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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7)
남편 최경환의 죽음에 흔들렸으나 ‘영광스러운 순교’ 선택
- 심순화 작 ‘이성례 마리아’.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보다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 복녀가 신자들 사이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옥중에서 젖먹이 막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배교했다가 다시 순교를 자청했던 그녀와, 어머니를 고통 없이 단칼에 베어 달라며 휘광이(망나니)에게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을 전하는 네 아들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에서 어머니를 소개하는 내용이 딱 한 편 있다(1851년 10월 15일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최양업 신부 부모에 관한 이야기는 이만 줄인다.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조선의 저명한 경주 이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이 가문에서 유명 인사를 여럿 배출했다. 그중 한 분이 단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다. 그의 집안 딸들에게서 2명의 사제가 탄생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이고, 어머니 이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다.
이 마리아는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는데 18세에 프란치스코와 혼인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했는데도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던 이야기,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줬다. 그는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데도 남편을 공경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1893년 포졸들이 집을 덮쳤을 때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먹였다. 서울에 도착한 마리아는 남편과 큰 자식들과 격리돼 여인들만 있는 감방에 갓 난 아들과 함께 갇혔다. 다음날 팔다리가 으스러지고 곤봉에 찢겼으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증언했다.
그에게 가장 큰마음의 고통은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였다. 갓난아기는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이 안 나와 엄마의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남편 최경환)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줄곧 꿋꿋이 버텼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죽고 또 어린 것이 더러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마리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곤장과 칼 앞에서도 용맹했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다. 그래서 살덩이와 핏덩어리들이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다시 구제하는 은혜를 주셨다. 마리아가 풀려나 집에 가 있는 동안 그의 맏아들 최양업 토마스가 마카오에 보내졌다는 사실이 탄로 났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인 형조로 이송됐다. 거기서 마리아는 신자에게 순교 권고를 듣고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판관 앞에서 배교를 용감히 취소했다. 재판소에서 마리아는 자기의 갓난아기가 기아로 죽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두 아들(양업과 갓난아기)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다.
최양업의 첫째 동생(최의정, 당시 15세) 야고보는 한 달 이상 감옥에 머물면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갇힌 포로들을 위해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죽는 날까지 지켜보면서 증인이 됐다. 마리아는 형조에서 세 차례 고문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날이 가까워져 오자 평온한 모습으로 야고보를 불러 마지막 훈계를 했다.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다.
사형 집행일, 마리아는 기도를 마치고 난 후 야고보에게 어머니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형장에 따라오지 말고 떠나라고 명했다. 야고보는 고아로 남겨질 어린 세 동생(선정 안드레아 12세, 우정 바실리오 9세, 신정 델레신포로 6세)을 거느리고 살아야 할 처지였다. 마리아는 형장에서 야고보의 모습을 보고 그 순간 모정에 끌려 마음이 허약해지고 흔들려, 최후의 전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덜 된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까 봐 두려웠다. 야고보는 어머니에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하고 감옥에서 나왔다.
마리아는 다른 6명의 교우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휘광이의 칼을 받고 1840년 1월 31일 39세로 순교했다.
▲ 당고개 성지
당고개 성지
이성례는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오늘날 서울 용산 청파로 139-26에 자리한 당고개 성지<사진>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이 탄생한 순교성지이다.
당고개는 원래 신자들의 처형지가 아니었다. 설을 앞둔 상인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처형지를 옮겨 달라고 요청해 한강 가로 조금 나간 당고개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것이다.
