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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불교사 / 최광일
목차
1.동남아시아의 역사적 배경
2.동남아시아의 불교사
1〉스리랑카
2〉버어마
3〉타이
4〉캄보디아
5〉베트남
3.현재의 불교적 모색
동남아시아지역 불교를 남방불교라 지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방불교를 소승불교와 동일시하고 이 지역의
불교를 모두 같다고 생각하는등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식이 무지의 극치를 달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자료의
빈곤과 관점의 편협성으로 많은 문제점이 제기될 것이나 남방불교에 대한 무지의 극복을 조금이라도 이루는데 이 글의 목표가
있으며 동남아시아지역 불교의 성격과 이 지역 대중들이 현재 어떠한 관점으로 생활하는가에 중점을 두고 진행시키고자 하는 것을 먼저 밝혀 둔다.
우리는 먼저 동남아시아지역에 대한 고찰을 해봐야 한다. 동남아시아지역은 인도차이나반도와 인도네시아지역, 그리고 스리랑카(샤일론섬)까지도 포함하는 일정치 않은 경계를 가지고 있다.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반도를 자세히 보면 마치 남성의 성기와 같은 모양인데 양옆으로 들어오는 인도 문화와 중국문화가 서로 부딪히는 문화국경선으로 크게 중국의 지배적 영향을 받은 지역과 인도의 지배적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물론 근대에 여러 유럽국가들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필리핀에서처럼 기독교의 전파를 통한 서양화되고 불교적,민족적 성향이 무너져 내린 곳도 있지만 이들 지역은 불교를 빼놓고 역사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불교국가들의 지역이다. 현재 동남아시아지역은 경제적으로 개발도상국이고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세계사에서조차 등한시되고 외면되는 지역이며 이것은 불교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랜 식민지로 강대국에 의해 수탈당하면서 불교적 민족주의사관, 불교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존재하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남성의 성기처럼 힘찬 기상들이 웅비하는
곳이다.
동남아시아의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불교사와 약간
동떨어진듯한 역사적 서술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역사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불교의 역사라 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동남아시아의 불교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간략한 역사적 배경을 서술한다.
동남아시아지역을 먼저 지리적인 요건으로 살펴보자. 이 지역의 나라로는 버어마 연방사회주의공화국, 라오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타이왕국,민주 캄보디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공화국, 필리핀 공화국, 싱가폴 공화국,그리고
스리랑카까지만 이 글에서는 포함하는 것으로 한다. 지형별로 나눈다면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은 이슬람교도와 서양의 침입에 의해 불교권이 소멸했으며 이 사실은 민족적 전통성이 많은 부분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인도차이나반도는 대승불교권과 소승불교권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런 다양한 종교 현황을 볼 때
수 많은 외래 종교와 문화가 범람하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도 얼마나 많은 대중들의 고통이 있었고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나가는데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역적 요건속에서 그들은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일찌기 인도인들에 의해 황금의 땅이라 하여 정복되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의 개방은 시작되었다. 그 속에서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등을 포함한 인도의 발전된 문명이 들어온다. 