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6] 고려 말, 정도전과 이성계
정치 낭인 정도전은 함흥에 있는 군부대를 이끌고 있는 이성계를 만나러 간다. 신진사대부 세력과 무장 세력의 만남이었다. 사상과 무력이 손을 맞잡은 날이었다. 정도전은 용비어천가에 소개된 시에서 소나무를 이성계에 비유하고 소나무에 써놓는다. 이것은 조선 건국을 모의한 것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사력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부패한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한 것으로 추정된다. 새 왕조 개창을 모의한 것으로는 보기 힘들다. 당시 정도전은 고려 말 공민왕 때 중앙 정계에 진출했었는데 우왕이 즉위하고 보수 친원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이 정책을 반대하다 유배를 당하고 정계에 복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도전은 왜 이성계를 선택했을까? 이성계는 군사력이 매우 강했다. 외적들의 침입으로 무장들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중 이성계와 최영이 가장 돋보였다. 이 때 정도전은 42살이었고 이성계는 49살이었고 최영은 68세였다. 젊은 이성계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이성계보다 최영이 더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검소한 삶을 살았던 위인이다. 개인적인 청렴과 사회적인 역할이 다를 수 있다. 최영ㅇ느 기득권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성계는 기득권 세력과 연결고리가 없었다. 당시 왜구는 1350년 이후의 왜구는 정규군 수준이었다. 그들은 지리산 내륙까지 침략했다. 이런 왜구를 무찌른 이성계는 굉장히 인기가 높았다. 그는 20대부터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나갔다. 홍건적, 나하추, 왜구를 격퇴했다. 나하추는 원나라의 무장이어서 고려에 침입했으나 이성계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성계의 군대는 충성심이 강하고 가문에 예속된 군대고 연대감이 깊었고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이성계를 따라다니는 휘하친병이다. 일종의 사병이다. 그러나 변방 지역 출신이어서 차별 당했다. 정도전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계를 찾아갔다. 함주 막사에서 이성계를 만나고 정도전은 그곳에서 정몽주를 만난다. 이 둘은 동문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이성계를 사이에 두고 대립한다.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정도전을 소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색 문하에서 동문수학이었다. 20대의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개인적인 충고까지 나누는 관계였다. 정도전은 맹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역성혁명을 일으킨다. 당시 성리학이 이색을 통해 고려로 들어온다. 이 때 성리학을 많은 이들이 공부하게 되는데 이 중 정도전과 정몽주도 있었다. 고려의 지식인들도 이색의 제자였다. 이들을 신진사대부라고 부른다. 새로운 사회 정치세력이고 경제적으로 중소시주였다. 고려 후기 지배층을 권문세족이라고 한다. 이들은 많은 권리를 독점한다. 이 때 신진사대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을 이념적으로 묶어줄 사상이 필요했다. 이 사상이 성리학이 된 것이다. 권문세족이 가진 권력을 빼앗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다. 백성들은 자기 토지를 경작해서 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낸다. 그런데 이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강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도한 세금에 못이겨 노비가 되는 것이다. 정도전은 권문세족이 대외정책에 반대하다가 3년동안 유배당한다. 정도전은 백성들을 가르치려고 했으나 그들의 처지를 몰라서 부끄러워했고 후에는 백성들에게 고마워했다. 그래서 백성의 삶을 보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발전시켰다. 정도전의 민본사상에 영향을 준 책이 맹자라는 책이다.
명나라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땅을 차지한다. 이때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한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워 요동정벌을 반대하고 최영은 요동정벌을 찬성하여 결국 강행된다. 그러나 장마와 전염병으로 위화도에서 멈추었던 이성계의 군대는 위화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회군한다. 결국 최영을 몰아내고 실권자로 등장한다. 원래 원나라는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지배하다. 그런데 공민왕 때 다시 차지한다. 그리고 명이 철령 이북 땅을 요구한다. 그리고 분노한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로 맞대응한다. 요동 정벌을 하면 명과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최영이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을 맡긴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우왕은 최영이 요동으로 간다고 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이성계의 4불가론 중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하느냐 라는 이유를 들어서 이성계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벌인다고 말한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야망보다는 절박함에 있었다. 위화도회군 때 정도전은 지방관직에 있었다. 정도전이 위화도회군에 관여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정도 교감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도전은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조준은 사헌부대사헌이 된다. 성균관은 성리학자들의 중심이었고 사헌부는 사법기관이었다. 권문세족들의 부패를 처벌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 결국 이성계의 힘이 더 강해졌다.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아들이라고 하여 폐가입진한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울 때 공을 세운 9공신 중 이성계와 정몽주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정몽주도 이성계와 정도전은 같은 정치행보를 걸어갔다. 당시에 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 조차 없었다. 정도전은 토지 개혁안을 주장했으나 조준의 절충안이 채택된다. 고려의 불교 사원들은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가졌다. 이것을 기반으로 권력화를 하고 비대화해졌다. 신진사대부들이 개혁에 만족하고 있을 때 정도전은 성리학자의 자세를 내세워 불교를 배척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주장했다. 정몽주는 고려왕조의 틀 안에서 개혁을 추진하자는 입장이었고 정도전은 왕조에 대한 충성보다 민본주의의 실현을 요구했다. 결국 이 둘의 사이는 각자의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충돌한다. 정몽주는 이성계파와 대립한다. 이성계의 낙마사건이 발생한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파를 공격하고 정도전도 이 때 유배를 간다. 불안해진 이성계파의 이방원은 문병 온 정몽주를 살해한다. 이 때 하여가와 단심가가 나온다. 그리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된다. 정도전은 총재 중심의 정치를 꿈꿨다. 경국대전은 정도전의 사상이 바탕을 두고 있다. 고려는 소수의 귀족중심의 사회이고 조선은 더 넓은 사대부 중심의 사회이다. 도한 고려는 대지주 중심이고 조선은 중소지주 중심이다. 백성들에게는 조선이 고려에 비해 열린사회였다. 발전적인 국가였던 것이다. 이성계와 정도전 두 사람이 있었기에 조선 건국이 가능했다.
이성계와 정도전
이성계가 몸이라면 정도전은 머리가 되었고, 이성계가 칼과 방패를 쥐고 있었다면 정도전은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감상문
고려 말, 부패한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조선을 건국했던 이성계와 정도전의 조선 건국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당시 고려 말은 매우 부패했었다. 불교의 승려들은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이용해 권력을 잡고 비대화해졌다. 그리고 권문세족들은 매우 부패해서 백성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이런 사회를 개혁하고자 조선을 세운 것이 이성계와 정도전이다. 나는 사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일단 이성계는 장군이다. 장군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명령을 거역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은 장군의 본분에 어긋난다고 본다. 또한 당시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워서 요동정벌을 반대했다. 당시는 장마철이었고 전염병이 돌았다. 그런데, 당시 요동은 거의 비어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장마철이고 전염병이 돌아도 끝까지 이성계가 북진했더라면, 우리나라의 영토가 훨씬 넓어졌을 수도 있었다. 만약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모두 이성계에게 돌아간다. 그랬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자신의 절박함에 위화도 회군을 했다. 단지 자신의 절박함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위화도 회군을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