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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마구치현 기행
최 정 윤
부경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유신의 고장 야마구치>
야마구치현(山口縣)은 일본 혼슈 서남쪽 끝단에 위치하는 유수의 어업지역이다. 일본에서 제일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3면이 바다이나 동북쪽은 온통 산으로 둘러 싸여 지방 이름을 야마구치(山口)라 한 것도 이색적이다. 한반도와 가까이 위치해 있어서 일찍부터 정기항로를 개설해 부산과는 가장 활발한 왕래를 해온 곳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해외여행계획을 가까운 일본의 야마구치현으로 정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야마구치현은 일본의 메이지유신 발상지로, 지난 격동의 시기에 우리에게 많은 폐해를 끼친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 대부분이 이 지방에서 나왔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자가 일본 유신청년들을 길러낸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이다. 그는 야마구치현 하기출신으로 반막(反幕)운동과 밀항죄로 처형되기 직전 옥중 수행록(囚行錄)을 통해 ‘유신 다음에 사무라이가 할 일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이루지 못한 조선 정벌사업을 이어받아 조선을 취하고 청국을 제압하여 천황의 친정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하는 무서운 말을 남겼다. 정한론의 원조격으로, 그의 정한사상은 후에 일본 정한론자들의 사상강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야마가타아리토모는 청일전쟁 때 평양전투를 지휘한 조선군사령관이었으며 일본 2대 총리를 지냈다. 이토히로부미는 을사늑약을 주도하고 일본 초대 총리와 초대 조선통감을 거쳤으나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우에노가오루와 미우라고로는 한말 주한 일본공사로 명성왕후시해사건을 주도했으며, 데라우치마사다케는 2대 조선통감으로 1910년 8월 한일합방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 밖에 현재까지 58명의 일본총리 가운데서 현 아베신조(安倍晉三)를 포함해 9명의 총리가 야마구치 출신이다. 대신급은 그 수가 너무 많아 명단을 다 댈 수 없을 정도다. 더욱이 근세 초기까지도 주인 없는 땅이나 다름없는 야마구치의 건설자가 백제 유민들이었다는 사실도 야마구치 기행을 유혹하는 부분이다.
2016년 11월 23일 오후 6시에 시모노세키행 부관페리 하마유호로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을 출항한지 12시간 만에 시모노세키항이 빛나는 아침햇살로 우리를 맞고 있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동행한 동아대학교 김대원(金大元)교수의 지인 아키모토미찌오(秋本道雄)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다. 1시간 가까이 멀리 떨어져 있는 야마구치시에서 우리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달려왔다고 한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고향친구 같은 온화한 느낌이었다.
1차 목적지로 야마구치현 서북쪽의 옛 성도 하기시(萩市)로 향했다. 일본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 요시다쇼인의 행적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보이는 곳마다 수목이 우거진 푸른 산으로 빼어난 조망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하기는 죠수번의 번주 모리(毛利)의 영지였으며 죠수번이 수도로 삼은 곳이다. 모리 이전에는 백제유민 오우치씨(大內氏)가 이곳 영주로 200여 년간을 다스렸다. 당시의 고성과 촌락이 그대로 남아 있고, 시의 전면에 하기항이 위치하며 서쪽에는 조망이 뛰어난 카사야먀국정공원이 있다. 주산업은 농업과 수산업이나 전통 공예품 생산으로도 유명하다.
자동차가 멈춰선 곳은 노송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공원이었다. 여기가 바로 일본의 역사를 바꿔놓은 유명한 요시다쇼인의 유적지다. 1만여 평의 넓은 공원 입구 양쪽에 세운 ‘유신의 고장 야마구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이라고 쓴 입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입구 우측에 서있는 신사 정문 토리이(鳥居)를 가로지른 요코기(횡목)가 꺼멓게 변색된 하기신사가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좌측에는 쇼인의 기념관과 영상체험장이 있고, 안쪽에 요시다쇼인이 이토히로부미 등 학동을 가르쳤다는 쇼카손쥬쿠(松下村塾)학숙이 자리해 있다.
