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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집(四佳集) 서거정(徐居正)생년1420년(세종 2)몰년1488년(성종 19)자강중(剛中)호사가정(四佳亭), 정정정(亭亭亭)본관달성(達城)초자자원(子元)시호문충(文忠)
四佳詩集卷之十四○第十二 / 詩類 / 水原樓。次朴延城韻。
㟮屼瓊樓上下池。白雲黃鶴起遐思。手攀北斗猶堪摘。簾捲西山故不垂。嫋嫋崇光風泛夜。亭亭淨植水明時。登臨佳節繁華地。鼎鼎淸懽不用悲。
사가시집 제14권 / 시류(詩類) / 수원루(水原樓)에서 박 연성(朴延城)의 운에 차하다.
우뚝한 누각에 위아래로 연못이 있어 / 突屼瓊樓上下池
백운 황학의 옛날 생각을 일으키누나 / 白雲黃鶴起遐思
손으론 북두성을 부여잡아 딸 만도 하고 / 手攀北斗猶堪摘
주렴은 서산을 보고자 짐짓 안 내려치네 / 簾捲西山故不垂
동풍은 살살 높은 광채 띄우는 밤이요 / 嫋嫋崇光風泛夜
깨끗이 우뚝 선 것은 물이 맑은 때로다 / 亭亭淨植水明時
등림하는 좋은 명절에 번화한 곳에서 / 登臨佳節繁華地
성대히 즐기거니 슬퍼할 것 없고말고 / 鼎鼎淸懽不用悲
[주-D001] 백운 황학(白雲黃鶴)의 …… 일으키누나 : 백운 황학은 그곳 누각(樓閣)의 경치를 말한 것이다. 당(唐) 나라 최호(崔顥)의 황학루(黃鶴樓) 시에 “옛사람이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났는지라, 이곳에는 공연히 황학루만 남아 있네. 황학이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흰 구름만 천재에 부질없이 유유하구나.〔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2] 동풍(東風)은 …… 밤이요 : 소식(蘇軾)의 해당(海棠) 시에 “동풍이 살살 불어와 꽃의 높은 광채 띄우니, 향 안개는 아득하고 달빛은 낭하로 옮겨가네.〔東風嫋嫋泛崇光 香霧空濛月轉廊〕”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3] 깨끗이 …… 때로다 : 송(宋) 나라의 주돈이(周敦頤)는 특히 연(蓮)을 몹시 사랑하여 일찍이 애련설(愛蓮說)을 지어서 연을 찬미했던바, 그 대략에 “나는 유독 연꽃이 진흙 속에서 나왔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 맑은 잔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 줄기 속은 텅 비어 통하고 겉은 곧으며, 덩굴도 가지도 뻗지 않고,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이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만 있고 가까이 가서 가지고 놀 수 없음을 사랑하노라.〔予獨愛蓮之出於淤泥而不染 濯淸漣而不夭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而不可褻翫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4] 등림(登臨)하는 좋은 명절(名節) :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이른다. 옛날 풍속에 이날은 사람들이 붉은 주머니에 수유(茱萸)를 담아서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菊花酒)를 마셔 재액(災厄)을 소멸시켰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머니에 수유를 담은 내력은 비장방(費長房)의 고사에서 온 것으로, 그 사실은 대략 다음과 같다. 후한(後漢) 때 환경(桓景)이 일찍이 선인(仙人) 비장방에게 가서 유학했는데, 하루는 비장방이 환경에게 이르기를 “9월 9일 너의 집에 재앙이 있을 것이니, 급히 가서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붉은 주머니에 수유를 담아서 팔뚝에 걸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국화주를 마시게 하면 이 재앙을 면할 것이다.”라고 하므로, 환경이 그의 말에 따라 9월 9일에 과연 온 가족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갔다가 저물녘에 내려와 보니, 계견우양(鷄犬牛羊) 등의 가축만 모두 일시에 다 죽어버리고 사람은 끝내 무사했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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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佳詩集卷之四十四○第二十 / 詩類 / 水州行。贈永川貴公子。
水州佳麗天下少。水州三月春光好。百花爛熳東風前。萬株楊柳黃金嫋。繁華第一雲錦樓。畫棟珠簾入斗牛。樓下碧沼生玉鱗。樓外靑山娥黛浮。王孫風流盖世豪。探春勝日來遊遨。桃花駿馬飛流星。白玉爲鞍黃金鑣。樓上錦宴開瓊樽。十千美酒欝金薰。靑蛾皓齒滿座春。珠鈿花冠翡翠裙。鵾絃鐵撥聲相催。羯鼓百枝喧晴雷。美人起舞飄輕裙。翩躚試學飛燕回。琉璃鍾琥珀濃。玉盤煮鳳仍炰龍。一座傳觴疾於箭。酒花入面臙脂紅。良辰行樂當及時。鯨呑虹吐安足辭。王孫百杯始半酣。乘興又吐瓊琚詞。龍香墨鳳管筆。雊眼紫石堅似鐵。十幅蠒紙滑於油。一掃字字龍蛟躍。佳妓重重紅作圍。快覩爭挽王孫衣。但願一笑王孫留。不願一別王孫歸。人生自古會合難。巫山雲雨猶盡歡。鴛鴦帳中春宵短。相思無盡淚闌干。淚闌干可奈何。恨不生平鐵作旰。君不見分司御史杜老狂。一語自詫回三行。靑樓薄倖難逃名。風撥花落猶尋芳。又不見陶糓學士爲時賢。江南一夜郵亭眠。相思枉作風光好。因緣妄擬別神仙。可笑兩儒酸復酸。一生冷氣無由删。那如今時貴公子。文彩氣象傾人寰。優游自得溫柔鄕。肉爲屛兮仍爲盤。莫說水州人物尤。不曾越笑三年留。君不見紫霞洞裏別藏天。世間何處無丹丘。緱山公子可伯仲。紫洞仙人爲伴儔。乘鸞駕鶴逍遙遊。上窮三島下九州。蠛蠓人世三千秋。
[주-D001] 掃 : 揮[주-D002] 旰 : 肝
사가시집 제44권 / 시류(詩類) / 수주행(水州行). 영천 귀공자(永川貴公子 이정(李定) )에게 주다.
