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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것을 고치고 부족한 것을 채워라(3)
2008년 3월 9, 16일 / 대예배 / 창 22:1-19
3. 하나님은 무조건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보다 순종키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한 것 또한 많이 있음을 고백도 합니다. 이번 기회에 부족된 순종을 찾아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갔으면 합니다. 믿음은 일종의 행함인 순종을 통하여 열매가 맺힙니다. 순종이 없다면 그러한 믿음은 좋은 질의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이왕이면 100%의 질 좋은 순종이 되도록 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을 삼고자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사 열방이 저를 통하여 복을 받도록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되기 위하여 치러야했던 힘들고 어려웠던 마지막 시험은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이 치룬 시험을 3가지로 보면 이렇습니다.
① 세상을 떠나는 일이었습니다. / 기독교의 신앙은 떠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죄악의 세상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는 옛 생활을 청산하는 일로 어두움에서 떠나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마 11:28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 기독교는 세상에서 불러내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세상에 속하여 죄악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 교회를 왜 세우셨습니까? 성령께서 왜 오셨습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을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 받도록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말은 ‘에클레시아’로 ‘세상에서 불러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을 불러 모아 새로운 그룹을 형성한 교회는 이 세상에 살기는 살아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유혹들이 끊임없이 유혹할지라도 그것은 보기에는 참 좋은 것이지 실지로는 우리를 유혹하여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
사 55:6-7 / 여호와께서 너희를 만나러 오셨을 때에 너희도 주님을 만나러 나오너라! 주께서 가까이 와 계실 때에 너희도 주님을 부르며 찾아라! 7) 여호와께 반대하고 자기 생각대로만 산 사람은 이제 그 길에서 떠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여호와께서는 얼마든지 그런 사람도 다시 받아주실 것이다. 주께서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도 애굽을 떠나는 일부터였습니다. 애굽을 떠나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 왕 바로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라, 멀리는 가지 말라, 남정들만 가라, 소유는 두고 가라.”라고 끈질기게 협박과 타협을 해 옵니다. 그럴지라도 성도는 떠나는 일에 분명해야 합니다. 대신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등진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때 가장 힘든 것은 불순종하려는 자아(自我)입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꺾는 일은 신앙생활의 시작이요 마지막이기도 합니다.
■ 헤밍웨이는 할아버지도 목사님이셨습니다. 어머님도 믿음생활 잘 했습니다. 아버지도 의사였습니다. 잘 믿는 가정에서 주일학교 때도 성가대에 앉고, 열심히 봉사도 잘했을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기자생활도 잘하고 작가로서도 성공했습니다. 노벨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돈도 많았습니다. 인기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권총으로 자살해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는 마지막 고백을 어머니에게 했습니다.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고 해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운 공허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어떻게 보면 돈도 집도 인기도 명예도 있다 하지만 외로움과 공허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4명의 여인과 결혼을 해도 허무함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행복하게 못했습니다.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인과 바다’도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바다에 나가 84일 동안 어떻게 하더라도 고기를 잡으려고 몸부림치다가 드디어 85일 만에 큰 고기를 생명 걸고 싸우다가 결국 잡아가지고 배 뒤에 묶어서 항구까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꺼내어 보니까 상어 떼가 고기를 다 뜯어먹고 뼈만 남은 것입니다. 이게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입니다. 이건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에서 잘 살려고 몸부림치고 파도와 싸우고 고기와 싸우고 인생 다 바쳐서 한 마리 겨우 잡았는데, 그것마저 지내놓고 보니 결국 상어 떼가 다 가져가는 것입니다.
■ 율리시즈라고 하는 사람이 바다를 항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바다를 항해하는 곳곳마다 수많은 배들의 선장들이 여인들의 이상한 소리에 유혹을 받아 다 넘어지는 것입니다. 거기만 오면 배들이 침몰합니다. 그래서 율리시즈는 “이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서 내 말을 듣지 마라. 이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나를 기둥에다 붙잡아 매라.”고 합니다. 그래서 돛에다 율리시즈를 붙잡아 맵니다. 그렇게 해서야 무사히 통과를 하게 됩니다. 그 유혹에 승리하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 교회가 왜 직분 맡기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왜 붙잡아 매는지 아십니까? 못 믿으니까 성도답지 못하니까 잡아매는 것입니다. 집사 왜 주는지 아십니까? 유혹 이기라고 집사라는 밧줄로 매는 것입니다. 시험을 이기라고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이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권사도, 안수집사도 주고 성가대도 맡깁니다. 직분이 이렇게 우리를 이 세상에서 보호하여 줍니다. 직분 때문에 죄를 덜 짓고, 직분 때문에 마귀하고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교회에서 직분 맡기면 안 매이려고 합니다. 매여야 됩니다. 우리는 이 유혹 많은 세상을 지낼 때 매여 가지고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잠깐의 유혹만 통과하면 영원히 복 받는데 순간순간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2008년 어떤 불경기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빌 4:6 / 걱정에 싸여 지내지 말고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기도하십시오. 필요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남께 감사드리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② 하나님을 인정하여 믿어드리는 것입니다. 히 11장에는 하나님을 믿어드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 나폴레옹이 전쟁에 나가려는데 부하가 “각하, 목사님을 모셔다가 기도를 하고 나가시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대답했습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야. 전쟁과 하나님은 아무 상관이 없어.”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수많은 부하들이 죽었고 나라도 망하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시 127:1) 영국의 해군 제독 넬슨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집 짓는 자의 수고가 무슨 소용 있을까요!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 서 있다 한들 무슨 소용 있을까요!”라는 성경 말씀을 외우며 믿었고, 전투에 나가기 전에 군목과 함께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고 그 결과로 영국이 살고 자기도 살고 부하들도 살았습니다. 같은 장군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장군과 자기를 의지하는 장군의 종말은 하늘과 땅처럼 달랐습니다.