이러한 흔적으로 3세기 전반 중국의 오(吳)나라는 메콩강 유역에서 세력을 떨친 부남(扶南,현재 캄보디아 지역에 해당)에 사신을 보내는데 그들은 [부남은 여자를 首長으로 하는 나체의 야만족이었는데 남쪽에서 상선을 타고 온 인도인에 의해 굴복되고 그 여왕을 아내로 삼아 인도의 풍속과 관습을 강요했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캄보디아의 전설에도 이와 흡사한 내용이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해상 교통에 의해 인도문화가 메콩강 하류지대까지 파급된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지역의 문자에서도 인도문화의 영향을 알 수 있는데 중세 이슬람교와 함께 퍼진 아라비아 문자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남인도의 그란다(Grantha)문자에 근거를 둔다. 뿐만 아니라 현재 사용되고 있는 타이 문자,버어마 문자,수마트라의 바탁크 문자,발리 섬의 문자 등이 모두 그란다 문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인도의 막강한 경제적,문화적,군사적 침입속에서 동남아시아에 비해 그 당시 엄청나게 발달한 인도문화에 융화되어 힌두교등의 문화와 함께 들어온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므로 사실상 이때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분리할 수 있는 시기의 구분은 상당히 어렵다. 또한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 중국의 잦은 침입을 받았던 월남만큼은 지속적인 중국의 침입과 지배를 받아 유불선 혼합형태의 중국식 대승불교가 전파되는등 중국문화가 지배적으로 전파되었는데, 본래 월남이란 말은 중국의 월나라의 멸망으로 남쪽으로 이동한 부족들이 정착하여 나라를 구성한데서 비롯한 말이다.이 지역은 천여년정도의 중국의 지배속에 있으면서 중국문화의 지배적 영향을 받았던 곳으로 다른 동남아시아지역과 역사적 출발점에서는 분리되는 곳이지만 본격적인 역사의 발전이 시작되면서 다른 동남아시아국가들과 비슷한 운명을 걷게 된다. 이후 근대에 들어서면서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프랑스등의 열강들에 의해 타이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데 오랜 기간의 식민지 생활은 이들 국가의 국민들로 하여금 강한 반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을 비슷한 시기에 해방한 우리나라와 비교해 본다면 민족의 자존심을 미국과 일본에 팔고 있는 우리는 부끄러울뿐이다. 이들은 과거 제국주의였던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배타적이며 그 영향으로 사회주의 특히 불교적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동남아시아지역의 불교 교리가 현실과 떨어진 신앙이 아니라 바로 현실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바탕속에서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에도 불교를 통해 민중이 통일되었고 서양에서 물밀듯이 몰아치는 문화적 충격을 완충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먼저 동남아시아 불교사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들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대승불교가 최고이고 상좌부 불교는 소승불교라는 잘못된 관점을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 또 한가지는 이 지역에 속한 많은 나라의 불교역사를 이 작은 지면 위에 옮긴다는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대불련인은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국가별로 불교와 그 나라의 구성원들과의 세부적인 반응에 대해서는 간략하거나 배제하는 것으로 하겠다. 또한 자바섬과 수마트라섬,보르네오섬등으로 나뉘어지는 인도네시아지역과 라오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 대해서는 자료의 절대부족으로 생략한다
처음으로 스리랑카의 불교부터 살펴본다면, 이 나라는 인도 남단에 자리한 샤일론 섬에 있는 국가이다. 이 곳에 불교의 전래는 다양한 전설이 있지만 대체로 석존의 입멸 후 서서히 전해졌으리라 여겨지고 본격적인 전도는 인도의 아쇼카왕의 아들(혹은 동생이라고도 함) 마힌다에 의해서이다. 마힌다 일행이 스리랑카로 온 경로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으며 이들은 서부 인도지역의 팔리어를 사용하는 상가(승가)로서 이 상가는 상좌부파였다. 