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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와 순교자
1. 서소문 순교성지 소개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
"The blood of the martyrs is the seed of the christians."(Tertullian)
서소문 밖은 바로 임금의 궁성이 있는 한양의 공식 처형지였습니다. 창업 이래 조선에서는 갖가지 모반 사건과 범죄, 정변 등으로 수많은 죄인들과 억울한 사람들을 처형하였습니다. 사형수는 크게 모반죄와 일반 범죄로 나뉘었는데, 그중 모반죄의 경우는 형장이 일정치 않았지만,나머지 사형수들은 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유교 경전인 오경 중 하나인 "예기(禮記)"에서 말한 "형장은 사직단 우측에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경복궁에서 바라볼 때는 이곳이 바로 사직단(지금의 사직 공원에 위치) 우측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서소문이 광희문(남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운반할 수 있는 시구문 역할을 했으며, 칠패 시장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으로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는 효과도 있었고, 최종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형장으로는 아주 적격이었습니다.
서소문 밖 형장이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안으로 들어온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초기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최창현 요한, 강완숙 골룸바 등이 순교의 고귀한 피를 흘린 때부터입니다. 한국 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도 바로 이곳에서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月落在天水上池盡)"라고 하며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그 외에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숨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이래 서소문 밖은 가장 중요한 신앙의 증거터인 순교터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서소문 밖 순교자들은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 1차로 문초를 당하거나 형벌을 받고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형조의 옥인 전옥서(지금의 광화문 사거리 동쪽 서린동 소재)에 갇혀 있다가 사령들에 의해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한 것입니다. 달레 신부(Claude Dharles Daller ; 1829~1878)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서소문 밖 처형장에서 처형당하신 순교자들의 모습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처형이 결정된 신자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높이는 여섯 자 정도로, 신자들은 양팔과 머리칼만 잡아 매인 채 발은 발판 위에 놓여지게 된다. 수레가 광화문통을 옆으로 지나 서소문에 이르면 그다음은 가파른 비탈길이다. 이때 사령들은 신자의 발이 놓여 있는 발판을 빼내고 소를 채찍질하여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달리게 하였다. 수레는 무섭게 흔들리고 신자의 몸은 머리칼과 팔만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고통을 받게 된다. 형장에 이르면 옷을 벗기고 꿇어 앉힌 뒤 턱밑에 나무토막을 받쳐 놓고 목을 잘랐다."(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서설)
서소문 밖에서의 순교사는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단계는 신유박해 초기, 지도층 신자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에는 첫 순교자가 서소문 밖에서 탄생하였습니다. 한국 교회의 반석인 이승훈(베드로)과 명도회의 초대 회장인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 6명이 순교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남녀 신자 9명이 순교하였고, 10월과 11월에는 '백서' 사건과 관련하여 황사영(알렉시오), 현계흠(플로로),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서소문 밖 만초천의 백사장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신유박해는 막을 내렸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기해박해 때로, 1839년 4월 12일에 성 남명혁(다미아노) 등 5명과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성 김아기(아가타) 등 4명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이어 6월 이후에도 계속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며, 8월 15일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이곳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이때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은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재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 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기해박해 때의 처형은 11월 24일에 성 정정혜(엘리사벳) 등 7명이 순교의 화관을 받은 뒤에야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처형은 설날 대목장을 처형으로 망칠 수 없다는 칠패시장 상인의 하소연으로 당고개에서 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의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대표적인 인물은 남종삼 성인과 전장운 성인 등입니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대의 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며, 병인양요의 영향으로 한양의 천주교도 처형이 잠두봉(지금의 절두산)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은화(隱花, 숨은 꽃)들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소문 순교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앙인들이 온갖 고통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희광이의 칼 아래 스러져가며 하느님을 증언한 거룩한 땅이며, 1984년 5월 6일 시성된 103위의 성인 중 44분이 서소문에서 생명으로 하느님을 증언했으며,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스물다섯 분의 순교자들과 1819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조숙 베드로, 권천례 데레사 동정 순교자 부부가 복자로 시복되신 한국 천주교회 최대의 순교 성지입니다.
새남터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순교터였다면 서소문 순교성지는 교회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끝내 목숨까지 바친 평신도들의 용맹과 신앙의 결단이 찬연히 빛나는 순교터입니다.
2. 서소문 순교자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숨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중 성인품에 오른 순교자만도 44명으로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희광이의 칼 아래 스러져 갔다.
서소문 밖 형장이 기억하는 첫 인물은 만천(蔓川) 이승훈이다. '덩굴이 무성한 시냇물'이라는 다소 풍류적인 호를 갖고 있던 그가 태어난 곳은 서소문과 이웃한 반석골, 곧 지금의 중림동(中林洞)이다. 자신의 호와 같이 덩굴이 우거져 무성한 시내를 앞에 둔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 교회 최초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훗날 조선 교회의 베드로로서, 본명이 의미하는 반석(盤石)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명문가에 태어나 이미 24세에 벼슬길에 나서 환히 열린 출세의 가도를 달리던 그가 환난(患難)의 길로 들어선 것은 천진암 강학회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이다. 광암 이벽이 주도했던 이 모임에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접하고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된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교회사상 처음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것이 1784년의 일이다.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전교에 힘쓰던 그는 1801년 신유박해의 서슬로 최필공, 정약종,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등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간다. 사회적 명망이 높은 이들 여섯 명의 당당한 태도와 굳센 신념은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 정약종은 약현 · 약전 · 약용 형제와 함께 이승훈의 처남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명도회의 회장을 역임한 그는 강직한 성품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주자학과 도가 사상을 깊이 탐구했다. 그러나 주자학이 공리공론에 치우치고 도가가 허무맹랑한 사상이라고 판단한 그는 마침 서양문물과 함께 들어온 한역 천주교 서적들을 손에 넣게 되고 주어사(走魚寺) 강학회(强學會)를 통해 천주교를 수용한다.
