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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믿음과 거짓 믿음
(야고보서 2:14-26)
(믿음은 참된 믿음이고, 믿음은 거짓된 믿음의 표시임)
※ 성경구절들은 ‘성서원’ 발행, ‘현대어성경’에서 인용
믿음(信仰)과 신념(信念)의 차이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 기초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신념은 자신에게 기초하고 자신 스스로가 믿음이 있다는 것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믿음이 왜곡되어져서 신념이 믿음인양 착각하는 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 믿음과 신념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념은 자기 느낌이나 자기 가능성과 계획과 자기 목적이 중심에 있다면, 믿음은 성령의 조명 가운데 신격체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 부활, 그 기록된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함에서 출발한다. 믿음이 신념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신념 자체가 믿음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신념은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신념이 바로 다루어져야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된다.
例 : 무슨 독을 마셔도 헤치지 못한다는 말씀을 굳게 믿고 신념을 끌어올린 후 독극물을 마시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처럼 기도를 열심히 해서 물 위를 걸을 줄 믿고 물에 들어간다면 필시 빠질 것이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걸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 정말 주님이시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라고 할 때, 예수께서 ‘오라’고 하시는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물 위를 걸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신념은 느낌을 따라가기에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베드로도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는 베드로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오라고 하신 예수님)에서 환경인 바람과 풍랑이 일자 무서움이라는 느낌,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믿음의 능력이 사라지고 말았다. 왜 그럴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 자기 느낌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념이다. 신념적인 믿음을 가지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느낌과 환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외골수로 빠지기 쉽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신념은 신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신념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신념 이상의 것이다.
▶ 오늘날 많은 경우 믿어질 때까지 기도하고, 강단에서 ‘믿습니까?’라고 강하게 말하면서 믿으라고 한다. 문제는 이런 식의 가르침이 신념적인 믿음, 세뇌적인 믿음을 갖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믿음은 단지 이론적인 성경지식에 불과할 뿐이다.
신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께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고, 상대방을 변화시켜 주시면 믿겠다고 기도한다. 신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신격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일의 성취나 환경과 문제가 해결될 것을 감성적으로, 의지적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믿음에 이런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느낌이나 일의 성취와는 무관하게 한결같이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성경적인 믿음이 하나님께 근거를 둔다면, 신념적인 믿음은 자기감정과 느낌에 근거를 둔다.
당연히 신념적인 믿음은 자신의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반면에 성경적인 믿음은 자신의 상태보다 하나님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므로 믿음의 출발은 하나님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하실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성경적인 믿음은 그 동기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신념적인 믿음은 동기가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신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위해 알라딘의 램프의 거인처럼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닌 자신으로부터 출발된 신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필연적 또는 신념적 믿음의 한계에 부딪히고, 심지어 그 신념적 믿음조차 포기하거나 아니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자기 나름대로의 적당한 거리를 두는 정도의 종교적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반면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주어진 것이기에 어떤 한계상황에 부딪혀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더욱 강해진다.
▶ 오늘날 ‘무조건 믿어라’, ‘덮어놓고 믿어봐라’하는 방식의 가르침 가운데 노출된 교인들은 참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믿음이 있는 척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임을 전제한다. 인간인 우리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 논쟁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히 11:6).”는 이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을 분명히 사실적이고도 실제적으로 알고 믿어야 함을 의미한다. 성경적 믿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신념적인 믿음은 하나님을 관념적으로, 감정적 수준으로, 막연한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에 관해 아는 성경지식이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상당수가 여기에서 신념적인 믿음으로 빠진다. 신념적인 믿음은 자신의 상태나 느낌 그리고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기복이 심하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커다란 문제나 역경이 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한다. 물론 성경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도 큰 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노출될 때 잠시 하나님을 오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치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잠시 원망하는 것일 뿐 곧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로 돌아온다.
신념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그 뜻을 묻기보다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극복해 보려하고 이마저도 안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기도 하다.
믿음에 신념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념적인 믿음을 갖게 될 경우, 언뜻 보기엔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그 중심은 매우 복잡하고 기복이 심하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제자들에게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것도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가도 자신들의 신념과 느낌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기까지 제자들은 믿음의 실패를 거듭했다. 그리고 부활을 바탕으로 한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자 굳건한 믿음에 설 수 있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깊이(포도나무와 가지,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종교적인 열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신선하고도 친밀하게 만날 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화로운 역사 가운데 온전히 노출되어져 믿음이 자라나고 온전한 믿음 갖게 되는 것이다.
▶ 문제는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너무 많은 것을 허비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의 친밀하고도, 사랑스러운 교제 없이 믿음이 바로 설 수 없다.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신념적인 믿음은 세상 일의 성취나 행복해지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사람은 샤머니즘적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산에 오르다 돌탑을 쌓고 복과 안녕을 구하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섬긴다. 당연히 자기 의를 가지고 정성을 드리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기고 하나님에 대해 종교적인 두려움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께로만 주어진다. 그래서 믿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例 : 한 아버지가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아이를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했어도 고쳐지지 않자 예수께 찾아왔을 때 믿음 없는 모습을 보였다. 예수께서 책망했을 때 ‘믿음 없음을 용서하시고 믿음을 달라’고 고백했듯이, 사실 신념적이고 느낌적인 믿음을 가지고 믿어지지 않는데 믿으려고 인격적인 감정을 끌어올리기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기도를 통해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성경적인 믿음은 확신을 동반하며 신념을 동반하지 않는다. 확신 안에 신념의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신념이 확신케 만든 것이 아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케 하시는 것을 성령의 조명을 통해 확신케 되고, 이 확신이 믿음의 행동에까지 이어진다. 우리의 믿음은 철저히 신격체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출발되어야 하고 성령의 조명 가운데 믿음이 굳게 세워져야 한다. 믿음은 결코 자생적이거나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믿음은 어떤 사실에 대해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다.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성령)에 근거한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신념적인 믿음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짜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신념의 경계선에서 혼동하지 말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야 한다. 애굽을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 앞에서 인도해 주시기를 소원한다.
