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오테아로아에 가고싶다. 아오테아로아는 뉴질랜드 원주민들의 언어로 ‘길고 하얀 구름의 나라’라는 뜻으로 날개가 퇴화된 멸종 직전의 새들이 모여 살고 있는 섬이다. 그 곳에는 고대의 식물과 짐승들이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날지 못하는 새들의 상처를 감싸안고 있는 태초의 섬, 아오테아로아... 그 곳에는 날지 못하는 새들의 창공을 향한 미망의 세월이 메이슨베이에 모래처럼 쌓여있을 것이다.
나는 그 까끌한 미망의 가루들을 밟으며, 발바닥에 피가 맺힐 때까지 그 곳을 달리고 싶다.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각양각색의 모래알들은 내 발끝이 스칠 때마다 나를 휘감고, 나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그 모래들을 모두 머리에 감을 것이다. 그렇게 해변을 달려 바람에 몸의 반쯤이 녹아든다면, 나는 날지 못하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새는 프리지아향을 깃 속에 품은 카카토이거나, 아름다운 깃털을 펼친 타카혜일 것이다. 메이슨베이의 황혼을 바라보며 수평선 위를 날고 있는 동류(同類)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그 눈과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걸치고 있던 천조각들을 벗어내려 날지 못하는 새들의 상처를 보듬어 줄 것이다. 그리고 밤이 찾아오면 태초의 식물들이 음산한 숨소리를 내는 숲 속으로 숨어들어 웨카의 둥지에 몸을 뉘이고 싶다. 어쩌면 알을 품고 있던 웨카의 경계의 눈이 나를 향하고, 탄탄한 발톱에 허벅지가 긁히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한 점의 동정을 베풀어 이끼가 낀 둥지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 황홀한 날개들 속에 콧등을 부비게 된다면, 무인(無人)의 섬에서도 나는 절대로 외롭지 않으리라. 눈만 감아도 그려지는 나의 낙원, 아오테아로아. 나는 끝없이 아오테아로아를 꿈꾸고 갈망한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삶을 벗어나 나의 섬에 헤엄쳐 닿을 그날을…… * 전봇대 뒤에 몸을 숨긴 여자의 정수리가 삼십분째 담 아래를 떠나지 않는다.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은 그녀의 얼굴이 담 위로 뻗은 어린 목련에 겹쳐진다. 애타게 담 너머를 훔쳐보는 여자의 눈이 가지 위에 필 것만 같다. 닫힌 커튼 너머로 그녀의 정수리를 지켜보던 나는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오늘도 그녀는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는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음울한 패배감을 지긋이 밟으며 곤히 자고있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커튼을 걷자 유리에 맺혀있던 햇살이 여자의 시선과 함께 우수수 떨어진다. 나는 관자놀이를 찌르는 햇살을 모르는 척 하며 분무기를 집어 화초에 물을 뿌렸다. 물의 입자가 먼지처럼 흩어진다. 푸른 잎 위에 점점이 흩뿌려진 물방울이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 낸다. 새의 날개 모양, 아이의 얼굴 모양, 그리고 내 자궁의 모양을 한 물방울들이 합쳐지고 다시 천천히 분리되는 것을 반복한다. 나는 끝이 갈라진 잎을 가만히 뜯어 내었다. 쓸쓸하게 뜯겨진 이파리 위에 장송가같은 햇빛이 무겁게 내려 앉는다. 나는 가만히 시선을 옮겨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정확히는 내가 안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과 마주쳤다. 검은자위가 유난히 많은 여자의 눈은 눈꼬리가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 있다. 저 애련하고도 처연한 눈동자라니. 나는 불쑥 짜증이 치밀어 들고 있던 분무기를 내려놓고, 다시 커튼을 쳤다. 여자의 안타까움과 원망의 눈빛이 커튼 위에 덕지덕지 묻는 것만 같다. 머릿 속에 날카롭게 돋아난 신경이 사방을 찌르는 것을 느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자마자, 칭얼대기 시작하는 아이를 가만히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 한참 뒤척이던 아이는 몇 번의 토닥임에 금새 다시 잠이 든다.
