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좌진 장군을 음해하지 마라!
이번엔 김좌진의 음해설에 대해 기술하겠다.
상술한바 청백전가팔백년의 가풍에서 자란 김좌진이 북만주에서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일제침략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였고, 경신년간도참변과 자유시참변을 직접 목격하며 체험했고, 반일무장투쟁을 우선주의로 했던 김좌진에게 변절이라든가 일제주구라는 말은 그에게 너무나 큰 형벌일 것이다. 그가 암살당하자 그 다음 해에 만주침략 구실을 만들어 낸 류탸오후사건柳条湖事件이 일본제국 관동군의 자작극이었다는 점으로 봐도 김좌진 장군의 비중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좌진이 살아 있을 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더니 장군이 암살당하여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이유였을까 이곳저곳에서 음해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이 음해설은 김장춘씨가 유물로 물려받은 김좌진 장군의 유품인 《장군의 가족(부부)사진, 장군이 말 타고 찍은 사진, 대원들과 찍은 사진, 군사작전지도, 장군의 진중일기 8권 분량, 장군의 둘째아들 김창규의 일기 수십장》이 강용권의 손에서 깡그리 사라지고, 이 같은 김좌진 장군의 유품들을 연구•분석•검증을 완료하고 김장춘과 함께 한국행을 기다리던 문호갑선생이 세상을 떠난 그 다음 해인 1993년 7월에 개최한 “김좌진학술연토회”에서 강용권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김좌진장군 음해설》이라 하는 것이며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문(강용권): 김좌진은 어느 조직에서 암살하였습니까?
답(양환준): 조선공산당만주총국(화요계)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암살했습니다.
문: 총을 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답: 공도진입니다. 공도진은 화룡구 서성동 명암촌에서 나와 함께 자란 친구였으니 잘 아는 사이입니다. 공도진이 김좌진을 암살했습니다.
문: 공도진이 김좌진을 암살했다는 양환준 선생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답: 이 문제를 알려면 그 당시에 내가 뭘했는가부터 말해야겠습니다. 나는 1929년에 고려공산청년회 동만주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 초에 만주총국의 부름을 받고 흑룡강성 아성현 소해구로 갔습니다. 총국에서는 나에게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선전부장의 중책을 맡겼습니다. 당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부서를 보면, 책임비서 김백파(원명은 김병묵), 조직부장 강화린, 군사부장 최석천(최용건), 위원 이계동, 김성(김책의 형), 등이었습니다. 내가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선전부장을 맡았으므로 그 후부터는 많은 일을 알게 되었고 많은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김좌진한테 총을 쏜 사람이 공도진이라는 것을 두 곳에서 들었습니다. 하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인 김백파한테서 들었는데 그는 “공도진은 내가 파견하여 김좌진을 암살하게 하였다.”고 말하였고, ①다른 하나는 1931년초에 내가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말한 것입니다. 공도진이 말하기를 “총국에서 나에게 특수임무를 주었기에 나는 ②김좌진이 꾸리는 정미소에 근 1년간 잠복해서 일만 하는 사람으로 알게했다. ③1929년 음력 설 밑의 어느 날 신민부 고관들이 화의를 하고 휴식하다가 정미소로 시찰하러온 기회에 김좌진을 명중하고 도망쳐 나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러고 보면 김백파의 말과 공도진의 말이 다 일치합니다.
문: 공도진은 어떤 가명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답: 최동범, 이복림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문: 김좌진을 암살하게 된 주요 근거는 무엇입니까?