이 당시 스리랑카의 국왕은 데바낭피아티사(재위 BC 250-210)로 이들에게 수도인 아누라다에 최초의 사원인 마하메가바나(大雲林)를 기중하였고 이것이 정비되어 마하비하라(大寺)라는 사원이 되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 봐서 스리랑카에도 자이나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우대받았다는 것은 스리랑카에 벌써 불교가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이거나 건국신화에 인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되어있는 왕족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역시 대륙에서 건너온 불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스리랑카에서는 불교가 별다른 저항없이 처음부터 왕실의 지원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밧타가마니아바아(재위 BC 43-17)왕이 자이나교사원을 부수고 아바야기리비하라(Abhayagirivihara,無畏山寺)라는 사원을 세워 마하티사 장로에게 기증하는데 이 장로에게는 기존의 상가 입장으로 봤을 때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출가자이면서 일반 가정에 출입이 잦았으며 이 장로와 함께 있는 승려들도 왕의 신임을 믿고 오만한 행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강하게 비판되면서 상가에서 추방을 당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어쩌면 왕실의 신임을 얻기 위한 불교집안내 권력싸움에서 마하티사 장로가 밀려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이때 그는 동조자와 함께 아바야기리비하라(無畏山寺)를 근거로 새로운 상가를 조직한다. 이것은 스리랑카의 불교사에서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전통과 계율을 중시하는 大寺派와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계율을 중시하지 않는 無畏山寺派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으로 대사파의 경우 정법의 맥이 흔들린다는 위기감 형성과 그 당시 외부의 침입과 기아로 발생한 시대적 불안감이 결합되어 불교사상 최초로 최대 편찬사업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그것은 5백의 비구가 암송으로만 전해지던 부처님의 교법을 문자로 옮기는 작업으로 경율논 세가지를 집성하고 주석까지 달아 아루비하라석굴에 보관하였다.이것은 10여년의 기근과 전란속에서 왕실의 후원도 없이 행한 자주적 결속으로 비록 차이는 있으나 우리의 팔만대장경을 연상케하는 대사업이다. 그리고 암송으로만 전하던 교리를 문자로 옮긴 대대적 사업이라는 점도 시대적 변혁으로 받아들일만하며 스리랑카의 중요한 보물인 것이다. 그럼 여기서 이왕 보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스리랑카의 불교보물에 대해서 몇가지 소개할까 한다. 먼저 전도사 마힌다의 여동생 상가미타가 부다가야의 보리수 남쪽 가지를 꺽어와 심은 보리수 나무이다. 이것은 서민의 불교수용에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도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음은 스리랑카에서 목숨처럼 아끼는 보물로서 바로 부처님의 왼쪽 송곳니이다. 이것을 왕궁의 담마차카라는 곳에 안치하고 일년에 한번 무외산사로 옮겨 성대한 〈불치제(佛齒祭)〉라는 행사를 베푸는데 불치보호장관이 있을 정도로 관리에 힘을 쏟고 있으며 몇개의 모조품을 만들어 과거 외국의 침입과 약탈속에서도 진품만은 지켜올 수 있었다. 이렇게 독실한 불교국가인 스리랑카에 상좌부만 전래된 것은 아니다. 공(空)사상을 강조하는 대승계열의 방광부(方廣部)가 전래되지만(3세기초) 이단으로 간주되고 배척 받는다. 계율과 전통을 중시하는 상좌부에게는 모든 것이 空이고 필요없다는 식으로 공사상은 이해 되었을 것이다. 또 7세기말경의 남인도 키스트나강 유역에서 성립된 밀교의 한 흐름이 스리랑카에서 행해지는데 한때 밀교의 중심지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밀교의 신비주의는 결국 종교계를 혼돈의 상태에 빠지게 하고 무지한 이들이 믿는 가르침이라 하여 거센 비판을 받는다. 이리하여 비자야바후 1세(재위 1059-1113)가 버어마의 상좌부 장로를 초청해와 어지럽던 스리랑카 불교의 법통을 다시 잇게 한다. 스리랑카와 버어마등은 서로 자국의 불교가 쇠퇴하면 이웃나라의 장로를 초청하여 법통을 잇는데 이것은 같은 상좌부 불교로 원형에 가깝고자 노력하는 부파이므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국가의 차원을 떠나 그 만큼 불교의 법통을 중시하였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붓다고사는 인도에서 태어나 출가한 후 마하나왕(재위 409-431)때 스리랑카로 들어오게 되는데 처음에는 그 당시 번창하던 무외산사에 있었으나 대사쪽에 순수한 법통이 있음을 알고 그곳으로 옮겨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싱할라어의 주석서(註釋書)를 수집하여 삼장에 대한 완전한 주석서를 편찬했는데 이것은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기억이 용이하면서 시적인 정서를 느끼도록 노력한 하나의 작품으로 그의 업적은 대승불교에서의 나가르주나(龍樹)에 버금가는 칭송을 받고 있다.
