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사(泰安寺)로 들어서다
소 재 지: 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원달리)
곡성의 태안사는 동리산 자락에 자리한 사찰로, 혜철선사가 구산선문의 하나로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시대의 태안사는 인근의 송광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로
넘어와 송광사의 사세가 크게 확장되면서 이 태안사가 크게 위축되었다고 한다.
태안사 능파각(泰安寺 凌波閣)
주차장을 지나면 첫 번째 마주하는 건물이 바로 이 능파각이다.
동리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을 건너기 위해 만들어 놓은 능파각은 태안사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데 빼 놓을 수 없는 누각이다.
'능파(凌波)'란 미인의 걸음걸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 누각 밑을 굽이쳐 흐르면서 기포를 일으키는 물길을 가리킨 말인 듯 하다.
그만큼 아름다운 물줄기다. 계곡의 양쪽에 있는 자연암반에다 낮은 석축을 올리고 길다란
통나무 두 개를 잇대어 걸친 위에 놓인 능파각은 정면 1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맛배 지붕의 건물이다.
난간에 걸터앉아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면 천년의 세월도 찰나 같기만 하다.
세속의 번뇌를 이 다리를 건너면서 던져 버리고 불계로 입문 한다고 한다.
태안사는 6.25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불타고 말았다.
그때 이곳에서는 지리산 빨치산과 경찰간의 격전이 벌어져 많은 경찰들이 희생되었기에
절 한 모퉁이에 추모탑을 세워 그들을 기리고 있다.
능파각은 태안사 건물 중 '일주문'과 함께
불타지 않고 남아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신라 문성왕 12년(850)혜철선사가 창건하고
고려태조 24년(941) 광자대사가 중수 하였으며 그 뒤 파손 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43년(1767)에
복원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능파각의 모습과 달리 복원되었다.
계곡에 가로질러 놓은 통나무도 현재처럼 각진 게 아니고 원목을 절반으로 나눈 반원형 이었다.
처마를 받치는 기둥도 전봇대처럼 매끈하게 깎은 직선이 아니고 자연목 그대로 사용해서
곡선미를 한껏 살려낸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일주문(一柱門)
다듬지 않은 지름이 거의 60cm가 되는 원목을 사용하였으며 앞뒤로 팔각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평방을 겹쳐서 일주문 전후에는 3具, 측면에는 1具의 空間包가 받치고 있다.
내3출목, 외4출목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앙설(仰舌)로 살미첨차들과 화려한 단청과
기둥 상부의 용머리 장식이 눈길을 끈다. 전면에는 桐裏山 泰安寺(동리산 태안사) 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지방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이름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이후 문성왕 9년 (847년) 혜철 국사에 의해 선종사찰로 거듭 개산되어 구산 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뒤에 고려 태조 때 광자대사가 머물면서 132칸의 건물을
짓고 대규모 절을 이룩하여 동리산파의 중심 도량 이 되었다.
고려 초에는 송광사, 화엄사가 모두 이 절의 말사였다. 1925년에 최남선이 찾아와
신라 이래의 이름있는 절이요, 또 해동에 있어 선종의 절로 처음 생긴 곳이다.
아마도 고초(古初)의 신역(神域) 같다고 평했다. 6.25 때에 대웅전을 비롯하여 15동의
건물이 불탔다. 그 뒤 다시 수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태안사에는 보물 등 문화재 9점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태안사로 들어가는 1.8km의 계곡은
봄에는 신록,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과 울창한 녹음, 가을에는 짙게 물들은 단풍이 아름다운
산책로로 알려져 있다.
광자대사탑비(廣慈大師塔碑)
보물 제275호,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원달리)
광자대사탑비는 광자대사를 기리기 위해 그 행적을 새긴 석비이다. 석비는 거북이 모양의
귀부(龜趺)를 맨 아래에 두고 그 위에 비문이 새겨진 비신(碑身)을 세운 다음 맨 위에
용으로 꾸며진 이수(螭首)를 얹은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는 비신이 파괴되어 그 일부가
석비 옆에 남아 있으며 새겨진 글자도 마모되어 부분적으로만 판독할 수 있는 상태이다.