시 91:15 / 내게 부르짖을 때 응답하며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내가 그들 곁에 있으리라. 그들을 건지고 높여 주리라.
믿음이란 무엇인가? 히 11:1 /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믿음이 있어야! 히 11:8 /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 약속해 준 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났습니다.
믿음을 가져야 하늘 도성을. 히 11:9-10 /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훗날 하나님께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처럼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1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늘의 도성으로 그를 데려다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산 것입니다. 그 하늘의 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건설하신 곳입니다.
사라도 믿음의 사람이었다. 히 11:11 /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믿음이 깊은 여자였습니다.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아기를 낳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굳게 갖고 있었으므로 어머니가 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세상을 등지게 한다. 11:15-16(아브라함의 경우) /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모세와 같은 믿음을 … . 11:24-26(모세의 경우) / 모세가 어른이 되었을 때 애굽 왕의 손자로 불리는 것을 거절한 것도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잠시 동안의 쾌락을 위해 죄에 빠지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26) 애굽의 모든 보화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장차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큰 상을 더 바란 것입니다.
③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의 순종! 히 11:17-19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을 때도 아브라함은 아무런 의심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아 제단 위에서 그를 죽여 희생제사를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18)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삭을 통해서 그의 자손이 퍼져 나가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하였습니다. 19) 만일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리라고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죽을 운명에 놓여 있던 이삭이 살아 있는 그대로 다시 아브라함에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를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아브라함의 행함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브라함의 고백이었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마음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뜨거운 중심에서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입술에 바른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예수님은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손수 준비하신 조반을 함께 잡수신 후에 베드로에게 3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요 21:15-17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16)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17) 예수께서는 한 번 더 그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께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자 근심이 생겨서 “주님, 주님은 제 진심이 어떤지를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처음 두 번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Do you love me?)”라는 물음은 ‘희생적인 사랑 - 아가페(Agape)’의 사랑을 말합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느냐?, 나를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느냐?’라는 신적인, 희생적인, 사심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음에 ‘사회적인 사랑 - 필리아(Phillia)의 사랑, 내가 주님을 좋아합니다(I like you, Yes, Lord, you know that I like you).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니?, 네가 나를 위해 정말 희생할 수 있니?”라고 물으셨는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똑같은 사랑을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Do you like me?)”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합니다. 슬픔에 잠겨 버렸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ike you.).라고 말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뭘 물어보십니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베드로는 감히 최고의 사랑,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 앞에 완전한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도 했던 것을 아시는 데 어떻게 자신있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완전한 사랑을 장담하지 못하는 베드로는 한때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입니다(마 26:33).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배신자였던 그가 또 큰소리치겠습니까? “주님 다 아시지 않습니까?”하는 베드로의 사랑 고백은 100%짜리 완전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도 허약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 속에는 회개하는 마음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백을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 고백은 몇 %나 되겠습니까?
◘ 삶의 꿈이 성취되고 그동안 고통스러웠던 인생의 숙제가 다 풀려 해결되고, 이웃의 존경과 신뢰를 회복하여 오랜만에 발을 뻗고 잘 수 있다고 느끼던 어느 날 갑자기 행복을 깨는 청천 벽락과 같은 불행과 아픔이 엄습해 온 일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21장의 아브라함은 가슴 속에서 늘 초조와 아픔으로 있었던 자식에 대한 문제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아들 이삭을 얻음으로 기쁨이 충만케 되었고 가정에 깔려있었던 이스마엘과 하갈의 문제도 해결되었고, 주위에 늘 존재하고 있었던 이웃 나라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고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기쁨과 웃음과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1.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시험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가장 번영과 안정과 평안을 누리고 있었던 때에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청천벼락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창 22:2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이 사건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test)하신 사건입니다. ‘시험’과 ‘유혹’은 다릅니다. 개역성경에는 혼돈에서 사용될 때도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시험(test), 유혹(temptation)으로 구분합니다. 시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유혹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시험은 욥처럼 나의 잘못과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이요 유혹은 가룟 유다처럼 대부분 개인의 욕심 때문에 옵니다. 시험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으로 언제나 건설적이며 교육적인 목적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은 언제나 파괴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지만 유혹하지는 않습니다. 시험은 힘들고 어렵지만 부족한 부분을 온전케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2. 아브라함으로서 감당할 만한 시험이었는가?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같은 시험을 하신다면 과연 몇 분이나 통과를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몇 분이나 합격통지서와 함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복을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께서 너무 지나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어리석거나 무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게 된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되어진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여러 가지 연단을 거쳤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시련도 있었을 것이며, 그로 인하여 심적 고통도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어지는 시험을 하나씩 잘 이겨나갔기에 지금 닥쳐온 시험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많이 넘어지기도 하고 타락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에 대하여도 많이 알게 되었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험이 일찍 주어졌으면 그는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많은 연단 끝에 감당할 만한 때 주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3.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주셨을 때 … .
