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코스 출발지점인 평산항에 17시28분에 도착 간단히 준비 후 바로 출발, 오늘은 빡세게
70여키로를 넘게 걸어야한다 그러나 시간은 넉넉하다.
(7구간은 다음기회에 가기로 하고 8구간부터 진행한다, 6구간을 지난 6월4일에 답사하고
4개월 반만에 남파랑길을 접한다)
남해바래길 안내도
평산항에 있는 작은 미술관
일몰과 평산항
평산마을
평산마을(평산교회입구 도로)에서본 평산항과 바다 노을
평산2리 마을 회관
평산마을과 평산항 그리고 바다 노을
평산2리 안내 간판
평산2리 표석
평산방파제(평산항) 섬 그리고 노을
아난타 남해CC
평산2리 마을 표석
오리마을표석과 마을 전경
양지교
아난타 남해CC입구
임진성 주간사진(퍼옴)
임진성 안내 간판
***남해인진성***
*위치: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상가리
*개요
남면 상가리 남쪽에 위치한 임진성은 이름 그대로 임진왜란 때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지어진 성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민, 관, 군이 힘을 합쳐 쌓았다는 이유로 민보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임진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길게 늘어선 돌덩이들이 차곡차곡 높게 쌓아져 있으며, 토성으로 된 외성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형태는 테뫼식으로 사암, 화강암, 안산암 등 활석으로 장방형 쌓기로 구축하고 틈새는 잔돌을 끼워 마감하였는데, 옥포 인접 구릉에 타원형 성곽으로 성곽 내 토루를 만들어 통로를 만들었다. 옛날에는 성루, 감시사, 망대, 탑대, 서당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시설물은 없고, 성곽과 동문터, 서문터, 우물터만 남아있다. 현존하는 성벽의 남쪽 동문터와 서문터 사이는 최근보수 공사를 거쳤고, 2014년에는 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연지,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197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순신(李舜臣)이 전사한 관음포 앞 바다를 배경으로 조성되었다. 관음포는 이락파(李落波)와 노량(露梁)을 연결하는 해역(海域)으로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최후의 해전을 치른 곳이며, 달아나는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를 추격하다가 이순신이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곳을‘이순신이 순국한 유서깊은 곳’이라 하여 ‘이락파’라고 불렀고, 돌출한 작은 곶도(串島)를 이락산(李落山)이라 하여 이순신의 충성을 추모하였다.
1598년(선조 31) 11월 9일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은 소금도(召今島)를 출발해 남해안의 왜적을 완전히 소탕하면서 동진하다가 동년 11월 19일 아침에 이곳 관음포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왜적은 서둘러 퇴각을 하다가 뱃길이 막히는 관음포로 쫓겨났는데, 여기서 그들은 남으로 빠져나가고자 하였다. 결국 관음포 전투는 근접전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이 때 이순신은 한 척의 왜적 전선도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친히 진두에 나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왜선 200여척을 침몰시켰다. 그러나 이 치열한 전투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아군의 사기를 위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에는 앞 바다를 바라보는 연안에 이순신을 제향한 이락사(李落祠)가 있다. 이것은 순국한 지 230년이 지난 1832년(순조 32)에 그의 8대손 이항권(李恒權)이 통제사로 부임하면서 왕명에 따라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이곳에다 높이 1.9m, 너비 0.73m 되는 충무공유허비(忠武公遺墟碑)를 세웠다. 또한 이락사 경내에는 ‘큰별이 바다에 지다(大星殞海)’라는 현액(懸額)이 붙은 충무공묘비각(忠武公墓碑閣)이 있다.