신념을 근거로 일컬어지는 믿음은 느낌에 의존한다. 그래서 느낌을 통해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한다. 종교적인 느낌이 좋을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거나 없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해 믿음이 좌우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다. 도마처럼 믿음의 기반을 느낌(요 20:25)에 둔 신자들이 의외로 많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것이 진리라고 말씀하셨으면 진리로 믿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느낌에 기초를 두면 인간 본성에 녹아있는 종교적 믿음 즉 자연적인 믿음, 샤머니즘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성경적인 믿음이어야 한다.
2. 거짓 믿음을 분별하라.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바로 알지 못하면 믿음이 아닌 것을 붙잡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문제는 믿음이 아닌 것을 붙잡는 순간 잘못된 신앙생활과 믿음의 헛수고를 할 뿐 아니라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성경을 보면 거짓 믿음을 가지고도 참 믿음을 가진 것으로 여기며 살았던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야훼신앙 중심으로 하나님 편에서 말씀을 선포했을 때마다 거짓신앙과 거짓 믿음을 가지고 있던 거짓 예언자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던 많은 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 예언자의 예언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핍박했다. 예수님 당시에도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 역시 자신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있고 율법 또한 완전하다고 믿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 율법을 믿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이 믿는다고 여겼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짓 믿음은 무엇일까?
1. 종교적 열심 자체가 믿음은 아니다.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예배와 기도와 봉사와 같은 의식을 온전히 행한다고 해도 그 자체가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열심이 곧 믿음이라는 의식이 대다수 교회에 가득 차 있다. 물론 ‘열심’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떠난 자기 열심 때문에 성전을 삼켜버리고 하나님께 신성 모독하는 삶을 살았듯이 열심 자체가 믿음을 증명해주지 못한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을 때 참 믿음인지 거짓 믿음인지가 분명히 구분된다.
바리새인들은 열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열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참 믿음이 없는 열심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와 같음을 명심하자. 신격체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열심은 영적 파멸로 이끈다. 문제는 열심이 곧 믿음이라는 의식 속에는 자기 의를 기초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복을 받고 형통하게 된다’는 ‘공덕(功德)주의 신앙’이 뒤에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배설물에 불과함을 분명히 했다(빌 3장).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도 매우 열정적이고 열심 있는 자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스스로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그들에게 주어져서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의존함이 열심히 나타난 것이다. 이 열심은 복음적 열심이자 십자가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온 정성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큰 성과를 내어도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처럼 열심이 있는 신자들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열심을 따라가다가 신격체 되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쉽게 잃는 경우도 있다. 그 열심은 봉사를 위한 봉사, 예배를 위한 예배를 하다가 영적 공허함과 침체에 빠지기도 하고 혹 어떤 성과라도 내게 되면 영적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매우 증오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적 열심이 없어서 하나님께 대적한 게 아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이 신격체 되신 하나님, 성전의 주인이시자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성전에서 떠나시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성전에 계시고 성전이 있는 한 이스라엘은 멸망치 않는다는 왜곡된 신앙에 빠지게 만들어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했다. 믿음의 열심은 귀한 것이다. 만일 열심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잠시 자신의 열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우러러 보시라. 그리고 하나님께로 오는 음성을 들으시라.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열심을 가졌다. 그 열심의 중심에는 십자가의 은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핍박과 환란, 배고픔과 추위, 심지어 순교까지 했다. 그러한 열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어준 하나님의 열심에 근거한 것이다.
2. 지식적인 동의가 믿음은 아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사실을 지식적으로 동의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긴다. 물론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지식적인 동의를 뛰어넘는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다. 믿음의 유일한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이론으로 알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즉 성경적인 지식까지도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바리새인들도 구약성경에 능통하고 성경적인 지식이 대단했지만 신격체 되신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지 못했다.
요 5:46-47 /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세가 나에 관해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러나 너희가 모두 모세의 글을 믿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히 받아들였고 율법의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음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믿음이 없다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의 믿음이 식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무 믿음도 없다고 하셨다. 재미있는 사실은 바리새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여겼다는 점이다. 사실 거짓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믿음이 전혀 없었던 그들의 종교적 의식과 열심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을 대체해 버렸다. 종교적 이론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을 대체하자 필연적으로 외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말씀을 읽는 분들 중에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바리새인들이 본래 문제가 있었기에 잘못된 믿음을 가진 것이지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이론적인 지식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한다면 곧 믿음을 가진 것으로 믿음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를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 즉 교리는 정통인데, 믿음은 없거나 죽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믿음이 사실적이자 실제적으로 역사되지 못하는 이유도 이론과 지식이 성경적 믿음인양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믿음은 성령의 조명 아래 신격체 되신 하나님을 먼저 경험으로 아는데서 시작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믿게 된다.