수주의 아름다움은 천하에 드문 곳이라 / 水州佳麗天下少
수주의 삼월은 봄 풍광이 좋기도 하지 / 水州三月春光好
온갖 꽃은 만발하여 동풍 앞에 찬란하고 / 百花爛熳東風前
만 그루 실버들은 황금 가지 간들거리네 / 萬株楊柳黃金嫋
번화하기 제일로는 운금루를 꼽는데 / 繁華第一雲錦樓
단청 마룻대 구슬발이 하늘에 치솟았으니 / 畫棟珠簾入斗牛
누각 아래 푸른 못엔 잔물결이 살살 일고 / 樓下碧沼生玉鱗
누각 밖의 푸른 산은 미인의 눈썹먹 같네 / 樓外靑山娥黛浮
왕손의 풍류는 세상을 덮는 호걸이라 / 王孫風流蓋世豪
좋은 날이면 가서 봄놀이를 즐기나니 / 探春勝日來遊遨
도화 준마를 유성처럼 나는 듯이 달려라 / 桃花駿馬飛流星
백옥 안장에다 황금 재갈을 물리도다 / 白玉爲鞍黃金鑣
누각 위의 화려한 자리에 술상 차려내면은 / 樓上錦宴開瓊樽
십천의 좋은 술에 울금향이 물씬 풍기고 / 十千美酒鬱金薰
이팔 청춘 미인들은 자리에 가득하여 / 靑蛾皓齒滿座春
옥비녀 화려한 모자에 비취 빛 치마를 입고 / 珠鈿花冠翡翠裙
곤현 철발의 소리 서로 재촉하는 가운데 / 鵾絃鐵撥聲相催
요란한 갈고는 청천백일 천둥처럼 들렐 제 / 羯鼓百枝喧晴雷
미인은 치맛자락 날리며 사뿐사뿐 춤추어 / 美人起舞飄輕裙
빙빙 돌아 비연의 춤을 시험삼아 배우네 / 翩躚試學飛燕回
유리 술잔에 호박 빛 진한 술로 / 琉璃鍾琥珀濃
옥쟁반의 봉과 용의 고기를 먹으면서 / 玉盤煮鳳仍炰龍
온 좌중이 화살보다 급히 술잔 돌리거든 / 一座傳觴疾於箭
주화가 얼굴에 들어 연지처럼 빨개지네 / 酒花入面臙脂紅
좋은 시절 행락을 의당 제때에 해야거니 / 良辰行樂當及時
통쾌히 마시고 무지개 뱉는 걸 왜 사양하랴 / 鯨呑虹吐安足辭
왕손은 백 잔 술에 비로소 약간 거나해 / 王孫百杯始半酣
흥겨워서 또 주옥 같은 문장 뱉어냈으니 / 乘興又吐瓊琚詞
용향묵과 봉관필에 / 龍香墨鳳管筆
구안 자석은 흡사 무쇠처럼 견고한데 / 雊眼紫石堅似鐵
기름같이 매끌매끌한 열 폭의 견지에다 / 十幅繭紙滑於油
일필휘지하니 글자마다 용이 날뛴 듯하네 / 一揮字字龍蛟躍
미인들은 겹겹으로 빨갛게 에워싸고는 / 佳妓重重紅作圍
유쾌히 보고 왕손 옷자락 다투어 당기면서 / 快覩爭挽王孫衣
왕손의 머무름에 한 번 웃길 바랄 뿐이요 / 但願一笑王孫留
가는 왕손과의 한 번 이별은 원치 않는다네 / 不願一別王孫歸
인생은 예로부터 만나기가 어려운 거라 / 人生自古會合難
무산의 운우도 오히려 실컷 즐겼거니와 / 巫山雲雨猶盡歡
원앙 휘장 안에 봄밤은 하 짧기만 한데 / 鴛鴦帳中春宵短
끝없이 서로 사모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네 / 相思無盡淚闌干
줄줄 흐르는 눈물을 어찌할꼬 / 淚闌干可奈何
평생에 철석 간장 못 된 것이 한이로구려 / 恨不生平鐵作肝
그대는 못 보았나 분사어사 두로 미치광이는 / 君不見分司御史杜老狂
석 줄로 에워싼 걸 한 마디로 자랑하였고 / 一語自詫回三行
청루 박행의 이름은 피하기 어렵거니와 / 靑樓薄倖難逃名
바람에 꽃 떨어진 뒤에도 꽃 찾아갔던 걸 / 風撥花落猶尋芳
또 보지 못했나 도곡 학사는 당대의 현인으로 / 又不見陶穀學士爲時賢
강남의 역마을 객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 江南一夜郵亭眠
서로 사모한 나머지 잘못 풍광호를 지어 / 相思枉作風光好
인연을 함부로 신선 이별에 견주었던 걸 / 因緣妄擬別神仙
가소로워라 두 유자는 그지없이 곤궁하여 / 可笑兩儒酸復酸
일생 동안 궁한 티를 없앨 길이 없었으니 / 一生冷氣無由刪
어찌 지금 세상의 우리 귀공자만 할쏜가 / 那如今時貴公子
인간 세상을 압도하는 문채와 기상으로 / 文彩氣象傾人寰
온유향 속에 우유자득하면서 / 優游自得溫柔鄕
육병에 육대반까지 누리는 걸 / 肉爲屛兮仍爲盤
수주의 인물이 뛰어나다고 말들을 마소 / 莫說水州人物尤
월녀의 웃음에 삼 년 머무른 적 없었다네 / 不曾越笑三年留
그대는 못 보았나 자하동 안의 별유천지를 / 君不見紫霞洞裏別藏天
세간 그 어느 곳엔들 단구가 없을쏜가 / 世間何處無丹丘
구지산 공자와는 서로 백중지간이요 / 緱山公子可伯仲
자하선인과는 서로 같은 무리가 되어 / 紫洞仙人爲伴儔
난새를 타고 학을 몰고 이리저리 노닐어 / 乘鸞駕鶴逍遙遊
위로는 삼도 아래로는 구주를 다 유람하니 / 上窮三島下九州
벌레 같은 인간 세상 삼천 년이 금방이로다 / 蠛蠓人世三千秋
[주-D001] 수주행(水州行) : 수주는 수원(水原)의 고호(古號)인데, 그곳의 누각(樓閣)으로는 운금루(雲錦樓)가 유명하다.[주-D002] 도화 준마(桃花駿馬)를 …… 달려라 : 도화는 옛날 준마의 이름이다.[주-D003] 십천(十千)의 …… 풍기고 : 십천은 만전(萬錢)이다. 왕유(王維)의 소년행(少年行)에 “신풍의 맛 좋은 술은 한 말에 십천인데, 함양의 유협들은 대부분이 소년이로세.〔新豊美酒斗十千 咸陽游俠多少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04] 곤현 철발(鵾絃鐵撥)의 …… 가운데 : 곤현은 곤계(鵾鷄)의 힘줄로 만든 비파(琵琶) 줄이고, 철발(鐵撥)은 쇠로 만든 비파 채이다.[주-D005] 빙빙 …… 배우네 : 비연(飛燕)은 한 성제(漢成帝)의 황후(皇后) 조비연(趙飛燕)이다. 그녀는 본디 가무를 배운 데다 몸매가 아주 가냘파서 손바닥 위에서도 능히 춤을 출 수 있었다고 한다. 《趙飛燕外傳》[주-D006] 유리(琉璃) …… 먹으면서 : 이하(李賀)의 장진주(將進酒)에 “유리 술잔에 호박빛 짙기도 해라, 통에서 흐르는 술방울이 진주처럼 붉구나. 용 삶고 봉 구우니 기름은 이글거리고, 수놓은 비단 휘장은 향기론 바람을 에워싸네.〔琉璃鍾琥珀濃 小槽酒滴眞珠紅 烹龍炮鳳玉脂泣 羅幃繡幕圍香風〕”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용과 봉은 진귀한 안주를 가리킨다.[주-D007] 주화(酒花)가 …… 빨개지네 : 주화는 술 위에 뜬 거품을 가리킨 것으로 술을 말한다.[주-D008] 통쾌히 …… 사양하랴 : 무지개를 뱉는다는 것은 곧 담소(談笑)를 나누면서 강개(慷慨)한 기개(氣槪)를 떨치거나, 훌륭한 문장(文章)을 지어내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주-D009] 용향묵(龍香墨)과 봉관필(鳳管筆)에 : 용향묵과 봉관필은 먹과 붓을 미화(美化)하여 이른 말이다.[주-D010] 구안 자석(雊眼紫石)은 …… 견고한데 : 자석은 자석연(紫石硯)을 가리키는데, 구안은 자세하지 않다.[주-D011] 무산(巫山)의 …… 즐겼거니와 : 전국(戰國) 시대 초 회왕(楚懷王)이 일찍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한 여인이 와서 말하기를 “저는 무산(巫山)의 여자로서 고당(高唐)의 나그네가 되었는데, 임금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왔으니, 원컨대 침석(枕席)을 같이해 주소서.”라고 하여 그와 같이 하룻밤을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 여인이 떠나면서 말하기를 “저는 무산의 양지쪽 높은 언덕에 사는데, 매일 아침이면 아침 구름이 되고 저녁이면 내리는 비가 됩니다.〔旦爲朝雲 暮爲行雨〕”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주로 남녀 간의 정사(情事)에 관한 일을 가리킨다. 《藝文類聚》[주-D012] 그대는 …… 자랑하였고 : 여기서 두로(杜老)는 두목(杜牧)을 가리킨다. 석 줄로 둘러싼 걸 자랑했다는 것은 두목의 시에 나온다. 두목이 일찍이 낙양 분사어사(分司御史)가 되어 낙양에 있을 때, 전 상서(尙書) 이총(李聰)이 자기 집에 빈객들을 초청하여 주연을 성대히 베풀었는데, 이때 백여 명이나 되는 기녀들 또한 미색이 뛰어났다. 두목이 기녀들을 한참 주시하다가 묻기를 “자운(紫雲)이라는 기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누가 자운인가? 