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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례 마리아(5.29) 기본정보 [자료모음]
성인명 이성례 마리아 (李聖禮 Mary)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녀
신분: 양반, 부인,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1-1840년
같은이름: 메리, 미르얌, 미리암, 이 마리아, 이마리아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Maria)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집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지녔던 그녀는 17세 때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낳았다.
이 마리아는 언제나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 나갔고, 일가친척들이 불화 없이 지내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나이가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는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로 이주하였다. 그동안 장남 최양업 토마스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이처럼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자주 이주하는 가운데서도 이 마리아는 모든 어려움과 궁핍을 기쁘게 참아 내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을 갖도록 하였다. 또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이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 최 프란치스코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이 마리아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가운데 포졸들이 마침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그녀는 음식을 준비해서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남편 일행의 뒤를 따라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 마리아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최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 마리아는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껴야만 하였다. 젖은 나오지 않았고, 먹일 것이 없어서 한 살밖에 안 되는 최 스테파노가 굶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최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 마리아는 자신의 본디 마음과는 달리 현세적인 구원을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형조에 이르자, 이 마리아는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말을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 냈으며, 막내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이 무렵 그녀의 둘째 아들인 최의정 야고보가 한 달 이상 감옥을 오가면서 모친과 신자들의 시중을 들었다.
이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이성례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당시까지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성례 마리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2. 최양업 신부의 모친 복자 이성례(마리아)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2편.
최양업 신부님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님에게 보낸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에서 부모님의 순교 행적을 보고하였고, 박해 후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에 나타난 신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성인의 삶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성례(마리아)는 18세에 최경환(프란치스코)과 결혼하여 남편을 공경하면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 나가고, 식구들 간에 불화 없이 지냈습니다. 평소에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남편 못지않은 극기와 신심을 지니고 있었고,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습니다. 아들들이 먼 길을 걸으며 굶주리고 지쳐 칭얼거리면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는 이야기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신앙을 위한 인내심과 참을성을 가르쳤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어머니가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다.”라고 하였습니다.
1839년 박해 때에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갈 때, 자식들을 위해 물건을 챙기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이에 포졸 하나가 점잖지 못하게 치근거리면서 “다른 이들은 다 떠났는데, 왜 꾸물거리고 서 있느냐? 가기 싫은 것 아니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당신은 누구를 망측한 사람으로 여기십니까? 내 남편과 내 자식들이 갔는데, 내가 왜 안 간단 말입니까? 당신은 상관 말고, 당신 갈 길이나 가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포도청에 갇혔을 때, 예수님을 증거하느라 온갖 고문을 받아 살이 너덜너덜 찢어지고, 팔과 다리가 부러져 유혈이 낭자하였습니다. 가장 큰마음의 고통은 갓난 아기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은 안 나오고, 먹을 것을 달라는데 먹일 것이 없었습니다. 자식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버텼습니다. 남편이 순교한 후에는 자식에 대한 애정에 의해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곤장과 칼에는 용맹했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했습니다. 결국 모성애 때문에 배교하고 풀려났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주신 모성애를 따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 최양업이 유학 간 사실이 드러나서 형조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때 형조 감옥에 갇힌 신자들이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자고 권하였습니다. 이에 감동하여 뉘우친 후 배교를 취소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내고 모정에서 오는 생각을 물리쳤습니다. 막내아들 스테파노(2살)가 기아와 비참으로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때 두 아들(큰 아들 최양업과 막내아들 스테파노)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습니다. 더 큰 믿음에서 살아남게 될 자식들을 하느님께 맡기고 순교의 길을 걷고자 한 것입니다. 다른 아들들에게는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교리, 기도문을 가르쳤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둘째 아들 야고보(12살)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들 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라.”라고 하면서 사형장에 따라오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고아로 남겨질 아들들을 보면서 그 순간 모정에 끌려 나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려 준비 안 된 모습을 보여줄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눈물짓는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드리고, 형장에 있어야 할 감옥의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보살펴드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조심스럽게 지켜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성례(마리아)는 1839년 12월 27일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당고개 형장에 도착했고, 6명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먼 곳에서 순교하는 모습을 보고 돌아왔는데, 동생들이 “어머니가 언제 오시냐?”라고 묻습니다.