쇼인의 부친 스기가(杉家)가의 마굿간을 □자형으로 개조해 만든 서당으로, 건물구조는 숙장(塾長)이 거처하는 독실과 강당, 공동침실, 취사실을 기본으로 좌우에 긴 툇마루를 두어 출입과 휴식이 자유롭도록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도산서원과 비교하면 지극히 왜소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작은 서당에서 근대 초기 일본의 유수한 지도자들이 대거 배출되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요시다쇼인은 1830년에 하기의 하급무사 스기가의 2남으로 태어나 요시다 가문(吉田家門)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름도 처음의 스기다이지로(杉大次郞)에서 요시다쇼인(吉田松陰)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영특해 15세 나이에 이미 쇼가손쥬쿠의 숙장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숙생 수가 많을 때는 근 80여 명에 달한 적도 있었는데, 대개는 그의 친구나 다름없는 나이 또래였다. 쇼인은 이들에게 명륜관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산수, 경제, 정치, 역사, 지리까지 다양한 지식을 논했다. 도쿠가와막부의 봉건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천황을 옹립해 일본을 근대국가로 건설해야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또 틈만 나면 ‘초분굴기대화혼(草奔崛起大和魂)’이라는 글귀로 일본인의 단결을 외쳤다. 대화란 일본 고대국가의 이름이며, 대화혼은 일본 고유의 민족정신 ‘야마토다마시이’를 뜻한다.
그와 뜻을 같이한 지사들이 토막죄(討幕罪)로 모두 옥사하고 쇼인마져 탈번죄와 미국군함에 무단 침입한 죄로 강호감옥에서 처형되자 죠수번 청년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때 쇼인의 나이는 30세였으며 세 번이나 감옥을 갔다 온 뒤였다. 드디어 죠슈번은 사쓰마번과 연합하여 막부 타도와 개국을 외치면서 교토를 거쳐 에도막부로 진격했다. 일종의 쿠데타였던 것이다.
동맹군은 1867년 1월 15세의 어린 메이지(明治)를 새 천황으로 옹립하고, 이듬해 9월 메이지정부 수립과 함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시작으로 일본은 약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 무렵 우리는 서구열강으로부터 끊임없는 개항요청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수구파들의 안일한 정세 안목으로 개항과 근대국가 수립이 10년에서 20년 가까이 뒤처지고 말았다.
야마구치현은 그 뒤로도 많은 정치인들을 배출해 일본 정계를 주름잡았다. 현재 야마구치시 안에 서있는 이토히로부미 기념관, 기토다카요시 신사, 우에노고로의 동상, 다카수기신사쿠 사적지는 야마구치가 일본 유신의 본고장임을 증명하는 유적들이다.
야마구치시 카스가죠(春日町)에 위치하는 야마구치현립박물관 전시실에는 메이지유신시대의 다양한 역사가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요시다쇼인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 쇼인의 문하생들과 유신에 앞장선 수 십 명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사진이 내걸려 있고, 허리에 긴 칼을 찬 일본 무사복의 사무라이(侍) 모습과 말을 타고 달리는 기병대의 돌격그림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대부분이 정한파들이며 조선침략에 앞장선 자들이다. 일본인 관람객들은 감탄의 눈으로 진지하게 보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냉정한 인내심이 있어야만 제대로 관람할 수 있다.
<야마구치와 백제유민>
야마구치에 한반도 도래인의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세기 중엽 나당연합군에 패한 백제군 일단이 야마구치현 남부 해안 소오섬(周防島)으로 건너왔다. 백제 제26대 성왕(聖王)의 태자 임성(琳聖)이 이끈 백제 관료들이었다. 7세기 말 백제는 백강전투(白江戰鬪)에서 또다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크게 패하자 이번에는 2천여 명의 백제왕족과 지식인들이 백제부흥을 꿈꾸고 도래해 합류하였다. 더러는 규수지방으로 흩어져 그곳에서 백제문화를 꽃피우면서 귀화인으로 살아갔다. 백강(白江)은 지금의 충남 부여에 있는 백마강의 옛 이름이다.
세토내해 입구의 왜구 본거지 카미노세키(上關) 일대를 평정해 조명무역으로 기반을 쌓은 백제 유민들은 세토내해의 해상교통과 교토로 통하는 물류루트를 개척하고, 2천 여척의 오우치선(大內船:백제선)으로 아카마세끼와 북구주를 연결하는 칸몬해협의 제해권까지 장악하였다.
