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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슬픔·고통을 천착해온 철학자 김상봉. 그는 “우리들이 참된 주체가 되어 만나야 한다. 만나서 길을 같이 찾고 같이 생각하고 형성해야 한다. 연대는 책에서 나온다”고 했다. 고통의 현장으로 달려가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담심리사. 고통 속에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정신의 깊이는 오직 고통의 깊이다.” 철학자 김상봉만큼 고통·슬픔을 천착한 이는 드물다. 천착. 구멍을 뚫는 일.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허울·허위·허영을 찢고 참된 만남으로 나아가는 일. 섬과 같은 ‘홀로주체’를 벗어나 ‘서로주체’로 만남의 공동체를 이루어내는 일.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뜻을 지닌 주체·주인이 되어야 하는 일. 서로가 서로를, 오직 슬픔 속에서, 모심과 섬김의 마음과 태도로 만나는 일. 주체-만남-공동체로 이어지는 ‘사유의 삼각형’, 의식(반성, 내 안에서 나와 너의 대화)-인격(말,사람들이 연대하는 장치)-만남(연대, 모심/배움, 선험적 세계)의 개념.그것이 김상봉 철학이다.
김상봉의 민주화 철학- 슬픔 인간론
현대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철학적 성찰을 필요로 하는 주제이다. 1987년의 민주화 성취를 찬양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김상봉은 민주화의 지속적 과제를 주장한다. 지속적 과제를 이루어 나가야만 1987년의 민주화 성취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민주화 개념은 단순히 직접 투표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인간에 대한 성찰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상봉의 민주화 철학은 구체적일 수 밖에 없다.[1] 예를 들어, “희망과 대안”이라는 이름의 진보적 시민단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나 <선거연합이나 좋은 후보 추천 및 지원을 통해 정치에 개입하기로 했다>는 선언 같은 것은 공허하다고 비판한다. 안타까운 마음이야 이해가 가지만, 경기하는 선수가 힘이 달리는데 밖에서 훈수를 두어 판세를 바꾸려는 발상은 놀랍고 기이하다고 생각한다. 밖에서 훈수를 두기보다 차라리 정당에 입당하라고 권한다. 대의민주주의 시대에 정당 밖에서 정치의 희망과 대안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진보신당이 자본과 타협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특정 신문을 보지 않는 것이 진보적 교양이 되었듯이, 어떤 재벌 제품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보적 문화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육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김상봉은 스스로 ‘학벌 없는 사회’라는 시민운동에 참여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본격적인 저술도 하였다. 개별적 주체가 학벌이라는 한국 사회의 구성물에 의해 집합적 주체성으로 대치된다는 것이다. 그는 학교교육에 대해 부정적이다: “긍지 높은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학교를 떠나, 낙오를 두려워 말고 자기의 길을 가라. 병든 세상에서 낙오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선구자가 되는 법이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 경기도 부천의 한 초등학교 교장이 학생 성적이 좋지 않은 학급의 담당 교사 둘을 교장실로 불러 30센티미터 자로 손바닥을 때린 사건에 대해, “이젠 교장이 손바닥을 내밀라거든 책상을 엎어라! 그것이 근대화다”라고 주문한다.
김상봉의 민주화 철학은 구체적이면서 또한 다양하다. 그는 다양한 주제들을 어떻게 민주화와 관련시키고 있는가? 첫째 그는 민주화란 모든 형태의 독재에 맞서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고, 둘째 민주화는 슬픔이라는 인간 연대성의 표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슬픔 인간론이 김상봉의 민주화 철학의 내용인 것이다. 슬픔 인간론이 어떻게 민주화 철학으로 이어지는가를 살펴보자.
1) 대안적 철학-슬픔 철학: 김상봉(2002: 249)의 슬픔 인간론은 기존의 철학에 대한 대안론이다. 그는 기존의 철학을 서양의 자아 중심주의에서 읽어 낸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프롤레마이오스(Ptolemaius)의 천동설처럼 대상을 인식의 중심에 설정하였지만, 칸트에 이르러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의 지동설처럼 사람이 인식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존재의 진리는 더 이상 사물적 존재자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나의 대상 속에서 반성되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칸트는 첫째 <시간과 공간이 사물을 지배하는 객관적 관계가 아니라 인식 주체가 대상을 직관하는 형식이다>라고 주관화하고, 둘째 <직관에 주어진 대상의 잡다한 요소들을 인식 주체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논리 또는 이성 능력을 통하여 종합, 통일한다>고 하여 대상 인식의 길을 보였다. 칸트의 인식 주체 또는 자아는 “선험론적 자아(transcendental Ich)”라고 불리운다.