[2021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3. 이성례 마리아와 이 에메렌시아의 활동과 순교 영성.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26)
이성례(1802~1840년) 마리아는 충청도 홍주 출신이다. 18세 때인 1819년에 최경환과 혼배성사를 거행하여 1821년 장남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낳은 것을 비롯하여 모두 6명의 아들을 낳았다. 한글을 배우지 못했으나 기억력이 좋아서 구전으로 교리를 배웠고 체포될 당시 치근덕거리는 포졸을 따끔하게 꾸짖고 단호하게 물리칠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다.
함께 체포된 수리산의 거의 모든 교우들이 배교하고 나갔으나 이성례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옥에 갇힌 채로 신앙을 증거했으며, 8월 5일 남편의 장살(옥사) 소식을 전해 듣고는 옥중에서 발상(發喪, 머리를 풀고 슬피 울어서 초상난 것을 알림)했다. 그러나 수 개월간의 굶주림으로 젖먹이 스테파노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상황을 보고는 나머지 아이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만 배교를 하고 옥을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을 외국에 보낸 일로 인해서 다시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형조로 이감되었다. 이성례는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에메렌시아(1801~1839년)는 충청도 예산 출신으로 외교인 집안으로 시집을 간 후, 친정 오라버니로부터 천주교를 배워서 굳게 믿었다. 이에 그녀의 남편은 심한 구타와 실외에서 옷을 벗기고 매달아 망신을 주는 등의 온갖 모욕과 폭언을 했다. 이 에메렌시아는 사지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모든 것을 인내하고 온화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남편을 설득하고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하여 이웃과 친지들을 감동시켰다.
이에 남편도 아내의 마음에 녹아들어 입교를 결심하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서 어느 깊은 산속으로 이사갔다. 그러나 남편이 병자성사를 받고 이내 병사하자 이 에메렌시아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친정 오빠들이 있는 수리산 교우촌으로 가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이 에메렌시아는 수리산 교우들과 함께 1839년 7월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갔으나 모진 고문과 심한 매질에도 흔들림없이 꿋꿋이 신앙을 지켰다. 살이 썪어서 벌레가 생겨났고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체력은 완전히 소진되었다. 그녀가 참혹한 형상으로 고통받자 교우들이 위로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어찌 제 힘만으로 감당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며 순교의 의지를 더욱 굳혔고, “큰 고통은 큰 행복을 낳습니다.”라면서 기꺼이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다. 이 에메렌시아는 마지막 형벌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2019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수원주보 4면,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4. 복자 이성례 마리아
굿뉴스 연재 기해박해 순교자 약전 편
이성례 마리아는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이다.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그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었다. 모태신앙인으로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간직하였다가 18세 때 최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여 서울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기해박해로 순교하기까지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기록에 따르면 이 마리아는 교리지식이 출중하거나 글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기해일기』?의 기록이나 최양업 신부의 서한 등에서도 이 마리아를 평할 때 특정 지식적인 부분이 언급되기보다는 자신보다 4살 어린 남편을 잘 보좌하였다거나 집안을 돌보는 일에 힘썼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설령 글을 잘 몰랐다고 해도 그의 신앙에 부족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마리아 신앙의 주된 덕목은 인내와 권면이었다.
