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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군사유학기 - 23년 6개월의 해군 복무중 70, 72, 80년에 걸쳐 세차례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중의 하나가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나 사관학교 4년 임관 후 중령으로 퇴역할 때까지 19년 6개월, 모두 23년 6개월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직업군인의 길을 걸어 온 나에겐 가장 재미있고 신나는 이야기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들이야말로 나와 함께 공감하실 듯하여 젊었던 시절의 회고담을 소개하겠다. 부연하여, 이제는 종이가 지배하는 시대를 접고 0과 1의 2진수가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인 점을 필자도 인정하여 가급적 글은 줄이고 사진을 크게 하여, 짧은 문장력을 보완하겠다.
1970년―샌디에이고, 상륙군 참모 훈련
내가 최초로 미국 땅을 밟은 것은 1970년으로, 우리나라는 소위 ‘잘살기 운동’이 시작되던 때였다. 국가적 부의 축적이 그다지 없었고, 국민들의 해외여행은 부유층 일부의 특권(?)일 때라서 여권 소지만으로도 타인의 부러움을 샀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나의 첫 번째 미국 유학은 임관 2년차인 임시 중위 시절,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San Diego)의 코로나도(NAB Coronado. 미해군 상륙군 기지)에서 실시하는 상륙군 참모 과정과 교관 훈련 과정이었다.
이 때 보잉 707 제트기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한 감회가 그 후 공적, 사적으로 여러 차례 태평양을 횡단한 기억보다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생애 최초로 장거리 제트 비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학교의 훈련과정은 이수 후 최종적으로 ‘연대 상륙작전 계획’을 작성하여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귀국 후 교관 직책을 수행 시 필요한 교관 양성 과정을 밟게 하는 것으로서, 연합국 장교 23명으로 구성되었다. 학교 당국은 좌학과 산업시찰격인 필드스터디를 구성해, 캘리포니아주 일대는 물론 미 동부 워싱턴, 뉴욕 등지에서 많은 견학기회를 주었다.
당시 우리의 하루 수당은 6달러 50센트였으며, 자판기의 코카콜라는 15센트였다.
하루 장교식당 식비가 대충 4달러 전후였으니 당시 우리나라 경제 규모로 보아 파격적인 대우였다. 장교식당에서는 소위나 제독이나 길게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 전혀 다른 군사문화 속에서 살아온 나에게 처음엔 충격적이었으나 점차 익숙해 졌다.
어느 날인가는 LA 부근의 엘토로 미 해병 항공기지와 인근 산업시설을 시찰했는데, 미 해병대 신예 전투기들에 대한 소개가 특히 인상적이어서 지금도 기억에 떠오른다.
학교 당국은 군사분야 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였는데, 미식 축구 경기 관람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나는 미식 축구 룰을 몰랐다. 그러나 축구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선수, 관중, 진행요원들의 열기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지며 특히 중간 휴식시간의 각종 이벤트는 환상적이었다. 서태지의 스테이지쇼나 이런 종류의 경기는 역시 텔레비전보다 라이브가 좋다. 이날 경기는 브롱코(Denver Bronco)대 차저스(SandiegoChargers)의 접전이었는데 홈팀인 차저스가 이겨 그 흥분이 한결 더했다.
1972년―7함대 구축함 OJT, 월맹군 포대와 포격전도
두 번째 미국 유학은 정확히 말해 현장훈련(OJT:on-the-job-training)으로, 미 태평양함대 제7함대 소속 구축함 모간함(USS Morgan DD-948)에서의 함상 실습이었다.
1972년 대위 때, 나는 모간함의 홈포트인 일본의 사세보로 향하여 잠시 정비차 귀항한 모간 함장에게 신고한 후 승함했다.
당시 미국은 월남전의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국제적 외교활동을 전방위로 실시하면서도 군사적인 압박은 계속 하고 있어서 내가 승함한 구축함도 7일간의 짧은 수리 후 곧 미 해군의 함포 지원작전에 참가하였다.
미 해군의 작전은 주로 야간의 5인치 함포사격으로, 미 지상군이나 공군이 공격하였으나 파괴하지 못한 표적들을 위주로 해안 약3마일까지 접근하여 발사하는 파괴사격이었다. 미국도 당시에는 최근 이라크 전쟁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공대지 정밀무기는 없었기 때문에 사거리 내의 이런 표적들은 모두 해군 함포지원사격의 대상이 되었다. 사세보를 출항하여 월남으로 항해중 우리는 홍콩 외해 40마일 해점에서 유류 부족과 기관 고장으로 3일째 표류하던 한국 화물선 화순호를 구조하였다. 이때 남지나해의 파도를 헤치고 구축함의 작은 단정을 이용한 구조 연락 활동에 한국장교인 내가 앞장 설 수 있어 다행이었다.
월남 쾅트리 시 외각 7마일 해상에 길게 줄을 지은 미 제7함대소속의 수많은 전투함들과 각종 두 번째 미국 유학은 정확히 말해 현장훈련(OJT:on-the-job-training)으로, 미 태평양함대 제7함대 소속 구축함 모간함(USS Morgan DD-948)에서의 함상 실습이었다.