1. 절대 신뢰 / 사실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인간 상식으로 생각하기에는 불합리한 명령입니다. 언제는 기적으로 주셨고 다시 뺏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후손을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까지 그것도 수차에 걸쳐 말씀하시고는 그 아들을 죽이라고 하시니 아예 씨를 없애 버리면 무엇으로 그 말씀이 이루어집니까?
얼마든지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순종하는 종으로 생각해봅니다. 이 아들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주셨는데 나도 드리면 하나님은 다시 살리시겠지? 나는 순종할 따름이고 다음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계속 아브라함이 시험 받을 때의 믿음의 상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11: 18-19 /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이삭을 통해서 그의 자손이 퍼져 나가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하였습니다. 19) 만일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리라고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죽을 운명에 놓여 있던 이삭이 살아 있는 그대로 다시 아브라함에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셨으니 바치지만 어찌되었건 하나님이 다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죽여 바칠 때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난을 받은 후에 사흘만 다시 살아나리라.”
눅 24:13-27 / 바로 그날, 예수를 따르던 이들 중의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11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길을 가면서 예수께서 돌아가신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그다지도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18) 그들 중에 글로바라는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살면서도 지난 주간에 일어났던 그 끔찍한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이오?’ 19) 예수께서 물으셨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께 있었던 일이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보인 예언자요, 권능 있는 선생으로 높이 존경을 받는 분이었소. 20)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붙들어 로마 정부에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였소. 21)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이 난국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생각해 왔소. 이런 일이 있은 것은 사흘 전이었지요.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오. 22) 그분을 따르던 우리 동료들 가운데 여자들 몇이 오늘 새벽에 그분의 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만 보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소. 24) 그래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달려가 보니 말한 대로였고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거요.’ 25)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렇게도 미련한 자들이냐! 너희는 예언자들이 성경에 기록한 모든 것이 그렇게도 믿어지지가 않느냐! 26) 그리스도가 영광스런 자리에 앉기 전에 이 모든 그날을 당해야 한다고 예언자들이 명백하게 예언해 두지 않았느냐?’ 27)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모세의 글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해 놓은 구절들을 일일이 인용해 가면서 그 구절들이 무엇을 의미하며 예수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부활을 믿지 못하였다면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은 상당히 돋보입니다.
2. 절대 순종 / 고민과 번민 자식과 한 시간이라도 더 있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3)고 하였습니다. 결단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연단을 통해서 배운 진리는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복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앙이 깊어지면서 순종의 중요성을 배웠을 것입니다. 끈끈한 정과 인간적인 생각을 끊고 순종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도 귀하지만 이삭의 순종도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삭의 나이 최소한 13세에서 최고 30세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반항할 수 있는 혈기 방장한 나이입니다. 그러나 반항한 흔적이 성경에 보이지 않습니다. 끝까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이삭은 아버지에게 순종하였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림을 받는 이삭의 모습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불순종으로 고난당한 후 순종을 배웠지만, 이삭은 어려서부터 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평탄했고 가는 곳곳마다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 어느 시골 농촌에 많은 것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늘 감사하며 온 식구가 열심히 노력하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웃 마을에 사는 부자 친구가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가정이 그렇게 화목하고 행복 하는가?” 물었습니다. 친구는 아무 말하지 않고 3아들들을 불렀습니다. 3아들들이 우르르 달려오더니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옳다. 그런데 외양간에 가서 암소를 끌고 오너라.” 아들들은 아무런 대꾸도 안하고 “예!” 하면서 뛰어가더니 외양간에서 소를 끌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저 암소를 지붕위로 끌어 올리려무나.” 아들들은 또 다시 아무런 대꾸도 안하고서는 “예!” 하고서는 큰아들은 고비를 잡고 지붕위로 올라가고, 둘째는 사다리를 받치고, 막내는 뒤에서 밀면서 소를 지붕으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엊그제 사온 소금 가마니가 있지 않니?”, “예! 있습니다.”, “그럼 그 소금 가마니를 지게에 져다가 저 앞 강가에 좀 담가두어라.” 아들들은 또 다시 “예!”하면서 소금 가마니를 지고 달립니다.
