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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월 한북정맥 종주중 다친 우측 무릎을 핑계로 긴 칩거에 들어갔다.
다친 무릎은 시간이 지날수록 호전이 되었지만
그와 반대로 산에 대한 갈증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주말에 한두번 동네 뒷산 다녀오는 것 말고는 제대로 된 산행을 해본지가 언제였단가?
무거워지는 엉덩이를 걷어차 준 옥자누부가 아니었으면
산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산길 시큰거리는 발목과 무릎이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을 상쇄시켜주기에 충분했던 여항산, 서북산의 풍경과
같이 걸었던 일구월심님의 배려 덕분에 오랫 동안 기억에 남을 산행이 되리라.
▶ 발산재에서 출발합니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팔의사..
지번 진전면 봉암리 121-8
▶ 326m봉 갈림길
▶ NO 106번 철탑
▶ 영봉산 갈림길, 이정표 → 영봉산 1.6 km
▶ 묘지 3기를 지나고 363m봉을 우측으로 우회.
▶ 우측으로 보이는 도로와 나란히 356봉, 큰정고개에 도착합니다.
▶ 오봉산 갈림길,
이정표 ↓ 낙남정맥(발산재 7.39 km), ↑ 여항산 5.20 km, ← 오봉산 2.14 km
여항산 방향으로 갑니다
▶ 522.9m봉, 삼각점(함안 414)이 있고 522.4m라고 표기
▶ 515m봉을 내려서면 오곡재(비실재),포장도로 도착.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 산 258-5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산 205-6 대형버스 진입 가능 구역. 오곡재까지 1.2km
▶ 557m봉, 바위 무더기가 있는 봉우리
▶ 군북 사촌(사랑목), 미봉산 갈림길
▶ 미산령, 정자가 있고 이정표
▶ 나무계단길을 올라서니 744m봉(지도상의 743.5m봉),
▶ 미산봉 정상(돌탑봉)
▶ 배능재
이정표 ↓ 미산령 1.3 km, ↑여항산 0.5 km, → 돋을샘 1.2 km, ← 미산 2.7 km
▶ 깃대봉이 있는 헬기장
▶ 여항산(770m), 암봉으로 되어 있으며 지리산 구간을 제외하고는 낙남정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 가야 할 천주산, 무학산, 광려산,서북산 등이 보임
▶ 코바위 윗쪽(여항산 내림계단길), 나무계단길
▶ 전망좋은 암릉구간이 이어짐,
▶ 소무덤봉(668m), 우측으로 병풍바위 같은 곳으로 이어지는 능선 분기봉
▶ 헬기장
▶ 전망 좋은 마당바위가 2개 있는곳(706m봉)
▶ 별천(적십자 수련원) 갈림길
▶ 정북산 삼거리,
▶ 서북산(738.5m), 헬기장에 삼각점(함안 11), 정상석
▶ 감재고개,
▶ 임도, 임도 갈림길, 잣나무를 심어 놓았음
▶ 평지산 갈림길(송전탑),
▶ 대부산(649.2m), 삼각점
▶ 봉화산 갈림길,
▶ 넓은 바위가 있는 곳을 지남.
▶ 봉곡 갈림길,
▶ 가파른 오르막 이후 330m봉
▶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서면 한치재(진고개 휴게소) 도착
함안군 여항면 진함로 790
지번주소 경남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788-4 여항산보리한우
산행지 : 낙남정맥 7구간 (발산재 ~ 여항산 ~ 서북산 ~ 한치재) 8시간 30분 소요 예정. 22.3km
산행일시 : 2016년 10월 23일 넷째주 일요일
지리산 영신봉을 떠나온 낙남의 산줄기는 지리산권을 벗어나면서부터 산도아니고 들도 아닌 형태로 사람 가까이 바싹 들러 붙는다.
해발 100~ 200m 정도의 높이를 가진 정맥길은 가시덤불과 쓰러진 잡목, 헷갈리는 능선길로 고생을 시키더니
이곳 8구간에 이르러서야 제법 산같은 형태로 용솟음을 쳐올린다.
남쪽 들머리인 발산재의 높이가 120m, 오늘의 최고봉인 여항산이 770m, 서북산738.5m 날머리인 한치가 145m.
만만치 않은 오르내림이 이어지는 구간이다.
