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차 세계대전 17】
다른 지역에서 펼친 영국의 對터키공세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터키가 선전포고를 하자 영국은 인도에 있는 소규모 부대를 메소포타미아로 파견했다.
남부 페르시아에 있는 영국의 유전을 보호하고 페르시아에서 아바단섬으로 가는 송유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페르시아만 입구에 상륙한 영-인도 연합군은 티크리스강을 따라 북상,바스라에 기지를 설치했다.
바스라市를 점령하고 터키군의 반격을 격퇴한 그들은 계속 북쪽으로 진격하여 1915년 9월까지 알쿠르나,아마라,쿠트알이마라를 차례차례 점령했다.
그들은 이어 바그다드 점령를 시도했으나 바그다드를 불과 32km 앞에 둔 크테시폰에서 터키군에게 격퇴당했다.
영국군은 쿠트알이마라까지 후퇴했다.
기진맥진해서 후퇴를 더 계속할 수 없게 된 8900명의 영국군은 그곳에 참호를 파고 주저 앉았다.
그들을 구출하려던 노력은 모두 실패했고, 1916년 4월 12일 찰트 타운잰드 장군은 터키군에게 항복했다.
쿠트알이마라의 패전이 있기 직전 영국군은 다다넬스에서도 대패했다.
러시아는 1915년 9월 코커서스에 들어온 터키군을 견제해 줄 것을 연합군에게 요청했다.
그러자 영국 해군성은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전략적인 해협 다다넬스와 보스프러스를 포위하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러시아로 가는 연합군의 전쟁보급품 수송을 신속히 하기 위해 해협을 개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1915년 2월과 3월에 걸쳐 영불함대는 터키의 외곽요새를 포격하고 다다넬스로 들어갔으나 바다속에 기뢰가 잔뜩 설치되어 있었다.
3척의 배를 잃고 함대는 후퇴했다.
그러자 영국 국방상 키치너 경은 반도에 대한 육해공 협동작전을 펴기로 결정하고 이언 해밀턴 경을 파견,그 작전을 지휘하도록 했다.
4월 25일,7만 5000명의 병력이 두 지점에 상륙했다.
영국군은 갈리폴리 반도 남단의 헬레스 곶에 상륙했고, 앤잭부대(호주-뉴질랜드 연합군)는 북쪽으로 약 24km 떨어진 아리부르누에 상륙했다.
그 후부터 아리부르누를 앤잭灣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격군은 처음에 좀 밀고 나갔으나 이내 제자리에 주자앉고 말았다.
오토 리만 폰 산데르스가 지휘하는 터키군이 해안을 내려다보는 고지를 완강히 지켜 연합군은 돌파해 나갈 수가 없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이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갈리폴리의 구세주’라고 불리게 되었고 전후 터키의 통치자가 되었다.
교착상태는 여름까지 끌어 더위,벌레,말라리아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8월에 보다 북쪽인 수블라灣에 상륙한 다른 연합군 부대도 기대했던 적진돌파에 실패했다.
그리하여 공세는 둔화됐다.
그 해 가을에 해밀턴이 해임되고 찰스 몬로 경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는 12월 1일 후퇴를 명령하는 현명한 조치를 취했다.
갈리폴리에서의 영국의 실패는 또 하나의 중립국 불가리아를 중앙제국 편에 가담하여 싸우게 만들었다.
교전 쌍방이 서로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1915년 가을 불가리아는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 편에 운명을 걸기로 했던 것이다.
그때는 이미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피 폰 팔켄하인 장군이 터키와의 육상 통신로를 열기 위해 세르비아를 분쇄하기로 결정인 내린 다음이었다.
팔켄하인의 계획은 세르비아를 공격하는 데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불가리아 3개국의 합동작전을 편다는 것이었다.
10월 6일 아우구스트 폰 마켄센 원수가 지휘하는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부대는 북쪽으로부터 세르비아를 침공,2일 후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불가리아는 10월 14일 동쪽에서 세르비아를 공격했다.
11월 2월 말경 2대 1의 열세에 놓인 세르비아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험준한 산을 넘어 이웃인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로 들어갔다.
결국 코르푸섬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중앙제국은 추격을 계속,몬테네그로를 침공했다.
몬테네그로는 1916년 1월 항복했다.
그보다 앞서 1915년 가을,세르비아군은 국경지대에 적의 대병력이 집결하는 것을 보고 연합국에 원조를 요청했었다.
10월 5일 1만 3000명의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프랑스의 모리스 사라예 장군의 지휘하에 세르비아 국경 남쪽에 있는 살로니카에 상륙했다.
이 연합군 부대는 북진하여 세르비아를 도우려 했으나 불가리아군에 의하여 저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연합군은 다시 살로니카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들은 앞으로 있을 발칸반도 공략에 대비해서 서서히 병력을 증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