잠시 후, 나는 기계적으로 아이의 배를 토닥이던 손을 거두어 들였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씁쓸한 공기 덩어리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솜털이 보송하게 돋아난 아이의 복숭아빛 볼 위로 여자의 앳된 얼굴이 스민다. 나는 갑작스럽게 덮쳐오려는 비애감을 피하며 무겁게 고개를 젓다, 무심코 시계를 바라보았다. 남편이 올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오늘 아침,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했던 화장이 거의 지워져 있다. 나는 까끌한 피부를 쓸며, 립스틱 뚜껑을 열었다. 희미한 검은색을 띈 짙은 붉은색이 눈을 찌른다. 그 생경하기만 한 색깔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립스틱을 입술에 가만히 눌렀다. 입술 위로 선명한 붉은빛이 음울하게 배어든다.
“우리 진우, 아빠 없는 동안 잘 있었어?” 식탁 앞에 앉아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추는 남편의 목소리가 달큰하게 흐른다. 나는 사심 없이 웃고 있을 남편의 눈가를 떠올리며 소독한 뒤 식혀놓은 젖병을 꺼내었다. 젖병에 물을 따르는 손이 계속 어긋난다. 나는 흘린 물을 닦으며 명치 한가운데를 가만히 쓸었다. 그의 아이에 대한 사랑은 때론 잔인할 때가 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내 위태로운 생명에 그는 사랑이라는 명목의 날카로운 바람으로 끝없이 몰아쳐온다. 그 바람은 언제나 차갑고 냉혹하기만 해서 수시로 내 숨을 틀어막으려 들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심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불씨를 허망하게 끌어안을 수 밖에 없다.
분유뚜껑을 열자, 하얀 가루가 공기 중으로 퍼졌다. 그 미미한 입자의 진한 젖내가 나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나는 젖병 안에 분유를 털어 넣으며 조심스럽게 남편을 바라보았다. 낯설만큼 화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눈이 지금껏 본 적 없던 따스함으로 찰랑이고 있다. 나는 눈 위에 내려앉는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우유 먹일 시간이에요. 이리 줘요” 아이를 건내주는 남편의 시선은 끈질기게 아이의 체취만을 쫓고 있다. 나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아이를 품에 안고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젖병을 흔들며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자, 예민해진 신경이 머리끝까지 찔러온다. 나는 침침한 눈 사이를 꾹 눌렀다. 젖병을 잡은 손에 계속 식은땀이 배어서 연신 젖병을 다시 잡았다. 한참을 날카롭게 돋아난 신경을 잠재우지 못하던 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이 느껴질 때쯤, 어설프게 젖병을 물렸다. 나는 무서운 힘으로 젖병을 빨기 시작하는 아이의 입을 놀란 가슴으로 바라만 보았다. 몇 번을 해도,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남편 몰래 긴장된 숨을 내쉰다. 남편의 시선이 짙은 립스틱이 발린 내 입술을 향해있다. “당신 힘들다는 거 알아, 이해해”
남편의 목소리가 공기에 섞여들지 못하고 둥둥 떠있다. 나는 뒤통수를 찔러오는 통증을 느꼈다. 짐짓 심각하게 굳어있을 남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당신의 동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내렸던 건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다 당신을 위해서였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나는 남편 몰래 아랫입술을 씹었다. 남편의 목소리는 귓바퀴 근처에서 맴돌기만 한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몇 달 째 같은 말을 반복할 수 있는 그가 새삼 대단스럽다. 남편의 시선을 피해 턱을 당기던 나는 아이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흠칫 손을 떨어버린 탓에 젖병을 쥔 손이 미끄러졌다. 나는 아랫배가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미한 통증이 살을 파고든다.