그녀를 데려오라.”고 하자, 이총은 얼굴을 숙이고 껄껄 웃고, 여러 기녀들은 모두 머리를 돌리고 파안 대소를 하였다. 두목이 스스로 술 석 잔을 연거푸 마신 다음, 낭랑하게 읊조리기를 “오늘 화려한 집에서 화려한 주연을 베풀고, 누가 이 분사어사를 오라고 불렀느뇨? 갑자기 미친 말 지껄여 온 좌중을 놀래켜라, 석 줄로 에워싼 기녀들이 일시에 머리 돌리네.〔華堂今日綺筵開 誰喚分司御史來 忽發狂言驚滿座 三行紅粉一時回〕”라고 하면서 의기(意氣)가 방약무인(傍若無人)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唐詩紀事 杜牧》[주-D013] 청루 박행(靑樓薄倖) : 두목이 양주 자사(揚州刺史)로 있으면서 청루(靑樓)의 많은 미인들과 사귄 적이 있어 후일 그의 견회시(遣懷詩)에 “십 년 만에 한 번 양주의 꿈을 깨고 나니, 미인에게 박정하단 이름만 실컷 얻었네.〔十年一覺揚州夢 贏得靑樓薄倖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14] 바람에 …… 걸 : 두목이 호주 자사(湖州刺史)로 있던 친구를 찾아가 노닐 적에 그곳의 이름난 미인들을 다 보았으나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어 자사(刺史)에게 청하여 물놀이〔水戱〕를 베풀어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여들게 하도록 하고는 자신이 직접 구경꾼들 사이를 왕래하면서 살펴보니, 그중에 할미를 따라 구경 나온 10여 세쯤 된 여아가 있었는데 참으로 국색(國色)이었다. 두목이 그 할미에게 “지금은 여아를 맞아들일 수 없고 후일로 미루어야겠으니, 내가 10년 뒤에 호주 자사가 되어 와서 여아를 맞을 것이로되, 만일 그때 오지 않으면 다른 데로 시집을 보내시오.”라고 말하고, 그에게 중폐(重幣)를 주어 약혼했다. 그 후 두목이 일이 늦어져서 14년 만에야 호주 자사로 부임하여 가 보니 그 여아는 이미 다른 데로 시집간 지 3년이 되었고 두 아들까지 낳았다. 두목이 그들 모자를 불러 만나 보고 돌려보내면서 이별을 슬퍼하여 읊은 시에 “내가 본디 봄을 찾은 게 워낙 더디었으니, 서글피 꽃다운 시절을 한할 것도 없고말고. 거센 바람이 불어 짙붉은 꽃 다 떨어뜨리니, 푸른 잎새 그늘 이루고 가지엔 열매가 가득하구나.〔自是尋春去較遲 不須惆悵恨芳時 狂風吹盡深紅色 綠葉成陰子滿枝〕”라고 하였다.[주-D015] 또 …… 걸 : 북송(北宋) 초기에 한림 학사(翰林學士) 도곡(陶穀)이 사신으로 남당(南唐)에 가서 스스로 상국(上國)의 사자임을 자부하여 의연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곳의 학사 한희재(韓熙載)가 기녀 진약란(秦蒻蘭)을 역졸의 딸인 것처럼 속여 도곡에게 소개하였다. 도곡이 마침내 신독(愼獨)의 경계를 망각하고 그녀를 가까이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그녀에게 ‘풍광호(風光好)’라는 사곡(詞曲)을 지어 주기까지 했다. 그 후 남당의 후주(後主)가 도곡을 위하여 베푼 주연(酒宴)에서 후주가 술잔을 들고 서서 기녀 진약란으로 하여금 앞서 도곡이 지어준 ‘풍광호’를 노래하여 도곡에게 술을 권유하도록 하자, 도곡이 그제야 몹시 부끄럽게 여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풍광호’의 가사(歌詞)는 다음과 같다. “좋은 인연인가, 나쁜 인연인가. 역마을 객사에서 고작 하룻밤을 지내고, 신선을 이별하다니 원. 비파 가져다 상사조를 남김없이 타보아도, 소리 알아듣는 이 드물어라. 난교로 끊어진 비파 줄 잇기만 기다리건만, 이때가 그 어느 해일런고.〔好姻緣 惡姻緣 只得郵亭一夜眠 別神仙 琵琶撥盡相思調 知音少 待得鸞膠續斷絃 是何年〕” 《說郛》[주-D016] 온유향(溫柔鄕) 속에 우유자득하면서 : 온유향은 미인을 비유한 말이다. 한 성제(漢成帝) 때에 황후(皇后) 조 비연(趙飛燕)이 일찍이 그의 자매(姉妹)인 합덕(合德)을 성제에게 들이자, 성제가 그녀의 온몸이 유연하지 않은 데가 없음을 보고는 대단히 기뻐하여 그녀를 ‘온유향’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古今事文類聚》[주-D017] 육병(肉屛)에 …… 걸 : 육병은 육병풍(肉屛風)과 같은 뜻으로, 당 현종(唐玄宗) 때 양 귀비(楊貴妃)의 오라비인 양국충(楊國忠)이 권력을 제멋대로 부리면서 사치를 극도로 누렸던바, 한겨울이면 항상 몸집이 비대(肥大)한 비첩(婢妾)들을 선발하여 자기 앞에 죽 늘어 세워서 그들의 온기로 자기 몸을 덥히면서 이것을 ‘육병풍’ 또는 ‘육진(肉陣)’이라 호칭했던 데에서 온 말이다. 육대반(肉臺盤)은 양국충이 재상 지위에 있으면서 특히 음식과 거처에 호사를 극도로 누렸던바,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는 식탁을 놓지 않고 수많은 가기(家妓)들로 하여금 각각 식기를 하나씩 들고 입시하게 하여 이를 ‘육대반’이라 호칭했던 데서 온 말이다. 《錦繡萬花谷》[주-D018] 월녀(越女)의 …… 없었다네 : 월녀는 옛날 월(越)나라에서 서시(西施) 등 미녀가 많이 나왔던 데서, 전하여 미인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유생시(劉生詩)에 “월녀의 한 번 웃음에 삼 년 동안 머물렀다가, 남으로 횡령을 넘어 염주로 들어갔었네.〔越女一笑三年留 南逾橫嶺入炎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19] 세간(世間) …… 없을쏜가 : 단구(丹丘)는 신선이 산다는 선경(仙境)을 가리킨다.[주-D020] 구지산(緱氏山) …… 백중지간(伯仲之間)이요 : 공자(公子)는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太子)였던 왕자교(王子喬)를 가리킨다. 왕자교는 본디 생소(笙簫)를 불어서 봉황의 울음소리를 잘 냈는데, 그가 일찍이 선인(仙人) 부구공(浮丘公)에게서 도를 배운 지 30여 년 뒤에 구지산에서 백학을 타고 승천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주-D021] 자하선인(紫霞仙人)과는 …… 되어 : 자하는 선궁(仙宮)에 낀 붉은 놀을 가리킨 것으로, 자하선인은 신선(神仙)을 말한다.[주-D022] 위로는 …… 유람하니 : 삼도(三島)는 전설 속의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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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시집 제30권 / 시류(詩類) / 장원정(長源亭)으로 유람 가는 영천 경(永川卿)을 보내다 10수
송도의 풍경이 맑은 가을에 접어들었는데 / 松都雲物欲淸秋
공자가 난생 불어라 또 훌륭한 놀이를 하네 / 公子鸞笙又勝遊
가서 장원정 위에 올라가 바라보며는 / 去向長源亭上望
고금의 인사가 모두 유유하기만 하리 / 古今人事摠悠悠
용손의 별원은 아직 남은 터가 있으니 / 龍孫別苑有遺基
물빛과 산 경치에 슬픔을 감당 못 하겠네 / 水色山光不勝悲
깊은 밤에 행여 옥 젓대를 불지 말게나 / 莫向夜深吹玉笛
죽지사를 창화할 줄 알 사람이 없으리니 / 無人解唱竹枝詞
송악산은 쓸쓸히 평호처럼 눈에 들오는데 / 鵠峯落莫入平湖
행전은 황량하여 잡초만 절로 무성하여라 / 行殿荒凉草自蕪
당시 군신 간에 원대한 책략이 없었기에 / 當日君臣無遠略
하찮은 바다 섬 하나를 왕도 삼았던 걸세 / 區區海島作王都
아름다운 수목은 추풍에 이미 쓸쓸해졌는데 / 琪樹秋風已寂寥
전조의 일을 얘기해 줄 만한 노인도 없어라 / 更無遺老話前朝
마음 아프니 흥망에 관한 일을 말하지 마소 / 傷心莫說興亡事
