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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諱, 需 號, 松竹堂 諡文英 忠烈朝文科 版圖佐郞寶文閣大提學 贊理功臣 封晉陽君 墓 忠北淸州 西州面 果桑山卯坐 執義宋來熙撰墓表
7세. 휘, 수 호는 송죽당이요 시호는 문영이다. 고려충렬왕(1274~1308)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도좌랑과 보문각대제학을 지내시고, 찬리공신으로 진양군에 봉해지셨다. 묘는 충청북도 청주시 서주면 과상산 묘좌에 있었으며, 아호가 집의(執義)인 송래희공이 비문을 지으셨다.
甲子(1984)移葬于忠北 淸原郡 南二面 外川里 山三六之一 隱谷後麓 鳳舞山乙坐 享于世德祠 祝曰 文提館學 武輝邊城 全才偉略 卓卓其英 配貞敬夫人 淸州韓氏 公墓合兆 有碑碣.
근래에 청주시 도시계획에 따라 1984년 12월 11일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 산36의 1의 은곡 뒷산인 봉무산을좌에 이장하였다. 진주세덕사에 배향되시니, 상향축문에 이르기를 “학문은 관학을 주도 하셨으며, 무예는 변방의 성에 빛났으니,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재능과 훌륭한 계략은 그 영명하심이 뛰어나셨네.” 라고하다. 배, 정경부인 청주한씨와 합조하고 묘비가 있다.
遠慕齋重建誌舊序(원모재중건지 옛 서문)
後孫之於先墓莫不幸於失傳而莫恔於得傳夫祖先不得享祀子孫之罪耳不幸也
자손이 선영을 실전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 없고 대대로 전하여 지키고 보호하는 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 조상의 제향을 받들지 못하는 것은 자손의 죄일 뿐만 아니라 불행한일이다.
反是則其恔可知已晉陽鄭氏咸祖高麗文英公諱需而其封所寄卽淸州之果桑山也
그와 반대일 경우는 자손의 행복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모든 진주정씨의 조상은 고려조의 문영공 휘 수(需)이며, 그 분의 묘소는 청주 과상산에 소재한다.
世遠失傳 深目無證 不免爲他人之有如 朱制置墓 至我純廟癸亥 因後孫載遇發其誌石 而得復傳焉
수백 년을 실전하고 징표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주자가 장려한 묘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순조계해년에 이르러서 후손재우가 문영공의 묘정에서 지석을 발굴해내므로 인해서 다시 묘를 찾아 후손에게 전하게 되었다.
於是錦谷宋先生 表其墓 諸章甫及公雲仍諸公 各爲酬唱 慨然於顯晦屈身之數者 不啻多矣
이때에 금곡 송 래희 선생께서 묘표문(墓表文)을 지으시고 유림과 후손들이 묘소를 다시 찾게 된 운수를 개탄하는 시문을 화답해 온 것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及後重建齋舍也所和篇什又復如前則遂釐爲一冊名之曰遠慕齋誌
그 후 재실중건 때에도 전번과 같이 송시가 많이 보내져 왔으므로 모두를 한데 묶어서 일책으로 하여 원모재지(遠慕齋誌)라 이름 하였다.
將付諸剞劂氏而昭揭人耳目其視朱子之於制置伐石崇土俾後不迷者果何如哉
앞으로 여러 자료를 모아 책으로 편찬하여 만인이 보도록 한다면, 주자(朱子)가 장려한 제도에 산에는 조상의 묘를 쓰고 비석을 세울 것이며, 또한 재실을 지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서 후일에 자손들이 묘를 잃어버리지 않게 한 제도이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과연 어떠한가!
於虖諸鄭氏之用心亦摯矣向所謂其恔可知者非邪今來問序者益鉉昌植而益鉉嘗爲敎官云
아! 모든 정씨의 마음 씀씀이가 역시 지극하도다! 이른바 그 행복을 바랄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닐는지 이제 나에게 서문을 물어온 사람은 익현, 창식 두 사람이고 익현은 전에 교관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柔兆攝格乾之下浣 通政大夫 奎章閣直閣 德恩 宋龍在 序
단기 4295년(서기1965년)병인 4월. 통정대부 규장각 직각 덕은 송용재 서
遠慕齋重建記
齋於淸州治南二面外川里隱谷之鳳舞山而揭楣曰遠慕者晉州鄭氏之先庵也其先高麗文宗朝寶文閣大提學諱時陽而歷世珪組連綿之文英公尤有大顯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 은곡본무산의 원모재는 진주정씨의 문영공재실이다. 그 선조는 고려문종 때 보문각대제학 휘 시양이시고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으니 그 중에 문영공이 가장 뛰어나셨다.
官至版圖佐郞晉陽府院君贈輸忠協謨佐理功臣寶文閣大提學諡文英公當拯民於左袒盡忠於泰山懿蹟煥赫震耀以基福於匡大無窮而後昆得亨昌盛者有是本而然歟
벼슬이 판도좌랑 봉진양군에 이르셨고 수충협모좌리공신 보문각대제학 시(諡) 문영(文英)에 추증되셨다. 공의 정치적 역량과 선정 또 나라에 공헌한 태산과 같은 충훈공적은 빛나서 크고도 무궁한 그 음복이 후손에게 미쳐서 창성하니 이는 그 근본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公之葬淸州治西果桑山之卯座之坡雙墳矣 噫昭代遷革桑海累變兵燹迭訌墳菴失守子孫之展誠無所故歲一澆酹體魄之藏已絶於數百載而後孫之傷盡可勝言哉
공의 묘소는 청주시 서편 과상산 묘좌에 쌍분으로 모시었는데 나라가 어지럽고 잦은 병난과 정변으로 인해서 분묘를 실전하여 자손들이 첨배할 곳이 없이 되어 수백 년간을 세일제(歲一祭)조차 끊겨왔으니 후손들의 회한을 어찌 말로 다할 것인가!