"주교요지(主敎要旨)"와 "성교 전서(聖敎全書)"는 그가 저술한 두 가지의 교리서이다. "성교전서"는 방대한 내용의 교리를 종합, 해설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고 "주교요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리서로 10장 43개 항목에 걸쳐 배움이 없는 이들도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쓰여졌다. 특히 이 책은 양반 계층의 학자가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글로 저술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평등사상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같은 때 강완숙을 비롯한 여교우들도 한꺼번에 참수된다. 최초의 여신도 회장이자 주문모 신부를 숨겨 준 죄목으로 아들 홍필주와 함께 체포된 강완숙은 몇 번이나 주리를 틀리면서도 주 신부의 거처를 함구하다가 다른 4명의 여교우와 함께 이승훈등이 처형된 그 자리로 끌려 나간다. 그로부터 얼마 뒤,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 사건이 발발하면서 황사영, 현계흠, 황심(토마스) 등 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소문 밖의 작은 개천가에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뒤에야 박해는 막을 내렸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에도 서소문 밖 형장에서는 순교자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분들 중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도 포함돼 있다. 그는 고문의 혹독함에 굴복해 한 번 배교한 후로는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정약종의 아들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생이며, 조선 교회의 지도자요 밀사 역할을 하던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 여자로서는 가장 치욕적인 고문을 당하고 순교하신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자매, 그리고 정하상과 같이 북경을 여러 차례 다녀온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불과 13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과 함께 순교한 유대철 베드로 역시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이다. 정하상 바오로는 미리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상재상서"(上帝相書)를 작성하여 품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를 조정 관리들이 발견해 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진교(眞敎)'라는 호교론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박해로 눈이 먼 그들은 이를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이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앵베르 주교는 현석문 성인에게 부탁하여 박해와 관련하여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원하셨고, 현석문 성인께서는 도망 다니면서도 박해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기해일기’란 책을 완성하셨다. 이 ‘기해일기’에 의하면 당시에 순교한 사람이 모두 114명이 넘었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78명의 순교사기만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훗날 교황청 시성성에서 순교자 관련 자료를 조사할 때 이 ‘기해일기’ 책으로 인하여 79명이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올랐으며, 이들은 1984년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탄생하신 79분 성인 중에 41분이 이곳 ‘서소문’성지에서 탄생하신 성인이시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는 또다시 피로 물든다. 베르뇌 주교 등 외국 선교사들이 새남터에서 순교하던 바로 그 날, 여기서는 남종삼요한, 홍봉주가 피를 흘린다. 그리고 이들의 머리가 네거리 말뚝에서 채 내려지기도 전에 최형 베드로, 전장운 요한의 목이 잘린다. 이분들 중 3분만이 성인품에 오르셨다.
전국적으로 가해진 대박해임에도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가 적은 이유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신자들을 체포하거나 투옥하고 처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름 모를 무명 순교자들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순교의 영광을 바쳤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다만 그들 모두 양같이 순하게 칼을 받았고 신음도 원망도 없이 오직 천주를 향한 한마음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만 미루어 헤아릴 뿐이다. 현재까지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만도 100명이 넘는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는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고, 서소문 순교자 중 강완숙 골룸바를 비롯한 27위가 복자로 시복되었다.
가. 기해박해 순교성인
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여 조선에 독립된 교구가 탄생하였다. 서양인 천주교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모방신부,샤스탕신부,앵베르주교 등이 들어와서 천주교의 교세가 회복되고 신도는 증가되어 갔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1839년 무자비한 박해를 전개하여 3인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처형되었다.
나. 병인박해 순교성인
병인박해란 조선조 말기인 1866년(高宗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박해를 말한다.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을 거치면서 치열해진 박해는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종식되었다. 이 기간 동안 처형된 순교자만도 8,000~2만 여명으로 추정되며, 그나마 살아남은 신도들은 집과 재산을 잃고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피로 자라난 조선교회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다시 생기를 되찾게 되었으며 1890년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시복 수속을 위해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치명일기≫를 간행하였다. ≪치명일기≫에 수록된 877명의 순교자 중 24위는 1968년 복자위(福者位)에, 그리고 1984년에는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랐다.
기해 박해순교성인 41위
성 정하상 바오로 | 성 김노사 로사 | 성 박후재 요한 |
성 김아기 아가타 | 성 김성임 마르타 | 성 이정희 바르바라 |
성 박아기 안나 | 성 이매임 데레사 | 성 이연희 마리아 |
성 이조이 아가타 | 성 김장금 안나 | 성 김효주 아녜스 |
성 김업이 막달레나 | 성 이광렬 요한 |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 성 이영희 막달레나 | 성 허계임 막달레나 |
성 한아기 바르바라 | 성 김누시아 루치아 |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
성 박희순 루치아 | 성 원귀임 마리아 | 성 김유리대 율리에타 |
성 남명혁 다미아노 | 성 박큰아기 마리아 | 성 전경협 아가타 |
성 권득인 베드로 | 성 권희 바르바라 | 성 조신철 가롤로 |
성 김제준 이냐시오 | 성 최창흡 베드로 | 성 정정혜 엘리사벳 |
성 박봉손 막달레나 | 성 조증이 바르바라 | 성 고순이 바르바라 |
성 홍금주 페르페투아 | 성 한영이 막달레나 | 성 이영덕 막달레나 |
성 김효임 골룸바 | 성 현경련 베네딕타 |
병인 박해순교성인 3위
성 남종삼 요한 | 성 전장운 요한 | 성 최형 베드로 |
다. 서소문 복자
로마 가톨릭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거나 생전에 뛰어난 덕행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어져 공식적으로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이 된 사람, 즉 공경할 만한 성도[可敬者]에게 붙이는 존칭입니다.
신유박해 복자 25위
1800년 정조 승하 후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으로 집권한 노론 벽파에 의해 시작된 천주교 박해 사건. 1801년 1월 박해를 예상하고 감추려던 명도회 회장 정약종의 천주교 관련 책 궤짝이 발각되어 같은 해 2월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최필공, 이승훈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지방으로 박해가 확산되었습니다. 3월 2일 신도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수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4월 19일 새남터에서 외국인 사제 최초로 군문효수 되고, 이어 전라도의 유항검이 참수되었습니다. 9월 15일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발생하고, 대왕대비의 척사윤음이 반포되었으며 16명이 처형되었습니다. 기타 약 100명의 평신도가 처형되고, 400여명이 유배를 당한 최초의 대규모 박해입니다.
신유박해 복자 25위 . 1819 박해 2위
복자 최창현 요한 | 복자 정철상 가롤로 | 복자 김종교 프란치스코 |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 | 복자 강완숙 골룸바 | 복자 홍필주 필립보 |
복자 홍교만프란치스코 | 복자 강경복 수산나 | 복자 현계흠 플로로 |
복자 최필공 토마스 | 복자 김현우 마태오 | 복자 손경윤 제르바시오 |
복자 홍낙민 루카 | 복자 문영인 비비안나 | 복자 이경도 가롤로 |
복자 최필제 베드로 | 복자 김연이 율리아나 | 복자 김계완 시몬 |
복자 윤운혜 루치아 | 복자 이현 안토니오 |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 |
복자 정복혜 칸디다 | 복자 최인철 이냐시오 | 복자 조숙 베드로 (1819박해) |
복자 정인혁 타대오 | 복자 한신애 아가타 | 복자 권천례 데레사 (1819박해) |
조선왕조치하 순교자133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는 125위 하느님의 종 시복시성 추진 당시 순교사료나 증거가 미비해 누락됐던 순교자들로 현재 자료를 보완해 시복추진 대상으로 선정한 순교자들입니다.