청산만이 남아서 저녁 조수를 보내는구려 / 只有靑山送晩潮
뿌연 연기에 성긴 비 내리는 예성강에서 / 淡烟疎雨禮成江
강도를 한번 바라보면 마음 더욱 두려우리 / 一望江都意轉𢥠
예전 일은 이미 황학을 따라 떠났는지라 / 往事已隨黃鶴去
난간 기대 한쌍의 백구만 한가히 볼 뿐이네 / 倚闌閑看白鷗雙
풍포와 동진의 물은 거울처럼 말끔하고 / 楓浦童津鏡面鎔
마니산 빛은 푸른 연꽃 봉오리 같은데 / 摩尼山色翠芙蓉
송악산 단풍잎엔 영웅의 한이 서리어 / 鵠岑黃葉英雄恨
선랑의 크나큰 가슴에 술을 쏟아 부으리 / 酒瀉仙郞磊落胷
배만 한 학의 등에 앉아서 퉁소를 불어라 / 鶴背如船坐弄簫
전신의 풍골은 바로 신선 왕교였으리 / 前身風骨是王喬
밤이 깊거든 성단 가까이 가지를 마소 / 夜深莫近星壇過
신선이 있어 한번 웃고 맞이할까 싶으니 / 知有眞君一笑邀
서풍에 기러기 줄은 공중에 글씨를 쓰고 / 西風鴈字咄書空
우뚝한 백마산엔 가을 풍광이 농후한데 / 白馬山高秋色濃
달 밝은 깊은 밤에 언덕 가까이 배를 대면 / 月白夜深船近岸
비파 소리 끊긴 곳에 용이 놀랄까 두렵네 / 琵琶聲斷恐驚龍
십 년 동안 산수의 풍류 맘에 그리웠어라 / 丘壑風流十載心
백 년의 한을 어찌하면 녹일 수 있을꼬 / 百年何用恨銷沈
그곳 지주가 정성스레 와서 방문하거든 / 殷勤地主來相訪
술잔 외에 다시 인정 또한 넘칠 거로세 / 杯酒更將人意深
벽란도 어귀에 배를 노 저어 돌아가거든 / 碧瀾渡口棹船回
다시 그 누가 있어 술잔을 권해 드릴쏜가 / 更有何人侑酒杯
자동의 신선이 자주 서글피 바라볼 테니 / 紫洞有仙頻悵望
왕손께 아뢰오니 하루 속히 돌아오소서 / 王孫爲報早歸來
[주-D001] 장원정(長源亭) : 경기도 풍덕군(豐德郡) 서쪽에 있다. 도선(道詵)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서강(西江) 가에 군자어마명당(君子御馬明堂)의 터가 있으니, 태조(太祖)가 통일(統一)한 병신년(936)부터 120년이 되는 해에 여기에다 집을 지으면 국운(國運)이 오래갈 것이다.”라고 했으므로, 문종(文宗)이 태사령(太史令) 김종원(金宗元)에게 명하여 이곳의 터를 보게 해서 서강의 병악(餠岳) 남쪽에 정자를 짓게 하였고, 또 이 정자 아래 못에서 서문석(瑞文石)을 얻었다고 한다.[주-D002] 공자(公子)가 …… 하네 : 여기서의 공자는 곧 조선 시대 왕족(王族)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이정(李定)을 가리킨다. 그는 시주(詩酒)를 매우 즐겼고, 특히 산수화(山水畵)를 그리는 데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영천군(永川君)에 봉해졌었는데, 당시에 영천공(永川公), 영천 공자(永川公子), 영천경(永川卿) 등으로 일컬어졌다.
난생(鸞笙)은 선인(仙人)이 부는 생소(笙簫)의 미칭(美稱)으로, 난생을 분다는 것은 곧 선유(仙遊)를 의미한다. 이백(李白)의 고풍(古風)에 “학의 등에 걸터탄 한 선객이, 날고 날아 하늘을 올라가서, 구름 속에서 소리 높이 외치어, 내가 바로 안기생이라고 하네. 좌우에는 백옥 같은 동자가 있어, 나란히 자란생을 불어 대누나.〔客有鶴上仙 飛飛凌太淸 揚言碧雲裏 自道安期名 兩兩白玉童 雙吹紫鸞笙〕”라고 하였다.[주-D003] 용손(龍孫)의 별원(別苑) : 여기서의 용손은 특히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가리킨다. 고려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의 선조(先祖)인 원덕대왕(元德大王) 보육(寶育)이 일찍이 출가(出家)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수도(修道)하고 돌아와 황해도 우봉현(牛峯縣)의 성거산(聖居山) 마하갑(摩訶岬)에 거처하면서 마침내 거사(居士)가 되었다. 그 당시 잠저(潛邸)에 있었던 당 숙종(唐肅宗)이 천하를 두루 유람하다가 마침 보육의 집에 들러 기숙(寄宿)하면서 보육의 딸 진의(辰義)와 합방하여 임신(姙娠)이 되었는바,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작제건(作帝建)이다. 그런데 작제건이 장성하여서는 자기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상선(商船)을 타고 바다를 건너던 도중에 서해 용왕(西海龍王)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그 용녀(龍女)와 함께 고향에 돌아와서 아들 용건(龍建)을 낳았고, 용건이 마침내 태조 왕건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별원은 옛날에 특별히 제왕(帝王)의 유렵(游獵)에만 제공되었던 원림(園林)을 말한다.[주-D004] 죽지사(竹枝詞) : 악부(樂府)의 적곡(笛曲) 이름으로, 본디 각 지방의 풍토를 읊은 시가(詩歌)이다. 당(唐)나라 때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일찍이 낭주(朗州)에 폄적(貶謫)되었을 때 굴원(屈原)의 구가(九歌)를 모방하여 죽지가(竹枝歌) 구편(九篇)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는데, 소식(蘇軾)이 지은 죽지가의 서(序)에 의하면, 또한 죽지가는 본디 초(楚)나라의 가락으로서 순(舜)의 두 비(妃) 아황(娥皇)ㆍ여영(女英)과 굴원을 몹시 애도하고, 초 회왕(楚懷王)과 항우(項羽)를 매우 가련하게 여긴 데서 깊은 원한과 비통함이 배어 있다고 하였다.[주-D005] 행전(行殿) : 제왕(帝王)의 행궁(行宮)을 달리 이른 말이다.[주-D006] 하찮은 …… 걸세 : 바다 섬은 바로 강화도(江華島)를 가리킨다. 1232년(고종 19)에 몽고의 제 2 차 침략에 대비하여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이곳을 강도(江都)라 칭했던 데서 온 말이다.[주-D007] 예전 …… 떠났는지라 : 황학루(黃鶴樓)는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무창현(武昌縣)의 황학산(黃鶴山) 위에 있는 누각이다. 옛날 촉(蜀)의 비문위(費文褘)란 사람이 신선이 되어 일찍이 황학(黃鶴)을 타고 이곳에서 쉬어 갔다는 고사에 의하여 이 누각을 황학루라 호칭하게 되었다. 특히 이백(李白)으로부터 당인(唐人)의 칠언 율시(七言律詩) 가운데 제일(第一)이라는 격찬(激讚)을 받았던 최호(崔灝)의 황학루 시가 대단히 유명한데, 여기서 황학루를 말한 것은 단지 장원정(長源亭)의 경치를 황학루에 비유한 것일 뿐이다.[주-D008] 배만 …… 왕교(王喬)였으리 : 왕교는 주 영왕(周靈王)의 태자인 왕자교(王子喬)를 가리킨다. 《열선전(列仙傳)》에 의하면, 왕자교는 본디 생소(笙簫)를 불어서 봉황의 울음소리를 잘 냈는데, 그가 일찍이 선인(仙人) 부구공(浮丘公)에게서 도를 배운 지 30여 년 뒤에 구지산(緱氏山)에서 백학(白鶴)을 타고 승천(昇天)했다. 여기서는 곧 영천 경(永川卿)의 전신(前身)이 바로 왕자교였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주-D009] 성단(星壇) : 강화도의 마니산 꼭대기에 있는 참성단(塹城壇)을 가리킨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곳이라 한다.[주-D010] 자동(紫洞)의 …… 돌아오소서 : 자동은 영천 경(永川卿)의 애희(愛姬)의 이름이고, 왕손(王孫)은 곧 영천 경을 가리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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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李定) (1422~?)