諺傳謂鄭司諫墓村老樵夫常指點不敢質而未能顯言也純祖三年癸亥秋木川後孫載遇公竭誠採訪幸遂得誌兩壙之間則誌與譜牒若左右契無疑故諸族歡喜顚倒奉護瞻掃之節香火歲伸追慕已而
시골노인이나 나무꾼들이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늘 정사간의 묘라고 지적하였지만 징표가 없어서 들어 내놓고 말하지 못해왔다. 순조3년 계해가을에 목천파 후손 재우공의 정성어린 탐방으로 쌍봉중간에 묻힌 지석을 발굴했는데 보첩과 다름이 없으므로 제족이 기쁨에 달려와서 묘소를 새로 단장하고 비로소 해마다 제사를 지내기에 이르렀다.
翌年甲子春尙黙尙煥尙燮奎淵基範尙煜學釚諸公倡齋建築之議仍鳩財於湖中列郡諸族若干金以內舍四間前後退行廊二間並舂舍始築於斧堂之北今爲一百八十一年也
다음해 갑자년 춘3월에 상묵, 상환, 상섭, 규연, 기범, 상욱, 학구 등 여러분이 재실을 짓자고 나서서 이내 호남 등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 모은 금액으로 내사(內舍) 사간과 행랑이간 및 방앗간을 묘소의 북쪽에 창건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181년 전의 일이다.
爾來經三十九年憲宗八年壬寅春不幸値回綠之變內外齋室灰燼無餘直時買得三間草屋又有高宗十六年庚寅府院君後孫奎祥公自擔移建于墓下等創齋以來七十四年間多事中疊僅守香火之節先人積勞之公豈非可爲大哉
다시 39년 후 헌종8년임인 봄에 우연히 화재를 만나서 재실전체를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다. 즉시 3간 초가집을 사들여 제사를 이어오다가 고종16년에 부원군후손 규상(奎祥)공이 자비로 재실을 묘(墓) 아래로 옮기는 등 창건이후 74년간 어려운 일이 쌓이는 가운데 근근이 제사를 지내왔으니 선인들의 공로가 그 어찌 크다고 아니하리오.
又經三十六年丙寅春新齋功訖卽上宇二間中廳二間下宇一間半前門一間墻垣二十四間以顔曰遠慕齋此是蓋取追遠寓慕之義也
또 36년후 일제치하 병인년에 옛 재실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상우2간 중청2간 하우1간반 담장 24간의 새로운 재실을 건축하고 원모재라 현판을 다니 옛 조상을 생각하고 추모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然齋舍規模狹隘不能容衆員之齊宿之所故每享祀之時有增新築之議而旋發旋寢矣其因卽鳩財之所難澁故也
그러나 재실이 비좁으므로 많은 자손이 해마다 제사를 지낼 적에 잠잘 곳이 좁아서 매년 향사 때 마다 증축 또는 신축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언제나 유야무야로 끝났다. 그 까닭은 자금을 모으는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往在丙辰春湖南居族先發別築於舊齋之南四間而晉州居族連築門樓顔曰悠然門公州淸州兩派圍築墻垣矣
그러던 중 10년전 병진 년에 호남(진양군충장공파)의 종친들이 옛 재실의 남쪽에 4간을 별도로 짓고 또한 진주(익은공파)의 종친들이 중문을 짓고 유연문(悠然門)이라 현판을 걸었으며, 공주, 청주 종친들이 담장을 쌓았다.
不過經九年甲子之歲因淸州市都市計劃從令陰十月十三日(陽十二月六日)遷葬于鳳舞山乙坐原而大人入葬之名穴也此非公之積陰餘慶耶
그 후 9년이 지나서 청주시 도시계획시행령에 따라서 12월6일(음10월13일)에 지금의 봉무산 을좌원에 묘를 이장을 하니 이곳은 대인이 영면하실만한 명당이니 이 아니 공의 적음소치(積陰所致)의 여경이 아니던가!
翌年乙丑三月附移墓碑神道碑新設床石文官石雙石籠竪立事蹟碑而墓庭廣闊約千坪也陰四月二十七日新齋入柱上樑連移築別齋而九月功訖矣
다음해 을축 3월에 묘비와 신도비를 옮기고 상석, 문관석, 쌍용 석등을 신설하고 또한 사적비를 세우니 드넓은 묘역이 약 1000평이다. 음4월27일 새로운 재실을 입주상량(立柱上樑)하고 이어서 병진년에 지은 별재를 이축하여 9월에 완공했다.
陰九月二十八日內外賀客二千雲集國樂奏樂全國時調文英公大賞第一回競唱大會裡盛擧竣工式矣寔是我祖赫赫之靈不昧有所陰騭안정할즐而然也
9월28일 내외하객 2,000명이 운집하여 국악의 은은한 진악이 울리고 일방으로는 전국시조 문영대상 제1회 경창대회가 있는 가운데 성황리에 준공식을 거행했다. 이는 곧 문영공의 혁혁하신 령이 도우신 음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垈地八百二十二坪上宇東西兩室中廳二十二平五勺下宇亦東西兩室中廳十五坪九合六勺卽丙辰所建別齋而中門七坪一合二勺庫直舍十九坪七合三勺厠間一坪三合四勺倉庫十四坪一柱門一楹總八十坪二合墻垣一百二十間中庭植樹花卉一時就新矣瓦甍翼然連接雄姿壯麗矣
대지822평의 중앙에 재실이 세워지고 동서 양편에 동제와 서재가 들어서고 중청을 세웠으니 22평5작이요 아래채 역시 동서양실중청이 15평9홉5작이니 병진년에 건축한 별재를 그대로 옮긴 것이며 중문이 7평1홉2작 고직사 19평7홉3작 화장실 1평3홉4작 창고14평, 일주문등 총80평2홉이다. 담장이 120간에 중앙정원에는 각종수목과 화초를 심어서 일시에 새롭게 단장하니 기와집웅 처마가 새의 깃인 양 아름답게 펼쳐지고 서로 잇달으니 웅장하고 화려하다.
實爲後孫興感瞻慕之所而公之遺風剩馥以俱與此山水而保齋則後之瞻依景仰亦於是而求之奚
실로 후손이 흥감하여 우러러보일 것이며 공께서 끼치신 아름다운 향기가 넘쳐서 이와 같이 좋은 산수를 잦춘 곳에 재실을 이룩하였으니 후손들 역시 이곳을 구하여 선조를 경앙하게 된 것이다.