신유박해 순교자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 순교자 최설애 | 순교자 김백순 |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 | 순교자 장덕유 | 순교자 김건순 요사팟 |
하느님의 종 황심 토마스 | 순교자 변득중 | 순교자 홍정호 |
하느님의 종 옥천희 요한 | 순교자 이희영 루카 | 순교자 김한빈 베드로 |
하느님의 종 고동이 바르바라 | 순교자 김의호 | 순교자 송재기 |
병인박해 순교자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 | 순교자 이재의 토마스 | 순교자 권 복 |
조선왕조치하 순교자133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조선 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는 125위 하느님의 종 시복시성 추진 당시 순교사료나 증거가 미비해 누락됐던 순교자들로 현재 자료를 보완해 시복추진 대상으로 선정한 순교자들입니다.
3. 신유박해 순교자 약전
하느님의 종_황심:‘하느님의 종’ 황심 토마스는 충청도 덕산 출신으로 본명은 인철.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하느님의 종’ 이존창 루도비꼬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로는 지황, 복자 윤유일과 더불어, 조선 교회와 북경주교와의 연락 일을 담당하였다. 1794년 12월 복자 주문모 야고버 신부를 북경으로부터 영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탄로되어 1795년에 윤유일, 지황이 잡혀 순교한 뒤로는 황심 토마스가 주로 북경과의 연락을 맡았다. 즉 1796년에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기 위해, 동지사의 하인 자리를 돈을 주고 사서 북경에 들어가 밀서를 무사히 전달했고, 그 뒤에도 여러 번 ‘하느님의 종’ 옥천희 요한, 김유산 등과 함께 북경을 왕래하면서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에 알리는 동시, 조선 교회에서 성사집행에 필요로 하는 성유(聖油) 등 성물을 가져와 주문모 신부를 도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강원도 춘천으로 피신하였는데, 이 때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가 가까운 곳에 피신해 온 것을 알고는, 제천으로 그를 찾아가, 주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을 알리는 동시, 조선 교회의 이 같은 사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는 방안을 의논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 알렉시오는 북경 주교와 면식이 있는 황심 토마스의 이름으로 이른바 백서(帛書)를 쓰고, 황심 토마스는 이를 옥천희 요한을 시켜 북경에 전달하기 위해 그해 9월에 백서를 받으러 다시 제천에 가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20일 옥천희 요한이 먼저 잡히고, 이어 황심 토마스도 그 달 26일에 잡혔으며 황사영 알렉시오도 10월 3일에 잡혀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다. 황심 토마스는 1801년 11월 28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당하여 순교하였다.
하느님의 종_옥천희: ‘하느님의 종’ 옥천희 요한은 평안도 선천 출신이다. 옥천희 요한의 입교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을 지켰고 교회 일에는 늘 앞장서서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복자 주문모 야고버 신부의 심부름으로 여러 번 중국에 내왕하면서 맡은바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가 박해를 받고 있는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기 위하여 쓴 백서(帛書)를 중국을 내왕한 경험이 많고 또한 가장 믿을 수 있는 옥천희 요한과 ‘하느님의 종’ 황심 토마스가 함께 가지고 가기로 약속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옥천희 요한이 8월경에 잡히고, 이어 황심 토마스와 황사영 알렉시오도 잡힘으로써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옥천희 요한은 이 일로해서 1801년 12월 1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하느님의 종_고동이 바르바라 :‘하느님의 종’ 고동이 바르바라는 양인 출신으로 남편을 여의고 홀로되어, 경기도 양근 지방에서 복자 조숙 베드로와 복자 권천례 데레사 동정 부부와 함께 생활하였다. 동정 부부가 성 정하상 바오로의 성직자 영입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때, 함께 부부의 일을 도왔다. 1817년 3월 조숙 베드로가 체포되자 권천례 데레사와 함께 자수하여 옥에 갇히게 되었다. 2년 동안의 모진 고문과 형벌을 이겨내고 1819년 8월 중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의호 ;순교자. 일명 경서. 서울 출신으로 애오개(현재의 아현동)에서 염색업(染色業)을 하며 살았다. 1791년경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에게 문교(聞敎)하여 입교했고 아들 희달(喜澾)을 황사영에게 맡겨 글을 배우게 하였다. 1801년 황사영 알렉시오의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최설애(催雪愛), 송재기(宋再紀) 등과 함께 황사영 알렉시오에게 상복(喪服)을 만들어 줘 피신하게 한 죄로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에 순교하였다.