조선 전기의 종친. 효령대군(孝寧大君)과 예성부부인(蘂城府夫人) 정씨(鄭氏)의 소생으로, 영천군(永川君)에 봉해짐. 시주(詩酒)를 즐겼고 산수화(山水畫)에 뛰어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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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정집(太虛亭集) 최항(崔恒)생년1409년(태종 9)몰년1474년(성종 5)자정보(貞父)호태허정(太虛亭), 동량(㠉梁)본관삭녕(朔寧)봉호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시호문정(文靖)
太虛亭文集卷之二 / 祭文類 / 祭延城君文
氣宇恢洪。靈臺正直。歷敭累朝。隆聲懋績。任兼將相。望注安危。巖廊柱石。當代蓍龜。天乎不憖。命也難續。宸悲亡鑑。世嘆埋玉。矧伊吾儕。忝與同盟。契擬金蘭。親比弟兄。數十餘載。七八僅存。從游漸稀。情志彌敦。遽隔笑談。曷勝情䀌。爰就道左。聊陳浻酌。哀哉復哀。知乎不知。命也已矣。逝者如斯。伏惟尙鄕食。
朴元亨 | 1411 | 1469 | 竹山 | 之衢 | 晩節堂 | 文憲 | 延城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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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탄집(三灘集) 이승소(李承召)생년1422년(세종 4)몰년1484년(성종 15)자윤보(胤保)호삼탄(三灘)본관양성(陽城)시호문간(文簡)
三灘先生集卷之十四 / 行狀 / 領議政朴文憲公行狀
公諱元亨。字之衢。號晚節堂。新羅宗姓也。遠祖三重大匡諱奇悟。自雞林徙居竹山。子孫蟬聯。遂爲竹山大姓。皇曾祖考諱文瑤。仕高麗。官至通直郞起居郞知制敎。追贈純誠佐理功臣。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竹山君。皇祖考諱永忠。事我太祖爲原從功臣。正憲大夫判漢城府事致仕。追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皇考諱翺。通政大夫兵曹參議。追贈純忠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延興君。妣陽城李氏。通政大夫判司僕寺事澣之女。封貞敬夫人。以永樂九年辛卯八月初十月己亥。生公。聰悟絶倫。方四歲時。乳媼聞隣家讀書聲。謂公曰。男兒長必讀書。吾爲汝憂之。公曰。人皆讀之則吾亦讀之。又何憂也。其機警若此。及長就學。一覽輒誦。以能詩文鳴。尤工於程文。至今習擧子業者。皆傳誦以爲軌範。延興君再謫于外。公隨侍。晨夕不離側。甘旨之奉。身自操辦。必極滋味而後已。鄕人莫不嘆異焉。世宗十四年壬子春。中司馬試。遊學於成均館。時權採以名儒爲大司成。見公甚器之。贈綱目,通鑑,宋元播芳,杜詩。館中諸生榮之。自是聲華大振。甲寅春。上幸成均館謁先聖。親試諸生。公擢第三人。授啓功郞禮賓直長。屢遷至宣敎郞都染署令。丙辰。丁延興君憂。哀毀逾禮。與弟元貞。廬墓三年。凡葬祭之事。一依朱文公家禮行之。戊午六月。服闋。拜義禁府都事。己未。以司憲監察。爲正朝使書狀官如京師。自使以下。皆憚公淸直。庚申。陞宣務郞承文院副校理。辛酉。遷兵曺佐郞。壬戌。階加承訓郞。秩滿當遞。時國家築長城。徙民實塞下。兵曺事務方劇。判書鄭淵以爲非公莫能治。特啓留公。公入見議事。則判書必改容。如接大賓。退則目送之。嘗謂人曰。如我輩當避一頭地。扈從伊川。大駕將還。已上道。顧見行宮煙焰屬天。上大驚。遣公廉問。公還啓曰。耕夫火田。不覺延燒。上召入臥內曰。予以爲民厭數幸而焚之。今聞汝言。良足慰懷。非汝之明。何以得情。癸亥。命議政府與司僕提調。擧能任馬政者。僉以公對。特加承議郞。授司僕判官。是年。赴京使臣馳啓曰。我國羅州人。漂流至蘇杭州。帝命還本土。上命公往鞠羅州官吏不啓之罪。公至。不得其情。更審漂流人名。與濟州人相類。卽啓曰。必是濟州之人。初不以實告也。今敬差官鄭光元將歸濟州。請使幷覈。上許之。公又念全羅道人遠行。則必於錦城堂呈願狀。使人悉取而觀之。有一狀卽漂流人姓名。而元繫濟州者也。人稱其神明。居無何。光元推啓。亦其人也。及漂流人至。上問汝初何以羅州人告乎。對曰。聞濟州本中原之地。若告以實則慮有別議故耳。上召公喜曰。汝言驗矣。李思儉巡察下三道牧場。薦公爲從事官。乙丑。轉吏曺正郞。上重馬政。復授司僕判官。特加奉訓郞。朴仲林與宋仲孫爭一奴年稚。兩家婢俱稱己子。事涉疑似。前後所遣朝官。皆莫能決。上命公鞠之。公曰。未辨其父者。容或有之。豈有未辨其母之理。卽往仲林農莊。俱得其情。聞者快之。文宗爲世子時。乘月與諸弟及宦官釣于慶會樓池。使人召司僕官。公適直宿入見。文宗顧左右曰。我意兼官入直。若人不可與共爲戲事。左右曰。暮夜。偶爾遊戲。何嫌焉。文宗曰。斯人也上亦敬待。卽遣中官報曰。使者誤召耳。丁卯。陞奉直郞司僕少尹,知製敎。累加至朝奉大夫。景泰二年辛未。文宗卽位。特加朝散大夫司僕寺尹。上重公。未嘗以名呼之。壬申。拜威毅將軍大護軍,知司諫院事,知製敎。癸酉。陞中直大夫。守判司僕寺事。是年十月。世祖靖內難。以公爲右副承旨。謂宰相曰。朴其非公事。未嘗至於私門。直道而行。物望所歸。屢遷至左承旨。皆兼知刑曹事。時稱奏讞明允。乙亥六月。世祖受禪。陞拜都承旨。策勳爲推忠佐翼功臣。賜田八十結。奴婢八口。白銀二十五兩。綵段一表裏。內廏馬一疋。丙子三月。公啓曰。每歲。宰相耆老者會宴於三月三日及重九日。謂之老英會。例賜酒樂。其來久矣。老臣等餘生無幾。慰宴之禮。不可廢也。上感其言。命司僕寺多獵禽以賜。又命公賚酒肴厚慰之。在會者皆感泣。耆英會遣內相自北始。時朝庭使臣尹鳳,金興將還。上餞于大平館。以獻童宦奏草示之。興覽訖曰。幷錄皇帝宣諭之辭。無效順之義。公答曰。如物膳之類則可。至於人口。雖欲效順。無宣諭則不得擅便以獻。興拱手曰。甚善。上亦嘉之。盜入公家。資產殆空。上聞之憫然曰。家本淸寒。今復如是。賜內帑綵段甚多。幷賜第一區。十月。超拜嘉靖大夫吏曹參判,世子賓客。延城君。丁丑。陞資憲大夫戶曹判書。是年。正統皇帝復位。改元天順。使翰林陳鑑,大常高潤來頒詔。上以公爲遠接使。仍命曰。使臣來期尙寬。則巡審塞上烟臺及鐵山牧場。因革便否。幷詢問守令得失。民間利害以聞。鑑,潤初至義州。以不郊迓責公。公使通事答曰。遠接使不出迎于郊。我國舊例也。潤猶怒不解。及公入謁。潤見公周旋中度。風彩動人。不覺下床曰。吾悔之。如朴宰相。求諸中原。亦不可多得。明日。宴于館。公以諱日不食肉。潤問知之曰。上國人於諱日不茹葷。未聞斷肉也。公應聲曰。君子有終身之喪。忌日之謂也。若之何食肉。鑑,潤歎服。自是益敬公。凡有所爲。必曰。朴宰相聞之。得無不可於心乎。曁還。公送于境上。鑑執公手揮涕曰。上感殿下厚德。次感公之意氣。烏得不潸然。更酌酒以進曰。故人有千里交神者。況此累月相從乎。願毋相忘也。遷刑曹判書戊寅。上欲,招撫野人。以公爲咸吉道都巡察使。