판서 박중림의 시호를 의논하게 하다
고 판서 박중림(朴仲林)의 시호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후손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정존겸(鄭存謙),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이휘지(李徽之)·홍낙성(洪樂性)이 모두 말하기를,
"박중림은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서 같은 때에 힘을 합쳐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였는데, 본직(本職)이 정경(正卿)이었으니, 시호를 주는 은전(恩典)은 시기가 오래되었다 하여 그대로 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65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159.정조실록 18권, 정조 8년 8월 21일 갑진 2번째기사 1784년 청 건륭(乾隆) 49년
고 판서 박중림의 시호를 의논하게 하다
고 판서 박중림(朴仲林)의 시호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후손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정존겸(鄭存謙), 좌의정 이복원(李福源),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이휘지(李徽之)·홍낙성(洪樂性)이 모두 말하기를,
"박중림은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서 같은 때에 힘을 합쳐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였는데, 본직(本職)이 정경(正卿)이었으니, 시호를 주는 은전(恩典)은 시기가 오래되었다 하여 그대로 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465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160.정조실록 24권, 정조 11년 8월 29일 갑자 2번째기사 1787년 청 건륭(乾隆) 52년
차대하여 영의정 김치인이 강계 인삼의 폐단에 대해 방법을 건의하다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이상(李頤祥)이 상소하여 강계 백성의 인삼으로 말미암은 폐해를 대단히 아뢰었습니다. 강계 인삼의 폐단은 위에서 이미 통촉하셨겠습니다마는, 신삼(信蔘) 2백 40근(斤)의 별무(別貿)가 또 이즈음에 있으니, 그 고을 수령이 상소하여 변통하기를 청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구례(舊例)대로 북관(北關)의 삼 40근·미삼(尾蔘) 10근과 평안 감영(平安監營)의 삼 20근을 분정(分定)하도록 허가하면 본부(本府)에서 바쳐야 할 삼은 1백 70근이고 신사(信使)가 가는 것은 후년 봄·여름쯤에 있을 것이니, 두 해에 나누어 장만하여 바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값을 더 주는 것으로 말하면, 갈 때마다 전례를 인용하는 것은 참으로 이어갈 수 있는 방도가 아닙니다. 성상께서 강계 백성을 자신이 아픈 듯이 돌보시는 덕의(德意)를 우러러 몸받아 체삼(體蔘) 한 돈마다 한 냥을 더 주어야 하겠습니다. 품질에 따라 값의 높낮이를 매기는 것은 그 고을 수령이 좋을 대로 헤아려 처리하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들에게 물었다. 다들 관서(關西) 20근과 관북(關北) 40근을 분정하는 것을 편리하게 여기니, 하교하기를,
"북관의 삼은 미삼·체삼을 물론하고 40근으로 정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경(正卿) 가운데에는 약원(藥院)에 맞을 사람이 없으니, 도승지 심풍지(沈豊之)를 발탁하여 제조(提調)에 의망(擬望)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접때 회덕(懷德)의 유생(儒生)이 상소하여 정절사(靖節祠)에 은액(恩額)을 청한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박팽년(朴彭年)의 정충(精忠)·장절(壯節)은 천고에 빛을 드리울 만하고, 송유(宋愉)가 세상을 피하여 살며 스스로 깨끗한 절개를 지키고, 송갑조(宋甲祚)가 도(道)를 믿고 의(義)를 지키고, 김경여(金慶餘)가 바른 도를 지키고 몸을 깨끗이 가지고, 송상민(宋尙敏)이 스승을 위하여 죽은 것으로 말하면 또한 환히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비추므로 열조(列朝) 이래로 혹 배사(配祀)를 허가하기도 하고, 벼슬을 추증하기도 하고, 시호(諡號)를 내리기도 하셨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원우(院宇)의 은액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거니와, 박팽년을 주향(主享)하는 원우는 대여섯이나 되는데 다 은액을 내렸으니, 이제 원우마다 은액을 청하여 근엄한 사체를 손상할 것 없겠습니다. 유생의 상소 가운데에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의 태생(胎生)인 곳에 원우를 세우고 은액을 내린 것을 증거로 삼았으나, 이 밖의 세 신하는 또한 일찍이 이 때문에 원우를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팔도 안에 있는 향현(鄕賢)을 제사하는 곳은 이루 손꼽을 수 없는데 소청하는 대로 허가하면 도리어 매우 방만해질 것이니, 청컨대 유생이 상소하여 청한 것을 지금은 우선 버려두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치인이 말하기를,
"전후에 유생이 상소하여 청한 것에 대해서는 해조(該曹)에서 품처(稟處)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이 많았습니다. 중첩된 향사(享祀)이므로 시행하도록 허가할 것 없는 것이 있더라도 해조의 당상(堂上)인 자가 혹 어려워하고 삼간다면 사론(士論)이 어지러이 일어날 것이니, 누가 이것을 무릅쓰고 방계(防啓)하겠습니까? 은수(恩數)가 방만하면 사체가 도리어 가벼워질 것이니, 이것은 성의(聖意)에 깊이 두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말이 좋다. 이 뒤로 중첩하여 향사하는 곳에 은액을 내리는 것은 해조에서 복계(覆啓)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접때 춘당대(春塘臺)에 전좌(殿座)하였을 때에 훈련 대장이 시관(試官)으로서 통화문(通化門) 밖에서 인의(引義)하고 사진(仕進)하지 않다가 여러 번 신칙(申飭)하고 나서야 비로소 들어왔으니, 국체(國體)가 어찌 이러할 수 있는가?"