流派遠于源則不知其源之我始也枝柯遠于根則不知其根之我本也公之世已久遠矣而吾宗得其本仁矣本立而支茂仁得而福應此齋之成亦可風勵慕先裕後之心油然於中矣
흐르는 물은 그 원천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자기의 근원을 모르고 가지와 잎사귀는 그 뿌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근본을 모른다. 공의 재세가 수백 년 전이지만 우리는 그 뿌리를 알게 되었고 효를 알았다. 뿌리가 실하면 가지가 무성하고 효를 다하면 복을 받는다. 이 재실의 성취는 미풍양속을 권장하고 선조를 숭상하며 후손을 돌보는 마음이 유연히 일어나게 할 실마리가 될 것이다.
敎導後進以崇祖敬睦爲本則吾宗之其又將昌大無疑乎傳曰父作之子述之又復繼述以肯構庶乎
후진을 교도함에 숭조경목을 근본으로 할진대 우리종중이 장차 크게 번창할 것은 또한 의심치 않을 것이다. 전(傳)에 말하기를 “아비가 시작하니 아들이 뒤를 잇는다.”라고 하였으니 또다시 뒤 이어서 선사를 아니 하려는가!
又有所務者 前會長憲祥會長代行鍾和總務憲國監督鍾賢其餘卓淵永喜來喜鍾植明淳 諸彦之賢勞於尊祖 何能如斯乎 略綴顚末 如右云 勉旃勉旃
이 일에 고생하신 분은 전임회장 헌상, 회장대행 종화, 총무 헌국, 감독 종현, 기외에 탁연, 영희, 종식, 명순등 여러분의 노고는 오직 존조하는 마음의 발로이니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으리오. 전말을 대강 위와 같이 기술한다. 힘씁시다.
檀紀四三一八年乙丑臘月上澣 二十四世孫福喜謹撰
단기 4318년(서기1985년) 을축 12월 상순 24세손 복희 삼가 씀.
원모재복원기(遠慕齋復元記)
吾晉陽之鄭이 最爲著聞은 自吾文英公始 而其勳德事業이 必輝暎百代언만 無他文獻之足以考稽가 是爲子孫遺恨이요 且當麗季하여 內憂外患이 相繼하고 國家交替라
우리 진양정씨가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문영공으로부터 시작하였으니 그 공훈과 덕업이 만세에 밝게 빛이 났건만 자세하게 기록된 문헌이 없으니 이것이 자손들의 유한이요 고려말에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치고 역성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以是로 子孫이 四散하여 其衣履之藏을 莫省其所하여 寥寥數百年하여 再爲子孫之痛恨傷盡이러니
그래서 이 때문에 자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니 문영공의 묘소를 수호하지 못하여 명성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수백 년을 지내왔으니 이것이 또한 자손들이 통한(痛恨)해 하는 것이다.
何幸純祖癸亥에 後孫載遇公이 博采故老傳說하여 得塋域於淸州果桑山卯坐之原하고 發其誌石於二壙之內하여 讀其標題에 曰諡文英公鄭需之墓配淸州韓氏祔左十九字하고 兩行卯坐右方에 有本晉陽三字添之하여
그러나 다행이도 순조계해년(純祖癸亥年) 서기(1804년)에 후손 재우공이 연로하신 분들의 말씀에 의거하여 청주 과상산 묘좌의 언덕에서 지석 두 개를 발굴하여 그 지문을 읽어보니 시 문영공 정수지묘 배정경부인 청주한씨부좌 19자가 쓰여 있었고 우측에 본진양이라는 세 글자가 더 기록되어 있었다.
與譜諜으로 相應일새 得以開塋封築하여 追遠寓慕를 始得其所하니 此吾子孫이 得姓以來로 莫大之慶이요 而吾文英公의 於昭不寐赫赫之靈이 長存하사 而陰騭所致歟아
그래서 보첩과 대조를 해보니 일치하여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고 옛 조상을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곳이 되니 이것은 우리자손이 득성(得姓) 이래로 큰 경사요 문영공의 영령께서 음덕으로 도우심이 아니겠는가!
抑亦載遇公의 至誠所感遠於九宵하여 而上帝憐以助之하사 使吾子孫으로 得其追遠報本之道者也아 其至誠惻怛을 少有秉彛之性者면 不感動而興起哉아
또한 재우공의 지극한 정성이 저 멀리 하늘도 감동하시고 옥황상제께서 도우셔서 우리자손으로 하여금 옛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를 다 하게 하신 것이니 심성이 성실하고 윤리와 도덕을 조금이라도 숭상하는 자라면 어찌 감동하지 않을 것이며 흥기(興起)하지 않겠는가!
此蘇子所謂 孝悌之心이 油然而生者非此也아
소동파가 말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유연이 생기는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니
自此로 封築塋域하고 翌明年甲子春에 諱 尙黙, 尙煥, 尙燮, 奎淵, 基範, 尙煜, 學(金+求)諸公이 倡齋室建築之論하여 鳩財湖中列郡諸派하여 作內舍四間前後退와 行廊二間하고 並舂家하였다.
이때부터 묘역을 새로 단장하고 다음해 갑자년(서기1804년)봄에 휘, 상묵, 상환, 상섭, 규연, 상욱, 학구등 여러분들이 앞장서서 재실을 지을 것을 논의하여 충청남북도와 여러 고을의 모든 종파들에게 돈을 걷어서 제실4간과 전퇴, 후퇴, 행랑2간, 방앗간을 건축하였다.
斧堂之北에 越一村하여 買入四斗落畓田하고 又明年癸酉에 又買入畓六斗落과 階下田一石十斗落하여 每歲一祀를 恪勤奉行하더니 至乙未分하여 山變이 突起하여 數年訟卞으로 宗錢이 無餘한데다 壬寅春에 火災로 內外齋室과 其他可考遺籍이 灰燼無存하니 嗚呼悲哉라
문영공묘의 북쪽에 한 마을을 건너서 논과 밭을 4마지기 사들이고 또 다음해 계유년(서기1813년)에 논6마지기와 묘아래 에 밭 10마지기를 마련하여 해마다 제사를 근근이 지내왔다. 을미년(서기)에 이르러 종중산 문제로 송사사건이 일어나 종중재산이 탕진되고 임인년 봄에 화재로 재실과 기타 옛일을 고증할만한 문서가 불에 타 없어져 버렸으니 아! 슬프도다!