"조선금석총람"과 "해동금석원"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자대사탑비는 고려 초 태안사를
고쳐 지은 광자대사의 탑비로 고려 광종 원년(950)에 세워졌다. 또한, 효공왕의 측근으로
불심에 대한 문답을 주고받았으며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귀부는 아래에 얇은 받침돌을 두었고 귀갑무늬(거북등무늬)와 꼬리, 뒷발이 뚜렷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용머리는 목이 짧으나 생김새가 사실성을 띠고 있으며 비석 받침대에는 구름과 소용돌이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수에는 네 모서리에 몸을 감고 있는 용이 표현되었고 연꽃 봉오리가 세 곳에 얹어져
있으며 중앙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조각되어 있다.
비신의 일부가 소실되어 아쉽기는 하나 광자대사승탑과 함께 스님의 행적을 기리고 가람의
장엄함을 돋보이게 하는 귀한 탑비라고 할 수 있다.
광자대사탑(廣慈大師搭) - 보물274호 일주문을 막 지나 오른편 부도밭에 있으며 고승 광자대사의
부도당이다.높이는 약 3m에 달하고 지석대부터 상륜부의 보개까지 8각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부 위에 탑신을 차례로 놓은 전형적인 8각원당형으로서 보물 274호로 지정되어 있다.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
보물 제274호
이 승탑(부도)은 고려 초 태안사를 중창한 광자대사의 부도로 고려 제4대 광종 원년(950)에
세워졌다. 이 부도는 기단부부터 옥개석과 상륜부(꼭대기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8각형으로
이루어진 8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신라시대 석조 부도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여러 단으로 중첩된 기단부의 맨 아래에는 저석과 좌대(받침대)를 대각선 방향으로
조각하였으며, 하대석의각 면에는 당초문(唐草文-덩굴무늬)을 정교하게 새겼다. 하대석 위에는
상단을 두었는데, 각 면에는 눈 모양의 안상(眼象)이 2좌씩 있고 그 위에 16엽의 이중 연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 그 위에 단을 마련하여 몸돌인 탑신을 받치고 있는데, 이것은 2단의
팔각형 받침과 난간을 모방한 것이다. 탑신의 양 옆면에는 탁상에 놓인 향로를 두었고 좌우로
사천왕 입상이 양각되었으며 앞뒤 면에는 문 모양을 새겼다.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따라 암키와와 수키와, 서까래, 부연 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상륜부는 공양 그릇을 엎은 모양의
복발, 바퀴 모양의 보륜, 구슬 형태의 보주 등이 있다.
이 부도는 상하 비례가 우아하고 정교하며 완전한 상륜부 조각 또한 매우 우수하다.
시기적으로 앞선 적인선사탑의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태안사 대웅전 주불로 아미타불을 모셨다. 좌우 협시보살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후불벽 또한 본존불과 어울리게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극락회상도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근래 새로 중수하였으며
4벌대의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삼고 원형 초석위에 원형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기둥위에서
결구한 다포양식의 겹처마 팔작 지붕 집이다. 전면과 측면의 중앙칸에는 주간에 2구의
공포를 얹고 나머지 칸에는 주간에 1구씩 내 3출목의 공포를 얹었다. 전면의 중앙칸에는
4분합 솟을 빗살문을 달았고 나머지 4칸에는 2분합 솟을 빗살문을 달았다.
태안사 대웅전 주련(柱聯)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편시방중]: 부처의 몸은 전세계에 두루 퍼져 있고
三世如來一軆同 [삼세여래일체동]: 석가,비로자나,아미타 부처님은 다 같은 부처님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넒고 크게 원하는 것이 항상 끊이지 않으며
汪洋覺海渺難窮 [왕양각해묘난궁]: 넓은 바다같은 부처님은 아득하고 궁함이 없으며
究竟淸淨微妙法 [구경청정미묘법]: 마침내 미묘한 법을 맑고 깨끗하게 하였으며
威光遍照利群生 [위광편조이군생]: 외경심이 모든 중생들에게 이롭게 두루 비춰주리라
동리산문의 개산조인 혜철(惠哲)의 탑비인 적인선사비송(寂忍禪師碑頌)을 뵈려오려면
머리 숙여 배알하도록 해야한다고 하여 문이름을 배알문(拜謁門)이라고 했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寂忍禪師照輪淸淨塔) - 보물273호
적인선사탑(寂忍禪師塔, 惠哲 785년 원성왕1년~861년 경문왕1년)
보물 제273호
적인선사탑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세운 혜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다. 혜철의 시호는 적인선사이고 탑호가 조륜청정(照輪淸淨)이어서 적인선사
조륜청정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승탑은 기단과 탑신, 옥개석이 8각형으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신라시대 석조 부도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넓은 기단 가운데에 4각형 지대석을 2단으로 놓고 그 위에 8각 받침돌을 놓았다.
