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엔도슈사쿠
★촛불 바로 아래, 나는 무릎에 손을 대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지금 당신들이 모르는, 당신들이 일평생 방문하지도 않을 이 극지에 제가 와 있음을 가만히 음미하고 있습니다. p35
▶아주 오래전 나도 그와 같은 꿈을 꾸었던 적이 있었다. 익숙한 나라와 언어를 떠나서 복음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삶의 이런저런 이유와 무엇보다 의지의 박약으로 부르심이라고 믿었던 꿈으로부터 돌아서서 지금을 살고 있다. 얼마나 맹랑한 생각이었는지 물론 실행했다면 어떻게든 살았었겠지만 로드리고의 고백 가운데 젊은 날 뜨거웠지만 진중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무엇이 그들에게 이 커다란 고통을 인내하게 했는지, 무엇이 그들에게 이 위대한 정열에 몸을 던지게 했는지 이제야 그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들도 모두 이 우윳빛의 뿌연 구름과 동쪽으로 흘러가는 검은 구름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또 그들이 그때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것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39
▶일본으로 가는 배안에서 밤새 폭풍우와 싸우고 지친 몸을 잠시 누이며 새까만 구름을 보면서 로드리고는 이러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현재 내가 지나고 있는 고통의 의미와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이유는 나와 같은 길을 걸었을 그들이, 나와 같은 것을 바라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마도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지점에 이르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고통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다만 희미한 어떤 것을 어렴풋이 알 뿐이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기치지로는 그 비굴한 웃음을 띠며 사람들 뒤에 피해 있었습니다. 마치 쥐처럼, 무엇인가 나타나면 언제라도 달아나 버릴 듯 한 모습이었습니다. 수치심으로 나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주님은 언제라도 자신의 운명을 어떤 인간들에게나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인간을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p43
▶기치지로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천로역정의 나약이처럼 좁은 길, 좁은 문에 대한 확신은 있으나 나약함이 그를 힘차게 걸어갈 수 없게 한다. 기치지로도 마찬가지다.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면 자신도 배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기치지로를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나에게도 추호도 그런 마음이 없다. 오히려 애처롭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나에게 많은 동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연약한 나약이처럼, 언제라도 달아날 준비를 하는 쥐새끼 같은 기치지로와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아니고 계속 해서 배교를 밥 먹듯이 하고는 유다처럼 돈을 받고 동지들을 팔아넘기는 기치지로가 짜증이 나서 보기가 싫었다. 하지만 내가 기치지로의 자리에 있었더라도 나도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치지로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어쩌나... 예수님은 이런 나약한 인간에게 자신을 운명을 맡기셨다. 하염없이 나약한 인간, 이것이 그분이 인간을 사랑하신 까닭이라니...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듣고 흘려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겁쟁이의 이 한탄이 어째서 예리한 바늘이 되어 제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인지요?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p.85
▶두려움의 반대말은 믿음이라던가? 순간순간 느꼈던 동일한 두려움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지만 나 자신은 수없이 되뇌고 되뇌고, 고뇌하고 고뇌했던 질문,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부재와 연결되는 의심의 싹이었기 때문에 불경스러운 의문이었다. 한 순간도 명쾌하게 답을 내려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침묵이라는 책의 제목을 처음 본 순간부터 들었던 거부감의 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왜 아무 이유 없는 고통 속에서 잠잠하실 수 있으실까? 왜 이유 없는 멸시와 천대, 폭력과 학대 속에 살아갔던 아니 죽어갔던 수많은 약자들을 구원하시지 않으실까? 불편한 마음 때문에 끝까지 고민해보지 않았던 주제입니다. 들추고 싶지 않았다. 가시 같은 마음을 품고 살고 있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p295
하지만 나로서는 침묵으로 함께 고통 받으시는 주님보다 폼나고 멋지고 뭔가 한칼에 단번에 확실하게 해결해주시는 슈퍼스타를 기대하는 마음을 저버리기가 역시 어렵다. 아마도 고통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 역시나 싫은 모양이다. 힘들고 싶지 않다. 가난한 것도 싫고, 고통은 더더욱 싫은 것이다. 나는 다시 기치지로로 돌아간다 그와 내가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
유다를 향하신 예수님의 마음은 기계 같은 단 하나의 마음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에게는 배신에 대한 분노와 그럼에도 사랑을 저버릴 수 없는 양날의 칼 같은 마음이 오히려 주님을 더욱 더 아프게 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이런 저런 단상들을 떠올리며 무엇보다 세상에 단하나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어리석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내몰고 있는가 싶었다. 그것이 진정 선하든 악하든 옳은 것이든 옳지 않은 것이든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이 세상에 과연 존재하기란 한 걸까? 혹부리영감처럼 수많은 책을 덮으니 오히려 더 많은 의혹을 주렁주렁 달고야 말았다.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어버린 판도라처럼 나는 너무나 무질서한 혼돈의 한가운데 서고야 말았다. 아마도 평생 이 혼돈 가운데 여전히 밥도 잘 먹으면서 보란 듯이 살아갈 것이다. 가시 같은 마음과 의혹의 혹을 주렁주렁 달고서 그렇게 살다가 주님을 만나면 하나도 빼놓지 말고서 물어볼 것이다. 눈물의 땅에서 무지하지만 순전하게 그리던 모든 무지랭이들의 천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