하자, 김치인이 말하기를,
"신은 이제야 비로소 듣게 되었습니다. 무장(武將)의 처의(處義)는 문재(文宰)와 다르고 전좌 때에는 더욱이 다른 것이 있습니다. 국체가 달려 있는 바가 아주 미안하니, 청컨대 훈련 대장 이경무(李敬懋)를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5책 666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금융(金融)
161.정조실록 29권, 정조 14년 2월 17일 무진 3번째기사 1790년 청 건륭(乾隆) 55년
영풍군의 무덤을 수축하다
영풍군(永豊君)의 무덤을 수축(修築)하였다. 하교하기를,
"영풍(永豊)의 일에 대하여 삼가 슬프고 갸륵하게 여긴다. 예전 숙묘(肅廟) 때에 장릉(莊陵)을 추복(追復)하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절개를 지킨 여러 왕자(王子)들인 금성 대군(錦城大君)·화의군(和義君)·한남군(漢南君)을 모두 여섯 신하[六臣]들과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을 포증(褒贈)한 규정에 의하여 예법대로 개장(改葬)하고 좋은 시호(諡號)를 주게 하였는데, 영풍군도 그 속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은 다 그 은전을 받았으나 오직 영풍군만은 시호를 내리고 무덤을 손질하는 대상에서 홀로 누락되었다. 이에 선조(先朝) 갑인년에 예장(禮葬)과 연시(延諡)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라고 명하였으나 아직까지 시행하지 않고 있다.
요즘 듣건대, 영풍의 무덤이 고양(高陽)의 대자동(大慈洞)에 있고 부인(夫人) 박씨(朴氏)의 무덤이 충주(忠州)에 있는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선영(先塋) 곁에 있는데, 모두 거적에 싸서 장사지낸 채로 있고 비석이나 묘지명(墓誌銘)도 없고, 시호 역시 태상시(太常寺)에 둔 채 미처 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며 흠사(欠事)가 아니겠는가.
경기와 호서의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고을 수령을 보내어 공사를 감독하여 무덤을 수리하고, 사실을 새긴 비석을 세울 것이며, 그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인 이재천(李在天)에 대해서는 고을 수령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임명해 보내어, 그로 하여금 즉시 시호를 맞이하게 하라. 관가에 몰수된 물건들은 모조리 값으로 쳐서 주인집에 돌려주고, 시호를 내려주는 날에는 관원을 보내 무덤에 치제(致祭)토록 하라. 이것이 바로 양조(兩朝)007) 에서 충성을 장려하고 절의를 표창하던 뜻을 이어받드는 것이다."
하였다. 경기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대자동을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수축할 만한 영역(塋域)이 없다고 계문(啓聞)하니, 본 동네에다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제사지낼 물품들을 떼어주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9책 29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6책 94면
【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 풍속(風俗)
[註 007]양조(兩朝) :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162.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21일 병인 1번째기사 1791년 청 건륭(乾隆) 56년
장릉에 배식단을 세우고 추향할 사람을 정하다
장릉(莊陵)019) 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이보다 앞서 경기도 유생 황묵(黃默) 등이 상언하여,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의 충효 대절(忠孝大節)은 육신(六臣)과 다를 것이 없다고 호소하고 창절사(彰節祠)에 추향(追享)할 것을 청했는데, 전교하기를,
"화의군을 그 위치와 그 사당에 추배(追配)하는 것은 귀신의 이치로 보나 사람의 마음으로 보나 다 합당하다고 할 만하나 추배할 사람이 어찌 화의군 한 사람 뿐이겠는가. 얼마 전에 노량(露梁)을 지나다가 육신의 사당과 무덤 곁에서 한참 동안 행차를 멈추고 쳐다보면서 한숨을 쉬었고, 행전(行殿)에서 묵을 때 감회를 금치 못하여 60구의 제문을 촛불을 들여오게 하여 불러주어 쓰게 하였으니, 그처럼 깊은 감회로 그와 같은 정중한 예를 베풀었었다. 육신은 실로 혁혁하고 뛰어나 사람들의 이목에 젖어 있지만 금성 대군(錦城大君)과 화의군의 그와 같은 절의가 종실에서 나왔다는 것은 더욱 특이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이 두 사람 이외에도 사육신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이번에 추배할 때 함께 시행하는 것이 실로 절의를 권장하고 충성을 표창하는 조정의 정사에 부합할 것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공사간에 상고할 수 있는 문헌들을 널리 상고하여 하나로 귀결시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고 정승 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의 시장(諡狀)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遜位)했을 때 공은 순흥부(順興府)에 안치되었는데, 그곳의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남쪽 지방의 인사들과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책을 꾸몄다. 