시지사시는 바리봉님이 "무릎이 어떠냐"고 물어보신다.
"아직 좀 뻐근하다"고 하니
"돌팔이. 자기 무릎은 못고치면서 남은 어떻게 고치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有口無言
쓴 소리를 해준 옥자누부는.
오랜만에 나타난 감포를 보더니 알아서 모델 역활을 해주신다
산행을 준비하시는 마가목의 꽉다문 굳센 입술에 숙달된 산꾼의 의지가 어려있다.
오랜만에 백마(100mm 렌즈)를 들고 나섰더니
사진을 찍어주시던 최기사님 " 망원렌즈 죽이네"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의식처럼 사진 촬영을 마치자 모두 출발이다.
출발하는 일행을 뒤로하고 중간출발(?)하는 세명은 오곡재를 찾아 나선다.
1029번도로.
여양에서 군북으로 넘어가는 지방도로로 이차선 포장도로, 일차선 시멘트 농로 그리고 이차선 도로의 반복이었다.
조그만 길에서 덤프트럭과 버스가 마주쳤다.
운전실력 좋은 덤프 트럭 기사님이 남의 집 마당 공터로 차를 빼주신다.
구불구불 이어지던 길은 도저히 차가 들어갈것 같지 않은 둔덕마을에 이르렀다.
시내버스의 종점인듯한 마을 회관 앞에서 내렸다.
이리저리 마을 이쪽저쪽을 헤매이는 우리가 안되어 보였는지,
아님 외부인이 잘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어서 그런지
몇몇분이 관심을 가져주신다.
그분들 덕분에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이후에서야 오실 마을 앞 도로를 지나간다.
군북으로 넘어가는 2차선 포장도로가 다시 나타났다.
차량한대 넘어가지 않는 도로는 오늘만큼은 우리들 차지였다.
오곡재와 미산령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달해서는
바로 미산령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미산령으로 올라가는 길은 시멘트 도로였다.
자전거 라이딩 하시는 분들이 자주 이용하는 도로라는 글을 어디에선가 본 기억이 떠올랐다.
꽃향유 군락지를 만났다.
뿌연 운무속 소나무가 몇 그루 서있고
군데군데 단풍이 든 잡목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피어난 꽃향유 군락지는 보기만 해도 흡족했다.
배고프다는 indigosea님의 성화에
과일 몇 조각을 꺼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있었지만
멀리 여양리 너머에서는 맑은 하늘이
구름사이로 한번씩 뒤척이고 있었다.
미산령 동물이동통로 지나 함안 읍의 풍경이 뿌연 운무 사이로 조망된다.
바람은 그곳에서 불어왔다.
한국전 발발이후 이곳 여항산에서 서북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무려 19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전투를 펼친 곳이엇다.
2013년 봄 유해를 발굴하여 국립묘지에 모셨다고 한다.
돌무더기 있는 봉우리를 지난다.
미산령에서 여항산까지의 오르막은 제법 숨이 찬다.
함안벌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능선을 지나 여항산의 남쪽 여양리로 불어오고 있었다.
여항산(艅航山)은 함안군의 남단에 위치한 주산(主山 : 鎭山)으로 이 산을 경계하여
동쪽인 본면(本面)을 산동(山東), 서쪽인 비실(比谷)을 산서(山西)로 구분짓고 있으며,
면명(面名)의 유래(由來)와 함안의 특수지형인(南高北低)의 근원(根源)도 이 산으로부터 비롯된다.
여항(艅航)이란 남고북저의 지형으로 물이 역류(逆流)하는 까닭에 이를 바로잡고자
1586년 한강(寒岡) 정구 군수(鄭逑 郡守)가 부임하여
풍수지리학적(風水地理學的)으로 낮은 북쪽을 뜻으로 높이기 위해 대산(代山)이라 하고,
높은 남쪽은 배가 다닐 수 있음은 낮음을 뜻하므로
“나룻배여(艅) 배항(航)자를 사용하여 여항(艅航)이라 고쳤다고 전하지만
그것은 낭설이며, 오전(誤傳)으로서 「代山」·「艅航」은 당초부터(정군수 부임 이전) 사용했던 지명이요,
그 이후에도 써왔던 이름이다.
