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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순(柳永詢, 1552~1630) 자는 순지(詢之)이다. 호는 졸암(拙庵) 또는 북천(北川)이다. 본관은 전주이다. 선조대 후반에 7년 동안 정승으로 있던 소북(小北)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에게 발탁되어 유당(柳黨)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남원 목동에 선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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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집 제2권 / 시(詩)○두류록(頭流錄) / 정룡암에 묵다〔宿頂龍菴〕
사찰의 굵은 기둥 하늘에 솟았는데 / 蓮社重楹拔蔚藍
천 개의 옥같은 봉우리가 안개 속에 들어갔네 / 玉岑千穎入浮嵐
세존이 만약 있다면 이곳에 와서 살 것이요 / 世尊如在應來住
제석이 높이 있다 한들 내려와 참례하리라 / 帝釋雖高亦下參
폭포가 우레처럼 울리니 자던 용 놀라 깨고 / 洞瀑閧雷龍睡警
소나무가 달빛을 거르니 학은 단잠을 자네 / 壇松篩月鶴眠酣
맑은 밤 북두성 자루 움직이는 소리 듣고 / 淸宵斗柄聞伊軋
일어나 옷을 가다듬고 세 번 절하네 / 起整霞衣拜手三
[주-C001] 두류록 : 1611년 두류산 일대를 유람하며 지은 시를 엮은 것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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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집 후집 제2권 / 시(詩)○두류록(頭流錄) / 선현을 생각하다 다섯 수〔懷賢 五首〕
세상에 전하기를 최자는 금 돼지 자손으로 / 世傳崔子金猪産
학업 닦아 가야에서 훌륭한 문장 이루었다지 / 鍊業伽倻文字工
바다 건너가 당(唐)나라에서 종횡무진 누비고 / 泛海橫行李天下
아름다운 문장 지어 신라 조정에 드리웠다네 / 摛華衣被羅朝中
당년에 달빛 비치는 석문에서 신선이 되었고 / 當年羽化石門月
오랜 세월 청학동 바람 속에 《금심》 읽었네 / 千載琴心鶴洞風
지금도 간혹 보이네, 홍류(紅流)의 잔교를 / 或看至今紅水棧
선동 데리고 푸른 노새로 건너가는 모습 / 靑驢橫渡領仙童
위는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읊은 것이다.
성대한 광악의 영기 듬뿍 받아 / 堂堂光嶽稟靈優
도학이 당대에서 제일 으뜸이었네 / 道學當時第一流
민증과 같은 행실로 모범 세웠는데 / 行捋閔曾堪立範
주급의 높은 명성은 화만 불렀다네 / 名高厨及只招尤
어찌하여 청계의 풍월을 꿈꾸다가 / 如何風月淸溪夢
끝내 변방 눈 덮인 산에 갇히고 말았나 / 終作關山白雪囚
천 년 세월 문묘에서 제사를 올리니 / 樽俎千年文廟享
남아가 이 밖에 무얼 다시 구하리오 / 男兒此外更何求
위는 정일두(鄭一蠹 정여창(鄭汝昌))를 읊은 것이다.
한생의 관직은 이서의 우두머리로 / 韓生官是吏胥雄
정부에서 오랫동안 상공을 모셨네 / 槐府多年奉相公
민심이 덕 있는 이에게 갈 줄 어찌 알았으리 / 豈意民心歸有德
목숨 바쳐 신하 된 도리 다하지 못하였네 / 未能臣職死於忠
온 산 소나무 계수나무에 전조의 달빛 비치고 / 一山松桂先朝月
만고의 천지에는 열사의 기풍이 남아있네 / 萬古乾坤烈士風
어느 곳 쑥대밭에서 그의 고향을 찾을까 / 何處蓬蒿尋故里
지금도 고사리 나는 수양산 속에 있겠지 / 至今殷蕨首陽中
위는 한 녹사(韓錄事)를 읊은 것이다.
돌아보니 양당엔 봄물 가득 찼는데 / 回首兩塘春水盈
산 중턱 송백 아래는 누구의 무덤인가 / 半山松栢是誰塋
남명의 본뜻이 청구를 맑게 하는 것이라 / 南溟本意澄青壤
북궐 향해 평생토록 붉은 정성 다하였네 / 北闕平生繫赤誠
한번 올린 상소에 간신의 뼈 서늘해지고 / 一奏匭函寒佞骨
평생 즐긴 산수에 높은 명성이 걸리었네 / 百年雲水掛高名
동방에서 드높은 절의 우뚝 세웠으니 / 東方壁立尋千節
영남의 군웅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 嶠外群雄孰使令
위는 조남명(曺南溟 조식(曺植))을 읊은 것이다.
푸른 회나무와 붉은 단풍나무 온 산에 우거지고 / 蒼檜丹楓萬壑陰
푸른 못과 날리는 폭포를 한 대가 굽어보네 / 碧潭飛瀑一臺臨
선생이 자식 가르치던 서루 우뚝 서 있고 / 先生敎子書樓峙
노승이 참선하던 별원 깊숙이 자리하였네 / 長老參禪別院深
자식 위해 지은 서재는 대단한 일 아니나 / 童稚治齋事不鉅
대유가 세운 절개를 선비들 모두 흠모하네 / 大儒植節士皆欽
우리 집 아이들도 예서 공부해야 하리니 / 吾家豚犬亦宜往
한가한 날에 황계로 너희를 찾아가리라 / 暇日黃溪當爾尋
위는 노옥계(盧玉溪)를 읊은 것이다.
[주-D001] 최자(崔子)는 …… 자손으로 : 최자는 최치원(崔致遠)을 말하는데, 그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최치원의 어머니가 금 돼지에게 잡혀 갔다가 최치원의 아버지 최충의 지략으로 구출된 뒤 여섯 달 만에 최치원을 낳았는데, 최충이 금 돼지의 아들인가 의심하여 아이를 내다 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소나 말이 피해 가고 밤이면 선녀가 내려와 보살펴 주었으므로 다시 연못에 버렸는데, 갑자기 연꽃 한 송이가 피어올라 최치원을 받들었고 백학 한 쌍이 날아와서 날개로 덮어주었다.”[주-D002] 바람 …… 읽었네 : 최치원과 청학동을 결부시킨 것이다.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비지(秘志)에, ‘최고운(崔孤雲)은 죽지 않고 지금도 청학동에서 노닐고 있어, 청학동의 승려가 하루에 세 번이나 고운을 본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 없으나, 만약 이 세상에 진짜 신선이 있다면 고운이 신선이 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고운이 과연 신선이 되었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서 노닐겠는가.”라는 내용이 있다. 《금심》은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의 별명이다. 《황정내경경》 〈서(序)〉에 “《황정내경》은 일명 《태상금심문(太上琴心文)》이다.” 하였고, 〈상청장(上淸章)〉에 “금심을 세 번 읽자 학이 춤춘다.[琴心三疊舞胎仙]” 하였다.[주-D003] 지금도 …… 모습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비지(秘志)에 “근년에 어떤 사람이 최고운이 푸른 나귀를 타고 외나무다리를 나는 듯이 건너가는 것을 보았는데, 강씨(姜氏) 집안의 노복이 고삐를 잡고 만류하였지만 채찍을 휘두르며 돌아보지도 않았다.”라는 내용이 있다.[주-D004] 광악(光嶽) : 삼광(三光)과 오악(五嶽)의 준말이다. 삼광은 일(日)ㆍ월(月)ㆍ성(星)이고, 오악은 중국의 태산(泰山)ㆍ화산(華山)ㆍ형산(衡山)ㆍ항산(恒山)ㆍ숭산(嵩山)인데,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명산을 뜻한다.[주-D005] 민증(閔曾)과 같은 행실 : 민증은 효자로 일컬어진 공자의 제자 민자건(閔子騫)과 증자(曾子)의 병칭이다. 정여창은 부친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다 전사하자, 18세의 나이로 함경도로 달려가 시신을 찾아 돌아왔으며, 모친이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주위의 염려를 무릅쓰고 염습과 빈전(殯奠)을 모두 예에 맞게 하였으며, 1년 동안 죽을 마시고 3년 동안 여막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1490년(성종21) 윤긍(尹兢)에 의해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다. 《一蠹遺集 卷3 神道碑銘》[주-D006] 주급(厨及) : 팔주(八厨)와 팔급(八及)으로, 후한(後漢)의 사대부들이 당시의 명사들을 부르던 칭호이다. ‘팔준(八俊)’, ‘팔고(八顧)’, ‘팔급(八及)’, ‘팔주(八厨)’라는 호칭이 있었는데, ‘준’은 빼어난 자를 가리키고, ‘고’는 덕행으로 사람을 이끌만한 자를 가리키며, ‘급’은 추종자를 이끌 능력이 있는 자를 가리키고 ‘주’는 재물로써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킨다.[주-D007] 청계(淸溪)의 풍월을 꿈꾸다가 : 정여창의 고택이 함양(咸陽)에 있는데, 그 근처에 청계가 있다.[주-D008] 끝내 …… 말았나 : 정여창이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은 것을 말한다.[주-D009] 민심이 …… 줄 : 조선의 건국을 말한 것이다.[주-D010] 전조(前朝) : 고려를 말한다.[주-D011] 지금도 …… 있겠지 : 함양에 수양산(首陽山)이 있으므로, 주(周)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뜯어 먹었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고사와 연결시켰다.[주-D012] 한 녹사(韓錄事) : 한유한(韓惟漢)으로, 고려 신종(神宗) 때의 은사(隱士)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한유한이 개성에 살다가 최충헌(崔忠獻)의 정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 난(亂)이 일어날 것이라 여겨 처자를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뒤에 나라에서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한유한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많은데, 고려 말엽에 나라가 혼란해 질 것을 예견하고 은거하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더 깊이 숨어버린 인물이라는 설도 있는데, 여기서는 후설을 취한 듯하다.[주-D013] 양당(兩塘) : 두류산 덕산(德山)에 있는 마을로, 조식(曺植)이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살았던 곳이다.[주-D014] 청구(靑丘)를 …… 것 : 우리나라의 정치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주-D015] 푸른 …… 굽어보네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낭떠러지에 접한 바위가 자연스레 대(臺)를 이루었는데 대암(臺巖)이라 한다. 그 아래에는 깊은 못이 검푸른 빛을 띠고 있어 무서워서 내려다볼 수 없었다.” 하였다.[주-D016] 선생이 …… 서루(書樓)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정룡암(頂龍菴)의 북당(北堂)은 거처하는 승려 말로는, 노 판서(盧判書)의 서재라고 하였다. 옥계(玉溪) 노진(盧禛) 선생이 자손을 위해 지은 것으로 선생도 봄이면 꽃구경 하고 가을이면 단풍놀이 하러 흥이 나는 대로 왕래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하였다.[주-D017] 노옥계(盧玉溪) : 노진(盧禛, 1518~1578)으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응(子膺), 호가 옥계이다. 1546년(명종1)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최예심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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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집 후집 제2권 / 시(詩)○두류록(頭流錄) / 두류산을 유람하다 백 운〔遊頭流山百韻〕
막힘없는 하늘은 온화한 기운 보내고 / 太虛無閡煦氳氤
음양의 조화로 모든 만물 이루어지네 / 品物咸由二氣甄
녹아서 흐르는 시내는 만든 물길 아니요 / 融作川流非决導
맺혀서 이루어진 산악은 누가 빚어내었나 / 結成山嶽孰陶勻
천하에는 우뚝하게 빼어난 산 다섯이요 / 穹窿五有寰中秀
바다밖엔 아득하게 신선산이 셋이라네 / 縹緲三稱海外神
우리나라 두류산이 땅은 다르지만 / 箕國頭流輿地別
선가의 방장산과 이름이 부합하네 / 仙家方丈號名眞
남방의 웅장한 진산을 익히 들었으니 / 飫聞南紀雄爲鎭
중화와는 저 멀리 까마득히 떨어졌네 / 踔遠中華隔幾塵
가는 자들 모두 길이 끊어짐을 꺼리니 / 之者擧嫌途道絶
아, 원숭이와 다람쥐만 이웃이 되었네 / 於乎虛作狖鼯隣
경치 좋은 용성 땅으로 부임해서 오고 / 龍城剖虎來佳境
좋은 시절 맞춰 목동에서 꽃구경 하네 / 木洞看花及令辰
천부의 사군은 성대한 연회를 열고 / 天府使君開勝宴
수암의 처사는 좋은 자리 참석했네 / 水巖處士與華鞇
꽃구경하자는 약속에 함께 나란히 달려가 / 齊鑣共赴尋芳約
지팡이 날리며 그저 승려 뒤를 따라가네 / 飛杖聊隨學佛人
운현 길 허물어진 비각에 잠깐 머물러 / 廢閣乍淹雲縣路
석계 물가의 큰 비석에 경건히 절하노라 / 豐碑虔拜石谿濱
운봉(雲峰)에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가 있다.
천추의 왕자의 자취 예서 모두 시작되니 / 千秋王跡此皆兆
한번 싸움에 패업 이룸이 이유가 있었네 / 一戰伯功□有因
지형이 호남과 영남의 목구멍이니 / 地形咽喉湖與嶠
인의를 겸하는 병가의 방략이라네 / 兵家方略義兼仁
황산의 참언은 황산의 죽음으로 응했고 / 黃山讖應荒山死
왕씨 임금은 이씨의 신하가 되었네 / 王氏君爲李氏臣
돌에 깃발 꽂은 흔적을 노인에게 물어보고 / 石着旗扃咨古老
바위가 피를 흘린 일을 주민에게 물어보네 / 巖流衁液訊居民
융성과 쇠퇴는 예부터 시운에 관계되니 / 替隆從古關時運
천지는 앞서 미리 곡진하게 알려준다네 / 天地先期告懇諄
잠시 말안장 풀고 백장 사찰 이름이다. 에서 쉬는데 / 暫卸游鞍休百丈
마음껏 감상하려니 다하는 봄이 애석하구나 / 欲諧心賞惜三春
이 날이 봄의 마지막 날이었다.