죽은 정통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이론이나 교리가 신격체 되신 하나님이 서야 할 자리에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을 말한다. 이런 믿음에는 참 생명이 없다. 영적으로 타락하면 죽은 정통주의에 빠지고 믿음을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교리를 믿는 것으로 대체한다. 이런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지식과 교리도 중요하다. 신격체되신 하나님을 보다 깊이 알게 하는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교리가 믿음의 본질을 앞설 수는 없다.
아래 말씀을 바로 이해하면 믿음을 바로 이해할 것이다.
약 2:19-20 /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런 당신도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믿겠지요? 맞습니다. 악마도 그걸 알고 있기에 공포에 떨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20)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언제쯤에나 깨달을 작정입니까?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참다운 신앙이 아니다.
여기에서 귀신들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귀신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크심과 능력으로 인해 떠는 것이다. 귀신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참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닌 것처럼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안다고 할지라도 신격체 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이 없다면 믿음이 아니다. 전능하시고 공급하시며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이 교리에 머물고 성경적 지식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2장 17-29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믿음을 질타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말씀대로 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말씀을 대면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잘 알고 성경에 통달했다고 하더라도 말씀 앞에 정직히 대면하여 서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이론으로 끝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열심도 있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없이 종교적인 의를 내세우고 의식을 지키는데 연연했다. 지식적인 믿음의 한계는 새로운 지식을 의존하기 때문에 설교에 새로운 것이 전해지면 그것을 깨닫고 알았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지만 설교의 내용이 다 아는 것이면 곧 싫증을 낸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에 관해 알고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서지 않으면 그 믿음은 가짜이다. 단순히 지식적인 동의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신격체이신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고 신앙고백까지 이어져야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며, 이 믿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만큼 자라간다.
약 2:21-22 / 우리 조상 아브라함까지도 아들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기쁨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22) 아브라함은 조그마한 의심도 없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기쁨으로 복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가 실제로 취한 행동과 선행으로 완전해진 것이다.
약 2:24-26 /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반드시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잘 새겨 두어야 한다. 25) 창녀 라합의 선한 행동이 좋은 예이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 두었다가 다른 길로 안전하게 보내주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26) 영혼이 들어 있지 않은 몸이 죽은 몸인 것과 마찬가지로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3. 환경에 좌우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보다 환경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환경을 초월한다. 환경이 이끌고 나가는 방향에 의해 믿음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으로 나가는 것이 믿음이다.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환경보다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믿음과 반대되는 환경이 조성되더라도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한다.
출애굽한 광야 1세대가 환경에 의존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환경이 좋을 때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살다가 환경에 문제가 생기면 믿음이 아닌 불신앙에 빠졌습니다. 환경에 근거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많은 신자들이 환경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긴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세상 사랑을 같이 하려는 태도가 환경에 의존하는 믿음이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이러한 것들을 청산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신뢰하라고 가르친다. 믿음은 환경에 절대로 기초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니라 환경과 세상을 의지하는 것은 불신앙이다.
시 78:14-17 / 낮에는 구름으로 저들을 이끄셨다. 밤에는 불빛으로 저들을 인도하셨다. 15) 빈들에서 바위를 쪼개시어 깊은 샘에서 나는 것 같은 엄청나게 많은 물을 마시게 하셨다. 16) 바위에서 시내가 흘러나오게 하시어 강처럼 물이 흐르게 하셨다. 17) 그런데도 그들은 거듭거듭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다. 빈들에서 지존하신 이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환경을 의지함으로 광야에서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배반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보다 이방나라를 의지하는 것을 불신앙으로 보셨다.
시편 106:12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다루고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말씀을 믿고 찬송까지 불렀음에도 극한 환경에 노출되면 즉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불신앙에 빠졌다.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주어질 때는 하나님을 믿는듯하다가 환경에 문제가 생기면 불신앙에 빠졌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환경을 믿은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려면 경건의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모세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환경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4. 긍정적 思考는 믿음이 아니다.
‘긍정적인 사고’는 긍정적 믿음이라는 것으로 덧씌워져서 공공연히 강조되지만 믿음의 출발 자체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자기를 부인하는 인식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러한 자기 긍정적인 믿음은 사실 믿음이라기보다는 심리적 자기 암시나 자기 신념에 불과하다.
물론 자기 긍정적 사고가 좋은 영향도 끼치지만 하나님 없는 자기 긍정, 하나님 신뢰가 없는 자기 긍정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자기 긍정의 믿음에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 없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언뜻 보면 하나님을 강조하지만 자신을 믿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대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런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와 의지보다 자기 의지나 생각이나 꿈을 크게 갖고,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생각을 가지고 밀어붙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즉 믿음을 자신에게서부터 찾으려는 자기 긍정의 믿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적인 야망과 성공에 집착하게 된다.
▶ 한국교회에서 자본주의 성장논리가 만연하게 되자 믿음도 물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믿음의 영향력을 얼마나 물질적 부와 성공을 했느냐에 따라 평가한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성공한다는 것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하나님 앞에 자기 부인함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찾아볼 수 없다. 자기 긍정적인 믿음은 자기만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중요시 여긴다.