이것을 본 친구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서는 마찬가지로 아들들을 불렀습니다. 한번 부르고 또 “첫째야!” “둘째야!” “셋째야!” 부릅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다시 고함을 치면서 부릅니다. 눈을 비비면서 겨우 마지못해서 불려나온 아들들은 “아버지! 이렇게 비오는 날이면 할 일도 없는데 왜 그렇게 부르시느냐?”고 반문하면서 못마땅해 합니다. 아버지는 친구의 가정에서 본대로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외양간에 가서 송아지를 가져다가 지붕위로 올리라.” 아들들이 깜짝 놀라 “아버지! 노망하셨어요? 왜 멀쩡한 소를 지붕위로 올립니까?” 부엌에 있던 부인마저 뛰어나오면서 소리칩니다. “네 아버지 술 잡수시고 오셨나보다. 비 오는데 어서 가서 잠이나 주무세요.”라는 것입니다. 한참이 지나서 아버지는 또 다시 아들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아들들이 겨우겨우 불려나옵니다. “엊그제 사온 소금 가마니를 져다가 저기 냇가에 좀, 담가 두어라.” “아버지! 소금을 왜 물 속에 담가 둡니까?” 아들들은 물론 부인과 함께 온 집안이 아버지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야단법석이 난 것입니다.
▶ 하나님의 시험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문제를 말씀이라는 공식에 적용하니까 풀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다른 것 같은 것도 있지만 순종하면 한결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공식에 적용하니까 부활신앙이라는 답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1:18, 19에 보면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고 순종했다.”고 했습니다.
자! 이제는 우리들의 믿음과 결단만이 남았습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무조건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요, 복된 길이며,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3. 절대 사랑 / 시험의 목적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절대 사랑의 관계를 성립하기 위해서 입니다. 노년에 얻은 독자 이삭을 아브라함은 지극히 사랑하였을 것입니다. 곧 이삭이 우상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거기다 절을 해야만 우상이 아니고 “나의 창조, 내 삶의 주인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 애는 버립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사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을 하나님 사랑하듯 하면 그 사랑에 녹아버려 쓸모없는 인간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식 버린 부모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 사랑d; 손상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이삭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마 10:37 / 만일 너희가 나보다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면 너희는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만일 너희가 나보다 너희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한다면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4. 절대 헌신 /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자신을 바치고 헌신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욕심에 대하여 내가 죽고, 이기심에 대하여 내가 죽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헌신해야 나를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물이 죽어야 제단에 올라가지 살아서는 올라 갈 수 없듯이 내가 나를 그분께 헌신해야 그분이 나를 쓰십니다. 그러기에 목이 잘리고, 각을 뜨고, 비늘이 벗겨지고, 꼬챙이에 찔려서 꼼짝할 수 없어야 합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서 바치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보다 더 괴로운 일이요 어려운 일입니다. 이삭을 죽이는 것은 곧 자신을 죽이는 것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마 16:24 /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자기가 기대하는 것하고 다르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종을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홍해가 가로막혀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출 14:11-12). 물이 없다고 불평했고(출 15:24), 배가 고프다고 원망했고(출 16:2-3),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했고, 애굽에 있을 때는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 등등을 먹었었는데 그런 것을 못 먹어 정력이 쇠약해 진다고 불평을 했습니다(민 11:1-6). 불평만 일삼는 그들은 결국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민 14:36-38 / 모세가 그 땅의 형편이 어떠한지 살펴보라고 보냈던 자들 중에서 돌아와서 그 땅의 실제 형편보다 훨씬 좋지 않게 말하며 백성들을 선동하여 모세를 괴롭혔던 자들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재앙으로 모조리 죽었다. 그러나 그 땅을 살피고 돌아온 사람 가운데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 만은 죽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선이 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우선이 되면 신앙생활을 해도 늘 불평하며 살게 됩니다.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이 잘 될 때는 잠시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일들이 그렇게 자기 뜻대로 다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 먼저가 되지 못하면 늘 불평하며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불평과 원망을 하나님을 바라보면 결사적으로 억제합니다. 예레미야는 12: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렘 12:1 / 여호와여, 주님은 언제나 의로우신 분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주님의 의로우심을 의심할 수가 있으며, 주님을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주님의 의로우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을 것인지 여쭈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주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자들이 언제나 이 세상에서 형통합니까? 그들이 늘 성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토록 배신하며 사는 반역자들이 왜 언제나 안전하고 평안하게 살아갑니까?
다시 말하면 예레미야는 자기에게 당하는 고난이 너무 힘이 들고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왜 악한 자가 형통하고, 패역한 자가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묻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다 옳으신 줄 압니다만” 하는 전제를 붙인 다음 물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랬고(느 9:33), 에스겔이 그랬고(겔 18:25), 다니엘이 그랬습니다(단 9:14). “그래, 뭔가 있을 거야.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주시는 데는 내가 알지 못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야.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을 거야. 그러니 원망해서는 안 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싸움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이렇게 위로를 하십니다.
마 5:4 /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계 7:17 / 보좌 앞에 서 계시는 어린양께서 목자가 되어 그들을 생명수의 샘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계 21:4 /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 다시는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영원히 다 사라져 버렸다.'