바람 차가운 그늘진 골짜기엔 꽃이 막 피는데 / 風凄陰壑花初軟
봄이 저무는 양지 언덕엔 잎이 이미 무성하네 / 節晏陽坡葉已蓁
푸르게 물든 물은 승복처럼 깨끗하고 / 挼碧流如僧服淨
붉게 타는 꽃은 불등 꽃 이름이다. 처럼 새롭네 / 燃紅花若佛燈新
남여로 시큰한 다리 대신하려는데 / 籃輿要替酸哀脚
넝쿨이 때로 늙은이 몸에 매달리네 / 藤蔓時懸老大身
시내 이름이 반암이니 여상이 은거했나 싶고 / 溪號磻巖疑隱呂
마을 이름이 영대이니 진나라 유민임을 알겠네 / 村名嬴代認逃秦
황천 협곡엔 맑은 우레 어지러이 다투고 / 晴雷亂闘黃川峽
흑수 가에는 흰 물방울이 서로 쏟아지네 / 白雪交加黑水垠
새로 나온 고사리 뜯느라 걸음마다 지체되고 / 步步行稽新蕨采
길게 늘어뜨려 찬 붉은 난초에 허리가 무겁네 / 纚纚腰重紫蘭紉
그림 같은 사찰은 남기와 어울리고 / 伽藍如畵嵐光合
산을 덮은 철쭉은 채색 비단 같구나 / 躑躅成山錦彩均
동부의 암석은 첩첩 옥대를 이루었고 / 洞府岩成玉臺壘
가사어는 벼논 같은 비늘로 덮혔네 / 袈裟魚被稻田鱗
유종(儒宗)은 자식 가르쳐 이름 남겼는데 / 宗儒訓子遺名在
정용암(頂龍岩)에 판서 노진(盧禛)의 서재가 있다.
옛 집엔 사람 없고 훌륭한 자취는 묵었네 / 故屋無人勝跡陳
물길 다한 곳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고 / 行到水窮拚寄宿
월락 골짜기 이름이다. 을 찾아 새벽에 떠났네 / 前尋月落去凌晨
높은 나무 첩첩이 쌓여 맑은 그늘 모이고 / 崇芒疊翠淸陰聚
수많은 돌 무더기 이루어 상쾌한 기운 모였네 / 衆石交叢爽氣屯
먹줄 닿지 않으니 늙은 편백나무는 소를 가리고 / 老栢蔽牛繩墨遠
귀신이 진노하니 큰 소나무는 사당에 의탁하네 / 長松依社鬼神嗔
반야봉 앞을 구불구불 지나가고 / 委蛇般若峯前過
영원사 경내로 어느덧 이르렀네 / 遄邁靈源寺裏臻
흰 눈썹의 화상 수선(善修)이다 은 선정에 평온하고 / 和尙雪眉禪定穩
사미는 얼음처럼 깨끗한 얼굴로 부처의 도 따르네 / 沙彌氷面佛陀遵
어깨까지 자란 편백나무 한 쌍은 싸늘한 달빛에 흔들리고 / 肩生雙栢搖寒月
털처럼 가는 긴 무지개는 푸른 하늘 가로지르네 / 毫吐長虹貫碧旻
공(空)을 잡아 색상을 초월해야 하니 / 要把一空超色相
어찌 오온으로 윤회(輪回)를 짓게 하리 / 寧敎五蘊作車輪
책상에 쌓인 불경은 늘그막을 즐길 만하고 / 梵經堆案堪娛老
소반 가득 냇가 나물은 손님 대접하기 족하네 / 溪蔌盈盤足享賓
발 밑에서 잠깐 사이 구름이 일어나니 / 脚下雲容俄冉冉
시내 앞에 갑자기 빗기운이 가득하네 / 溪前雨意忽津津
배회하다 어느새 푸른 덩굴 벽을 내려와 / 低回遽落靑蘿壁
비틀거리며 다시 푸른 보리밭을 지났네 / 蹭蹬還經翠麥畇
들 먼지 당에 가득한 군자 사찰 이름이다. 는 더러운데 / 野粉滿堂君子陋
난간에 핀 모란은 찡그린 미인처럼 아름답네 / 牧丹當檻美人嚬
한 줄기 맑은 냇물은 도로와 나란히 흐르고 / 淸流一帶途邊並
천 구비의 돌 비탈은 산골 물길을 따라가네 / 風磴千盤澗上循
골짜기 도는 높은 강 용유담(龍游潭)이다. 은 어찌 이리 노하였나 / 谷轉高江何吼怒
못에 서린 음수의 구불구불 얽힌 모습 보이네 / 泓蟠陰獸看輪囷
파낸 듯한 돌솥은 천 길이나 검푸르고 / 刳成石釜千尋黝
쏟아지는 폭포는 만 수레가 달리는 듯하네 / 注却銀潢萬軸轔
넝쿨 잇고 장대 연결해 재어보니 구멍 깊어 놀라고 / 續蔓連竿驚邃竇
희생 잡고 폐백 빠뜨려 정결한 제사 올리네 / 剸牲沈幣饗明禋
새가 낙엽을 물어가니 찌꺼기 없이 깨끗하고 / 鳥啣落葉澄無滓
구름이 첩첩 산을 덮으니 가물어도 마르지 않네 / 雲覆層巒旱不貧
우르르 쾅쾅 아향은 나그네 좇아오고 / 隱隱阿香隨客至
번쩍번쩍 번개는 자주 사람을 놀래키네 / 闐闐列缺駭人頻
산길 지나느라 꽃 사이 이슬에 듬뿍 젖고 / 穿林盡濕花間露
길을 잘못 들어 돌 위의 죽순 잔뜩 꺾었네 / 失路多摧石上筠
용유 못 이름이다. 를 굽어보니 연무 피어오르고 / 頫視龍游出氛靄
깊이 마적 암자 이름이다. 을 찾아 가시덤불 지났네 / 窮探馬跡歷叢榛
추성의 깨끗한 경내엔 사찰이 세워졌고 / 楸城凈界開蓮塔
옹석의 신묘한 마을엔 참죽나무 모였네 / 甕石神坊簇榦杶
숲에 우뚝한 도파 탑(搭)이란 뜻의 범어(梵語)이다. 는 신령한 범이 지키고 / 林聳堵波靈虎守
폭포 아래 다라 단(壇)이란 뜻의 범어이다. 에는 길든 사슴이 물을 마시네 / 泉懸茶邏飮麋馴
사정의 위태로운 잔도에 털이 자주 곤두서고 / 棧危獅頂毛頻竪
옷이 엷어 이당에선 몸이 얼어 터지려하였네 / 衣冷夷堂體欲皴
고개 들어 우뚝한 천왕봉을 바라보고 / 擡首王峯看突兀
부여잡지 않고 몸을 날려 낭현에 오르네 / 騰身郞峴謝緣夤
천 년 된 짧은 나무는 얽힌 돌에 기대었고 / 千齡短木欹纏石
태고적 견고한 얼음은 반짝이는 은처럼 빛나네 / 太始堅氷皓爛銀
헝클어진 이끼는 푸른 털 담요 비슷하고 / 苔髮鬖髿靑似罽
옹이 박힌 꽃가지는 붉은 꽃 피우지 못했네 / 花梢癰腫紫難顰
속이 빈 채 반쯤 말랐으니 어찌 동량으로 쓰이리 / 空心半槁寧充棟
절로 도랑에서 썩어가니 누가 땔나무로 가져가리 / 自朽中溝孰負薪
반짝이는 별을 따니 빛이 찬란하고 / 摘取明星光燦燦
기이한 풀 뜯으니 향기가 넘쳐나네 / 擷來瓊草馥誾誾
우뚝한 정수리에 노을은 펼쳐지고 / 霞裳披拂巍巍頂
높다란 갓에 북두 낮게 드리웠네 / 玉斗低垂岌岌巾
들이킨 한 잔 술로 산과 바다 거둬들이고 - 1자 판독 불가 - / 溟嶽收□盃一歃
부릅뜬 두 눈으로 하늘과 땅이 들어오네 / 乾坤輸入目雙瞋
동쪽 부상 그림자는 시 읊는 와탑에 일렁이고 / 榑桑東影搖吟榻
서쪽 약수의 물줄기는 낚싯줄처럼 가늘구나 / 弱水西流細釣緡
표관 문을 두드리니 표범 소리 무시무시하고 / 豹關叩扃聲可厲
섬궁이 머리 누르는 통에 목을 펴기 어렵네 / 蟾宮壓首吭難伸
뭇 봉우리는 멀리 백두산에서 온 것이요 / 衆峯來自白頭遠
한 줄기 끝내 푸른 바닷가에 도달하였네 / 一脉終窮蒼海滣
성대한 대지의 정기가 여기에 축적되니 / 磅礴坤精於此蓄
거침없는 하늘의 운행 어찌 이리 더딘가 / 縱橫天步一何迍
동쪽에 흩어진 수천 산은 제후처럼 복종하고 / 千山東散諸侯服
남쪽으로 만 리 길 달려 천자처럼 순행하네 / 萬里南馳天子巡
크고 높은 깃발 세운 의장대가 나열되고 / 大纛高牙森隊仗
나는 듯하고 춤추는 듯한 준마가 줄지었네 / 飛驂舞服列騏駰
조정 반열엔 수많은 관원들이 즐비하고 / 朝班濟濟千官品
뜰 가득 사해의 진귀한 물건이 빛나네 / 庭實煌煌四海珍
구름처럼 모여든 조정 백관들 분잡하고 / 雲合冠裳相雜沓
분주히 달려온 손님과 시종들 어지럽네 / 駿奔賓從互紛繽
금 쟁반과 옥 그릇에 진수성찬 차려지고 / 金盤玉豆排嘉饌
화려한 옷과 꽃 비녀가 비빈은 둘러쌌네 / 珠服花簪擁美嬪
계집종은 재빨리 달려가 장로를 공경하고 / 丫䯻蹌趨欽長老
동자는 두려워 조심하며 엄친을 받드네 / 弁髦夔栗奉嚴親
사씨 집안 옥수 같은 자제들 빼어나고 / 謝家玉樹諸郞秀
서씨 집안 기린아 같은 아들 수두룩하네 / 徐氏祥麟衆子兟
산신령이 사람을 도와 우주를 청명하게 하고 / 山鬼助人澄宇宙
바람과 안개가 솜씨를 부려 난간을 둘러쌌네 / 風煙效技繞欄楯
운문과 월출 모두 산 이름이다. 엔 뜬구름 걷히고 / 雲門月出豁遊氣
금수와 노진 모두 물 이름이다. 엔 푸른 물결 가로흐르네 / 錦水露津橫碧淪
학사 최치원(崔致遠)이다. 가 오지 않아 세 골짜기 묵었고 / 學士不來三洞古
남명 조식(曺植)이다. 은 어디에 있나 양당은 막혔네 / 南溟安在兩塘陻
사수에서 패배한 누감 동일원(董一元)이다. 을 생각하고 / 遙思泗水屯樓艦
외로운 충정 이순신(李舜臣)이다. 위해 물가 마름 올리고 싶네 / 欲爲孤忠薦渚蘋
누가 진주성에서 원통한 피 흘리게 했나 / 誰使晉城寃血濺
남원읍에 묻힌 유골에 그저 슬퍼할 뿐 / 空悲原邑戰骸窀
산수의 풍광은 길이길이 한가로운데 / 湖山雲物長閑暇
속세의 풍파는 부질없이 고생스럽네 / 塵世風波浪苦辛
들쭉날쭉한 산에 거문고 소리 드높고 / 鴻軫聲高山齾齾
맑디맑은 바다에 퉁소 소리 퍼져가네 / 鳳簫吹徹海粼粼
옛 사당은 언제부터 천온을 높이었나 / 遺祠何代尊天媼
길몽 꾼 당년에 상서로운 기린 탄생하였네 / 吉夢當年誕瑞麟
삼한을 통일하여 돌보고 복을 드리웠으니 / 一統東韓垂眷祜
천 년 동안 남방에서 정결한 제사 올렸네 / 千年南國享精純
무당 불러 재물 바침은 부박한 풍속이요 / 邀巫傾賮流風薄
귀신에게 아첨해 복 구함은 어리석은 말속이네 / 諂鬼祈禠末俗嚚
향적암 푸른 바위에 기대어 밤을 보내고 / 香積夜眠依翠石
영신암 풀밭에 앉아 바람 맞으며 먹었네 / 靈神風餐藉芳茵
구름에 닿는 높은 층단이 경쇠처럼 달려있고 / 層壇雲搆懸如磬
백발의 승려는 대춘(大椿)처럼 장수하였네 / 一衲霜髭壽似椿
연기 사그라진 향로에는 지난밤 불씨 남았고 / 寶鴨煙沈餘宿火
티끌 없는 등나무 침상엔 향기로운 죽 놓였네 / 藤床塵淨貯香籸
험한 산길 찾아다니느라 괴롭게도 발 부르트고 / 凌危覔路勞重繭
보이는 사물마다 시 짓느라 고심하며 읊조리네 / 觸物搆詩費苦呻
학은 깊은 골짜기 맴돌다 검은 구름 뚫고 가고 / 幽壑鶴盤穿𪑓黑對
원숭이는 뻗은 줄기에 매달려 벼랑을 내려가네 / 飛莖猿掛下嶙峋
장막을 두른 듯 무성한 수풀엔 삼광이 어둡고 / 繁林布幕三光晦
나래를 편 듯한 고운 누각에선 오채가 빛나네 / 畵閣翔翬五彩彬
고요한 낮엔 삼화로 지저귀는 새가 날아들고 / 晝靜三花藏語鳥
소란한 아침엔 일천 게송에 놀란 노루 달아나네 / 朝喧千偈竄驚麕
신선 자취 세심히 따라 홍류 산골물 이름이다. 를 방문하고 / 仙蹤細向紅流訪
옛 일을 부지런히 좇아 만월 암석 이름이다. 을 찾아가네 / 故事勤從滿月詢
우뚝한 여공대(呂公臺)엔 푸른 이끼만 끼었고 / 臺峙呂公空碧蘚
깊은 기 - 1자 판독 불가 - 담은 붉은 입술 잃었네 / 潭深妓□失丹唇
비석에 새겨진 훌륭한 글은 탁본할 만하고 / 工文刊記碑堪印
석벽에 새긴 큰 글자는 마멸되지 않았네 / 巨字鐫厓石不磷
둥지만 남은 청학봉에는 학을 볼 수 없고 / 靑鶴遺棲人莫見
폭포 쏟아지는 향로봉은 세상에 비길 데 없네 / 香爐飛瀑世無倫
여와가 한 덩이 돌로 메우지 않았다면 / 女媧不補一團石
천제가 응당 천 길의 띠를 드리웠으리 / 天帝應垂千尺紳
햇살에 빛나는 붉은 안개 자욱하고 / 耀日紅煙紛漠漠
허공에 흩어진 옥 가루 반짝이네 / 浮空玉屑散璘璘
깊은 정성으로 공중에서 영액을 삼키고 / 深心靈液空中嚥
자연의 조화로 뱃속에 아이 잉태하였네 / 元化嬰孩腹裏脤
산 기운으로 몸 씻으니 푸른빛으로 바뀌고 / 山氣洗骸知綠換
얼굴 가득 봄빛 받으니 붉은빛 고루 퍼졌네 / 春光盎面覺丹均
구름과 물을 저버리고 홍진으로 돌아가면 / 紅塵有路欺雲水
묘신에 맞추느라 문서에 바삐 쫓기리라 / 朱墨催人趁卯申
승려들은 길을 막고 다투어 위로하고 / 祇老遮途爭勞勞
관아 말은 골짜기 들어와 이미 서성이네 / 官騶入谷已駪駪
관아 동자는 닳은 짚신 보고 서로 웃는데 / 衙僮爭笑芒鞋胝
산길이 어찌 누더기 도복 입은 자를 금하랴 / 山徑那禁道服鶉
화개동에 수레 세우고 옛 철인을 생각하고 / 花洞傍車懷古哲
정일두(鄭一蠧)가 화개(花開)에 살았다.
