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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새로움을 위하여
이정환
1
어떤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했는지 기대하며,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작을 살폈다. 물론 엄정한 심사과정을 거쳐서 등용된 작품인 만큼 각각 나름의 특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필자는 금년 초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여러 문학 갈래 중에 시조를 선택한 이들에게 묻고 싶다. 왜 하필이면 시조인가? 생뚱한 이야기일는지는 모르지만 시조를 쓰고자 하는 이에게는 남다른 소명의식이 요청된다. 또한 시조를 쓰겠다면 무엇보다 시조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이 형식이 자신의 체질에 잘 맞는지 면밀히 자체 검증해 보아야 한다. 진정 영혼의 자유로움을 갈구한다면 3장 6구 12음보라는 정형의 틀을 가진 시조는 높은 장벽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천명할 수 있는 것은 틀이 마냥 정신을 억압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조 형식을 잘 숙지하게 되면 틀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때 틀은 틀이 아니라 개성적인 기율로서 생명력을 확대·재생산하는 창의적 의미공간이다.
적어도 하고많은 문학 갈래 중에 시조를 선택했다면, 시조가 아니면 아니 되겠다는 강력한 내적 요청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시조 고유의 형식미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형식적 특징에 대한 충분한 숙지 없이 좋은 시조를 쓰기 어렵다. 또한 늘 새로움에 대한 궁구가 필요하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다른 장르로 등단 과정을 거친 다음 시조로 응모하여 당선되는 경우다. 물론 장르를 넘나드는 일은 개인의 자유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그 일이 일회용으로 그친다면 달리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장르의식이 요청된다.
2
신인의 작품이 완벽하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얼마나 그 가지를 멀리 뻗어나가게 될까 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소 부족한 점은 시인 스스로가 깨닫고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다. 수많은 응모작들을 제치고 당선된 작품들을 보도록 하겠다.
어라, 쪼그만 녀석 여간내기 아니었네
엉덩이 뻥 내질러도, 허리를 작신 밟아도
도무지 쓰러지지 않네,
두 손 들 줄 모르네.
누르면 꼭 그만큼 이 악물고 튀어 올라
가슴속 숨긴 깃발 하늘 높이 흔들다가
다시금 지상에 내려
낮은 곳을 살피네.
마음조차 둥글어서 각진 세상 품은 걸까?
진자리 마른자리 아래로만 길을 찾는
속 텅 빈 고무공 성자,
걸음마저 탱탱하네.
-고윤석,「고무공 성자」전문
창살의 봉인에서 해제된 집이 있다
유성우 지던 하늘 내 손에 쥐어진 별
여우가 삼켰다 뺐다 유혹하던 유리구슬
원추형 거꾸로 선 꿈에 맺힌 물방울
미세한 금, 새떼가 저 멀리 흩어진다
바람이 칼질한 공중 벌겋게 부푼 노을
지붕을 걸으며 조심조심 내려온다
내연의 열기로 밥을 짓는 처마 끝
또 하루 저물어간다 창살 다시 꽂힌다
-고성만,「고드름」전문
「고무공 성자」는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다. ‘어라, 쪼그만 녀석 여간내기 아니었네’에 대한 방증으로‘엉덩이 뻥 내질러도, 허리를 작신 밟아도/ 도무지 쓰러지지 않네,/ 두 손 들 줄 모르네.’라고 노래한다. 또한‘누르면 꼭 그만큼 이 악물고 튀어 올라’서 ‘가슴속 숨긴 깃발 하늘 높이 흔든’다고 증언한다. 그러니까 ‘고무공’은 아무도 본 일은 없지만 가슴 속에 깃발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존의 깃발이자 의지의 표상이기도 하다. ‘고무공’은 ‘다시금 지상에 내려/ 낮은 곳을 살피’는 여유도 보인다. 셋째 수에서는 당당히 걸어가고 있는 ‘고무공’을 바라보면서 ‘마음조차 둥글어서 각진 세상 품’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진자리 마른자리 아래로만 길을 찾는/ 속 텅 빈 고무공 성자’는 그 걸음마저 탱탱하여 자존감이 한껏 고양된다.「고무공 성자」속에는 살가운 동심이 흐른다. 그만큼 순수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이 탄력 있게 읽히는 것은 비단 대상이 고무공이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자기 목소리, 자기 시각이 있다. 생생한 표현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 읽게 한다. 화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번진다.