이곳에서 1839년 12월 27일(음력)부터 이틀간 이성례를 비롯한 10명이 순교한다. 이들 중 한 차례 배교했던 이성례만 제외하고 모두가 1925년 7월 5일 시복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이성례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시복됐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1일, 리길재 기자]
6. 이성례 마리아 [복자 124위 열전] (51) 옥에서 굶주리는 아들 보며 한때 배교했으나 끝내 순교 1840년 1월 31일, 서울 만초천 하류 당고개에서 복녀 이성례(마리아, 1801∼1840)는 칼을 받는다. 그 순간 그는 누구의 얼굴을 떠올렸을까? 당고개로 끌려오기 얼마 전, 피와 고름이 엉겨붙어 썩는 포청 옥 멍석에 눕혀 있다가 젖도 물리지 못한 채 죽은 젖먹이 막내 스테파노였을까? 아니면 먼저 순교한 남편 최경환(프란치스코)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국땅에서 신학 공부에 정진하던 맏이 최양업(토마스)이었을까? 아무튼 부모의 순교로 고아가 돼 신산스런 삶을 살아야 할 자녀들을 남겨둔 채 이성례 마리아는 망나니의 칼을 받고 흔연히 순교의 길을 걸었다. - 복녀 이성례 마리아. 포청 옥에서 굶어 죽은 젖먹이 때문에 ‘눈물의 배교’를 해야 했던 그는 같은 날 순교한 박종원(아우구스티노)과 홍병주(베드로) 등 6위와 달리 아직 시성의 영예를 안지는 못했지만, 당고개에서 순교한 다른 순교 성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모성 때문에 신앙이 흔들렸지만, 신앙으로 모진 육정을 이겨내고 순교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신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이성례 마리아의 삶은 잘 알려져 있다. 충청도 홍주현 태생으로,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총명했던 그는 17세 때 최경환과 혼인해 홍주 다락골 새터에 살면서 21세 때 최양업을 낳았고 그 뒤로도 슬하에 다섯 자녀를 더 뒀다. 늘 지혜롭게 집안일을 꾸렸고, 일가친척들과의 불화도 없었다. 나이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면서 화목하게 가정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양으로 이주했으며 다시 박해의 기미가 보이자 강원도 금성현(현 김화군), 경기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92번길 일대) 등지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동안 맏아들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다. 이처럼 ‘신앙 때문에’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타향으로 전전하며 가난과 궁핍을 이겨내야 했지만 이성례는 기쁘게 참아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하던 이야기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른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주며 인내의 덕을 갖추도록 권면한 외유내강의 어머니였다. 또한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군 ‘지혜로운 여장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는 가난했지만 단란했던 가정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은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줬고, 그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자녀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마침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에 부부는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대접한 뒤 어린 자녀 다섯을 데리고 교우 40여 명과 함께 한양으로 향했다. 포도청에 압송된 이성례는 젖먹이와 함께 갇혀 300대 이상의 곤장을 맞으며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지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굶주리는 갓난아이를 지켜보는 고통은 그를 흔들리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배교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장남이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체포돼 형조로 압송된다. 당시 함께 갇힌 교우들의 권면으로 용기를 낸 그는 배교를 취소하고 갖은 유혹을 이겨낸 뒤 젖먹이를 하느님께 바치고 순교의 화관을 쓴다. 최양업이 마카오로 떠난 뒤 사실상 장남 노릇을 하던 둘째 최의정(야고보) 등 자녀들에게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교 순교자전」을 통해 전해온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님과 성모님을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처음부터 굶주리는 젖먹이를 뿌리치고 순교했다면, 그는 일찌감치 성인이 됐을 뿐 아니라 ‘위대한 순교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막내아들 때문에 흔들렸고 배교까지 할 정도로 모진 육정을 끊지 못했던 복녀 이성례 마리아는 그 모정까지 하느님께 봉헌하고 형장으로 향했다. 그랬기에 그의 열절한 순교 혼은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눈물샘을 자극한다. [평화신문, 2015년 3월 8일, 오세택 기자] |
7. 신학생과 사제들의 어머니
[새로운 복자] 이성례 마리아 -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내이자,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이신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신앙적으로 보면 최고의 영광을 입은 아내이고 어머니이십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면, 수많은 삶의 질곡에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 하셨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집안사람으로, 이존창이 순교한 1801년에 태어났습니다. 가성직자로 활동하였던 이존창에게 하느님께서는 성직자 가문을 허락하십니다. 그의 딸을 김대건 신부의 조모로, 그의 생질녀를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로 삼아 주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여장부다웠던 이 마리아는 17세 때 최경환과 혼인하여 충남 청양 다락골에 살면서 최양업을 낳았습니다. 이 마리아는 연하의 남편에게 순종하고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가며 집안사람을 화목하게 이끌었습니다. 이후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강원도, 인천 부평을 거쳐 안양 수리산 뒤뜸이에 정착해 교우촌을 일구고 살았습니다. 잦은 이주와 굶주림으로 어린 자식들이 칭얼거리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이집트 피난 이야기나, 골고타 언덕의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에게 인내를 가르쳤습니다. 이때에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납니다.
