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버전으로
요 며칠 단양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을 기리는 축제로 분주하다.
천오백년 전의 옛사랑, 신분을 뛰어 넘는 한 남여의 러브스토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의 고전으로 전해진다.
온달을 사랑한 공주의 내조는 마침내 거지 남편을 장군으로 만들었다.
사랑의 열정은 격을 파괴하고 상식과 관습의 벽을 허물어뜨린다.
누가 뭐라 하든지 나는 해낼 수 있어, 여자들은 사랑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전환시키는 신비의 불꽃이다.
조국 고구려를 위한 온달장군의 장렬한 죽음은 아직 가슴에 온기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내 가정과 마을, 나라와 인류를 위해 무엇을 바칠 수 있을까?’ 하고
새삼스레 존재의 의미를 되새김하게 한다.
한 삶의 마지막 죽음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장군은 전장을 택했다.
남자들은 깃발을 좋아한다.
깃발을 올리고 그 깃발 아래 목숨을 던진다.
더러는 그걸 환상이라 하고 허구라 하지만 깃발엔 피를 역동시키는 마력이 있다.
장군의 주검은 전사한 성터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나이 한 생애의 한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달려온 평강이 치맛자락으로 그 주검을 감싸고
여보, 하늘이 내린 일이니 이제 풀고 돌아가요, 하자 관이 움직였다.
깃발과 치맛자락은 모두 바람에 쉽게 흔들린다.
스스로 흔들리면서 흔드는 것, 남자들은 그런 흔들림에 약하다.
내 생애도 어느 바람 부는 날, 다 풀어버리고
바람 따라 산보 가듯 가볍게 떠날 수 있으려나.
깃발 아래서의 장렬한 죽음 같은 화려한 꿈은 애시당초 없었다.
아내가 달려와서 특별히 치마를 벗어 위로해야 할만한 한도 없다.
삶의 어느 지점, 계획에도 없이 문득 멈춰선 기차에서 홀연히 내려설 때
한참을 옆자리에서 동행했던 여인이 손을 흔들어주며
‘잘 가시라’는 인사 한마디면 족하지 않을까.
하늘 맑고 바람결이 좋은 남한강의 들녘으로 아내와 나섰다.
코스모스며 갈대며 여인의 흰 머리칼이 깃발처럼 강바람에 흔들린다.
순박한 꿈과 생애를 가을바람에 맡기고 있다.
어쩜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겨울의 서울에서
나는 젊다는 것 빼고는 내놀 게 없었던 알몸의 온달이었다.
시골 촌놈에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평강공주.
그대는 어떻게 그 무모하고 위험한 선택을 결행했을까, 미쳤지.
고운 정 미운 정으로 여정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오늘은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의 버전으로
(2013. 10. 11.)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해 묵은 가을의 글이라서 죄송합니다.
참 좋았읍니다..잘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