다음은 버어마로 가 보자. 버어마는 버어마족과 카친족,카렌족,산족,몬족등 다양한 종족이 모여 있으며 동남아시아지역에서 인도와 가장 가까운 국가이다. 지형상으로 말레이반도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진다. 버어마족은 상부 평원지역에 있으면서 북인도지역에서 넘어온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하부지역은 인도의 아쇼카왕시대 전도사인 (기원전 3세기경) 소나와 유타라 라는 전도사에 의해 불교를 받아들인 몬족이 국가를 건설하고 발전하였다. 11세기초 버어마족의 영웅 아노라타왕(재위 1044-1077)이 버어마지역의 대부분을 통일시키고 몬을 공격했다. 몬을 공격했던 이유는 청정 비구와 팔리어 성전을 보내달라고 그 당시 몬의 왕이었던 마누하왕에게 요구한 것이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를 이용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노라타왕은 1057년에 몬을 멸망시키고 팔리어의 삼장과 주석서들을 가져왔으며 비구 500여명을 자신의 파간왕국으로 데리고 왔다.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부터 대승계열의 범어 성전 대신 팔리어 성전을 통일적으로 사용케한 것으로 이것은 통일된 버어마에 본격적으로 상좌부가 수립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후 파간에 완전한 상좌부 불교의 상가가 생기자 외국의 상가와 빈번한 교섭을 가지게 되는데 앞에 이야기 된 스리랑카에 비구들을 파견한 것도 11세기 후반인 이때의 일이다.그러나 이 파간 왕국도 몽고군의 침입으로 1287년에 멸망하고 이백여년의 혼란 속에서 두개의 국가로 정리되는데 이 중 페구를 수도로 하는 라만냐데사의 왕 담마체디(재위 1472-1492)가 1475년 스리랑카에 대규모 파견단을 보내 새롭게 불교의 융성을 꾀하고자 하였고 스리랑카에서 돌아온 장로들에게 켈레니아 도량을 마련하여 주었는데 이후로 스리랑카의 대사파에게서 전승해 온 순수한 작법으로 통일시켜 라만냐데사의 수계작법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남방불교에서의 라만냐파 불교의 기원이 된다.
이번에는 타이를 살펴보자. 타이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도 중심부에 있는 국가이다. 타이족이란 그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는 샴 족과 라오 족을 지칭하는 말인데 처음에는 중국 남쪽에 위치하며 대승불교권에 속했으나 차츰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크메르족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되고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된다. 크메르족은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이족은 이들의 영향 아래서 상좌부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들도 국가를 세우고 14-16세기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으나 1766-1767년에 그 동안 침공해 오던 버어마가 대군을 동원하면서 침략해 와 멸망하게 되고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되어 정확한 역사의 파악이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창 이름을 날렸던 아유티아 왕조때 시리스리야반사라마왕은 1361년 스리랑카 대사파의 가르침을 사신으로 하여금 받아오게 하여 국가적 가르침으로 삼았고 이후의 모든 왕들도 불교를 신봉하였다. 버어마에 의해 멸망한 후 많은 혼란기 속에서 1782년 방콕왕조가 들어선다.이 방콕왕조는 몽구트왕(재위1851-1868)때 근대화가 되는데 그는 비구 생활의 경험이 있었으며 각종 개혁을 단행한다. 이 사실은 불교가 우리나라에서는 수구세력이고 미신적이고 전근대적으로 인식되어지는 반면 이 지역에서는 새로운 사고를 추구할 수 있는 능동성과 근대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반도 남부에 있는 조그만 나라이다. 캄보디아인은 이 지역에서 비교적 오래된 크메르족의 후예로 약 75%를 차지하고 있는데 전술된 동남아시아의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내용중 부남에 관한 전설이 바로 현재 캄보디아의 지역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전설의 내용처럼 이 지역은 일찍부터 인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부남시대에는 불교가 바라문교와 함께 서민들에게 깊이 침투하여 눈부신 발전을 했으며 중국의 구법승 義淨(635-713)의 동남아시아 여행기인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권 1에는 [옛날에 부남국이라고 불렀던 나라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천신을 모셨으며 뒤에 불교가 왕성해졌다. 