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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수인물역사연표 [咸陽郡守人物歷史年表]
buhopark 추천 0 조회 204 02.01.27 15:06 댓글 0
아래 자료는 함양사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관직의 선대 조상님들 세계가 궁금합니다. ------------함양군수인물역사연표 [咸陽郡守人物歷史年表] ----------- *1397년 태조 6년 5월 순군 천호(巡軍千戶) 한을기(韓乙氣)를 보내어 박자안(朴子安)을 군중(軍中)에서 베게 하였는데, 그때에 자안이 왜적을 쫓아 바야흐로 전라도 진포(鎭浦)에 이르렀다. 일이 저 적에 관계되므로 비밀히 하고 선포하지 않으니, 바깥 사람들이 알 수 없었다. 그 아들 박실(朴實)이 듣고 전하의 잠저(潛邸)에 이르렀다. 마침 의안군(義安君) 이화(李和) 등 여러 종친이 전하의 잠저에서 나오니, 전하(殿下)가 문에 나와 영접하였다. 실이 울며 아비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하니, 전하가 말하였다. “국가의 큰 일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여러 종친이 들어갔다가 하직하고 가니, 전하가 또 문에 나와 보내었다. 실이 땅에 엎어져 통곡하니, 전하가 마음으로 불쌍하게 여겨 여러 종친과 함께 예궐하여 청하게 하자 하니, 여러 종친이 말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비밀한 일인데, 상감께서 만일 어디서 아셨느냐고 물으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렵니까?” 전하가 말하였다. “그 책임은 내가 지겠소.” 곧 함께 예궐하여 내관(內官) 조순(曹恂)을 시켜 계청(啓請)하게 하니, 순이 말하였다. “이것은 비밀한 일인데 여러 종친이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하가 말하였다.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인데, 바깥 사람이 어찌 알지 못 할 리가 있겠는가?” 순이 들어가 아뢰니, 임금이 처음에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너희들은 자안(子安)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있다가 중추원(中樞院)에 명하였다. “내가 자안의 죄를 말감(末減)하고자 하니, 급히 말 잘 타는 지인(知印)을 불러 문서를 이송(移送)하라.” 중추원에서 심구수(沈龜壽)를 시켜 아뢰니, 곧 명하였다. “네가 힘을 다하여 빨리 달리어 시간에 미치어서 자안의 죽음을 구제하라.” 구수가 명을 받고 빨리 달리어 행하는 길이 이미 반이 지났는데 말에서 떨어져 역리를 시켜 대신 글을 보냈다. 글이 이르는 날, 관원이 자안을 사형하고자 얼굴에 칠을 하고, 옷을 갈아 입히고 칼날까지 갖추었다. 홀연히 바라보니 넓은 들에서 한 사람이 달려오며 입자(笠子)로 휘둘렀다. 관원이 괴이하게 여겨 형(刑)을 멈추고 기다려서 자안이 죽지 않게 되었다. 실(實)은 본래 학술이 없고 또 무예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전하가 그 아비 구제한 것을 어질게 여러 금려(禁旅)를 맡게 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태조실록. 박실은 함양 박씨로 함양의 효자이다. **1400년 정종 2년 8월 박습(朴習)과 이은(李垠)으로 좌간의(左諫議)와 우간의(右諫議)를 삼았다.정종실록. ***1408년 태종 8년 11월 전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 박자안(朴子安)이 죽으니,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쌀, 콩 50석과 종이 1백 권과 곽(槨)을 부의(賻儀)로 내려 주고, 시호(諡號)를 양혜(襄惠)라 하였다. 