此何吾宗子孫試鍊之酷이 至於此耶아 又發奮通議于近邑各派하여 癸卯春에 買入數間草屋於失火之傍하여 僅守香火之節이러니 衆議齊發하여 丙寅春에 建上宇二間과 墻垣二十四間하고 遠慕齋之楣額을 自此始矣하다.
이 어찌 우리종중자손들이 격어야 할 혹독한 시련이 이에 이르렀단 말인가! 또다시 분발하여 통문을 가까운 고을과 각파에 보내서 계묘년 봄에 몇 간의 초가집을 옛 재실근처에 매입하여 제사를 모시다가 다시 재실을 짓자는 논의가 일어나 병인년 봄에 위채2간과 담장24간을 건립하고 원모재의 현판을 이때부터 달기 시작했다.
先輩爲先之誠을 何可勝言哉아 其間收議方略은 燕岐 諱觀泳 公州 諱哲喜 諱仁喜요 跋涉鳩財는 鎭岑祖公 諱完植 魯城 諱壹鉉 公州 諱哲喜 雲泉 諱憲柱 茂長 諱會源 益山 諱憲普 高敞 諱明源 公州 諱憲祖요 節財終始竣功者는 舟橋諱昌植이요 監董終始者는 公州 諱載萬 燕岐 諱復泳이요 終始發起者는 諱憲益也라
이글을 쓰기위하여 옛글을 상고하여보니 선배님들께서 조상을 위하여 고생하신 일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오. 그간에 고생하신 분들은 연기에 사시는 휘 관영, 공주의 철희, 인희요. 여러 고을을 순방하여 돈을 걷으신 분은 진잠조공(鎭岑祖公) 휘 완식, 로성 휘 일현, 공주 휘 철희, 운천 휘 헌주, 무장 휘 회원, 익산 휘 헌보, 고창 휘 명원, 공주 휘 헌조요. 재물을 절약하며 착공에서 준공까지 고생하신 분은 주교 창식, 현장감독은 공주 재만, 연기 부영이요 재실건립에 주창자는 휘 헌익이다.
乙酉九月日漢城府入案에 曰 漢城府爲立案成給事 忠淸道文義居鄭氏文永公山所가 在淸州西州內面果桑山인바 而其禁養局內를 四標段으로 하되 東自主山起하여 西至脣前盡處하고 北自白虎脊으로 南至靑龍中脊하여 全一局으로 定境界爲去乎하여 四標內는 勿許入他人入葬을 是遣이며 一草一木도 無敢犯斫함이 宜當者라고 云하였으니
을유년(고종22년 서기1885년) 9월 일 한성부 입안에 말하기를 한성부는 다음과 같이 입안한 문서를 발급해준다. 충청도문의에 거주하는 정씨댁의 선조 문영공산소는 본도(本道)로 청주 서쪽 주내면 과상산에 있는바 그 산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정한다. 동쪽은 주산 봉우리로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묘 앞에 끝나는 곳까지이고 북쪽은 백호등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 이르러 청용 중앙의 등성으로 하여 전체를 한 덩어리로 경계를 정하니 사방표적 내에는 다른 사람의 묘를 쓸 수 없으며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벨 수 없다.
國家之厚腆到此至矣요 子孫之所榮이 莫此爲大矣라 至于丁巳하여 湖南宗中이 自發議하여 新築齋室하였고 繼而晉州宗中이 自擔하여 建立廡門하고 額名曰悠然門이라 하니 其規模가 比舊壯麗러니
국가에서 베푼 은혜가 융성하니 자손의 영화로움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을 것이다. 정사년(서기1977년)에 이르러 호남종중이 자발적으로 재실을 신축하였고 이어서 진주종중이 스스로 부담하여 정문을 세우고 현판에 유연문이라 하니 그 규모가 옛 재실에 비해 웅장하고 화려하더니
嗚呼라 滄桑이 再變하여 因淸州市都市計劃整理事業하여 上如漢城府案果桑山全局內山川塋域이 盡入于淸州市區劃하여 不得已於甲子閏十月十三日字에 吾文英公衣履之藏을 移封于淸原郡南二面外川里鳳舞山隱谷三六의一 乙坐之原하고
아! 세상사 상전벽해(桑田碧海)이니 청주시 도시계획 정리 사업으로 윗글의 한성부에서 인정한 과상산 전국내 산천묘역이 청주도시구획으로 들어가게 되어 할 수 없이 갑자년(서기1984년)윤10월 13일자에 우리 문영공의 묘를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 봉무산 은곡36의 1번지 을좌의 산언덕에 이장하고
隨墓儀物一切及附屬住宅을 一齊移建하고 前湖南所建齋室과 晉州宗中所建廡門도 移建于一邊하였으니 此亦新買宗垈也라
묘에 따른 의장물(儀仗物) 일체와 부속건물일체를 이건하고 전에 호남에서 건립한 재실과 진주종중에서 건립한 정문도 한쪽으로 이건하였으니 이 또한 새로 종중에서 매입한 대지위에다 세웠다.
嗚呼라 吾先祖幽宅이 非其地歟아 吾子孫之誠意가 不足而然歟아 感淚交頤에 不能已已라 然이나 天理도 不可違之事體가 不得已하니 此人知力云所不能及也야 自鳳鳴洞으로 移鳳舞山이 且亦有緣而然耶아 都不可理會也로다
아! 우리선조의 유택이 그 땅이 아니었던가! 우리자손의 정성이 부족하여 그런 것인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구나! 그러나 하늘도 막을 수 없는 일로 부득이한 일이니 사람의 지혜와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봉명동에서 봉무산으로 옮겨왔으니 이 또한 인연이 있어 그런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다.