하루는 보흠을 불러 격문을 초하게 하였는데, 관노(官奴)가 벽 사이에 숨어서 몰래 엿듣고 공의 시녀와 내통하여 격문의 초고를 훔쳐서 달아났다. 그런데 기천 현감(基川縣監)이란 자가 급히 추격하여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서울에 가서 고변하였다. 그리하여 공과 보흠은 잡혀 사형을 당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기진(李箕鎭)이 지은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의 시장에는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이 왕위 회복을 도모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공도 그 일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함양(咸陽)에 안치되었다가 귀양지에서 죽었다.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과 함께 가족은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하는 화를 입었다. 중종 갑오년에 비로소 선계(璿系)에 다시 포함시켰고, 명종 때 또 관작을 회복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先朝) 갑인년에 종부시가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에는 ‘노산군(魯山君)이 손위할 때 시습은 마침 삼각산(三角山) 속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곧 문을 닫고 사흘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자기 책을 모두 태워버리고 절간에 자취를 의탁했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신흠(申欽)이 지은 산중독언(山中獨言)에는 ‘남효온(南孝溫)이 소릉(昭陵)020) 을 복위할 것을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열경(悅卿)021) 을 종유하였다. 열경이 말하기를 「공은 나와 다른데 어째서 세도(世道)를 위해 벼슬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는가?」 하니, 효온이 말하기를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아도 늦지 않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감사 최현(崔晛)이 지은 이맹전전(李孟專傳)에는 ‘경태(景泰)022) 갑술년023) 즈음에 시사가 크게 변하자, 소경과 귀머거리로 행세하면서 친한 벗들을 사절하고, 매월 초하루에는 항상 아침해를 향해 절을 하며 내 병이 낫기를 빈다고 말했는데, 집안 사람들도 그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고 판서 신 이재(李縡)가 지은 조여(趙旅)의 비명에는 ‘경태계유년024) 에 진사가 되었는데, 하루는 여러 유생들과 작별하고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숙종 기묘년에 영남의 선비들이 공의 절의를 보고하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으며, 사당을 함안(咸安) 백이산(伯夷山) 밑에 세우고 김시습·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배향하였다.’ 하였습니다.
고 정승 신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원호의 묘갈명에는 ‘단종이 영월로 손위한 뒤에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새벽과 저녁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을해년에 3년 상복을 입은 뒤 고향집으로 돌아가 문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해서 앉고 누울 때도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무인년025) 에 복위한 뒤 의리와 절개로 인해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주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이 지은 잡저(雜著)에는 ‘성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아버지의 묘소 아래 숨어 살면서 일찍이 서울에 올라간 일이 없었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남효온이 지은 허후전(許詡傳)에는 ‘김종서(金宗瑞) 등이 죽임을 당했을 때 그를 불러들여 잔치에 참여시켰는데, 유독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끝내는 유배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권자신(權自愼)은 상왕(上王)의 외숙인데, 육신과 함께 복위를 도모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었다.’ 하였습니다.
장릉지(莊陵誌)에는 ‘송석동(宋石仝)은 육신과 함께 잡혀서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는 ‘권절(權節)은 귀머거리 노릇을 하며 병들었다 핑계하고는 문밖에 나가지 않은 채 일생을 바쳤다.’ 하였습니다.