자안은 기위(奇偉)하고 장략(將略)이 있었다. 두 아들이 있으니 박실(朴實)과 박유(朴유)이다.태종실록. 박자안은 함양 박씨로 함양 사람이다. ****1417년 조선 태종17년 감음현을 안음현으로 개칭, 관청을 안의면으로 옮김 6월 7일 박습(朴習)을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로 삼았다.태종실록. 박습은 함양 박씨로 안의면 사람이다. 박습은 금의환향한 뒤 안의면 심진동에서 산수 유람하며 용추폭포 곁에 원당(願堂)을 지었다. 각연조사(覺然祖師)가 절의 규모를 갖추니 한국동란 때 불타기 전까지 장엄히 존재하던 장수사(長水寺 안의면 상원리)이다.옥계집. 8월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 박습(朴習)이 의령 현감(宜寧縣監) 성계(成蹊)를 파직하여 장(杖) 1백 대를 속받았으니, 큰 비가 올 때에 물가에 이미 베어 놓은 화곡(禾穀)을 거두어들이지 않아서 표류(漂流)하게 한 때문이었다.태종실록. 9월 7일 박습(朴習)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태종실록. *****1418년 태종 18년 2월 대사헌(大司憲) 박습(朴習)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라 하여 그 직(職)만 파면하였다. 5월 박습(朴習)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태종실록. ******1418년 세종 즉위년 8월 10일 박습(朴習)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태종실록. 8월 26일 병조 판서 박습(朴習), 참의(參議) 이각(李慤), 정랑(正郞) 김자온(金自溫), 이안유(李安柔), 양여공(梁汝恭), 좌랑(佐郞) 송을개(宋乙開), 이숙복(李叔福)을 의금부에 내려 가두었다. 그리고 의금부 제조(提調) 유정현 등에게 명령하기를, “상왕께서 모든 정무에 대하여는 보살피시기 가쁘시나, 오직 군사에 관한 일만은 들으시겠다고 하셨는데, 병조에서는 모든 군사에 관한 일을 한 가지도 여쭙지 않았으니, 경(卿)들은 그 까닭을 국문하라.” 하고, 또 삼성(三省)의 형조 판서 조말생, 대사헌 허지, 우사간 정상(鄭尙)과 위관(委官) 호조 참판 이지강(李之綱)들에게 잡치(雜治)하도록 하였다. 상왕은 최윤덕(崔閏德)에게도 명하여 의금부에 가서 안문(按問)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9월 14일 박습 <경상남도> 사천(泗川)으로 귀양가다.세종실록. 11월 25일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형률(刑律)에 의거하면, 강상인과 박습은 모반 대역(謀叛大逆)에 해당되므로, 수모자(首謀者)와 종범자(從犯者)를 분간하지 않고 모두 능지 처사(凌遲處死)하게 될 것이오며, 그들의 부자(父子)의 나이 16세 이상이 된 자는 모두 교형(絞刑)에 처하고, 15세 이하와 처첩(妻妾), 조손(祖孫), 형제(兄弟), 자매(姉妹)는 공신(功臣)의 집에 주어서 노비를 삼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세종실록. 12월10일 박습의 집을 몰수(沒收)하여 장흥고(長興庫)를 삼았다. *****1422년 조선 세종 4년 . 4월 박의손(朴義孫)을 죽였다. 의손은 역적 박습(朴習)의 아들로서 곤남현(昆南縣) 관노(官奴)로 몰입(沒入)되었는데, 그 어미는 습의 버림을 받은 아내이므로 서울에 살게 되었다. 의손이 천역을 싫어하여, 글을 지어 관찰사 최사강(崔士康)에게 바쳤는데, 말하기를, “한 남자의 탄식으로 6월에 서리가 내리고, 한 여자의 원망으로 3년 동안 큰 가물이 오는 것이다. 만일 모자를 같이 살게 하면 천행입니다.” 라고 하였다. 