然이나 此地亦新宅之塋域이요 載遇公墓域을 亦移封于下하니 祖孫이 相依하시매 永久安穩於累百代之下耶아 此亦不可知也라
그러나 이 땅 또한 새로 조성한 묘역이고 재우공의 분묘를 묘역아래 이장하니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의지하시며 영원토록 편안하게 자자손손 이어지기를 희망해보나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果桑山局內全體賣却代金이 累巨億萬金이니 以此永久守護가 是吾子孫의 莫重大責任也니
과상산의 전체매각대금이 18억 5천만 원이니 이 금액을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 우리자손의 막중대사이다.
神靈이 下敢하니 敢不少忽而輕易之哉아 於是에 以一億五千萬金으로 回顧先輩丙寅之役하여 大擴張復元之意로 再建遠慕齋閣八間床石一襲獅子石燈壹石文官石將軍石遷奉碑하니 山川이 映耀하고 塋域이 維新이라
신령께서 굽어보고 계시니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거나 또한 가볍게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1억5천만 원으로 선배님들께서 지난병인년에 고생하시며 지으신 재실을 돌이켜 생각하며 그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재건할 뜻을 모아서 원모재각8간, 상석일습, 사자석등, 문관석, 장군석, 천봉비등을 세우니 산천이 더욱 빛이 나고 묘역이 새롭게 되었다.
於乙丑九月二十八日落成也에 淸州市外諸郡有志元老들이 數千萬이 參席하여 以慰吾文英公永久安穩之藏則此亦吾鄭得姓以來最大之盛擧也라 我先祖在天之靈이 不寐而長存之驗歟아
을축년(서기1985년) 9월28일 낙성식에 청주시외 여러 고을의 유지와 원로들이 참석하여 우리의 문영공이 영원한 안식처에 안장되었음을 위로하니 이 또한 우리정씨들이 득성(得姓)이래 최고로 성대한 거사이다. 이러한 경사가 겹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선조님들의 영령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도우심을 증험함이 아니겠는가!
其於吾子孫之責則今日之誠이 與先祖英靈永久相續於累百代之下가 是其所望이니 凡吾子孫等은 一心血盟을 勉旃勉旃이며 又而記焉하노라
이러한 경사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우리자손들의 책무로 금일의 성대함이 선조의 영령과 함께 천추만세토록 영원히 이러지는 것이 나의 소망이니 우리 후손들은 한마음으로 굳게 뭉쳐서 힘쓰고 힘쓸 것을 당부하며 우와 같이 기록한다.
檀紀 四三一八年乙丑月日文英公二十二代孫瑗用記
단기4318년(서기1985년) 문영공 22세손 원용 쓰다.
遠慕齋重建誌碑銘幷序
白頭聖峰起脈南行千里而聳出金剛是海東三神之一而南走峻嶺五百里許天皇峰屹立卽俗離靈峰也
우리한족의 성봉(聖峰)인 백두산이 우뚝 솟아 여기서 정기를 받아 큰 산줄기가 천리를 남쪽으로 뻗어내려 금강산을 이루었다. 이곳이 해동의 삼신산 중의 하나요 또 남쪽으로 오백리를 높고 험준한 산맥으로 연이어 오다가 우뚝 솟아 천황봉을 이루었으니 여기가 명산 속리산이라
而西馳百里作頭山以文義主山連而回北顧首十里崒崒起頭曰鳳舞仙鳳翽翔惟端正美脈西馳逶迤屈曲甲龍行止乙坐之原左出坤去三合聯珠行僧指點曰隱仙讀書富貴之地也
다시 서쪽으로 백리쯤에 문의면의 작두산을 이루니 이곳을 주산으로 하여 북쪽으로 돌아 십리쯤 산줄기가 가다가 고개를 돌려 굽이굽이 뻗어 솟은 봉이 있으니 이름이 봉무산이니 봉이 날개를 펴고 금시 날려는 단정한 모양이라 이 봉우리에서 서쪽으로 아름다운 산맥 한줄기가 꼬불꼬불 굽이굽이 비켜 뻗어 내려오다가 갑용(甲龍)이 멈춘 지점에 을좌신향(乙坐辛向)에 우수(右水)가 좌출(左出)하여 곤(坤)으로 거(去)하니 삼합(三合)이 연주(聯珠)하는 명당이라 노승이 이르기를 은둔한 신선이 독서하는 부귀의 땅이라 하였고
歌云三折祿馬法辛向甲龍生鼎甲艮山艮水面坤流南二外川隱谷亦淸州屬鄕而左輔右弼龍虎相揖重重抱拱八峰乾馬又吉星南顧九龍是文筆峰也
가(歌)에 이르기를 삼절록마법(三折祿馬法)에 신향갑용(辛向甲龍)은 생정갑(生鼎甲)하고 간산간수(艮山艮水)는 면곤류(面坤流)라 했으니 이곳이 바로 그 명당이다. 지명은 청원군 남이면 외천리 은곡동이니 역시 옛날부터 청주의 땅이라 우수(右水)를 보필하는 청용과 백호 양 날개가 서로 받들고 이중삼중으로 양보맥(兩保脈)이 에워쌓으며 북쪽팔봉산은 건마(乾馬)를 이루고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구용산이 문필봉을 이루었으니 모두가 길성(吉星)이라
所以惟我先祖麗朝佐理功臣寶文閣大提學諱需諡文英所藏之地而遠慕齋亦公之齋閣也自果桑山至於鳳舞隱谷遷葬于檀紀四千三百七十七年甲子陰十月十三日而從移齋舍改新築緣由淸州市都市計劃不可抗力時宜順應宗議之意焉
우리 선조께서는 고려 때 좌리공신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셨고 시호를 문영공이라 받으시고 휘자는 수(需)이시며 이곳에 영면하신 어른이시다. 원모재는 이분의 재각이다. 단기4317년(서기1984년)갑자 음 윤 10월13일 청주봉명동에서 이곳 봉무산 은곡 뒷산으로 이장했으며 재실도 그 이듬해 을축년에 따라 옮기었으며 새로 원모재는 복원신축했다. 이는 불가항력으로 도시계획에 의한 것이며 정책에 순응하는 우리종중의 뜻이었다.
