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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막4:1-9)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바닷가로 가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닷가까지 예수님을 따라 왔는데 예수님은 거기에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닷가까지 가시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회당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닷가로 나가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쫓겨 가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틀린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닙니다.
언제는 그의 제자들이 하도 답답해서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눅9:54,55)
예수님을 그 분이 옳으셔도 실력행사를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할 수만 있다면 실력행사를 합니다.
그들은 제가 옳지 않아도 제 욕심을 위해 힘을 과시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옳고 힘이 있으면 어떤 바보가 성경 말씀을 따르겠습니까?
힘이 있으면 대포로 쏴버리고 말지!
그래서 일어난 것이 일이차 세계 대전입니다.
예수님은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럴 일이 아니신데 스스로 바닷가로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참아주십니다.
여러분 따라 해보세요.
하나님은 계속 참아주십니다.
하나님의 참아주심으로 죄인들은 생명의 기회 즉 회개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렘3:22,23)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관철시키는 사람은 그 안에 생명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원수는 내가 갚겠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영혼을 고려하며 자신의 계획을 접는 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지 이 땅에서 100층 빌딩 소유주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병사들이 활과 창을 들고 왔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일거에 처리하도록 천사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불의한 자들에게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찌른 자들에게도 생명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가르치심
주님이 그렇게 쫓겨 가셔서 하신 일은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아주 이성적인 작업이셨는데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그 여인은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계신 곳에는 예수님 옷자락 만지려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밀치며 달려들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는 동안에 불쑥 나타난 나병환자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혹은 귀신들린 자식을 위해 온 부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은 바닷가에 몰아놓고 예수님 홀로 배를 타신 것입니다.
그 배 위에서 주님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기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의 것들을 가지고 와서 자꾸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방해했지만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제를 가지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분명히 당장 득도 없는데 설교 들으러 거기 왜 가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부흥은 언제 되냐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설교를 한다는 사람들이 아주 과장된 목소리로 감정에 호소합니다.
아주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강대상에서 아주 사람을 웃기는 코메디를 합니다.
어디 튀는 예화를 고르느라 고민을 합니다.
저는 이런 황당한 소리도 들었습니다.
한 교인이 복권이 당첨이 된 다음에 그 교회가 부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이런 이상한 일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주제를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셨습니다.
당장에 우리와 저기 멀리 있는 나라입니다.
거기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이 살던 세상 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한 목사들이 기이한 내용과 행동을 가지고 사람을 끌려하지만 그것을 두고 교회 부흥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교회는 시장바닥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의 사람들은 웃기는 소리를 들으려고 예수님께 간 것이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해 듣는 일이 그렇게 좋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님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잘 알고 하나님을 나라를 잘 전하면 더 이상 튀는 예화 찾느라고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죄인에게는 누구나 죄의 종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영적 갈급함이 있는 것입니다.
영생하는 하나님의 나라만이 그 필요를 채워줄 것입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
거기에는 높은 첨탑도 스테인드글라스와 성가대의 파이프오르간에 4부 찬양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강대상 위에서 흰 구두에 흰 양복을 입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유치찬란한 금빛 나는 관을 쓰고 기이하게 만든 가운을 입은 채 강대상에 서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옷은 땀 냄새에 젖어 있었고 특별히 그 분의 강대상은 바람에 흔들리는 배였습니다.
생선 비린내가 진동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모래밭으로 파도가 몰려오고 갈매기 울음소리에 뒤섞여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곳이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뺀질거리는 강대상과 값비싼 파이프오르간이 교회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 있느냐는 것입니다.
웃기고
없는 농담하고
정치 운동하고.......
그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전해진다면 바닷가라도 거기가 교회입니다.
*비유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산유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산허리에 서 있는 꽃나무 이야기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국어 선생님은 그것은 나무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홀로 서서 피고 지는 산유화는 시인의 외로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소월은 내가 외롭다는 말 한 마디 한 적 없습니다.
시인은 외로운 산유화가 되어 산에서 피고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을 만드시면서 그 모든 것들에 이런 비유를 심어두신 것입니다.
혹시 텔레비전 세트장을 가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는 마당가에 소품, 빗자루 하나도 다 영화감독의 의도대로 그 자리에 놓인 것입니다.
꼭 세트장 그 자리에 그 시간에 버려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을 섭리하실 때에 하나님은 의도를 가지시고 바로 그 때에 바로 그 자리에 그것을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마당의 빗자루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비유를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수두룩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듣도록 아주 구체적으로 방법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드러누우면 거기에도 말씀이 보이도록 천장에 말씀을 붙여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의 예는 너무나 일상적이라 놀랍니다.
이제 가을이 오니 김장철에 김장배추를 수확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초가을에 김장 배추 무씨를 뿌리는 것은 말씀의 가르침을 비유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소품 하나까지 거기에 하나님의 비유를 감추어두신 것입니다.
때가 되면 이 지구 위의 수억의 사람들이 밭에 씨를 뿌립니다.