송재기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이름이 ‘宋再紀’로 나온다. 서울에서 태어나 황정동(지금의 동대문 부근)에서 각수장[돌에 글자나 무늬를 새기는 직업]을 하며 살았다. 1800년 입교하여 김의호, 김한빈,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 등과 교우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사건이 일어나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피신을 도와주어 이로 인해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 김의호, 변득중, 장덕유, 복자 이경도 가롤로, 김백심,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 최설애 등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설애: 순교자. 황해도 안악 출신.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와서 살았다. 나이가 차 결혼했으나 곧 남편과 사별하였다. 1800년 왕십리에 사는 어느 과부로부터 천주교를 듣고, 김의호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 뒤 복자 강완숙 골룸바, 송재기 등 유력한 교우들과 접촉하면서 열심히 신앙을 지키고 전교에 힘썼다. 1801년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에게 상복을 지어 주어 도피하는 걸 도와주었다는 죄로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 김의배 등 여러 교우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장덕유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서울의 양반 출신으로 1796년 ‘하느님의 종’ 김종교 프란치스코에게 문교했고 평소 순교하기를 원하여 복자 주문모 야고버 신부, 명도회장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박해가 일어나면 동생동사할 것을 약속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는 심한 형벌과 고문으로 인해 주문모 야고버 신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한 동생동사의 약속을 부인하였으나 승정원에서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고, 1802년 1월 29일 복자 이경도 가롤로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변득중: 순교자. 서울 대묘동(지금의 종로4가) 출신. 세례명은 알 수 없으나 초대 조선 교회의 창설자의 한 사람인 ‘하느님의 종’ 김범우 토마스와 복자 최창현 요한에게서 교리를 배워 1785년에 입교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잡혀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의 숨은 곳을 대지 않으면 죄가 더 무거워질 뿐만 아니라 사서 즉 천주요 서적을 내놓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협박과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을 때에는 전일의 배교를 취소하고 자기 신앙을 굳건히 고백하였다. 결국 1802년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이희영: 순교자. 세례명은 루카.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이현 안토니오의 숙부이다.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1797년 순교자 김건순 요사팟의 전교로 입교한 뒤 상경(上京), 성화(聖畵), 상본(像本) 등 주로 종교화를 그리며 생활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이해 5월 10일 김백순과 함께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김백순: 순교자. 세례명 미상. 순교자 김건순 요사팟의 종형(從兄).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입신출세를 위해 열심히 학문에 전념하는 가운데 선열들의 철학서를 탐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책 속에 모순된 점이 많음을 깨닫고 사람은 죽어도 그 영혼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새로운 논리를 자기 나름대로의 학설로 친구들에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서교에서 따온 것이 아니냐는 친구들의 평을 듣자, 그는 큰 충격을 받고 비로소 천주교를 연구하여 마침내 입교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입교한 사실을 알자 그의 외숙은 그의 마음을 돌려 배교케 하려고 의절을 선언했으나, 그는 외숙과 의절은 할지언정 배교는 하지 못하겠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1801년 3월 26일 배교자의 밀고로 의금부에 수감되어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지 못하고 한때 배교했으나 곧 전비를 뉘우치고 신앙을 고백하였으므로 1801년 5월 11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김건순: 순교자 김건순 요사팟은 여주 출신이다. 1797년 6월 6일(음) 복자 주문모 야고버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원래 본성이 영특하여 14세 때에 이미 천주교 입문서를 탐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의 경서, 불서, 음양서, 병서 등 각 방면의 서적을 탐독하였다. 그의 집안은 노론의 대가 가계로 그는 어려서 종가에 입양하였으나, 후에 천주교를 신봉한 탓으로 파양 되었다. 김건순 요사팟은 천주교리를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당시 당파적으로 적대시되는 남인인 ‘하느님의 종’ 권철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몰래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후에 이희영, 이중배, 원경도 등에게 전교하여, 여주 고을을 천주교의 중심지로 하는 데 큰 공을 남겼다. 그는 또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도와 천주교리를 순서 있고 체계있게, 그리고 쉽게 설명한 성교전서를 저술하다가 박해로 중단하는 비운을 겪었다. 김건순 요사팟은 1801년 6월 1일 서소문 밖에서 26세의 나이로 참수 순교한 것으로 달레(Dal let)의 《한국천주교회사》와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에 기록되어 있으나 관변측 자료에 의하면 배교한 것이 확실하다.
홍정호: 순교자 홍정호는 복자 홍필주 필립보의 가까운 친척으로 가족과 함께 복자 주문모 야고버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7월 2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한빈 :순교자 김한빈 베드로는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1800년 9월(음) 상경하여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행랑살이를 하면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 해 6월(음) 체포되었으나 탈출한 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박해에 관한 상황을 수집하여 제천 배론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에게 보고, 백서(帛書) 작성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801년 11월 6일 배론에서 황사영 알렉시오와 함께 체포되어 11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하느님의 종’ 황심 토마스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4. 병인박해 순교자
하느님의 종_홍봉주: ‘하느님의 종’ 홍봉주 토마스는 충청도 예산 출신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복자 홍낙민 루카의 손자이며, 부친 복자 홍재영 프로타시오 역시 기해박해로 순교하였다. 모친 정소사는 초대 명도회장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복자 정약종의 맏형인 약현의 딸로 기해박해로 남편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렇듯 대대로 열렬히 천주교를 신봉해온 가정에 태어났으므로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은 홍봉주 토마스는 요행이도 박해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어, 1852년 메스트르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서울 전동에 있는 이군심의 집에 기거하게 하면서 그의 전교활동을 도왔다. 1852년 2월에 메스트르 신부의 명을 받고 선편으로 중국 상해에 건너가 조선교구의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뇌 주교를 만나, 그와 푸르티에 신부, 그리고 프티니콜라 신부를 함께 무사히 서울까지 인도하여, 태평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해서 주교의 포교활동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65년 러시아의 국경침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 정국이 시끄러워지자, 홍봉주 토마스는 평소 러시아의 침공을 우려한 주교의 의중을 감지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종교의 자유도 얻고 자신의 입신출세도 도모할 목적으로 김면호, 이유일 등과 상의하여 러시아 사람을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 및 영국과 조약을 맺는데 있으며, 이 조약을 맺는 데는 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주교를 통해서 교섭하는 것이 좋다는 방아책을 쓴 서한을 대원군의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천주교인으로서 높은 관직에 있는 승지 성 남종삼 요한에게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이 같은 방아책을 다시 청원토록 종용하였다. 이에 남종삼 요한은 자신이 직접 작성한 청원서를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는데, 북경에서의 양인학살 등 사태의 변화로 오히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주교를 비롯한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는 병인박해를 몰고 왔다.
홍봉주 토마스도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와 함께 잡혀, 3월 7일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던 날, 남종삼 요한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달레는 홍봉주 토마스의 순교사실을 상당히 의심하고 있으나 관변측 기록에 의하면 그가 배교를 취소하고 자기 신앙을 고백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신규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는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의 셋째 아들이다. 복자 정약용 아우구스티노의 생질이 된다. 아버지 이승훈 베드로가 순교한 이 후 얼마동안 열심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문재와 의술에 뛰어난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용인, 진천 등지로 피난하다가 그해 9월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학문과 의술의 사회적 공헌을 인정받아서인지 또는 배교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석방되어 그 뒤 인천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로 가서 1846년까지 살았다. 184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관련이 되어 5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처음엔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결국 배교하고 1846년 8월 1일 석방되었다.
이재의 ;순교자 이재의 토마스는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이다. 강원도 정선 출신이다. 성 정하상 바오로와 반년 가까이 동거하면서 교리를 배워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앵베르 주교가 순교할 때까지 복사로 일하면서 주교를 도왔다. 김대건 부제가 입국할 때 의주 변문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여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인도했고, 김대건 부제가 중국 상해로 건너갈 때 동행하여 그 곳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교리를 더욱 깊이 연구한 뒤 페레올(Fereol, 高) 주교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주로 피난하여 화를 면했으나 1846년에 체포되었을 때에는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1868년 4월 3일(음 5월 25일) 그는 외국인 주교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국내로 인도해 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5월 28일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로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그 때 나이 61세였다.