“진우, 우리 아이라고 생각해 줘” 귓속으로 스며드는 남편의 목소리가 사뭇 명령조를 띄고 있다. 남편의 부탁과 존중은 어느새 명령과 강제가 되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아이의 젖병을 다시 쥐었다. 코끝에 바다냄새가 은은하게 감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오테아로아의 피오르드랜드가 눈앞을 지나간다. 그곳에는 밀포드사운드의 폭포 아래에 선 내가 있다. 강 옆으로 솟아있는 산들과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수십 개의 폭포. 그 찬물에 몸을 담근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바위 위에 몸을 말릴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만끽할 것이다. 오직 새들만이 살고 있는 섬이기에 누릴 수 있는 아오테아로아의 싸늘한 자유를……
자궁암의 발발로 자궁을 들어내야 했던 날, 나는 수술실로 가는 내내 다시는 못 돌아올 것처럼 울었었다. 자궁암이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에도, 자궁을 들어내야 한다는 말을 남편에게 꺼내야 했을 때에도, 수술복을 입을 때까지도 아무렇지 않다고 믿었던 나는 이동침대를 몰아가는 간호사의 볼록한 아랫배를 보자마자, 오열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는 견딜 수 없게 두려워졌던 것이다. 그 두려움이 이젠 남편의 아이를 낳아줄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었는지, 여자로서의 상실감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구역질이 날 것만큼 비릿하고 질퍽했던 그 순간의 두려움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수술이 끝나고 정신이 들었던 나를 처음으로 맞은 것은 절절한 고통과 치욕스러운 공복감이었다. 이어 나타났던 수 십년은 늙어버린 듯한 우울함은 내가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던 수술 후유증이었다. 허나 수술의 충격에 더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은 내가 아닌 남편 쪽이었다. 수술 이후,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했던 남편의 귀가가 어느 날부터 늦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어떤 연락도 없이 첫 외박을 하던 날, 나는 견딜 수 없는 참담함에 갇혀 불안에 떨어야했다. 그를 믿지 못하는 스스로를 타이르며 ‘당분간’일거라고 믿으려 애썼던 내 믿음은 남편의 계속되는 외박에 점점 흔들려만 갔다. 하지만 외동아들로 커 나보다 더 아이를 원했던 그의 혼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나였기에, 나는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불안과 의심, 자책의 깊이가 하루하루 더해가던 어느 날 남편은 내게 대리모를 구했다고 말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쥐어짜듯 말을 던졌던 그의 눈은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몇 개월을 비밀스럽게 품고 있던 말을 남편이 힘들게 꺼냈던 그 순간, 내가 느꼈던 미미한 안도감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온갖 분노와 배신감 비애감이 뒤엉킨 덩어리를 헤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튀어 올랐던 그 불안했던 감정의 뿌리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다만 남편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 선언이 오히려 내게 잔인한 평온을 안겨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온갖 추측 속에서 밤잠을 설쳐야했던 시간들을 곱씹으며 낯선 얼굴을 한 남편을 마주 바라 보았었다. 남편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허망하게 그를 바라만 보는 내 태도가 곤혹스러웠는지 어머니의 강요로 어쩔 수가 없었다며 언성을 높였다. 나는 계속 시선을 피하는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남편은 나의 반응은 개의치도 않고, 인공수정이어서 그 여자와의 어떤 접촉도 없었음을 역설했다. 내겐 어떤 틈도, 숨을 쉴 겨를도 주지 않고 나와 그 사이에 아이는 반드시 필요한 거라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주장하는 그에게 끝끝내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몇 주 뒤, 남편은 아직 피냄새도 지워지지 않은 아이를 안고 집으로 왔다. 남편의 코를 쏙 빼닮은 그 남자아이가 어쩌면 그렇게나 낯설 수가 있었는지. 그 날 밤, 남편의 코와 낯선 여자의 눈을 가진 아이를 보며 나는 견딜 수 없는 상실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배어날 것만 같은 애증의 한복판에서 나는 태초의 섬 아오테아로아를 끝없이 그렸다. 그 어느 곳에도 안주할 수 없던 날 수 없는 새들까지 포근히 품어주는 태초의 섬을, 그 태초의 섬 어딘가 에서 무딘 날개를 안고 잠이 들었을 타카혜와 카카토를 떠올리며 나는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퍼석한 모래알들이 귓바퀴에 쌓여만 가는 해변과 눈 시린 바다, 음산한 원시의 공기를 품은 어두운 숲과 짐승들이 서로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살아가는 나의 아오테아로아……
그 날밤, 나는 금방이라도 진주가루와도 같은 파도에 쓸려 가버리고 싶은 욕구를 가만히 쓸어내리며, 두 팔로 어깻죽지를 감싸안은 채 밤새도록 입술을 씹어야했다.
