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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열 번째
♣ 프뉴마틱코스에서 드리는 영성 :~
기념일을 영적으로 회복하는 것의 당위성과 중요성
오늘은 11월11일 빼빼로 데이라고 하는 날입니다. 과자회사에서 만들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날에 많은 연인이나 가족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또는 부모와 자녀에게 빼빼로등 과자를 선물하고 사랑을 보내는 그런 날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는 이런날이 참 많습니다. 화이트 데이, 블랙 데이라고 해서 짜장면을 먹기도 하고 삼겹살 데이 등 여러날이 있습니다. 물론 공식적인 공휴일은 아니지만 기념일로 지낸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날들이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있는데 좀 생각해보면 거의가 연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성인 남성과 여성이 서로가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삼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서양에서는 2월14일을 세인트 발렌타인데이 라고 해서 기억하는 날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와 같은 날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기독교적으로 지키는 크리스마스 날이나 부활절 같은 경우에도 연인에게 좀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연인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에만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부활절에는 성인남녀가 데이트 하면서 그 날을 기념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특별히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 날의 분위기를 이 나라는 참 많이도 가족중심 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양이나 기독교문화권의 나라를 방문하면 사뭇 다른 기독교적인 기념일을 볼 때마다 낯선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 또한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많이 세속화가 되어 주님안에서 라는 개념이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들은 가족이 함께 지내는 모습속에서 그날을 기억하고 보내는 모습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서양에서도 기념일의 본뜻을 흐릿하게 만들려고 하는 악한 영적 세력이 마지막 발악같은 것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 것들이 블랙컨슈머데이 라고 해서 소비하는 날 또 복싱 데이라고 해서 성탄절 다음날인 12월26일에 성탄절에 선물을 자녀들에게 주었던 것처럼 그 날에도 아주 싸게 좋은 물건을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하는데 집중하게 만들어 주머니의 지갑을 열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도 영적인 싸움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해서 다른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더 좋은 것으로 본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한다든지 하는 일은 당신의 물질을 사용해서 정말 최고의 행복이요 찬사요 사랑의 표현이다 라고 하는 세속적인 흐름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그리스도교가 지켜온 성탄절이라든지 부활절은 그와같은 소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자기 자신을 만족하게 하라. 축하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정말 자신의 모든 것중에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함께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분을 송축한다는 개념으로서 부활절이나 성탄절을 지켜오고 기념해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의 영적인 의미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단순히 그것은 성탄절이나 부활절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는 심지어 빼빼로 데이라고 할지라도 그안에 있는 세속성을 가지고 그날을 어떻게든 보내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그 날을 세속적인 것이야, 영적인 것이 아니야, 완전히 버려야해, 멀리해야 해야한다고 반대만을 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함께 더불어 때로는 그 날이 빼빼로 데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좋은 것들을 허락하셔서 서로 좋은 것을 나눌 수 있음에 하나님을 송축하며 함께 더불어 나누는 것으로서 우리가 성탄절 부활절 또는 그냥 젊은 남녀가 데이트 하며 즐기는 기념일 조차도 우리가 거룩하게 다시 바꾸어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특별히 한 가지 더 얘기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열광하는 할로윈 데이 같은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조차도 그 날은 그냥 웃고 떠들며 아이들에게 즐겁게 해준다는 인식하면서 보내는 것 같습니다. 할로윈데이의 기원을 따라가 보면 10월 마지막 날부터 11월1일에 올사이언스데이(All Saints day) 라는 것에서 파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을 어떤 귀신적인 것 여러 가지가 서구에 나타나는 안 좋은 세력에 대한 것을 재미있게 희화하고 그 세력들에게 거부감 없이 만들게 하기 위한 할로윈데이를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서 즐겁게 웃고 떠들고 성인 남녀가 즐겁게 데이트 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주 많이 안일하게 바라보고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날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농사를 마치고 기념하기위한 날로 정한 것이라는 것과 아직도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악한 영적 세력에게 결정적인 패배는 안기셨지만 비유하면 화재시 큰불은 잡았지만 아직도 잔불이 있다는 것처럼 지금도 소탕작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런 소규모적인 영적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력이 어떻게든 악한 영적세력이 자신의 세력을 우리에게 미치게 하려고 할로윈데이를 만들고 컨슈머데이 박싱데이를 열어서 세속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이 깨어 그것들을 참된 영적인 의미로서 되살리는 것으로 변혁시키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 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하고 모든 기념일들을 주님을 송축하고 영광을 올려드리는 그리고 주님안에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날로 만들어 나가는 변혁이 일어나야 영적으로 계속해서 그리고 끊임없이 만들고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 코포스에서 드리는 일 :~
성도가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지반 두 번에 시간을 통해서 성도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과 또한 소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였습니다. 성도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과거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미래와 연결된다고 제임스 휴스톤의 이야기를 빌려서 나누웠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창조세계와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에게 성실하게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이행하셨는가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소망을 가지는 것은 닥아오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그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소망하면서 일하는 것이 연결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임스 휴스톤은 믿음은 과거와 소망은 미래를 가지고 우리는 오늘 현재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라고 말하는 핵심이다 고 얘기합니다.