권 복: 순교자 권복 프란치스코는 초기 교회 지도자인 ‘하느님의 종’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증손자로 양근(지금의 경기 양평군 양평읍 일대)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잘 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양근에서 지내다가 1839년 기해박해 이후에는 여러 번 이사 끝에 서울로 이사하여 의술로 세력가들과 가깝게 지내며 신앙을 멀리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척사문인 '사율'[사언율시의 하나]을 짓기도 했다. 가을에는 흥선대원군의 권유로 강화도에 있는 프랑스 군대 진영을 방문하여 리델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1868년 4월(음)에 누군가의 진술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포도청에서 신앙을 한사코 부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의 권면을 받아 회개한 후 5월 28일(음력 윤4월 7일), 서소문 밖에서 함께 참수형을 당해 5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관찬 기록에는 이름이 '권복(權複)'으로 나온다. 권일신(權日身)의 증손자로 그의 조부는 상문(相問), 부친은 황(亻晃)이었다. 《좌포도청등록》 무진년(1868) 4월 11일 기사 참조.
5. 서소문 순교 연도별
신유박해 서소문순교자
1801년
4월 8일
이승훈 베드로,
'복자' 최필공 토마스,
'복자' 최창현 요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복자'' 홍낙민 루카
5월 11일
이희영 루카, 김백순(예비신자)
5월 14일
'복자' 최필제 베드로,
'복자' 윤운혜 루치아.
'복자' 정복혜 칸디다,
'복자' 정인혁 타대오,
'복자' 정철상 가롤로
6월 1일
김건순 요사팟
7월 2일
'복자' 강완숙 골룸바,
'복자' 최인철 이냐시오,
'복자' 김현우 마태오,
'복자' 이현 안토니오,
'복자' 김연이 율리아나,
'복자' 강경복 수산나,
'복자' 한신애 아가타,
'복자' 문영인 비비안나, 홍정호
10월 4일
'복자' 김종교 프란치스코,
'복자' 홍필주 필립보
11월 28일
황심 토마스, 김한빈 베드로
12월 10일
'복자' 현계흠 플로로, 황사영 알렉시오,
옥천희 요한
1802년
1월 29일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
'복자' 이경도 가롤로,
'복자' 김계완 시몬,
'복자' 손경윤 제르바시오.
김백심, 김의호, 송재기, 최설애, 장덕유,
벽득중
1819년
8월 3일
'복자' 조숙 베드로,
'복자' 권천례 데레사 동정 부부
한양도성에서 참수형(서소문 밖 추정)
기해박해 서소문 순교자
1839년
5월 24일
성 권득인 베드로, 성 박아기 안나,
성 남명혁 다미아노, 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 박희순 루치아, 성 이조이 아가타,
성 김업이 막달레나. 성 한아기 바르바라,
성 김아기 아가타
7월 20일
성 이광렬 요한, 성 김장금 안나,
성 김노사 로사, 성 원귀임 마리아,
성 이매임 데레사. 성 이영희 막달레나,
성 김성임 마르타, 성 김누시아 루치아
9월 4일
성 박후재 요한, 성 박큰아기 마리아.
성 권희 바르바라. 성 이정희 바르바라
성 이연희 마리아, 성 김효주 아녜스
9월 22일
성 정하상 바오로,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9월 26일
성 조신철 가롤로, 성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성 김제준 이냐시오, 성 김유리대 율리에타,
성 전경협 아가타, 성 박봉손 막달레나,
성 홍금주 페르페투아, 성 허계임 막달레나,
성 김효임 골룸바
12월 29일
성 최창흡 베드로, 성 정정혜 엘리사벳,
성 이영덕 막달레나, 성 고순이 바르바라,
성 현경련 베네딕타, 성 조증이 바르바라.
성 한영이 막달레나
6. 병인박해 서소문 순교자
1866년
3월 7일성 남종삼 요한, 홍봉주 토마스
3월 9일성 전장운 요한, 성 최형 베드로
12월 14일이용리 베드로
1868년
2월 16일김경보 등 6명
5월 6일무명 순교자 30여 명
5월 28일이신규 마티아, 이재의 토마스, 권복 프란치스코, 조 로사
일자불명남 데레사, 김백철, 조계승
1871년
5월 27일김창실 안토니오, 김여강, 이돈호
7. 서소문 성지 역사표
1392년
조선 건국, 『예기』에 따라 한양 도성의 공식 처형장으로
‘사직단’ 서쪽 서소문 밖 설정
1756년
이승훈 한양 반석방(현 중림동 근교)에서 탄생
1784년
2월 만천 이승훈 북경 북천주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조선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를 주보 성인으로 세례.
1794년
12월 주문모 신부 입국
신유박해 The Shinyu Persecution (1801)
정조 사후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 김씨와 벽파가
남인 시파를 배척하기 위해 일으킨 최초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
이다. 대부분의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고, 살아남은 신도
들은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어 천주교 신앙의 전국적 확산과 서민
사회롤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1800년
선왕의 장례식이 끝나자 마자 천주교 박해의 풍문이 돌기시작함
12월 17일(음)최필공의 체포로 박해가 시작됨
1801년
1월 9일(음)
서울의 회장 최창현 체포
1월 19일(음)
명도회 회장 정약종의 책 궤짝 사건 발생
2월(음)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최필공, 이승훈 등이 서소문에서
참수. 지방으로 확산된 박해.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 체포, 경기도
포천의 홍교만 체포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 자수, 4월 19일 군문효수
전라도까지 확산된 박해: 유항검의 체포와 순교
9월 15일(음)
황사영 백서 사건 발발
12월 22일(음)
<척사윤음> 반포
12월 26일(음)
16명이 처형되면서 박해는 막을 내림
1831년
9월 9일
조선교구 설정
1836년
제 2대 교구장 앵베르 라우렌시오 범주교
(世亨 IMBERT LAURENTIUS) 입국
기해박해 The Kihae Persecution (1839)
시파인 안동 김씨와 벽파인 풍양 조씨 사이의 당파 갈등이 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이며 1839년 한해 동안 계속되었다.이 박해로
참수 순교한 신자는 전국적으로 70명,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에 이른다. 기해박해 순교자 70위가 시성(諡聖)되었다.
1839년
1월 16일(음)
권득인 체포되면서 박해 발발
4월 7일(음)
서울의 회장 남명혁, 이광헌 등이 체포 박해의 주동자
우의정 이지연은 대왕대비에게 공식적 박해령 요청.
<사학퇴치령> 반포
5월 3일(음)
경기도 고양의 용머리에서 김효임, 김효주 자매 체포.