♬ 내일 일은 난 몰라요 / 1.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도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할 길 주옵소서
2. 좁은 이길 진리의 길 주님가신 그 옛길 힘이 들고 어려워도 찬송하며 갑니다 성령이여 그 음성을 항상 들려줍소서 내 마음은 정했어요 변치 말게 합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할 길 주옵소서
3. 만왕의 왕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만백성을 구원하니 참 구주가 되시네 순교자의 본을 받아 나의 믿음 지키고 순교자의 신앙따라 이 복음을 전하세 불과 같은 성령이여 내 맘에 항상 계셔 천국 가는 그날까지 주여 지켜 주옵소서
■ 스코틀랜드의 ‘에릭 리들’은 파리 올림픽 400m 계주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국에 돌아왔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네가 받은 메달보다 더 위대한 영광의 메달이 있다. 너는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올림픽 경기로 국가적 영웅이 되었지만, 에릭 리들은 하나님과의 헌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영광을 버리고 선교를 위해 아버지와 형의 뒤를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중국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그는 운동선수의 화려한 명성이 중국의 무지한 농부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에 비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릭 리들은 12년간 톈진에서 교사로 봉사하며 복음을 전했으며, 그 후 7년 동안 산둥 반도의 곳곳을 다니며 농촌 지역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에릭 리들이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돕자 일본군은 그를 스파이로 몰아 감옥에 가두었지만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감옥 안에 신앙의 공동체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나이 44세 때인 1945년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감옥 옆 작은 동산에 그를 묻었습니다.
4. 가장 값진 것을 서슴치 않고 드린 아브라함
1. 사랑하는 독자 이삭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자녀나 세상의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가?”의 시험입니다. 100세 때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있는 것 중에서 하나를 드리라는 것이 아니고 단 하나 밖에 없는 것 그것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을 드리라는 시험입니다.
눅 18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아끼고 사랑하는 재물로 인하여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주의 종으로 드리라고 해도 어려운 일인데 독자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시험은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도 죽여서 제물로 드리라는 시험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적으로 받은 선물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아들이 될 수가 있고, 명예도 될 수 있으며,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 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이 결정해야 할 문제일 뿐입니다.
사르밧 과부도 단 하나밖에 없는 마지막 빵을 외아들에 주지 않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드릴 때 삼년반 동안의 흉년에 밀가루 통이 마르지 않고 기름병이 마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므로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참고할 것은 사르밧 과부가 매일 빵을 만들어 먼저 선지자 엘리야를 공궤했다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밖에 없는 자기 자식에게 먼저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이삭을 제물로 드린 이 한 날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날’로 삼은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제일 좋고 귀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내 속에 있음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든지 성령의 불로 태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이런 요구에 잘 부응했던 신앙의 인물입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빌 3:8 /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욕심을 버렸을 때 그는 이삭을 온전히 취할 수 있었던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육정도 불로 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이 즐겨갖고자 했던 배설물과 같은 세상의 모든 것을 지금 우리가 혹시 갖고자 하지는 않는지 돌아봅시다. 내 속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지? 배설물과 같은 것인지?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드렸습니다(2)
창 22:2 / 네가 무척 아끼는 외아들 이삭이 있지 않느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그리로 가면 내가 네게 산 하나를 일러 줄 터인데 그 산으로 올라가거라. 거기서 네 아들을 내게 번제물로 바치거라.
아브라함의 아들 중 이스마엘이 아니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한 산에서 그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을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을 것이라고 짐작해서 내가 좋아하는 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4.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방해되는 핑계거리를 제거해야 했습니다.
나쁜 뜻이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나쁜 뜻으로 많이 쓰이지만 실제 의미는 ‘분별하여 밝힘’ 입니다. 옳은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도 변명입니다.
핑계에는 안 좋은 뜻이 있습니다.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것의 탓으로 돌린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한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방어를 위해서 다른 외부요인을 끌어들여 변명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변명은 자기가 한 일이 잘못이 없음을 따져서 밝히는 행위를 할 때 말하는 것이고, 핑계는 잘못을 해 놓고 그것을 부인하기 위해서 구차하게 늘여놓는 말 따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그의 지나친 변명은 오히려 사람들에겐 그의 핑계로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잘못이, 잘못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여러 말을 내세워 변명을 했으나, 오히려 듣는 사람은 그가 구차하게 잘못을 해놓고 그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뜻이 되므로 핑계라고 쓰게 되는 것입니다. 핑계가 되었든, 변명이 되었든 .... 이런 골칫거리부터 만들지 말아야겠죠?
▶ 세상을 살다보면, 힘들고, 귀찮은 일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의 태도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나는 이래서 안 돼’ 또는 ‘애써 그것을 할 필요는 없어’하며 일을 회피합니다. 지나고 나면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핑계에 맞장구치며 태도와 행동을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기 싫거나 힘든 일을 만났을 때에 주로 무슨 핑계를 댈까요? 우리는 조금이라도 편하고 싶어 수많은 핑계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항상 새로운 핑계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의 핑계 : 피곤한 데 억지로 일어나면 오늘 하루 졸면서 시간을 보낼 거야. 그럴 바에는 좀 더 자는 게 좋지 않겠어?
운동하기 싫을 때의 핑계 : 어제 비가 와서 분명히 등산로가 질퍽할 거야. 그러나 땅이 마른 다음에 운동하자.