받침돌의 각 면에는 안상이 2좌씩 조각되어 있으며, 하대석의 각 면에는 사자가 1마리씩
새겨져 있다. 하대석 위에는 중대석을 4단으로 두었으며, 중대석 위는 활짝 핀 연꽃잎을
잘 조각하여 꾸몄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대좌 위에 놓여 있는 탑신은 낮은 편이나,
아래는 얿고 위는 좁아 안정감이 있으며, 각 면에는 문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서까래와 추녀, 기왓고랑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상륜부는 꽃이 위로 핀 연꽃 모양의 장식물, 공양 그릇을 엎은 듯한
장식, 바퀴 모양의 장식, 구슬 형태의 보주 등이 잇어 완전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조성시기는 스님이 입적한 통일신라 경문왕 원년(861)
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신라말 번성했던 禪宗思想의 근본 도량인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1) 가지산문 迦智山門 - 도의 道義 (장흥 보림사)
2) 동리산문 桐裏山門 - 혜철 惠哲 (곡성 태안사)
3) 실상산문 實相山門 - 홍척 洪陟 (남원 실상사)
4) 봉림산문 鳳林山門 - 현욱 玄昱 (창원 봉림사)
5) 사자산문 師子山門 - 도윤 道允 (영월 법흥사)
6) 성주산문 聖住山門 - 무염 無染 (보령 성주사)
7) 사굴산문 사崛山門 - 범일 梵日 (강릉 굴산사)
8) 희양산문 曦陽山門 - 도헌 道憲 (문경 봉암사)
9) 수미산문 須彌山門 - 이엄 利嚴 (해주 광조사)
을 말하며 신라말기 부패해가는 귀족중심의 교종(敎宗: 종교의 교리, 부처님의 말씀만 중요시하는)을 벗어나서
깊은 산속에 참선(參禪)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 九山禪門이다.
* 사崛山門의 사자는 門+者로 화장할 사 자 즉 불에 태우는 사 자입니다
조륜청정탑 좌측에 있는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개산조(開山祖) 혜철의 탑비인
무주동리산대안사적인선사비송 병서(武州桐裏山大安寺寂忍禪師碑頌 幷序)
탑비 번역내용을 이곳에 옮긴다.-인터넷에서 옮김
곡성군 동남쪽에 산이 있으니 동리(桐裏)라 하고 그 안에 집이 있으니 대안(大安)이라 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에워싸 자취를 가리고 한 줄기 물이 맑게 흘러 나갈 뿐이다. 길은 멀리로부터
끊어져 속세인이나 승려가 이르기 어렵고, 지경(地境)이 깊고 그윽하여 승려들이 조용히 머물 수 있는
곳이었다. 용신(龍神)이 바친 상서롭고 기이한 땅이요, 벌레와 뱀이 그 독을 감춘 곳으로,
소나무 그늘에 구름이 깊어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은 따뜻하니, 이 곳이야말로 삼한의 승지(勝地)로다.
선사가 지팡이를 짚고 와서 보더니 상주할 뜻을 두고 교화의 도량을 열었다.
고려 태조 22년(939년)에 광자선사 (廣慈禪師)가 중수한 이후 태안사를 여러 차례 중수한 기록이 있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대웅전은 1968년 봉서암을 옮겨 다시 건립한 것이다. 태안사는 소규모 수계(水系)의
합류지점 전면에 위치한다. 보성강과 동계천이 합류하는 골짜기 입구에서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거슬러 올라간 곳에 위치한다. 봉두산에서 발원한 계류가 절 좌우를 흘러 동계천에 유입된다.