사강이 그 사연을 보고하니, 태상이 말하기를, “의손은 본시 죽을 사람이나 내가 특히 용서하였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도리어 원망과 분을 품었단 말이냐.” 하고, 의금부 옥에 내려 치죄하여 참형에 처한 것이었다.세종실록. ****1458년 세조 4년 4월 이조와 병조에 전지하기를, “윤목(尹穆)과 박습(朴習)의 자손은 모두 벼슬길을 허통(許通)하게 하라.” 하였다.세조실록. ***1728년 영조 4년 안음 출신 정희량 반란을 일으킴. 무신란. 이인좌의 난. (????) 3월 함양 군수(咸陽郡守) 박사한(朴師漢)이 처음에 군사를 내어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이 모두 적과 내응하니, 박사한은 낭패(狼狽)하여 오수욱(吳遂郁)과 더불어 손명대의 군사에 의탁해 함께 영애(嶺隘)를 지키다가 적이 함양을 버리자, 박사한이 다시 본군으로 들어가 이민(吏民) 가운데 적을 따른 자를 죽였다. 운봉(雲峰)의 천총(千摠) 정후교(鄭後僑)는 강개(慷慨)하고 담략(膽略)이 있었는데, 손명대가 군사를 내어 적을 막을 때 정후교의 힘이 많았다. 적이 함양에 들어오자, 정후교가 수백 명의 군사로 함양으로 달려들어가 적괴의 머리를 베어 바치겠다고 청하였으나, 손명대는 감사(監司)가 경계를 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여 쓰지 못했다.영조실록. 4월 운봉 현감(雲峰縣監) 손명대(孫命大)의 장계에 이르기를, “함양 군수 박사한(朴師漢)이 역적인 가짜 함양 군수 최존서(崔存緖) 및 허격(許格) 등을 잡아서 엄중히 가두었는데, 최존서는 함양에 살면서 병기(兵器)를 도적의 진중(陣中)에 수송하고, 허격은 창고의 곡식을 꺼내어 적병(賊兵)을 호궤(牛+高饋)한 자입니다.” 하였다.영조실록. 4월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이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함양 군수 박사한(朴師漢)이 적장(賊將) 심수명(沈壽明), 안음(安陰)의 위현감(僞縣監) 신수헌(愼守憲)과 그의 아들 신윤증(愼潤曾) 등을 체포하여 효시(梟示)하였고, 적당(賊黨) 이만채(李萬采), 이익춘(李益春), 정규서(鄭奎瑞) 등은 엄중히 가두었습니다.” 하였다.영조실록. **1792년 정조 16년 함양군수 윤광석이 함양군 서계(西溪)에 흥학재(興學齋)를 세우자 안의현감 연암 박지원이 그 기문을 지어주었으니 『연암집』에 있는 「함양군흥학재기」이다. ***1793년 정조 17년 계축 7월 안음의 여인으로 함양의 임술증(林述曾)에게 시집간 밀양박씨가 남편을 따라 순절하다. 박지원은 「열녀함양박씨전」을 지었고 윤광석과 산청현감 이면제(李勉齊) 및 경암대사 등도 열녀전을 지었다 ****1794년 정조 18년 윤광석이 학사루가 퇴락하자 자기 봉급을 털어 크게 중수한 뒤 박지원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짓게 하였으니 그것이「함양군학사루기」이다. ***1795년 정조 19년(1795) 윤광석이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를 간행함에 미쳐 박지원을 연루시킴으로써 둘은 절교에 이르고 말았다. 그 사연은「여윤함양광석서」에 자세하다. 인간 관계는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얽혀 있으니 이것을 초월하기는 어려운 일임을 박지원의 절교 사건에서 실감할 수 있다. 