물론 거기에 꼭 하나님의 말씀 십자가의 말씀을 뿌려놓아야 합니다.
복음의 밭에 샤머니즘의 기복주의의 씨앗을 뿌려놓고 영생의 열매를 얻으려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그 씨앗이 예수님의 그것이라면 호박이 열릴지 수박이 여릴지 그것을 염려할 필요가 절대로 없습니다.
복음의 씨를 제대로 뿌리면 거기에서 반드시 영생의 결실이 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씨앗을 심지 않고 가을에 수확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복음의 말씀이 뿌려지지 않으면 영생의 수확이 없습니다.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그런데 그 씨앗을 그저 뿌려만 놓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뿌려진 씨앗 위로 거름을 잘 주고 흙을 덮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장소 길은 애초에 씨앗이 뿌려져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혹시 흙이 그 씨앗 위를 덮었다 하더라도 거기를 지나가던 사람이 밟고 지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씨앗을 뿌리려면 사람이 걷기 위한 곳에 그것을 뿌리면 안 됩니다.
수확을 목적으로 하는 장소인 밭에 뿌려야 하는 것입니다.
길에도 밭에도 목적이 있듯이 복음에도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가지고 세상 것을 해결하려는 장소에 씨를 뿌리면 안 됩니다.
영생을 목적으로 하는 장소인 제대로 된 밭에 씨를 뿌려야합니다.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5,6)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러분에게 신앙이 있다면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있습니다.
열심히 전도했는데 그 분이 작은 시험에 넘어지고 마는 경우입니다.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는데 그럴 수 있느냐며 교회를 떠나고 맙니다.
선생님이 매를 때린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물론 폭력은 심각한 문제가 되지만 사랑의 매라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교인들은 죽을병에 걸려 병원 침대에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사업을 망하고 극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경우도 많습니다.
모든 것들이 잘 되어서 그 일이 그렇게 감사하다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저는 여태껏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은 40이 되셔서 신앙을 시작하셨습니다.
사업을 다 망하고 한계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어린 초등학교 시절 주일 학교를 나갔는데 교회에서 자신의 새 신발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젊음을 다 보내고 교회를 다시 찾으신 것입니다.
그 믿음의 뿌리가 얕아서 신발 한 켤레에 신앙을 버리실 뻔 한 것입니다.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가시떨기도 잘 자라는 것을 보면 그 곳은 돌도 없고 물도 거름도 충분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잎사귀만 무성하지 막상 무화과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자랐으니 모든 것이 문제없을 줄 알았습니다.
결실을 막는 것들은 그 가시는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기타 욕심이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죄인들의 세상 욕심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 보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보장입니다.
요즈음은 예수님 이름으로 부자 되려는 사람만 많습니다.
그러니 환경이 파괴되어 코로나가 터지고 태풍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성경은 씨앗이 뿌려져서 수확을 막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나열한 것입니다.
한 알의 씨앗이 수확을 하는 과정에서 수 없이 많은 방해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생명을 위협할지 사람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때에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종조를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품종이 더 좋은 씨앗에 대해서 일체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 자체가 완벽하시니 그 씨앗의 우열을 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과연 우리 안에서 그 결실을 내느냐는 그 환경에 따른 것입니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3)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가뭄이 들어서 물이 없으면 그것을 말라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금 농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실존적인 요구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잘 자라도록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환경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과 같이 말씀을 엉뚱한 장소인 길가에 씨를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이라는 목적을 가진 장소에 뿌려져야 합니다.
돌밭에 뿌려져서 손톱만큼 뿌리를 내렸다가 뜨거운 햇빛이라도 비치면 그것에 시달려서 말라죽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씨앗을 뿌려졌는데 세상 염려에 쌓여서 혹은 욕심에 쌓여서 잘 자라기는 했는데 열매가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때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을 것입니다.
그것을 콩과 함께 심었는데 정말 그 크기가 내 키만큼 컸습니다.
그것을 햇빛에 잘 말린 후에 뒤집어 들고 몽둥이로 툭툭 쳤습니다.
그 작은 것 하나에서 쏟아지는 수확을 보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옥토라는 밭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말씀을 드렸지만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듣고 정말로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깁니까?
원수가 나타나면 하나님께 그 일을 맡기기 전에 내가 먼저 두 팔 걷고 달려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들었다면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가장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제 시늉조차 안 내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의 생명을 위해서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혀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힛틀러가 나타났는데 그 때도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이냐고 할 것입니다.
교회가 담대하게 이 십자가를 전하지 못했으니 많은 기독인이라는 사람들이 힛틀러의 졸개가 되고만 것입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뉴스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 사람의 종교부터 확인합니다.
지금 광화문에 힛틀러 같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문제는 예수 이름을 내건 졸개들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제대로 가르쳤더라면 힛틀러만 완전무장하고 광화문에 혼자 서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옛적 2,000년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교회들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가는 곳마다 거기에서 십자가를 무력하게 수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