용정에 말을 멈추고 나의 인척 방문하네 / 龍亭歇馬問吾姻
인척 최온(崔蘊)이 용두정(龍頭亭)에 살았다.
흥이 다하고 슬픔이 오니 맑은 눈물 떨어지고 / 悲來興盡垂淸淚
산은 높고 물은 멀어 대궐과 멀리 떨어졌다네 / 水遠山長隔紫宸
관복 입고서 몇 년이나 성상을 모시었나 / 朱紱幾年陪輦轂
옥당을 돌아보며 윤음(綸音)을 추억하네 / 玉堂回首憶絲綸
대궐 떠나 비바람 속에 험한 길 다니며 / 風雲鳥路違雙闕
산해를 떠돌아다니느라 오십이 넘었네 / 山海蓬飄負五旬
기린은 조보 같은 마부가 필요 없고 / 騏驥無勞造父御
예장은 장인의 선택을 기다리지 않네 / 豫章休待匠人掄
문장을 시험하기도 전에 쇠약해졌으니 / 文章未試衰侵病
세속의 어느 누가 옥과 돌을 구분하리 / 流俗誰分玉與珉
내일 아침 넝쿨에 대 갓을 걸어 둔다면 / 明日篁冠掛蘿薜
머리 숙이며 속세에 시달릴 필요 없으리 / 不須低首困塵闉
[주-D001] 빼어난 산 다섯이요 : 중국의 오악(五嶽)으로, 동쪽의 태산(泰山), 남쪽의 형산(衡山), 서쪽의 화산(華山), 북쪽의 항산(恒山), 중앙의 숭산(嵩山)을 말한다.[주-D002] 신선산(神仙山)이 셋이라네 : 전설상의 신선산으로 불리는 봉래산(蓬萊山), 영주산(瀛洲山), 방장산(方丈山)을 말한다.[주-D003] 선가(仙家)의 …… 부합하네 : 두류산의 이칭으로 방장산이라는 이름이 걸맞다는 말이다.[주-D004] 용성(龍城) : 남원(南原)의 옛이름이다.[주-D005] 목동(木洞) : 남원에 있는 마을이다.[주-D006] 천부(天府)의 사군(使君) : 순천 부사(順天府使) 유영순(柳永詢, 1552~1630)을 말한다.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따르면, 유영순이 한식(寒食)에 용성 목동에 있는 자신의 선영에 성묘하러 왔다고 한다.[주-D007] 수암(水巖)의 처사 : 진사 김화(金澕)를 말하는데,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따르면, 김화는 당시 용성 목동 수용암(水舂巖) 근처에 재간당(在澗堂)을 짓고 살고 있었다고 한다.[주-D008] 허물어진 비각(碑閣) : 황산대첩비 비각으로,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정오 무렵 운봉(雲峯) 황산(荒山)의 비전(碑殿)에서 쉬었다.”는 내용이 있다.[주-D009] 지형이 …… 방략이라네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그 땅의 형세를 살펴보면, 바로 호남과 영남의 목구멍을 누르고 있는 형국이니, 험한 곳을 막아 유리한 곳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병가(兵家)에서 말하는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하는 방법’이다.”는 내용이 있다.[주-D010] 황산(黃山)의 …… 응했고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고려 말에 왜장 아키바쓰[阿只拔都]가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 지방을 노략질했는데, 견고하게 버티는 보루가 없었다. 일본의 참위서(讖緯書)에 ‘황산(荒山)에 이르면 패하여 죽는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마침 산음(山陰 산청) 땅에 ‘황산(黃山)’이 있어 그 길을 피해 사잇길로 운봉 땅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황산의 험한 곳에서 맞이하여 크게 물리치셨다.” 하였다.[주-D011] 돌에 …… 물어보고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황산의 노인들은 바위 구멍을 가리키며 태조가 황산에서 싸울 때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하였다.[주-D012] 바위가 …… 물어보네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황산대첩비 곁에 ‘혈암(血巖)’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 말로는, 임진년 난리가 일어나기 전에 이 바위에서 저절로 피가 흘렀는데, 샘처럼 끊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서울에 알렸는데 답변이 오기도 전에 왜적이 남쪽 변경을 침략하였다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주-D013] 불등 : 불등화(佛燈花)라는 꽃으로,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백장사에서 쉬는데, 어린아이가 꽃 두 송이를 꺾어 가지고 왔다. 하나는 불등화라고 하는 꽃인데 연꽃처럼 크고 모란꽃만큼 붉었다.”라는 내용이 있다.[주-D014] 시내 …… 싶고 : 주(周)나라 여상(呂尙)이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였기 때문에 반암과 연관지어 말한 것이다.[주-D015] 마을 …… 알겠네 : 진(晉)나라 때 무릉(武陵)의 어부가 복사꽃이 흘러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가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을 만났다는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관련지어 말한 것이다. 영(嬴)은 진(秦)나라의 성씨이다.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골짜기에 두세 집이 있는데 영대촌(嬴代村)이라 하였다.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깊은 골짜기와 수많은 봉우리들 사이에서 나는 것이, 참으로 하나의 무릉도원이었다. 이 마을이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구나.” 하였다.[주-D016] 황천(黃川) …… 다투고 : 황천 협곡을 흘러내리는 폭포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주-D017] 가사어(袈裟魚) : 두류산 대암(臺巖)에 아래 깊은 못에 사는 물고기로, 비늘 무늬가 승려의 가사와 같아서 붙은 이름이다.[주-D018] 유종(儒宗)은 …… 남겼는데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따르면, 정룡암(頂龍菴)에 판서 노진(盧禛)이 자손을 위해 지은 서루(書樓)가 있다고 한다.[주-D019] 먹줄 …… 가리고 : 재목감이 되지 못하기에 편백나무가 소를 가릴 만큼 크게 자랐다는 말이다.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의하면, 장석(匠石)이 제(齊)나라로 가다가 곡원(曲轅)이라는 땅에 이르러 사당 앞의 상수리나무를 보았는데, 크기는 소를 가릴 정도이고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다. 그런데 장석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자 제자가 이유를 물었다. 장석은 그 나무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이라고 대답하였다.[주-D020] 귀신이 …… 의탁하네 : 사당에 있는 나무를 베면 귀신이 진노하기 때문에 소나무가 크게 자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장자》 〈인간세〉에 “사당의 나무가 되지 않았다면 벌채당했을 것이다.” 하였다.[주-D021] 색상(色相) : 불교 용어로, 겉으로 드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체의 외물(外物)이다.[주-D022] 오온(五蘊) : 불교 용어로,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 가지 작용이 모여 쌓여서 사람의 신심(身心)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색은 물질(物質) 현상이고, 나머지 네 개는 심리(心理) 현상이다.[주-D023] 들 …… 더러운데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인지라 흙먼지가 당 안에 가득하였다.……며칠 동안 구름 밖을 유람하여 마치 신선이 되어 천상에 간 듯하였는데, 홀연 하루 저녁에 누런 티끌 세상에 떨어지니 사람의 정신을 답답하게 하여 밤새 악몽을 꾸었다. ‘어디인들 군자가 살면 어찌 비루함이 있겠는가.’라는 공자의 말씀은 수긍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주-D024] 찡그린 미인처럼 아름답네 : 월(越)나라 미인 서시(西施)가 속 아픈 병이 있어서 얼굴을 찡그리니 그 찡그리는 것도 어여쁘고 아름다웠다는 고사를 차용하였다.[주-D025] 파낸 듯한 돌솥 : 돌이 움푹 들어가 못을 이루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주-D026] 쏟아지는 …… 듯하네 : 세차게 흘러가는 물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두 언덕이 나뉘어져 거대한 협곡을 이루고 동강(東江)이 그 가운데를 흐르며 세차게 쏟아져 물거품이 용솟음친다.”라는 내용이 있다.[주-D027] 넝쿨 …… 재어보니 : 넝쿨을 잇고 장대를 세워서 얼마나 깊은지 재어본다는 말이다.[주-D028] 희생 …… 올리네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따르면, 용유담(龍游潭)은 두류산의 3대 무당 소굴의 하나로 복을 빌러 오는 자들이 많다고 한다.[주-D029] 아향(阿香) : 뇌거(雷車)를 밀었다는 전설 속의 여신으로, 우레를 뜻한다. 《搜神後記 卷5》[주-D030] 추성(楸城)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함양군(咸陽郡)〉에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다. 우마(牛馬)가 지나지 못하는 곳으로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주-D031] 옹석(甕石) : 옹암(甕巖)으로, 독을 엎어놓은 듯한 형상의 웅장한 바위이다.[주-D032] 사정(獅頂)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시냇가에 돌출한 가파른 언덕이 보였는데, 의신사의 승려가 ‘사자 머리[獅頂]’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주-D033] 이당(夷堂) : 청이당(淸夷堂)으로,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보인다.[주-D034] 낭현(郞峴) : 영랑대(永郞臺)로,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보인다.[주-D035] 짧은 나무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따르면, 천왕봉을 오르는 도중에 보이는 나무는 높이 올라갈수록 키가 더 짧았다고 한다.[주-D036] 반짝이는 …… 넘쳐나네 : 반짝이는 별은 쌓인 눈을 말한다.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바위틈에 눈이 한 자 넘게 쌓여 있기에 한 움큼 집어 먹으니 목을 적실 수 있었다. 겨우 싹이 튼 풀이 있었는데 푸른 줄기는 청옥(靑玉)이라 하고 붉은 줄기는 자옥(紫玉)이라 하였다. 승려가 ‘이 풀은 맛이 달고 부드러워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한 움큼 뜯어 왔다. 내가 ‘그대가 말한 청옥과 자옥은 바로 선가(仙家)에서 먹는 요초(瑤草)라네.’라고 하면서 지팡이를 세워 놓고 손으로 뜯었는데 주머니에 거의 가득 찼다.” 하였다.[주-D037] 부상(榑桑) : 동해 바다 해 뜨는 곳에 있다는 신화 속의 신목(神木)이다. 부상(扶桑)이라고도 한다.[주-D038] 약수(弱水) : 약수는 서쪽 바다 가운데 위치한 선경 봉린주(鳳麟洲)를 둘러싸고 있다는 신화 속의 강 이름이다.[주-D039] 표관(豹關) : 표범이 지키는 하늘 문을 말한다. 송옥(宋玉)의 〈초혼(招魂)〉에 “호랑이와 표범이 아홉 겹 하늘 문을 지켜, 하계(下界)에서 오는 자를 물어 죽이네.[虎豹九關, 啄害下人些.]”라는 구절이 있다.[주-D040] 섬궁(蟾宮) : 두꺼비가 사는 월궁(月宮)으로, 달 속에 두꺼비가 살고 있다는 전설로 인해 생긴 달의 이칭이다.[주-D041] 사씨(謝氏) 집안 옥수(玉樹) : 사씨는 진(晉)나라 사안(謝安)이고, 옥수는 훌륭한 자제를 말한다. 사안이 여러 자제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의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이것은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가 자기 집 뜰에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79 謝安傳》[주-D042] 서씨(徐氏) 집안 기린아(麒麟兒) : 서씨는 당(唐)나라 서경(徐卿)인데, 경(卿)은 존칭이고 이름은 자세하지 않다. 그의 두 아들을 칭찬한 두보의 〈서경이자가(徐卿二子歌)〉에 “그대는 못 보았나. 서경의 두 아들 뛰어나니, 길몽에 감응하여 연이어 태어났다네. 공자와 석가가 친히 안아다 건네주니, 두 아이 모두 천상의 기린아라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43] 운문(雲門)과 월출(月出) : 밀양(密陽)의 운문산(雲門山)과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岀山)으로, 두류산 천왕봉에서 보이는 산을 읊은 것이다.[주-D044] 금수(錦水)와 노진(露津) : 금수는 영암(靈巖)의 영산강(榮山江)의 이칭이고, 노진은 남해의 노량진(露梁津)으로, 두류산 천왕봉에서 보이는 강과 바다를 읊은 것이다.[주-D045] 양당(兩塘) : 두류산 덕산(德山)에 있는 마을로, 조식(曺植)이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살았던 곳이다.[주-D046] 사수(泗水)에서 패배한 누감(樓艦) : 명(明)나라 장수 동일원(董一元)으로, 정유재란 때 구원병을 인솔하고 유정(劉綎) 등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남진(南進)하다가 사천(四川)에서 적장의 꼬임에 빠져 대패하였다. 누감은 누선(樓船)이다.[주-D047] 물가 마름 : 마름 따위의 수초(水草)와 같은 조촐한 제수(祭需)로 제사를 경건히 지낸다는 뜻이다. 《詩經 采蘋》[주-D048] 진주성(晉州城)에서 …… 했나 :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이 함락되어 7만의 민관군(民官軍)이 전사한 일을 말한 것이다.[주-D049] 남원읍(南原邑)에 묻힌 유골 : 정유재란 때에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항전하다 전사한 군ㆍ관ㆍ민을 합장한 만인의총(萬人義塚)을 말한다.[주-D050] 옛 사당 : 두류산 천왕봉 정상에 있는 성모사(聖母祠)를 말한다.