그러기에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도 많은 경우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자아가 깨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기 부인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놀이에 불과하다.
▶ 믿음은 하나님이 앞서가심을 보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먼저 자기가 계획을 세워놓고 열심히 기도하며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이 그들에게 약속으로 보이자 그 약속에 반응한 것이 믿음이었다.
그러나 자기 긍정적인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기록된 약속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장하면 무엇이든 된다고 한다. 한 걸음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좋은 말을 취해서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긍정적인 믿음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당연히 자기 긍정적인 믿음은 자신의 마음의 확신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부정적인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좋은 말만 하라고 가르친다. 만약 부정적인 생각, 의심이 있게 되면 믿어질 때까지, 확신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자기 긍정적인 믿음은 자기 힘, 기쁨, 목적, 중심을 결코 내려놓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에서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복과 은혜 되는 말씀을 붙들면 자동적으로 축복이 온다고 여긴다. 이런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믿음을 자기 마음의 상태에 두기 때문에 그 초점이 하나님께 두기보다 자신에게 두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께 기우는 것이지 자신에게 기우는 것이 아니다. 사실 자기 긍정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깨어지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멍에를 맬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긍정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자기 긍정은 우리의 자원과 능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평가에 의해 자기 긍정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긍정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함 속에 주어진다.
자기 긍정적인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이루어달라고 열심히 기도한 후 하나님이 그렇게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밀고 나간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계획을 세워서 일을 추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뒷받침하실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기 마음대로 계획을 세워 밀고 나가다가 문제 가운데 많이 넘어진 경우를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영적 문제가 일어난다.
자기 긍정적 믿음을 가지고 사역을 하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인간적 수단과 방법을 해서라도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고 한다. 교회가 세상과 진리 앞에서 갈등해야 함에도 대중적 신앙, 대중을 따라가는 교회는 사람이 많이 모이고 큰 성과만 있다면 무엇과도 타협한다. 세상의 온갖 죄악과 문제가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은 이처럼 믿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기 과신을 교만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도 안에 자기 부인(否認)과 자기 죽음을 경험한 후에 오는 은혜 아래 자기 긍정, 즉 하나님의 긍정이 믿음의 역사를 일으킨다.
▶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은 믿음 아닌 것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의심하는 믿음, 외식하는 믿음, 거짓된 신앙체계를 중심으로 한 믿음, 기복신앙, 율법주의, 인본주의 그리고 신비주의와 죽은 정통주의 등과 같은 죽은 믿음이 너무나 팽배해져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믿음을 반드시 분별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바로 서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을 때 가능하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믿음보다 불신에 더 끌린다.
찰스 스탠리 목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생계획’이라는 책에서 믿음을 방해하는 요소를 5가지로 말하고 있다.
1. 초라한 자아의식이다.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자신의 현재 모습에 집착하는 것이 믿음을 방해한다.
2. 하나님에 대한 무지이다. 하나님을 거룩하시고 살아계심을 체험하지 못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에 믿음으로 출발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의심이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할 때 하나님의 개입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4. 무능력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무능력에 초점을 맞추면 의심, 불안, 염려로 믿음이 저지되고, 반대로 자신이 능력 있고 강하다고 여기면 하나님을 의지하기 어렵고 이대로 믿음이 무력해진다.
5.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무기력하게 만든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패를 경험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롬 1:17 / 이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 곧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인정해 줄 자로 만드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 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행위, 열매가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을 방해하는 요소는?
1. 의심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나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한 의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한 것인지에 대한 의심,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의심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 의심하는 것에 큰 죄책감을 갖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이 아이를 25년간 낳지 못했을 때 아들 낳는 것을 포기하고 엘리에셀 혹은 이스마엘에게 후사를 잇도록 하려 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의심을 했지만 극복했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성경의 인물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의심이나 흔들림이 있었다. 다만 이런 의심을 믿음으로 극복한 것이다. 욥 또한 이러한 의심에 노출된 적이 있었고 이를 극복했다.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로 의심과 관련된 단어가 6번 나온다. 의심은 일반적으로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마음을 뜻한다. 성경에서 의심은 두 입장 사이에 서서 확실히 결정하지 못함이나 당황과 궁금함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야고보 사도는 의심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 이유는 간청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동생 유다도 신자들에게 의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라고 권면했고(유다서 22절),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 14:28-31 /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정말 주님이시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29) ‘걸어오너라.’ 주님이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예수를 향해 물위를 걸어갔다. 30) 그러나 물결이 높이 이는 것을 보고 무서움을 느끼는 순간 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란 베드로는 ‘살려 주십시오, 주님!’ 하고 소리쳤다. 31) 예수께서는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들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나를 의심하느냐?’ 하시고
이 말씀에서 보듯이 믿음이 약해지거나 적을 때 의심이 따른다. 사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불신하는 자들이었다(요 10:24). 의심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다른 용어들로 비슷하게 사용된다. 예수님이 청중들에게 ‘염려하지 말라’(눅 12:29)고 하신 것처럼 동요함이나 의문, 걱정과 절망과 불신의 상태가 의심과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모든 의심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의심 후에 승리를 체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경의 인물 중에 ‘의심’하면 도마를 떠오른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의심했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야 의심이 사라졌다. 대신 예수님에게 책망을 들었다.
