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 59분 부터 6시 09분 까지 항마좌로 2시간 10분 동안 좌-수행을 했다.
'언제'는 시간에 대응하고 '어디'는 공간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문제는 수행자의 여로에 빠질 수 없는 주제이다. 시간이 곧 공간이라는데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이해할 물리학적 지식은 없고 개념적으로 이해해봤자 바뀌는 것이 있을 것 같지 않아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는 오랜 기간 지식의 양적 축적에 집착한 지난 날에 대한 반성 혹은 포기의 결론이다. 대신 이 사지육신을 수단으로 확인하는 방법만이 스스로 의심없이 수용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물론 부처님 가르침에 부합할 것을 전제로.
경전을 읽다보면 참 일관되는 특징이 있는데 가르침이 설해진 시간은 '한때'라고 하며 밝히지 않는데 비해 장소만큼은 늘 명기된다는 점이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등으로 장소를 밝히면서 경이 시작된다. 부처님 말씀은 시간을 초월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가르침이 베풀어진 시기에 따라 가르침의 성숙도?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의도가 있다는 설이 있다. 맞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 직후나 반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설법을 베푸실 때나 불법은 바뀌거나 변하거나 가감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의 경전적 증거는 이미 불교학자를 비롯한 다수의 불자들이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글쓰기가 아니기 때문에 열거는 하지 않으련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최상이고 원만하고 완전한 깨달음이기에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완전한데 더이상 어떻게 성숙한다는 개념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애초에 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것이지. 어쨌든 이런 관점도 충분히 인정하지만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실수행 측면에서의 영감이다.
소리로 전래되던 불법을 문자로 결집한 분들은 그당시 아난다 존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라한이었다고 알고 있다. 이 분들이 동시에 기억하고 있는 가르침을 합송하여 일치하는 내용만 문자로 기록하였다면 해당 가르침이 베풀어진 시기 또한 충분히 확정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기는 기록하지 않고 장소만을 명기했다는 것은 사전에 시간을 기록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거나, 아니면 시간을 신경쓰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여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아라한의 경지라면 이미 시간 개념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짐작이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시간을 상정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힘을 써야 하고 애를 써야 하는 정신활동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괴로움을 가져오는 대상인 시간 개념을 멀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수행에서도 보면 육내외입처, 18계, 6계, 사념처(장소 개념보다는 확립의 개념이 강하지만 사띠 확립의 대상으로써 신수심법은 장소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색계4선에 <머뭄>, 7식주2처,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등 위치와 장소의 뉘앙스를 풍기는 명칭이 많다. 이런 문자적 갖다붙임은 논쟁의 실마리가 되는 경우가 있어 즐기지 않지만 나열해 보았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시간 개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괴롭다. 그래서 대안이 있다면 시간을 버리고 그 대체안을 택하고 싶다. 앞뒤 순서는 있어야 마땅한 것이지만 굳이 타임라인을 쪼개어서 계획하고 그 라인 위에 나를 세우고 진행해 나가는 상정 행위가 머리를 아프게 한다. 수행으로 치면 수행 안에 시간이 들어와야지 시간 안에 수행이 계획의 일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이런 상황에 대한 고민 끝에, 계획 또는 편집 행위는 아주 좁고 공고하고 한계지어진 자아를 선행으로 해서 이루어지므로 당연히 괴로울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타인들 눈에 궤변이나 현실도피자의 자기합리화로 보일 수 있고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들에게조차 꺼내지 않는 부분이다. 결론을 그렇게 내렸다 하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시간 개념을 떠나서 살 수 있는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현실을 생각하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수행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가능하다고 보고 또 맞다고 본다. 나는 시간 개념을 대체할 수 있는 게 장소 개념, 즉 위치 개념이라고 본다. 수행의 체험 중 자꾸 걸리는 것이 공간, 영역, 위치 이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시간 개념에 얽메이는 것 보다 위치 개념으로 전환하여 좌-수행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일상으로도 가져오는 것이 보다 덜 괴롭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위치나 장소나 영역 등의 단어 뜻은 꼭 물질적인 것만을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 글에 썼던 것처럼 비물질적인 것들도 공간을 점유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게 하는 체험이 있었고, 경전에 나오는 '안으로 밖으로 안밖으로' 명상한다는 문구도 꼭 신체의 피부를 경계로 삼을 수 없게 만드는 체험도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례의 공간, 장소, 영역, 위치 개념이 많이 깨져 있는 상태다. 또 수행으로 체험한 '갈애의 흐름'이나 '사띠의 이어짐' 같은 시간적 연속성을 나타내는 듯한 표현도 모두 연기적인 관점에서의 표현이지 시간적 흐름을 상정한 표현은 아니다. 위치가 공간, 영역, 장소 등과도 연관되고 相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표현이 어렵다. 이 주제를 가지고 계속 수행해야 표현이 그나마 순조롭게 가능해질려나.
오늘도 경주지진의 여진인지 전진인지 모를 진동으로 경북/경남의 많은 거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지만 수도권의 거주민들은 체감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극소수의 몇몇이겠지만 즐겨보는 드라마 방영 중 하단에 지진속보 문구 떴다고 방송국에 항의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같은 국가의 영토에 거주하면서도/위치하면서도 공감이 이렇게 어렵다. 그래서 누군가는 타인의 고통은 저 하늘의 은하수보다도 멀다라도 말했나보다. 물리적으로 아무리 가까이 붙어있다 한들 識이 거주하지 않는 위치(영역, 공간, 장소)라면 그 위치 혹은 그 위치을 점유하는 그 무언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지 모른다.
지진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누군가는 혹은 어느 단체는 인종 청소를 위해 큰 자연재해가 들이닥칠 전조이며 미래인류를 위해 일할 준비된 일꾼들 소수만이 살아남아 찬란한 미래를 만들 것이라는 소리를 하는데 이렇게 묻고 싶다. 누구를 위한 청소인가? 일꾼은 무슨 기준으로 뽑나? 죽어가는 중생은 인류가 아닌가? 찬란한 미래는 또 어떤 모습이길래 수많은 생명의 죽음을 대가로 하는가? 모든 생명을 친구로 여기고, 모든 생명 가엽게 여기고, 모든 생명의 기쁨을 같이 기뻐하고,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자비희사(慈悲喜捨) 사무량심이거늘... 너무나도 안타까운 모습이다.
2016.9.21
첫댓글
과거-현재-미래의 선상에서
현재를 ‘지금 여기’로 지칭하고
지금 여기를 산다고
현재를 선택한다면
선택받지 못한 과거와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과거와 미래는 버리고
현재를 택하라는
위로가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왜 현재를,
지금 여기를 택하는 행위가
과거와 미래를 단절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과거가 현재이고
미래 또한 현재인
속시원한 원리는 없을까?
바꾸어 현재가 과거이자 미래이고
미래가 현재이자 과거인 원리는 없는가?
왜 근원적이고 완전한 해결책을 제쳐두고
피상적이고 분절적 해결책을 신봉하는가?
왜 心을 무량하게 넓혀가지 못하고
비좁고 어둡고 찌그러진 곳으로 처박아 놓는가?
하루살이가 100년을 알 수 있는 원리
그것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스스로 한계를 지어두지 말라
최선해가 불가능해 보인다 하여
만족해에 머물러 포기하지 말라
최선해가 불가능하다는 증명은 없다
최선해가 가능하다는 증거는 있다
Buddha!
2018.4.3
사두 사두 사두
좋은 내용 감명깊게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