백제 유민 임성의 후예들은 14세기 무렵에 오우치히로유키(大內弘幸)를 1대 가독(家督)으로 하는 오우치가(大內家)의 가명을 얻고 거점을 지금의 야마구치시로 옮겨 이곳에 오우치촌을 건설하였다. 유민역사 수 세기만에 이룬 성취로, 당시에 일본에서 가명(家名)을 갖는 자체로써 일본 무가사회의 화족반열에 진입하는 것이 되었다. 2대 가독 오우치히로요(大內弘世)대에 와서는 야마구치를 교토에 상응하는 서경(西京)이라 이름 짓고 근세 야마구치의 도시설계에까지 착수하여 야마구치 영주로 군림했다.
14세기에서 16세기 말에 이르는 무로마치 시대 약 2세기 동안 오우치가(大內家)는 야마구치와 나가토, 이즈모, 시모노세끼, 스호, 이와미(石見)까지 아우르는 쥬고구 대명으로 활약했다. 무로마치정권의 절대적 신임아래 교토와도 활발하게 교류해 나간 야마구치에서는 가장 유력한 씨족으로 성장한 것이다. 현 야마구치대학 오카와쿠니하루(小川國治)교수는 이러한 백제인의 활약을 더 상세히 설명해 주어서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본속의 백제문화에 관해 새로운 주목을 끌게 했다.
야마구치시내에 남아 있는 백제인의 유적들이 당시 오우치가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현 야마구치시 오오마치(大町)다. 이 지명은 야마구치시 동북에서 남서로 흐르는 이치노사카가와 강변에 위치했던 과거의 오오우치촌(大內村)에서 유래한다. 오우치가의 위업을 알리기 위해 모리번주가 세운 켄코미치의 웅장한 오우치칸(大內館)과 오우치가 3대 가독 오우치요시히로(大內義弘)의 추모관 코우류지(興隆寺)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백제식 사찰 용복사(龍福寺)에는 제6대 가독 오우치요시타가(大內義隆)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으며, 켄코미치 인근의 사비에르공원은 16세기에 오우치요시타가의 도움으로 야마구치에 머문 유럽 최초의 포교자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신부의 기념공원이다.
야마구치시 북쪽 이즈모의 쿠마노신사(熊野神社)는 백제 귀화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이 신사에는 지금도 조선의 문화가 농후하게 남아있다. 신사명칭 쿠마노(熊野)는 백제 왕도 웅진(熊津)에서 따온 것이라는데, 웅진은 백제의 옛 도읍지로 현재의 충남 공주를 가리킨다.
야마구치의 유력 씨족 오우치가는 7대 가독 오우치요시나카(大內義長)의 야마구치 대명을 끝으로 약 200년 역사의 종말을 고했다. 씨족 간에 알력이 생기고 수성의 열정마저 식어갔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은 야마구치 대명 모리(毛利)는 원래 오우치가의 가신이었는데, 전국시대에 토요토미히데요시의 노선을 따르면서 오우치가와 대립하게 되고 끝내는 16세기 말(1591) 오우치가의 몰락을 초래했다. 선조 24년 임진왜란 직전의 일이었다.
일본의 유명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일본의 조선문화를 논하는 자리에서 ‘야마구치현이야말로 조선인의 혈맥이 가장 응축된 지역이며 지금의 야마구치인 다수는 조선인의 피를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의 먼 조상 한 계열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라는 주장을 편 적이 있다. 그의 책 「일본속의 조선문화(1998)」 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행은 필연적으로 역사탐방으로 이어진다. 이번 야마구치 기행은 일본속의 백제인 역사와 아직도 그곳에 선연히 남아 있는 도래인들의 발자취를 실감한 여행이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야마구치대학 방문>
야마구치대학 방문에 앞서 아키모토씨는 자신의 집을 먼저 안내해 줬다. 간단히 만난 인연인데 특별한 배려이다. 일본의 주택양식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시 외곽 야트막한 산 아래에 넓게 조성된 일본식 주택단지 안 한 쪽에 그의 집이 자리해 있었다. 약 100여 평의 대지 위에 벽돌기와집으로 지은 아담한 단층주택이었다. 마당은 자동차 2대의 주차장과 작은 텃밭으로 쓰고 있었다. 실내 구조는 거실과 3개의 방이 있고 거실과 연결해 다다미(疊)4조 크기의 돗자리방 하나를 별도로 만들어 두고 있었는데, 이곳은 접객과 가신(家神)을 모시는 겸용 방으로 쓴다고 한다. 아끼모토씨 집은 천주교 신자라서 별도의 가신은 모시지 않으나 작은 십자가에 묵주를 걸어 둔 돗자리 방위의 낮은 카미다나(神柵) 아래에 촛불을 밝혀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다른 집들은 누구나 반드시 가신을 모시며 그 방은 대개 돗자리로 만든 다다미방으로 꾸민다고 한다. 우리처럼 조상제사를 열심히 지내는 것은 아니지만, 집을 들어서면 가족 누구든 가신에 인사하고 특별한 날에는 보다 경건하게 앉아 그들의 조상인 가신에 감사와 축원을 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신(迷信)같은 이러한 종교의식이 일본인들의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고유의 민족신앙으로 깊이 뿌리박고 있는 힘이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국화와 칼」의 저자 루즈베네딕트는 그 힘의 원천을 가정은 물론, 국가와 사회, 심지어 회사에 대해서까지 감사하는 일본인들의 보은의식(報恩意識)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보은의식의 실천수단으로 생겨난 것이 일본의 카미사마(神様)문화라고 하는 의미 있는 관찰결과를 내 놓았다.