배교자 김순성의 밀고로 현석문, 조신철, 정하상, 유진길 체포
8월 10일(음)
앵베르 주교 자수
9월 6일(음)
모방, 샤스탕 신부 자수
11월 23일(음)
<척사윤음> 반포
1841년
8월 22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와 성 요셉을 조선의 주보성인
으로 모심.
1845년
8월 17일 김대건 신부 사제 수품
1859년
9월 24일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82위 가경자로 선포됨
병인박해 The Byeongin Persecution (1866)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사형에 처한다는 조선 사신들의 보고(1866년
1월)를 듣고 집권 안동 김씨 세력이 서양인과 천주교도들을 처형하
라는 압박을 대원군에게 가함
1866년
2월 19일(음) 2월 19일(음)되기 전 최형, 전장운 체포
2월 23일(음)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 체포. 병인박해의 본격적
시발. 2월 3월에 선교사와 주요 지도층 인사들이 대부분 체포,순교
6월 24일(음) 조불 수호 통상조약
7월, 10월 7월(리델)과 10월(페롱, 칼래)에 3명의 선교사 중국으로
탈출. 일시적인 소강상태
9월 12일(음) <병인척사윤음> 반포. 박해의 일단락
10월 초프랑스 함대의 조선 출병. 병인양요 발발
한불수호통상조약 체결
1892년
11월 6일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 보이는 약현 언덕에 한국최초의 성당 - 약현성당 준공.
1925년
7월 5일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서소문 성지 41위)
1968년
10월 6일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성
(서소문 성지 3위)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성인 시성
(서소문 성지 44위)
2004년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시성 추진 운동 시작
(서소문 성지 27위)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124위 시복
(서소문 성지 27위)
8. 서소문밖 처형장은 어디인가?
서소문은 서울 도성이 세워지던 당시에는 소덕문(昭德門)이라 했다. 그 후 18세기 영조때에 이르러 이 문의 이름을 소의문(昭義門)으로 바꾸어 불렀다. 전통적 사상에 따라 방위를 논할 때 서쪽은 오행으로 금(金)에 해당된다. 이는 오상(五常)으로는 의(義)에 적용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서쪽은 형정(刑政)과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해석했다. 또한 서향(西向)은 가을을 상징하며 인생의 노쇠기에 해당지워졌다.
이러한 오행의 원리에 따라 서울 도성이 세워진 다음, 형장의 위치를 결정할 때도 이러한 오행에 대한 해석이 적용되었다. 또 장송(葬送)이 지날 수 있는 곳은 서소문과 수구문(현 광희문)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백주의 장송은 금지되었다. 이와 같이 15세기 전반기 태종 연간부터 이미 이 문제가 논의되었고, 당시에 이미 사형을 집행하는 장소로 서소문 밖이 결정되었다. 물론 15세기 당시에는 서소문 밖 특정 장소가 참소(斬所)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서소문 밖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의 지역 즉 서소문을 나가서 양천현에 해당되는 지역에서까지도 참형을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울의 성곽 주변에 위성취락들이 성립되면서 서소문 밖 일대에는 칠패와 아현이 형성되었고, 경조(京兆)의 본격적인 관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종전의 관행대로 서소문 밖은 여전히 공식적 행형지로 사용 되고 있었다. 서소문 밖에서는 참수형 뿐만 아니라 사약을 내려 처벌하는 사약사도 집행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광해군 5년 계축옥사 때에 인목대비의 부친이었던 김제남은 이 서소문 밖에서 사사되었다. 1694년의 갑술옥사 과정에서도 훈련대장 이의징이 서소문 밖 민가에서 사사당했다. 또한,1801년의 박해과정에서 천주교를 신앙하던 궁중의 나인들도 이곳의 어느 민가에서 사사당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서소문 밖은 참수형 뿐 아니라 양반이나 궁인에게 가해지던 사사가 진행되던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의 죽음은 참수터와는 관계없이 민간 여염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서소문 밖 처형지를 논할 경우에는 이러한 죽음의 형태까지도 충분히 감안하여 그 지점을 논해야 한다.
조선 시대 형장은 일반적으로 물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서소문 밖에는 한강의 지류인 만초천이 통과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연환경으로 이 지역은 형장으로 지정되기에는 적절한 구비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17세기 이후 서소문 밖에 주거지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어 유사 십자로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서소문 밖 네거리는 참형의 집행과는 별도로 죄인의 수급을 효수하기에 적절한 자리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성문 근처이므로 효수경중(梟首警衆)의 뜻을 알리기에는 알맞은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7세기 광해군 때에는 당고개에서 처형된 사람을 서소문 밖에서 다시 추형(追刑)하는 기록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세기 영조 연간에도 당고개에서 처형된 목호령의 수급을 서소문 밖으로 가져와 효수한 바가 있었다. 개화기 이곳에서 죄인의 수급이 효수된 광경을 묘사한 서양인의 글은 이러한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다. 즉, 서소문 네거리에서 형이 직접 집행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죄인의 수급은 이곳에서 효수되고 있었다. 이로써 서소문 밖은 조선왕조의 공식적 처형지로서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이곳에서 집행된 참형관계 기록에는 대부분 ‘서소문외’(西小門外)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19세기 중엽 이전의 모든 기록에는 ‘서소문외’로만 기록되어 있음을 보면, 이곳의 특정 지점이 참형 집행처로 지정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서소문 밖 네거리’와 같은 한정적 장소가 처형지로 나타난 때는 1866년의 박해과정의 일부 기록 가운데였다. 늦어도 이때에 이르러서는 네거리가 생길 정도로 주거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a-1 : 베르뇌 주교와 그 동료들이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광을 받던 같은 시각에 남(종삼)요한과 홍봉주 토마스가 네거리에서 처형되었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a-2 : 남(종삼)요한과 홍봉주 토마스의 머리가 아직 네거리의 말뚝에 매달려 있고, 형장에 아직 그들의 피가 흥건한데 이틀 뒤인 3월 10일(양력) 이번에는 최 베드로와 김진운 요한이 그곳에 와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이상에서와같이 1866년에 처형된 일부 순교자의 경우는 처형지가 서소문 밖 네거리로 확실히 나온다. 그러나 1801년의 순교자들이나 1839년의 순교자들 경우에는 그들의 순교지가 ‘서소문 밖’으로만 나오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하게 된다. 이는 늦어도 1839년도까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만 사형을 집행하지는 않았음을 제시한다. 한편, 특별한 경우에는 형 집행의 장소를 변경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1866년의 박해 과정에서 다블뤼 안 주교 일행과 장주기, 황석두와 같은 일반 신도들의 사형지가 변경된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관행으로 보면 외국인 선교사는 새남터에서 처형되고, 조선인 지도자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형장은 국혼(國婚)이 임박했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250리가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변경되었다. 1839년의 박해 때에 당고개에서 신도들의 사형이 집행된 바가 있다. 이때 형장을 당고개로 옮긴 까닭을 다블뤼는 그의 ‘비망기’에서 “이 처형과 다음 처형은 서소문 밖에서 해야 했다. 그러나 상인들이, 대목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하기를 청하였고 그래서 당고개 또는 새남터라 불리는 곳에서 시행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 ‘비변사등록’을 통해서도 동시에 확인된다. 이로 볼 때 사형지의 이동은 당시 관례적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상에서와같이 사형지가 아예 다른 지역으로 변경된 사례 이외에도 같은 서소문 밖의 형장이라 하더라도 특정 지점이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 500여 년 동안 한 장소만을 참형장소로 지정하여 변함없이 운영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서소문 밖에 주거지가 형성된 이후에는 이곳 주민들의 항의를 받아서 참형지가 ‘서소문 밖’이라는 범위 내에 있는 다른 지점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유럽의 도시에는 광장 일부에 사형 집행 터가 지정되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오행에 의해서 형장을 결정했던 서울의 서소문밖은 특정 장소라는 지점보다는 서향(西向)이라는 방위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이 때문에 별도의 지점이 형장으로 지정되지 않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형장은 시대에 따라 주거환경이 변화하게 되자 거기에 준하여 이동하게 되었다. 즉, 형 집행 당시의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서소문밖이라는 범위 내에서 이동할 수 있었다고 봄이 순리이다. 한편, 페레올 주교는 서소문밖의 주민들이 천주교인들의 처형장을 딴 곳으로 옮겨 달라고 수령에게 청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처형장소를 서소문밖이라 하더라도 주민들의 주거지로부터 일정하게 떨어진 다른 장소로 옮겨달라는 말로 해석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당시의 형장이 민가에 근접하여 있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추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료로는 다음의 기록을 들 수 있다.