나는 김이 올라오는 물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 끝에 적당히 달아오른 물줄기가 부드럽게 감겨드는 것을 확인하곤, 욕조물을 잠갔다. 욕실 안에 가득 찬 수증기가 볼을 감싼다. 나는 그 미미한 알갱이들의 움직임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속눈썹 위로 메이슨베이의 모래알과도 같은 수증기가 천천히 쌓이는 것이 느껴진다. 그 안온한 입자에선 흐릿한 바다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나는 순간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느 새의 부리를 바라보다가, 눈을 뜨며 걸치고 있던 옷들을 벗어 변기 위에 올려놓았다. 어깨를 덮는 푸석한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며 무심코 몸을 돌리다가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화장기 없는 초췌한 얼굴을 한 여자가 나를 휑하게 바라보고 있다. 몇 달 전의 나보다 수년은 늙어 버린 거울 속의 여자는 모래를 먹은 듯한 누런 눈동자로 나를 측은하게 바라본다. 나는 입꼬리를 들어 웃어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일그러진 웃음을 짓고 있다. 참 가관(可觀)이군... 나는 언제부터 저런 지독한 표정을 짓게 된 걸까. 나는 자잘한 주름이 진 눈가를 매만졌다. 꺼칠한 피부가 손가락 끝을 꼬집는다. 점점 사방에 들어차는 뿌연 수증기가 거울 안에 갇힌 나를 삼켰다. 나는 쓸쓸한 심정으로 욕조 안에 발을 담갔다.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온기가 몸을 이완시킨다. 나는 무릎을 굽혀 가슴까지 몸을 담갔다. 안개 같은 김이 순식간에 눈앞을 가렸다. 잠시 눈가를 비비며 숨을 몰아쉬었던 나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느끼며 마른 무릎 사이에 얼굴을 타려 박았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괴물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혼란의 깊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었다. 똬리를 튼 구렁이 같은 상실감은 여간해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남편을 향한 분노와 슬픔,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분노와 슬픔은 내 안에서 잔뜩 뒤엉켜 있었다. 그 뒤엉킨 감정들은 위태롭게 쌓여있는 내 위선이 무너지려 할 때마다 가차없이 내 숨통을 틀어막았다. 혼돈의 우물 가장 밑바닥에 고립되어 버린 나는 컴컴한 우물 속 이끼 낀 물에 숨이 막힐 때마다, 태초의 섬과 바다를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연명해 나갈 수 밖에 없다. 더 이상은 습관 이라기 보다는 중독에 가까운 상념들에 기대어 힘겨운 매일을 견디는 심장은 지쳐만 갔고, 몸뚱이를 칭칭 감고있는 피곤은 점점 무거워만 갔다.
나는 가만히 무릎을 폈다. 발끝에 하수구를 막고있는 작은 마개가 걸린다. 욕조물의 출구를 고집스럽게 막고있는 이 마개를 뽑아 낸다면 내게 들러 붙어있는 분노와 슬픔들도 빨려 내려갈까. 나는 가만히 이마를 짚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콧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 때, 밖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움찔 몸을 떨었던 나는 젖은 몸을 대충 닦으며 가운을 걸친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잠이 깬 아이가 목이 찢어져라 울어대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름끼치는 울음소리에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아이가 가끔씩 울음을 터트릴 때는 나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뺨을 맞은 사람처럼 멍해져버린다. 그나마 얌전히 자고 있을 때는 잊고 지내는, 이 아이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참을 어찌할 줄을 몰라 망설이던 나는 어색하게 아이를 안아 올렸다.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아이를 보듬은 손에 식은땀이 배어 나온다. 숨이 넘어가게 울어대는 아이가 내 가운의 깃을 부여잡았다. 나는 어설프게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온 몸의 털이 쭈뼛 설 것만 같은 아이의 커다란 울음소리에 나는 다시 한번 뒷목을 움츠렸다. 목이 터져라 울어대는 아이의 목에서 피가 토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해졌다. 이 작은 몸 어디에서 이런 우렁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일까. 나는 입술을 씹으며 아이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아이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져 온다. 나는 뻣뻣한 손바닥으로 연신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등을 두드린 지 한참 뒤에야 아이는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 조금씩 끅끅대며 숨을 고르는 아이를 최대한 다정하게 토닥이며,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긴장된 팔에서 아이의 무게감이 빠져나가자 진한 현기증이 정수리를 덮쳤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빨갛게 충혈된 아이의 커다란 눈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못 견디게 낯설고, 또 처참할 만큼 익숙한 눈이. 