사실 의심의 역사는 깊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것도 사탄의 말에 속아 하나님의 진실됨을 의심했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은 믿음보다는 의심에 강하게 끌린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잘 아시기 때문에 친히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의심의 싹을 잘라내신 것이다. 결국 믿음은 의심을 충분히 이기고 극복케 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고백했던 한 아버지처럼 의심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놔야 한다. 그럴 때 의심이 물러난다(막 9:24). 다시 강조하지만 신앙적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적 의심에 대한 오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해이다. 성경을 읽다보면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따랐지만 때때로 갈등하고 의심도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이런 의심을 믿음으로 극복했다는 사실이다. 성경 곳곳에서 여러 사람이 의심했던 것을 본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필요한 것이다. 무조건 의심이 믿음의 반대이며 불신앙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의심이 불신앙의 방향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티스(pistis)와 불신앙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티아’(apistia)가 있는데, 사실 의심은 믿음이나 불신앙 중 어느 것도 아니다. 의심은 난처함, 걱정, 동요, 약한 믿음과 같은 개념을 내포한다. 의심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불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의심은 신자들이 믿음의 여러 형태나 단계에서 갖게 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의심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편 44편을 보면, 시편기자의 신앙적 동요로 인한 의심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의심을 하나님을 더욱 알고 사랑하는 자원으로 삼았다. 신앙적 회의감에 빠진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제멋대로 하는 사람보다 상당수가 열심있는 사람들로 누구도 자신의 믿음이 의심으로 흔들리기를 원치 않는다. 이런 신자들에게 있어서의 의심은 영적 성장을 돕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의심은 믿음의 증거를 가질 때 극복하게 되고,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속에 경험으로 알 때 의심은 믿음 성장의 동력으로 사용된다.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만을 믿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된다(롬 6:20-23). 하나님은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만한 증거를 주신다.
믿음 자체가 무엇인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는가?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닌가(히 11:1).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충분한 증거를 제공하신다.
사실 우리가 의심하게 되는 것은 외적인 문제보다는 자신으로 하여금 회의(懷疑)하도록 방치할 때 생긴다. 자신이 계속 걱정하도록 내버려두면 의심이 찾아든다. 그렇기 때문에 회의와 염려의 틈을 믿음으로 메워 우리의 정서와 행동까지 바꾸어야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광야 1세대와 같은 의심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의심이나 감정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롬 7:21-8:11, 슥 4:6). 의심 자체를 죄악시 하지 말고 믿음의 또 다른 얼굴인 의심을 굳건한 믿음 위에 설 수 있는 토대로 만들어야 한다.
의심이 들 때 기도하고(빌 4:6, 벧전 5:7), 말씀을 묵상하며(시 48:9. 63:2), 하나님을 찬양 경배해야 한다. 반복적인 신앙적 의심이 깊어져 신앙의 일부나 전부를 포기하거나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도록 의심이 뿌리박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사랑할 때 고통스러운 의심을 넘어 성장하게 된다. 하나님께 더욱 뿌리 내리기를 힘써야 한다. 그렇게 되기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2. 자기중심적인 태도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이 타락한 후 믿음보다는 불신에 더 끌린다. 이런 타락한 본성이 하나님과 갈등하게 하고 대적하도록 만든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가지면 하나님보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하기 때문에 자신을 높이기를 원한다. 여기에서 주술적이고 기복주의적인 믿음이 나온다. 자기 야망과 욕심이 왕 노릇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을 좇는다.
믿음은 하나님이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라고 하는 절대적 차이에서 나온 결과인데, 자기 과신에 사로잡혀 하나님 없이 살려고 바벨탑을 쌓기도 한다. 자기방어를 위해 자기중심적인 관점과 편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를 변호하려고 한다. 마치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성전에 올라가 자신을 과시하며 기도하는 바리새인이나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한 달란트 맡은 종처럼 말이다.
마 25:24 / 이번에는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씨를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어들이고 심지도 않은 데서 모아 들이는 인색하고 매정한 분이신 줄을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제가 이익을 남기더라도 빼앗아 갈 것이므로 돈을 다만 땅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가지고 자기 기준, 자기 과신, 자기 욕심, 자기 변호, 자기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 당연히 하나님과 충돌하게 된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내려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기준이나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기보다는 자기 의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방법보다 자기 방법을 선호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바로 알고 서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3. 잘못된 신앙이다.
오늘날 많은 경우 신념과 종교적인 믿음이 성경적인 믿음인 것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잘못된 신앙으로 인해 믿음이 오염되거나 변질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이다.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가 내려지지 않고는 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참 믿음을 가지려면 세 가지 잘못된 신앙을 극복해야 한다.
1. 율법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율법주의는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리고 육신을 의지하여 자기 의를 드러내도록 한다. 아무리 부분적으로 자기를 의지한다고 해도 전적으로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우월감과 반복적인 죄책감을 오간다. 또한 영적 안식 안에 있는 자유로운 긴장감이 없이 안일함과 나태에 빠지고, 전통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보다 심지어 신격체 되신 하나님보다 자신의 종교적 행위를 신뢰한다.