b-1 : 9명의 희생자는 서소문 밖에서 그들의 영광스러운 제사를 끝마쳤다. 그들의 시체는 법에 따라 처형 장소에 3일간 버려져 있었다. 27일(양력) 월요일, 이른 새벽에 나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 시체들을 거둘 수가 있었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b-2 : 서소문 밖은 조선 500년 동안 죄인을 공개로 처형하던 사형장이 지금 서소문공원 자리(의주로 2가 16번지 4호)에 있었다. 전에는 이 공원 서쪽으로 만초천이 흐르고, 그 주위에는 채소밭과 백사장이 있었다. 이 백사장에서 죄인을 처형했던 것이다..... 서소문 형장에는 약 50보 사방으로 장막을 쳐 일반 시민들로부터 격리시켰다.(박경룡, 서울개화백경)
즉, 위의 자료 b-1을 보면 형장이 주거지와는 일정한 간격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순교자의 시체를 훔쳐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형집행장소와 주거지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조선후기 당시 참형집행과 관련된 2차적 자료를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즉 증언 자료와 문헌자료를 종합하여 집필한 b-2의 기록을 보면 민간 여염에 근접한 지점이 아니라 주거지와는 일정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 적어도 50보 이상 격절되어 있는 곳에서 참형이 집행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사진 기산 김준근, 참형도 참조>
이러한 사례는 기산 김준근(1890년대 전후 활동)의 풍속화 가운데 참형도를 보면 장막을 치고 감독관이 있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50보 내외의 거리를 두고 집행을 위해 장막을 쳤다는 기사의 진실성을 증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서소문 형장과 관련된 지명으로는 뚜개우물 혹은 망나니 우물이 있다. 이는 의주로 2가 헌다리 앞 참수터 동쪽에 있던 우물이라고 되어있다. 이 우물은 망나니 우물, 반우물이라고도 했다. 이 우물은 평시에 뚜
여기에서 뚜개우물골(개정동)이란 지명이 유래되기도 했다. 참수가 가능했던 지점의 동편에 이 뚜개우물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망나니 우물이라는 명칭 이외에도 뒷굴길이란 지명도 서소문 밖의 참형 집행과 효수경중이라는 사실과 관계된다. 뒷굴길이란 지명은 참수된 수급이 효수되어 있던 십자로를 우회하는 길을 말한다. 뒷굴길은 오늘의 의주로 2가에 있었다. 이 길의 이름은 굴의 뒷골목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굴은 참수터 인근에 있던 ‘도깨비 굴’과 관련된다. 즉, 이 일대에서 사형당한 원혼들이 원귀가 되어 도깨비 굴에 살다가 날씨가 좋지 않을 경우 행인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이 굴의 뒤쪽으로 뒷골목을 만들어 뒷굴길이라고 불렀다. 물론 오늘에 이르러서는 뚜개우물 혹은 망나니 우물이나 뒷굴길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지명들이 참수터를 비정하기 위해서 활용되어 왔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소문 밖의 참형지가 이미 500여 년 동안 사용되어 오던 과정에서, 이 일대의 경관이나 주거환경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서소문사거리나 뚜개우물 등과 같은 지명은 이 지역에 주민의 거주가 진행되었던 조선 후기 19세기 중엽 전후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지명만을 가지고 서소문 밖 참수터를 특정지점으로 비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공식적 참수형 집행장은 이미 조선 태조 5년(1397년)부터 오행론에 따른 도성 내 주요 지점의 비정에 따라 서소문밖으로 결정되었다.