[주-D051] 천온(天媼) : 성모사에서 모시는 성모(聖母)를 말하는데, 고려 태조의 어머니라고 한다.[주-D052] 무당 …… 말속이네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따르면, 성모사는 백모당(白母堂), 용유담(龍游潭)과 함께 두류산 3대 무당 소굴로, 영남과 호남에서 복을 구하는 자들이 이곳에 와서 음사(淫祠)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주-D053] 대춘(大椿) : 매우 오래 산 나무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상고에 대춘이란 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았다.” 하였다.[주-D054] 삼광(三光) : 햇빛, 달빛, 별빛이다.[주-D055] 오채(五彩) : 청(青), 황(黃), 적(赤), 백(白), 흑(黑) 다섯 색깔이다.[주-D056] 삼화(三花) : 패다수(貝多樹)를 말하는데, 1년에 꽃이 세 번 피므로 삼화수(三花樹)라고도 불린다.[주-D057] 신선 …… 방문하고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이곳의 지명을 홍류(紅流)라고 하는 것은 사영운(謝靈運)의 ‘돌 비탈에서 붉은 샘물 쏟아지네.[石磴射紅泉]’라는 시구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를 해석하는 자들이 ‘붉은 샘물은 단사(丹砂)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니 홍류라는 이름은 선가(仙家)의 문헌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주-D058] 깊은 …… 잃었네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따르면, 기담(妓潭)은 홍류(紅流)에 있는 못인데, 진경(眞境)이 나쁜 이름을 만났다고 저자가 한탄하였다.[주-D059] 비석에 …… 만하고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절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었는데, 전액(篆額)에 ‘쌍계사고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다.……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지음’이라고 씌어 있으니, 당(唐) 희종(僖宗) 광계(光啓) 연간에 건립된 것이다.……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단지 옛사람을 생각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겠는가. 지난 일을 생각하며 느껴지는 비애까지 일었다. 종이와 먹을 내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하였다.[주-D060] 석벽에 …… 글자 : 쌍계석문(雙溪石門)에 새긴 최치원의 글자를 말한다.[주-D061] 둥지만 …… 없고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 “서쪽에는 청학봉이 있는데, 승려가 벼랑의 구멍을 가리키며 ‘저것이 학의 둥지입니다.’ 하였다. 옛날에는 붉은 머리와 푸른 날개의 학이 그곳에 살았는데 지금은 오지 않은 지가 몇 년째라 한다. 나는 비록(秘籙)에서 ‘지리산의 푸른 학이 무등산(無等山)으로 옮겨갔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이야기와 서로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주-D062] 여와(女媧)가 …… 않았다면 : 신화 속의 고제(古帝)로,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여와씨(女媧氏)가 오색의 돌을 구워 터진 하늘을 메웠다.”라는 내용이 있다.[주-D063] 허공에 …… 반짝이네 :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방을 말하는 듯하다.[주-D064] 자연의 …… 잉태하였네 : 천지의 원기를 가슴에 품었다는 말이다.[주-D065] 묘신(卯申) : 묘시(卯時)에 출근해서 신시(申時)에 퇴근하기까지의 업무 시간을 말한다.[주-D066] 용두정(龍頭亭) : 본서 후집 제6권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에는 와룡정(臥龍亭)으로 되어 있다.[주-D067] 조보(造父) : 주 목왕(周穆王)의 마부로, 목왕의 팔준마(八駿馬)를 잘 몰았던 사람이다. 《史記 卷43 趙世家》[주-D068] 예장(豫章) : 예(豫)와 장(章)은 나무 이름으로, 대들보로 쓸 만큼 크게 자라는 나무이다.[주-D069] 넝쿨에 …… 둔다면 : 벼슬을 그만두고 야인으로 지내겠다는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최예심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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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집 후집 제6권 / 잡지(雜識) /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遊頭流山錄〕
내가 벼슬살이에 시달리며 아침저녁으로 고생한 지가 이미 23년이다. 스스로 생각해보니 외람되게 청현직에 올라 임금이 계신 곳을 출입한 적도 여러 번이었으니, 불초한 나에게 과분한 것이었다. 이제 늙은 데다 병까지 잦아지니 물러나 유유자적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평소 산과 바다를 유람하기 좋아하여 귤, 유자, 매화, 대나무 등이 어우러진 시골을 그리워하였다.
만력(萬曆) 신해년(1611, 광해군3) 봄에 관직을 사직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고흥(高興)의 옛 집으로 갔다. 조정의 옛 동료들이 내가 아직 늙지 않았는데도 미리 물러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공석이었던 용성(龍城 남원) 수령의 자리에 나를 천거하여 제수를 받았다. 나는 ‘용성은 고흥과의 거리가 백 리도 안 되니, 돌아가는 길에 잠시 행장을 풀고 쉬어가는 것도 무방하리라.’ 생각하였다.
2월 초에 임지로 부임하였다. 용성은 큰 고을인지라 공무가 무척 바빴다. 게으른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곳이 아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때 한식(寒食)이 가까워, 승주(昇州 순천) 수령 유순지(柳詢之)가 용성의 목동(木洞)에 있는 자신의 선영에 성묘하러 왔다. 유순지는 나보다 선배인데도 내가 이 고을의 수령이라 하여 예를 갖추었다.
나는 목동 수용암(水舂巖) 근처의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승경을 자못 동경하였다. 진사 김화(金澕)가 그곳에 살면서 집의 이름을 재간당(在澗堂)이라 하였다. 재간당은 두류산 서쪽 기슭에 있어, 안개 서린 봉우리가 서너 겹으로 둘러싸인 풍광을 바로 창가에서 마주 대할 수 있었다. 두류산은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방장산은 삼한(三韓) 멀리 있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주석에 “방장산은 대방국(帶方國) 남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지금 살펴보건대, 용성의 옛 이름이 대방이다. 그렇다면 두류산이 곧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다. 진 시황과 한 무제는 삼신산을 찾기 위해 배를 보내느라 쓸데없이 공력을 허비했는데, 우리들은 그냥 앉아서 감상할 수 있다.
술에 얼큰 취했을 때, 나는 술잔을 들어 좌중의 손님들에게 말하길,
“저는 봄이 되면 두류산을 맘껏 유람하여 오랜 숙원을 풀고자 합니다. 누가 저를 따라 유람하시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유순지가 말하기를,
“제가 예전에 영남 지방을 안찰할 때 이 산에서 잠깐 노닐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따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 두류산의 한쪽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하여 아쉬웠습니다. 근래 승주에 부임하여 우연히 이 산과 이웃하게 되었는데,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어찌 혼자 쓸쓸히 유람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그대와 함께 유람하리니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굳게 약속하고 술자리를 끝냈다. 그 뒤에 여러 번 서신을 교환하며 날을 정해 재간당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3월 정묘(27일), 유순지가 약속대로 왔다.
3월 무진(28일), 처음 약속한 장소에 다시 모였다. 기생들의 노래와 연주를 들으며 술에 흠뻑 취했다. 밤이 되어서야 술자리가 파하여 시냇가의 재간당에서 잤다.
3월 기사(29일). 수레를 채비하게 하여 서둘러 떠났다. 유순지는 술이 덜 깨어 부축해 수레에 태웠다. 재간당 주인 김화와 순창(淳昌)에 사는 족질(族姪) 신상연(申尙淵)과 서얼인 족질 신제(申濟)도 나를 따라 동쪽으로 갔다. 요천(蓼川)을 거슬러 올라 반암(磻巖)을 지났다. 온갖 꽃이 만발하는 철인데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 개이니, 꽃을 찾는 흥취가 손에 잡힐 듯하였다.
정오 무렵 운봉(雲峯 남원) 황산(荒山)의 비전(碑殿)에서 쉬었다. 만력 6년(1578, 선조11), 조정에서 운봉 수령 박광옥(朴光玉)의 건의에 따라 비로소 비석을 세우기로 의논하고 대제학 김귀영(金貴榮)에게 기문을 짓고,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에게 글씨를 쓰고, 판서 남응운(南應雲)에게 전액(篆額)을 쓰게 하였다. 지난 고려 말에 왜장 아키바쓰[阿只拔都]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 지방을 노략질 했는데, 그가 향하는 곳 어디에도 견고하게 버티는 보루가 없었다. 그 나라의 참위서(讖緯書)에서 “황산(荒山)에 이르면 패하여 죽는다.” 했는데, 산음(山陰 산청) 땅에 ‘황산(黃山)’이 있어 그 길을 피해 사잇길로 운봉 땅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때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황산(荒山)의 험한 곳에서 맞이하여 크게 물리치셨다. 지금까지 그 고을 노인들이 바위 구멍을 가리키며 깃발을 꽂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적은 군사를 이끌고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대적하여 우리나라의 무궁한 기틀을 열어주셨으니, 어찌 단지 하늘의 명과 인간의 지모 이 둘만을 얻어서이겠는가. 그 땅의 형세를 살펴보면, 바로 호남과 영남의 목구멍을 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대저 험한 곳을 막아 유리한 곳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병가(兵家)에서 말하는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하는 방법’이다. 지난 정유재란 때 양원(楊元)의 무리는 이 길을 차단해야 되는 것을 모르고 남원성을 지키려다 적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으니, 땅의 이로움을 잃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비석 곁에 ‘혈암(血巖)’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진년 난리가 일어나기 전 이 바위에서 저절로 피가 흘렀는데, 샘처럼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서울에 알렸는데 답변이 오기도 전에 왜적이 남쪽 변경을 침략하였습니다.”
하였다. 아! 이 땅은 왕업(王業)이 시작된 곳이라, 큰 난리가 일어나려 하자 신(神)이 미리 알려준 것인가.
운봉 수령 이복생(李復生) 백소(伯蘇)가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먼저 역참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바로 일어나 함께 길을 나섰다. 시내를 따라 십여 리쯤 가니 모두 앉아 구경할 만한 곳인지라 수레에서 내려 쉬엄쉬엄 구경하였다. 북쪽으로부터 산세는 점점 높아지고 길은 점점 험해져, 말을 버리고 남여(藍輿)로 바꾸어 타고 백장사(百丈寺)로 들어갔다. 유순지는 숙취가 아직도 풀리지 않아 먼저 불전(佛殿)에 들어가 누웠는데, 코 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어린아이가 꽃 두 송이를 꺾어 가지고 왔다. 하나는 불등화(佛燈花)라고 하는 꽃인데 연꽃처럼 크고 모란꽃만큼 붉었다. 그 꽃나무의 높이는 두어 길쯤 되었다. 다른 하나는 춘백화(春栢花)인데 붉은 꽃잎은 산다화(山茶花) 같고 크기는 손바닥 만하였다. 병풍과 족자에서 보던 모습과 닮았다. 절의 위쪽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정면으로 천왕봉(天王峯)을 마주하고 있어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었다.
4월 경오(1일), 동행한 자들은 각자 대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노끈을 동여매고는 남쪽으로 하산하였다. 논두렁을 따라 구불구불 걸어가니 큰 냇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황계(黃溪)의 하류였다. 동부(洞府)가 넓고 물이 세차게 흘러 돌을 굴렸다. 북쪽은 폭포이고 아래쪽은 못인데, 못 위의 폭포수는 어지러이 쏟아져 내리며 성난 듯 울부짖으며 벼락과 천둥이 번갈아 치는 듯한 소리를 내니 어찌 그리도 웅장한가. 길을 가다보니 푸르른 소나무는 그늘을 드리우고 철쭉은 불타듯이 붉게 피어 있었다. 번번이 남여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휴식을 취했다. 골짜기에 두세 집이 있었는데 영대촌(嬴代村)이라 하였다.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깊은 골짜기와 수많은 봉우리들 사이에서 나는 것이, 참으로 하나의 무릉도원이었다. 이 마을이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구나.
