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집 부록 상○남악유고 / 칠언율시(七言律詩) / 청풍 수령을 지낸 양장경에 대한 만시〔梁淸風長卿挽〕 부(賦)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양원에서 놀던 사객 자가 바로 장경으로 / 梁園詞客字長卿
한전에서 부 잘 지어 명성 크게 날렸었네 / 漢殿曾馳作賦聲
태로 문장 공에게서 나오는 걸 보았으며 / 苔老文章看自出
송천 집에 인재 나와 세상 울림 보았다네 / 松川家世見雄鳴
초하룻날 구름 사이 신발 오리 감추었고 / 鳬藏朔日雲間舄
천년 전의 땅 아래 성 말은 알아보았다네 / 馬識千年地下城
고을 사람 옛 수령을 논하는 말 들어 보니 / 聞說邑人談舊德
맑은 풍모 군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했네 / 淸風不忝郡之名
[주-D001] 양장경(梁長卿) : 양만용(梁曼容, 1598~1651)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장경, 호는 오재(梧齋)이다. 1633년(인조11) 사마시에 장원하였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검열로 있을 때 직언으로 인하여 권신(權臣) 김자점(金自點)의 비위를 거슬러 승진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후 군수, 현감 등 외직과 응교 등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 제도 개선에 많은 공을 세웠다. 저서로 《오재집》이 있다.[주-D002] 양원(梁園)에서 …… 날렸었네 : 양원은 서한(西漢)의 양 효왕(梁孝王)이 세운 동원(東園)으로, 옛터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 동남쪽에 있는데, 원림(園林)의 규모가 굉장하여 사방이 300여 리나 되며, 궁실이 서로 잇달아 있다. 양 효왕이 그 안으로 빈객들을 불러들여서 놀았는데, 당시의 명사인 사마상여(司馬相如), 매승(枚乘) 등이 상객(上客)이 되었다고 한다. 장경(長卿)은 사마상여의 자로, 사부(詞賦)에 특히 뛰어나서 〈자허부(子虛賦)〉, 〈상림부(上林賦)〉, 〈대인부(大人賦)〉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史記 卷58 梁孝王世家》[주-D003] 태로(苔老) …… 보았으며 : 양만용의 외증조부가 태헌(苔軒) 고경명(高敬命)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고경명은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ㆍ태헌(苔軒)이다. 문장에 아주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다.[주-D004] 송천(松川) …… 보았다네 :
양만용이 양응정(楊應鼎, 1519~1581)의 손자이므로 한 말이다.
양응정은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으로, 진주 목사, 경주 부윤 등을 지냈으며,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팔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저서로 《송천집》, 《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이 있다.[주-D005] 초하룻날 …… 감추었고 : 양만용이 외방 고을의 수령으로 있었으므로 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하동(河東) 사람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자주 도성에 드나들었는데, 올 때에 수레나 말도 보이지 않고 오직 두 마리의 집오리만 날아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그물로 잡은 결과, 그물 속에 신발 한 짝만 있더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後漢書 卷82 方術列傳 王喬》[주-D006] 천년 …… 알아보았다네 : 양만용의 무덤 자리를 잡아 장사 지냈다는 뜻이다. 땅 아래 성은 무덤을 말한다. 한 고조(漢高祖) 때의 명신으로 등공(滕公)에 봉해진 하후영(夏侯嬰)이 일찍이 말을 타고 동도문(東都門)에 이르렀을 때 말이 가지 않고 발로 땅을 허비적거리므로 그곳을 파 본 결과 석곽(石槨) 하나가 나왔는데 “갇혀 있던 가성이 삼천 년 만에 태양을 보리니, 아, 등공이 이곳에 거처하리라.[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나중에 하후영이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 지냈던 고사가 있다. 《西京雜記 卷4》[주-D007] 고을 …… 아니했네 : 양만용이 청풍(淸風)의 수령을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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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4] 송천(松川) …… 보았다네 : 양만용이 양응정(楊應鼎, 1519~1581)의 손자이므로 한 말이다. ->梁應鼎 1519 1581 濟州 公燮 松川
*[주-D001] 양장경(梁長卿) : 양만용(梁曼容, 1598~1651)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장경, 호는 오재(梧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