噫公之葬年代未詳而載遇公之得誌以後子孫之展誠瞻仰之所近爲二百祀矣伏惟八百年古宅地氣已衰退而揭示天數之所以乎自是後在天之英靈伏願永世是安所占稀世名堂地先祖陰騭之餘而子孫福祿然歟
슬프도다! 재우공께서 지석을 얻으신 이후 이백년도 채 안되고 유택에 안장한 년도는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대략 팔백 여 연간 평안히 잠드셨던 옛 유택을 버리시고 떠나오신 문영공의 영령께서는 삼가 이곳에서 영원히 잠드소서. 다행히 이렇게 찾기 힘든 드문 명당을 얻은 것은 선조의 음덕이 후덕하사 적덕(積德)하신 덕분이요. 우리자손들의 복이 가득한 탓이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垈地八百二十二坪齋舍外附屬建物總八十餘坪墻垣七百餘尺雄姿秀麗棟樑之材瓦(每+瓦)之制蜈宗未遑之盛擧而不甚壯麗苾芬孝祀庶可以容行祀亦足矣鄕堂行旅口足以傳碑矣
822평의 대지위에 80여 평의 재실 및 부속건물과 700여 척의 담장을 쌓아놓으니 웅장한 규모와 수려한 용마루 틈실 한기둥 굵직한 대들보 모두가 정교하고 장려하여 봉사(奉祀)에는 넉넉하고 보기에도 아름답고 부족함이 없으며 그 지방 사람들이나 지나가는 나그네들도 훌륭한 재각이라 이를 것이다.
檀紀四千三百十八年乙丑九月二十八日竣工行禮兼全國時調競唱文英大賞第一回大會中數千賀客群衆雲集焉
단기4318년 을축 9월 28일 낙성준공식 때 겸하여 전국시조문영대상1회 경창대회를 개최하고 수천 명의 하객과 후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略此兩工役賢勞 前會長憲祥會長代行鍾和 監督鍾賢 其忝帶統轄之任 使役盡力者 卽不肖憲國也 赫赫之先靈 亦感應於冥冥之中矣 不肖拙文 而固辭不獲 略敍始終顚末如右記焉
참으로 우리종중에 드문 경사였다. 이장과 재실을 짓는 두 공역에 많은 자손들이 수고했으며 특히 전회장 헌상, 종화의 노고가 컸고 나 헌국은 이 두 공사 모두 총무를 맡아 공역을 총괄하여 힘을 쏟았고 감독에는 덕수의 종현이 큰 고생을 같이했다. 이밖에 고생하신 분이 많으나 비면관계로 생략하고 고생하신 분들 모두에게 찬사를 드리며 복 많이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숭조정신과 봉사이념에 문영공영령께서는 가납해 주시고 고이 잠드소서. 불초 글을 잘 쓰지 못하여 사양했으나 끝내 얻지 못하고 간략하게 시종전말을 우와 같이 기술한다.
檀紀四三一九年丙寅春二十三代孫薪田憲國謹識
단기4319년 병인 봄 23세손 신전 헌국 삼가 쓰다.
발문(跋文)
왕실에 실록이 전하듯이 모든 관청에도 관지가 있고 지방에도 읍지 또는 군지(郡誌)등 각기 연혁지가 전해옵니다. 가문에는 가전(家傳)이 있어 옛날의 사적과 선인들의 행장을 함께 기록하여 후세사람들로 하여금 고찰할 수가 있게 됩니다. 현대 또는 우리후손들이 선대조상들이 하신 일과 업적을 명료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원모재지는 바로 그런 문헌이며 이 지를 통해서 우리는 문영공묘소를 재우공께서 득지(得誌)하신 이후 근 이백년간의 사적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이 원모재지란 우리문중 역사를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 다행히 가전으로 전승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현재 보존된 이 지(誌)도 불과 전종인 통털어 보아도 몇 권 안남아 있습니다. 이소중한 책을 다행히 저는 소장하고 있어 틈틈이 읽어보면 당시의 영락한 가문을 온전하게 지키시느라 선현들께서 얼마나 긴 세월 인고의 날을 보내셨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얼마나 큰 고초를 견디셨나. 마음고생 그리고 몸 고생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큰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남씨와의 과상산 산송(山訟)은 서기 1835년 을미부터 시작하여 승소 후에 또 남씨 대성촌집거의 우월감으로 남씨들의 침탈행위가 해마다 계속되어 완결된 것이 서기로 1886년 병술이니 장장 51년간이나 소송을 했습니다. 대를 물려가면서 2대가 소송을 계속했으니 그 고초와 재정적 손실 등 얼마나 잃은 것이 많겠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끈질기게 집안일을 돌보지도 못하고 신명을 바쳐서 조상위해 일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1. 2십년도 아니요 오십년이란 긴 세월 평생과업으로 그것도 끝을 못보고 대를 이어서 자식에게 물려가면서 소송을 하셨단 말씀인가! 정말 현대인으로 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사건중의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당시 선산아래 사는 자손으로서 물론 여러 곳의 종친들이 협조도 있었고 위토도 팔아서 소송비용에 충당했습니다만 유일하게 우리주교 선인들이 끝까지 지구력으로 끈질기게 맞서 싸워 연전연승해서 오늘날 문영공이 빛을 보게 되었음을 감사하며 크나큰 보본추원(報本追遠)의 업적으로 복록이 자손들에게 내리신 은덕이라 생각합니다. 넉넉지도 못한 살림살이에 집안일을 돌보지도 못하고 수 십리 길을 혹 수 백리 길을 짚신을 신으시고 왕래하시며 송사(訟事)하랴, 향사하랴, 산소 수호하랴, 위토 장만하랴 참으로 숭조이념만으로는 불가능한 인간의 능력한계를 초월한 신념에 꽉 찬 사명감의 발로였으며 선영들의 보우가 발현했음을 실감케 했습니다. 청주까지 오십 리길을 옛날에 비하면 편하기 한량없는 여정이지만 어쩌다 종중일로 청주를 갔다 귀가하면 피곤을 못 이겨 2. 3일간은 꼼짝 못하고 가사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럴진대 옛날의 선현들께옵서는 이 길을 걸어서 다니시며 송사 등 고통스러운 종중 일을 거의 매월매일 되풀이하며 반복 오십년 하시니 그 고통을 짐작케 합니다. 자는 후손으로서 참 부끄럽습니다.