군수지원함들이 재빠르게 이합 집산하며 공격진형을 갖추는 작전속도는 감탄할 만했다. 당시 우리 해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헬기를 이용한 신속한 수직 군수지원(VERTREP)을 보며, 우리 해군에는 언제쯤 이런 전술이 도입될 수 있을지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승함한 구축함은 육상으로부터의 지원사격 요청에 따라 통상적인 함포지원사격을 수행하던 월맹 하이퐁 부근의 특수작전에 투입되었는데, 이 작전은 몇 척의 구축함과 공군 전투기의 전투 초계 위치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입체 작전이었다.
칠흑 같은 무월광을 이용하여 해안선 6000야드까지 은밀히 침투하면서도, 월맹 해안 지상군의 해안포가 침투하는 우리 기동전대에 대하여 계속적인 사격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음이 우리의 ESM 장비에 잡혔으므로 함교와 CIC를 포함한 전 부서의 긴장감은 더해갔다.
예정된 목표가 사거리에 들어오면 5인치 함포로 예정된 사격을 하고, 발사종료와 동시에 090도 변침, 최고속력으로 외해로 기동하는 공격은 한마디로 ‘치고 빠지기(히트 앤 런)’ 작전이었다. 그해 우리와 비슷한 작전을 먼저 실시한 구축함 중의 한 척이 월맹군이 응사한 130미리 해안포탄에 함미가 피격되어 수리를 위해 급거 홍콩으로 회항한 일도 장병들간에 알려져 있어 긴장은 더했다.
이 작전 중 내가 탑승한 구축함은 다행히 별다른 손상 없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으나, 사격후 피항중 우리를 향해 응사된 적의 해안포탄이 지근거리 40야드까지 떨어지는 것이 육안으로 확인되고, 음파 탐지기로 포탄 떨어지는 소리를 상호 확인하는 등 숨막히는 결전의 순간들이었다. 이 작전 중 시작부터 종료시까지 나의 뇌리에는 동해와 원산이 떠나질 않았다.
그후 소령, 중령 진급하며 함장을 4번 역임하면서 해상 간첩선 침투대응 작전 등에 여러 번 참가했으나, 이 작전은 나의 유일한 ‘함포 대 해안포 포격전’의 해상실전 경험이 되었다.
이같은 전투중에도 하루 ‘휴전’삼아 크리스마스 함상 파티가 있기도 했다. 이런 날에는 특별 메뉴가 나오고 장병들로 조직된 연예단의 공연으로 전쟁에 피로한 장병들을 위문한다. 요즘이야 첨단 무선통신기술이 보급되어 지구 곳곳의 미국장병들은 고향의 가족들과 일정한 통제범위 내에서 자유스럽게 통신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때만 해도 미군은 수시로 헬리콥터를 동원해 조국의 애인들이 보내는 초콜릿, 케이크, 편지 등의 전쟁 위문품을 운반해 장병들에게 전해주었다.
이 밖에 석식 후 매일 밤 최신 영화와 팝콘, 코카콜라 등의 휴식시간은 매 순간을 긴장 속에서 보내는 전장의 장병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듯하였다.
내가 승함한 구축함은 1개월 동안 각종 함포사격지원에 5인치 함포 10,500발을 소모하고 싱가폴로 향했다. 싱가폴에 임시 수리차 기항했을 때 우리는 월남전 휴전소식을 접하였으나 다시 월남으로 향했다.
나는 3개월의 OJT 연수를 마치고 쾅트리에서 하함, 이곳에서 미 공군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의 클라크 공군기지-수빅 해군기지-타이완-일본을 거쳐 귀국하니 구축함 전탐관의 직책이 주어졌다.
1980년―뉴포트 미해군 참모대학, 해군전략과 국방경제
세번째 유학은 미 동북부 로드아일랜드 주 뉴포트 시의 미 해군 참모대학에서였다.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의 여과 없는 생생한 텔레비전 화면이 외신으로 전해졌고, 이곳의 연합국 장교들은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여 위로의 말을 많이 해주었다.
우리 반은 미국, 일본, 태국, 필리핀, 아이슬란드, 터키, 베네수엘라 등 연합국 16개국에서 온 20명의 장교들로 구성된 16기였다. 학교장은 캡틴 쿠인(Captain Quinn)으로 이제 고인이 되었으나, 1기부터 우리 16기까지 그가 보여준 열과 성의는 두고두고 졸업생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교과과정은 해군전략과 국방경제 의사결정으로 대별되어 참모연구서 작성에서부터 에세이 또는 논문에 이르기까지 심도 있게 짜여있었다.
나는 월~금까지 못한 공부는 토, 일요일로 복습을 미루어 놓지만 번번이 각종 파티 등의 소위 ‘사회적 활동(social activity)’에 참여해야 하므로 공부가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활동도 평가대상이었고, 귀국후 참모총장 앞으로 보내진 사후평가보고서가 나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나도 주로 먹고 마시며 친목을 도모하는 이 ‘사회적 활동’에 열심이었던 것 같다.