답: 책임비서였던 김백파는 나에게 “내신 정보에 의하면 ④김좌진은 일제와 결탁한 주구이다. 김좌진은 하얼빈 OO일본여관에서 조선총독부 만주파견원 마쯔시마와 밀담하였다. 마쯔시마가 『돈은 근심 말라. 독립군에 관한 정보보다도 공산당에 관한 정보가 퍽 중요하다. 조직의 명칭과 부서 조직들간의 합작관계 등을 제공해 달라.』고 했는데 ⑤김좌진은 이 요구를 접수하고 활동경비를 받아 그 돈으로 산시에 정미소를 꾸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놈의 주구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근거라면 지혜겸 선생(같이 공산당을 했고 조국이 광복된 후에 연변대학 역사과 주임교수가 됨)이 말씀하기를 “김좌진이 마쯔시마와 밀담한 후 ⑥목단강으로부터 횡도하자에 이르는 철도선 내에서 여객열차 안에 신민부 경비대원을 파견하여 많은 공산당원들을 잡아다 죽였다는 죄입니다. 한번은 금방 조선에서 망명해 들어오는 사람을 붙잡아 내리고 공산당 혐의분자라고 때리다가 공산당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자 돈 500원을 내면 놓아준다고 했답니다. 그의 가족이 급히 ⑦조선으로 되돌아나가 안달복달 500원을 구해 가지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벌써 죽은 뒤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왜놈의 주구에다 공산당을 보기만 하면 잡아 죽이니 공산당에서 이 장애를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1980년도에 지혜겸 선생이 나와 이야기할 때 “김좌진이 중동선에서 공산당을 많이 죽였으니 만약 화요파에서 죽이지 않았더라면 우리 ML파에서 죽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상 남색으로 처리한 문답은 강용권이 당시 김좌진을 암살하였다고 지목되고 있는 이복림(일명 공도진)과 중국공산당 활동을 같이하였다는 양환준을 만나 대담한 것을 강용권이 “김좌진학술연토회”에서 발표한 것이다. 강용권의 질문에 양환준이 진술한 것에 불과하다.
위의 문답을 요약•정리하여 그러했을만한 배경과 이유를 상호 반대급부를 포함하여 분석해보겠다.
⑴ 다른 하나는 1931년초에 내가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말한 것입니다.
위 김춘선은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되자 김종진은 부위원장 권화산과 함께 비상간부회의를 열고 군사위원장 리붕해를 중심으로 청장년들을 뽑아 임시치안대를 조직하였으며 그날 밤으로 해림역 부근에 있는 김봉환의 거처를 습격하여 김봉환 외 1명을 학살하였다.》고 했다. 공도진, 박상실, 이복림, 최동범이 네 개의 가명을 쓴 공도진이라는 인물이라면 1930년 1월에 김봉환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살해되었을 것이므로, 1931년 초에 양환준이 만났다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김좌진 암살 용의자는 김봉환과 함께 한족총연합회 임시치안대한테 살해되었는데 어떻게 1년 후에 만났단 말인가?
⑵ 김좌진이 꾸리는 정미소에 근 1년간 잠복해서 일만 하는 사람으로 알게했다.
▶배경과 이유 분석: 문제는 “공도진이 말하기를 『총국에서 나에게 특수임무를 주었기에 나는 김좌진이 꾸리는 정미소에 근 1년간 잠복해서 일만 하는 사람으로 알게 했다.』”에서 “근 1년간”이라는 말은 시기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금성정미소는 재만 한인 농민들이 수확한 벼를 중국인이 경영하는 정미소에서 도정搗精하고 삯을 내느니, 한족총연합회가 설치한 정미소에서 도정하면 그 이익금을 군자금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인 농민들에게도 경비를 절감해 줄 수 있다는 취지였다. 한족韓族연합회에서는 1929년 10월 농촌자치조직하에서 생활하고 있는 농민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산시참山市驛에 정미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1929년 7월에 한족총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0월에 한족총연합회가 정미소를 설치했다. 그러니까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한 1930년 1월까지는 불과 3개월 정도 기간인데 “근 1년간”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김좌진이 조선총독부 만주파견원 마츠시마에게 공산당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받은 돈이 아니라는 점도 확인되는 것이다.
