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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은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인간의 유전정보인 DNA만봐도 위대성 확인합니다. 디옥시리보핵산이라는 영어약자가 DNA입니다. DNA집합체를 게놈이라합니다. 발음에 조심해야합니다. 우리 세포 한 개에 들어 있는 DNA정보를 책으로 만들면 1000권이고 일렬로 쌓으면 아파트 13층까지 쌓을 수 있다합니다. 몸 전체에 대해 책으로 만들면 미국 그랜드 캐니언을 40번 메울 수 있는 분량이라 합니다. 인간을 이렇게 형이하학적 관점으로만 볼 수없습니다.
인간은 영과 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희노애락이라는 감정도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예술도 추구합니다. 원숭이가 바이올린 켜면서 음악 즐기는 거 보셨습니까? 젓가락으로 간단히 두드릴수 있는 리듬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은 종교심도 있습니다. 원숭이가 물 떠 놓고 비는 거 보셨습니까?
오늘본문은 인간이 불행하게된 실상을 보임과 동시에 원인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를 전가 해 주는 방식을 속전과 화목제물로 증거합니다.
지금부터 인간의 죄인된 모습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늘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하고 싸웁니다. 개인 간에도 싸우고, 집단 간에도 싸우고, 나라와 나라 간에도 싸웁니다. 나라들끼리 연합해서 다국적으로도 싸웁니다. 요즈음 남북관계가 상당히 긴장 상태입니다. 북한에서 미사일 쏘면 우리도 대응해서 쏩니다. 미사일 한 발당 최대 60억이 든답니다. 얼마전에는 드론이 넘어와 긴장했습니다.
이렇게 싸운다는 것은 서로 선한 기준이 있고 각자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함으로 싸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제대로 잘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TV켜고 뉴스를 보면 아름다운 이야기만 나옵니까? 99프로가 좋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대부분 범죄이야기가 나옵니다. 법정다툼에서 졌다고 상대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자살방화를 하고 20대 부인이 40대 남편과 돈 때문에 다투다가 잠든 남편을 칼로 살해하는 뉴스도나옵니다.
세상은 많이 잘못됐습니다. 오늘 본문 9-18절을 보면 세상이 어떻게 불행한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아래 성경 참고 구절 9-12절까지 봅니다. 본문은 우리 모두다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아래는 영향권아래 있습니다. 본문은 아예 우리가 태생이 죄인이라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짓습니다. 깨닫는 자가 없음은 영적인 무지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유투브 검색만 해도 노래 잘하는 사람 많습니다. 기네스북을 보면 더 많습니다. 얼마 전에 타개한 송해MC는 최고령(95세) 노래경연 MC 로 기네스북에 올랐답니다. 전문가는 많지만 반대로 영적으로는 무지합니다.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돼지머리 놓고 절합니다. 애기동자 찾아가서 점도 봅니다. 그리고 심지어 뭐라 합니까? 우리의 조상은 원숭이라합니다. 본문에 치우쳤다는 뜻은 길을 벗어났다입니다. 무익하다는 맛이 간 우유란 뜻입니다. 맛 간 우유는 쏟아버려야합니다. 본문은 그만큼 하나님이 보기에 인간은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12절 하반절은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합니다.
그리고 13-18절 부터는 죄 아래 있는 자들의 실상입니다. 목구멍, 혀, 입술, 입에 독은 사람이 말로 짓는 죄를 말합니다. 혀는 부드럽지만 사람을 죽이는 힘이 있습니다. 죄인의 특성은 입만 뗐다하면 남과 비교하고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입술에 독이 있다는 뜻은 이집트산 코브라를 염두 해 둔 발언입니다. 코브라는 독도 강하지만 독을 쏩니다. 우리도 말로 사람을 쏴서 죽입니다. 총칼보다 말이 더무섭습니다.
포털검색을 하다 남의 말에 상처 안 받는 특이한 방법 있어 소개합니다. 남이 나에게 한 비방 말을 종이에 일일이 쓴 다음 갈기 갈지 찢어 휴지통에 버립니다. 과연 효과 있을까요? 종이에 쓰면서 더열 받지 않을까요?