잦은 이사와 궁핍한 처지를 이겨내다
홍주에서 서울로, 다시 오래지 않아 이 마리아 가족은 다시 강원도 김성과 경기도 부평의 산간 지대를 거쳐 1838년경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구었다. 잦은 이사에 흉년이 겹쳐 이성례 마리아는 궁핍함과 싸워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망하는 마음 하나 없이 기쁨으로 모든 고통을 감내하였다고 한다. 『기해일기』?에 따르면 이 마리아는 이런 고난을 마지못해 받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우리 주 예수의 거룩하신 가르침과 이전 성인들의 행실을 따르기 위하여 구하고 청해야 한다면서 큰 영광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어린 자식들이 배고픔과 고통을 호소할 때마나 이승에서의 고통은 잠시 뿐임을 상기하며 후세의 영원함과 예수의 표양을 강론하면서 권면하였다고 한다. 궁핍함 속에서도 이 마리아는 남편과 더불어 40일 금식할 때 양식과 전량을 모았다가 가난한 교우를 돕고는 하였다.
권면과 인내의 신앙인
이성례 마리아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녀의 가족들은 순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7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마리아의 담대함과 권면하는 마음은 체포 장면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포졸들이 집을 덮쳤을 때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남은 물건들 중에 무엇이든지 좀 좋은 것들을 모아서 싸고는, 포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먹였다고 한다.
모성으로 인한 배교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장면을 뒤로한 채 이 마리아와 그의 가족은 포도청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어내야만 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마리아는 300대 이상의 곤장을 맞았지만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함께 체포된 어린 자식들이 더러운 감방에서 굶어 죽어 가는 것을 보는 일이었다. 이성례 마리아 가족은 총 다섯 명이 함께 체포 투옥되었는데 그중에서 큰아들인 최의정 야고보가 열네 살이었고 막내가 겨우 두 살이었다. 이 마리아는 자신과 남편의 순교는 기쁘게 맞이할 일이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 고통스러움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차마 지켜보기 힘들어하였다. 더구나 막내 아이는 아직 젖도 채 떼지 못한 채였다. 특히 기억할 것은 어머니로서 이 마리아가 세상에 듣게 된 비난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훗날 서한에서 당시 자신의 어머니가 당했던 모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외교인들 중에는 너무나 끔찍하게 여겨 “이 몹쓸 모진 년들아, 이 인정사정없는 독한 년들아, 그 연약하고 애처롭고 귀여운 어린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죽음을 자청하러 간단 말이냐?” 하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마음이 황폐해진 이 마리아는 배교하는 말을 하고 감옥에서 나왔다. 『기해일기』에는 이 마리아의 다음과 같은 다짐이 새겨져 있다.
“아무쪼록 살아나와 이 여러 어린 것의 영육을 돌아보리라.”
이것이 실제 이성례 마리아의 육성이었는지는 확증할 수 없지만 눈물겨운 배교를 선언할 때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그가 배교를 결심한 것은 신앙심이 약해져서도 아니고, 곤장이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오직 자식에 대한 애처로운 마음과 사랑이었다.
두 번째 체포 그리고 회심
그러나 이성례 마리아의 이러한 애처로운 결심조차 뜻대로 될 수가 없었다. 신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난 아들 최양업 신부에 관한 사실이 탄로나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이송되었던 것이다. 그때 거기에 함께 갇혀 있던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은 이 마리아의 회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전에 그르친 것을 통회하고 관아에 선포함으로써 위주치명하면, 세옥과 지옥을 함께 면할 수 있으리라. 함께 천당에 올라 대부모를 뵈옵고 모든 성인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자. 이 마리아는 주변 교우들의 권면에 힘입어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도록 결심하는 용기를 보였다. 이제 그는 젖먹이 막내가 옥중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보면서도 끝내 순교의 본 뜻을 잃지 않는 용기를 보여 주며 기쁜 마음으로 형장에 나아갔다. 39세 되던 해인 1840년 1월 31일 서울의 당고개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세상의 모욕과 빈정거림을 감내한 위대한 어머니
복자 이성례 마리아는 세상의 모욕과 빈정거림을 감내한 위대한 어머니이다. 어린아이들까지 형장에 끌려와 고통을 당하게 된 일이 어머니로서 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특히 어린 아이들과 함께 투옥되었을 때 감내해야 했던 주변의 욕설과 비난은 어머니로서 진정 참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려웠던 배교 결정을 다시금 당당히 회심하였던 것 또한 진정한 용기였다. 함께 투옥된 이들의 권면이 큰 힘을 발휘하였던 것은 물론이나, 한 차례 저지른 잘못된 결정을 두고 아집에 빠지지 않고 번복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녀의 신앙의 발로였다.