公至則宣布德威。邊人畏愛。且置富寧鎭。以固關坊。己卯。朝庭以我國授野人官爵。遣給事中陳嘉猷來詰之。上慮應對之際一失其辭。則生釁上國。事機至重。故復以公爲遠接使。七月。以奏聞兼謝恩使如京師。禮部郞中孫武見公於朝曰。陳翰林鑑欲見公。可詣禮部相待。鑑果至。引公入主客司廳饋茶。勞慰甚勤。學士倪謙及鑑潤屢使人問寒暄。將還。皆作詩頌美。書于簇以爲贐。進階正憲大夫。庚辰。朝庭又以野人事。遣張寧武忠來。公又爲遠接使。加崇政大夫。辛巳。公以病乞解職。不允。壬午。轉吏曹判書。癸未。遷禮曹判書。新置弘文館。以公兼大提學。甲申。給事中金湜,舍人張珹來。公亦爲接伴使。湜篆書晩節堂以贈。珹爲作記。公因以自號。陞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禮曹判書。成化元年乙酉。知成均館事。丙戌。兼義禁部判事。皆以贊成帶之。一日。上問曰。今學者趨向何如。公對曰。上數引諸生講經。近古所罕。然或兼講九流之書。學者頗有他歧之惑。 上默然良久曰。此則予之罪也。又召問盧思愼。對曰。朴元亨之言是矣。儒士至有讀佛書者。上又嘗酒酣。語公曰。予好佛之主乎。對曰然。上曰。何如梁武帝。公不敢對。上固要之。左右皆危公。公徐對曰。殿下必不至以麵爲犧牲矣。上咲。四月。拜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世子傅。上又命公巡審全羅,慶尙道▦▦。幷考慶尙道軍容。十月。改延城君。兼禮曹判書。丁亥夏。咸吉道李施愛聚群不逞。盡殺節度,觀察使及守令。據險以反。上遣將討平。然猶浮言未殄。人多反側。特遣公存撫曰。民罹兵革。流離失所。不大擧救恤。則軍民死亡無際。卿其賞罰監司以下。便宜從事。不必取旨。戊子三月。拜左議政。四月。帝遣姜沃,金浦等來。上宴于大平館。旣罷。出御更衣室。公時亦爲接伴使。將入啓事。見上不冠帶。遲回不進。上望見。遽命左右取冠帶曰。此吾之汲黯也。語公曰。予屈卿爲接伴。於卿意何如。對曰。臣雖無狀。然猶待罪三公。朝庭若聞以議政爲接伴則益信殿下事大之誠矣。上曰。人欲改之。予固不廳。亦此意也。九月初七日。上疾大漸。傳敎於公曰。予欲今日傳位世子。速諭國人皆知此意。公退。指揮措辨。俄傾之間。大禮以成。翼日。上薨。公與大臣議定喪制。雖自謂達禮者。無敢異議。今上問公曰。舊稱大妃之敎曰內敎。予欲改之。何如。公對曰。大妃當大行王累日行辛時。若不得已有命。則稱內敎爾。今大妃所命。殿下稟而行之。何得別稱大妃之敎。上曰然。又問公曰。今喪制。二十七日後方斷流以下罪。如是則無乃滯獄乎。公對曰。三年之喪二十七月而除。近古帝王。以日易月。故必待二十七日而決罪。世宗,文宗皆用之矣。舊制。九月十七日。考閱軍士。兵曹據例將行。公聞之。啓曰。詰戎雖國家大事。然於初喪。釋衰麻著戎衣。有所未安。上曰。予以軍務之重。從兵曹之請。今聞公言。甚合予意。遽命止之。冬。康純,南怡謀不軌。上炳幾誅除。公之贊謀居多。賜保社定難翼戴功臣之號。公當國恤遭大變。夙夜盡瘁。遂感疾。然以山陵事重。不敢辭職。力疾扈衛。漸至沈綿。己丑正月初八日夕。召子安性於灯下謂之曰。今日乃汝生日也。可稱觴壽我。因口號一絶句曰。今夜灯前酒數巡。汝年三十六靑春。吾家寶物唯淸白。好把相傳無限人。公之詩。公之心也。是月二十二日丁丑。卒于正寢。年五十有九。訃聞。上震悼。停市朝三日。遣禮官弔祭。官庀葬事。公稟性嚴重。宇量寬弘。平居。無疾言遽色。溫醇樂易。人皆可親。及其臨大事決大疑。毅然持正。不爲威屈。不爲利撓。有巖巖不可犯之氣。每於上前。群臣論議。各執所見。是非鋒起。公徐以一言定之。適情合理。人莫能奪。雖以世祖之豁達顚倒豪桀。而尙不冠不見。至比之汲黯。則公之爲人。蓋可想矣。公早喪母。事繼母如所生。弟元貞遘疾。親嘗藥餌。盡心治療。及死。不勝慟怛。自斂尸曁窆棺。躬自臨視。勿之有悔焉。撫其遺孤。無異己子。孝友之心。出於至誠。人無間言。自承旨至判書刑曹。治獄凡六年。務存大體。不事苛察。雖部決如流。而必盡其明愼。摘伏如神。而必加以懇惻。至於覆讞死囚則爲求生道。哀矜勿喜。世祖嘗謂公曰。自公在秋官。幾致刑措。倚卿如皐陶也。有一宰相獻弭盜之策曰。強盜除三覆奏。竊盜不待時斷。世祖問於公。對曰。三覆之法。所以求生道也。待時之法。所以順天道也。唐時至五覆奏。此帝王欽恤之仁也。且不可輕改舊章。世祖又以蜜告之法問於公。對曰。淑季人心澆薄。誣上行私。若廳匿名書。則勳戚之臣被誣者多矣。世祖皆嘉納之。公之用心仁恕皆類此。末年。久兼春官。交隣事大。各盡其禮。當國恤之際。事多倉猝。而公處之悏悏有餘地。又善於辭命。凡五爲遠接使。未嘗失言於人失色於人。故使者皆敬慕。雖以宦寺之驕縱不法。亦折節爲恭。不敢以非禮相加。若陳翰林諸公則悅公文雅之美。相與唱酬。歡若故舊。由是。身居海外而名動中原。每我國奉使人至京師。則縉神之士必問曰。朴宰相好在否。世祖嘗引見流球國使臣於別宮。命公爲擯相。顧謂左右曰。朴某眞所謂束帶立於朝。可使與賓客言者也。公以勳臣。爲宰相幾二十年。而第宅不易於舊。無衣帛之妾。無食粟之馬。常以節儉戒其子孫。故爲當世法家云。公娶丹陽禹氏。啓功郞軍器直長承瓊之女。封貞敬夫人。生二男四女。男長曰安命。通訓大夫行內資寺副正。先公死。次安性。擢文科。今爲通訓大夫行司諫院司諫。女長適通訓大夫行內贍注簿崔玉潤。次適通訓大夫訓鍊院正尹孝孫。次適承議郞行軍器寺注簿權恩榮。次適啓功郞長興庫奉事趙承廷。承廷先公死。副正娶判官閔孝忻之女。生二男三女。長曰守幹。從仕郞。次曰守根。女長適幼學李成孫。餘幼。司諫娶司勇趙季發之女。生四男二女。長曰守經。從仕郞。次曰守緘。將仕郞。餘皆幼。訓鍊正生五男二女。男長曰繼衡。將仕郞。女長適許顒。從仕郞。餘皆幼。主簿生四男二女。皆幼。奉事生一男。
[주-D001] 其 : 某[주-D002] 老 : 耆[주-D003] 北 : 此[주-D004] ▦▦ : 牧場[주-D005] 蜜 : 密[주-D006] 淑 : 叔[주-D007] 注 : 主[주-D008] 注 : 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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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1년 기축(1469) 1월 22일(정축)
01-01-22[02] 영의정 박원형의 졸기
영의정 박원형(朴元亨)이 졸(卒)하였다. 박원형은 자(字)가 지구(之衢)이며, 갑인년 친시(親試)에 제삼인(第三人)으로 합격하여,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사복 판관(司僕判官)이 되었는데, 이때에 문종(文宗)께서 세자(世子)가 되어, 밤에 제군(諸君)들과 더불어 경회루(慶會樓)의 못에서 낚시질을 하며 사복관(司僕官) 박원형을 불러 들어오게 하여 보게 하였다. 문종이 좌우(左右)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처음에 ‘겸관(兼官)에게 숙직(宿直)하게 하라.’고 이른 것이 이 사람이다.”