본문에 발은 피흘리는데 빠르다란 뜻은 폭력적인 수단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것도 아주 빠르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인류는 전쟁을 끊임 없이합니다.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피흘리고 있지 습니다. 시리아 난민 소년이 한 명언입니다. “그냥 전쟁만 뭠춰주세요! 그게 바라는 전부입니다.” 영국시인 줄리안 그렌펠은 “전 전쟁이 좋아요. 전쟁은 커다란 소풍같아요.”라고 전쟁예찬합니다. 우리속담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은 불구경,싸움구경입니다. 요즈음 폭력이 더 심해집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옛날에는 권투가 인기였습니다. 솜뭉치 큰거끼고 주먹으로만 상대 얼굴과 몸만 때렸습니다. 요즈음 UFC는 얇은 장갑 끼고 온몸 다 써서 기절 할 때까지 때립니다. 심판이 기절 하나 안하나 살피고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16,17절은 죄의 결과를 말합니다. 인간은 파멸과 고생과 평강이 없게 되었습니다. 파멸 속에는 죽음도 포함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왔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왜 이렇게 죄를 짓고 불행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가 본문에 나옵니다. 본문에 대조적인 두 단어가 나옵니다. 거짓과 참(4,7절) 선과 악(8절) 의와 불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알려주는 구절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다(4,7)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다.(5,25)
창세기 1장26절을 참고하면 처음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습니다. 형상은 성품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며 거룩합니다. 우리 인간 속에도 그런 성향을 심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선하게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코드가 심어져있습니다. 우리가 눈만 뜨면 싸우는 이유가 선악의 기준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 우리가 선하게 살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선한 성품을 심어놓았다는 예로 종교의식 봅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씻어내는 의식을 합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목욕하고 동물피도 뿌립니다. 하나님은 선을 요구하고 인간은 요구대로 살지못하여 불안하고, 죄책감 갖습니다. 이것을 씻기 위한 의식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고 싶어도 못사는 이유는 본문11,18,23절에 나옵니다. 11절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습니다. 18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죄를 함부로 짓습니다. 23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만 위해 삽니다. 착한일도 들여다보면 자기만족이고 자기영광을 위함입니다. 다 제 잘난 맛에 삽니다. 이상 세 구절을 종합하면 인간이 하나님 품을 떠났기 때문에 선하게 살고 싶어도 살지못합니다. 그럴 힘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 품을 떠남으로 절대성을 잃었습니다. 사단의 손아래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구원론하면 왜 그렇게 딱딱한 말을 씁니까? 의와 불의, 선과 악, 죄, 율법, 정죄, 심판, 칭의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쉬운 말을 써도 되지 않겠습니까? 법정 용어를 써야만 하는 이유는 왜입니까? 바로 인간의 상태와 하나님의 요구가 의롭느냐 불의 하냐 선하냐 악하냐의 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저주받은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 갈 길로 가는 인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시고, 손을 내밀고, 끊임없이 찾아줍니다. 손내민 하나가 이스라엘을 택했습니다. 이들에게 율법을 주어 지켜서 의인되게 요구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19,20절에 보면 실패합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선행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율법은 마치 죄를 보는 거울 같습니다. 빨리 죄를 깨닫고 두 손 두 발 들고 하나님께 나오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 앞에 서면 난 작아집니다. 죄없다고 변명불가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입을 막을 수밖에 없다합니다.
지금까지의 진술은 죄인인 인간이 의로워지는데는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의 영적 상황은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상태이고 응급실로 업고 뛰어가야 할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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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희망없습니까? 아닙니다. 21절부터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본문 원어는 이제는 앞에 그러나 가 붙습니다. 영어로 but now입니다. 대전환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캄캄한 터널을 지나 동굴 밖으로 나왔다는 표현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전할 때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뭔가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차별 없이 의롭게 됩니다. 구원받는 다는 것은 의롭게 된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이 의라는 옷을 입혀 주시고 너 의인이야 하고 선언했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입니다. 본문에 주목할 단어는 나타났다입니다. 만들어졌다. 조작되었다의 반대 말입니다. 나타났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 사건이라는 뜻 입니다. 복음은 철학, 사상, 관념, 이론, 교훈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난타 난 사실 형이하학적입니다.
복음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역사적으로 나타난 사실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갑자기 나타난 분이 아니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수 천년 동안 예언된 분입니다.