「고드름」은 직조능력이 돋보인다. 시의 분위기가 신비스럽다. 단순한 정경 묘사에 그치지 않고 생생하고도 세밀한 형용을 통해 밀도 있는 미적 질서, 미적 자질을 획득하여 정신을 고양시킨다. ‘창살의 봉인에서 해제된 집이 있다/ 유성우 지던 하늘 내 손에 쥐어진 별/ 여우가 삼켰다 뺐다 유혹하던 유리구슬’이라는 첫수에서 보듯 신선한 시어 차용, 빈틈없는 구성력, 맺고 푸는 음보의 능수능란함과 첫수 초장에서부터 팽팽한 긴장감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둘째 수는 또 어떤가. ‘원추형 거꾸로 선 꿈에 맺힌 물방울/ 미세한 금, 새떼가 저 멀리 흩어’지면서 ‘바람이 칼질한 공중 벌겋게 부푼 노을’이라는 개성적이 이미지를 보인다. 셋째 수는‘지붕을 걸으며 조심조심 내려’와서 ‘내연의 열기로 밥을 짓는 처마 끝/ 또 하루 저물어간다 창살 다시 꽂힌다’로 끝맺고 있다. 빈틈없는 구성과 유기적인 체계가 인상적이다.
바랭이 강아지풀 숨죽이는 저물녘에
장독대 틈 사이로 구렁이 지나간다
고요는 툇마루에서 먼지로 층을 쌓는다
우체통은 주인 없는 고지서를 받아놓고
별들은 감나무 가지에 오종종 앉아 있다
처마는 구부러지고 기와 물결 끊어진다
바람이 들락거리는 양주댁 방안으로
손주들 웃는 모습 흙벽에 즐비한데
흩어진 근황을 묻는 달빛만 수심 깊다
-강대선,「마당 깊은 집」전문
흔들리는 날씨를 점치는 일이었지
들개가 물고 가는 싱거운 돌 하나
생이란 매일 그 예보에
실패하는 법이라네
잎사귀 쥐었다 놓은 바람의 손금처럼
달의 무늬 되지 못한 주름진 돌들은
으스름 달 뜬 밤이면
뜬 눈으로 갈라지네
천년을 살 것인 양 견적 없이 괴로워도
뜨거운 재의 꿈을 꾸고 있어 저 멀리
한 마리 개가 오는 동안
선한 피를 흘릴 거야
-최보윤,「돌들은 재의 꿈을」전문
「마당 깊은 집」은 잔잔한 흐름을 타고 있다. ‘바랭이 강아지풀 숨죽이는 저물녘에/ 장독대 틈 사이로 구렁이 지나’가는 정경은 이미 우리가 오래 전 잃어버린 세계다. 그래서 ‘고요는 툇마루에서 먼지로 층을 쌓’고 있는 것이다. 마당은 깊지만, 북적거리는 공간은 아니다. ‘우체통은 주인 없는 고지서를 받아놓고/ 별들은 감나무 가지에 오종종 앉아 있’고 ‘처마는 구부러지고 기와 물결 끊어진’상태다. 그곳‘바람이 들락거리는 양주댁 방안으로/ 손주들 웃는 모습 흙벽에 즐비’하지만 인기척은 없고 ‘흩어진 근황을 묻는 달빛만 수심’이 깊을 뿐이다. 토포필리아 즉 장소애는 있지만 바이오필리아 즉 생명애가 없는 자못 쓸쓸하고 적막한 정황이 제시된 시다. 이러한 부재 상황은 현대인들이 처해 있는 인생의 씁쓸한 한 단면이기도 하다.
「돌들은 재의 꿈을」은 철학적 사유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 속에 등장하고 있는‘들개, 싱거운 돌, 주름진 돌들, 뜨거운 재의 꿈, 한 마리 개, 선한 피’라는 이미지들이 서로 어떤 관계 맺기와 충돌을 통해 제목에서 일러주듯‘돌들은 재의 꿈을’이라는 난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둘째 수‘잎사귀 쥐었다 놓은 바람의 손금처럼/ 달의 무늬 되지 못한 주름진 돌들은/ 으스름 달 뜬 밤이면/ 뜬 눈으로 갈라’진다는 진술에서 그러한 생각을 한참동안 유추해 보게 된다. ‘뜨거운 재의 꿈을 꾸’면서 ‘한 마리 개가 오는 동안/ 선한 피를 흘릴’시적 자아의 간단치 않을 여정을 상상해 본다.