장릉지에는 ‘정보(鄭保)는 권세 있는 간신을 대놓고 꾸짖다가 거의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할뻔 했는데 세조가 그가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용서해 줬다.’ 하였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조상치(曺尙治)의 묘지(墓誌)에는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일생 동안 서쪽을 향해 앉지 않았다. 비석에 글을 써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포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 하고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노산조라고 쓴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것이고 벼슬 품계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제하지 못한 죄를 드러낸 것이고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없애지 않기 위해서이며 포인이라 쓴 것은 망명하여 도피한 사람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무덤앞에 세우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당시 제현들이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살아 있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단지 그 처한 상황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었고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선왕(先王)에게 충성을 바친 의리에 있어서는 살았건 죽었건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금성 대군 이유는 왕실의 지친으로서 충성을 다해 의리에 죽었습니다. 후세에 논하는 자들이 종실의 친족으로는 금성 대군을 꼽고 조정의 경우는 육신을 꼽으니, 육신의 사당에 어찌 금성 대군의 제향을 빼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화의군·한남군·영풍군 세 사람도 각기 그 본분을 다했으니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금성 대군에 비하면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김시습·남효온·이맹전·조여·원호·성담수 등 6인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인데 혹은 방랑생활로 그 자취를 감추거나 혹은 은둔해 살면서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그 충성과 그 절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 사당에다 함께 제사지내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더욱 특별히 뛰어난 자로서 김시습은 세종의 특별한 신임에 감격하여 미친 사람처럼 종적을 숨기고 절간에 몸을 의탁하였으며, 남효온은 소릉(昭陵)의 복위를 요청하고 육신의 전기를 지으면서 그 내용을 완곡하게 쓰고 자기 뜻을 고수하였으니, 그들의 고심과 아름다운 절의는 영원토록 사람들을 격려할 만합니다. 이 때문에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에 ‘만약 매월당(梅月堂)과 남 추강(南秋江)을 여기에 제사지내고 또 사당 옆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공주(公州)의 동학사(東鶴寺)에서처럼 한다면 일이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약에 육신(六臣)을 한꺼번에 모두 제사지내는 것을 선뜻 논의하기 어렵다면 우선 선정이 이미 정한 논의에 따라 김시습과 남효온 두 사람을 추향(追享)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이보흠(李甫欽)과 권자신은 그 사적은 같지만 제단을 따로 설치하자는 선정의 논의로 볼 때 그 사이에 경중을 둔 것 같으며, 허후(許詡) 등 7인이 이룬 바는 비록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이보흠과 권자신에 비교하면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추배(追配)하는 문제는 신들이 감히 독단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공사간의 문헌을 가져다가 절의가 가장 현저하고 사실을 증명할 만한 것들을 가려낸 결과 육신과 금성 대군·화의군 이외에도 순절하거나 은둔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장릉지에 보이는 자만도 거의 1백여 인이 넘지만 이름만 있고 행적은 없어 대부분 상고하기 어렵고 단지 뚜렷이 드러난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단묘조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苯)은 모두 세종의 고명 대신(顧命大臣)으로 세조의 변란 때 함께 죽어 그 곧은 충성과 큰 절의가 역사책에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문민공(文愍公) 박중림(朴仲林)은 곧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아버지로서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이 모두 스승으로 섬겼던 사람입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일찍이 세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병자년026) 에 그의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습니다. 도총관 성승(成勝)은 곧 충문공(忠文公) 성삼문의 아버지로서 역시 충문공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상 두 집안의 부자가 이룩한 것이 이처럼 뛰어난데, 중림의 경우는 전하의 무신년027) 에 특별히 시호를 받는 은전을 입었으나 성승은 아직도 시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은 변란 때 황보인·김종서 등과 결탁했다는 죄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사(賜死)되었는데, 영종 때에 이르러 관작을 회복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와 영풍군(永豊君) 이전(李瑔)은 장릉지를 살펴보면, 정축년 금성 대군이 상왕을 복위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었을 때 종친부에서는 어는 유(瑜)028) 와 죄가 같으므로 혼자만 살려줄 수 없으니 안치·금고시키자고 아뢰었고, 종부시에서는 영(瓔)029) ·어·전은 죄가 종사에 관계되므로 왕실 계보에서 삭제하자고 아뢰었습니다. 어·전의 시장(諡狀)을 살펴보면, 어·전은 모두 양빈(楊嬪)의 소생인데 양빈은 곧 단종을 젖먹여 기른 사람입니다. 단종이 손위한 뒤에 육신의 복위를 도모한 것이 성공하지 못하자, 어가 그 일에 참여하였다 하여 드디어 함양(咸陽)에 안치되었고, 정축년 금성 대군의 일이 발각되자 양빈이 내응하였다 하여 병자년에 모두 화를 당했습니다. 중종 때 명으로 왕실 계보에 다시 속하게 하였고 명종 때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숙종 때 단종을 복위하면서 시호를 내려주고 예장(禮葬)하도록 하였습니다. 영종 갑인년에 종부시에서는, 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의 순절은 육신과 다름이 없다고 아뢰었고, 또 호남의 유생들이 상소로 청하기를 ‘저 세 신하가 모두 왕실의 지친으로서 목숨을 바치면서도 절개를 바꾸지 않은 것은 실로 육신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신은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심지어는 엄흥도(嚴興道)와 같이 미천한 자도 오히려 육신과 함께 제향을 받는데, 이 세 신하만은 그 높고 빛나는 충렬이 해와 달을 꿰뚫고 우주를 지탱할 만한데도 표창하는 은전은 도리어 엄 호장(嚴戶長)030) 보다도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상의 문헌으로 상고해 보면 어와 전은 유와 영과 마찬가지인데, 금성 대군의 청안(淸安) 사당에 화의군만 배향하고 한남군과 영풍군을 배향하지 않은 것은 결국 결함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간공(淸簡公) 김시습은 5살에 신동이라 하여 세종의 특별한 인정을 받았고 단종이 손위한 뒤에는 절간에 의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선정신 이이가 말하기를 ‘절의를 높이 세우고 윤리 강상을 부식한 것은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해도 근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문정공(文貞公) 남효온(南孝溫)은 18세에 글을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고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아껴 대현들의 이름을 인멸시키겠는가.’ 하였습니다.