기해박해(1839년) 때, 남편이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마리아도 적극적으로 남편을 뒷바라지합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이 부부는 새벽녘에 급습한 포졸들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따라갈 테니, 잠시 쉬었다가 식사를 하고 떠납시다” 하며 밥상을 차려 주고, 장롱에서 옷을 꺼내 포졸들에게 입혀주고는, 교우 40여 명과 함께 행렬을 이루어 한양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감동한 포졸들은 오랏줄을 묶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마리아는 감옥에서 굶어 죽어가는 젖먹이 아들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어린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고문 끝에 옥사하자, ‘살아 내 아들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본능적인 ‘모성애’를 선택해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이후 아들이 신학생으로 유학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마리아는 다시 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한때 모성애에 이끌렸던 이 마리아는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는 여장부로 변해있었습니다. 감옥으로 음식을 갖고 오는 철부지 아들 최의정 야고보에게 “이제 그만 가거라. 절대로 천주님과 성모님을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형(최양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하며 끓어오르는 모정마저 끊고는 당고개(서울 용산 신계동)로 끌려가 용감히 참수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살아서 아들 사제를 보지 못했던 이성례 마리아가 천상에서 신학생과 사제들을 위해 당신의 모성애를 다하고 계심이 그려집니다.
[2014년 8월 3일 연중 제18주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8. 이성례 마리아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하반기 공개대학 지상중계] II' (10 · 끝)
순교자 이성례(마리아, 1801~40)와 그의 맏아들 증거자 최양업(토마스, 1821~61) 신부!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시복을 추진하는 대표적 모자 '하느님의 종'이요, 드러내고 또 드러내고 싶은 모범적 신앙 선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좌포도청에서 그 무서운 형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아내요, 그의 아들이다. 그래서 모자의 삶과 신앙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수없이 바쳐온 묵주기도처럼 이들 모자의 이야기는 아무리 되새겨도 부족할 뿐이다.
'모진 육정을 극복한 위대한 어머니'. 이성례는 이 한 구절로 설명될지 모르겠다. 어느 성극은 '엄니 이성례'라고 작품 제목을 정했는데, 이는 찰나의 세상에서 다 듣지 못한 어머니라는 말을 영겁의 천국에서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제목인지도 모른다. 이성례는 20년 동안 여섯 아들의 어머니로 살았지만 맏아들 최양업에게서는 15세 이후로는 어머니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막내 스테파노에게선 어머니라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옥중에서 하느님께 아들을 바쳐야 했다.
이성례는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집안에서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나 18세 때 세 살 아래인 최경환 성인과 혼인해 다리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1827년 무렵부터 서울 낙동으로, 강원도 김성으로, 경기도 부평으로, 안양 수리산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삶과 관련해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 번째로 이성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다고 한다. 기해박해 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기 전 치근거리는 포교를 따끔하게 혼내준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둘째로 이성례는 최경환 성인과 함께 한평생 성가정을 이끌며 진실한 신앙의 삶을 살았다. 1836년 맏아들 최양업을 하느님께 바친 것은 이들 부부의 신심을 잘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예다. 세 번째로 인내와 극기의 정신 또한 뛰어났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 동안 거듭했음에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다. 넷째로 혁혁한 순교의 용덕이다. 기해박해 당시 남편 최경환, 다섯 아들과 체포된 그는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증거했지만 막내 스테파노가 옥중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이에 거짓말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를 하고 집에 돌아온 이성례는 맏아들이 마카오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형조로 압송됐고 전옥서에서 동료들의 권면에 힘입어 다시 용덕을 갖게 됐다. 이 용덕은 스테파노가 굶어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육정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마침내는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행형쇄장(行刑鎖匠, 회자수)의 칼날을 용감하게 받았다. 이에 앞서 그는 자식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뿌리쳤다. 동양 윤리나 사상으로 보자면 이성례는 비정한 어머니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배교를 뛰어넘은 혁혁한 순교의 용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제 이성례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시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신앙 생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라는 점이다. 그는 1836년 2월 6일 경기도 부평에서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돼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ㆍ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마카오로 출발해 조선인 가운데선 최초로 신학 수업을 받았다. 또 1849년 4월 15일에는 상하이에서 조선인 가운데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랴오뚱 차쿠성당에서는 한국 천주교 사제로는 최초로 중국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함으로써 최초의 북방 선교사로 기록된다.