포르말린 가득 찬 유리병을 본 적 있니
시간을 베고 누운 병 속의 표본처럼
내 몸속 수많은 사람 보관되어 있지
네모난 구멍들이 뚫려있는 몸통에
각진 불이 켜지는 한밤이 찾아오면
사람이 꿈틀거리는 유충처럼 보이지
몸속엔 살인범도 그를 쫓는 형사도 살지
술병의 병목 부는 나팔수도 하나 있지
심장엔 물방울 같은 아이들이 뛰어 놀지
바람이 어깨 펴고 옆구리를 치고 가면
철커덕 휘청이며 키를 높이 세우지
가슴에 현대아파트 이름표가 반짝이지
-김나비,「MPD(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다중인격장애)」전문
고요했던 순물질
비등점에
닿는 순간
최선의 방어이자
최후의 공격으로
뿔, 뿔, 뿔
들끓어 오르지
맹렬해진
심장의 서슬
차오르던 역한 기운
포화점을
넘는 찰나
한 모금 혼돈주로도
솟구치는 혀의 돌기
이맛전
짓이겨져도
치받아버리지
뿔
뿔
뿔
-이현정,「뿔, 뿔, 뿔」전문
조각가가 꿈이었던 팔목 굵은 사내는
대리석 목욕대 위 모델을 흘깃 보고
한 됫박 첫물 뿌리며 데생을 시작한다
한때는 눈부셨던 세차장 사장도
지금도 눈부신 성형외과 의사도
실상은 꼼짝 못하고 몸을 맡긴 피사체
깔깔한 때수건 조각도처럼 밀착시켜
핏줄까지 힘주어 묵은 외피 벗겨내면
곧이어 환해진 토르소, 두 어깨 그득하다
수증기 송송 맺힌 목욕탕 한 편에서
날마다 극사실주의 석고 깎는 조각가
두 손은 북두갈고리 거친 숨을 뱉는다
-이현정,「세신사」전문
「MPD(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다중인격장애)」는 제목도 의외고 내용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입체감이 느껴지는 탄력 있는 어법과 비유로 말미암아 독해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다중인격장애’라는 이채로운 소재로 이렇게 밀도 있는 시를 축조한 점은 눈길을 끈다. ‘포르말린 가득 찬 유리병을 본 적 있니/ 시간을 베고 누운 병 속의 표본처럼/ 내 몸속 수많은 사람 보관되어 있지’라는 첫수부터 범상치가 않다. ‘내 몸속 수많은 사람 보관되어 있’다니, 참으로 섬뜩하다. 둘째 수는 또 어떠한가? ‘네모난 구멍들이 뚫려있는 몸통에/ 각진 불이 켜지는 한밤이 찾아오면/ 사람이 꿈틀거리는 유충처럼 보’인다고 진술한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그의 ‘몸속엔 살인범도 그를 쫓는 형사도 살’고 ‘술병의 병목 부는 나팔수도 하나 있’고 ‘심장엔 물방울 같은 아이들이 뛰어 놀’기도 한다. 그리고 ‘바람이 어깨 펴고 옆구리를 치고 가면/ 철커덕 휘청이며 키를 높이 세우’는데 그의 ‘가슴에 현대아파트 이름표가 반짝’인다고 깜짝 반전을 보인다.
「뿔, 뿔, 뿔」과「세신사」는 같은 시인의 작품으로 완성도보다는 새로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읽을 수 있겠다. 특히 「뿔, 뿔, 뿔」은 새롭다. 패기가 넘친다. 무거운 시어들을 잘 용해하여 시종 긴장감 있게 축조한 점이 눈길을 끈다. ‘순물질, 비등점, 최선의 방어, 최후의 공격’과 같은 묵직한 시어들을 초·중장에 포진시킨 뒤 종장에서 ‘뿔, 뿔, 뿔/ 들끓어 오르지/ 맹렬해진/ 심장의 서슬’이라고 일단 한번 한숨을 돌리다가 둘째 수에서 ‘차오르던 역한 기운/ 포화점을/ 넘는 찰나’에 ‘한 모금 혼돈주로도/ 솟구치는 혀의 돌기’로 말미암아‘이맛전/ 짓이겨져도/ 치받아버리지’라고 부단한 괴롭힘에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시적 자아의 방어 혹은 과감한 되받아치기를 읽는다.「세신사」가 보여주는 인생담론도 눈여겨 볼 점이다. 집요한 탐색과 주제를 향한 집중력이 돋보인다.
