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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강원랜드의 상임감사로 황인오씨가 거론되고 이 때문에 꽤 시끄러운 상황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문지상만 대충 보면 ‘황인오는 간첩이었다. 왜 간첩전과가 있는 사람이 공기업의 감사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얘기가 있고, 이에 대해 반대측에서는 ‘간첩전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당시 안기부가 필요에 의해 사건을 부풀렸고, 조사과정에서 가혹행위도 있었다. 그리고 간첩이라고 해도 이미 전향했고, 그 죄과도 다 치렀으니 일만 잘하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이 말에 대해서도 ‘가혹행위 얘기 많이들 하는데, 그것과 간첩협의를 분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사람이 전향했다는 증거는 어디 있으며, 더욱이 일을 잘한다는 보장은 어디 있는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즉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은 사실 아주 큰 사건입니다. 그 내용에 대해 예전에 어디에다 쓴 글이 있긴 한데, 그건 A4로 60페이지 정도 되는 긴 분량입니다. 따라서 아주 짧게 줄여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강원랜드 얘기입니다. 이건 그 중간단계에 제가 약간 개입한 적이 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1994년 YS정부는 ‘지역균형개발 및 지방중소기업육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서 공포했는데, 이 법에 따라 1995년 12월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어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내국인이 출입가능한 카지노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998년 6월 회사인 강원랜드주식회사가 만들어졌고, 1999년에는 카지노호텔을 착공해서 2000년 10월에 개장했습니다.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내국인카지노라고 하는 곳이 차마 갈 곳이 못 됩니다. 거기에 가면 벌써 며칠 째 잠도 안자고 도박에 몰두하다 보니 몸에는 냄새가 나고 눈도 풀려 버린 인간들이 수백명 몰려 있고, 이른바 ‘끗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도박꾼이 들어오면 그 자리를 돈 받고 팔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리에 앉아 있는데, 이들 또한 며칠 째 샤워는커녕 세수도 제대로 안해서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카지노 한켠에는 은행창구가 있어서 은행원이 앉아 있는데, 이 은행원들은 24시간 거기에 앉아서 대출을 해 줍니다. 당연히 신용대출이다보니 그다지 많은 돈을 대출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밤 12시에 거기 앉아서 대출심사하고 있는 은행원들도 할 짓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도박에 아주 잼병이라서 카지노도 ‘도대체 저걸 왜 하나?’ 라고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외국인들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몇 번은 가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강원랜드라는 기업은 아주 대단합니다. 비록 도박이나 해서 먹고 사는 기업이긴 하지만, 2017년 1년 간 당기순이익이 무려 4,300억원입니다. 채용하고 있는 직원만 하더라도 약 3,700명인데, 이 중 정규직이 3,628명인 직장이고, 직원의 평균급여는 성과급을 제외한 상태에서 6,500만원이 넘습니다.
이 회사의 임원은 대략 2억원 가량의 연봉을 받는데, 이번에 강원랜드의 감사로 ‘황인오’라는 사람이 물망에 오르내리자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황인오’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이 사람은 강원도 정선 탄광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광부다 보니 당연히 부자는 아니었을 것이고,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다음 서울로 올라가서 제일 처음에는 중국집에서 일하다가 의류공장에 취직해서 재단사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일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했고, 자신은 공무원시험이나 사법시험을 치를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황인오씨는 워낙 가난하다 보니 공부를 할 형편이 안되었지만, 그 동생들은 서울대에 들어가는 등 아주 공부를 잘 했던 것을 보면 머리는 좋은 집안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막상 공장생활을 해 보니 돈도 안 벌어지고, 게다가 공부할 시간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1972년 다시 정선으로 가서 아버지와 같은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17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석탄을 캐면서도 공부는 꾸준히 했고, 그 와중에 약간의 폭행사건에 휘말리면서 2년 간 징역을 살게 되자 감옥 안에서 신학과 관련된 책들을 읽었고,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히)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 읽는 몇권의 책들을 읽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가난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고 인식한 황인오는 그때부터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던 도중 1980년 이른바 ‘사북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북사태’에 대해서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아주 길어지는데, 아무튼 이 사태에 황인오는 아주 적극 가담하게 됩니다. 물론 아주 적극 가담은 했지만 황인오가 폭력을 쓴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북사태 결과 경찰관이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그 경찰은 투석전 도중 돌에 맞아 죽었지만, 경찰은 황인오를 살인범으로 지명수배했습니다.
도망을 다니던 황인오는 같은 해인 1980년 6월 29일 서울의 하이야트호텔에서 잡힙니다. 정선의 광부가 갑자기 뜬금 없이 하이야트호텔까지 가게 된 이유는 전혀 다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정정의 불안 때문에 외국기업들이 막 빠져나가는 사태를 겪고 있었고,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전두환 집권 이전에 결정된 일입니다) 대규모의 국제행사를 무리를 해가면서 유치했는데, 그것이 바로 ‘미스유니버스대회’입니다. (이 대회에 나온 미스프랑스가 우리나라의 어느 이상한 놈의 편지에 홀려 결혼해서 그 녀석을 몇년 먹여 살렸습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제비 중 한명입니다...)
황인오는 사제폭탄 (이라고 해봐야 별다른 폭발력도 없었습니다)을 들고 하이야트호텔로 갔는데, 현장에서 체포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큰 행사가 열리는데 거기에 경찰이 없었을 리가 없었던 것이죠.
이로 인해 2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뒤, 다시 1982년 석방된 황인오는 성남에 가서 다시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때 성남에서 황인오를 지도하고 노동운동의 세계로 끌었던 인물이 바로 ‘김문수’였습니다.
그 후 1984년 황인오는 다시 사북탄광으로 가서 광부들을 대상으로 의식화교육을 진행하고, 그 도중에 (그로 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동생인 황인혁 (당시 성균관대 학생회 기획부장) 이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86년 또다른 동생인 황인욱 (당시 서울대 서양사학과 학생) 은 ‘서울대 대자보사건’으로 구속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후 황인오의 행적은 그냥 꾸준히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1987년에는 아내 송혜숙을 만나서 결혼했는데, 송혜숙은 인천의 대한마이크로노조결성 때문에 해직된 노동자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탄광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성남으로 간 다음 건축노동자로 일하다가 건축노동자를 파견하는 용역사무실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일상적인 노동운동입니다.
그런데 1990년 7월 어떤 할머니가 황인오를 찾아왔습니다. 이 할머니가 바로 ‘이선실’이었고, 당시 북한의 조선노동당 공식서열 22위의 거물이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