폴 스티븐스는 이것을 야곱의 이야기와 연결해서 말합니다. 사랑과 연결했을 때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기 위하여 무려 14년을 일했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라반에게 무보수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일했던 것으로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야곱은 첫 7년이라는 시간을 단 한 번도 길거나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으로 여겼다고 창세기 저자는 얘기합니다. 하지만 7년이 지나서 야곱이 결혼하게 된 사람은 라헬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인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자신에게 사기치고 거짓말한 라반에게 항의를 하자 라반은 다시 7년을 일하면 라헬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야곱은 다시 7년 동안 일을 하게 됩니다. 도합 14년이란 시간을 자신이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무보수로 일한 것입니다.
그런 모습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면서 일을 한다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지루해 하거나 힘들어 하거나 아니면 너무 노이로제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14년이란 시간을 마치 단 며칠을 보낸 것처럼 느끼듯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그 하나님의 과거와 다가오고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미래의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사랑하며 살아간다면 내가 하는 일이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차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긍정적인 것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야곱이 사랑하면서 살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국에는 어리석게 14년동안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 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야곱의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져주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결국에는 야곱의 인생가운데서 많은 자녀로 12명이 태어나게 되었고 또 많은 재물도 얻었으며 또한 돌아오는 길가운데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힘쌘 장정들을 데리고 올 때 야곱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가운데서 목숨을 유지하게 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에서와도 진실한 화해를 하게되는 모습을 창세기를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의 인생가운데 어떤 참된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이기적이고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였습니다. 이제는 14년이라는 시간동안 무임봉사로 일하고 사기당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겪지만 결국 그를 붙잡은 것은 사랑이였습니다.
야곱은 한 순간마다 자기 자신의 더 나은 인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일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오직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가에 초점을 맞추면서 살아갈 때 그의 인생은 변화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고 창세기 저자는 우리에게 얘기하여 줍니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거짖으로 장자의 복을 받고 도망치듯 쫓겨나갈 때 결국 모든 것을 다 잃고 비참하게 떠나가는 모습가운데서 하나님이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는 그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살면서 항상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주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과 함께 하신다는 그 소망가운데 살아갔습니다. 구래서 그는 라반이 있는 그 땅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소망가운데서 매일같이 어리석음에 당하고 사기를 당하는 그런 시간 14년이라는 인생을 살았지만 매 순간마다 현재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라헬을 사랑하는 것이였습니다. 결국 라헬을 사랑하는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서 이기적인 인물에서 참되게 모든 이들을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곱의 인생이 우리의 완벽한 모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요셉을 편애하고 요셉은 다른 형제들간에 다툼이 있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노예로 팔려가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또한 야곱은 이집트 파라오를 만났을 때 내 인생이 그렇게 정처없이 떠도는 인생이였다고 얘기하는 것을 봤을 때 그가 정말 한 많은 인생을 살았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야곱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자신이 온전치 못함으로 인해서 돌아다니는 인생이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셔서 끊임없이 자신을 빚어가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의 계속된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 참된 순례자의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런것들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성도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땅에 속해서 정착하여 사는 사람이면 하나님의 순례자로서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그래서 본향에 다가가 이 땅이 완벽한 본향으로서 회복되어지는 그 날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이 땅에 결코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참된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과거로부터 오는 믿음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참된 소망을 가진 이 두 가지가 하나로 결합되어 오늘 우리가 사랑하면서 살아가게끔 만드는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온전히 일치할 때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참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비록 이기적인 사랑을 할지라도 그것을 벗어버리고 참된 사랑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일은 나를 충족하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섬기는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언약과 율법의 사랑으로 참되게 자신이 일하고 있는 일터와 환경 일의 성격 그리고 일을 대하는 자세 모든 것들을 바꾸어 나가게 됩니다. 그것도 건강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게 된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포이에오에서 드리는 예술 :~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예술가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들
