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곡 정희보 (함양교육청 제공자료)
ahn6208 ・ 2021. 5. 21. 11:17
함양선비 <당곡 정희보> 영호남의 인재 반이 제자
정희보(1488, 성종19년~1547, 명종2년)의 자(字)는 중유(仲猷)이며 호(號)는 당곡(唐谷)이고 본관은 진양이다. 정희보는 남해군 이동면에서 효충(孝忠)의 삼남삼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인 남해에서 일찍부터 학문을 연마하다가 17세 되던 해(1504년) 함양으로 이주해 왔다. 15세기말 당시 함양은 점필재 김종직이 군수로 재직하던 시기이고 일두 정여창이 살던 곳이었으니 학문을 더욱 깊이 궁구하고자 함양으로 이주해왔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주 후 함양의 유현(儒賢) 춘당 박맹지의 손녀에게 장가 들었다. 춘당 박맹지는 1426년 함양 대수촌에서 태어나 단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가현감, 승문원교리 등을 지내고 1492년 67세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후 정희보는 더욱 학문에 매진하였으나 당시 정국은 신진사류들과 훈구파간의 정쟁으로 4대사화가 발생하여 사림의 선비들이 참혹한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로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곤궁한 생활속에서도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35세(1522년) 때 집으로부터 100보쯤 떨어진 곳에 초옥(草屋)을 건립하여 영호남의 문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때의 상황을 문인 옥계 노진은 그가 찬(撰)한 글에서 "선비들이 줄을 지어 멀리서 찾아오니 시내 동쪽에 초가집을 지어 서재삼고 현(絃)도 타고 노래도하며 캐어묻고 뒤져도 보네. 사람마다 재질따라 성취한 이 많도다. 고을 안에 문사(文士)늘어 의관이 제제하네. 깊고 옅음 있을 망정 길은 모두 잡혔도다:라 하였고 "그런지 10년이 못되어 차츰 씩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에 벼슬도하고 경서를 통하여 책도 저술하며 바야흐로 과거를 업으로 삼는 자는 이루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게되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선비들은 당곡선생의 풍류와 학문을 연구, 강론하였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청렴한 선비정신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와같은 후학지도로 선생의 문인에서 수많은 과거급제자 및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그의 문인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이조판서를 지낸 문효공 옥계 노진, 역시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이조판서를 지낸 문청공 쳥련 이후백, 장례원 판결사 및 동지사를 지내고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된 구졸암 양희, 위 세분의 제자는 천령삼걸이라 하여 당시 조정에서 함양을 빛냈던 분들이다. 또 과거급제후 좌승지등을 역임한 남계 임희무,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개암 강익, 매촌 정복현, 시와 명필로 이름난 매암 조식, 홍문관 저작을 지낸 양성헌 도희령, 죽암 양홍택, 도탄 변사정, 죽헌 정지등 그야말로 영호남 인재 반이 당곡의 제자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많은 인재들이 학문을 배웠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그의 제자중에 청백리가 2명이나 배출되었다는 점과 천령삼걸이 모두 그의 제자라는 것이다.
선생이 함양에 살며 후학을 가르치던 시기는 4대사화로 수많은 사림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던 엄혹한 시기였다.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기 힘든 시기에 선생은 조용히 초옥을 짓고 오로지 후학지도에 전념함으로써 향후 오백년간 함양지역이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명예로운 선비의 고장으로 자리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선생 자신은 관직도 재산도 명성도 얻지 못했다. 얻지 못했다고 하기보단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그것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문인 옥계 노진은 그의 글에서 “훌륭한 문장이 아름다움을 발하니 / 패수의 시냇물이 더하여짐과 같았고 / 학상(學床)에서 즐겁게 지내시니 / 아름다운 이름으로 문필을 일으키셨네 / ... / 갑과(甲科)에서 합격한 영광스러움을 / 땅에서 티끌을 줍듯 생각하였네.”라고 찬(撰)하였다. 오로지 선비로서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군자행(君子行)을 실천하고 교육자로서 후학 양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오로지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다했을 뿐이었다.
鋪臺玩瀑 (용추폭포 위 연포대에서 폭포를 감상하며)
札札聲休織女機 (찰찰성휴직녀기) 철커덕철커덕 직녀의 베틀 멈추니
期將匹練浣汀磯 (기장필련완정기) 한 폭 비단을 물가에 씻기네
河西忽報牽牛信 (하서홀보견우신) 은하수 서쪽 문득 견우의 소리 들려오니
流下人間也不知 (유하인간야불지) 물 아래 인간들은 알지 못하리라.
[출처] 당곡 정희보 (함양교육청 제공자료)|작성자 ahn6208
이원상
2022년 11월 11일 오전 03:35
«漁夫午睡圖»
낚시는 漁撈에서 파생되기는 했지만, 반드시 믌고기 낚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리라。많은 文人들이 風流와 遁世의 수단으로 즐겼든 바라 漁隱으로 비유된다。
炎夏가 물러간 開秋일까? 江風 건들 불고 살포시 秋雨가 내리는데 믌고기와 角戲하면 무엇하리오。 釣竿을 거두고 팔을 베고, 仰天하여 드러누웠다。秋風에 흔들리는 그림에 어울리는 生氣潑剌한 筆致로 〖流下前溪也不知전계로 유하함을 알지 못하도다。〗라 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