과정 중에는 학생인 장교들의 ‘국가 소개(country presentation)’가 있었는데, 출국 전 미리 준비한 자료와 이곳 도서관의 풍부한 시청각 자료 덕분에 발표, 질의 응답, 토의 순서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는, 각국의 고유음식을 만들어 소개겸 파티를 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가정책상 가족동반이 안되어 나 혼자 냉동 치킨과 기름을 사서 학교 행정보좌관인 미즈 앨리스(Ms. Alice)의 집에서 튀겨 제공하니 모두 ‘원더풀!’ 하며, 칭찬했지만 나는 맛이 없어서 날개 한쪽 조차 다 먹지 못했다.
군사전략과정의 마지막 관문은 2개 팀으로 나누어 진행되는 전쟁 연습이었다.
2차대전과 태평양전쟁의 각종 시나리오 200여 가지가 이곳 유서 깊은 뉴포트 미해군대학에서 연습되어 실전에 적용되었으니 가미가제 특공대도 대책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중위 시절 샌디에이고에서의 상륙전 유학경험에 따라, 이곳에서 블루포스 사령관(Blue Force CATG. 상륙 기동함대 사령관 : Commander Amphibious Task Group) 직책을 맡아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하였다. 사진에 보이는 나의 오른쪽에서 카메라 쪽을 보고있는 요시무라(Yoshimura)는 당시 일본 해상자위대 소령이었고, 나중에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이렇게 전략을 배우는 중에도 가끔 학교장 집 뒷마당에서 ‘크랩 앤 클램(Crab & Clam)’ 파티가 열렸다. 뉴포트는 다른 해군항구와 달라 뉴잉글랜드 지방 대서양의 해산물이 풍부했다. 지금도 이곳의 랍스터를 생각만 하면 군침이 돈다. 이런 식의 ‘사회적 활동’이 매 주말 있어, 깊은 공부는 귀국후 교재로 더 많이 한 것 같다.
참모대학 과정중 중요한 한 부분은 미 해군당국이 정말로 성의껏 학생들을 대우하는 ‘CNO VIP Itinerary Field Trip’으로, 사진에 보이는 미해군 참모총장 전용 항공기 2대를 동원해 남부 플로리다까지 왕복비행을 했다.
플로리다 여행 중에는 ‘Peterson Air Force Base BOQ’에 여장을 풀고, 지역내 산업시설, 군시설 등을 돌아 보았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 기지 내의 전투기 모의조종 장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도입되지 않았던 장비로, 십수년 후에야 유사한 장비들이 도입된 것으로 안다.
NASA 방문도 이때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에 치열했던 우주경쟁의 역사를 이곳에서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 방문시 생도들과 1일 생활을 통해 미 해군장교 양성과정을 본 것은 귀국후 여러 대미 관련 부서 근무시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학교당국은 재학중 틈이 날 때마다 미 동북부 지방 여행과 이벤트에 학생들을 참여시켰다.
이같은 이벤트중 기억에 생생한 것이 보스턴에서 실시된 ‘Tall ship parade’이다.
이 행사는 전세계의 유명 범선 등이 참여하는 관함식이다.
우리 보다 6년 앞서 졸업한 졸업생이 함장으로 있는 순양함에 초청되어 멋진 퍼레이드를 보게 되었지만 범선보다는 우리가 타고 있는 순양함에 더 관심이 많았다.
가장 추억에 남는 돈 소령과의 케이프 코드 비행
유학시절 만난 미국인들중 가장 추억에 남는 분으로 나의 개인 어드바이저였던 돈(Don Edgerton) 소령 부부를 들 수 있다.
학교에서는 1대 1로 학생 장교마다 미국측 장교 1명씩을 배정해 교육중 제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었는데, 돈 소령은 원래 보급 장교로서 라인 오피서(line-officer)는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조종사 자격증까지 취득할 정도로 비행기에 열성적인 취미생활을 하였다.
하루는 뉴포트에서 보스턴 부근 케이프 코드(Cape Cod)까지 돈 소령이 직접 조종하는 단발 소형비행기로 날아가기도 했다. 비행기에는 돈 소령 부인도 동승했다. 비행 전, ‘사고책임 면책 조항’ 서류에 서명할 때는 불안하기도 했지만, 능숙한 조종으로 금새 안정을 되찾고 동북부 해안선을 따라 그 옛날 초기 이민자들을 태우고 대서양을 건너온 메이플라워(May Flower)호가 도착한 유서 깊은 케이프 코드를 하늘에서 이리저리 살펴보며, 미국 건국 이민역사의 현장을 그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느껴 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돈 소령이 한국, 인도네시아 등의 FMS사업 관련 일로 방한했을 때, 나는 뉴포트에서 못 보여준 한국음식을 여의도에서 마음껏 대접할 수 있었다.
영광의 졸업장을 손에 쥐고 귀국 후 나는 해군대학 교관이 당연 보직인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의외로 참모총장 수석부관의 직책을 맡게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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