원모재지를 읽노라면 선인들의 뚜렷한 행적에 긍지를 느낍니다. 그리고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 이 역시 원모재지가 아니었으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알 것이며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재지는 우리진정의 보고이며 진실 된 기록이며 문중지입니다. 이런 귀중한 기록이 벌써 66년 전에 창간 이후 단절 됐으니 다시 간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필요성을 통감하던 차에 뜻있는 효사지성(孝祀之誠)이 탁월한 후손들이 상의하여 중간지를 펴내게 되었음을 참으로 여러 종친들과 더불어 고맙게 생각하며 다행스러움을 자축해 마지않습니다. 그동안 66년 길고도 짧은 세월 우리종중에는 일도 많고 변천도 많았고 엄청난 변화도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굵직한 큰일만도 추려보면 갑자년에 산소를 남이면 외천리 은곡 봉무산 을좌원으로 이장을 햇고 이듬해 을축년에 재실을 이건했고 또 웅장한 현원모재를 신축했습니다. 이제 문영공 종중재산은 옛 선인들의 각고 끝에 그 결실로 수십억의 거부가 됐으니 선조들의 훈업적덕의 결실이고 자손들의 복록이라 자유자괴(自遺自愧)합니다. 더욱이 이번에 문영공묘아래 시조이신 당나라 승상공 휘 예의 행적을 위시 17위의 업적을 고증하신 당대석학 한갑수 박사께서 비문을 쓰신 유래비를 세우고 사당 경덕사를 창건하여 묘를 실전하신 시조공이하 17위의 영령을 봉안하고 매년 음 3월 1일 추모제를 지내기로 했으니 참으로 우리진주정의 계보의 명확함과 당당한 명문가통임을 널리 과시함과 동시에 대본의 귀감을 후세에 전하게 됨은 실로 자랑스러운 대역사이며 우리문중의 대보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이런 종중의 큰일을 십여 년간 중첩하여 하나하나 성취되는 시점에 있으니 일일이 업적을 다 헤아릴 길 없습니다. 더구나 금년은 또 하나의 종사를 완수하는 해입니다. 이런 사적을 편람토록 집대성하여 원모재지를 중간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시기적절한 과업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번 원모재지 중간의 책임인 편집을 맡아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헌신각고하신 청주파 신전헌국과 공주파 서울 복희 두 종친의 유창하신 문장과 표현력과 표기력(表記力)의 탁이함에 감탄하며 그 음덕과 각고에 우리종인 다 같이 합장으로 심심한 감사의 뜻을 드립니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진정의 사적을 또 한 번 빛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종인 모두는 충효경목(忠孝敬睦)의 종훈을 바탕으로 대동단결하여 굳게 뭉쳐서 문영공종중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매년 향사에 지성껏 참여하여 자손 된 도리를 다 할 것을 간절히 바라며 이후 우리문영공문중에 홍복이 내리사 화기애애하고 긍지에 찬 종사가 되도록 조상영령께서 보살펴 주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천학비재한 제가 한사코 사양했으나 끝내 고사치 못하고 경건한 원모재지중간(重刊)에 즈음하여 발문으로 졸문인 이글을 올리게 되었음을 양찰하시기 바라며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돈수백배(頓首百拜) 사죄하나이다.
단기4324년 신미 10월 일 문영공21세손 주교 광세삼가 쓰다.
발문(跋文)
민족마다 각기 민족사가 있고 나라에는 국사가 있다. 고려사나 이조실록은 통칭국사가 되며 우리집안의 가전은 다른 집안의 가전과 더불어 민족사가 된다. 청주읍지는 각문중의 가전지(家傳誌)가 모이고 관가의 연혁이 합해서 읍지가 된다. 원모재지는 우리문중지다. 문중지는 즉 가전이다. 이번에 또 우리문중에서 거대한 과업을 시작했다. 감자보발간의 대역사가 끝난 지 불과 7,8년인데 우리가전인 원모재지를 66년 만에 중간하게 되었으니 족보중간 못지않은 중대 사업이라 하겠다. 무릇 지에는 여러 가지가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1), 소소한 일이라도 상세히 기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개 세인들은 일중에서 큰일만 기억하고 작은 일은 망각하기 쉽다. 일에 있어서 어찌 크고 작음을 론 할 수 있겠는가만은 대소사를 막론하고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은 일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2), 지는 정확하고 진실 되게 기록해야 한다. 사람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는 없다. 어느 시기에 도달하면 지난 과거사가을 반드시 평가받게 된다. 주인공이 생존해 있어도 좋고 죽어서 이 세상에 없어도 괜찮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말고 정확하게 왜곡되지 않게 기술되어야 한다. 일의 대소 , 경중을 막론하고 과대미화 하거나 반대로 격하시켜서도 안 된다.
(3), 지는 사료이므로 시대의 배경이나 변천, 환경, 여건등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연대순 또는 사건 순으로 편철되어야 한다.