⑶1929년 음력 설 밑의 어느 날 신민부 고관들이 화의를 하고 휴식하다가 정미소로 시찰하러온 기회에 김좌진을 명중하고 도망쳐 나왔다.
▶배경과 이유 분석: 1928년 12월 김좌진 등은 우선 군정파를 해체하고 개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독립운동단체 창립을 주장하는 참의부 김승학, 정의부의 김동삼 등과 연합하여 《혁신회의》를 조직하였다. 1928년 12월부터 1929년 3월까지 민족유일당 창립 및 3부통합운동 가운데서 선후로 두파(신민부 군정파와 민정파)가 전부 해체되었다. 신민부는 1927년 2월 중앙집행위원장 김혁, 경리부 위원장 유정근과 김윤희, 박경수느 한경춘, 남중희, 리종순, 리정화, 남극 등 중앙간부들이 석두하자에서 일경과 중국 군경들한테 체포된 이후로 수난을 겪다가 이렇게 해체되었다. 양환준의 말대로 1929년 음력 설 밑의 어느 날이라면 양력으로는 1929년 2월쯤이다. 이때는 신민부 군정파는 완전히 해체되었고, 금성정미소는 차려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근 1년간 잠복할 수 있고, 더구나 《1929년 음력 설 밑의 어느 날 신민부 고관들이 화의和議를 하고 휴식하다가 정미소로 시찰하러 온…》 이라는 뚱딴지 같은 말을 하는가 말이다. 정미소를 꾸리지도 아니하여 없는데 어떻게 시찰하러 왔단 말인가! 양환준의 말은 완전 조작이다. 이런 조작된 말을 강용권은 학술회의에서 발표했고, 한국의 모대학 교수는 이를 연구성과라고 평가했다.
⑷김좌진은 일제와 결탁한 주구이다. 김좌진은 하얼빈 OO일본여관에서 조선총독부 만주파견원 마쯔시마와 밀담하였다.
조선총독부 만주파견원 마쯔시마와 김좌진이 할빈의 OO일본여관에서 밀담한바 마쯔시마가 말하기를 “독립군에 대한 정보보다도 공산당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면 돈을 주겠다.”는 것이어서 김좌진은 이 요구를 접수하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산시에 정미소를 차렸다는 것인바
▶배경과 이유 분석 : 김좌진은 아홉 차례의 청산리전투에서 수 백 명의 일본군을 살상殺傷하였으므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단순첩자로 이용할 인물이 아니었다. 일제침략자들에게 김좌진이라면 현장에서 보는 즉시 체포하여 오랏줄로 묶어 압송될 중죄인이다.
1925년 6월11일 당시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츠야 미야마츠三矢宮松와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張作霖 사이에 비밀리에 협약을 체결하고, 중국 군경과 합동으로 독립군부대와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을 대대적으로 토벌하는 때였으므로 김좌진과 같은 중죄인을 현장에서 체포하지 아니하고 밀담密談하였다는 것은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감행하던 일본군의 전략으로 보아 설득력이 전혀 없다. 미츠야협약이 체결된 후 만주의 관리들은 이 협약이 체결된 후부터 독립군 적발에 혈안이 되었으며, (일본측에서 포상금을 지급했기에 중국인 관리들이 억세게 나섰음;필자주) 그 결과 일반 조선인 농민들까지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장쭤린의 강력한 독립운동 단속으로 만주에 있던 독립군의 기세는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일반 조선인이 받은 피해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1927년 지린吉林의 대검거 사건이었다. 장작림은 일본에게 만주지방에서의 여러 가지 이권을 얻게 해준 대가로 일본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한 인물이다.
⑸김좌진은 이 요구를 접수하고 활동경비를 받아 그 돈으로 산시에 정미소를 꾸렸다.”고 했습니다.
