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5월2일 평산포만호는 어디에 있었을까?
5월2일 맑음
삼도 순번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도착하였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 와서 하는 말이
“남해현령(기효근), 미조항 첨사(김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들이
왜적의 소식을 한 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군기 등의 모든 물자가 모두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 고 했다.
매우 놀라운 일이다. 오시(정오경)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만은 피하려는 뜻을 가진 것 같아 한탄스럽다.
그러나 원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게 가능하겠는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 세 척이 돌아 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세 장의 공문이 내려왔다.
창평 현령이 부임하였다는 공장이 와서 바쳤다.
이 날 저녁의 군호(군대암호)는 용호이고 복병은 산수라 하였다.
1592년 4월13일 왜구가 부산포로 들어오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된다.
하지만 부산은 경상좌수영이라 그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충무공 이순신은 왜구가 들어왔다는 공문은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공문으로 4월15일 알게 되었다고 나와 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전라좌수사였던 충무공 이순신은 부하를 시켜 경상바다를 살피게 한 것 같다.
그때 시찰을 갔던 송한련이 돌아 와 한 말이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 남해현령, 미조항 첨사, 상주포,곡포, 평산포만호가 달아나고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군기나 모든 물자가 흩어져 버렸다는 보고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 사는 세상은 다 그러하겠지만 주인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 그릇이 되지 못 한 사람들이 자기 분수에 넘치는 업무를 맡다보면 항상 일이 그르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난중일기를 읽을 때마다 이 대목에서는 화가 나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조선시대 만호가 세 명, 첨사가 두 명이나 주둔했던 수군의 요충지 우리남해의 책임자들이 이러하니 다른 지역은 오죽했으랴
난중일기에도 등장하는 평산호만호가 주둔했던 지금의 평산은 관광지 남해에 걸맞게 작은 미술관도 있고 또 우리남해 바랫길인 ‘다랭이지겟길’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평산 앞바다도 오밀조밀 참으로 아름답다.
언젠가 지나간 역사이야기나 역사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지나간 이야기 이제 그만 하고 지나 간 사람 우려먹지 말고 지금 일어나는 이야기 지금 이 시대에 이름을 알리는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발전적이지 않을까요?” 했었다.
물론 그 말도 백번 옳은 말씀인 것을 안다.
역사는 승리한 사람들의 기록이니 오류가 있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오래 된 고전이 회자되는 이유는 긴 시간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기에 천년이고 이천년이고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경이나 성경 그리고 논어 같은 철학서는 문맥의 구조나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 하고자 하는 말, 사람이 살아야 하는 길에 대해서는 그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하여 오랫동안 살아남아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맥을 같이해서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충무공 이순신의 고뇌가 가슴에 와 닿는다. 사람이 일기를 쓸 때 거짓으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이 일기를 볼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없는 이야기를 꾸며서 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역사의 진실이나 지난 역사속의 인물들은 오래 된 고증을 통해 평판이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났기에 우리는 역사 속 이야기에서 배우고 역사 인물 속에서 가치관을 정립하고 인생관을 세우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지난 역사를 ‘반면교사’삼아 반복되는 오류를 없애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허나 살아보니 그도 아닌 것 같다. 정보화시대에 옛 사람들보다 지난 역사를 더 훤하게 꿰뚫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은 또 지난 역사보다 더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1592년 4월13일 18만이란 왜군이 부산포로 쳐들어 왔다.
경상우수사 원균과 경상좌수사 박홍은 제 자리를 비웠다.
한데 경상바다에 익숙하지 않았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경상바다로 와서 싸웠다. 그해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해전, 부산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왜군의 간담이 써늘하게 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아무리 자주 길게 언급해도 싫증나지 않을 이야기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평산포와 마주보이는 전라좌수영 여수에서 경상바다를 시찰하고 대책을 세우는 그 급박한 시간 평산포만호는 그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무서워 숨어있었을까?
혹시 지금도 우리나라에 공적인 일에 관여하는 사람 중에 일의 중대사를 잘 판단하지 못 하고 평산포만호같이 숨어 대응하는 사람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