김상봉(2002: 275)은 칸트의 “선험론적 자아”를 독일 관념론의 “절대적 자아”와 관련시킨다. 칸트의 자아는 모두인 동시에 아무도 아니고, 어떤 경험적인 개인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자아이다. 독일 관념론은 이러한 칸트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능력에 주목하여 이를 절대화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나 속에 있다. 그리고 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칸트의 자아는 독일 관념론의 초자아(Ueber-Ich)가 된 것이다. 경험적 자아는 이념적 “초자아에 예속되고 억압될 수 밖에 없다. . . 초자아에 억압되는 자아가 바로 우리 시대 정신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더 이상 근대적 정신이 생각했던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체의 죽음이다”(2002: 277).
김상봉(2002: 234-243)은 독일 관념론에서 절정을 이룬 서양 철학의 자아중심주의의 본질과 면모를 “나르시즘”이라는 은유로 그려내고 있다. 미소년 나르시스는 자기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말을 반복만 하는 소녀 에코(echo) 와 대화 한번 하지 못하고,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만을 사랑하다가, 번민하며 죽는다. 나르시스는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지는 우월의식으로 나타나고, 진정한 타자를 만나지 못해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없으며, 자신을 타자화 하여 몰입하고, 홀로 주체성 속에서 자기와 진정한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상실로서의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김상봉(2003: 259-261)의 대안철학은 서양 전통의 홀로 주체성을 대치할 서로 주체성에서 찾아진다. 홀로 주체성이 자아의 반성 과정을 통한 결과라면, 서로 주체성은 자아와 타자의 만남을 통한 구성이다. 그리고 이런 만남은 한국의 경우 고난의 역사를 통해 발생한다. 서양사가 자유라는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 나르시즘의 과정에 들어 갔다면, 한국사는 수난의 치욕을 통한 슬픔의 경험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자유 발전의 역사라고 할 때 자아는 개인주의의 자아가 되지만, 역사를 슬픔 공유 확장의 역사라고 할 때 자아는 공동체적 우리에 뿌리를 내린 자아가 된다.
김상봉(2003: 23-26)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의 가치를 구현하는 노력일 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가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주목 하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슬픔 경험에서 너와 내가 만난 우리, 이러한 우리의 공동체이다. 우리 공동체는 각자가 자신의 주인일 것을 서로 요구, 존중, 보호하는 공동체로서, 이해 계산의 공동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자신의 주인일 수 있기 위해서는 권력 독재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독재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 독재, 교육 독재, 도덕 독재등, 김상봉이 참여하는 민주화 운동의 범위는 이렇게 규정되고 있다. 이제 그의 각론적 주제들에 천착해 보기로 한다.
2) 슬픔과 민주주의: 김상봉의 민주주의론은 정치철학적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원형적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을 기본으로 갖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나타 난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그리스 비극이 민주주의의 기본을 보여준다고 본다. 민주주의는 비극적 슬픔과 연결된 인간론의 표현인 것이다.
김상봉(2003: 105-119)은 그리스 비극이 당함의 비극이 아니라 행함의 비극이라고 판단한다. 역사나 자연의 뒤틀림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권력이나 돈의 횡포로 슬픔을 겪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리스 비극은 주인공이 주체적 행위자로서 참여한 사건(hamartia) 에서 비롯된 고난의 이야기이다. 전자가 노예의 비극이라면, 후자는 자유인의 비극이다. 자유인의 관점에서 볼 때 전자는 숨기고 싶은 치욕의 경험이지만 후자는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그리스 비극은 슬픈 이야기이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개개인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동질성으로 인해 같은 자리에 처하게 된다(2003: 261-264). 슬픔은 인간들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이 만남이 중요한 까닭은 “진리가 오직 슬픔 속에서만 계시”(2003: 383)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 간의 만남이 진리라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비극이 자유인의 비극이라는 사실은 인간이면 누구건 간에 당면할 수 있는 비극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비극적 슬픔의 가능성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이 이렇게 슬픔의 인간론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비극이 목표로하는 것은 “민주주의, 곧 자유로은 시민 공동체”였다고 김상봉(2003: 23, 20-26)은 해석한다. 슬픔을 통해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될 때, 우리의 나와 우리의 너는 서로 주체성의 나와 너가 되는 것이다. 김상봉은 이러한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되는 행위를 “정치”라고 부르고, 민주주의란 그러한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의 정치를 가치로 채택하는 관점이라고 본다.