어제도 먹고 오늘도 술 마실 때의 핑계 : 몸이 피곤할 때는 술을 좀 먹어야 잠이 잘 와. 오늘 마시고 이번 주엔 안 먹으면 되지 뭐.
눈앞에 놓여있는 일이 하기 싫을 때의 핑계 : 내가 편히 살려고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지금도 이렇게 하루 종일 일만해야 하나? 좀 쉬면서 하자.
지나가면 후회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핑계를 댑니다. 어제는 물론이고 지금도 핑계거리를 찾고 있고, 내일도 당연히 새로운 핑계거리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지겹고 따분하고 힘든 것은 가능하면 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의 모습입니다.
이런 핑계는 정신과의사인 스캇 펙박사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나 시기, 질투가 아니라 ‘게으름’이라고 정의할 정도니 인간 마음속에 뿌리박힌 모습인 것 같습니다.
▶ 어떻게 보면 눈감아 줄 수 있는 핑계들도 있습니다. 뻔히 알면서도 ‘그래. 좀 쉬지 뭐.’ 하며 휴식거리를 만들어주는 게으름 정도라면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핑계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케 한다거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꿔 버릴 정도면 그건 좀 심각한 상황이 될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일에 대한 도전 자체를 포기하는 상태 : ‘나는 가진 것이 없어’라는 마음으로 무엇인가 시작할 때부터 실패를 예상하는 태도. ‘나는 남에게 줄 것이 없어’라는 생각 때문에 아예 남에게 무엇인가 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은 자세 등입니다.
■ 날지 못하는 닭, 핑계
사실적인 아닌 예화를 들어봅니다. 날개는 있지만 날지 못하는 새인 닭도 예전에는 날 수 있는 동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길들여지면서 점점 날개가 퇴화해 이제는 날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끼니 걱정 안 해도 되니까,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니까 편하다는 핑계로 사람들에게 길들여졌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지켜주던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닭이 되고 말았습니다. 편하다는 핑계로 자신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지금도 저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는 닭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일상에 매번 불평을 하면서도 이미 그 상황에 적응해, 변화를 꿈꾸기보다는 자리에 주저앉아 핑계만 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의 내 모습도 괜찮다는 핑계로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핑계를 버리면 닭도 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도 자신이 버릇처럼 하는 핑계를 버리면 하늘 높이 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것을 잃고 살아갑니다. 가까운 사람과 함께 나누는 순간, 남을 돕는 순수한 마음,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 등은 내가 바쁘다고 말하는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됩니다. 또한 사람들은 ‘나는 할 수 없다는 핑계’로 많은 것을 잃고 살아갑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용기,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끈기, 다른 사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자신감 등은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연기처럼 사라져버려 어떤 일이든 할 수 없게 합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에게 핑계는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구차한 변명이자 자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어’, ‘부모한테 받은 게 아무것도 없어’, ‘지금은 너무 바빠, 다음에 할게’ 등 사람들이 흔히 하는 핑계들이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에 ‘때문에’라는 말을 붙여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할 때, 홀로 ‘이지만’이라 말한다면 누구든지 남보다 뛰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슬픔을 도전으로, 장애를 기회로,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 있었지만 희망과 용기를 갖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핑계는 그야말로 핑계일 뿐, 인생에서 버려야 할 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 방향과 성패를 좌우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한테 표현한 말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항상 더 나은 내일, 더 멋진 삶을 꿈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항상 조심해야 한다. 핑계거리가 많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상황일지라도 그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되고, 이런 저런 핑계가 꿈을 향해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는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덫이자 실패의 길로 이끄는 함정이 되고 맙니다. 인생에서 핑계를 버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바라고 있는 꿈에 다가가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나는 안 돼’ 보다, ‘그럼에도 나는 해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제 핑계를 버리고 날아오를 때입니다. 자신이 날아오르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핑계’와 그 핑계를 넘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상황과 실패한 사실을 합리화하는 핑계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인간이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무겁게 하고 있는 핑계를 내려놓고 멋지게 하늘을 날아보십시다! 우리의 꿈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더 이상 없어야 합니다!
핑계의 목차들 :
핑계 Ⅰ: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어, 남편을 잘못 만났어, 난 지지리도 운이 없어, 뭘 하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 하지, 학벌이 안 좋아서 힘들어, 난 여자잖아, 사람들 앞에 서면 아무 말도 못 하겠어, 그때 그 사고만 없어서도 … , 부모한테 받은 게 아무것도 없어, 도대체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어.
핑계 Ⅱ : 왜 나한테는 기회가 안 오는 거야? , 왜 이리 자식복이 없을까?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겠어?,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걸 어떡해, 나 실연당했어, 상사를 잘못 만났어, 부하직원들이 하나같이 맘에 안 들어, 보고 배울만한 사람이 없어, 사내자식이 어떻게 그런 걸 해? 내 얼굴로는 절대 성공 못해, 미안해 깜빡했어.
핑계 Ⅲ :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이겨,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 난 중학교 밖에 못 나왔어, 사람들은 내 말을 무시해, 사람들은 내 흉터만 봐, 가족이 아니라 웬수라니까, 이 일은 적성에 안 맞아, 난 부양가족이 너무 많아, 너무 늦게 철들었어, 지금은 너무 바빠, 다음에 할 게.