하였는데, 임금께서도 경대(敬待)하였으므로 더불어 놀 수가 없으므로, 곧 물러가게 하여 보내었다. 〈문종이〉 즉위하자 판사복시(判司僕寺)로 옮겼으며, 세조(世祖)를 섬겨서 정난(靖難)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고, 〈세조가〉 선위(禪位) 받자 도승지(都承旨)로 승진시키고 좌익 공신(佐翼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었으며,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옮기어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고, 호조(戶曹)ㆍ형조(刑曹)ㆍ이조(吏曹)ㆍ예조(禮曹)의 4조(曹)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올랐고, 병술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에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고, 박원형을 보내서 본도(本道)를 존무(存撫)하여,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또다시 익대 공신(翊戴功臣)에 참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나서 매우 위독하였는데, 그 아들 박안성(朴安性)을 불러서 술을 올리게 하고, 입으로 시(詩) 한 귀절을 부르기를,
“오늘 밤 등불 앞에서 한 순배 술을 드니,
네 나이 서른 여섯 청춘이라.
우리집의 구물(舊物)은 오직 청백뿐이니,
이를 잘 지녀 무한히 전해 다오.”
하였다. 졸년(卒年)이 59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조제(弔祭)를 내려 주었다. 박원형은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크고 중후(重厚)하여, 평생 동안 말을 빨리 하고 얼굴에 당황하는 빛을 띤 적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하고 의심스런 것을 해결함에 의연(毅然)히 정도(正道)를 지켜서, 매양 군의(群議)가 각기 소견(所見)을 고집할 때마다 천천히 한 마디 말로써 이를 결정하되, 행동이 사의(事宜)에 합당하였다. 또 사명(辭命)을 잘하여 명나라 사신이 우리 나라에 오게 되면, 반드시 빈상(儐相)이 되었는데, 그 의관(儀觀)이 매우 법도가 있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계모(繼母)를 섬기기를 생모(生母)와 같이 섬기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쌓은 담이 매우 깊어서, 남들이 엿볼 수가 없었으며, 또 능히 마음을 잘 헤아려서 뜻을 맞추고, 세상과 더불어 저앙(低昻)하였다. 성격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매양 관아[公朝]에 나아갈 적에는 비록 바쁜 때라 하더라도 반드시 의복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먼지와 더러운 것을 털어 버리고서야 나갔다. 시호(諡號)를 문헌(文獻)이라 하였으니, 문견(聞見)이 넓고 많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인재를〉 천거(薦擧)하는 것이 마땅하여 체대(替代)함이 없음을 헌(憲)이라 한다. 아들이 둘이 있으니, 박안명(朴安命)과 박안성(朴安性)이다.
[주-D001] 병술년 : 1466 세조 12년.[주-D002] 존무(存撫) : 백성을 위로하여 안심하게 함.[주-D003] 익대 공신(翊戴功臣) : 예종 즉위년(1468)에 남이(南怡) 등이 반역을 음모한다 하여 이들을 없애는 데 공을 세운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 등 38인에게 준 공신 칭호.[주-D004] 구물(舊物) : 대대로 전해 내려 오는 것.[주-D005] 사명(辭命) : 한 나라의 사신이나 사자로서 명령을 받들어 외교 무대에서 응대(應對)하는 말.[주-D006] 의관(儀觀) : 위엄있는 몸가짐.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노영수 (역)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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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를 문헌(文獻)이라 하였으니, 문견(聞見)이 넓고 많은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인재를〉 천거(薦擧)하는 것이 마땅하여 체대(替代)함이 없음을 헌(憲)이라 한다.
문헌(文獻)->문헌(文憲)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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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 제1권
성현(成俔) 찬(撰)
세조(世祖) 때에 한림(翰林) 진감(陳鑑)과 태상(太常) 고윤(高閏)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한림 진감이 연꽃 그림을 보고 시를 짓기를,
쌍쌍의 백로는 서로 친한 것 같고 / 雙雙屬玉似相親
물 위로 나온 연꽃은 더욱 핍진하다 / 出水紅蓮更逼眞
객이 있어 이름이 송성하는 글에까지 퍼지고 / 名播頌聲緣有客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염계 뒤엔들 어찌 없겠는가 / 愛從周後豈無人
멀리서 바라봐도 절로 더위를 물리치겠고 / 遠觀自可袪煩暑
나란히 선들 어찌 속진(俗塵)에 물들으리요 / 幷立何曾染俗塵
그림으로도 이런 뜻을 알겠으니 / 料得丹靑知此意
거위와 오리가 이웃을 괴롭히는 것보다 낫구나 / 絶勝鵝鴨惱比隣
하였다.