한 곳에 이르니 높은 산등성이에 가파른 협곡이 있었다. 양쪽 벼랑을 밀쳐낸 모습으로 그 안이 매우 깊었다. 그 협곡 안은 모두 온전한 바위였다. 시냇가에는 큰 바위가 수없이 널려 있는데, 이곳의 이름을 흑담(黑潭)이라 한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에 그림을 좋아하여 인공(人工)을 다한 것을 나는 사치스럽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곳을 보니, 바위가 흰데 이끼는 어찌 그리 푸르며 물이 푸른데 꽃은 어찌 그리 붉은지. 천공(天工)도 극히 호사스러우니 그 호사를 누리는 자는 산신령인가 보구나.”
하였다.
이에 녹복(祿福)은 비파를 연주하게 하고 생이(生伊)는 피리를 불게 하고 종수(從壽)와 청구(靑丘)는 태평소를 불게 하였다. 〈산유화(山有花)〉 곡이 산에 울려 퍼지고 골짜기에 메아리치며 시냇물 소리와 어우러지니 즐길 만하였다. 동자에게 통을 열어 묵과 붓을 준비하게 하고 암석 위에 시를 썼다.
황계폭(黃溪暴)을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어 이어진 30리 풍광이 모두 푸른 회나무와 푸른 단풍나무였으며, 비단 같은 날개를 지닌 새들이 사람을 스치며 날아다녔다. 내원(內院)에 이르니, 두 줄기 시냇물이 합류하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 한 채가 놓여 있었다. 마치 수놓은 비단 속에 들어있는 듯하였다. 소나무가 서 있는 단(壇)은 숫돌처럼 평평하였고, 금빛과 푸른빛이 숲속 골짜기 사이에 어리비쳤다.
또 여러 번 다듬이질한 종이에 누런 기름을 먹여 배접해 바른 온상(溫床)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노란 유리 같아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수염이 센 늙은 선사(禪師)가 승복을 단정히 입고 앉아 불경을 펴놓고 있었다. 그의 생활이 맑고 시원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에 시를 지어 옷을 남겨 놓는 것을 대신하고 떠났다.
동쪽 시내를 따라 오르니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수록 산은 깊어지고 물은 빨라졌다. 정룡암(頂龍菴)에 이르렀다. 앞에 큰 시내가 있는데 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건장한 승려를 골라 그 등에 업혀서 냇물 사이의 돌을 밟고 건넜다. 낭떠러지에 접한 바위가 자연스레 대(臺)를 이루었는데 대암(臺巖)이라 한다. 그 아래에는 깊은 못이 검푸른 빛을 띠고 있어 무서워서 내려다볼 수 없었다. 그 못에 있는 물고기를 가사어(袈裟魚)라 부른다. 비늘의 무늬가 가사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고기는 천하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오로지 이 못에서만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이에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도록 했으나, 물이 깊어 끝내 새끼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이 날 저녁에 운봉 수령 이백소가 먼저 인사하고 돌아가 내원에서 묵었다. 나 역시 맑고 고요하며 그윽한 내원이 좋아 처음에는 그곳으로 돌아가 묵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룡암에 이르자 너무 피곤해 도저히 내원까지 갈 수 없었다. 내가 몹시 늙었구나.
정룡암에는 북당(北堂)이 있었는데, 거처하는 승려가 노판서(盧判書)의 서재라고 하였다. 옛날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선생이 자손을 위해 지은 것인데, 선생도 봄이면 꽃구경을 하고 가을이면 단풍놀이를 하러 흥이 나는대로 왕래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아! 깊은 산 속 외딴 곳에 새 한 마리 울지 않는데 자제들을 위해 집을 짓고 살았으니, 선생의 맑은 운치는 후학을 흥기시킬 만하구나.
4월 신미(2일), 일어나자마자 밥을 먹고 월락동(月落洞)을 거쳐 황혼동(黃昏洞)을 지났다. 고목이 하늘에 빽빽이 치솟아 올려다봐도 해와 달이 보이지 않았다. 맑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하기에 월락동, 황혼동이라 부른다. 와곡(臥谷)으로 돌아드니 수목은 여전히 울창하고 돌길이 험준하여 더욱 걷기 힘들었다. 천 년이나 됨직한 고목들이 절로 자라났다 절로 죽어 가지는 꺾이고 뿌리는 뽑혀 가파른 돌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그 가지를 베어내고 문을 드나들 듯이 구부리고서 그 밑으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마치 문지방을 넘고 사다리를 타는 것처럼 타고 넘거나 밟고 올라가기도 하였다. 그 외에 공중에 선 채로 말라죽어 반쯤 꺾이거나 반쯤 썩은 나무도 있고, 가느다란 줄기가 천 자나 위로 우뚝 솟아 여러 나무에 기대어 넘어지지 않은 나무도 있으며, 노성한 원로와 같은 푸른 등나무가 가지와 잎을 늘어뜨려 장막처럼 넓게 뒤덮고 있는 것도 있는데, 시내를 따라 수십 리나 뻗어 끝이 없었다. 맑은 바람이 항시 가득하고 상쾌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는다. 함께 유람 온 자들이 봄옷을 입은 지 한 달 남짓 되는데, 이곳에 와서는 모두 한 겹씩 더 껴입었다.
해가 뜰 때부터 더위잡으며 올라 정오에 이를 때쯤 비로소 갈월령(葛越嶺)을 넘었다. 갈월령은 반야봉(般若峯)의 세 번째 기슭이다. 푸른 조릿대가 길을 이루어 몇 리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는데, 그 사이에 대나무 아닌 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다. 마치 사람이 개간하여 대나무를 심어놓은 듯하였다.
다시 간신히 올라 영원암(靈源菴)에 이르렀다. 영원암은 고요한 곳이다. 터가 높고 시원하게 탁 트여 숲을 굽어 볼 수 있었다. 왕대를 쪼개 샘물을 끌어왔는데, 졸졸 옥 구르는 소리를 내며 나무통 속으로 흘러내렸다. 물맛이 청량하여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암자는 자그마하여 기둥이 서너 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맑고 외져 사랑스러웠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마이봉(馬耳峯)과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천왕봉(天王峯)을 바라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상무주암(上無住庵)을 등지고 있다. 이름난 승려인 선수(善修)가 여기에 거처하는데, 제자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강론하니 사방에서 귀의하는 승려들이 많았다. 그는 유순지와 자못 사이가 좋아서 우리에게 송편과 인삼 과자, 팔미다탕(八味茶湯) 등을 대접하였다. 이 산에는 대나무 열매와 감, 밤 등이 많이 나서, 매년 가을에 수확하여 빻아 겨울에 먹을 양식으로 삼는다고 한다.
해가 저물자 바람이 서늘해지고 앞 봉우리에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니 비 올 징후임을 알겠다. 우리는 길을 재촉해 사자항(獅子項)을 돌아 장정동(長亭洞)으로 하산했다. 긴 덩굴을 잡고서 곧장 가파른 돌길을 내려오는데 실덕리(實德里)를 지나자 비로소 들녘의 논이 보였다. 도랑을 튼 지 얼마 되지 않아 맑은 물이 콸콸 쏟아졌다.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에서 투숙했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인지라 흙먼지가 당 안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유독 모란이 선방(禪房) 앞에서 한창 꽃을 피우고 있어 감상할 만하였다. 옛날에는 절 앞에 신령스런 우물이 있어서 영정사(靈井寺)라 불렸는데 지금 절의 이름이 군자사(君子寺)로 바뀐 것은 무슨 뜻을 취했는지 모르겠다.
며칠 동안 구름 밖에서 맑은 유람을 하여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청도(淸都)에 간 듯하였는데, 홀연 하루 저녁에 누런 티끌 세상에 떨어지니 사람의 정신을 답답하게 하여 밤새 악몽으로 가위눌렸다. “어디인들 군자가 살면 어찌 비루함이 있겠는가.”라는 공자의 말씀은 수긍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4월 임신(3일), 아침에 출발하여 의탄촌(義吞村)을 지나는데 옛일이 많이 생각났다. 옛날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는 이 길로 천왕봉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이고 나는 나이다. 내가 굳이 이 길을 따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곧장 3~4리를 가서 원정동(圓正洞)에 이르렀다. 동천(洞天)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갈수록 승경이 더해졌다.
용유담(龍游潭)에 도착했다. 층층의 봉우리가 모여 있는데 모두 암석이 많고 흙이 적었다. 푸른 삼나무와 붉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모여 있는 곳에 다시 담쟁이넝쿨이 이러 저리 얽혀 있었다. 하나의 큰 바위가 뻗쳐 있고, 두 언덕이 나뉘어져 거대한 협곡을 이루고 동강(東江)이 그 가운데를 흐르며 세차게 쏟아져 물거품이 용솟음친다. 바위는 세찬 물결에 닳았고, 혹 웅덩이를 이루거나 혹 모래톱을 이루거나 혹 입을 벌린 듯 틈을 이루거나 혹 평탄하게 마당을 이루기도 하였다.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형상이 수백 보나 펼쳐져 있고 천만 가지로 다른 모습이어서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승려들은 허탄한 이야기를 숭상하여, 돌이 깨진 곳을 가리켜 용이 할퀸 자국이라 하고, 돌이 둥그렇게 움푹 팬 곳을 가리켜 용이 서린 곳이라 하고, 바위 안에 휑하니 찢긴 곳을 용이 뚫고 지나간 곳이라 한다. 무지한 백성은 모두 이런 말을 믿어, 이곳에 오면 자기도 모르게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한다. 선비된 자들도 “용은 돌을 보지 못하므로, 변화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한다. 나 또한 직접 눈으로 그 놀라운 형상을 보고서 신령스러운 존재가 여기에 머물고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이 어찌 과아(夸娥)나 거령(巨靈)이 도끼로 쪼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한 번 시로써 징험해보기로 하고 절구 한 수를 종이에 써서 못에 던졌으니, 장난으로 한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벼랑의 굴 안에서 연기 같지만 연기가 아닌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겹겹의 봉우리와 푸르른 산 사이에서 우르르 쾅쾅 우레가 치고 번쩍 번쩍 섬광이 번득이며 금세 일어났다가 금세 멈추었다. 동행한 자들은 옷깃을 추어올리고 재빨리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 기다렸다. 잠시 후 은실 같은 빗줄기가 떨어지더니, 새알만큼 큰 우박이 일시에 퍼부었다. 좌중의 젊은이들은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려 거의 숟가락을 잃을 지경으로 크게 놀랐다.
한참 뒤에야 천지가 뒤바뀌더니 구름 사이로 햇살이 새어 비추었다. 드디어 벼랑을 따라 가다가 길을 잃어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풀의 이슬이 옷을 적시고 등나무 가지가 얼굴을 찔렀다. 밀고 당기며 덤불을 헤치고 산허리를 비스듬히 돌며 올라갔다. 가는 길마다 허리를 구부려 죽순을 꺾고 고사리의 새싹을 뜯느라 발걸음이 더뎠다.
동쪽으로 마적암(馬跡庵)을 지났다. 나뭇가지를 힘껏 붙들고 넝쿨을 더위잡으며 오르니 옛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산꼭대기로 기어오르다 보니,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넘어졌다. 고생하며 오르내리느라 모두들 얼굴에 땀이 흐르고 다리가 시큰거리며 발이 부르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만일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비록 꾸짖더라도 원망하고 탄식하며 성내는 것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럿이 함께 가고 함께 쉬면서 길에 가득 웃음소리가 넘치니, 어찌 완상하는 마음이 즐거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두류암(頭流菴)에 들어갔다.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서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 사이로 폭포가 쏟아지고 있어 마치 옥으로 만든 주렴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듯했다. 비록 저녁 내내 앉아 완상하더라도 피곤한 줄 모를 터이다. 비가 막 그친 터라 골짜기에서 부는 바람이 차갑고 급하여 지나칠 정도로 상쾌하였다. 오래 머물 수 없어 선방(禪房)에 들어가 편히 쉬었다.
4월 계유(4일), 이른 아침에 옹암(甕巖)을 스쳐 지나 청이당(淸夷堂)에 들어갔다. 울창한 숲과 어지러운 돌무더기를 뚫고 영랑대(永郞臺)에 이르렀다. 어두운 골짜기를 굽어보니 무척 어두컴컴하여 정신이 달아나고 눈앞이 어지러워 나무를 붙들고 기대었다. 무서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영랑(永郞)은 화랑(花郞)의 우두머리로 신라 때 사람이다.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바닷가를 맘껏 유람하였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산수 중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다.
산등성이를 따라 천왕봉을 향해 동쪽으로 나아갔다. 산에는 매서운 바람이 많이 불어 나무가 모두 울퉁불퉁 구부정하였다. 나뭇가지는 산 쪽으로 쏠려 있고 이끼가 말라죽은 나무에 덮여 있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 있는 듯하였다. 소나무 껍질에 잣나무 잎을 한 나무가 속이 텅 빈 채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가지 끝은 아래로 휘어져 땅을 찌르고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나무는 더 짧았다. 산 아래에는 짙은 그늘이 푸른빛과 어우러져 있었는데, 여기에 오니 꽃나무 가지에 아직 잎은 돋지 않았고 그 끝에만 쥐의 귀처럼 쫑긋 싹을 내밀고 있었다.