▶ 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핑계를 대기를 시작했습니다. / 그들은 “당신의 잔치에 우리는 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갈 수 없습니다 / 그리고 그들은 바보 같고 사소한 핑계들을 댔습니다. / 온갖 종류의 핑계들이 고안됐습니다.
한 남자는 땅 한 덩어리를 샀습니다. / 그리고 그 땅을 보러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습니다. / 나는 그것들을 시험해보기 위하여 갑니다. / 제발, 저는 빼 주세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도록 그 따위 사소한 것이 그 사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
또 한 사람이 “나는 결혼을 해서 나는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글쎄요, / 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조금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절대로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조차도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오지 않는 것에 대한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는 모두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핑계 가장 피해야 핑계거리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원망입니다.
하나님과 진흙탕 / 두 아이가 진흙탕 속에서 온몸을 더럽혀 가며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엄마가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말을 안 들었습니다. 엄마는 화가 나서 애들을 불러서 야단을 치려니까 네 살짜리가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하나님이 비를 내려 진흙탕을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가 거기서 놀지 않았을 게 아니에요?”엄마는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아이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만 않으셨다면 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살짜리 사내아이가 한 말이기에 재미있고 깜찍하게 들렸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자주 이런 식으로 변명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말썽만 피우지 않았다면 나도 야단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이해만 해주었다면 그렇게까지 바가지를 긁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지만 않으셨다면 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핸드폰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핑계를 댄다고 합니다.
“지하에 있었어, 건전지가 다 나갔나 봐, 차 안에 있었어, 꺼 놓아서 못 받았어, 집에다 놓고 나왔어, 전화 걸만한 데가 없었지 뭐, 진동으로 해놓았는데 못 들었어, 그동안 출장 갔었어, 메모리가 풀이라 못 받았어, 왜 연락 못 받았지? 내 핸드폰은 가끔 이래, 어, 그게 너였니? 이상한 번호가 찍혔더라구, 잤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핑계 빼면 시체다”
■ 양계장을 운영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교회출석은 열심이었으나 도무지 헌금을 드릴 줄 몰랐습니다. 하루는 담임목사가 조용히 여인을 불러 타일렀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여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목사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이제부터 주일에 낳은 달걀을 모두 십일조로 드리겠습니다.” 여인은 그때부터 매주 수백 개의 달걀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점점 달걀의 수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단 하나의 달걀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담임목사는 다시 여인에게 성실한 십일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닭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때문에 주일은 알을 낳지 않습니다.”
■ 네 탓이오! / 어느 날 ‘내 탓이오’라고 쓴 스티커를 차 뒷유리에 붙이고 다니는 차를 보면서 친구에게 농담 삼아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아니! 자기 눈앞에 저 스티커를 붙여 놓고 ‘내 탓이오’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왜 뒷사람에게 잘 보이게 붙이고 다닐까? 저건 완전히 ‘내 탓이오’가 아니라 ‘네 탓이오’라는 말이잖아! 그랬더니 친구가 익살스럽게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해주었습니다. “앞에 있는 거울로 보면 스티커의 뒷면이 다시 거울에 반사되어서 ‘내 탓이오’라고 바로 보인다.” 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남의 탓으로 돌리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어린아이가 뛰어 놀다가 가구 모서리에 부딪혀 울고 있노라면 어느새 할머니가 얼른 달려오셔서 아이의 아픈 부분을 쓰다듬어 주시고는 곧잘, “예끼, 우리 손주를 누가 그랬어?” 하시면서 애꿎은 가구를 때리는 모습을 요즈음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애들이 신나게 뛰어 놀다가 방바닥에 넘어져서 울고 있으면 우리네 엄마들은, “예끼!”를 연발하며 말 못하는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우는 아이들을 달래주곤 합니다.