『윤충헌공실기 尹忠憲公實紀』는 3권 1책으로 그 책판이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최치원과 김종직 향사)에 간직되어 있었는데 서원이 훼철된 뒤 행방을 알 수 없다. *9월 명은(明隱) 김수민(金壽民 1734-1811 자字 제옹濟翁, 본관 부안,장수 출신) 김수민의 여정을 더 살펴보면 우정전가(禹廷全家)에서 삼박, 당시 현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1792-1796재임)이 지은 연상각(煙湘閣),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등을 보고 풍자시를 짓고 안의향교를 지나 지대촌(止垈邨 안의현 지대면知代面, 안의면 신안리)에서 사박, 23일에 녹봉서당(鹿峯書堂 안의면 하원리 하비마을)으로 녹봉(鹿峯) 유언일(劉彦一 1725-1797, 황고 신수이 문인)을 방문, 심진동에 들어가 장수사(長水寺)에서 오박, 24일에 용추폭포(龍湫瀑布)를 보고 용추암(龍湫庵)에서 서산(西山), 송운(松雲), 무학(無學), 문곡(文谷)의 영정을 친견, 도솔암(兜率庵)에 올랐다가 녹봉서당에서 육박, 25일에 위천면 상천리(上川里)에서 칠박, 26일에 면우곡(眠牛谷 위천면 강천리 면동)에서 팔박, 27일에 수승대(搜勝臺)를 거쳐 갈천동(葛川洞)에서 구박, 28일에 남령(藍嶺)을 넘어 영각사(靈覺寺)에서 십박, 29일에 화엄판전(華嚴板殿)을 보고 육십령(六十嶺)을 넘어 귀가하였다.명은집 ***1843년 헌종9년(1843) 감모재(感慕齋) 노광두(盧光斗 1772-1859)가 유언일의 유적인 녹봉서원(鹿峯書院) 상량문을 지음.감모재집. 노광두는 함양 출신으로 옥계(玉溪) 노진(盧示+眞)의 아우의 후손으로 신성진(愼性眞 1752-? 신수이의 손자)의 문인이고 이계(尼溪) 박내오(朴來吾)의 외손이다. 문과 급제하고 호조 참판까지 지냈다. **1847년 헌종 13년(1847) 남계서원 풍영루 소실 4월 병와(病窩) 송심명(宋心明 1788-1850) 함양의 정동응(鄭東膺) 및 안의 성북의 박정기(朴禎箕) 등과 함께 산천 유람. 수망령(水望嶺)을 넘어 함양의 은신암(隱身庵), 장수사(長水寺), 용추폭포, 풍류암(風流巖), 녹봉서원(鹿峯書院), 월연암(月淵巖), 대고대(大高臺)를 거쳐 산청을 지나 귀가하였다. 송심명은 남명의 연원으로 존양재(存養齋) 송정렴(宋挺濂)의 6대손이며 삼가의 유전(柳田)에서 정조 12년에 태어나 철종 1년에 별세하였다. 감모재 노광두와 이종(姨從)으로 친하였다. 성리학과 서법에 뛰어나고 산수 유람을 좋아하였다. 병와집. |
居昌郡誌 [郡誌] 碑閣 旌閭
孝子黃岡愼性眞閭 在渭川面黃山搜勝臺東하다愼性眞은黃皐守弊孫英宗壬申生이오號黃岡이니善養親하야及其親病에問醫侍湯하고血指和進에感動傍人이라哲宗戊午에命旌하니判書金學性撰旌閭記하고門人參判廬光斗書
신성진(愼性眞)
문과방목
[문과] 정조(正祖) 1년(177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3위(06/33)
생년 임신(壬申) 1752년 (영조 28)
합격연령 26세
본인본관 거창(居昌)
거주지 안의(安義)
선발인원 33명 [甲3‧乙7‧丙23]
전력 통덕랑(通德郞)
문과시험답안 논(論):인인능악인(仁人能惡人)
[부(父)]
성명 : 신인명(愼認明)
[조부(祖父)]
성명 : 신수이(愼守彛)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부(愼桴)
[외조부(外祖父)]
성명 : 박성운(朴聖運)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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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16권, 순조 12년 9월 22일 辛卯 1번째기사 1812년 청 가경(嘉慶) 17년
진전과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행하고 상전을 시행하고 관직을 가자하다
○辛卯/詣眞殿, 行酌獻禮, 贊禮李肇源加正憲, 禮房承旨尹尙圭加嘉善, 執禮朴宗琦, 大祝洪遇燮ㆍ李憲琦ㆍ曺鳳振幷加通政, 仍施華寧殿酌獻禮獻官以下賞典, 旋因京兆六十一歲人抄啓別單, 命靑城尉 沈能建, 知事李晩秀, 判敦寧, 李彦植, 令郞官存問。 曾經先朝侍從宣傳官人, 幷加資, 楊州牧使金孝建加資憲, 吏曹參判林漢浩加嘉義, 淮陽府使尹益烈, 副護軍洪羲運, 慶州府尹申溆加嘉善, 副司直愼性眞加通政, 武臣之嘉善者八人, 通政者四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