현재는 나쁜 왕이 불교를 멸망시키고 승려도 없다. 지금은 불교 이외의 여러가지 종교가 성행하고 있다] 여기서 나쁜 왕이란 부남을 멸망시킨 진랍왕 바바바르만 1세로 추정된다. 진랍은 부남의 속국이었는데 독립을 쟁취하였다가 6세기 중엽 부남을 멸망시켰다. 이 당시(6세기경)에 관세음보살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대승불교가 유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시 상좌부불교와 바라문교도 성행하고 있었다. 이후 야쇼바르만 1세 (재위 889-900)때 크메르는 인도차이나반도의 태반을 지배할 정도로 발전하는데 이 시대에 대승불교는 정식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1357년,1394년,1420년에 걸친 타이족의 침략으로 그들의 수도인 앙코르 톰을 포기하고 로베크로 새 도읍을 옮기면서 화려했던 시기도 막을 내렸다. 결국 1593년 샴(타이의 옛 이름)의 공격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데 타이족의 영향은 결국 상좌부불교를 제외한 대승불교와 바라문의 쇠퇴및 멸망을 가져왔다.
베트남을 월남(越南)이라고 하는 기원에 대해 전술한 바 있다. 월남은 중국과 끊임없는 연결속에서 비교적 상세한 역사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다. 월남은 경제,정치,문화등 다양한 부분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反중국적 경향이 짙은 것이 특색이다. 기원전 111년 한무제에게 토벌되어 10세기까지 천여년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는다. 물론 이 사이에 대규모의 반란이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정작 월남의 민중들이 스스로를 피지배자로 인식하고 월남이 중국의 일부라는 생각이 사라진 것은 수나라의 지배를 받기전 6세기경 잠깐 동안의 독립기를 거치면서 부터이다. 이후 10세기경 당의 멸망을 틈타 독립을 쟁취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꽃 피운다. 베트남의 불교사에서 최초로 불교를 전한 이는 後漢 末에 중국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남하한 인물 가운데 모자(牟子)라는 학자라고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추측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2-3 세기경 인도차이나반도의 모든 곳에 퍼져가던 인도의 승려와 상인들에 의해 불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당시 국경의 남단이었던 교주에 상당수 인도 문화권의 사람들이 漢인과 베트남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준것만 봐도 이해될 수 있다. 이 교주라는 곳은 베트남에서 불교의 번영을 대변해 주는 도시로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중국의 삼국위진남북조 시대의 왕성한 불교의 발전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월남이 중국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월남인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었다. 580년 교주의 법운사에서 인도의 선을 전한 남천축의 바라문 출신인 비니다류지가 이 시기에 활동하게 되는데 이후 비니다류지파의 선은 9세기경 無言通에 의해 시작된 무언통파와 쌍벽을 이루면서 베트남의 李朝 말기까지 법맥을 유지한다. 그러나 제 4조 청변 사이의 조사 이름이 확실치 않고 7세기 이후에야 일파로서 구체적 모양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의 베트남 불교는 중국 문화의 강력한 침투로 사실상 중국풍의 불교였다. 무언통파는 육조 혜능으로부터 따져 4대째인 백장(百丈)에게서 남종선을 이어 받은 무언통이 [어디에서나 생활에 충실하면 그것이 선]이라는 백장의 가