또한 그는 ‘무식하다’는 빈정거림의 대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포도청 투옥 당시 포졸들은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에 이어서 이 마리아에게 천주교 교리서를 읽어보라고 시켰으나 글을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관원들은 “아니 저렇게 훌륭한 회장의 부인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빈정거렸다.
그녀가 진정 글을 전혀 몰라 읽기를 거부하였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굳이 그것을 따지지 않더라도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이 마리아가 평생 받아왔을 손가락질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겠는가. 오늘날 우리들조차 지식이 부족했던 신앙의 선조들에 대해 꽤나 모질지 않은가. 고난과 궁핍함 속에서도 남편을 도와 가정을 건사하였고, 훌륭히 아이들을 키우며 마침내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이끌었던 어머니들을 우리는 너무도 몰라주고 있지 않은가.
너무나도 어머니다웠던, 또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이성례 마리아에게 어찌 그리 연약했느냐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위대한 어머니이자 온전한 신앙인이었던 그를 복자품에 올린 교회의 결정은 옳은 것이었다. 기해박해를 기억하는 중에 이번 한 주간은 위대한 어머니, 온전한 신앙인, 복자 이성례 마리아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우리 모두의 어머니를 함께 기억하며...
[자료제공 한국교회사연구소]
5. 성 최경환 · 복자 이성례 부부
[가족의 인연을 하느님께로] (2) 최양업 신부 부모… 강인한 신심을 순교로 증명
경기도 과천 수리산 속에 있던 ‘뒤뜸이’ 마을은 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룬 곳이라고 전해진다. 생계를 위해 담배를 경작했다고 해서 일명 ‘담배촌’이라 불린다. 이곳을 일구고 개척한 이는 다름 아닌 한국교회 두 번째 성직자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 성인이다.
그는 1805년 홍주 다래골 새터에서 태어났다. 새터는 현재의 충남 청양이다. 조부 최한일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집안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부친 최인주는 신유박해(1791년)로 시련을 겪은 후 모친을 모시고 낙향해 새터에 자리를 잡았다.
14세에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의 조카뻘 되는 복자 이성례(마리아, 1801~1840)와 혼인해서 1821년 장남 최양업을 낳았다. 1827년경 가족들을 서울로 데려와 살았으나 박해의 위험이 닥치자 강원도 김성과 경기도 부평으로 이주했고, 이어 1838년 수리산 뒤뜸이에 정착했다. 앞서 최양업은 1836년 초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돼 그해 말 동료들과 함께 중국 마카오로 출발했다.
최경환은 「칠극」(七克)의 가르침을 신심의 바탕에 두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최양업 신부 서한에 따르면 그는 교리에 해박했으며 묵상과 독서를 통한 신심 함양에 힘썼다. 또 이웃과의 나눔과 극기 실천에 뛰어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모방 신부로부터 수리산 교우촌 회장에 임명됐던 그는 아울러 회장으로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물론 경제적인 부분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자 최경환은 신자들과 함께 상경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안장했으며 다시 수리산으로 내려와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평생 교회 가르침 안에서 신자로서의 본분을 따랐던 그는 일찍부터 순교 원의를 지니고 있던 터였다.
최경환은 결국 그해 음력 7월 아내 이성례와 자식들, 교우촌 신자 40여 명과 함께 체포돼 투옥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았다. 아들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유학 간 이유만으로도 형벌은 더 극심했다. 40일 이상의 참혹한 고문 속에 110여 대의 곤장을 맞으면서도 하느님을 증거했다. 굳건한 태도에 외교인들조차 천주 신앙을 찬미하게 했던 그는 9월 12일 포청옥에서 장독사(杖毒死)했다.