박연성(朴延城)이 관반사가 되어 차운(次韻)하기를,
수향의 화조는 멀리서 친하기 어려운데 / 水鄕花鳥邈難親
붓으로 옮겨옴이 교묘하게 참[眞]을 빼앗아 왔구나 / 筆下移來巧奪眞
갓 피어 오른 연꽃 봉오리가 말하고자 하고 / 菡蓞初開如欲語
한가롭게 서 있는 백로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네 / 鷺絲閑立不驚人
진흙 속에서 났으나 오히려 깨끗하여 물들지 않았으며 / 淤泥淨色還無染
빙설 같은 고상한 자태 멀리 속진을 벗어났구나 / 氷雪高標逈脫塵
옥서(玉署 홍문관(弘文館))에 노는 신선이 보기를 싫어하지 아니함은 / 玉署遊仙看不厭
맑은 몸매와 향기로운 덕이 닮았기 때문인가 / 淸儀馨德與相隣
하였는데, 그 그림은 종사(從事) 이윤보(李胤保)가 그린 것이다. 또 〈희청부(喜晴賦)〉를 지었는데, 김문량(金文良)이 곧 차운하여 시를 지으니 한림이 크게 칭찬하면서, “동방의 문사(文士)는 중국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태상(太常)은 사람됨이 교만하여 알성하는 날에 고풍(古風 한시의 한 체)을 짓고서 유사(儒士)들로 하여금 차운하게 하였다. 짓지 못하여 붓을 놓은 사람이 있으면, “시를 짓지 못한 자가 5명이다. 뒷날 차운하여 짓고자 하는 자는 천백 편을 지어도 좋다.”고 크게 썼는데, 그의 거만함이 이와 같았다.
慵齋叢話卷之一 成俔撰
世祖朝翰林陳鑑太常高閏到國。翰林見畫蓮作詩云。雙雙屬玉似相親。出水紅蓮更逼眞。名播頌聲緣有客。愛從周後豈無人。遠觀自可祛煩暑。幷立何曾染俗塵。料得丹靑知此意。絶勝鵝鴨惱比隣。朴延城爲館伴。次韻云。水鄕花鳥邈難親。筆下移來巧奪眞。菡萏初開如欲語。鷺絲閑立不驚人。淤泥淨色還無染。氷雪高標逈脫塵。玉署遊仙看不厭。淸儀馨德與相隣。從事李胤保之所作也。又作喜晴賦。金文良卽依韵次之。翰林大加稱賞曰。東方文士與中華無異矣。太常爲人驕傲。謁聖之日。作古風。令儒士次之。或有停筆未就者。太常大書曰。詩不成者五人。後有願賡之者。雖千百其篇可也。其慢人如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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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부부고 제22권 / 설부(說部) 1 / 성옹지소록 상(惺翁識小錄上)
조사(詔使 중국 사신)의 빈대(儐待)는 반드시 당대에서 문망(文望)이 높은 자를 뽑았다. 박원형(朴元亨)과 허종(許琮)은 모두 의표(儀表)와 예모(禮貌)로 중국인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박이 방주(芳洲 명 나라 유태(兪泰)의 호)와 화답한 시와 허가 규봉(圭峯 명 나라 동월(董越)의 호)과 화답한 시는 모두 종사관(從事官)으로 수행한 이삼탄(李三灘 이승소(李承召))과 신삼괴(申三魁 삼괴는 신종호(申從濩)의 호)가 대신 지은 것이었다.
박연성(朴延城)은 세 번 원접사(遠接使)가 되었고, 정호음(鄭湖陰 호음은 정사룡(鄭士龍)의 호)도 세 번 원접사가 되었으나 그중 한 번은 내관(內官 환관)을 접대(接待)한 것이므로 박보다는 영예롭지 못하다.
세 번 종사관(從事官)이 된 사람으로는 이삼탄(李三灘)이고, 나도 세 번이었으나 그중 한 번은 내관(內官)이었다. 그러나 내가 빈대한 유 태감(劉太監)은 시를 잘 지어서 창수(唱酬)하는 데 따른 괴로움이 한림(翰林) 과도관(科道官)이 왔을 때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호음(湖陰)이 조용하게 넘긴 것에 비하면 힘이 들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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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탄집(三灘集) 이승소(李承召)생년1422년(세종 4)몰년1484년(성종 15)자윤보(胤保)호삼탄(三灘)본관양성(陽城)시호문간(文簡)
三灘先生集卷之二 / 詩 / 次陳內翰題荷花雙鷺圖詩
水鄕花鳥邈難親。筆下移來巧奪眞。菡萏初開如欲語。鷺鶿閑立不驚人。淤泥淨色元無染。氷雪高標迥脫塵。玉署儒仙看不厭。淸儀馨德與相隣。
삼탄집 제2권 / 시(詩) / 진 내한의 〈하화쌍로도에 제하다〉 시에 차운하다〔次陳內翰題荷花雙鷺圖詩〕
강 마을과 화조 서로 친하기가 어려운데 / 水鄕花鳥邈難親
붓끝 아래 옮겨지니 진짜인 양 똑같구나 / 筆下移來巧奪眞
갓 피어난 연꽃 마치 말을 하려는 듯하고 / 菡萏初開如欲語
한가로이 선 백로는 사람 보고 안 놀라네 / 鷺鶿閑立不驚人
깨끗한 빛 진흙 속에 있어도 물 아니 들고 / 淤泥淨色元無染
빙설같이 높은 의표 티끌세상 벗어났네 / 氷雪高標逈脫塵
옥서 있던 유선 암만 봐도 아니 질리는 건 / 玉署儒仙看不厭
맑은 자태 향기론 덕 서로 이웃해서라네 / 淸儀馨德與相隣
[주-D001] 진 내한(陳內翰)의 …… 차운하다 : 중국 사신 진감(陳鑑)이 연꽃 그림을 보고 시를 짓기를 “쌍쌍이 떠 있는 물새는 다정도 하고, 물 위에 솟은 홍련은 핍진도 하구나. 칭송의 소리 널리 퍼지는 것은 손이 있기 때문이니, 연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주염계 뒤에 없겠는가. 멀리서 보면 저절로 무더위를 쫓을 수 있고, 나란히 선다고 어찌 세속의 티끌에 물든 적 있나. 화공이 이 뜻을 알았음이 짐작되니, 거위와 오리가 옆에서 번뇌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지.〔雙雙屬玉似相親 出水紅蓮更逼眞 名播頌聲緣有客 愛從周後豈無人 遠觀自可祛煩暑 竝立何曾染俗塵 料得丹靑知此意 絶勝鵝鴨惱比隣〕” 하였는데, 삼탄이 이에 화답하여 이 시를 짓자 진감이 크게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동방의 문사(文士)와 중화(中華)의 문사가 다를 것이 없다.” 하였다고 한다. 《燃藜室記述別集 卷5 事大典故 詔使》[주-D002] 옥서(玉署) 있던 유선(儒仙) : 옥서는 홍문관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한림원을 가리키며, 유선은 진감(陳鑑)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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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 사대전고(事大典故) / 조사(詔使)
박원형(朴元亨)이 관반사(館伴使)가 되었는데, 진감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수향과 화조는 서로 친하기 어려운데 / 水鄕花鳥邈難親
붓으로써 옮겨 놓으니 진짜같구나 / 筆下移來巧奪眞
갓 피어난 연꽃은 말하고자 하고 / 菡萏初開如欲語
한가로이 서있는 해오라기는 사람에게 놀라지 않네 / 鷺鷥閒立不驚人
깨끗한 빛은 진흙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 淤泥淨色還無染
빙설같이 깨끗한 지조는 티끌 밖에 뛰어났네 / 氷雪高標逈脫塵
옥서(玉署 홍문관(弘文館))의 유선이 보아도 싫증이 아니남은 / 玉署游仙看不厭
청아한 자태와 향기로운 덕이 이웃한 때문이지 / 淸儀馨德與相隣
하였으니, 이것은 종사(從事) 이승소(李承召)가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