바위틈에 눈이 한 자 넘게 쌓여 있기에 한 움큼 집어 먹으니, 갈증난 목을 적실 수 있었다. 겨우 싹이 튼 풀이 있었는데 푸른 줄기는 청옥(靑玉)이라 하고 붉은 줄기는 자옥(紫玉)이라 하였다. 승려가 “이 풀은 맛이 달고 부드러워 먹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한 움큼 뜯어 왔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말한 청옥과 자옥은 바로 선가(仙家)에서 먹는 요초(瑤草)라네.”라고 하면서 지팡이를 세워 놓고 손으로 뜯었는데 그것이 주머니에 거의 가득 찼다.
앞으로 나아가 소년대(少年臺)에 올라 천왕봉을 우러러보니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잡초나 잡목 없이 푸른 잣나무만이 연이어 자라고 있는데, 얼음 서리와 비바람에 시달려 뼈대만 앙상한 채 말라 죽은 나무들이 열에 두셋은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노인의 흰머리처럼 너무 많아 모조리 뽑아낼 수는 없을 듯하였다. 어떤 이들은 ‘소년’이라는 이름이 영랑의 무리라고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천왕봉은 장로이고 이 봉우리는 장로를 모시고 있는 소년과 같아서 소년대라 이름 붙인 것 같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뭇 산과 수많은 골짜기가 주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제일봉(第一峯)에서 바라보면 어떻겠는가.
드디어 지팡이를 짚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었는데 바로 성모사(聖母祠)이다. 사당 안에 석상 하나가 안치되어 있는데 흰옷을 입은 여인상이다. 이 성모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성모상은 고려 태조의 모친인데, 그가 현명한 왕을 낳아 길러 삼한을 통일하였기에 존경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였다. 영남과 호남에서 복을 구하는 자들이 이곳에 와서 음사(淫祠)로 떠받들고 있다. 그래서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귀신을 숭상하던 풍습이 생겨 원근의 무당들이 이 성모상에 의지하여 먹고 산다. 이들은 산 정상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지를 내려다보며 살피다가, 그들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숲 속에 흩어져 몸을 숨긴 채 유람하는 사람들이 하산하기를 엿보다가 다시 모여든다.
산허리를 빙 둘러 판각(版閣)이 벌집처럼 줄지어 있는데, 복을 빌러 온 자들을 맞이하여 묵게 하는 곳이다. 짐승을 도살하는 것은 불가(佛家)에서 금지하는 것이라 둘러대며, 복을 빌러 온 자들이 산 아래 사당에 소를 매어 놓고 가면 무당들은 이것으로 생계를 도모하였다. 이 때문에 성모사, 백모당(白母堂), 용유담은 무당의 3대 소굴이 되었으니, 참으로 분한 일이다.
이 날 산에 비가 갓 그치자 뿌연 안개가 사방에서 걷히니, 광활하고 아득한 광경이 막힘없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하늘이 명주 장막을 만들어 이 봉우리를 위해 병풍을 둘러 친 듯하였다. 게다가 눈과 넋이 이르는 곳을 감히 방해하는 한 덩이 작은 언덕도 있지 않았다. 다만 푸르게 얽혀 있는 것이 산이고 하얗게 얽혀 있는 것이 물이라는 것만 알 뿐, 어느 곳이며 무슨 강이고 무슨 언덕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시험 삼아 산승이 가리키며 이름을 불러 주기에 동쪽을 바라보니 대구의 팔공산(八公山)과 현풍(玄風)의 비파산(琵琶山), 의령의 자굴산(闍掘山)과 밀양의 운문산(雲門山), 산음(山陰)의 황산(黃山)과 덕산(德山)의 양당수(兩塘水), 안동(安東)의 낙동강이 보였다.
서쪽을 바라보니 광주에 있는 무등산, 영암(靈巖)에 있는 월출산, 정읍(井邑)에 있는 내장산(內藏山), 태인(泰仁)에 있는 운주산(雲住山), 익산(益山)에 있는 미륵산(彌勒山), 담양(潭陽)에 있는 추월산(秋月山), 부안(扶安)에 있는 변산(邊山), 나주(羅州)에 있는 금성산(錦城山)과 용귀산(龍龜山)이 보였다.
남쪽으로 소요산(逍遙山)을 바라보니 곤양(昆陽)임을 알겠고, 백운산(白雲山)을 바라보니 광양(光陽)임을 분간하겠고 조계산(曺溪山)과 돌산도(突山島)를 바라보니 순천(順天)임을 알겠고, 사천(泗川) 와룡산(卧龍山)을 바라보니 동장군(董將軍)이 패한 것이 떠오르고, 남해 노량(露梁)을 바라보니 이순신(李舜臣)이 순국한 것에 슬퍼졌다.
북쪽으로는 안음(安陰)의 덕유산(德裕山)과 전주(全州)의 모악산(母岳山)이 하나의 작은 개밋둑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그 사이에 큰 아이처럼 조금 솟구친 것이 성주(星州)의 가야산(伽倻山)이었다. 삼면을 두른 큰 바다를 바라보니 대마도를 비롯한 여러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큰 파도 속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데, 하나의 탄환처럼 아득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아! 덧없는 세상에서의 삶이 가련하구나! 초파리같은 중생은 술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 죽으니 모두 다 잡아서 모아도 한 움큼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저들은 재잘재잘 자기 이익만 도모하며 옳으니 그르니 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니, 어찌 몹시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오늘 본 바로는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일 뿐이다. 하물며 이 봉우리는 하늘 아래 일개 작은 물건일 뿐인데, 이곳에 올라 높다고 여긴다면 더욱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저 안기생(安期生)과 악전(偓佺)의 무리가 난새의 깃과 학의 등을 침상으로 삼고서 구만리 상공에서 여기를 내려다 볼 때, 이 큰 산이 추호(秋毫)만큼도 되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사당 밑에 작은 움막이 있었는데, 잣나무 잎을 엮어 비바람을 막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여기는 매를 잡는 사람들의 움막입니다.”
하였다. 매년 8, 9월이 되면 매를 잡는 자들이 봉우리 정상에 그물을 쳐놓고 매가 걸려들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대개 매 가운데 잘 나는 놈은 능히 천왕봉을 넘어가기 때문에 이 봉우리에서 잡은 매는 그 재주가 무리 중에서도 빼어난 것들이다. 이곳 원근의 관청에서 부리는 매는 대부분 이 봉우리에서 잡은 것이다. 그 사람들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추위와 굶주림을 참아내며 이곳에서 삶을 마치니 어찌 관청의 위엄이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뿐이랴. 이익을 노려서 삶을 가볍게 여기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아! 소반 위의 진귀한 음식은 한 번 씹기에도 부족하거늘, 백성의 온갖 간난신고가 이같은 줄 어떻게 알겠는가.
날이 저물어 향적암(香積菴)으로 내려갔다. 향적암은 천왕봉 아래 몇 리쯤 되는 곳에 있다. 요초를 삶아서 안주 삼아 향기로운 막걸리를 마셨다. 남쪽 누대에 서서 바라보니 이리저리 흩어진 바위가 삐쭉 삐쭉 솟아서 작은 암자를 둘러싼 채 붉고 푸른 빛을 띠었다. 북쪽으로 천왕봉을 우러르고 동남쪽으로는 큰 바다를 바라보니 뛰어난 산세가 바깥쪽의 산들과는 자못 다른 모습이었다.
4월 갑술(5일), 일찍 향적암을 떠났다. 우뚝 솟은 늙은 나무 아래를 지나 빙판길을 밟으며 구름다리를 타고 곧장 남쪽으로 내려왔다. 먼저 가는 사람은 아래에 있고 뒤에 가는 사람은 위에 있으니, 벼슬아치는 낮은 데 있고 종복은 높은 데 있었다. 공경할 만한 자의 상투를 발로 밟고 있고, 깔볼 만한 자의 발을 머리에 이고 있으니, 인간 세상의 일들이 이 행차와 비슷한 것이겠구나.
길가에 집채만큼 우뚝한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단번에 뛰어 올랐으니, 사자봉(獅子峯)이다. 어제 아래에서 바라볼 때 드높이 허공을 찌르고 있던 것이 아닌가. 아래를 흘끗 내려 보니 땅은 보이지 않고 온통 비탈진 산뿐이었다. 참으로 천왕봉에 버금가는 장관이었다. 이 봉우리를 지나서 내려가니 무릎을 넘지 않는 길이의 면죽(綿竹)이 언덕 곳곳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마침내 면죽을 깔고 앉아 휴식하니 털방석을 대신할 만하였다.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靈神菴)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영신암을 둘러싸고 안쪽을 향하는 형상이 마치 서로 마주 보고 읍하는 듯하였다. 비로봉(毗盧峰)은 그 동쪽에 있고, 좌고대(坐高臺)는 그 북쪽에 우뚝 솟아 있으며, 아리왕탑(阿里王塔)은 그 서쪽에 서 있고 가섭대(迦葉臺)는 그 뒤에 버티고 있다. 마침내 지팡이를 내던지고 손발로 기어 비로봉 위에 올라보니, 오싹 소름이 끼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암자에는 차솥과 향로 등이 있었지만 거처하는 승려는 보이지 않았다. 흰 구름 속으로 나무하러 갔기에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세속의 사람을 싫어해서 수많은 봉우리 사이로 자취를 숨긴 것인가. 계절이 청명하고 온화하여 처음으로 두견화가 반쯤 핀 것을 보니 산 속 기후가 가장 높은 산봉우리보다 조금은 따뜻한 줄 알겠다.
영신암에서 사십 리쯤 걸어갔다. 산세가 중국의 검각(劍閣)보다도 더 험준하고 가팔랐는데, 바람 부는 높은 돌계단이 곧장 아래로 내려와 일백 여덟 굽이의 형세를 이루지 않았다. 그 길을 따라 내려오자니, 마치 청천(靑天)에서 황천(黃泉)으로 추락하는 듯하였다. 넝쿨을 끌어당기며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내려오면서 무성한 녹음 사이의 틈으로 내려 보았으나, 깜깜하여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이맛살이 찌푸려지고 한숨이 나와 손가락을 깨물어 조심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 후에야 깊은 골짜기 안으로 내려갔다. 높은 대나무 숲을 헤치며 의신사(義神寺)를 찾아가 묵었다. 밤에 두견새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들리고 시냇물 소리가 평상을 휘감았다. 그제야 나의 유람이 인간 세상에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이 절에는 의신사에 머물고 있는 옥정(玉井)과 태승암(太乘菴)에서 온 각성(覺性)이 있었는데 모두 시로 명성이 있었다. 그들의 시는 모두 격률(格律)이 있어 읊조릴 만하였다. 각성은 왕희지(王羲之)를 임모하여 필법이 굉장히 청신하고 강건하여 법도가 훌륭하였다. 내가 두 승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모두 속세를 떠났으면서 어찌하여 숲 속 깊은 곳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는가. 내가 지나온 곳은 함정이나 다름없는데, 거기에 비하면 그대들의 거처가 외지긴 외지지만 푸른 소나무와 흰 사슴을 벗하는 정도에 그칠 따름이오. 그러나 내가 지나온 자취를 생각해보면 푸른 소나무와 흰 사슴이 머무는 세상 바깥으로 나갔다 온 것이니 내가 그대들보다 훨씬 낫소.”
하였다. 두 승려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윽고 서로 번갈아 수창하며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4월 을해(6일), 마침내 홍류동(紅流洞)으로 내려가 시내를 따라 걸어갔다. 시냇가에 돌출한 가파른 언덕이 보였는데, 의신사의 승려가 ‘사자 머리[獅頂]’라고 불렀다. 푸른 소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맑은 시냇가에 초록빛 이끼를 깔고 앉았다. 이에 비파로 〈영산회상(靈山會上)〉과 〈보허사(步虛詞)〉를 연주하고, 범패(梵唄)로 그 선율을 따라 부르며, 징과 북을 치며 노닐었다. 깊은 산 속의 승려들은 생전 관현악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모두 몰려들어 발돋움하며 구경하면서 그 음악소리를 기이하게 여겼다.
기담(妓潭) 가로 옮겨 앉았다. 물은 고여 쪽빛을 머금었고, 무지개는 옥빛으로 비스듬히 드리워 있었다. 거문고 같은 물소리가 숲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 이곳의 지명을 ‘홍류(紅流)’라고 하는 것은 사영운(謝靈運)의 “돌 비탈에서 붉은 샘물 쏟아지네.[石磴射紅泉]”라는 시구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를 해석하는 자들이 “붉은 샘물은 단사(丹砂) 구멍에서 나오는 것이니 ‘홍류’라는 이름은 선가(仙家)의 문헌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기담’이라 불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경(眞境)이 나쁜 이름을 만난 것이 심하구나!
이때 두 승려가 작별을 고하였는데, 나와 유순지는 헤어지기가 아쉬워 그들을 데리고 함께 유람하고 싶었다. 두 승려가 말하기를,
“합하를 따라 아래 못에서 노닐고 싶으나 여기서부터는 세속과 점점 가까워져서 꺼려집니다.”
하고, 시를 소매 안에 넣고 떠났다. 고개를 돌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두 개의 지팡이가 날아가는 듯하더니 어느 틈에 사라졌다.
이곳을 떠나 앞으로 가다가 폭포 한 줄기와 맑은 연못 하나와 봉우리 한 무더기를 만나 바위에 걸터앉아 시를 읊조렸다. 신흥사(神興寺)에 이르니 함께 유람 온 자가 한참 전에 먼저 도착해 탑상에 누워 쉬고 있었다. 함께 시냇가 바위 위에 올랐다. 시냇물이 대일봉(大日峯)과 방장봉(方丈峯) 사이에서 흘러나오는데, 겹겹으로 뻗은 나무가 하늘을 가렸고 맑은 물결이 돌을 굴렸다. 평평한 반석에는 60~70여 명이 앉을 만하였다. 바위 위에 ‘세이암(洗耳巖)’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는데 누구의 글씨인지는 모르겠다. 골짜기 이름을 ‘삼신동(三神洞)’이라 하는데, 이 골짜기에 영신사(靈神寺), 의신사(義神寺), 신흥사(神興寺) 등 세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 풍속이 귀신을 숭상함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결서(秘訣書)에 이르기를,
“근년에 어떤 사람이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이 푸른 나귀를 타고 외나무다리를 나는 듯이 건너가는 것을 보았는데 강씨(姜氏) 집안의 노복이 고삐를 잡고 만류하였지만 채찍을 휘두르며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고운은 죽지 않고 지금도 청학동에서 노닐고 있다. 청학동의 승려가 하루에 세 번이나 고운을 보았다.”