「최우정(바시리오)의 이력서」에 의하면 시신은 그의 형 최영겸 부자에 의해 노구산에 안장됐다가 수리산 뒤뜸이 앞산으로 옮겨졌다. 이후 1928년 4남 최신정의 처 송 아가타 증언을 토대로 뒤뜸이에서 유해가 발굴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 안치됐다가 다시 절두산에 봉안됐다. 현재 수리산성지 본묘에는 후손들이 기증한 유해(손뼈 5기)가 안치돼 있다.
이성례는 수리산에 포졸들이 들이닥쳤던 당시 음식을 준비해 대접한 다음 어린 자녀들과 함께 남편 최경환의 뒤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평소에도 자신이 가난할 지라도 주위의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돌보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사순시기에는 금육·금식으로 모은 양식을 남편과 의논해서 어려운 신자들과 나눴다.
남편, 자식들과 격리된 채 젖먹이 아들 최 스테파노와 감옥에 갇혔던 그는 300여 대 이상의 곤장을 맞는 등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보였다. 그러나 젖먹이가 굶어 죽어가고, 남편 최경환이 옥사하자 마음을 접고 배교를 선언했다.
아들 최양업이 신학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시 형조로 압송된 이성례는 갇혀있던 신자들이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할 것을 권고하자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배교 의사를 거둬들였다.
옥에 있던 아들의 죽음을 보면서도 순교 원의를 잃지 않았던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 감옥에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6명 신자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복자 부부는 부친 최인주로부터 이어진 신앙을 배경으로 자기희생과 절제에 바탕을 둔 남다른 자선을 베풀고, 기도와 영적 독서로 얻은 신앙심을 순교로서 증명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9년 9월 22일, 이주연 기자]
6.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7) 남편 최경환의 죽음에 흔들렸으나 ‘영광스러운 순교’ 선택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보다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 복녀가 신자들 사이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옥중에서 젖먹이 막내가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배교했다가 다시 순교를 자청했던 그녀와, 어머니를 고통 없이 단칼에 베어 달라며 휘광이(망나니)에게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을 전하는 네 아들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에서 어머니를 소개하는 내용이 딱 한 편 있다(1851년 10월 15일자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최양업 신부 부모에 관한 이야기는 이만 줄인다.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조선의 저명한 경주 이씨 가문에서 출생했다. 이 가문에서 유명 인사를 여럿 배출했다. 그중 한 분이 단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다. 그의 집안 딸들에게서 2명의 사제가 탄생했다. 그의 딸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모이고, 어머니 이 마리아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다.
이 마리아는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는데 18세에 프란치스코와 혼인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했는데도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던 이야기,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줬다. 그는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데도 남편을 공경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는 1893년 포졸들이 집을 덮쳤을 때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먹였다. 서울에 도착한 마리아는 남편과 큰 자식들과 격리돼 여인들만 있는 감방에 갓 난 아들과 함께 갇혔다. 다음날 팔다리가 으스러지고 곤봉에 찢겼으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증언했다.
그에게 가장 큰마음의 고통은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였다. 갓난아기는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이 안 나와 엄마의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남편 최경환)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줄곧 꿋꿋이 버텼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죽고 또 어린 것이 더러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마리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곤장과 칼 앞에서도 용맹했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다. 그래서 살덩이와 핏덩어리들이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다시 구제하는 은혜를 주셨다. 마리아가 풀려나 집에 가 있는 동안 그의 맏아들 최양업 토마스가 마카오에 보내졌다는 사실이 탄로 났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인 형조로 이송됐다. 거기서 마리아는 신자에게 순교 권고를 듣고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판관 앞에서 배교를 용감히 취소했다. 재판소에서 마리아는 자기의 갓난아기가 기아로 죽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두 아들(양업과 갓난아기)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다.