그리스도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참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술이 자신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예술은 결국 예술가들이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생각보다 굉장히 많이 우리 삶 주변에 놓여져 있을뿐더러 단순히 전문적인 학교라든지 영감을 받은 그런 사람들만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아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 그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예술활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많은 분들이 예술이라는 것은 결국 예술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시며 나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보통의 사람들에겐 크게 상관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은 예술에 대한 편견으로 어떠한 차원으로 국한시키는 인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경제적인 예술로만 생각하여 예술가와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로써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로만 구분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예술가다 또 모든 성도가 그렇다하는 것에 대한 어색함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포코스 연구소에서도 조금은 다루고 질문을 받은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폴 스티븐스는 모든 성도가 다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가 되며 또한 그 리더 역할가운데서 어떤 상황가운데서는 그 사람이 리더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영원토록 변함없이 계속해서 리더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리더의 위치에서 영향력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 위치에 있던 사람이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는 누군가로부터 영향력을 받는 참여자의 위치로 자연스럽게 왔다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식의 얘기가 리더쉽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리더와 참여자를 구분시키고 리더를 무조건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고 참여자는 영향력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은 그 위치에 놓여있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폴 스티븐스가 얘기하는 리더와 참여자의 관계에서 리더가 참여자로 갈 수도 있고 참여자가 리더가 될 수 있는 식의 관계의 다양성 또는 변화성에 대해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술에 대해서도 결국에는 예술을 전문적으로 생산해내는 사람들로서 예술가와 그 예술을 관람하고 공유 또는 소비하는 자로 일반 대중 관계가 있고 그것이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예술활동을 하는 예술가이다 라는 이야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일종의 걸림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런 얘기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걸림돌이란 것이 역할이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고 역할이 바뀌지 않는다는 식의 생각이 우리가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넘어서야만 그리스도인들은 진실로 나의 삶에 아주 지극히 작은 부분일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쉽게 받아드릴 수 있게 됩니다.
곧 대림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교회력으로 회계 마지막 주일이고 그러면 11월 마지막 주일부터 2021년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면 많은 교회들이 상징물로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하는 아름다움을 장식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이루셔서 이 땅에 오신 그 아름다움을 찬송하게 드러내는 모든 것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술이 아닌가요.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대림절과 성탄절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장식들을 기존에 상록수를 가져와 장식을 하고 말구유를 만든다든지 그 뿐만 아니라 캐릭터로 풍선을 장식한다면 그것이 저급한 모습일까요. 이런 것들을 그냥 그저 일반적인 상업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활동은 전문가적인 일로 만들려고 구분하는 것인가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어느 작은 교회에서 풍선으로만 장식한다고 하면 그 교회의 어르신들이 이것은 성의없이 저급한 것이라고 하시며 어떻게 풍선하나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겠느냐 어쩌면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평가 절하하는 일들 가운데에는 우리가 이미 예술을 고급이다 혹은 저급한 혹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나 하는 것으로 등급을 만들어내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인하여 본질을 흐려버리는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도로서 예술에 어느 고급이요 중급 혹은 저급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세대에서 세대로 나이가 많은 분들부터 간난아기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모두가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놀라운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교회가 함께 더불어 고민하고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장식하고 증거하는데 공동체적으로 분별하고 결정하여 함께 준비한 것을 꾸미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교회 공동체성이 온전히 살아나고 그 공동체성을 통해서 결국에는 신앙의 전달이 세대를 걸쳐 이루어지며 그런 일들을 해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 예술이라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구분 짓고 그래서 서로 분리되고 단절된 그와 같은 안타까운 현실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이 장애물인 예술을 어떤 전문적인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닌 우리는 그냥 보통에 소비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들과 또한 예술을 고급 중급 저급하면서 등급을 매겨서 품질을 나누는 것 같은 행동들을 넘어서야하고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참되게 스스로 모두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로 부름받은 예술가이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예술에 함께 더불어 공유하고 개발하는 공동체성이 교회의 예술의 공동체성이 더욱 온전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성장 성숙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성숙해진 교회공동체의 공동 예술은 결국 세상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증거하는 참된 소금과 빛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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