3) 서로 주체성: 김상봉에게서 슬픔 인간론과 민주주의를 연결하는 핵심적 개념은 앞서 본 것처럼 <서로 주체성>이다. 그렇다면 서로 주체성은 보다 세밀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로 주체성을 위한 지지 논변은 적어도 세 가지로 구별되어 제시될 수 있다. 의식, 인격 그리고 만남의 개념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서로 주체성을 총체적으로 표상하지만, 이들이 각기 서로 주체성을 향한 고유한 징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독립적인 논변으로 구성될 수 있다. 이 논변들의 설득력에 따라 홀로 주체성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개념이 서로 주체성일 수 있는지가 보여 질 것이다.
전통적으로 <의식>은 주체성의 기본 개념이었다. “나는 생각 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에서의 데카르트 “생각”은 모든 의식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비트겐슈타인이 보여준 것처럼, 유아론적이었다. 데카르트 생각은 홀로 주체성의 실체이다. 그러나 김상봉(1998: 361-373; 2002: 316-319)은 다른 종류의 의식론을 제안한다. 그에게서 의식은 추상적 동일성이 아니라 내 안의 나와 너의 대화이다. 내 안의 너와 나는 반성 형식을 빌어 대화를 하는 것이다. 내 안의 너와 나는 여기에서 역사와 현재 사이를 왕래하면서 “지금과 역사의 본질적 동일성”으로 들어간다. 김상봉의 의식은 유아론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서로 주체성의 활동이다.
김상봉(2002: 312-314)의 <인격>은 한편으로 형이상학적이고 다른 한 편으로 인식적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인격론에 하나님을 개입시킨다. 그의 하나님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존재자로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미로서 나타나고 “뜻”으로서 사람들에게 역사하여 개성적 인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내부에 각인된 뜻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자기 밖에서 찾”고, 그래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일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격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인격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사물일 뿐 인격이 아니다. 인격은 말로 구성되고 말로 표현되며 말로 만나진다. 말없이 나의 믿음과 소망을 구성할 수 없고, 말없이 나의 사람됨을 표현할 수 없고, 말없이 다른 사람과 생각을 나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격 총체성에 나타나는 말은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뜻의 저장고이고, 사람들을 연대하는 장치이다. 이를 위한 김상봉(2007: 257-262)의 논리는 분명하다. 말하기와 말듣기는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기와 말듣기는 상호 교환적이고, 그래서 서로 주체적이다.
김상봉(2007: 281-282)에게 있어서 <만남> 개념은 중요하다. “나와 너의 만남 속에서 나도 세계도 존재한다”는 만남의 선험론을 믿기 때문이다. 만남의 선험론은 무엇인가?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나 다른 사람 없이 자기 홀로 자기를 의식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나의 이름을 부르고, 나를 인간으로 대접할 때 그 때 나는 자기 의식을 가질 수 있다. 내가 “나”라는 단어를 홀로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라는 단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경우를 보았어야 한다. 내게 나타난 세계 존재도 또한 그러하다. 세계의 어떤 사실도 특정한 체계의 어떤 문장을 사용하지 않고는 그 사실을 생각할 수 없고, 언급할 수 없으며,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처럼, 나의 존재나 세계 존재는 내가 너와 더불어 수용하는 언어의 틀 속에서 구성되어 나타난다. 나와 너가 만나지 않고 이 언어가 가능하지 않다면, 나와 세계의 존재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남의 선험성을 이렇게 구성한다고 할지라도 만남의 서로 주체성은 어떻게 제시되는가? 김상봉(2007: 285-6)의 만남론으로부터 이 물음을 조명할 수 있다. 김상봉의 만남은 부름과 응답의 사건이고, 자기복귀와 자기초월의 동일성이다. 이러한 만남에는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만남의 크기와 깊이를 통하여 말해질 수 있다. 만남의 폭이 넓으면 큰 만남에 이르게 되고, 만남에 성실성을 쏟을 수록 그 만남은 깊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남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온전한 만남에 이르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온전한 만남은 “절대적 서로 주체성”이라는 이념으로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만남에서 얻어지는 부름과 응답, 자기복귀와 자기초월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김상봉(2007: 297) 은 이를 위해 “모심”의 뜻을 도입하여 조명한다. 만남은 모심에서 핵심적으로 나타나고, 모심의 모형은 <가까이 모시는 관계>에서 보여지는 배움의 관계일 것이다. 모심 보다 더 한 만남이 어디 있고, 배움 보다 더 소중한 모심이 어디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이들 사이의 개념적 관계는 선명해 보인다. 김상봉은 더 나아간다. 배움이란 자기를 비우지 않고는 개시되지 않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만남은 모심, 배움, 비움의 역과정이고, 이러한 과정이 상호적일 때, 만남이라는 계기가 얻어진다. 이러한 만남은 자기복귀와 자기초월이 동시적으로 실현되는 뜻의 때가 된다.