최양업의 첫째 동생(최의정, 당시 15세) 야고보는 한 달 이상 감옥에 머물면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갇힌 포로들을 위해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죽는 날까지 지켜보면서 증인이 됐다. 마리아는 형조에서 세 차례 고문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날이 가까워져 오자 평온한 모습으로 야고보를 불러 마지막 훈계를 했다.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다.
사형 집행일, 마리아는 기도를 마치고 난 후 야고보에게 어머니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형장에 따라오지 말고 떠나라고 명했다. 야고보는 고아로 남겨질 어린 세 동생(선정 안드레아 12세, 우정 바실리오 9세, 신정 델레신포로 6세)을 거느리고 살아야 할 처지였다. 마리아는 형장에서 야고보의 모습을 보고 그 순간 모정에 끌려 마음이 허약해지고 흔들려, 최후의 전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덜 된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까 봐 두려웠다. 야고보는 어머니에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하고 감옥에서 나왔다.
마리아는 다른 6명의 교우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휘광이의 칼을 받고 1840년 1월 31일 39세로 순교했다.
당고개 성지
이성례는 서울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오늘날 서울 용산 청파로 139-26에 자리한 당고개 성지<사진>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이 탄생한 순교성지이다.
당고개는 원래 신자들의 처형지가 아니었다. 설을 앞둔 상인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처형지를 옮겨 달라고 요청해 한강 가로 조금 나간 당고개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것이다.
이곳에서 1839년 12월 27일(음력)부터 이틀간 이성례를 비롯한 10명이 순교한다. 이들 중 한 차례 배교했던 이성례만 제외하고 모두가 1925년 7월 5일 시복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이성례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시복됐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1일, 리길재 기자]
7. 이성례 마리아
[복자 124위 열전] (51) 옥에서 굶주리는 아들 보며 한때 배교했으나 끝내 순교
1840년 1월 31일, 서울 만초천 하류 당고개에서 복녀 이성례(마리아, 1801∼1840)는 칼을 받는다. 그 순간 그는 누구의 얼굴을 떠올렸을까? 당고개로 끌려오기 얼마 전, 피와 고름이 엉겨붙어 썩는 포청 옥 멍석에 눕혀 있다가 젖도 물리지 못한 채 죽은 젖먹이 막내 스테파노였을까? 아니면 먼저 순교한 남편 최경환(프란치스코)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이국땅에서 신학 공부에 정진하던 맏이 최양업(토마스)이었을까? 아무튼 부모의 순교로 고아가 돼 신산스런 삶을 살아야 할 자녀들을 남겨둔 채 이성례 마리아는 망나니의 칼을 받고 흔연히 순교의 길을 걸었다.
포청 옥에서 굶어 죽은 젖먹이 때문에 ‘눈물의 배교’를 해야 했던 그는 같은 날 순교한 박종원(아우구스티노)과 홍병주(베드로) 등 6위와 달리 아직 시성의 영예를 안지는 못했지만, 당고개에서 순교한 다른 순교 성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모성 때문에 신앙이 흔들렸지만, 신앙으로 모진 육정을 이겨내고 순교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 신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이성례 마리아의 삶은 잘 알려져 있다. 충청도 홍주현 태생으로,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씩씩하고 총명했던 그는 17세 때 최경환과 혼인해 홍주 다락골 새터에 살면서 21세 때 최양업을 낳았고 그 뒤로도 슬하에 다섯 자녀를 더 뒀다. 늘 지혜롭게 집안일을 꾸렸고, 일가친척들과의 불화도 없었다. 나이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면서 화목하게 가정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양으로 이주했으며 다시 박해의 기미가 보이자 강원도 금성현(현 김화군), 경기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92번길 일대) 등지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동안 맏아들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다.