암 6:1 / 시온성 안에서 안전하다고 떵떵거리며 사는 자들과 사마리아산 위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은 재앙을 만나게 되었다. 세계 만민들 중에서 일등 민족에 속하게 되었다고 으스대는 이스라엘 집의 세도가들이 망하게 되었다.
또한 율법주의에 빠지면 자기 의에 빠져있기에 배우려는 자세가 없다. 결국 외식하는 신앙으로 전락하고 형식적으로 예배, 봉사, 헌금을 한다. 예수께서 율법주의에 빠진 바리새인들이 믿음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셨듯이 율법주의라는 모판에서 믿음은 절대로 자랄 수 없다(요 5:46-47).
2. 기복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영적으로 타락하면 믿음이 변질된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기복주의에 쉽게 빠집니다. 기복주의 신앙의 특징은 탐심이 가득하여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렘 6:12-15). 또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많은 헌신과 봉사와 희생을 드려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보다 자신이 앞서 있기 때문에 이것은 거짓된 사랑이다.
기복주의는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이다.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물질에 연연한다. 그것은 탐심에서 기인한다. 탐심은 우상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기복주의는 탐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 자신이 복이시다. 신명기 30장에서 하나님은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 중에 복과 생명을 택하라고 하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이요 복이다.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목적이 되기 때문에 섬기기를 원하신다.
기복주의 신앙에 빠지면 하나님이 도깨비 방망이가 된 것처럼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 하나님과 거래를 하면서 정성 드려 하나님을 섬기면 복 주셔야 한다는 마음이 사로잡고 있다. 자기 목적과 목표 그리고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설교와 기도를 원한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목적과 목표를 내려놓고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목적과 목표와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헌신한다. 이런 것에 하나님은 환멸을 느끼신다.
렘 14:12 / 그들이 이제는 아무리 오랫동안 금식을 하고 기도를 해도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겠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번제물과 곡식예물을 가져다 바쳐도 그것으로 내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나는 이제 오직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들을 전멸시키기로 작정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자기 목적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그릇된 신앙이다.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3. 인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어느 때인가부터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 되어버렸다. 많은 목회자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여 신자들에게 만연해 있는 죄와 불순종을 다루지 못하고 어떻게 하든 자기 교회에 나오게 하려고 이런 것들을 애써 외면한다.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고 듣고자 하는 설교나 복을 전하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윤리나 처세를 그리고 즐거움을 주는 설교는 결국 양과 목자 모두 병들게 만든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 세상에 있을 법한 죄가 만연하고 교인들 간에 반목과 후욕이 난무하다. 무엇보다 세상을 이길 능력도 상실해 버리고 온갖 눌림과 고통 가운데 있게 된다.
이런 인본주의가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성장제일주의와 맞아떨어져 인간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을 좇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보다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교회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지기보다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예배 또한 성령의 강한 인도와 하나님의 임재보다는 프로그램과 사람에 의해 진행되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라고 하지만 인간의 만족을 위한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떻게든 교인들이 감동하고 만족하는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 화려한 건물과 돈을 주고, 지휘자와 찬양대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고용해서 찬양을 드리고, 온갖 첨단 장비를 이용해 예배 분위기를 조성한다.
문제는 여기에 성령의 주도하심과 인도하심이 배제된다는 사실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설교는 20분을 넘겨서는 안 되고, 전체 예배시간이 50분 안에 끝나면 센스가 있는 예배라고 여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갈망 그리고 기대가 아닌 예배드린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
어떤 신자들은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돌이키려고 노력한다. 또한 목회자들 중에서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여서 이런 병폐들을 설교하고 고치도록 노력하지만, 삶과 교회 사역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기준과 방법이 아니라 기존에 사용하던 인본주의적인 방법들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수 없다.
이사야 54장과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 언약의 대표자인 이삭과 율법주의에 대표자인 이스마엘의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아들로 인본주의에 대표적 인물이다. 이스마엘의 삶과 신앙은 인본주의로 흘러 하나님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 인간적 수단과 방법과 야망과 목적을 버리지 않고는 인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도록 하나님을 구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준과 길과 방법에 서기를 추구하기보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 자신들이 세워놓은 것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많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조종하여 자기편에 서게 하고 교회의 필요를 채우도록 한다. 또한 교인들도 목회자를 통해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인간적인 관계를 갖는다. 하나님 앞에 고민하고 하나님의 길로 조정하도록 기도하며 기다리기보다 서로의 필요를 위해 회유하거나 협박까지 한다. 목사 쪽에서는 교회를 나가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고 교인은 교회를 나가겠다고 협박을 한다. 결국 서로가 상처받고 불신이 커진다. 당연히 사람 두려워하는 것이 내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보다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인본주의는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 하나님 경외함이 사라지면 교회는 인간의 무대가 되고 만다. 이런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참된 신앙의 삶을 살 수 없다. 이런 신앙관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받는다. 반드시 잘못된 신앙을 끊어야 한다.
▶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의 관계로 참 믿음은 순종으로 드러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종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역사는 불순종으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의 중심 흐름은 인간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과 불순종의 두 흐름이 극명히 보인다. 순종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만을 좇을 때 가능하다.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만, 불순종은 하나님과 갈등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데, 가라지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불순종의 결과가 즉시 안 보여도 불순종의 열매를 거둘 시점이 되면 그 여파가 굉장히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왜 쉽게 불순종할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도 즉각적인 제지가 없고 불순종으로 갖게 되는 이익이 순종의 결과보다 좋은 것 같은 결과를 낸 경우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순종의 사고는 치명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만든다. 처음에는 불순종의 결과가 좋은듯하나 결국 더 큰 손해를 보고 만다.