이 형장은 서소문 밖 특정지점으로 고정시켜 참수형을 진행했던 곳이 아니라. 집형 시의 편의에 따라 서소문 밖의 공활지 가운데 불특정한 한 곳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 후 도성의 팽창과 더불어 서소문밖에 주민이 거주하고 유사 십자로가 형성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참수된 수급의 효수는 인촌의 왕래가 빈번한 네거리 부근에 하게 되었다. 그러나 참수형 집행장소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때에나, 민가의 반발이 있을 경우에는 서소문 밖과 만초천 사이에 있는 다른 지점으로 이전하여 형을 집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서소문 밖의 참형지점은 시대에 따라서 변동이 가능한 것이었으며. 특히 만초천변의 모래사장이나 만초(덩굴풀)가 있던 지역에서 이루어졌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러한 점에 따라 판단할 때, 조선 후기 서소문 밖 처형지는 오늘날 서소문 공원 내에 자리 잡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조광 교수, [2012년 한국교회사 연구소 연구포럼] - “서소문 역사문화공원의 추진과 서소문 성지의 복원방안” 중에서
9. 순교자 현양탑
서소문 순교성지에 대한 관심
서소문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과 “서소문 순교성지”에 대한 관심은 일찍이 서소문이 바라다 보이는 약현 언덕에 세워진 약현 성당의 신부들과 신자들에 의해 보존되어 왔습니다. 교우들의 증언에 의하면 약현 본당 신부들은 서소문이 있었던 지역을 가리키며 교우들에게 그곳을 지날 때마다 성호를 긋고 순교자께 기도를 바치도록 가르치면서 서소문의 순교자들과 순교성지에 신앙과 관심을 미약하나마 유지시켜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서소문 순교성지에 대한 범교회적인 관심과 성지 조성을 위한 노력은 1958년에 가서야 나타났습니다. 당시 경향 잡지사를 맡고 있던 윤형중 신부는 병인박해 100주년(1966년)을 앞두고 경향 잡지를 통해 순교자 기념관을 짓자고 주장함으로써 일제 때 시도 후 좌절되었던 순교자 현양회를 재건함과 아울러 서소문 순교성지에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사정으로 그 시도는 안타깝게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서소문 순교성지는 서소문 고가 도로와 경의선 철길, 한때 서울 수산시장이었다가 1977년에 조성된 서소문 공원, 그리고 고층 빌딩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더 이상 교회에서 어찌할 수 없게 되었고, 잃어버린 성지로 방치되었습니다.
첫 번째 현양탑 건립
서소문 순교성지에 대한 관심은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사업 중 시성식을 준비하면서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200주년을 맞아 여러 기념사업을 추진하던 중 시성될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의 성인이 서소문 순교성지에서 순교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지 확보는 고사하고 순교성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고증조차도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서소문 순교성지 조성 사업을 최우선으로 시행할 것을 계획하고 서울대교구 가톨릭실업인회에서 기금 지원으로 1984년 12월 22일 임송자(리타) 작가가 제작한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을 건립함으로써 서소문 성지 조성 사업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하지만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진 곳이 국유지인 서소문 공원 안이라는 한계로 인하여 순례객을 위한 아무런 편의 시설도 갖추지 못했고, 안내 체계 역시 미흡하여 교우들의 방문이 어려웠으며, 서소문 공원을 찾는 일반인들의 몰이해로 인해 순교성지로서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또다시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순교자 현양탑의 관리를 맡게 된 약현 본당 교우들은 주어진 여건 속에서 미약하나마 현양탑에 관심을 기울여 서소문 공원이라는 대중적인 공간에서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하였고 지역 주민들에게 현양탑의 가치를 인식시키고자 자주 기도회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탑 주위 공원 지하차고를 건설하면서 받은 충격과 경의선 열차의 빈번한 왕래로 인한 소음이 심한 까닭에 순례지로서의 품격은 물론 현양탑 자체의 보존에도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현양탑 자체가 훼손 되어 기단의 돌 들이 떨어졌고 탑을 이루는 돌들의 접착 상태가 불량하여 탑 속으로 물이 스며드는 문제까지 발생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1997년 서소문 공원이 새로 단장되는 것을 계기로 첫 번째 순교자 현양탑은 약현성당 내 기도 동산으로 옮기고 새로운 순교자 현양탑의 건립을 추진하게 됩니다.
현재의 현양탑
순교자 현양탑을 세운 목적은 천주교회 44명 성인과 27위 복자가 계시는 뿐만 아니라 서소문 형장에서 진리를 증거하다 희생된 수많은 유명. 무명의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아울러 그들의 위대한 정신과 믿음을 후손에게 전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성인과 순교자를 본받아 하느님 말씀의 증인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뜻으로 1999년 성령강림대축일에 새로운 현양탑을 세웠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1997년 4월, 조광호(시몬) 신부(화가, 가톨릭 조형 예술연구소 대표)를 중심으로 건축가 임근배씨와 설치작가 전종철씨와 함께 30여 차례 토의를 거치며 3년 동안의 작업으로 1999년 5월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서소문 근린공원 부지 내 콘크리트로 복개된 지하 공간(재활용 처리장) 위 53평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세워진 현양탑은 청동조각, 유리, 물, 자갈, 목재바닥으로 되어 있으며, 분수를 작동하기 위한 급. 배수 설비와 조명 설비가 첨가되어 있으며, 현양탑 아래에는 60여 평의 지하공간을 두어 시설물 관리 및 관리 보존 창고로 이용하도록 하였습니다. 현양탑은 주님의 행복선언 가운데 “복되어라, 의로움에 목마르고 굶주린 이들!(마태5장 6절)”을 주제로 설계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 형틀인 '칼'을 형상화환 화강석 3개의 탑은 죽음과 박해를, 주탑과 좌우탑 윗부분의 원형 형틀에서 흘러내리는 7개의 금빛 선은 순교를 통한 하느님의 은혜인 7성사를 상징합니다. 중앙 하단의 청동조각은 참혹한 순교자의 모습을 형상화하였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순교자의 모습은 예수(교회)를 품에 안은 성모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순교자를 오늘의 우리가 품에 받아들여야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탑을 중심으로 해서 왼쪽 탑은 44위 성인들의 오른쪽 탑은 27위 복자와 27위 순교자 명단을 기록하여 이곳의 역사를 현장화 하였습니다. 또한 현양탑 아래 분수에 잠긴 수천 개의 조약돌은 이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익명의 순교자를 상징합니다. '칼'의 형상이 죽음을 상징한다면 물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물속에 비친 탑을 통하여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한 생명의 이미지를 극대화 한 것입니다. 탑의 뒷면은 나자로의 부활 장면을 부조로 설치하여 우리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현양탑 설립 이후
2008년 4월 18일, 현양탑 앞에 상설 제대가 설치 되었으며, 매해 9월 순교자 대축일이면 이 현양탑 앞에서 “서소문 순교자 현양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또한 2010년 3월부터 매주 금요일 10시면 순교자를 기억하는 성지미사가 현양탑 앞 광장에서 봉헌되고 있으며, 2011년 2월 현양탑 옆에 서소문 성지 안내소가 설치되고 안내 봉사자가 배치되어 순례자의 순례를 돕고, 성지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현재 순교자 현양탑은 서소문 성지를 지키며, 서소문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에게 서소문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전해 주는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2011년 2만 5천여명, 2012년 5만 천여명,2013년 7만 이천여명, 2014년 상반기에만 6만 천여명이 순례한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은 ‘잊혀진 성지’였던 서소문 성지가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로 살아나는 데 초석이 되고 있습니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 순교자 124위 시복식에 앞서 시복대상자 중 27위가 순교하신 서소문 성지를 참배하셨습니다.
출처: 약현동성당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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