나는 씁쓸함을 어금니로 부수며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었다. 아이의 눈을 마주 볼 수 없는 내 자신이 못 견디게 가여워진다. 아이에 대한 감정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가정과 남편을 빼앗아간 존재에 대해 허튼 증오만을 품으려고 안달했던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닫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나는 아이를 미워하려 애쓰면서도, 아이를 미워해야 할 일말의 이유를 애초부터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나로서는 가슴 한켠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올린 뒤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가는 가슴 시린 애정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아이를 원했던 나는 도저히 아이를 미워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언젠가부터 모든 걸 잊고 그의 뜻대로 아이를 품고 싶어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소름 끼치는 모성애의 발발을 느꼈을 때, 나는 그 끔찍한 본능을 얼마나 저주했던가.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살짝 벌어진 커튼 너머로 창 밖을 가만히 내다보았다. 전봇대 아래에 있어야 할 여자의 정수리가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도에 가까운 미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가 집에 온 이후, 언젠가부터 담 아래에는 낯선 여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의 존재에 의아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아이와 똑같은 눈을 한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어린 여자는 어쩌자고 자신을 빼박은 눈을 지 새끼에게 물려준 것인지. 여자의 출현은 그 날 밤, 나를 밤새 앓게 만들었었다. 지독한 편두통과 위경련에 땀범벅이 된 몸으로 신음하며 나는 끝없이 그 어린 여자와 남편을 저주했다. 절벽 끝에 선 내게 창끝을 들이미는 남편과 그녀의 위선이 그보다 더 끔찍할 수가 없었다. 아이에 대한 사랑과, 남편과 그녀에 대한 미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 것도 그 때쯤이었다. 행복한 가정이라는 틀 안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노력하던 시간들도 이내 의미를 잃어 버렸다. 더 이상은 다정한 엄마가 되어주는 것이 정말 아이를 위한 일인지도 자신이 없었다. 진정, 무엇이 아이를 위하는 길일까.
나는 다시 아랫배를 누르는 허전함에 치를 떨며, 입술을 씹었다. 찌르듯이 아파 오는 복부를 감싸며 천천히 바닥에 귀를 대고 누웠다. 바닥에서 희미한 파도소리가 올라와 귀를 적신다. 그것은 태초의 바다였다. 나는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아무 바위 위에서나 잠을 청해도 내 심장을 뜯으려 달려드는 육식동물이 없는 낙원 섬, 날개가 없어도 그 누구에게도 위협받지 않고 숨쉴 수 있는 나의 섬은 오늘도 호흡하고 있었다. 나는 눈물이 배어나올 것 같은 눈을 찌푸렸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이 얼굴이 말랐구나” 먹이를 노리는 사마귀와도 같은 어머님의 음성에 숨을 죽였다. 나는 손가락 끝에 감은 실을 잡아당겼다. 검은 보랏빛으로 물든 손가락 끝에 통증이 온다. 아랫배로부터 허전한 통증이 치고 올라온다. 난 심장 저 끝까지 도망가있던 음성을 힘들게 잡아서 입술까지 올려보냈다. “어젯밤에 토하고 설사를 하더니……” 독사처럼 눈을 부라리는 어머님의 얼굴이 메두사처럼 나를 향해있다. 나는 돌이 되지 않기 위해 가만히 눈을 내렸다. “넌 도대체 애를 어떻게 두길래 애가 얼굴이 반쪽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둔 거니?” 날카로운 어머님의 시선이 칼끝처럼 나를 찌른다. 나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누르며 손끝을 움츠렸다. “너 니 아이 아니라고 그러는거 아니다. 사람이 그러는 법이 아니야. 자고로 내 자식보다 더 귀하게 키워야 하는 게 남의 자식이거늘...” 공기 중에 떠다니던 눈길이 빳빳하게 얼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날카로운 얼음조각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 귓속에 벌레라도 들어온 마냥 윙윙대는 소음이 맴돈다. 명치끝이 저릿해진다. 나는 어느새 벌어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우, 제 아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거짓과 혼란은 시어머니의 눈가에 깊은 주름을 만든다. “지금 어디서 눈을 부라리니?” 나는 잠시 들었던 눈동자를 힘없이 돌렸다. 창가에 날리고 있는 커튼 사이로 물줄기 같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올이 풀린 커튼 끝을 바라보았다. 괜히 온몸이 무기력하게 가라앉는다.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애만 보는 애가 아이를 잘 못 봤으면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라는 거 아니니? 