4) 민주화이후의 민주주의- 여러 형태의 독재들: 민주주의는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이론이 가능하고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여러 유형의 실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의 대치점을 종교, 군주, 귀족, 이데올로기 중 어느 것으로 취하는가에 따라 민주주의 개념의 지형이 달라진다. 김상봉(2005: 155; 1999: 301)은 그 대치점을 독재에서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김상봉의 민주주의는 이론적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원형적이다. 한국사회가 1987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지속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단계에 처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의 가치를 구현하는 노력이다. 시민 공동체는 슬픔 경험에서 너와 나가 만난 우리, 우리의 공동체이고, 각자가 각자의 주인일 것을 서로 요구, 존중, 보호하는 공동체이다. “자유롭게 자기를 정립하고 형성하려는” 의지의 본질을 손상하거나,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강요하는 것은 모두 독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김상봉이 맞서 온 몇 가지 형태의 독재들에 주목할 만하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로 독재(1961-1987)가 마감되었다고 사람들은 믿지만, 김상봉(2010b: 18; 2010c:341-362)은 군부독재의 자리에 자본독재가 들어 왔다고 판단한다. 김상봉은 컬럼을 써 왔던 경향신문사에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에 대한 서평을 보냈지만, 거절되었다. 그는 소위 진보계 언론이 고정 컬럼마저 부정하면서, 자본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거대 구조를 따르는 것을 자본 독재의 사례라고 보았다. 이 사건 주제와 관련된 글들을 김상봉이 모아 엮은 것이 『굿바이 삼성』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 라고 말한 것은 자본 권력이 선출된 권력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정일 것이다. 김상봉은 이러한 자본 독재에 대해 철학적 성찰을 제시한다. 태양이 그 주변에 여러 행성들을 거느리지만 그 자체로 중력의 지배하에 있는 하나의 별이듯이, 재벌도 자본의 운동법칙에 따르는 꼭두각시라는 것이다. 이 꼭두각시가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지배권력의 홀로주체성을 서로주체성의 공동체 구성원리로 민주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상봉(2005: 29-59)은 도덕교육과 관련된 독재를 지적한다. 그는 국정 교과서에 나타난 것을 토대로 판단해 보자면, 한국의 도덕 교육이 자유인의 도덕 교육이 아니라 노예를 기르기 위한 도덕 교육(2005: 26)이라고 분석한다. 교과서는 예절은 강조하면서 불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국가와 민족은 개인에게 의무와 책임을 요구하는 실체로서 군림한다. 국가가 시민들의 참여를 통하여 구성되는 민주적 공화체의 과정이라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 교과서의 저자들이 헌법1조의 의미를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는지가 의문스러워 지는 대목이다. 도덕의 내용뿐 아니라 그 내용을 가르치는 방식도 자율적이 아니라 타율적이다. 질문과 대화의 방식이 아니라 명령과 당위문으로 표현되어 있다. 학생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에 순응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김상봉은 도덕은 자유와 같은 말이어야 한다고 본다. 자유는 만남이고, 자유의 능력은 만남의 능력이며, 이 만남의 능력은 자기강제와 자기형성의 통합된 능력이다(2005: 25). 그러기 때문에 도덕적이 된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것(2005: 155)이다. 도덕의 왜곡된 독재하에 인간을 가두는 것은 노예도덕이라는 것이다.
