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자리에서 여럿이
잔을 부딪히고 일제히 마시는 것보다 간섭하지 않고 간섭 받지 않고 알아서 마시게 놔두는 게 훨씬 더 좋다. 체질이
그런지 오래전부터 ‘혼술’을 즐겼다. 전에는 퇴근하여 저녁상차림을 보고 이 반찬은 안주로 더 적합하겠다 싶으면 술을 곁들였다. 요즘은 저녁 식사 삼십분이나 한 시간쯤 전에 가벼운 안주와 함께 한잔 하는 경우가 많다.
술 심부름.
대부분이 소싯적에 많이
겪었으리. 나 역시 빨간 두꺼비 그려진 진로 소주나 백화수복 청주를 사오는 건 무수히 했고, 서울이지만 동네에, 당시에는 밀주였겠지, 막걸리를 파는 곳이 있어 심부름으로 빈 주전자를 들고 가면, 주인
할머니가 땅에 묻은 장독의 뚜껑을 열고 손잡이 달린 플라스틱 바가지로 장독 바닥까지 긁으며 휘휘 저은 후 술을 주전자에 담고 종이를 동그랗게 뭉쳐
주둥이를 막아서 주었고, 그걸 조심조심 집으로 날랐다. 오다가
호기심에 주전자 주둥이에 제 주둥이를 대고 한 모금 빨아먹어본 게 인생의 첫술이었다는 친구들도 꽤 있다.
딸들이 초등학생 때 어느
저녁. 술 생각이 났는데 집에 술이 없었다. 딸아이를 불러
아파트 상가에 있는 가게에서 술을 사오라고 시켰다. 아이의 표정이 어리벙벙했다. 안 해본 것이니 그랬겠지. 좀 더 설명을 해주려던 차에 마눌의 대갈일성이
이단옆차기처럼 귀를 강타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괜히 우물쭈물)얘한테 소주 한 병 사오라고…”
“정신이 있는 거야? 이렇게 캄캄한데(뭐 그렇게 캄캄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하여튼) 여자애한테 술을 사오라고?”
“(여전히 수세에 몰려)난 쟤보다 더 어렸을 때도 다 했던 건데…”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이 시간에 어린
여자애를 내보내!
찍. 깨갱. 납작.
언즉시야言則是也. 말인 즉 옳았다. 어떤 세상인데.
얼마나 흉흉한데. 마눌의 핀잔이 계속될까 얼른 밖으로 나가서 술을 사왔다. 화가 덜 풀린 엄처의 視下에서 마시는 술맛은 참으로 소태였다.
딸아이가 고등학생 때였나
보다. 술을 사오라고 시켰다. 이것이 피식 웃더니 왈,
“아빠, 중고등학생들에게 술 담배 안 팔아요. 팔다 걸리면 큰일 나요.”
윽. 쓰으, 그런가.
틀린 법도가 아니니 속이
쓰렸지만 이해했다. 속절없이 내가 나갔다.
딸내미가 대학생 시절
술 심부름을 시켰다. 흐흐흐 드디어.
<샛강>의 李貞桓 작가가 잘 쓰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데 그러나였다. 좀 지나서 전화가 왔다.
“아빠, 주인아저씨가 저 보고 미성년자 같다면서 주민등록증 보재요. 안 갖고
왔거든요.”
“에휴, 주인 바꿔 봐. 내가 이야기하마.”
“(조금 있더니)통화 안 하시겠대요. 고등학생들이 와서 늘 이러면서 남자친구 바꿔준대요. 안될 거 같아요, 아빠.”
으아, 환장하겠네. 머리 위로 뜨거운 김을 푹푹 내뿜으며 내가 나갔다. 주인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기에 술을 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후로 딸들이 좀 더
나이가 들었지만, 젊은 여자가 술-그것도 소주나 막걸리-을 사는 게 보기 좋을 리 없으니 더 이상 심부름 시키지 않았다. 수십년
이렇게 ‘질’을 냈으니 조카나 사위가 와도 의례껏 술은 내가
준비한다. 그저 기구하고 박복한 팔자려니 한다.
첫댓글 딸가진 부모의 심경을 조금 알 수 있네요
요즘도 애들이 심부름 하나요? 애들 심부름을 부모가 하던데
그러게 말임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