실내의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전체가 페인트로 칠해져 있거나 온통 벽지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정과 기둥, 벽의 도리, 창틀과 같은 것은 모두 삼나무(杉木)자재로 마감하여 자연미를 한층 살리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였다. 심지어 목욕탕의 욕조마저 두꺼운 삼나무통으로 설치해 둔 것이 눈에 띄었다. 일본인들의 삼나무 사랑은 우리의 소나무 사랑 못지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들과 집들의 경계를 이루는 골목은 넓은 편은 아니지만 반듯하게 나있고 길옆에는 갖가지 화초나 키가 낮은 나무로 가꾸어진 화단을 조성해 놓았으며 자동차를 골목에 세워두는 집은 아예 볼 수가 없었다. 담장을 높이치고 큰 대문을 세워 웅장해 보이도록 한 호화 주택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키모토씨의 마을을 나와 야마구치현 유일의 국립대학 야마구치대학(山口大學)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의 동북쪽에 위치한 산 준령을 배경으로 수십 개동의 고풍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입구의 넓은 광장은 전체가 자동차와 수백 대의 자전거 주차장으로 조성해 놓고 있었다. 교문도 없으며 담도 둘러쳐 있지 않아 마치 서구의 대학촌을 보는 듯했다.
대학 본관으로 보이는 5층 석조건물 전면 벽에 내건 「야마구치대학 112주년 기념」이라는 현수막이 이 대학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연혁을 살펴보니 1905년에 출발한 야마구치고등상업(山口高等商業)이 전신이며, 1949년에 야마구치대학(山口大學)으로 개편되었다고 적혀 있다. 당시 일본의 고등상업, 고등농업, 고등수산과 같은 학교는 다 5년제 중학졸업 이상이라야만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야마구치대학의 뿌리를 야마구치고등상업에 두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만큼 대학의 역사도 깊을 수밖에 없다.
교정 맨 뒤편에 위치한 벽돌 건물이 유학생을 위한 국제교류회관이다. 이 건물 3층에 방 하나를 제공받아 1년간 유학생활을 했다고 김교수는 20년 전 당시를 회고했다. 이틀간 우리 일행을 성의껏 안내하고 있는 아끼모토(秋本)씨는 그때 김 교수와 친분을 쌓은 관계이다.
대학의 상징은 도서관이다. 수십 만 권의 장서와 희귀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야마구치대학 중앙도서관에 들러 장서목록을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그 결과 한말에서 일제강점기 말까지 40여 년간 부산에서 영업활동을 한 「부산수산주식회사 영업보고서」수 십 점이 이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회사는 일본인 자본으로 해방과 함께 철수하면서 중요자료 전부를 자국으로 반출했던 것이다. 무척 찾고 있던 자료의 소재를 여행지에서 알아낸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대학 측과 자료협조를 약속받고 동행한 아끼모토씨도 적극 협력하겠다는 고마운 말을 전하므로 여행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야마구치시내 유다(湯田)온천에서의 일박은 때마침 노객에게 여행의 피로를 잠시 잊게 했다. 김교수는 야마구치대학 유학시절에 이따금 들린 적이 있었다는 「스낵바 브릭」을 요행히 찾았다. 옛 기억을 더듬어 김교수가 열심히 설명하자 60대로 보이는 바(bar)의 여주인 텐마슌코(天滿淳子)씨도 금방 알아차린 듯 반갑게 맞았다. 작은 스낵바에는 이미 몇 명의 일본 손님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우리는 한국식으로 맥주에 일본 소주를 섞어 잔을 부딪쳤다. 묵혀두었던 일본어가 어느새 터져 나왔는지 슌코씨는 “니혼고 스고이”를 연발하면서 연신 우리들의 맥주잔을 채웠다. 여행의 피로를 한꺼번에 풀어주는 유감없는 분위기였다.