정간공(貞簡公) 원호(元昊)는 집현전 직제학으로 단종 초년에 원주에 은퇴하여 살다가 단종이 승하하시자 영월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냈으며 세조가 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숙종 24년 무인년에 특별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정숙공(靖肅公) 성담수(成聃壽)는 교리 성희(成熺)의 아들입니다. 선정신 성혼(成渾)의 잡저(雜著)에 ‘희가 성삼문의 사건에 연좌되어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담수는 지극한 정성과 높은 식견을 지니고 파주(坡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그 당시 죄인의 자제들에게 으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를 시험하였을 때 모두 머리를 숙이고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유독 담수만은 끝내 벼슬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전하의 갑진년에 증직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간공(靖簡公) 이맹전(李孟專)은 일찍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으로 뽑혔으나 경태(景泰)갑술년031) 에 귀먹고 눈멀었다고 핑계하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신축년에 시호를 추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정절공(貞節公) 조여(趙旅)는 태학생(太學生)으로 단종이 손위하게 되자 여러 유생들과 하직하고 함안군(咸安郡)으로 돌아가 은둔하여 소요 자적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숙종 28년 임오년에 특별히 이조 참의를 추증하였고, 전하의 신축년에 이조 판서로 올려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숙공(忠肅公) 권절(權節)은 선정신 이이가 지은 《율정난고(栗亭亂稿)》 서문에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여러 번 그의 집에 가서 거사하는 문제를 은밀히 말했으나 귀먹은 체하고 대답하지 않았으며, 은둔하여 한평생을 마쳤다.’ 하였습니다. 숙종 임오년에 강원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육신의 사당에 사액(賜額)할 것과 권절을 함께 배향할 것을 청하자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습니다. 갑신년032) 에 양주(楊州) 유생들이 또 상소하여 사당을 건립할 것을 청하니, 증직하고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고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는 《갱장록(羹墻錄)》 화속편(化俗篇)을 상고해 보니 ‘세조가 일찍이 박팽년 등을 논평하여 당대의 역적이고 후세의 충신이라고 했다.’ 하였고, 그 아래에 ‘부제학 조상치가 상소하여 치사를 요청하니 백관에게 명하여 도성 문 밖에서 전별하도록 하였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고 부제학 임영(林泳)이 지은 묘표에 ‘공은 성삼문·박팽년 제공과 길은 달라도 가는 곳은 같았다.’ 하였고, 그 유사(遺事)에 ‘세조가 왕위를 물려 받은 뒤에 영천(永川)에 물러가 살면서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스스로 돌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 부제학 조상치지묘」라 하였고, 또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자기 뜻을 드러냈다.’ 하였습니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영천사당기(永川祠堂記)에 ‘육신은 죽었고 공은 죽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그 자취가 드러나 쉽게 보이지만, 죽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이 은미하여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종을 복위한 뒤에도 육신과 함께 노량진의 사당에서 제향을 받지 못한 것은 후세의 공론을 기다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고 교리 성희(成熺)는 곧 성삼문(成三問)의 종숙부(從叔父)이자, 정숙공 성담수(成聃壽)의 아버지입니다. 선정신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표에 ‘희가 삼문과 함께 왕실을 보필하여 죽고 사는 일로 그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삼문 등이 죽자 희도 역시 엄한 국문을 받고 귀양갔으며 처자는 노비가 되고 재산은 몰수당했다. 그 뒤 3년 만에 용서를 받았으나 끝내 충성과 의분에 겨워 죽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정보(鄭保)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손자입니다. 육신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한명회(韓明澮)의 첩으로 있던 서매(庶妹)를 가서 보고 ‘공은 어디에 갔는가?’ 하고 물으니 ‘죄인을 국문하느라 궁궐에 가 있다.’ 하자, 보가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명회가 즉시 상에게 아뢰어 세조가 친국을 하고 사지를 찢어 죽이려 하다가 충신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죽음을 감해 유배하였습니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은 곧 문종의 부마입니다. 단종 을해년에 광주(光州)로 귀양갔다가 정축년 금성 대군의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자, 종친부가 ‘정종·송현수(宋玹壽)·어(𤥽)·전(瑔)의 죄는 나라의 법으로 보아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여 결국 사약을 받았습니다. 영조 무인년에 특명으로 시호를 내렸습니다.