르침을 전하는데 무언통의 제자 감성을 제 1조로 하여 무언통파를 확립했다. 이름에서도 풍기듯이 비나다류지파는 인도의 선을 시작으로 한 파이고 무언통파는 중국의 선을 시작으로 한 것이다. 이것만 봐도 교주를 중심으로 베트남의 불교가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서 중심역할과 전달역할을 하면서 얼마만큼 불교 선진국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무언통파는 비니다류지파보다 백년 더 법맥을 잇다가 진조(陳朝) 聖宗(재위 1258-1278)에 의해 생긴 죽림파에게 이어졌는데 죽림파는 중국식 불교를 베트남식 불교로 바꾸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독립후 초기 왕조인 정조(丁朝),(전)여조(前黎朝)의 짧은 기간을 지난 후 李朝를 거치면서 승려의 정치 참여가 아주 두드러지는데 마치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국사가 있었듯이 이들 국가에서도 정책자문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이것은 중국의 영향이나 인재 등용의 문제를 불교만이 해결할 수 있었던 점도 있겠지만 얼마만큼 이 지역에서 불교의 세력이 정권에게 필요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정치참여 속에 이루어진 발전은 이조의 멸망뒤에 이어 생긴 진조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왕이었던 인종이 무언통파 제17대 혜충(慧忠)을 스승으로 출가하는데 이 인종이라는 인물은 왕이었을때 몽고의 세차례에 걸친 원정을 물리친 시대의 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죽림파는 대중들에게 쉽고 빠르게 퍼졌으며 몽고의 침입으로 더욱 발전한 민족의식은 죽림파를 베트남식 불교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발전하던 불교도 끊임없는 유교의 도입과 중국식 관직개편의 시대적 변화속에서 서서히 왕족과 중앙정치세력에서 밀려 나오게 된다. 진조시대부터 이 같은 징후는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불교는 그 대상을 귀족이 아닌 일반 백성에게로 돌려야 했고 서민들의 생활 깊숙히 잠식해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불교가 밀려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고려시대까지 우대받아 오던 불교의 타락상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교로서 존중받는 종교는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타락하기 마련이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종교로서의 청정성을 잃기 마련이며 더 이상의 국가 이념으로서의 매력을 잃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속에서 진조가 망하고 중국의 명나라에 의해 1406년 월남지역은 또다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명은 베트남의 불교서적을 약탈해 가고 정토경전들을 유포시키는데 이는 불교를 통한 식민지정책중에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서민들속에 살아 움직이던 불교는 베트남의 독립을 꿈꾸는 민족주의자로 둔갑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후 격렬한 투쟁속에서 다시 독립을 쟁취한 국가는 후여(後黎)인데 이 국가는 유교의 적극적 정치도입을 강력하게 하여 불교는 더욱 정치와 멀어지게 되고 서민들의 삶속으로 빠져든다. 17세기를 거치면서 서민속으로 들어간 죽림파 불교는 겉으로는 임제선을 주장하지만 염불과 밀교의식, 베트남 민간신앙인 신도(神道)를 혼합하여 정토교 계통의 연종(蓮宗)으로 성립된다. 이때부터 불교는 후에 완조(阮朝)시대를 거쳐 프랑스 식민시대까지 정치권의 비판세력으로,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외치는 민족종교로 그 모습을 변모시켜 나간다.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동남아시아불교의 전래와 발전부분을 살펴보았다. 이 속에서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최초 석존의 가르침이 수 없이 변화하고 시대에 적응하여 발전하면서 마침내는 대중들 속으로 파고들 수 밖에 없는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 모습이다. 아무리 권력의 보호속에서 발전하더라도 결국 무지한 대중들을 버리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종교일 것이다. 그 중에서 결국 불교가 사라져 버린 곳도 있고 아직도 건재하게 살아 남아 시대를 고민하고 있는 지역도 있다. 