소박한 선술집 스타일의 스낵바에서 낯선 손님들과 화면의 노래가사에 맞춰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김교수는 유학시절에 익혔다는 일본가요 「북국의 봄(北國の春)」에 이어 두 곡을 더 열창했으며, 나도 기억해둔 「북의 어장(北の漁場)」일본가요 한곡과 「돌아와요 부산항」한국가요를 원어로 불러 옆 좌석으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했다. 벌써 우리들은 친구같이 어울려 한일 친선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은 어느 때나 불안과 긴장감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이날 저녁 야마구치시 유다온천 스낵바에서의 시간은 모처럼 여행의 낭만을 만끽한 즐거운 한때였다.
<나가토를 지나면서>
자동차는 일본 서해안의 최고 명승지 카사야마국정공원(笠山國定公園)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국립공원을 국정공원으로 부른다. 도중에 추수를 끝낸 논과 밭을 지났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는 보기 어려웠으나 도시 주변부가 쇠락해 보이는 것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공원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는 확 트인 수평선과 해안 절경은 환상적인 한 폭의 그림이다. 일본인들은 이 바다를 일본해로 고집하면서 끔찍하게 여기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동해로 표기한다. 아마 수평선 저 너머 끝이 우리의 포항쯤이며 독도는 그 위쯤에 위치할 것이다. 같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웃나라라 하지만 국가의 이익 앞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것이 해양경계이다.
차는 다시 수백만 평의 산등성이 전체가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아끼요시다이(秋吉台) 정상에 멈춰 섰다. 몇 개의 산등성이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일렁거리는 가을의 언덕을 지나 그 옛날 고래잡이로 유명한 나가토(長門)로 향했다.
‘경(鯨)일두는 칠포의 기쁨’이라는 말이 전해 올 정도로 나가토의 근세 포경은 이 지역 유일의 생업이었다. 칠포(七浦)란 나가토 해안의 어촌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나가토 해안 가요이우라(通浦)에는 포경역사자료관과 오래된 고래 무덤이 몇 개나 보존되어 있었고, 일본 최대의 근대 포경기업 ‘동양포경(주)’의 발상지가 여기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나가토 수호대명을 지낸 백제유민 오우치가의 역사가 있었으며, 백제 석공의 기술로 축조했다는 약8km의 조선식 긴 산성이 해안 방벽이 되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성이 바로 야마구치의 역사에서 말하는 나가토성이다.
나가토를 지나면서 놓칠 수 없는 곳의 하나가 센자키역(仙崎駅) ‘가네코의 길’이다. 길 곳곳이 나가토의 작은 어촌마을 센자키에서 태어나 짧은 생을 살다간 여류시인 가네코미스즈(金子みすず; 1903~1930)의 추억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에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와 같이 살다가 시모노세키로 나가 어느 서점에서 일하면서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해 죽기 전까지 시와 동요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 후 불과 3년 만에 남편의 학대와 고통에 못 이겨 그녀는 어린 딸을 남겨둔 채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음독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가네코기념관에서는 이러한 가네코의 일생이 영상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500여 편의 시를 남긴 그녀의 시작노트가 일본의 한 아동문학가에 의해 발견된 것은 그녀의 사후 40여 년이 지난 뒤였다. 현재 센자키의 가네코기념관 관장으로 있는 야나기세츠오(矢崎節夫)씨가 그 주인공이다. 죽음과 함께 묻혀졌던 그녀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자 초중등학교 교과서에는 가네코의 시가 소개되고 그녀의 드라마틱한 생애가 TV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면서 요절한 가네코의 삶이 새삼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문학에 이해력이 낮은 일행은 건성으로 지나쳤지만, 멀리 교토와 도쿄, 오사카로부터 자녀들의 손을 잡고 온 관광객들의 물결은 감동적이었다. 안내인의 말로는 나가토의 센자키어촌은 온천과 식당, 민박, 특산품가게까지 온통 ‘가네코의 길’로 언제나 붐빈다고 한다. 모두 요절한 여류동요작가 가네코미스즈 때문이다.