금성정미소는 1929년 10월에 한족총연합회에서 설립했다. 김좌진이 정미소를 꾸렸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한족총연합회에서 김좌진에게 경영을 맡겼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김좌진이 일제측한테 돈을 받아 정미소를 꾸렸다는 말은 허구와 조작과 음해공작이다.
⑹목단강으로부터 횡도하자에 이르는 철도선 내에서 여객열차 안에 신민부 경비대원을 파견하여 많은 공산당원들을 잡아다 죽였다
마쯔시마와 밀담을 마친 김좌진이 목단강에서 횡도하자에 이르는 철도선 여객열차 안에 신민부 대원들을 파견하여 많은 공산당원을 잡아다 죽였다는 것인바
▶배경과 이유 분석 : “1928년 2월. 제1차,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검거사건으로 고려공산청년회의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의 대부분은 파괴되었다.”는 것으로 김좌진을 오해할 소지는 다분하다 하겠다. 그렇지만 김좌진이 이 사건에 개입할 수도 없거니와 지휘할 수도 없는 정황이었다. 당시 만주 일대(동만, 서만, 북만)에는 국제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지부로 승인받은(1925. 7) 고려공산청년회만주총국(1925. 4. 18)이 사회주의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었으며, 조선공산당만주총국(1926. 5)이 창립되었고, 신민부 군정파의 반대급부와 한인사회 동포들도 사회주의혁명에 깊이 젖어 있었다. 이들은 일제타도와 대한독립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찾으려 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공산주의를 접수하지 아니한 김좌진의 편에 설 단체는 한족총연합회 조직에 참여한 대종교와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 중동선교육회 뿐이었고 규모 또한 쇠약했다. 더구나 김좌진은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경의 추격을 받았으므로 가족을 만나기는커녕 외부 출타出他도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신민부도 해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객열차 안에 신민부 대원들을 파견하여 많은 공산당원을 잡아다 죽였다는 것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만주의 반일무장투쟁 정황에 비춰볼 때 설득력이 없다.
⑺조선으로 되돌아나가 안달복달 500원을 구해 가지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벌써 죽은 뒤였습니다.
조선에서 막 들어오는 사람을 붙잡아 공산당 혐의분자라며 금전 500원을 요구했는데 돈이 없어 가족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돈 500원을 가져왔으나 사람은 벌써 죽은 뒤라는 것인바
▶배경과 이유 분석 : 발표자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발표라면 이 또한 참으로 우둔하기 짝이 없는 음해공작이라 판단된다. 당시 군자금 의무금이 각 호마다 6원이었다. 이 6원도 내기가 어려워 총기살해사건까지 일어났다. 500원은 거금이었다. 어림없는 음해공작이다.
이 문답식 발표문에는 마츠시마와 김좌진이 밀담한 날짜가 명시되지 않았으며, 목격자나 제보자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자와 중국공산당 활동을 같이했다는 양환준의 진술일 뿐이다. 강용권의 질문에 대한 양환준의 답변은 객관성, 사실성, 상식성을 크게 벗어나며 개연성조차도 관찰되지 않는다. 따라서 검증할 근거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런 자료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박창욱 교수는 “박상실이 조선공산당총국에 자신의 공적을 세우려고 헛소리 칠 수 있다.”고 논평했다. 하여 상술한 김좌진 암살자가 확증되지 아니한 채 ①~⑧까지 나열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김좌진의 암살자가 누구라고 확정하는 문제는 아직 미결상태라고 주장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암살의 배경이다.
양환준의 답변에 나타난대로 김좌진을 음해한 세력이었던 조선공산당만주총국과 그 예하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는 1932년에 일제가 조직한 민생단을 조선인 민회, 금융부, 구제회, 상애회 등과 거의 동일시하고 《우리들의 혈육을 남김없이 착취하려고 하는 정책기관》으로 규정하였다.