“학벌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학문적 주제가 되고, 어떻게 독재의 형태를 지니며 반민주적 구조를 나타내는 것일까? 김상봉(2004: 191-198)은 뒤르켐(Durkheim, E. 1997)이 자살을 사회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전에는 자살이 개인적 문제일 뿐 사회적 주제가 아니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학벌사회라는 주제가 한국사회에서 논의될 필요를 제시한다. 사회는 서로주체성의 공동주체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서로 주체성의 성격에 따라 여러 목적의 사회가 가능하다. 학벌사회란 같은 학력을 가진 개인들이 학연으로 연결하여 이루어낸 공동주체의 사회이다. 인륜 공동체는 그것의 이상을 추구하는 반면에, 학벌 공동체는 가족 공동체처럼 구성원의 복리 증진을 추구한다. 학벌 공동체는 대학 기반적이지만 인륜적으로 개방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폐쇄된 가족이요 문중인 것이다. 김동춘(2004)은 이를 “현대판 신분제”라고 하고, 박노해(2010)는 이 신분제를 비판한다: “. . 양반인지 상것인지 신분을 물었다/ . . /집안과 학벌을 물었다/ . . / 신분제를 타파하는 죽창이 들렸고/ . . /계급차별에 맞선 총이 들렸고/ . .” 그리고 강준만(1996)은 그 신분제의 범죄를 고발 한다: 학벌 같은 “연고에 의한 청탁은 괜찮고 금품을 이용한 청탁은 범죄라면, 그건 정말이지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김상봉의 민주화 철학은 그의 슬픔 인간론에 기반하여 있다. 선험주관성과 같은 홀로 주체성에 기초한 전통철학의 나르시즘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 간의 동질성에서 오는 슬픔의 서로 주체성으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슬픔을 통해 나와 너가 만나는 행위는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의 정치성을 갖는다. 서로 주체성의 정치성이 바로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화는 이러한 슬픈 인간들의 서로 주체성의 복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1] 김상봉, 「공허한 희망과 대안」(경향신문, 2009년 10월 23일자); 「진보신당을 위하여」(경향신문, 2010년 1월 26일자); 「낙오자를 두려워 말라」(경향신문, 2009년 12월 15일자), 「주체성을 지키는 게 근대화다」(경향신문, 2010년 1월 5일자); 학벌사회: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한길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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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현, 「김상봉의 민주화 철학: 슬픔 인간론 」, 『한국현대철학, 그 주제적 지형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259-268.
첫댓글 #나의 슬픔을 숙고하고 타인의 슬픔의 공유해야 한다.홀로 주체가 아니라 서로 주체, 겹주체(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슬픔의 진화 / 심보선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그러고는 긴 침묵)
나는 하염없이 뚱뚱해져간다
모서리를 잃어버린 책상처럼
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다!
심지어 그 독하다는 전갈자리 여자조차!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
공에게 모서리를 선사한들 책상이 될 리 없듯이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가구로 진화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질문이었다
(그러고는 영원한 침묵)
김상봉의 슬픔 인간론
슬픔·고통을 천착해온 철학자 김상봉. 그는 “우리들이 참된 주체가 되어 만나야 한다. 만나서 길을 같이 찾고 같이 생각하고 형성해야 한다.
“정신의 깊이는 오직 고통의 깊이다.”천착. 구멍을 뚫는 일.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허울·허위·허영을 찢고 참된 만남으로 나아가는 일. 섬과 같은 ‘홀로주체’를 벗어나 ‘서로주체’로 만남의 공동체를 이루어내는 일.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뜻을 지닌 주체·주인이 되어야 하는 일. 서로가 서로를, 오직 슬픔 속에서, 모심과 섬김의 마음과 태도로 만나는 일. 주체-만남-공동체로 이어지는 ‘사유의 삼각형’, 의식(반성, 내 안에서 나와 너의 대화)-인격(말,사람들이 연대하는 장치)-만남(연대, 모심/배움, 선험적 세계)의 개념. 그것이 김상봉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