지역 경제를 반드시 생산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문화와 관광과 산업을 서로 융합하면 그 자체가 바로 경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옮겼다.
<칸몬해협(關門海峽)>
야마구치 기행 마지막 날 아침 다시 시모노세키로 나왔다. 신야마구치역에서 아키모토씨의 전송을 받고 출발한 열차가 시모노세키역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기타규수국제대학 원도길(元道吉) 교수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그는 한국외국어대학 일문학과 출신으로 주일한국대사관 근무를 거쳐 이 대학 한국어 교수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임 후에는 아예 기타규수 고쿠라에서 영구체류 중이라 한다. 김교수와는 기타규수국제대학 교환교수로 왔을 때 친분을 쌓은 분이다.
첫 인상에서 벌써 인텔렉츄얼한 면모에 신뢰가 갔다. 무엇보다 우리말로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가 맨 먼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일청강화기념관이었다. 한말 한․중․일 삼국의 운명을 갈라놓은 청국의 전권대사 이홍장(李鴻章)과 일본 전권공사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좌해 시모노세키조약을 이뤄낸 곳이다. 시모노세키항을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에 일본식 3층 붉은 벽돌집과 그 옆 서향의 검은 단층 기와집이 자리해 있었다. 이 기와집이 바로 1895년 4월 17일 청일 양국의 대표가 마주해 역사적인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한 춘범루(春帆樓)이다. 옛날 시모노세키항에서 여관을 겸한 가장 화려한 요정이었던 이 춘범루에 당시 이홍장이 머물렀던 것이다.
건물 앞에는 「사적 춘범루 일청구화담판장」이라 새긴 석비가 놓여 있다. 우리는 청일전쟁으로 쓰지만 일본은 일청전쟁으로 쓰는 것 까지는 좋았으나, 조약체결 장소를 보통 쓰는 강화장소(講和場所)라 하지 않고 굳이 ‘구화담판장(媾和談判場)’이라 한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다.
천하무적 북양함대를 창설한 대국의 정객 이홍장이 왜국의 땅에 불려와 강화조약에 도장을 찍어야 했던 그의 심정이 오죽했으면 담판장을 몰래 빠져나와 춘범루 언덕길을 혼자 서성대다가 일본 낭인에 습격까지 당했단 말인가. 춘범루 언덕바지에 서 있는 ‘이홍장의 길’이라는 푯말에서 그때의 긴박한 청일간의 기 싸움이 상상되고도 남았다.
모두 7개 항으로 된 시모노세키조약은 첫째, 일청양국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것과, 둘째 청국은 요동반도와 대만, 그리고 팽호제도를 일본에 할양한다는 것, 셋째 청국은 전쟁배상금으로 2억 냥(일화 약 3억원) 상당을 일본에 지불한다’는 이 세 개 내용이 주요골자였다. 팽호제도(澎湖諸島)는 중국대륙을 사이에 둔 대만해협의 27개 섬을 가리킨다. 이 조약 체결로 대륙진출에 패권을 잡은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는 우리의 주권을 빼앗은 을사보호조약, 일명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과 치욕적인 한일합방으로까지 이어졌다.