흔히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것을 자기 관점에서 받아들여 불순종해도 하나님이 받아주신다고 여긴다. 하나님은 결코 불순종하는 자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를 받아주신다. 하나님이 조건 없는 사랑을 주시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받아주시는 분이 아니고 애통하고 통회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받아주신다. 불순종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순종한다면 그 믿음은 거짓이다.
문제는 불순종의 뿌리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의와 의심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반면 순종의 뿌리에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은 결국 신뢰와 사랑에서 나온다. 아담과 하와가 온전히 하나님을 의식하고 신뢰하며 살 때는 믿음의 삶, 순종의 삶을 살았지만 사탄의 유혹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자기 정욕에 집중하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자리에 설 때 불순종하게 되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순종을 믿음과 동등하게 보았다. 참 믿음은 순종을 동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참 믿음은 지식적인 인식이나 판단이 아니라 순종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래와 악기를 치워버리고 제물과 의식 지키는 것을 그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아무리 종교적인 의식, 예배, 기도, 어떤 헌신을 한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왜 번제와 제사를 싫어하신다고 하셨을까?
사 66:4 / 그러므로 나도 그들이 당할 재앙들은 모두 골라서 내리고 그들이 치 떨리게 두려워하는 것들을 모두 그들에게 내리겠다. 내가 불렀으나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며, 내가 미리 경고하였으나 듣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너희는 내가 악하게 보는 일들을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만 골라 하여 나를 모욕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와 절기를 지켰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았다. 사실 최고의 예배는 순종인데 말이다. 불순종의 배후에는 원수 사탄이 있다. 죄의 소원과 아담의 본성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늘 노출되어야 한다. 죄의 법을 방어하고 정복하려면 참된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한다. 야고보의 말처럼 참된 믿음에는 그 믿음에 상응하는 순종이 따른다. 순종은 참된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에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자기 뜻을 내려놓지 않고 자기 길을 고집하는 신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불순종의 태도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에까지 침범하도록 만든다. 자기 뜻, 자기 자원, 자기목적대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위에 도전한 적이 없다고 여긴다. 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목적과 뜻과 자기 논리가 하나님의 권위보다 높아져 영적 분별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괜찮다고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괜찮다고 여길 것이라는 착각을 쉽게 한다. 바리새인들이 말씀을 많이 알고, 온갖 절기를 지키면서도 순종치 않고, 외식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인정받을만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여긴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이들이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당연히 이들은 불법에 자신을 열어주었고 감히 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불법이 심판을 받게 된다.
물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해 이런 불법이 덮어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순종의 삶에서 멀어지면 하나님과도 불순종의 거리만큼 멀어지고 만다.
하나님은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의 눈을 열어 불순종의 영역들을 보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보게 하시는 이유는 순종의 삶으로 돌아서게 하기 위함이다. 많은 경우 불순종의 이면에는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땅의 소원과 자기 생각과 목적이 아니라 하늘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존귀케 되지만 불순종은 수치를 당하게 된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누가 보아도 엉터리로 하는 믿는 사람은 불순종과 순종에 대해 크게 생각지 않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순종과 불순종을 생각한다. 문제는 순종의 기준을 자신에게 맞추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여 순종의 처음부터 끝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 아담이셨던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첫 아담의 불순종을 좇지 말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좇아야 한다.
불순종이 인류를 괴롭히는 온갖 문제를 불러왔고, 반대로 순종이 온갖 평안과 기쁨을 누리도록 만든다. 순종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성품과 선하심과 순전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는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고 따를 때 불순종하게 된다. 하나님의 권위에 불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죄임을 명심하라. 윤리도덕적인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권위에 온전히 순종할 때 다른 모든 것도 뒤따르기 때문이다.
▶ 바울서신과 야고보서가 믿음과 행함에 대해 서로 상반된 것처럼 오해하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다. 믿음과 행함은 결코 상반된 것이 아니고 상호보완적이고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행함을 수반하고 행함은 믿음의 결과이다. 성경은 믿음 없는 행함은 자기 의에 기초한 자기 과시이자 자기 자랑에 불과하고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분리할 수 없다. 사실 믿음이 행함을 동반한 올바른 믿음이었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마지막 심판 때이다(마 7:21, 24-27, 25:31-46).
▶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이해하는 반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 받는다는 생각이다. 이런 신앙을 가지면 공적(功績)주의에 빠진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것이라면 행함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믿음의 행함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 행함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우리의 적극적인 결단과 의지 없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이 또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아래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따로 분리할 수 없고 설사 믿음과 행함을 구분 짓는다 하더라도 모두다 하나님의 은혜에 결과물이다. 복음서나 야고보서가 행위가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행위를 너무 강조하다가 믿음을 약화시키고 다른 한 편으로는 바울 서신이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를 너무 강조하다가 행함이 약화시키기도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글을 읽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어떤 신학자는 복음서와 야고보서가 바울서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반대로 바울서신이 복음서와 야고보서의 부족한 부분을 상호보완 한다고 본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와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가지고 있고 바울서신 또한 그렇다(갈 2:16, 약 2:14, 21-24). 또 다른 신학자는 복음서와 야고보서는 기존 신자들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행함을 강조하고, 바울서신 특히 로마서가 초신자들을 향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논쟁이 있는 이유는 한국교회의 현주소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믿음과 행위의 괴리(乖離)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배우고 믿는 것 사이에 행함과의 큰 괴리가 큰 장벽처럼 서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행함이 뒷받침되지 못함으로 신앙적 혼란에 빠져 있다. 이것은 우리의 혼란이지 성경의 혼란이 아니다.