충장공(忠莊公) 권자신(權自愼),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는 육신이 화를 당하던 날 함께 죽었는데, 영조 때에 와서 함께 시호를 주는 은전을 받았습니다.
여량 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는 단종의 장인으로서 복위를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 금성 대군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시호를 내려주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창절사(彰節祠)에 추배(追配)하는 일은 그 예법이 매우 중대합니다. 세 대신033) 의 뛰어난 절의나 박중림과 성승 부자가 보여준 특별한 절개는 마땅히 배향할 만하지만, 신주의 순위가 서로 맞지 않으므로 감히 쉽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안평 대군 및 한남군·영풍군은 금성 대군과 같은 형제이니, 다함께 죽계(竹溪)의 사당에 추배한다면 역시 풍속과 교화를 길이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생육신을 사육신과 함께 제사지낸다 한들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만 선정신 송시열이 지은 육신사기(六臣祠記)를 상고하건대, ‘만약 매월당과 추강을 이곳에 배향하고, 또 사당 곁에 한 제단을 만들어 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仝) 등을 함께 제사지내기를 대략 공주의 동학사(東鶴寺)처럼 한다면 일이 더욱 완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미 선정의 정론이 있어 다시 논의할 여지가 없지만, 나머지 네 신하의 똑같은 깨끗한 절의에 대해서는 역시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공론이 있을 수 있으며 그밖의 사람들도 모두 순절하거나 은둔하여 칭송할 만한 뛰어난 절의가 있긴 하나 이것은 사당의 규례에 관한 일이라 신들이 감히 억측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달 경술일에 사관이 실록을 상고하고 돌아와 아뢰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자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육신의 일은 감히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세조의 하교에 ‘후세의 충신이다.’ 하셨고, 영양위(寧陽尉)의 집의 일을 논하면서 ‘난신(亂臣)으로 논할 수 없다.’ 하셨다. 그 훌륭하신 훈계와 계책은 해와 별처럼 환히 빛나 임시 방편에 통달하고 원칙을 부식한 성인의 깊은 뜻을 삼가 엿볼 수 있다. 그것을 천명하고 드러내는 것이 어찌 우리 후인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 지난번 행차할 때 민절사(愍節祠)034) 를 지나다가 옛날의 감회가 일어나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고 이어서 금성 대군 등 여러 사람을 영월에 있는 사당에 추배하기 위해 사관에게 명산에 깊이 보관되어 있는 실록을 삼가 상고하게 하였다. 그런데 사관이 복명하던 바로 그 날 강원 감사가 자규루(子規樓)의 옛터를 찾아낸 상황을 장계로 아뢰었다. 이 두 가지 일이 공교롭게도 한꺼번에 겹쳐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되었으니 이치란 속일 수 없다. 참으로 기이하고도 이상하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세상에서 말하는 생육신이나 오종영(五宗英)035) 의 높고 큰 충절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추앙하는 형편이라 누구는 배향하고 누구는 배향하지 않는 것으로 쉽게 취사 선택해서는 안될 것이니, 별도로 예법에는 없지만 예법에 맞는 예를 찾아서 시행하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는가.
지난 숙종 무인년에 장릉(莊陵)을 복위했을 때 조정의 신하가 육신의 사당이 정자각(丁字閣)과 너무 가깝다는 말을 하자, 숙종께서 ‘무후의 사당이 길이 이웃에 가깝다[武侯祠屋長隣近]’는 두보(杜甫)의 싯귀를 인용하면서 헐어버리지 말라고 하셨으나, 의론이 서로 엇갈려 끝내는 옮겨 세우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억울함을 되새기는 제사는 동학사의 실례를 취하고 제단을 만드는 제도는 달천(㺚川)의 실례를 모방하되 당시에 절의를 다한 사람들을 합쳐 하나의 사판(祠版)으로 만들어, 본릉(本陵)036)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매년 한식(寒食)에 함께 제사를 지내며, 고을원으로 하여금 집을 하나 지어서 사판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똑같이 제사지낸다는 뜻을 보여야겠다.