일청강화기념관 바로 위쪽에는 시모노세키의 지방 신사 아카마신궁(赤間神宮)이 항구의 파수꾼처럼 우뚝 서 있고, 신궁 마당에는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 해군이 대국 러시아 함대를 향해 날렸다는 포탄 2개가 보물처럼 모셔져 있다.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뜻으로 읽혀진다. 조선시대에 이 신궁은 우리 통신사 일행이 묵은 인접사(引接寺)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옛 이름은 단노우라(壇浦)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안토쿠천황의 어린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아미타사(阿彌陀寺)란 절이었는데, 메이지시대에 와서 지금의 신궁으로 개조해 받들고 있는 것이다. 구름다리로 연결된 길을 따라 오르면 적색 단청의 유서 깊은 아카마신궁을 맞이하는데, 경내에는 벌써 신년의 행운을 비는 참배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원도길 선생은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항구의 광장 서쪽 끝 부분이 400년 전 조선통신사들이 내린 아카마세키선창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하므로 곧장 택시를 불러 달려갔다. 다시 광장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 일본의 수산물 30% 가까이가 집하된다는 시모노세키의 관광명소 가라토시장(唐戶市場)과 시모노세키 또 하나의 관광명물인 세계 최대의 복어동상까지 관람했다. 복어가 시어(市魚)로까지 지정될 정도로 유명한 이유를 알 것 같다.
페리호의 출항 시간이 아직 남아 있어서 마지막 코스로 시모노세키항 인근의 히노야마(火の山) 정상 전망대를 조망하기로 하였다. 택시로 약 20여 분 거리의 이 산은 해발 약 300여 미터 높이로 가을이 되면 산 전체가 온통 노을처럼 불타 칸몬해협을 물들인다 하여 ‘불타는 산’으로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정상에는 꽤 큰 원형건물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3층의 회전식당 자체도 전망대 구실을 하고 있었다. 원형을 그리면서 좌석 전체가 빙빙 도는 식탁에 앉자, 눈 아래로 펼쳐지는 사모노세키항과 칸몬해협이 전체로 시야에 들어왔다. 지도와 대조해 보니 멀리 보이는 전면 바다 저쪽이 규슈의 후쿠오카현이라는 것을 알겠고, 해협의 동쪽 기점이 죠후항(長府港)이며 더 동쪽으로 나아가면 세토나이카로 이어진다. 해협의 서쪽 기점은 요시미의 히비키탄(響灘)까지 연결되는데, 그 북쪽은 우리의 동해이다.
칸몬해협의 거센 물줄기가 도도히 흐르고 그 위로 칸몬교가 가로 질러 놓여있다. 칸몬교 아래 바다 밑에는 혼슈와 규슈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이 관통한다. 시모노세키항은 일본의 내해와 오대양으로 통하는 그야말로 전략적 요충지면서 국제적 관문이다. 그 옛날 부산을 출발해 일본으로 들어온 조선통신사들은 위험한 목선으로 이 해협을 건넜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징용과 징병에 내몰린 조선의 청년들이 고국땅을 되돌아보면서 수없이 눈물을 뿌린 곳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다투어 귀국선에 오른 곳도 이 해협이었다. 빠른 것은 해협의 거센 물결뿐만이 아니다. 숨 가쁜 역사의 소용돌이가 이 해협을 통과한 것이다.
나는 지금 시모노세키의 주산 히노야마 정상에 올라 수많은 조선인의 한을 뿌린 칸몬해협과 그 옆으로 거대하게 성장한 해협의 도시 시모노세키항을 내려다보고 있다. 무심하게 흐르는 이 해협을 페리는 매일 평화롭게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면서 많은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있지만, 만감을 떨칠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다. 앞으로 이 해협의 뱃길이 더 넓고 더욱 평화롭게 이어지기를 바랄뿐이다.
<부관페리 선상에서>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여객선 페리호는 매일 같은 시간에 두 곳에서 한 차례씩 뜬다. 오후 6시 40분에 출항하면 다음날 아침 8시가 양쪽 항구의 입항 수속시간이다. 두 항구 사이의 바닷길 거리는 300여km에 지나지 않지만 총 항해시간은 무려 12시간 가까이 걸린다. 이처럼 긴 항해시간을 요하는 것은 숙식을 겸한 여객 선박이므로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크루저형으로 운영되는 때문일 것이다.
500여 명의 승객이 탈 수 있는 16,000톤 크기의 초대형 여객선 부관페리는 선명이 '성희(SEONG HEE)호'이며, 관부페리의 선명은 '하마유(HAMAYU)호'이다.
선내에는 매점과 대형식당, 컴퓨터게임실, 노래방과 대형 휴게실, 공동샤워실을 갖추고 있고, 숙박선실은 1등실과 2등실로 구분해 2층과 3층에 배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승객은 한국인이며,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은 극소수다.