건장한 헤드라인에 낱낱이 포위되어
포지션 따라 줄 맞춘 활자들 그 사이
예각의 커터 칼날이 가로지른 행간들
이슈가 이슈를 실시간으로 덧칠한
지면마다 시시비비 들끓는 파열음에
팩트는 구겨진 채로 무혈의 접전이다
전모가 드러난 가십은 접어두고
목적지에 소환될 진술은 따라간다
치명적 오독이 없는 재활의 분리수거
-이희정,「스크랩」전문
조그만 발톱에서 새로운 꽃 돋아나
꽃밭이 마법으로 풍성해질 때까지
발걸음 사그라지는 발끝을 생각한다
어머니 흔들리는 건 그늘을 입기 때문
씨방 속 남은 열기로 닳은 당신 세워보면
점묘된 눈물자국은 혼잣말을 삼킨다
돌아본 발자국 소리 얼굴을 내밀 때
그믐달 위로 하나 둘 피어난 바닥꽃
꽃잎은 울지 않기 위해 발끝부터 타오른다
-박진형,「페디큐어」전문
「스크랩」은 공들여 쓴 작품이다. 착상도 참신하다. ‘건장한 헤드라인에 낱낱이 포위되어/ 포지션 따라 줄 맞춘 활자들 그 사이/ 예각의 커터 칼날이 가로지른 행간들’이라는 첫수가 보여주는 다소 건조하지만 날카로운 직조는 새롭다. ‘전모가 드러난 가십은 접어두고/ 목적지에 소환될 진술은 따라’가면서 ‘치명적 오독이 없는 재활의 분리수거’로 끝맺고 있는 대목에서 스크랩의 모든 것을 읽는다.
「페디큐어」는 소재가 새롭다. 그 느낌은「스크랩」과 엇비슷하다. ‘페디큐어’는 ‘발톱의 매니큐어술’이다. 둘째 수에서‘어머니 흔들리는 건 그늘을 입기 때문/ 씨방 속 남은 열기로 닳은 당신 세워보면/ 점묘된 눈물자국은 혼잣말을 삼킨다’면서 미세한 감각의 촉수로‘페디큐어’를 노래하고 있다. ‘돌아본 발자국 소리 얼굴을 내밀 때/ 그믐달 위로 하나 둘 피어난 바닥꽃/ 꽃잎은 울지 않기 위해 발끝부터 타오른다’고 마무리 짓는 것에서 보듯 시로 빚기 어려운 특이한 소재를 섬세한 손길로 버무린다.
입안의 잔칫상 성게알 톡톡톡
터지는 게, 맛있게 터지는 게 고로코롬
깨어진 하루가 홀딱, 파도에 젖었다
터져서 기쁘다니 지지고 졸이고
겁나게 그녀는 가난한 골목길
백내장 앓는 가로등 아래 서로 맛났나
익모초로 단 입술 떠난 그녀 상큼 쓰려,
고사리 고것고것 살리라 하는데
도라지 돌아 돌아서 오라는데 소식 없다
돌아오고 돌아가게 만드는 그녀가
돌아버린다, 저 섬에 돌아갈 땔 아는 건
갯바람 징허게 동백 헤아릴 때이다
-김성배,「산다화 조리다 남도 삼백리를 졸다」전문
간신히 삼켜버린 한숨이 비려지면
목 안의 근육들이 실눈처럼 벌어지고
묵묵한 바다를 향해
등 구부려 해감한다
물 위를 달려가는 주름진 한숨 더미
부표를 끌어안고 바다는 늙어가고
관절의 묵은 소금기
일어서려 넘실댄다
성글은 어망 속엔 철 만난 알 품은 게
어망을 부여잡은 게의 집게발과
서로를 놓치지 않는
게와 게의 집게발
바다는 게를 따라 포구로 올라왔다
바다를 뜯어내느라 기우는 어부의 등
창백한 휜 낮달 같다
생활이 만곡이다
-이경희,「바다에서 게를 뜯어내고」전문
생은 온통 흔들림의 기억으로 남는가
나무의 가슴은 소용돌이로 어지럽다
상처를 보듬어 안은 강물의 파문처럼
안으로 삭혀 삼킨 울음의 무늬인지
밖으로 밀어냈던 몸부림의 흔적인지
손금의 운명선같이 가지들은 뻗어나가고
빛과 어둠 현실과 이상, 그 삶의 온도차
바람은 언제나 제 안에서 일었다
우듬지 경계를 넘어 푸른 길을 찾는다
현기증으로 사는 일에 멀미가 나는 날엔
발밑의 뿌리들은 따뜻한 흙 움켜잡는다
연둣빛 어린 연어 떼 돌아오는 가지 끝
-최정희,「나이테를 읽다」전문
「산다화 조리다 남도 삼백리를 졸다」는 이채롭다. 군데군데 비문이 등장하는데 그것도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오고 돌아가게 만드는 그녀가/ 돌아버린다, 저 섬에 돌아갈 땔 아는 건/ 갯바람 징허게 동백 헤아릴 때이다’라는 끝수가 긴 여운을 남긴다. 하고 싶은 말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잘 대할 수 없는 짜릿한 이야기가 깔려 있는 시편이다. 비문으로 된‘겁나게 그녀는 가난한 골목길’과 같은 중장은 시조에서 피해야 할 형태인‘3 /3 /3 /3’구조다. 한 마디 정도는 변화를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다에서 게를 뜯어내고」의 둘째 수‘물 위를 달려가는 주름진 한숨 더미/ 부표를 끌어안고 바다는 늙어가고/ 관절의 묵은 소금기/ 일어서려 넘실댄다’라는 대목에서 지난한 삶의 한 단면을 읽는다. ‘바다는 게를 따라 포구로 올라’왔고, ‘바다를 뜯어내느라 기우는 어부의 등’을 바라보면서 화자는‘창백한 휜 낮달 같다’라고 진술하다가‘생활이 만곡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는 셋째 수는 강렬한 울림을 안긴다. 세밀한 관찰의 소산이다.