이들은 1929년 6월 조선공산당만주총국위원회에서 《신민부 같은 부패한 민족단체는 매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또한 소비에트 혁명의 기치를 내세우고 중•조 민중의 연합항일과 민족해방을 주장하면서 일제 비호하에서의 소위 민족독립 등은 일체 반대한다는 것이었고, 강도 일본제국주의와 주구무리들은 …자치촉진회, 한족연합회 및 기타 주구들을 집합시켜 민생단이라고 하는 큰 개굴狗巢을 만들고 일체 노력대중에 대한 압박책을 채취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기편(기만)하고 있다.
김좌진 장군 사후 음해공작 | ||
음 해 내 용 | 사실성 | 음해성 |
⑴ 다른 하나는 1931년초에 내가 공도진을 만났는데 그가 직접 말한 것입니다. | X | O |
⑵ 김좌진이 꾸리는 정미소에 근 1년간 잠복해서 일만 하는 사람으로 알게했다. | X | O |
⑶ 1929년 음력 설 밑의 어느 날 신민부 고관들이 화의를 하고 휴식하다가 정미소로 시찰하러 온 기회에 김좌진을 명중하고 도망쳐 나왔다. | X | O |
⑷ 김좌진은 일제와 결탁한 주구이다. 김좌진은 하얼빈 OO일본여관에서 조선총독부 만주파견 원 마쯔시마와 밀담하였다. | X | O |
⑸ 김좌진은 이 요구를 접수하고 활동경비를 받아 그 돈으로 산시에 정미소를 꾸렸다.”고 했습 니다. | X | O |
⑹ 목단강으로부터 횡도하자에 이르는 철도선 내에서 여객열차 안에 신민부 경비대원을 파견 하여 많은 공산당원들을 잡아다 죽였다 | X | O |
⑺ 조선으로 되돌아나가 안달복달 500원을 구해 가지고 돌아와 보니 사람은 벌써 죽은 뒤였 습니다. | X | O |
⑻ 장군의 부인 중 13세, 9세, 8세의 여자 어린이들은 김좌진의 윤리•도덕관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 | O | O |
⑼ 김두한이 1958년에 오숙근여사의 장례식을 치른 것은 완전 사기극이다. | O | O |
⑽ 김을동이 제시한 가족사진은 완전 조작품이다.(김장춘 증언) | O | O |
민생단이 조직된 배경을 살펴보면 만주침략(1931.9.18.)이 노골화되자 재만 공산세력은 중국공산당과 합작하면서 전반적인 항일전선을 구축한다. 이청천李靑天의 독립군은 왕덕림王德林의 중국인 항일구국군과 연합한 후 대전자령大甸子嶺등에서 청산리대첩 이상의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1933.7.3.)
이런 반일무장전선에 재구축된 상황에 한•중 양 민족의 이러한 접근 및 그들의 연합전선을 깨기 위해서 조직된 것이 친일 민생단民生團이다. 이것은 최남선의 매부 박석윤朴錫胤이 동민회同民會 계열의 친일파 조병상曹秉相과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金東漢•김택현金澤鉉•이경재李庚在•이인선李仁善•최윤주崔允周등과 협의해서 만주사변 직후부터 조직준비를 시작했다. 경성(서울)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의 이사 겸 민회이사 조병상과 《매일신보》사 부사장 박석윤은 리인선, 김동한과 함께 룡정에 도착하여 《일거에 간도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이미 조선총독부의 양해를 얻었다고 공언하면서 사회 각 계층을 방문하고 일본군의 동북 출병이 《동만 조선인의 권익확보를 기하는 좋은 기회》라고 선동하였다.이들은 조선총독부와 간도일본영사관의 후원과 조종 밑에서 1932년 2월5일 일본군 대좌 출신 박두영朴斗榮을 단장으로 하는 민생단을 용정龍井에서 발족시켰다. 민생단은 재만 조선인의 생활안정과 낙토건설을 표방했으나 실제는 한•중 이간으로 공산조직과 산하 대중단체를 파괴하려는 반공•친일의 간첩조직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조직이 강력했을 때 민생단은 힘을 쓸 수 없어서 1932년 7월에 사무소를 폐쇄했다. 일본헌병대는 이것을 다시 살려서 그 산하의 간첩조직으로 하여 중국공산당 조직 안에 계속 침투시켰다.