아, 예법이란 인정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서 신이나 인간이나 차이가 없다. 저 열렬한 영령들의 가시지 않는 울분이 길이 의지할 곳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장릉의 혼령도 오르내리면서 제물의 김과 향기가 물씬 풍길 때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이 일을 누가 근거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본도와 예조로 하여금 이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게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배향하는 일에 대해 방금 전교를 내렸는데 내각(內閣)에 배식록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라. 사판은 충신 사판이라 쓰고 제물은 밥은 큰 그릇에 한 그릇, 탕은 큰 주발에 한 주발, 나물과 과일은 각각 한 접시, 술은 한 잔으로 규례를 정하고 제관은 부근의 찰방으로 하며, 예관(禮官)이 내려가기 전에 제단을 만들고 사판을 만들도록 하는 등의 일을 해도에 분부하라. 의례적으로 쓸 제문은 마땅히 지어서 내려보낼 예정인데, 이후에 본릉의 한식제에 쓸 향을 받아갈 때 함께 주어서 보낼 것이라는 것도 해도와 예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제 장릉의 일로 인해 생각해보니, 충정공(忠正公)037) 의 부친 박중림(朴仲林)은 시호가 있는데, 성승(成勝)은 충문공(忠文公)038) 의 부친으로 중림과 함께 죽었으나 아직도 홀로 빠져 있다. 이 어찌 더욱 큰 결함이 아니겠는가. 본관(本館)039) 에 신칙해서 즉시 제사를 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논해 올리도록 하라. 고 충신 박계우(朴季愚)는 바로 대제학 박연(朴堧)의 아들인데, 연이 악(樂)을 제작한 것은 허 문경공(許文敬公)040) 이 예를 제작한 공과 백중을 이루는 것이다. 문경공의 아들 허후(許詡)는 계우와 동시에 순절했으나 후는 시호가 있고 계우만 유독 빠졌으니, 혹시 벼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독동(禿同)과 윤생(尹生)의 뛰어난 절의 또한 인멸시킬 수 없으니, 아울러 증직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단종조의 여러 신하가 절개를 지킨 것은 다 같지만 성과에 있어서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순위에도 귀천의 차이가 있다 하여, 장차 별단(別壇)을 설치하는 문제를 내각으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도록 하였다. 내각이 아뢰기를,
"대신들 가운데 원임 각신에게 물으니, 원임 제학 이복원(李福源)은 말하기를 ‘배향하는 문제는 지극히 엄중하니, 지금 이 명이 비록 묘정에 종향(從享)하는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하나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서원(書院)에 배향하는 것에 비하면 의미와 상황이 자연 다릅니다. 그러니 조정에 벼슬한 적이 없거나 벼슬을 받지 않은 자는 비록 뚜렷이 기록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오직 엄흥도(嚴興道) 한 사람만은 육신의 반열에 나란히 세워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드문 은전은 간략한 것이 귀중하니, 간략하면 그 광명한 빛이 더욱 빛나고 확대하면 오히려 혹 근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드는 것은 표창하는 의리는 마찬가지이고 불쌍히 여기는 은혜로 인해 나온 조치이긴 하나 배식(配食)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인원수의 많고 적음에는 구애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원임 제학 채제공은 말하기를 ‘내리신 3책 가운데 있는 배향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성상께서 직접 뽑아내신 것은 마치 저울 눈금을 가늠한 것처럼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이들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 아래쪽에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에 대해 물으신 일은 불쌍히 여기고 표창하시려는 성상의 마음을 삼가 이해할 수 있긴 하나 숫자는 많고 사적은 너무 소략하니, 만약 위의 항목에 든 뚜렷한 사람들와 똑같이 함께 제사지낸다면 혹시 예법이 번잡해질 혐의가 있을 듯합니다. 신은 일찍이 영남 지방을 왕래한 적이 있으므로 선배들의 유적을 대략 알고 있습니다. 금성 대군은 순흥(順興)에서 화를 당했기 때문에 그 당시 그 부근 고을에서는 평생동안 세상을 등지고서 북쪽 문을 막고 동쪽만 향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자손들이 만약 조정에서 예전에 없었던 은전을 베푼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앞으로 행차하시는 길에 글을 올리는 자들이 더한층 많아져 이루 다 베풀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여기에 뽑아 기록한 자만으로 끊어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전에 우리 성조(聖祖)041) 의 하교에 육신의 사당을 본릉(本陵) 홍살문 안에 그대로 두라고 하셨으니, 매우 훌륭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배향하는 규례를 거행하자고 논의하는 것을 가지고 삼가 그 뜻을 계승하는 일단을 스스로 구현하고자 한다. 대체로 제단에 제사지내는 것과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사실 차이가 있지만 함께 제사지내는 뜻은 마찬가지이다.
