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탄생"관련성지
16. 중국요동반도 남단 차쿠성당
1842년12월31일, 압록강을 다시 건너 중국측 변문으로 감 .
체포될 것 같아 김대건은 다시 의주로 발길을 돌렸다. 굳센 김대건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자 지쳐서 눈 속에 쓰러져 잠들었다.
이때 어디선지 "일어나 걸어라"하는 소리가 들리고,그림자 같은것이 어둠 속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보였다. 훗날 김대건은이 일을 천주의 섭리였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43년 1월 6일에는 메스트로 이 신부가 있는 백가점으로 돌아가게되었다.
1843년 1월 백가점으로 돌아온 김대건은 그곳에 머무르면서 입국길을 트기 위해 팔방으로 노력했다. 훈춘을 거쳐 함경도 경원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 방법을 찾아보 았으나, 거기서 서울까지 무사히 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서자 이계획을 일단 포기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서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요동반도 남쪽 장하 시에서 북쪽 70리 거리에 위치한 차쿠는 백가점과 개울하나를 가운데에 둔 같은 마을이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의 중국 요동 지역 사적지이다. 차쿠는 마을 이름으로 지금은 용화산이라 부르고 있다. 두 번째 사제이신 최양업 신부님의 첫 사목 지 중 한 곳이며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차쿠 성당은 1867년 이래 조선에 파견 된 선교사들이 박해로 입국하지 못한 채 이 성당에 거주함으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1870년엔 리델 주교가 차쿠에 신학교를 설립 하였다고 한다.
현재 자리는 그 옛날 차쿠 성당 자리는 아니다. 지금은 한 달에 한번 미사가 올려 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 요동 남부의 장하 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60-70리 지점에 있는 차쿠는 인근에 있는 산의 이름을 따서 용화산(蓉花山)으로 불리는데, 행정 구역상 장하 시에 속한다.
1840년대 베롤 주교는 양관 성당을 건립한 뒤, 차쿠에도 아름답고 높은 첨탑을 가진 성당을 건립하고 그 주보를 로마에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과 같은 이름으로 정하였다.
왜냐하면 차쿠 주변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눈이 오면 사방이 눈으로 덮여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곳에 가기 위해서는 천산산맥의 끝 부분에 속해 있는 높은 산들을 넘어야 한다. 또 차쿠 남쪽 가까이에는 아름다운 계관산(鷄冠山)이 솟아 있는데, 이러한 차쿠의 위치에 대해 조선 선교사들은 "성모설지전 성당은 북쪽으로 영광의 산, 남쪽으로 작은 시내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계관산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최근에 차쿠 성당에서 사목 중인 청주교구 이태종 사도요한 신부의 증언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성모 설지전 성당은 현, 차쿠 성당에서 직선거리로 약 200~300미터 정도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한다. 현재 그 자리에는 공장이 들어서있지만, 그 공장 터까지 현 차쿠 성당 부지였다 한다.
또한 백가점 교우촌 역시 현 차쿠성당에서 직선거리로 700~800미터 거리 용화산 아래에 위치한 곳으로 한 부락 안에 차쿠 성당, 성모 설지전 성당, 백가점 교우촌이 있었음이 확인 되었다.
차쿠 성당은 이후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목 거점이 되었으며, 베르뇌 신부와 최양업 신부도 이 곳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차쿠 성당(지금의 용화산 성당)은 1860년대에 와서 다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동 지역 안에서도 차쿠 성당이 조선과 가장 가까웠고, 이로써 1867년 이래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이 곳에 거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건너온 파리 외방 전교회의 리샤르, 마르티노, 그리고 훗날 제7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는 블랑 신부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문에 조선으로 가지 못하고 이 곳 차쿠에서 생활하였다. 이어 조선을 탈출한 칼래 신부와 리델 신부도 차쿠로 와서 조선 입국을 모색하게 되었다.
1869년 베롤 주교에게 요동 사목의 재치권을 부여받은 리델 신부는 조선 교회의 장상으로서, 또 1870년 이후에는 교구장으로서 모든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당시 조선 선교사들이 사목 중심지로 삼은 곳은 '차쿠'(차溝)라는 교우촌이었다.
우선 그는 조선교구의 대표부를 차쿠에 두고 그 안에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리샤르 신부를 차쿠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하여 대표부 일과 경리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1876년부터 하나 둘씩 선교사들을 조선에 입국시키기 시작하였다. 한국 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에 접근하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렸는데도 리샤르 신부는 차쿠의 사목을 맡고 있었으므로 조선으로 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80년 9월 장티푸스로 사망하여 차쿠 성당 앞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동시에 리델 주교는 차쿠의 대표부를 일본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1881년에 일본을 방문하였다가 나가사키에서 발병하여 상해, 홍콩을 거쳐 다음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이후 조선교구의 대표부가 나가사키로 이전되면서 조선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요동에서의 재치권도 자연히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