「나이테를 읽다」는 좋은 작품이다. 시종 같은 어조로 주제를 구현하는 집중력에서 기량을 느낀다. ‘생은 온통 흔들림의 기억으로 남는가’라는 반문 끝에 ‘나무의 가슴은 소용돌이로 어지럽다’고 한다. ‘상처를 보듬어 안은 강물의 파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유는 더욱 깊어진다. ‘안으로 삭혀 삼킨 울음의 무늬인지/ 밖으로 밀어냈던 몸부림의 흔적인지’생각하면서 ‘손금의 운명선같이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것을 본다. 셋째 수는 ‘빛과 어둠 현실과 이상, 그 삶의 온도차’라는 존재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바람은 언제나 제 안에서 일었’기에 ‘우듬지 경계를 넘어 푸른 길을 찾’으려고 한다. ‘현기증으로 사는 일에 멀미가 나는 날엔/ 발밑의 뿌리들은 따뜻한 흙’을 움켜잡는다. 그때 가지 끝으로 ‘연둣빛 어린 연어 떼’가 돌아오고 있다. 이렇듯「나이테를 읽다」는 한 편의 인생론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지 오래 헤아리게 하는 시편이다.
3
등단 과정에서 지나치게‘신춘문예’에 의존하지 않았으면 한다. 문단으로 나오는 과정은 여러 갈래가 있다. ‘신춘문예’의 화려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오로지 목표가‘신춘문예’라면 그것은 온당치 않은 자세다. 어디로 나왔는가 하는 것보다 등단 이후 얼마나 치열하게 쓰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내적 요청에 의해, 그 알 수 없는 들끓음에 의해 시가 탄생하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시 쓰기 그 자체가 목적이 됨이 마땅할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삶에 대한,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대응방식으로서 시조는 언제까지나 유용할 것이다. 이 그릇을 잘만 활용하면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데, 그리하여 우리 인생을 고양시키는데, 역사와 현실을 견인하는데 일조를 할 것이다. 일익을 넉넉히 담당할 것이다. 우리가 다른 그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 물론 길은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글이 있지 않는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정형률이 있지 않는가?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내적 위의와 절조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기에 시조로 우리의 정신을 윤택케 하고 드높이는 일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새로운 출발 선상에 선 영예의 당선 시인들에게 큰 박수를 보낼 일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당선작보다, 아니 당선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하게 높은 수준의 시조 쓰기에 매진했으면 한다.
이것은 곧 새로움의 새로움을 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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