이로 인하여 결국 중국 공산당은 민생단을 감시•처단해야 했고, 일제는 조선인을 민생단원으로 하여 중국공산당 조직에 침투시켜 희생양으로 하였으니 죽어가는 생명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김좌진 순국 이후 1930년초에 조선공산당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는 코민테른의 지론에 따라 1국1당이라는 명분으로 조공만주총국을 해체하고 모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여기서 눈여겨 살펴볼 대목이 있다. 중국공산당에는 김좌진을 음해한 조선공산당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성원 대부분이 가입했고, 일제 친일파들이 조직한 민생단에는 1920년대 소위 민족주의 계열의 우익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혁명 노선을 추구하던 조선민중 가운데 일부 변절자들이 일제주구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반일무장투쟁 우선주의를 주장했으나 민의에 따라 신민부 군정파를 해체하고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한 김좌진은 이쪽으로 가나 저쪽으로 가나 미운오리새끼였을 것이다. 김좌진은 만주 반일단체들의 회의문화 결핍으로 상호 양보와 지모智謀없는 쟁론만 펼치다가 간교한 일본제국의 이간질에 녹아나고, 음흉한 중국공산당에 이용만 당하였으니, 고향 떠난 타국 만리에서 불리한 점도 많았겠지만, 《일제와 소련과 중국공산당 3개 세력의 중동철도 경제권 쟁탈전, 소련의 남하정책, 일본제국의 대륙침략흉계와 조선인 학살, 일제와 장작림의 합작군대의 조선인 탄압, 자유시에서의 민족분열, 코민테른의 개입, 신민부 내부 갈등으로 인한 해체와 3부통합 실패, 맑스-레닌 사회주의혁명론 등장, 조선공산당만주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와의 군권과 관할지역 쟁탈, 한•중 양국 일제주구들의 끊이지 않는 이간과 농간, 군자금태부족, 김좌진의 교육•인권•평등•경제•문화•농업 등을 향상•발전시키고자 하는 정책으로 세력 팽창 우려》등의 복합적인 정황이 김좌진을 죽음으로 몰아갔고, 무고한 조선 양민들만 고통 속에서 학살당해야 했다.
이상 살펴본바 김좌진 장군을 이렇게 음해한 점에 대하여 김좌진의 후손들은 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가? 왜 반박하지 않는가? 마땅히 강용권을 명예훼손으로 제소하여 그 진위眞僞를 밝혀야 했다. 김좌진 장군의 장남으로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김두한씨도, 김두한씨의 딸 김을동씨도 국민적 영웅으로 된 할아버지가 저토록 허무맹랑한 음해를 당하였는데도 왜 말이 없는가? 혹자는 필자에게 “김을동씨가 진정 장군의 피가 섞였다면, 김동진의 후손들이 진정으로 혈족 가문이라면 입을 열지 않는 이유가 뭔가? 이건 참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를 반드시 밝혀 김좌진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중국 길림성 왕청현 거주 김장춘씨 단 한 사람뿐이다. 그는 왕청현 교육국 소속 향토사학자 문호갑 선생과 연변대학교 사학과 박창욱 교수의 연구와 분석에 준하고 있다.
김좌진평전을 저술한 수원대학교 박모 교수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1993년 7월4일과 5일 양일간 흑룡강성 영안현 해림에서 요령성 신빈현과 중국조선민족사연구소가 공동으로 개최한 ‘김좌진학술연토회’에서 발표된 글들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원인 강용권의 연구성과다. 여기서 강용권은 당시 김좌진 장군을 암살하였다고 지목되고 있는 이복림(일명 공도진)과 중국공산당 활동을 같이 하였다는 양환준을 만나 대담한 내용을 보고하였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며 근거도 제시하지 아니한 강용권의 음해성 발표를 “연구성과”로 평가했다.