태안사는 동리산을 주산으로 삼아 북쪽으로 탐진강 본류, 서쪽으로 보성강과 동계천, 동쪽으로 향진천으로
포위되어 있다. 절은 밖으로 두 개의 강이 감싸고 합하는 내부에, 안으로는 개울이 감싸며 흐르는 곳에
위치하여 골짜기가 좁고 깊어 산과 물이 짜임새를 잘이룬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사찰 좌우에는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사찰 전면에서는 논농사, 사찰 전면 계류를 건너 구릉지에서는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태안사는 봉두산(鳳頭山: 桐裏山: 752미터) 경사면 해발 270미터에 위치하고 있다. 보성강과 동계천이
합류하는 골짜기 입구에서 골짜기를 따라 거슬러 을라가면 태안사가 있다. 봉두산의 맥을 제대로
이어받아 힘차게 명당을 향해 주산이 뻗어 내려왔다. 맥은 유순하고 부드럽다.
태안사의 명당은 장풍국(藏風局)에 합당한 형세조건을 갖고 있다. 주산 봉두산을 현무로 삼으면
동남으로 보이는 청룡은 오봉산(479미터) 줄기이며, 북서의 440미터에서 뻗어내려오는 산줄기는 백호이다.
주작인 깃대봉은 430미터이며 남서방에 있다. 현무인 주산 봉두산에서 뻗어 내린 본신용호가 여러 겹으로
명당 주위를 감싸고 있다. 태안사 지형도(1: 5,000 지형도) 에서 1은 주산의 맥이며 2는 청룡자락,
3은 백호자락이다. 현무인 봉두산 외에는 산 높이가 거의 같으며 중후하게 절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지형도에서 알 수 있듯이 봉두산에서 이어지는
주산1이 힘차게 뻗어내려와 물길과 만나는 곳에 절이 자리를 잡고 있다.
청룡2는 300-400미터 내외의 산줄기로 절 좌측을 에워싸고
백호3은 절 오른쪽을 감싸고 있다. 수구(水口)쪽으로 신유산이 훌륭한 기세로 우뚝 솟아있다.
해발고도는 280-300미터이고 좌향은 남서향이다. 작은 계류는 명당 좌우에서 흘러들어 명당 앞에서 합수된다.
태안사 명당은 봉황이 날개를 안으로 접으면서 둥지로 막 들어오는 형국이다.
따라서 절은 봉황의 둥지에 해당하는 곳에 입지했다. 그런데 비봉귀집형의 지세는 그 기세가 생동감과
힘이 있으나 안정감이 부족한 약점이 있다. 기세로 볼 때 봉황이 하강하는 관성에 의해 앞으로 약간 들리는
듯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봉황포란형(鳳鳳抱卵形)과는 그 기운에 차이가 있다.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형국의 터는 편안하고 온화한 기운을 띠지만 기세가 약하고, 반면 태안사와 같은
비봉귀소형의 땅은 힘과 생동감이 넘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안정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이 기세를 오동나무의 안으로 오롯이 안으려는 의도로 동리산이란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땅 기운의 약점을 지명으로 비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절 이름인 태안(泰安, 大安: 크게 편안함)이라는 뜻도 지세를 감안하여 봉황이 아주 편안하게 깃드는
절이라는 풍수적인 사고가 담겨있다.
태안사 일주문 앞에 자리한 연못, 가운데 삼층석탑이 보인다.
연못 가운데 자리한 진신사리를 모신 태안사 삼층석탑 이 석탑은 원래 사찰입구 광자대사 부도 바로 옆에
있었으며 당시의 상태는 기단부 면석 1매와 탑신부 일부에서 유실된 보재가 있었으나 현 위치로 옮겨
보수하면서 완전하게 복원하였다. 탑의 구조는 당초 2층 기단인 3층석탑 이었으나 연못으로 옮기면서
기단부 지대석을 높여 탑이 전체적으로 높게 보인다. 탑신부의 각 옥개석 층급 방침은 4단이며
옥개석 상면에는 2단 괴임을 하였다. 상륜부는 모두 신제로 보충하였다 조성년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도지정 지방문화재, 자료 170호)
3월 29일 모든 답사를 마치고 압록면에 있는 수궁가든(061-363-4633)에서 참게와
잡어로 맛있게 매운탕하여 먹었다.
앞에 보이는 보성강 그리고 다리 건너 섬진강과 합쳐져 경남 하동포구로 나간다.
이것으로 1박2일의 답사를 모두 마침니다. 읽어 보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사진과 글
권진순 올림
2015년 3월31일
첫댓글 대하 서사시 - 감동입니다.
답사의 시작과 끝 준비하시느랴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