마침 돌아오는 부관페리 성희호 선상에서는 부산항 140년을 기념하는 부산본부세관의 ‘현해탄 한․일여객 112년 자료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1905년 최초로 개통한 관부연락선 이키마루(壹岐丸)에서 해방 후 마지막까지 취항한 공고마루(金剛丸)까지 모든 정기여객선의 선명과 배의 크기, 취항기간, 승객 정원수 등이 상세히 나와 있다. 지금은 이 여객선 이름을 부관페리 또는 관부페리로 부르지만, 일제시대에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이 공식이름이었다.
최초의 관부연락선 이키마루에 이어 다음으로 취향한 것이 쓰시마마루(對馬島丸)와 사쓰마마루(蕯摩丸)였는데, 셋 다 현해탄에 붙어 있는 일본의 섬 이름이었다. 그 뒤의 선명은 고려환, 신라환, 경복환, 덕수환, 창경환 등으로 조선의 왕조명과 궁궐의 명칭을 붙였다. 그러나 만주 사변이후부터는 곤륜환, 천산환, 흥안환 등으로 만주와 중국 변방의 거산(巨山)에서 배의 이름을 따온 것이 주목된다. 제국주의 일본은 관부연락선의 명칭까지도 단순하게 생각지 않고 그들의 식민지개척과 대륙진출을 염두에 두고 정했던 것이다.
관부연락선은 한국 근대사에 차지하는 의미도 적지 않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애환에 얽힌 사연도 많았다. 일본인들은 승선권만으로 얼마든지 여행이 가능했으나 조선인들은 승선권 외에 도항증을 별도로 지참해야만 했고, 도항증이 있어도 일본 사복형사들로부터 수시로 감시와 갖가지 수색을 당하므로 여행에 제약이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성악가 윤심덕(尹心德, 1897~1927)과 동경 유학생 김우진(金祐鎭)이 비련에 몸부림치다가 현해탄 거센 물결에 몸을 던진 충격적인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은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선상에서 일어났는데, 투신 시점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 8월 4일 새벽 4시경 도쿠주마루가 쓰시마 앞을 지날 무렵이었다. 캄캄한 밤 선상에서 일어난 두 연인의 비극적인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에 곧바로 타전되어 동경 유학생들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사회적으로도 큰 화제꺼리가 되었다.
당시 윤심덕은 경성여고 출신으로 총독부 관비 유학생시험에 합격해 일본 도쿄음악학교에 유학 중이었으며, 김우진은 명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나온 전남 목포의 부잣집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였으나 김우진은 이미 고향에 처자를 둔 몸이었으므로 극진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사람의 운명은 비련의 정사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윤심덕이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노래가 「사의 찬미」로, 당시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 사진 아래에는 이 노래가사가 적혀있었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어데냐 / 슬쓸한 세상 허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 행복한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어리석음」
그녀가 죽은 후 이 노래는 축음기에 실려 곧 전국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으며,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애수에 찬 노래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당시 식민지 청년들의 울분을 토로한 노래였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윤심덕이 연인과의 마지막 이별을 각오하고 남긴 죽음의 찬미가 아니었던 가 연상되기도 하는 것이다.
선상 3층 복도에서는 해방을 맞이해 귀국 동포들이 마지막 귀국선 공고마루(金剛丸)를 타고 시모노세키항을 떠나는 극적인 장면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가수 남인수(南仁樹)가 불렀다는 「귀국선」‘돌아오네 돌아오네 / 고국산천 찾아서 /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깃발을 / …’로 이어지는 노래 가사도 함께 실려 있어 감회가 새로웠다.
페리는 어느덧 쓰시마 옆을 지나 대한해협 안으로 들어선 듯 어슴푸레 먼동이 트고 있었다. 김교수와 나는 벌써부터 뱃전에 나와 이번 야마구치현 기행에 관한 소감을 나누면서 페리호의 부산항 입항을 고대하고 있었다. 3박 4일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나름대로 의미 있는 해외여행이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성악가 윤심덕과 그의 연인 김우진이 1927년 8월 4일 새벽 현해탄에
몸을 던진 당시의 3,600톤급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의 모습
1895년 4월 17일 청국의 李鴻章과 일본의 伊藤博文이 대좌해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한 장소 春凡樓(시모노세키)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요시다쇼인 유적공원에
서있는 明治維新胎動記念碑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요시다쇼인
유적공원에 위치한 松下村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