그렇다면 불교가 이 곳, 동남아시아지역의 국가들이 근대화를 이루어 나가는 동안에 어떠한 모습으로 움직였고 어떤 방향점을 대중들에게 지시하고 있는가 경전대로라면 불기 2500년 이후는 불교의 쇠퇴를 의미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불기 2500년 이후에 위대한 종교개혁과 불법의 선양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스리랑카에서는 불기 2500년에 불교국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강한 믿음은 결국 불교국가 수립에 크나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문화속에서 살아온 그들은 가능한 모든 물자를 완전히 개발해 버리는 서구의 경제 생활방식보다 훨씬 소박한 경제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때문에 결코 그들을 서구화된 우리의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그들의 경제를 비판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그들도 불교 해석의 오류인 허무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리의 엄격한 생활실천을 하는 그들은 불교가 사라진 지역에 비해 훨씬 더 근면한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과거 제국주의가 할퀴고 간 상처를 완벽하게 청산하고 지속적으로 다가오는 수 많은 시련에 대한 극복이다. 이러한 것들을 그들은 불교적 관점에서 풀고자 하는 것이다. 1961년 버어마의 불교 국교화작업을 시작한 우누 수상도 그런 사람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전후 어지러운 민심을 불교로서 다스리려 하고 타이와의 불편한 관계도 불교라는 공동 문화권으로 인식을 유도하여 풀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하고 만다. 우선 기독교와 이슬람교등 다른 종교를 가진 소수민족에 대한 문제 미해결과 불교도의 독선적이고 거만한 사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불교를 미래 지향적 방법으로서가 아닌 신왕정주의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시대역행적인 착오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경우는 불교 11개파가 미국의 후원으로 선 사이공 정부의 독재와 폭압정치에 반대하며 통합하여 [통일 불교회]를 결성하였고 월남전이 종결될 때까지 정부와 대립하였다. 베트남의 해방이후 친외세의 세력들이(대체로 기독교세력) 정권을 장악하면서 또 다시 민족주의자의 탄압은 시작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해방 당시 김구선생님의 암살을 대표로 하는 민족주의자 탄압정책과 비슷한 것이다. 이 속에서 스님의 분신자살등의 극단적인 방법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불교가 하나의 민족의 지도 이념임을 나타내는 모습이다. 또한 타이의 경우는 붓다다사라는 비구를 중심으로 신불교운동을 펴고 있는데 그는 불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의 비판을 유도해 내고 늙어빠진 보수적 불교를 새롭게 탄생시키고자 한다. 또 인텔리 계층의 불교청년회의 결성으로 사회봉사활동에 열중하는 새로운 타이불교의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이 사실 또한 산중불교인 우리의 입장에서 청년불자인 우리 대불련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제 돌이켜 전체적인 것을 살펴보자. 물론 상좌부불교가 개인의 수행을 우선시 하는 부분이 크며 포교와 사회복지에 관한 부분에 불교의 활동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라는 우리나라의 모습도 결코 나을 것은 없다.오히려 상좌부불교가 비합리적 경향을 타파하려는 경향이 강하여 각 지역에 있는 미신적 생활을 개선하는데 앞장 서고 있으며 빈민가의 사람들이 무료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마련해 주고 정신적 지주로서 침략자에게 시달리는 국민들의 정서를 하나로 묶어 외래문화의 강력한 충격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었고 상당한 포교사업과 사회복지사업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해방이후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외부의 문화적 충격에 한국불교는 집안 싸움만 하고 있었고 역사적으로 봐서 대체로 소멸되기 직전에 나타나는 밀교적 성향이 강해지면서(우리나라가 티벳처럼 처음부터 밀교를 받아들였다면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하겠지만) 오늘날 통불교라는 이름下에서 한국불교는 떠돌고 있다. 또한 대승불교라는 한국불교는 승가의 특권의식으로 재가신자들은 철저한 고립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껏 동남아시아의 불교를 살펴본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불교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개선해 나아가야 할 방법을 찾고자 하는 의지라는 것을 알리면서 이 글을 읽는 대불련 또한 강한 책임감과 주체성을 가져주길 당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