이번 원모재중건지는 문영공을 모신 대종중의 종사기록인 만큼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았고 시련도 많았다. 고금을 막론하고 종사에 관여한 선인과 족친들의 공과(功過)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공을 논할 때이지 허물을 탓할 때는 아니다. 종사에 큰 업적을 남긴 분들의 공은 현양(顯揚)하고 숭조효사(숭조효사)의 이념을 계승하는데 본지의 편집목적을 두어야겠다. 이런 면에서 이번 원모재지는 여러 가지로 세심한 배려와 기술적인 저술과 유창한 문장력이 요청됐다. 그러나 다행히 66년 전부터 지금까지 종중기록이 보존되어 있고 가장 종사가 난마(亂麻)처럼 산적했던 20년 전후 지금까지 1970년, 80년대 및 90년대의 문중임원들이 건재해 자료수집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문중의 문사인 충장공파서울 복희족질과 부원군파청주 신전 헌국족제 두 분의 지극한 숭조 이념과 탁월한 문장구성력 그리고 세심한 집중력 정성어린 성취감과 신념등 풍부한 문학적 역량을 두루 갖춘 이 두 분의 편찬에 마음이 흐뭇하다. 원고를 대충 읽어보니 참으로 세밀하고 체계적이었다. 탈락된 사적이 혹시나 없는가! 또 내가 직접 대표시절 행적이나 겪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한데 혹여 왜곡된 부분은 없는가! 과대, 혹은 과소평가로 객관성이 결여 된 부분은 없는가에 대해서 여러 면으로 검토를 해보았으나 어느 한부분도 지적할 곳을 찾지 못했으니 참으로 만족스럽다. 그러나 다만 옥의 티라면 지나치게 자세한 것이 흠이다. 상세한 기록을 필요로 하는 재기(齋記)에 너무 자세한 것이 흠이라고 지적한다면 그것도 또한 이 늙은이의 노망이리라 삼가 양해해 주시기 바라며 이 두 분의 노고를 우리 여러 친족들과 같이 진심으로 위로하며 그 공로에 감사한다. 재실을 신축했다가 또 헐고 이건하고 또 옮겨 짓고 산소를 수호한다고 정화작업까지 해놓았더니 또 이장하게 되고 이장을 하니 재실도 같이 이건해야겠고 신축을 몇 번씩 하게 되니 용재(用材)가 훼상되어 말이 아니고 생각다 못해 이왕이면 남이면 외천리 은곡 새 터전을 얻었으니 호남제일의 재실을 짓고 웅대한 문화제유적지로서 기반을 조성하리라는 큰 결심이 서게 한다. 강력한 반대에 봉착하여 좌절 될 번했지만 여러 뜻있는 족친들이 있어 협력해 주어서 재실을 신축하게 되었으니 이 웅자수려한 원모재에 들어서면 지금도 나는 감개무량하여 옷깃을 여미면서 눈물을 감당치 못한다. 얼마나 엄청난 시련과 고초를 격어야 했던가! 다행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천우신조와 선조의 영령이 감응하사 도우셔서 이루어진 신의 역사라고 나는 믿고 신의 작품이라고 혼자 감사한다. 이것이 모두 재지의 사료가 아니겠는가! 여하튼 그 당시 함께 고생했던 족제 헌국이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해 주었음에 감사한다. 이 책은 마치 역사소설 같은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한 문학작품 같다.
그러나 흥미 있게 저술되어서 어디까지나 실록이요. 우리가전(家傳)이다. 고루고루 제종께서 읽어주시기를 바라며 선인들의 혼을 이어받아 효사근본의 귀감이 되어 주었으면 하고 이 졸문을 감히 발문에 바친다. 원래 천학이라 고사했으나 어쩔 수 없이 피하지 못하고 두서없이 이 글을 맺으며 제종제현(諸宗諸賢)께 한량없는 양해를 빌 뿐이다.
단기 4354년 10월 일 23세손 영동 헌상 근서
발문(跋文)
사람이 도리를 행함에 옛 조상을 높이고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하는 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고 훌륭한 조상을 세상에 드러내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서 후손에게 전하는 일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종중일에는 종족의 소목의 차래를 분명하게 밝히 기록한 지(지)를 간행하는 일, 선조를 기리는 사업을 행한 발자취를 기록한 지(誌)를 발행하는 일, 종중발전과 복리증진을 위해서 행한 기념사업을 기록한 각종의 기문을 발행하는 일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원모재지는 우리선조 문영공 현양사업을 기술한 역사입니다. 우리의 선조 문영공의 위훈덕업은 보첩의 행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거니와 수백 년 동안 실전했던 묘소를 찾은 것은 자손의 크나큰 복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윗대 선조의 분묘를 모두 실전한 후손들의 불효를 홍우(鴻牛)의 일모(一毛)만큼이라도 속죄한 것이 아니었겠는 지요! 묘를 찾은 후에 선인들께서 혈성을 받치신 일을 살펴보면 종중재산을 모두 탕진해가면서 과상산을 남씨들과 싸워서 다시 되찾아 수호한 일이나 근근이 저축해서 향화(香火)를 받들어 이어온 일 등을 생각하면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문영공의 유택을 봉무산의 명당에 모시게 된 것은 첫째로 공의 혁혁한 영령께서 도우심이고 또한 자손들의 혈성이 아니었던들 방대한 종중재산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영락하여 빈한했던 우리종중을 뒤돌아 볼 때 만감이 교차하여 눈시울이 붉어짐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윤리는 례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인구가 팽창(膨脹)되고 외래문화가 물밀 듯이 밀어닥쳐서 교화는 해이지고 예절이 극도로 퇴패될 뿐만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파륜상태(破輪狀態)가 날로 증가하고 있어 전통문화의 가치관마저 부인할 우려가 큰 이때에 우리종중은 금년2월19일 경덕사의 낙성식을 올렸고 이어서 3월1일 분묘를 실전한 조상 17위의 춘향(春享)을 봉행했습니다. 자손으로서 이보다 더한 경사가 있으리요만은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혈통을 소중하게 여겨서 훼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손의 도리이고 또한 조상님께 항상 감사드리고 그 분들의 위업을 기리며, 종중의 발전과 후손들의 복리증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선조의 훌륭하신 “얼”을 이어받아 원모재에서 천추만세토록 향화가 꺼지지 않도록 자손들을 잘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원모재를 66년 전 병인년에 창건하고 아울러서 원모재지를 초간할 때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께서 종사를 위하여 헌신노력하실 때 저는 옆에서 바라보고기만 있었을 뿐 종사에 도움을 못 드렸던 불초가 발문을 쓰게 되니 부끄러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번 원모재지 중간에 있어서 편찬위원장 탁연족조의 탁이하신 숭조이념과 편찬위원 헌국족조와 복희족숙의 불요불굴(不撓不屈)하신 노고에 경의와 치하를 드립니다.
단기4324년 6월 25대손 익산 종배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