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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해제 그리고 회자정리=1월15일
해제 날이다. 새벽 두시다. 모두들 들뜬 기분이어서 벌써들 일어났다. 도량석을 하는 지전스님의 염불소리가 무척이나 청아하다. 산울림도 청아하다. 신라 대종이 울린다. 무겁고도 은은하다. 산울림도 은은하다.
아침 공양이 끝나자 곧 조실스님의 해제 법문이 시작되었다. 법상에 앉아 주장자를 짚은 조실스님은 언제나처럼 자비롭다.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불교의 중도를 표현한 극치다. 중도란 가치의 변증법적인 종합이요, 통일이다. 대소와 고저의 가치를 분간하여 자타를 넘어서 크고 높은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여기에 대승의 진리가 잠겨져 있다. 양극에 부딪쳐 상극분(相剋分)에 그치지 않고 더 높고 큰 가치로 지양 종합하여 나아간다. 중도란 단순한 중간이나 중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궁무진한 불교의 정신에서 다즉일(多卽日)의 진리를 선양하는데 그 본의가 있다. 일즉다(一卽多)이다.”
법문의 요지다. 불교의 중도는 역의 태극이나 자사의 중용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도 상통한다. 상극의 초극이야말로 진실로 인간의 가장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비로소 인간의 순화, 지상의 정화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다. 개인의 순정한 마음 없이 사회의 복지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점심 공양을 일찍 마친 스님들은 가사와 발우를 바랑 속에 넣고 꾸렸다. 사중에서 떠나는 스님들에게 여비조로 천 원씩 주어졌다.
회자정리(會者定離)다. 그러나 이자정회(離者定會)를 기약한 이별이기도 하다. 선객은 어느 선방에서든지 또 만나게 된다. 선객으로 있는 한. 나도 바랑을 걸머졌다. 황금색 낙엽길을 밟고 올라왔었는데 은색의 눈길을 밟으며 내려가고 있다. 지객스님과 나란히. 갈 곳이 무척이나 멀어서일까. 갈 길이 무척이나 바빠서일까. 반가이 맞이해 줄 사람도 곳도 없는데, 대부분의 스님들이 걸음발을 빨리하여 우리들을 앞질러 갔다.
지객스님이 물었다.
“스님 어디로 가시렵니까?”
“설악산을 가렵니다. 그리고 토굴 생활을 하렵니다. 권태와 나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입니다. 나태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나태의 온상 같은 토굴로 들어가서, 권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권태의 표본 같은 기계적인 생활을 하렵니다. 견성(見性)은 대중처소에서 보다 토굴 쪽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지객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저는 남방으로 가렵니다. 그리고 선방으로 가렵니다. 내가 나태해질 때마다 탁마가 필요했고 권태로울 때는 뒷방이 필요했습니다. 뒷방을 들여다볼 때마다 공부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월정사 층층계 밑에서 헤어졌다.
“성불하십시오.”
“성불하십시오.”
남방행인 그 스님은 월정사로 들어갔고 나는 월정사를 뒤로 한 채 강릉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