함안군청 홈페이지 발췌-
여항산을 여항산(艅航山 : 嶺誌選下), 일명(一名) 파산(巴山 : 全國地理誌)으로 오기(誤記)된 문헌도 있지만
이 곳에서는 과더미산, 또는 갓데미산, 필봉(筆鋒)이라고도 부른다.
(혹은 6·25 당시 전투에 지친 미군들이 ‘갓뎀잇(god damn it)’이라고 부른 데서 각데미산 혹은 곽데미산으로도 불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천지개벽 당시 모두가 물에 잠기고 주봉의 바위만이 과(시체를 넣는 함) 또는 갓만큼 남았다고 곽더미(갓데미)라하며,
필봉이란 둔던(屯德)에서 여항산을 바라보면 주봉 앞에 붓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산봉이 필봉이다.
이 아래에 일인(一人)이 채광하던 폐광이 여러곳 있어 이를 비실광산(比谷鑛山)이라고부른다.
6·25때는 이 폐광이 적의 은신처가 되어 여항산(770고지)을 중심으로
전투산(戰鬪山 :661고지), 서북산(西北山 :738고지)등지가 치영한 격전지였다.
산 정상을 곽바위, 갓바위, 또는 마당바위(平岩)라 부르는 깍아지른 암벽이 있고,
이 암벽 위에는 10~20명이 앉아서 놀수있을 만큼의 넓이인데 맑은 날은 대마도(對馬島)를 역역히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한다.
마당바위 남쪽 아래 낮은 능선을 배넘기도랑이라 하고,
배넘기도랑이란 배가 넘나드는 개울이란 것으로 노아의 홍수 대 이 곳으로 배가 넘나들었다고 전하며,
이 마당바위를 대상으로 애절한 노래가 구전(口傳)된다.
곽(갓)데미 마당바구 비온둥 만둥
조그만 신랑품에 잠잔둥 만둥
함안군청 홈페이지 발췌-
마산 진동앞바다.
한국전 당시 이곳에 정박한 배에서 함포사격을 해서 북한군들이 여항산 능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고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고.
여항산을 지나자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제법 많다.
군데 군데 라면 끓이는 냄새와 옆을 지나가는 이들에게서는 막걸리 냄새가 난다..
이제 한 시간 반 정도면 한치까지 내려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낙남정맥은 쉽사리 우리를 산 밖으로 풀어 주지 않았다.
완경사 능선을 따를 때까지만 해도 무릎은 덜 부담스러웠지만 갈재를 지나고
편백나무숲 갈림목을 지나면서 올려치기 시작한 603m봉 서릉은 장딴지를 뻑적지근하게 했고,
대부산(649.2m) 정상을 지나 북진하던 낙남정맥은
봉화산 갈림목(봉화산 0.9km, 청암 3.3km, 한치 1.8km)에서 방향을 동으로 틀어 쏟아질 듯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섰는데도
다시 된비알이 기다리고 있었다.
봉화산정에 는 폭4m 높이 3m 가량의 돌로 쌓은 봉수대와 봉수대를 관리하던 집터가 남아 있다.
이 봉수대는 전국 봉화로(全國烽火路)중 간봉(間烽)으로서
초기(初起)인 거제의 가라산(加羅山)부터 7번째이며, 서울 까지는 다시 23개의 봉수대를 거쳐야만 했는데
옛날 남해안에 자주 출볼했던 왜구의 침입을 중앙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봉수로서
3·1운동때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함안군청 홈페이지 발췌-
산행내내 나타나서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
산부추, 구절초, 쑥부쟁이 등의 들꽃들.
서북산 정상지난 공터에는 산부추 군락지와 패랭이 꽃, 범꼬리 등도 피어있더라.
한치재 도착직전 과수원에는 꽃향유가 피었더라
한치재는 진동면 장날에 이 길을 이용하던 행인들이 쉬어 넘던 고개이다.
한티재라 함은 이 고개에 올라서면 진동 앞바다가 한눈에 훤히 보인다고 해서 한티재(한티고개)라 불리워 졌다고 한다.
도착을 하니 우리를 태워온 버스가 기다린다.
버스너머 다음산행 진행하여야 할 광려산의 높이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첫댓글 고생하셨읍니다...
역시 대포가 성능이 쥑이네요...
살아있네....
감포님이 좋아 ~~~ 뭐라고 표현을 못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