어쨌든 양환준은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화요파 선전부장이었다. 이들이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일본과 싸우려는 수단이었음을 인정하는 속에서 고려공산청년회는 반일무장투쟁이라는 점은 김좌진과 일치하지만 공산주의•사회주의혁명이라는 점은 김좌진의 노선과 상호 배치背馳되는 단체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강용권의 발표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 국민은 김좌진을 국민적 영웅으로 취급하면 안된다. 특히 김좌진의 고향 홍성군민은 역사에 기만당했잖은가 말이다. 김좌진이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과 전쟁하여 대승의 공적을 올렸다 해도 신민부를 창립하면서 대한독립군을 기만하고 일제에 빌붙었다면, 김좌진의 이러한 반민족적 행위를 조사도 검증도 하지 않고, 청산리대첩 영웅으로 추대하여 기념관을 짓고, 운용비를 해마다 투입하는 것은 국민 혈세 낭비에 해당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강용권의 발표문을 도입導入한 김좌진평전을 지은 ㅂ모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으므로 강용권이 1993년 발표 당시 제시한 근거자료를 함께 도입했어야 했다. 만약 강용권이 어떠한 근거자료도 제시하지 못했다면, 이러한 발표문을 도입한 점은 역사정의라는 객관적 관점에서 볼 때 무리가 따른다 하겠다. 상술한 강용권과 양환준의 문답은 소설 같은 시나리오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김두한이 1958년 장군의 부인 오숙근여사의 장례식을 치렀다. 이때 오숙근여사는 1947년에 이미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에서 사망하였고 묘도 보청현에 있다고 김장춘은 말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측 당안黨案에도 그 기록이 있다. 더구나 김두한은 1958년 장례를 치르면서 김좌진 장군 유체와 합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두한이 1958년에 오숙근 여사의 장례를 치를 때 중국에서 유체를 모셔오지 않았다거나 그 밖의 검증할 방법이 없다면 이는 명백한 《김좌진장군 사후 음해》에 해당된다.
김을동씨가 장군의 부인 오숙근 여사와 6살 때 찍었다는 사진을 살펴보면, 김을동씨가 1945년생이므로 사진을 찍은 해는 1950년이 된다. 이미 1947년에 큰아들 김창렬이 중국 토지개혁심판대 야외심판장에서 몽둥이로 처참하게 맞아 죽는 광경을 목격하고 몸져누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시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므로 김을동씨가 공영방송(MBC-TV 대전방송)에 출연하여 사진을 찍었다고 공개방송한 것은 완전 사기이므로(김장춘 주장) 이 또한 《김좌진장군 사후 음해》에 해당된다.
상술한 김두한이 가짜 장례식을 치르고 또 김을동씨가 사실일 수 없는 사진을 공영방송에서 말한 것은 국민기만에 해당됨에도 대한민국 국가가 이를 조사하지 아니하고 방치•체념하는 것 또한 《김좌진 장군 사후 음해》에 해당된다.
홍성군 발행 도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장군 전기-발행인:홍성군수. 저자 전옥진. 2001』 “제7장 장군의 가족” 편에 생몰도 없는 김계월, 9세 이복희, 8세 김영숙이라는 여자 어린이들을 장군의 부인이라고 기술한 점에 대한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아니하고 입소문 귀소문 눈소문에 따라 기술했다면 이 또한 《김좌진장군 사후 음해》에 해당된다.
충남 홍성군이 이 같은 역사왜곡•조작과 국민을 기만한 문제를 알면서도 방치•체념하는 것은 역시 《김좌진장군 사후 음해》에 해당된다.■
첫댓글 김좌진장군을 암살한 배후는 홍범도 장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