얘가 자궁을 들어내서 그러나, 이젠 무서워서 며느리한텐 말도 못 하겠구나. 잘못하면 시어미도 잡겠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를 아이 낳는 기계쯤으로 치부했던 그녀는 이제 나를 아이 돌보는 로봇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퍼석한 씁쓸함을 씹으며, 시선을 내렸다.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마치 커튼 끝에 매달린 빨간 구두처럼 커튼을 춤추게 만들고 있다. 우아하게 혹은 처절하게 춤추는 커튼이 창가를 비우자 바스락하고 부서진 햇빛이 음울하게 번지고 있다. 깨어진 햇빛의 파편이 눈에 박혔다. 나는 따끔거리는 눈을 깜빡였다. 통증이 미미해져 갈 때쯤 천천히 눈을 떠보니, 집안으로 개미 한 마리가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무리에서 이탈한 것일까. 길을 잃은 연약한 다리가 햇빛에 비춰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만 같다. 무리에서 벗어난 절망인 것일까. 아니, 그것은 오히려 무리에서 벗어난 흥분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개미는 집단에서 벗어나면 한시간도 못되어서 죽고 마는데도 불구하고 왜 무리에서 벗어난 것일까. 나는 손가락 끝에 감긴 실을 바라보았다. 어느 천에선가 풀려 나왔을 실은 때가 탄 채, 끝이 너덜너덜해져있다. 실이 감겨있던 손마디가 아려온다. 개미는 어쩌면 끝없이 자신을 압박하는 뒤엉킨 삶에 환멸을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나도 모르게 아오테아로아를 떠올리고 말았다. 날개없는 새의 주둥이가 등줄기를 쿡쿡 찌르는 것만 같은 전율이 한순간 나를 쓸고 지나간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개미에게서 은은한 바다냄새가 풍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내쉬다가, 번뜩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어머님의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이 내게 경멸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내게 질려버린 듯한 그녀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따라 나올 거 없다” 너무나 단호하게 내 배웅을 거절하는 목소리에 발바닥이 바닥에 얼어 붙어버린다. 싸늘하게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나는 허망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머님이 구두를 신고 나가실 때까지 멍하니 자리에 붙어있던 나는 가만히 창가로 다가갔다. 한 나무에 두 색의 꽃을 피우는 복숭아나무가 그 화사한 색을 담 위로 흩뿌리고 있었다. 꽃잎의 향연은 흐린 봄날의 하늘에 우울할만치 아름다운 원을 그리며 떨어진다. 나는 열린 창을 닫으며 담 너머를 살폈다. 목련 아래 전봇대에 여자의 정수리가 둥둥 떠 있다. 나는 불안한 서늘함이 눈가를 덮치는 것을 느끼며 커튼을 쥐었다. 엉성하게 담 너머를 살피는 여자의 눈이 오늘따라 영악하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자신을 긴장된 눈으로 쳐다보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잔뜩 날이 선 어머님의 뒤통수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발소리를 들은 여자의 놀란 눈이 어머님을 향했다. 나는 바싹 조여오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여자의 기척을 느낀 어머님의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쩔줄 몰라하던 여자는 얼른 고개를 숙인다. 여자의 얼굴을 알아본 어머님의 당황한 시선이 그녀를 둘러쌌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정적에 나는 어이없는 소외감을 느꼈다. 한참을 말없이 대치하고 있던 두 사람간의 태세는 어머님이 말없이 차에 올라탐으로서 깨어졌다. 어머님을 태운 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목뒤가 섬뜩해진다. 싸늘하고도 억센 분노가 심장을 강하게 쥐었다.
나는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를 안고 집 밖으로 걸어나왔다. 집안을 살피던 여자의 동공이 크게 열리는 것이 보인다. 나는 정원으로 들어가 여자의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섰다. 곤히 닫혀있는 아이의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린다. 잠시 입술을 깨물었던 나는 손바닥을 쳐들어 아이의 볼을 힘껏 내리쳤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얼어붙고 나를 보던 여자의 심장이 얼어붙는다. 아이의 찢어지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귀가 따갑게 울어대는 아이의 볼이 빨갛게 부어오른다. 마른 눈가에 눈물이 배어났다. 나는 단지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행복을 바랬을 뿐이다. 평범하게 결혼을 하고, 평범하게 집을 사고, 평범하게 아이를 낳는... 음울하게 안개가 낀 머릿속에 짙은 풀색의 까끌한 털이 스쳐갔다. 아오테아로아의 키위를 연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키위는 낮에는 빛을 피해 깊은 숲 속에 몸을 숨기고, 밤이 되어서야 몰래 둥지를 나와 땅 깊은 곳의 지렁이를 파먹으며 어두운 수풀 속에 둥지를 짓고 살아간다. 평화의 섬 아오테아로아가 준 안락에 나는 법을 잊고 날개와 꽁지까지 잃어버린 키위는 숲의 가장 어두운 곳에까지 밀려와 빛 아래에선 활동할 용기마저 잃어버렸다.
