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5월 22일(월) 욥기 9:1-10 찬송 359장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개역 개정)
지난 8장에서 전통적 인과 응보의 원칙론에 입각해
간접적으로 자신을 정죄했던 빌닷의 논증에 대해
욥이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9장에는
위대하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욥의 수용적인 신앙과 함께
여전히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욥의 한계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9장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불의함과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신 위엄을 비교하는 전반부 1-10절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항변하는 중반부 11-24절
그리고 절망에 빠져 스스로의 노력의 무익함을 고백하며
중보자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요청하는 후반부 25-35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전반부인 오늘 말씀에서는
인간의 내재적인 범죄 성향과 불의함을 지적하는 1-4절과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계를 마음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지혜로우심과 전능하심이 언급된 5-10절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다.
이처럼 욥은 인간의 나약함과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에 대한
깊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앙은 당연히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실제 생활에서의 태도로 나타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욥의 태도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면모가 나타났다.
이는 당시 욥이 당하던 고난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음을 보여 주는 것임과 동시에 욥 역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도식적 인과 응보론의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부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 준다.
10절)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욥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이란
문맥의 흐름상 우주 창조 및 그 운행과 관련된 일이다.
셀 수 없는 기이한 일 역시 같은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저 우주 운행과 관련된 일을 하신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것을 다 알지 못한다.
아무리 우주 과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인간이 밝혀낸 지식은
전체 지식의 지극히 일부일 뿐 그 신비를 다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것을 다 밝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란 대단한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제한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우주와 관련된 일만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엡3:8)을 증거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대속의 은혜가 인간이 잴 수 있는
그 어떤 도량형의 단위로도 측정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이지 그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에 있어서
그 어떤 죄라도 능히 사유하고도 남음이 있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인간의 도량형으로도 잴 수 없다.
또 이러한 죄인들을 위해 죽어주신 주의 은혜 역시
도저히 인간 이성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7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세상에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다.
가끔 ‘선인’을 위해 죽는 자들은 있다.
하지만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다.(롬5:8)
이러한 신비를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왜 이처럼 사랑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거나 설명해낼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비밀’(엡3:4)이라고 했다.
이 비밀을 간직한 자의 삶은 달랐다.
그들의 삶은 거룩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주를 위해 봉사했다.
자기의 모든 재산, 재능, 시간은 물론이요, 생명까지 주를 위해 바치면서도
아까워하기는커녕 더 바치지 못해서 안타까워 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왜 오늘날 신앙 생활이 어려운지, 힘든지...
이 비밀을 잃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이 은혜의 신비로움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이었던 성도라도 이것을 잃는 순간 신앙 생활은 어렵다.
세상에서 제일 뻑뻑하고 힘든 것이
이 은혜의 비밀을 상실한 채 신앙 생활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것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신앙 생활만큼 쉬운 일이 없다.
쉬운 정도가 아니라 신앙 생활만큼 재미있고 행복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고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일, 놀라운 은혜를 회복해야 한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시7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