23절부터는 이 나타난 예수님에 대하여 다른 말로 진술합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본문은 속량이라는 단어를 써서 구원을 설명합니다. 속량은 노예나 죄인을 누가 돈을 대신 내주고 풀어주는 행위이고 이 돈을 속전이라 합니다. 속량은 2가지 의미입니다. 첫째 자유롭게 풀려난다. 행방된다입니다. 두번째 누가 죗값으로 돈을 대신 지불해준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사단과 악령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다 지불한 셈이됩니다.
본문 25절은 우리의 죗값을 지불한 방법이 나옵니다. “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속량의 방법은 그의 피로써 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합니다. 그의 피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해방시키고 죗값을 대신 내주는 행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사건입니다.
본문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했다에서 간과는 볼 간(看) 지날 과(過)자를 써서 지나가면서 대충 본다입니다. 아예 눈감아버린다는 뜻이고 의역하면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 과거의 죄뿐아니라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습니다. 속량은 구원이 우리 입장에서는 값없이 주어졌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시키는 값비싼 댓가를 치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값비싼 댓가에 대한 감사를 늘 해야합니다.
25절에는 예수님의 역할에 대하여 다른 표현이 나옵니다.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입니다. 화목제물은 불태우는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켜주는 제물입니다. 화목이라는 말은 가해자 가 피해 보상으로 피해자의 화가 풀어지고 좋은 관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는 반드시 진노합니다. 성경은 580번이나 이 진노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진노한다고해서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가볍게 화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속성상 죄와 죄인에 대하여는 그냥 두고 보지 못합니다. 죄는 그 자체도 문제지만 인격이 결부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인격에 해를 끼치고 나의 영 혼도 파괴합니다. 또 죄는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까지도 파괴 합니다.
죄는 관계를 파괴함으로 양쪽 편을 만족시킬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 제물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피 흘려 죽게하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이 화목제물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풀렸습니다. 화목제물로 세우셨다에 세웠다는 기념비를 세움 입니다.갈보리에 세워진 십자가는 인류에게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빼놓고 복음과 구원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나 이제는 But now 나타난 예수님의 속량 때문에 또 세워진 예수님 화목제물 때문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율법과 정죄와 진노의 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BC가 끝나고 AD가 시작되었습니다.
1-8절은 몇 가지 논쟁에 대하여 정리합니다. 1,2절로 돌아갑니다. “1.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미리 택한 유대인에게 아무런 혜택이 없다면 유대인이 좋을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은 것 자체가 나음이며 유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말씀을 맡음은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은 신구약 성경 66권을 말합니다. 성경은 보통 책이 아닙니다. 19세기에 들어와 고등비평이라는 학문이 생기면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려합니다. 성경의 영감, 계시, 무오류성을 훼손하려 합니다. 성경이 훼손되면 우리의 믿음도 흔들립니다.
3,4절은 택한 유대인이 실패했으면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본문에 미쁘다는 신실하다는 순수 우리말입니다. 본문은 다윗의 시를 인용합니다. (시편51:4) 하나님께는 문제가 없고 언제나 의로우심을 마치 하늘 법정에서 재판장이 판결하는 모양으로 연출합니다. 인간은 실패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유지해 간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유대인이 넘어져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복음 역사를 이룹니다. 우리 이런 생각하기 쉽습니다. 내가 교회에 없으면 제대로 굴러가는가? 네 굴러갑니다. 하나님은 플랜B, 플랜C, 플랜D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 넘어지자 복음을 이방인에게 넘기고 유대인은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시기심이 생겨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5-8절은 구원받았으니 이제 막살아도 되나? 죄를 통 크게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을까?하는 논리에 대한 답입니다. 본문을 이해 시킬 적당한 예가 없을까 생각하다 손양원 목사의 예를 들겠습니다.
손양원목사는 여수 애양원에서 나병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해인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 당시 반란군 공산당원이 예수쟁이란 이유로 그의 두 아들을 총살을 합니다. 손양원 목사는 그런 원수를 용서하고 심지어 양아들로 삼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아들이 친 아들을 죽여서 아버지가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으니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을 죽여서 악행을하면 아버지는 사랑의 원자탄이 아니라 사랑의 수소폭탄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궤변이 본문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말꼬리 잡기식의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바울은 이 논리에 대하여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마무리합니다. 악은 선을 생산해 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죄를 인정하기 싫고, 죄에 대한 책임을 지기 싫고, 하나님께 전가시키려는 억지 주장일 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필자의 로마서 이외 원고는 블러그 "빛고운구슬" [성경탐구 및 강의원고]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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