복음서나 야고보서, 바울서신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본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교훈을 받아들여 행한다는 것이고,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믿음과 행함의 불균형과 혼란은 믿음이 바로 이해되지 못하고 참 믿음을 갖지 못한 결과이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한 쪽은 있고 다른 한 쪽이 없으면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절대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복음서와 야고보서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만 참 믿음은 행함을 동반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적인 진리에 대해 단순히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야고보는 1세기 당시에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의 열매가 없는 자들에게 참 믿음은 행함과 연결되게 됨을 강조했다. 자기 열심과 노력을 통해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어진 믿음이 행함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열심과 노력을 통해 믿음을 증명하려 들면 자기 의에 빠져 결국 율법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구원받는 믿음이든, 성화이든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뒷받침하는 행함 또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만 가능하다.
바리새인들도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철저하게 믿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자신들의 믿음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전혀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진단하셨다.
마 23:2-4 /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4) 그들은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요구를 너희에게 강요하지만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에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믿음의 전부로 여겼다. 이러한 신앙관이 한국교회에 가득 차 있다. 성경공부하고, 설교 듣고 깨달아 지식적으로 동의하면 그 가르침과 말씀을 지킨 것으로 여긴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믿음에 전형적인 모습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따르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 것이고(요 5:38)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으로 간주한다(호 4:6).
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전존재로 신뢰하기 때문에 당연히 행함을 동반한다. 바로 믿음의 세대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행하기 때문에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신뢰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순종한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세대들 모두가 신격체 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았고 전존재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신뢰했다. 성경은 이것이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명령하시면 상황과 환경과 상관없이 그들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께 순종했다. 결코 이들에게는 ‘믿음 따로 행함 따로’가 아니었다. 많은 경우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있기 때문에 잘 믿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믿는 바를 드러내기 때문에 행함을 통한 믿음의 열매를 보고 평가된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 속에서 행함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는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행함이 드러내기 때문에 믿는 자의 삶을 살펴보면 믿고 있는 바가 보인다. 참 믿음은 행함과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함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은혜 아래서 믿음과 행함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고 심판하신다. 우리가 믿음에 대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행함을 위한 행함으로 빠지기 쉽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행함을 추구하다가 쉽게 지친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참 믿음을 갖는 것이다. 참 믿음을 가질 때 행함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참 믿음과 행함은 항상 같이 한다. 은혜 아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갖지 않으면 참 믿음을 갖는 것과 행함은 불가능하다.
믿음은 혁명적인 것이다. 믿음이 주어질 때 개인의 생애가 완전히 바뀌게 된다. 믿음의 길로 들어서면 이전에 익숙하고 사랑했던 세상적인 것들과 이별해야만 한다. 또한 모든 것을 조정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믿음은 자신을 작게 만들고 하나님을 크게 하고, 그분은 더욱더 위대해지고 나는 더욱더 작아져야 한다(요 3:30).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 믿음의 길은 오직 유일한 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가는 것이다.
▣ 거짓 믿음 3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 역사적인 믿음이다.
이런 식의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과거 역사적 사건을 사실로 믿는 것처럼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식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이 결핍된 믿음이다(마 7:26, 약 2:19). 이런 믿음은 문자에 근거한 믿음으로 성경적 믿음이 아니며 잘못된 것이다(고후 3:6). 머리로는 믿으나 마음으로는 믿지 않는 것이다.
2. 일시적인 믿음이다.
이런 식의 믿음은 자기감정이나 느낌을 의존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중생의 체험을 통한 결과로서의 믿음이 아닌 것은 심리적이고 종교적 확신에 비롯된 것이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뿌리를 깊이 박아 참 믿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혹이나 핍박이 오면 신앙이 흔들려 쓰러지기 쉽다.
3. 기적중심적인 믿음이다.
이런 식의 믿음은 자신이 기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믿거나, 자신을 위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다(마 8:11-13, 17:20). 이런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믿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지나치게 기적만을 좇다가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 참 믿음 3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 은사로서의 믿음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복음 전파를 위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부어주시는 확신으로서의 믿음이다. 예를 들어 능력 행하는 은사는 내 높이가 아닌 하나님 높이의 뜻인 초자연적인 확신을 부어주시고 그 확신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은사이다.
2. 성령의 열매로서의 믿음이다(갈 5:22-23).
성령의 열매 중 충성(faithfulness)은 신실함을 뜻하는데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삶을 주관하시면서 나타내시는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가 신실함이다. 충성과 신실함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신실함은 또 다른 모습으로서 성령의 열매로서의 믿음이다.
3.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인데, 골리앗을 이긴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믿음이다. 이외에도 성경은 많은 의인들의 믿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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