그 외에 순조 때 홍문관대제학 홍석주(洪奭周)가 세운 이충무공 유허비를 비롯해 근래에 세운 이충무공 사적비도 함께 있다. 이처럼 이곳은 순국한 이순신의 공적과 충성을 기리고 있는 역사적 유허이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개설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내용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泗川) 등지의 시마쓰(島津義弘)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死則無憾)”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 침몰하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이순신함대에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패잔선들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같은 날 오전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남해대교는 단절된 국도 19호선의 경남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를 연결하는 연륙교다. 남해도와 하동군 사이에는 거리가 600m밖에 되지 않는 매우 협소한, 수로와 같은 형태의 노량해협이 있다. 여기에 3경간 2힌지의 타정식 현수교가 가설되었고, 그 경간 구성은 128+404+128=660m다. 2차선 교량으로 전체 폭원은 12m인데, 차도부는 7.2m, 보도부는 양측에 각각 1.2m를 두었으며, 보강 거더는 내풍 성능이 우수한 유선형 박스 모양을 채택했다. 주탑은 H형식의 라멘형 강제 주탑이며 높이는 60m다. 또한 직경이 φ258mm인 주케이블이 2면으로 설치되었고, 새그(Sag)비는 1/12이 적용됐으며, 케이블 지간장은 130.6m+404m+130.6m로 AS(Air Spinning)공법으로 가설됐다. 설계 활하중은 AASHTO의 HS 20-44(DB-18), 등분포활하중은 0.95t/m가 적용됐다.
남해대교가 준공될 당시인 1973년 세계에서 최대 경간장인 교량은 1964년에 준공된 미국 뉴욕의 베라자노-내로우스(Verrazano-Narrows)교로 1,298m였다. 중앙경간이 404m인 남해대교는 세계에서 20번째로 긴 다리였으며,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였던 일본 와카토대교(若戶大橋)의 중앙경간 366m보다 길었다. 참고로 중앙경간이 1,280m인 금문교(GoldenGateBridge)는 1939년에 준공됐으며 세계 2위였다.
[네이버 지식백과]남해대교 [南海大橋, Namhae Grand Bridge] (세계 다리명 백과, 김선일)
2. 다리의 건설 배경
남해도는 약 600m인 노량해협으로 육지와 단절돼 산업 · 경제 · 교통 면에서 고립 상태였지만 해협의 수심이 깊고 조류가 빨라 이곳에 교량을 가설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다. 하지만 아무리 선박이 발달되고 편리하다 할지라도 남해도의 산업 경제와 직결되는 육지와의 교통, 물류 운송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 지역의 개발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또한 남해도의 유일한 특산물인 감귤이 국내에서 호평받고 있었던 시기였을 뿐 아니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승전지이자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던 노량대첩이 있었던 곳이기에 충무공 사당을 비롯한 관광 자원이 풍부해 명승지로 개발될 수 있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할 때 교량 가설의 필요성은 충분했다.
1966년에 실시된 국내와 일본 조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지형, 지질, 수심, 조석 등을 조사한 결과 자연적인 조건 때문에 장경간의 교량이 아니면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를 근거로 초기에 계획했던 가설 위치 및 경간장이 다소 변경되었고, 주탑의 기초 위치가 원안에서는 수심이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약 5m를 육지 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최종 계획이 수립됐다.
남해대교의 계획부터 건설까지의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66. 12. : 교량 실시 계획 설계 ∙1968. 04. : 일본 교량기술자 2명을 초청해 타당성 검토 비교 ∙1968. 11. : 남해대교 사업계획서 국회 통과 ∙1968. 11. : 남해대교 실시 설계 준공 ∙1969. 12. : 차관 사업 계획 합의서 서명 ∙1969. 12. : 자재 구매 계약 체결 ∙1970. 08. : 기술 협조 협의 각서 체결(니폰스틸, HHI) ∙1973. 06. : 공사 준공
[네이버 지식백과]남해대교 [南海大橋, Namhae Grand Bridge] (세계 다리명 백과, 김선일)
월곡교
노량대교
감암 마을
감암회관
남해대교(상하)
사진좌 노량대교, 우는 남해대교
남해대교로 오르는 데크
남해대교
노량항 모습
구노량 나루
남해대교에서 본 노량대교
남해대교 3거리/ 노량터널 입구
노량버스 정류장..
05시56분...노량 삼거리... 46코스 종점, 47코스 시점...40키로미터 지점(남해에서 하동으로 넘어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