퍼덕일 날개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아 언젠가는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마저 가질 수 없는 키위. 그런 키위는 서로의 날개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든 다른 새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던 어느 날의 저녁, 그 절망과도 같은 슬픔을 떠올리며 나는 밤새 울었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온 가슴이 절절한 격정에 휩싸일 때까지 몸을 떨었던 그 날밤, 나는 가슴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아오테아로아섬에 닿을 그 어느 날, 키위를 만나게 된다면 온 몸이 생채기로 채워진다고 해도 끝까지 두 팔을 벌려 키위를 가슴에 품으리라. 그리고 그 가슴 시린 외로움을 함께 하리라...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다짐을 발끝에 떨어트리던 그 날밤의 하늘에는 단 한 점의 별빛도 비추지 않았었다. 나는 아직도 그 날 밤의 그 절절했던 동조감을 잊지 못한다. 밤이 드리운 거실 안에는 희미한 달빛도 비추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은 집에는 무거운 정적이 깔려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울다 지쳐 잠이 든 아이의 볼이 빨갛게 부어 올라있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려다가 날카롭게 귀를 찌르는 소음 때문에 다시 손을 거두어 들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엇갈린 채로 놓인 수화기의 기계음이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야근이니 기다리지 말고 자라는 남편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남편의 진의를 알 방법을 아직 나는 알지 못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소소한 일상사에 마음을 다치고 싶지는 않았다.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거라 생각했던 남편의 가슴 속은 오래 전에 내게서 멀어져 있었다. 그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는데 나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나는 가만히 집안을 둘러보았다. 고통과 분노가 곳곳에 스민 벽이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나는 거친 입술을 핥으며 외투를 입었다. 소매를 집는 팔이 무겁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숨을 골랐다가 아이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무거운 여행가방을 챙겨드는 손이 떨려왔다. 자리에 붙어 서 있던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팔을 누르는 아이의 무게가 새삼 소름끼친다. 집을 나서자, 눅눅한 바람이 아이의 머리칼을 스친다. 잠이 든 아이가 작게 칭얼댔다. 나는 아이의 볼에 가만히 입술을 갖다대며 낮은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 아직 열이 내리지 않은 아이의 볼이 뜨겁다. 눈 사이가 뜨거워졌다.
이 어미는 날개조차 가지지 못해, 언젠가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키위란다. 그런 어미는 너를 해치려 달려드는 풍파와 짐승들 속에서 따뜻한 날개깃 속에 품어 너를 보호해줄 수도, 너를 안고 날아가 줄 수도 없구나. 나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잔뜩 구름이 낀 밤하늘은 달도 별도 잃은 슬픔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다. 대문을 열고 나오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골목에 숨죽인 인기척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나는 쓰게 웃으며 여행가방에서 우산을 꺼내었다. 그리고 아이를 감싼 포대기를 조심스럽게 대문 앞에 내려놓았다. 곤하게 잠이 든 아이가 몸을 뒤척인다. 나는 옅게 미소지으며 아이의 이마를 쓸었다. 혹시라도 올지 모를 비에 대비해 우산을 펼쳐 아이의 위를 덮었다. 명치를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나를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오후 내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을 골목 안 숨은 인기척은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뜬다면 아이는 자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이가 없는 집안을 발견한 그이와 어머님은 어떤 기분이 들까. 괜히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나는 이것으로 남편과 어머님, 그 여자... 그리고 나의 삶이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나는 여행가방을 들고 길로 나섰다. 황홀한 꽃잎이 어두운 골목길을 덮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발바닥에 밟히는 꽃잎이 구름처럼 포근하다. 늦은 설렘이 가슴을 꽉 채운다. 눈을 감자 아오테아로아의 바다 내음이 콧속을 시원하게 씻고 지나간다. 다시 한번 꽃잎을 실은 바람이 불었다. 나를 아오테아로아까지 보내줄 바람이었다.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달큰한 미소 한 스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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