◘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이라고 해서 핑계거리가 없었겠습니까?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야말로 뱀같은 지혜를 가진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안 받치기 위한 핑계와 이유가 적어도 몇 가지는 되었을 것입니다. 만들면 만들수록 핑계는 나올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핑계거리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1) 하나님의 약속 / 이삭을 받치라고 하셨을 때, 얼마든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틀리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과 같이 후손을 많이 주겠다고 하셨는데, 지금 이 자식을 바치라시면 그 약속이 틀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알았다! 취소하자!” 이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2) 사라의 마음 /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이 떨어질 때, “하나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다를 것입니다! 제 아내를 설득시켜 놓고 받치겠습니다!” 식구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논하고 실행하여야 할 때도 있지만 아브라함은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마음 변하기 전에 아침 일찍 일어나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브라함 혼자 것이 아니고 아내인 사라의 아들도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문제는 최소한 자기 부인과는 상의를 했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죽여서 제물로 바치기 때문에 마지막 작별의 인사라도 시켜야 하는 것이 사람의 인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더 큰 선한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고 아내 사라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말했다면, 틀림없이 “여보, 제가 지금까지 당신에게 순종하지 않았소? 거짓말하라고 하면 거짓말하고, 누이 동생이라고 하여 고생도 하고 지금까지 내가 거역한 적이 없는데, 이것만은 죽어도 안 되겠소! 차라리 나를 잡아가십시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어찌 어미가 자식을 죽는 자리에 내보낼 자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좋은 아내 사라였기에, “안 돼요. 어떻게 산 자식을 제물로 … . 당신 미쳤어요?”라는 앙칼진 목소리보다는 “그리 마옵소서. 꼭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까? 좀 더 기도해보고 드립시다.”라고 정중히 거절을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에 방해되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의논하지도 않고 지체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을 미루면 대부분 사단이 그동안 공격할 틈을 주어 순종하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 대부분 사람과 의논하거나 교회에서 회의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이 지연되고 순종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순종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3) 이웃의 비웃음 / 이웃이 “아니, 100세에 아들을 주시더니 뭐 또 빼앗아 가네? 웃기시는 하나님이시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심심하면 주셨다가 또 심심하면 빼앗나봐?” 하면서 조롱과 핍박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겠습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아내인 사라도 그렇게 말했겠지만 아브라함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런 핑계를 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할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모세도 이러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출 32:11-12 /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여호와께 화를 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애원하였다. `여호와여, 주께서는 그토록 강한 팔을 휘두르시고 놀라운 힘을 드러내시어 이 백성을 애굽 땅에서 밖으로 끌어내 주셨습니다. 이 백성을 아끼시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 백성에게 그토록 화를 내십니까? 12) 애굽 녀석들 입에서 ‘여호와가 그 백성을 데리고 나가 산에서 죽이고 땅 위에서 싹쓸어 버렸다.’는 말이 나올까 두렵습니다. 주님, 제발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소서. 제발 분노를 그치시고 내리시던 재앙을 거두어 주소서.
4) 번제물의 내용
“하나님 본래부터 양이 제물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언제 식성이 바뀌었습니까?”하면서 항의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모세를 통해 주신 5경에도 자식을 제물로 삼아 드리라고 하신 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는 번제물이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까? 이것이 전례가 된다면 앞으로도 사람을 번제물로 드려도 된다는 말입니까?
5) 이삭의 질문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묻습니다. 불하고 나무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그때 아브라함은 서슴없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았다!” 이때 아브라함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여서 이삭으로 하여금 도망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 아이가 안 물어보면 내가 가만히 있겠는데? 물어보는데 어찌 믿음의 조상이 거짓말을 합니까?”하면서 말해 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 안 할 수 있는 핑계거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6) 하나님의 요구는 너무 의외였고, 가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해서 제 삼일에 지정된 장소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번제드릴 장소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매우 무거웠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산아들을 묶는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요 괴로움의 극치요 최후의 결정입니다(실제적인 헌신). 지금까지는 믿음으로 이곳까지 올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들을 잡아 단에 눕히고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는 행동뿐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분명히 보여야 합니다. 행함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보일 헌신입니다. 최후의 갈림길에 어찌해야 할 것인지는 우리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그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시험을 주는 것은 학생들을 애먹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의 실력을 평가하고, 실력을 향상시키기며, 애를 쓴 만큼 상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신 8:16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막으로 인도해서 고생을 시킨 것은 그들을 “낮추시며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하심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약 1:2-4에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뻐하십시오. 험난한 길은 여러분에게 인내를 기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인내력을 기르십시오. 여러 문제가 닥쳐올 때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지 마십시오. 인내력이 충분히 길러지면 여러분은 완전히 성장해서 어떤 일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벧전 1:6-7에서 “그러므로 진심으로 기뻐하십시오. 이 세상에서는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으로 괴로움을 당하겠지만 앞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련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고 순수한 것인가를 보고자 하는 시험에 불과합니다. 마치 금이 불에 정련되어 순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믿음을 어찌 닳아 없어질 금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불과 같은 시련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도 강한 믿음으로 남아 있을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많은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달게 받아야 합니다.
▶ 본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한 곳을 향해 떠납니다. 자식을 죽여야 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리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명령이라 해도 고민하고 몸부림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엄청난 명령을 받고 나서도 이상할 정도로 아침 일찍 일어나 종들과 함께 아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모든 열악하고 부정적인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그 명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이란 순종을 통해서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미적미적 할 때에 사단이 찾아옵니다. 머뭇거리고 환경을 쳐다 볼 때 불평의 싹이 트고, 핑계거리가 생겨나며, 방황의 먹구름이 덮이게 됩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인간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지만 무조건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아브라함은 고민하거나 지체하지 않고 즉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갑니다. 감당할 수도, 순종할 수도 없는 명령이지만 끝내는 순종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믿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명령을 내리시든지 감당할 수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이유 없는 순종입니다. 믿음은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크라이막스는 순종일 뿐입니다. 믿음은 한번 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해 놓고 결과를 보자가 아닙니다. 무조건 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회가 없는 것이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순종을 보기 원하십니다. “너를 포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네 아들까지 포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순종은 여호와 이레의 복을 낳습니다.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기다리는 복, 예비되어 있는 복을 얻을 것입니다.
순종하기로 결단하시는 여러분의 앞길에 여호와 이레의 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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