하였다. 이런 이야기는 믿을 수 없으나, 만약 이 세상에 진짜 신선이 있다면 고운이 신선이 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고운이 과연 신선이 되었다면 이곳을 버리고 어디서 노닐겠는가.
이 날 유순지는 먼저 칠불암(七佛菴)으로 떠났다. 내가 이 절의 승려에게 자세히 묻기를,
“칠불암에 기이한 봉우리가 있소?”
라 하니, 승려가 답하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폭포가 있소?”
하니, 승려가 답하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맑은 못이 있소?”
하니, 승려가 답하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무엇이 있소?”
하니, 승려가 답하기를,
“칠암정사(七菴精舎)가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나는 사찰의 금빛 푸른빛 단청은 이미 실컷 구경했고 때는 녹음이 울창한 계절인지라 눈을 붙일 만한 기이한 경관은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산비탈을 오르내리느라 이미 흥이 다하였으니, 시냇가 길을 따라 내려가며 수석(水石)의 경치를 완상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가면서 홍류교(紅流橋)를 건너고 만월암(滿月巖)을 지나쳐 여공대(呂公臺)에 앉았다. 깊고 깊은 못에 이르러 그 풍경을 구경하고 졸졸 흐르는 시냇가에 나아가 그 물소리를 들었다. 갓끈을 풀어 씻기도 하고 시냇물을 한 움큼 떠서 입을 헹구기도 하였다.
쌍계석문(雙溪石門)에 도착했다. 최고운의 필적이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지 않았다. 그 글씨를 보니 획이 가늘면서도 굳세어 획이 굵고 부드러운 세간의 서체와는 많이 다르니, 참으로 기이한 필체이다. 김탁영(金濯纓 김일손)은 이 서체에 대해 글자를 막 익힌 어린아이가 쓴 듯하다고 말하였는데 탁영은 문장은 잘 짓지만 글씨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 이끼 낀 바위 위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맑은 못과 흰 폭포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동자가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라고 하여 쌍계사로 들어갔다.
절에는 용 두겁과 거북 받침이 있는 오래된 비석이 있었다. 전액(篆額)에 ‘쌍계사 고 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고 씌어 있었는데, 전서체가 기괴하여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밑에 ‘전 서국 도순무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지음’이라고 씌어 있었다. 곧 당(唐) 희종(僖宗) 광계(光啓) 연간에 건립된 것으로,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 보니 지금으로부터 7백 년이나 되었다.
흥하고 망하기를 백번이나 반복하면서 비석은 그대로이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비석을 쳐다보면서 눈물 떨구느니, 신선술을 배워 오래도록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나는 이것으로 인해 뒤늦게나마 깨달은 바가 있었다. 또 나는 어려서부터 고졸(古拙)하고 굳센 최고운의 필적을 사랑하여 탁본(拓本)한 그의 글씨를 얻어 벽에 붙여 놓고 완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집도 글씨도 모두 없어져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내가 의금부의 문사랑(問事郞)으로 있을 적에 문안(文案)을 해서(楷書)로 썼는데, 곁에 있던 금오장군(金吾將軍) 윤기빙(尹起聘)이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그대는 예전에 최고운의 서법을 배웠는가. 어찌 환골탈태가 이리도 대단한가.”
하였다. 지금 진본(眞本)을 보니 어찌 단지 옛사람을 생각하며 감회가 일어날 뿐이겠는가. 지난 일을 생각하며 느껴지는 비애까지 일었다. 종이와 먹을 내오라고 하여 탁본하였다.
절에는 대장전(大藏殿), 영주각(瀛洲閣), 방장전(方丈殿)이 있다. 옛날에는 학사당(學士堂)도 있었다는데 무너져버려 지금은 없다. 날이 저물자 유순지가 칠불암(七佛菴)에서 돌아왔다.
4월 병자(7일), 유순지가 작별을 고하며,
“저는 몇 년 전에 청학동을 유람하여 지금 다시 가볼 필요가 없으니 곧장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고, 김화도 말하기를,
“저 또한 일찍이 청학동을 실컷 구경했습니다. 농사일이 있어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두 사람을 전송한 뒤에 홀로 신상연(申尙淵)의 무리와 함께 동쪽 고개를 올라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 골짜기는 황혼동(黃昏洞), 월락동(月落洞)과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하였다. 긴 대나무 숲이 길 양옆으로 빽빽했는데, 송아지 뿔과 같은 새 죽순이 오래된 낙엽을 뚫고 솟아 있었다. 그 중에 종종 승려들의 신에 걸려 부러진 것들이 있었는데, 나는 북쪽에서 내려 온 나그네인지라 이를 보니 아까웠다. 벼랑에 이르자 승려들이 나무를 베어 가로질러 놓은 잔도(棧道)가 몇 개 있었다. 아래를 굽어보니 깜깜하여 바닥을 알 수 없었다.
드디어 불일암(佛日菴)에 도착했다. 암자 앞에 평평한 대(臺)가 있었는데 벼랑 바위에 ‘완폭대(玩瀑臺)’라 새겨져 있었다. 푸른 봉우리와 비취빛 절벽 사이에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데, 그 길이가 수백 자쯤 되었다. 여산(廬山)의 폭포가 얼마나 높은지 나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긴 폭포로는 개성의 박연폭포(朴淵瀑布)만한 것이 없다. 이 폭포는 박연폭포와 비교해도 몇 길쯤 더 긴 듯하고, 물길도 더 긴 듯하다. 다만 걸림이 없이 곧장 낙하하는 것은 이 폭포가 박연폭포만 못한 듯하다.
하늘에서 큰 띠를 아래로 드리운 듯하고 온 골짜기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데, 자줏빛 안개 속에 흰 눈발 같은 포말이 골짜기 안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사람의 귀를 놀라게 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하여 망연자실할 정도였다. 이 날의 기이한 장관은 참으로 평생 다시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남쪽에는 향로봉(香爐峰)이 있고, 동쪽에는 혜일봉(慧日峯)이 있고, 서쪽에는 청학봉(靑鶴峯)이 있다. 승려가 벼랑의 구멍을 가리키며 “저것이 학의 둥지입니다.” 하였다. 옛날에는 붉은 머리와 푸른 날개의 학이 그곳에 살았는데 지금은 오지 않은 지가 몇 년째라 한다. 나는 비록(秘籙)에서 “지리산의 푸른 학이 무등산(無等山)으로 옮겨갔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이야기와 서로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문득 크기가 나귀만한 산양이 향로봉 정상에 한가로이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비파와 장적(長笛) 소리를 듣고서도 귀를 기울이며 서성이고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아! 금화산(金華山)의 신선이 기르던 짐승이 흰 구름 속에서 몇 해 동안 한가로이 잠을 자다가 감히 여기에서 느닷없이 나로 하여금 기양자(騎羊子)를 배우게 하려는 것인가. 채찍을 들어 꾸짖자 양이 그 소리에 응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유람이 거의 끝나고 관아의 말이 골짜기에서 울고 있었다. 느릿느릿 말을 몰아 골짜기를 빠져나오니 아름다운 님과 막 이별한 듯하였다. 고개를 돌려 며칠 간 내 발자취가 지나온 길을 바라보니, 천 길 높이의 한 아름이나 되던 나무들이 바늘처럼 가늘게 보였다. 골짜기 이름을 물어보니 화개동(花開洞)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기후가 따뜻하여 꽃이 먼저 피기 때문이다.
옛날에 정일두(鄭一蠧 정여창)가 이곳에 집을 짓고 강학하였다. 일두가 이 산을 유람할 때, 힘이 다하자 허리에 새끼줄을 묶고 승려로 하여금 끌고 가게 하였다. 김탁영(金濯纓 김일손)이 이를 보고
“스님은 어디서 죄인을 묶어 호송하는 것인가.”
라 하였다. 또
“동량(棟樑)의 재목으로 쓰이지 못하고 텅 빈 산에서 말라 죽은 것은 조물주가 애석히 여길 만한 일이지만, 또한 이 나무들은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린 것이구나.”
하였다.
아! 말은 마음의 소리이다. 마음은 본래 청허(淸虛)하고 깨끗하니 말로 나와서 징험이 있게 된다. 그 후에 일두는 옥에 갇혀 죽게 되었고 탁영도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하여 모두 조물주가 애석히 여길 만한 바가 되었으니, 어찌 말이 씨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천도(天道)는 인사(人事)와 암암리에 합치되고, 통색(通塞)은 시운(時運)과 서로 부합한다. 형산(衡山)에 구름이 걷히자 한퇴지(韓退之 한유)는 자신의 정직함을 과시하였고, 동해에 신기루가 나타나자 소동파(蘇東坡 소식)가 스스로를 한퇴지에 견주었다. 그들은 이것이 천운인지 아닌지 몰랐지만 머지않아 조정에 돌아갔으니 길조(吉兆)가 먼저 응한 것이다.
삼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와 김탁영의 지리산 유람록을 읽어보니, 그들이 천왕봉에 올라 유람하던 날에 모두 비바람과 구름, 안개의 방해를 받아 낭패를 당한 적이 많았다. 이 두 사람이 정직한 줄은 천지가 분명히 아는 바이지만 산신령이 장난을 부려 일이 드러나기 전에 불길한 징조가 먼저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 내가 유순지와 입산한 뒤로 하늘은 맑고 날씨는 온화했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리고 유동하던 구름 기운도 높이 상승하여 산과 호수의 만 리나 뻗은 풍경이 두 눈에 훤히 들어왔다. 비록 신령스런 용의 일시적인 노여움을 재촉했지만, 결국 이튿날 날씨가 맑아지도록 도운 격이니, 무슨 해가 되겠는가.
정오 무렵 섬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와룡정(臥龍亭)에서 잠깐 말을 세우고 쉬었다. 이 정자는 생원 최온(崔蘊)의 장원(庄園)이었다. 큰 흙무더기가 강 한가운데로 뻗어 마치 물결을 끊어놓은 듯하였다. 말을 타고 반석 위로 나아가니 다시 하얀 모래사장이 깨끗이 씻은 솜처럼 수백 보 펼쳐져 있었다. 그 위에 초당 서너 칸을 지어놓고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로 주위를 둘러싸고 그림을 벽에 둘러놓으니, 시원스레 세속을 떠난 형상이었다. 이날은 남원부의 남창(南倉)에서 묵었다.
4월 정축(8일), 숙성령(肅星嶺)을 넘어 용담(龍潭) 가에서 잠시 쉬다가 관부(官府)로 돌아왔다. 서찰이 앞에 가득하고 주묵(朱墨)으로 쓰인 공문(公文)이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푸른 여행주머니를 풀고 죽장을 던지고서 도로 속된 관리의 일을 하려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아! 나는 성품이 소탈하여 약관의 나이 때부터 사방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벼슬길에 나오기 전에는 삼각산(三角山)을 집으로 여겨 아침저녁으로 백운대(白雲臺)를 올랐으며 청계산(淸溪山), 보개산(寶盖山), 천마산(天摩山), 성거산(聖居山) 등에서 독서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어 팔도(八道)를 두루 다닐 때는 청평산(淸平山)을 둘러보고 사탄동(史呑洞)으로 들어갔으며 한계산(寒溪山)과 설악산(雪嶽山)을 유람하였다. 봄, 가을로 풍악산(楓嶽山)의 구룡연(九龍淵)과 비로봉(毗盧峯)을 구경하고 동해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면서 영동(嶺東) 아홉 군의 산수를 두루 돌아다녔다.
적유령(狄踰嶺)을 넘어 압록강(鴨綠江)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천령(磨天嶺), 마운령(磨雲嶺)을 지나 장백산(長白山)에서는 칼에 기대어 서고 파저강(波豬江), 두만강(豆滿江)에서는 말의 목을 축이게 한 후 북해에서 노를 저으며 돌아왔다. 또 삼수(三水), 갑산(甲山)을 모조리 둘러보고 혜산(惠山)의 장령(長嶺)에 올라 앉아 백두산(白頭山)을 내려다 보고, 명천(明川)의 칠보산(七寶山)을 거쳐 관서(關西)의 묘향산(妙香山)에 올랐으며, 발길을 돌려 서쪽으로 가서 대해(大海)를 건너 구월산(九月山)에 오르고 백사정(白沙汀)에 정박하였다. 중국에 세 번 들어갔는데, 요동(遼東)으로부터 북경(北京)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아름다운 산수를 완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땅의 형세가 동남쪽이 낮고 서북쪽이 높으니, 남쪽 산악의 정상은 북쪽 산악의 발뒤꿈치보다도 못하고 또 두류산이 비록 명산(名山)이지만 우리나라의 산을 모조리 보았는데 풍악산이 집대성하였으니, 바다를 보면 여타의 물은 눈에 들어오기 어렵듯 두류산도 단지 한 주먹 돌덩어리일 뿐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제 제일 높은 천왕봉에 올라본 뒤에 비로소 그 웅장하고 걸출한 것이 우리나라 모든 산악의 으뜸임을 알게 되었다.