조선에 돌아온 뒤로는 무려 11년 6개월간 박해의 위협을 무릅쓰고 5개도 교우촌을 순방하며 사목했으며 한글로 '천주가사'를 지어 보급했다. 1853년에서 1856년 여름에는 진천 배티교우촌에서 조선대목구 신학교 겸 성당ㆍ사제관에서 거처했으며, 1854년 초엔 조선 신학생 3명을 선발해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로 파견하기도 했다. 1850년대 한글본 「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를 편찬한 활동도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1861년 6월 15일 사목 보고 차 상경하다가 진천공소(경북 문경설도 있음)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했다.
그의 신앙과 영성은 △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ㆍ희망ㆍ사랑 △ 예수ㆍ성모ㆍ성인 신심 △ 선교영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 그의 사상과 의의를 평가하자면 △ 조국애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상가 △ 서양 근대 학문을 수용하고 가르친 청소년 교육자 △ 한글을 사랑하고 널리 보급한 위민(爲民) 사상가 △ 서양음악 수용의 선구자요 천주교리 토착화의 선각자로 집약할 수 있다.
[평화신문, 2013년 12월 15일, 차기진(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정리=오세택 기자]
9. 이재행과 이성례, 정태봉과 정산필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온순하고도 단호하며 곧고 자비로운 성격의 이재행 안드레아(1776-1839년)는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 가족과 함께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더 평온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재산과 고향을 떠나 산속에 은거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이주하느라 가난하게 되어 천한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시련과 빈곤 속에서도 그가 보여준 인종(忍從), 동료애, 모욕을 감당하는 인내심, 언사에서의 신중함, 가족을 가르치고 부양하는 정성 등 많은 덕행은 모두의 칭찬과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순흥의 곰직이마을(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살았던 그는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잡으러 온 포졸들을 기쁘게 맞이하였고, 기꺼이 안동 관아에 끌려갔습니다. 잔혹하게 매를 맞으면서도 그는 관장에게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의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제게 묻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대구 감영에서도 엄청난 형벌과 회유를 받았습니다. 감옥에서 하루 한 차례만 음식을 먹었고, 그 나머지를 가장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부인과 자녀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통과 슬픔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박사의 안드레아가 “욥 성인을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말에 자극을 받았고, 모든 것을 준비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 12년만인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박사의,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63세의 나이에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포졸들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인데, 순교자들은 그들을 가까이하는 모든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1801-1840년)는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칭얼거리면 예수님과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주었습니다. 1839년 포도청 감옥에서 곤장과 칼에도 용맹하였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 약해졌습니다. 젖먹이 스테파노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배교한 뒤 얼마 있다가 체포되어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용감히 배교를 취소하였고, 모든 유혹 특히 모정에서 오는 나약한 생각을 끝까지 물리쳤습니다. 기아와 비참으로 말미암아 막내아들을 가슴에 묻으면서도 두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순교 직전 둘째 아들을 불러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하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당고개(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동료 6명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충청도 덕산 출신 정태봉 바오로(1796-1839년)는 내포회장 정산필 베드로의 사촌(또는 육촌)입니다. 선하고 호의적인 성격을 지닌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촌 아저씨 집에서 자라면서 고아로서 적지 않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자립할 나이가 되자 처자식들과 함께 전라도 용담고을로 이주하였는데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용담에 거주한 지 3년이 지난 1827년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순교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던 그는 때때로 정사각형 나무토막을 턱밑에 갖다 대고 웃으면서 “내가 이와 같이 칼을 받는다면 아마도 내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찌나 영적 독서에 몰입했던지 책을 들면 끝까지 읽고 나서야 책을 덮을 정도로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하였습니다. 용담의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문초와 함께 한 차례 다리에 매질을 당한 뒤 전주로 이송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내면서 어린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 이태권 베드로,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등과 함께 43세의 나이에 전주 장터(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덕산의 양인 집안 출신인 정산필 베드로(?-1799년)는 과격한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부터 유순하고 친절해졌습니다. 주 신부에게 내포지방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기도와 경건한 독서에 열심하였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1798년(또는 1799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현 덕산초등학교 자리)에서 많은 신문과 고문을 받았는데, 곤혹함이나 고통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고, 항상 수감된 동료 신자들을 격려하였습니다. 1799년에 참수(또는 장사형)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성월입니다. 기해박해 순교자인 이재행 안드레아와 이성례 마리아의 눈물겨운 신앙실천과 순교, 충남 덕산 출신 정태봉 바오로와 정산필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갈망을 우리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10년 9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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