두 대신이 올린 의견에 혹은 ‘간편한 것이 귀중한 것이다.’ 하였고, 혹은 ‘이루 다 베풀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일을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제 취사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절의를 지켜 죽어서 그 자취가 나라의 역사와 능지(陵誌)에 올려져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육종영(六宗英)042) ·사의척(四懿戚)043) ·삼상신(三相臣)044) ·삼중신(三重臣)045) ·양운검(兩雲劒)046) 및 육신과 육신의 아비와 자식 중에 특별한 사람과 허후(許詡)·허조(許慥)·박계우(朴季愚) 등 문경공(文敬公)047) ·문헌공(文獻公)048) 의 아들과 손자로서 더욱 뛰어난 사람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도진무(都鎭務) 정효전(鄭孝全)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상의 31인을 함께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에는 축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사실이 자세하지 않은 사람과 연좌되어 죽임을 당한 자는 다시 신중히 참작해야 할 것이다. 별단을 설치하는 문제는 대신들의 말이 진실로 일리가 있으니, 충민단(忠愍壇) 등 여러 제단에 담장은 함께 하면서 제지(祭地)는 달리 한 전례가 바로 그것이다. 사적이 자세치 않은 조수량(趙遂良) 등 8인과 연좌되어 죽은 김승규(金承珪) 등 1백 90인은 별단에 제사지내야 할 것이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의리를 떨쳐서 장사를 지내는 일에 힘을 다한 사람은 오직 엄 호장(嚴戶長)049) 한 사람인데, 어찌 순절한 사람의 반열에 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혼자만 배향에서 누락시킬 수 있겠는가. 김 문정(金文正)050) ·송 문정(宋文正)051) 이 묘정에 추배(追配)된 사례가 곧 본받을 만한 뚜렷한 근거이다. 증 참판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라. 또 고 처사(處士) 김시습과 태학생 남효온은 속세를 떠나 은거하고 몸을 깨끗이 하여 변함이 없었으니, 그 맑은 기풍과 굳은 지조는 백세를 격려할 만한데도 모두 이 사당의 제사에서 빠진 것은 미처 조처하지 못한 결함이다. 두 신하를 똑같이 창절사(彰節祠)에 추가로 제향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장릉에 배식하는 문제는 지금 수의한 것으로 인해 또 별도로 한 제단을 만든다는 명을 내렸다. 32인의 제단에 지내는 제사에는 마땅히 축문이 있어야 하겠고, 제물은 처음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 사판(祠版)은 ‘충신지위(忠臣之位)’라고 쓰되 감사에게 쓰도록 하라. 별단(別壇)의 경우는 사판 3개를 만들어 계유년·병자년·정축년에 죽은 사람들을 각각 쓰도록 하라. 제사를 지낼 때는 지방에다 성명을 죽 쓰되, 조사(朝士)를 한 판, 맹인·내시·군사·노비를 한 판, 여인(女人)을 한 판으로 해야 한다. 신위의 위치는 중신들의 왼쪽에 두되 조사의 경우는 약간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맹인·무당·내시·군사·노비의 자리는 약간 밑으로 내려야 한다. 제사지내는 의식에 축문을 쓰지 말고 제물은 각기 밥 한 그릇, 탕 한 그릇, 술 한 잔으로 하며, 헌관과 집사는 두 제단의 일을 겸하여 보게 해야 한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2책 3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204면
【분류】
왕실(王室) / 윤리(倫理)
[註 019]장릉(莊陵) : 단종(端宗)의 능.
[註 020]소릉(昭陵) : 문종비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능호.
[註 021]열경(悅卿) : 김시습의 자.
[註 022]경태(景泰) :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
[註 023]갑술년 : 1454 단종 2년.
[註 024]계유년 : 1453 단종 1년.
[註 025]무인년 : 1698 숙종 24년.
[註 026]병자년 : 1456 세조 2년.
[註 027]무신년 : 1788 정조 12년.
[註 028]유(瑜) : 금성 대군.
[註 029]영(瓔) : 화의군(和義君).
[註 030]엄 호장(嚴戶長) : 엄흥도.
[註 031]갑술년 : 1454 단종 2년.
[註 032]갑신년 : 1704 숙종 30년.
[註 033]세 대신 : 김종서·황보인·정분.
[註 034]민절사(愍節祠) :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의 사당.
[註 035]오종영(五宗英) : 안평 대군·금성 대군·한남군·영풍군·화의군 등 다섯 왕족.
[註 036]본릉(本陵) : 장릉.
[註 037]충정공(忠正公) : 박팽년.
[註 038]충문공(忠文公) : 성삼문.
[註 039]본관(本館) : 홍문관을 말함.
[註 040]허 문경공(許文敬公) : 허조(許稠).
[註 041]성조(聖祖) : 숙종을 가리킴.
[註 042]육종영(六宗英) : 안평 대군·금성 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이양(李穰) 등 여섯 종실.
[註 043]사의척(四懿戚) : 송현수·권자신·정종·권완 등 네 외척.
[註 044]삼상신(三相臣) : 김종서·황보인·정분 등 세 재상.
[註 045]삼중신(三重臣) : 민신·조극관·김문기.
[註 046]양운검(兩雲劒) : 성승(成勝)·박쟁(朴崝).
[註 047]문경공(文敬公) : 허조(許稠).
[註 048]문헌공(文獻公) : 박연(朴堧).
[註 049]엄 호장(嚴戶長) : 엄흥도.
[註 050]김 문정(金文正) : 김상헌(金尙憲).
[註 051]송 문정(宋文正) : 송시열(宋時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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