두류산은 흙[肉]이 많고 바위[骨]가 적으니 이것이 산을 더욱 높고 크게 만든다. 문장으로 비유하자면, 굴원(屈原)의 글은 애처롭고, 이사(李斯)의 글은 웅장하고, 가의(賈誼)의 글은 명쾌하고 사마상여(司馬相如)의 글은 풍부하고, 양웅(揚雄)의 글은 현묘한데, 사마천(司馬遷)의 글은 이 모든 것을 겸비한 것과 같다. 또 맹호연(孟浩然)의 시는 고아하고, 위응물(韋應物)의 시는 전아하며, 왕유(王維)의 시는 공교롭고, 가도(賈島)의 시는 청아하며, 피일휴(皮日休)의 시는 험벽하고, 이상은(李商隱)의 시는 기이한데, 두보(杜甫)의 시는 이 모든 것을 통합한 것과 같다. 지금 흙이 많고 바위가 적다고 두류산을 경시한다면, 이는 유사복(劉師服)이 똥덩어리라고 한퇴지(韓退之)의 문장을 기롱한 것과 같다. 산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4천 리나 면면히 이어져 우뚝하고 광대한 기운이 남해에서 막혀 축적되어 모이고 우뚝 솟아나 열두 고을을 둘러 끌어안고 2천 리를 두루 감싸고 있다. 안음(安陰)과 장수(長水)를 어깨에 메고, 산음(山陰)과 함양(咸陽)을 등에 짊어지고, 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을 배에 넣고, 운봉(雲峯)과 곡성(谷城)을 허리에 차고, 하동(河東)과 구례(求禮)는 그 무릎을 베고, 사천(泗川)과 곤양(昆陽)은 그 발끝에 닿아 있다. 그 뿌리에 얽혀 있는 지역은 호남과 영남의 태반이다. 저 풍악산은 북쪽에 가까운데도 4월이면 눈이 녹는데, 두류산은 남쪽 끝인데도 5월이 되어도 얼음이 단단하니, 그 땅의 높낮이를 이로 말미암아 짐작할 수 있다.
옛사람은 일찍이 천하의 큰 물 세 가지로 황하(黃河), 장강(長江 양자강), 압록강(鴨綠江)을 논하였다. 그러나 압록강의 크기는 서울의 한강(漢江)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옛사람의 말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범범하게 말한 것이니, 전기(傳記)에 기록된 것 또한 치밀하지 않은 점이 있을 것이다. 나도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바다와 산악을 모두 내 두 발로 밟았으니, 비록 자장(子長 사마천)과 박망(博望 장건)의 유람일지라도 내가 많이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발자취가 미친 곳을 들어서 등급을 가린다면, 두류산이 우리나라의 첫 번째 산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인간 세상의 영리(榮利)를 마다하고 멀리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고자 한다면, 이 산만큼 평안한 은거지는 없을 것이다.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을 깊이 아는 것은 백수(白首)의 서생이 관계할 바가 아니니, 조만간 허리에 찬 긴 인끈을 풀고 내가 처음 입던 옷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물소리 고요하고 바람소리 그윽한 곳에 절방 한 칸을 빌린다면, 어찌 유독 나의 본관지인 고흥(高興)만이 나의 여지(輿地)에 기록할 곳이겠는가.
만력 39년 신해년(1611) 4월 모일에 묵호옹(默好翁) 쓰다.
[주-D001] 만력(萬曆) …… 갔다. : 〈연보〉에 따르면, 이 시기 유몽인은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부임하고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였다. 그 후 순천(順天) 조계산(曹溪山)에 들어가 임경당(臨鏡堂)에 기거하다가 고흥(高興)으로 돌아갔다.[주-D002] 유순지(柳詢之) : 유영순(柳永詢, 1552~1630)으로, 순지는 자이다. 호는 졸암(拙庵) 또는 북천(北川)이다. 선조대 후반에 7년 동안 정승으로 있던 소북(小北)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에게 발탁되어 유당(柳黨)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주-D003] 제가 …… 때 : 유영순이 1606년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일을 가리킨다.[주-D004] 요천(蓼川) : 남원 일대에 흐르는 하천을 말한다.[주-D005] 황산(荒山)의 비전(碑殿) : 황산(荒山)은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봉대리에 있으며, 서무리, 가산리, 인월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비전(碑殿)은 황산대첩비지(黃山大捷碑址)의 비각(碑閣)을 가리킨다. 1380년 이성계(李成桂), 이두란(李豆蘭) 장군이 황산에서 왜적 아키바쓰 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이다. 황산대첩비지는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길 7에 있다.[주-D006] 양원(楊元) : 조선에 파병 온 명군(明軍)의 부총병으로, 정유재란 당시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전라 병사 이복남(李福男)과 광양 현감 이춘원(李春元),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의 군사 1천 명과 함께 남원성(南原城)에서 왜적을 방어하다 패하였다. 양원은 함락 직전에 서문을 통해 달아났다.[주-D007] 옷을 …… 것을 : 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있을 적에 친하게 지냈던 노승 태전(太顚)과 작별하면서 자신의 의복을 남겨 주었던 일화가 한유의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보인다.[주-D008] 청도(淸都) : 옥황상제가 산다는 천상(天上)의 궁전을 가리킨다. 《楚辭 遠遊》[주-D009] 어디인들 …… 말씀 : 공자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자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곳은 비루한 곳인데,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군자가 살면 어찌 비루함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주-D010] 용은 …… 못하므로 :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용은 돌을 보지 못하고 귀신은 땅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다. 《芝峯類說 卷20 禽蟲部 鱗介》[주-D011] 어찌 …… 아니겠는가 : 과아는 자손대대로 흙을 날라 산을 옮기려는 우공(愚公)에게 감동하여 산을 옮겨주었고, 거령은 화산을 둘로 쪼개어 황하를 흐르게 하였다는 전설의 인물이다.[주-D012] 동장군(董將軍)이 패한 것 : 동장군은 명나라 신종 때 장군 동일원(董一元)이다. 1597년(선조30) 일본군이 조선을 재침하였을 때 명나라의 구원병을 인솔하고 유정(劉綎) 등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사천(四川)에서 일본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군을 공격하다가 적장의 꼬임에 빠져 패배했다.[주-D013] 초파리 : 원문은 ‘혜계(醯鷄)’로, 술 단지에 생기는 초파리 종류의 하루살이 벌레이다. 주색 등 향락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자들의 비유로 흔히 쓰인다.[주-D014] 하나의 손가락 :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만 같지 않고, 말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만 같지 않으니, 하늘과 땅은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라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15] 안기생(安期生)과 악전(偓佺) : 안기생은 선진 시대(先秦時代)의 방사(方士)로 봉래도(蓬萊島)에서 사는데, 오이만한 크기의 대추를 먹고 살았다 한다. 악전은 괴산(槐山)에서 약초를 캐고 사는 신선인데, 송실(松實)을 먹기를 좋아하고 온몸에 털이 났으며, 눈동자가 네모졌고 머릿결이 푸른빛이며, 몹시 빨리 달려서 달리는 말을 쫓아갈 수가 있다고 한다. 《史記 卷80 樂毅列傳》[주-D016] 검각(劍閣) : 중국 장안(長安)에서 서촉(西蜀)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예로부터 험준하기로 유명하였다.[주-D017] 일백 …… 형세를 : 황정견의 〈차운무종송별시(次韻楙宗送別詩)〉에 “일백 여덟 굽이의 천상의 길에, 거년의 명일에 유인을 보내었네.[一百八盤天上路, 去年明日送流人.]”라 하였고, 또 〈신유도중기원명시(新喩道中寄元明詩)〉에 “일백 여덟 굽이를 손잡고 올랐노니, 지금도 그 꼬불꼬불한 길 꿈속에 떠오르네.[一百八盤携手上, 至今猶夢遶羊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黃山谷詩集 卷12, 16》[주-D018] 영산회상(靈山會上) :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회(靈山會)의 불보살(佛菩薩)을 노래한 악곡이다.[주-D019] 보허사(步虛詞) : 아악곡(雅樂曲)으로, 거문고, 가야금, 양금 등 현악합주로 연주하는 ‘보허자(步虛子)’를 일컫는 곡명이다.[주-D020] 범패(梵唄) : 석가여래의 공덕을 찬미하기 위해 경문(經文)이나 게(偈)에 가락을 붙여서 부르는 노래이다.[주-D021] 단사(丹砂) : 광택이 있는 짙은 홍색의 광물이다.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한다.[주-D022] 두 개의 지팡이 : 원문은 ‘쌍석(雙錫)’으로, 옛적에 보지대사(寶誌大師)가 주석 지팡이를 짚었는데 여기서는 승려가 두 명이어서 ‘두 개의 지팡이’라고 썼다.[주-D023] 김탁영(金濯纓)은 …… 말하였는데 : 이 내용은 김일손(金馹孫)의 《탁영집(濯纓集)》 권5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에 보인다.[주-D024] 오래도록 사는 것이 : 원문은 ‘구시(久視)’로 장생(長生)이나 불사(不死)와 같은 말이다. 《도덕경》 59장에 장생구시(長生久視)의 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주-D025] 여산(廬山)의 폭포 : 여산은 중국 강서성 북부 무푸[幕阜]산맥의 동단부를 이루는 명산이다. 여산 남쪽에 십여 개의 폭포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개선(開先)의 쌍폭이 가장 빼어나다고 한다.[주-D026] 비록(秘籙) : 신선이 되는 방법을 기록한 도교 문서이다.[주-D027] 금화산(金華山)의 신선 : 한나라 때의 신선 적송자(赤松子)를 가리킨다. 금화산은 중국 절강성 금화현(金華縣)에 있는 산으로, 적송자가 이곳에서 도를 얻었다고 한다.[주-D028] 기양자(騎羊子) : 갈유(葛由)를 말한다. 《열선전(列仙傳)》 상권에 “갈유는 강땅 사람으로, 주 성왕 때 나무로 양을 만들어 그에게 팔았다. 어느 날 양을 타고 서촉으로 들어오자 촉땅의 왕후 귀인들이 그를 따라 수산으로 올라갔다. 아미산의 서남쪽에 있는 무지하게 높은 산이다. 그를 따라갔던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모두 선인이 되는 방법을 얻었다.” 하였다.[주-D029] 일두는 …… 요절하여 : 정여창은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었고 1504년에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김일손 또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일찍 죽었다.[주-D030] 형산(衡山)에 …… 과시하였고 : 한유가 형악(衡嶽)에 올라가 기도를 한 덕분에 운무가 걷혔다는 고사가 있다. 《韓昌黎集 卷3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주-D031] 동해에 …… 견주었다 : 소식의 〈등주해시(登州海市)〉에 “조양태수가 남쪽으로 좌천되어 석름봉과 축융봉 높은 모습 기쁘게 보았네. 스스로 말하기를 정직하여 산신령을 감동시켰다지만 조물주가 가련한 신세 불쌍히 여긴 줄 어찌 알았으랴.[潮陽太守南遷歸, 喜見石廩堆祝融, 自言正直動山鬼, 豈知造物哀龍鍾.]” 하였다. 《蘇東坡全集 卷15》 여기서 조양태수는 한유를 가리킨다.[주-D032] 유사복이 …… 같다 : 미상이다.[주-D033] 옛사람은 …… 논하였다 : 명대(明代)의 지리지 《황여고(皇輿考)》 권4 주석에 “천하의 큰 물 세 가지로 황하, 장강, 압록강이 있다.[天下有三大水, 黃河長江鴨綠江也.]” 하였다.[주-D034] 자장(子長)과 박망(博望)의 유람 : 자장은 《사기》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의 자이다. 사마천은 온 천하를 두루 유람한 결과 명문장가가 되었다고 한다. 박망은 곧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을 말한다. 장건은 황하의 근원지를 밝히려고 뗏목을 타고 가다가 하늘 궁전에 이르러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가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에 실려 있다.[주-D035] 처음 입던 옷 : 벼슬을 떠나 처음 은거하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물러가 다시 나의 처음 입던 옷을 손질하리.[退將復修吾初服]”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김홍백 권진옥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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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곡집(八谷集) 구사맹(具思孟)생년1531년(중종 26)몰년1604년(선조 37)자경시(景時)호팔곡(八谷)본관능성(綾城)시호문의(文㦤)특기사항유희춘(柳希春), 이황(李滉)의 문인
八谷先生集卷之一 / 七言律詩 / 臺巖僧神照。以詩見投。次韻酬之。二首。
孤棲巖畔了前因。自是超然物外人。半搨宿雲留戶內。分身凉月印溪濱。啖松已覺增淸健。破衲寧知惱實賓。獨有廣寒樓上客。靑衫依舊禁城塵。
流行坎止本無因。遁迹由來只在人。經卷詩籤方丈裏。藥爐丹鼎小泓濱。淪亡不耐思賢者。尋訪先愁忌惡賓。洞口佐卿誰遣去。寒巢寂寞已生塵。
師。辛酉大禪。淸𦡱不雜塵土氣。初從東洲先生受業。通內外典。詩亦疏淡。實禪門名勝也。入定於頭流之頂龍庵。絶粒啖松。已三年。愈覺充健。嘗獲知於玉溪盧尙書。追思不置。故次篇第五及之。有一邑宰率狂童。遊靑鶴洞。射鶴中翅。病瘡留數日。遂飛去不復來。末句。蓋傷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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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중(蜀中)의 도사(道士) 서좌경(徐佐卿)이 학으로 변하여 사원(沙苑)에 왔다가 당 명황이 사냥하는 화살을 맞고 서남으로 날아 갔다. 그의 제자에게 그 화살을 주며, “이 뒤에 이 화살의 주인이 올 것이니 이것을 돌려주라.” 하였다. 후일 명황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촉중(蜀中)으로 파천해 가서 그 화살을 발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