이처럼 ‘신앙 때문에’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타향으로 전전하며 가난과 궁핍을 이겨내야 했지만 이성례는 기쁘게 참아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하던 이야기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른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주며 인내의 덕을 갖추도록 권면한 외유내강의 어머니였다. 또한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군 ‘지혜로운 여장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는 가난했지만 단란했던 가정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은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줬고, 그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자녀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마침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에 부부는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대접한 뒤 어린 자녀 다섯을 데리고 교우 40여 명과 함께 한양으로 향했다. 포도청에 압송된 이성례는 젖먹이와 함께 갇혀 300대 이상의 곤장을 맞으며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지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굶주리는 갓난아이를 지켜보는 고통은 그를 흔들리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배교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장남이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체포돼 형조로 압송된다. 당시 함께 갇힌 교우들의 권면으로 용기를 낸 그는 배교를 취소하고 갖은 유혹을 이겨낸 뒤 젖먹이를 하느님께 바치고 순교의 화관을 쓴다.
최양업이 마카오로 떠난 뒤 사실상 장남 노릇을 하던 둘째 최의정(야고보) 등 자녀들에게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교 순교자전」을 통해 전해온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님과 성모님을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처음부터 굶주리는 젖먹이를 뿌리치고 순교했다면, 그는 일찌감치 성인이 됐을 뿐 아니라 ‘위대한 순교자’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막내아들 때문에 흔들렸고 배교까지 할 정도로 모진 육정을 끊지 못했던 복녀 이성례 마리아는 그 모정까지 하느님께 봉헌하고 형장으로 향했다. 그랬기에 그의 열절한 순교 혼은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눈물샘을 자극한다.
[평화신문, 2015년 3월 8일, 오세택 기자]
8. 신학생과 사제들의 어머니
[새로운 복자] 이성례 마리아 -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내이자,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이신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신앙적으로 보면 최고의 영광을 입은 아내이고 어머니이십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면, 수많은 삶의 질곡에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 하셨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내포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집안사람으로, 이존창이 순교한 1801년에 태어났습니다. 가성직자로 활동하였던 이존창에게 하느님께서는 성직자 가문을 허락하십니다. 그의 딸을 김대건 신부의 조모로, 그의 생질녀를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로 삼아 주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여장부다웠던 이 마리아는 17세 때 최경환과 혼인하여 충남 청양 다락골에 살면서 최양업을 낳았습니다. 이 마리아는 연하의 남편에게 순종하고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가며 집안사람을 화목하게 이끌었습니다. 이후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살다가 박해를 피해 강원도, 인천 부평을 거쳐 안양 수리산 뒤뜸이에 정착해 교우촌을 일구고 살았습니다. 잦은 이주와 굶주림으로 어린 자식들이 칭얼거리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이집트 피난 이야기나, 골고타 언덕의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에게 인내를 가르쳤습니다. 이때에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납니다.
기해박해(1839년) 때, 남편이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마리아도 적극적으로 남편을 뒷바라지합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이 부부는 새벽녘에 급습한 포졸들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따라갈 테니, 잠시 쉬었다가 식사를 하고 떠납시다” 하며 밥상을 차려 주고, 장롱에서 옷을 꺼내 포졸들에게 입혀주고는, 교우 40여 명과 함께 행렬을 이루어 한양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감동한 포졸들은 오랏줄을 묶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마리아는 감옥에서 굶어 죽어가는 젖먹이 아들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어린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고문 끝에 옥사하자, ‘살아 내 아들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본능적인 ‘모성애’를 선택해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이후 아들이 신학생으로 유학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마리아는 다시 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한때 모성애에 이끌렸던 이 마리아는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는 여장부로 변해있었습니다. 감옥으로 음식을 갖고 오는 철부지 아들 최의정 야고보에게 “이제 그만 가거라. 절대로 천주님과 성모님을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형(최양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하며 끓어오르는 모정마저 끊고는 당고개(서울 용산 신계동)로 끌려가 용감히 참수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살아서 아들 사제를 보지 못했던 이성례 마리아가 천상에서 신학생과 사제들을 위해 당신의 모성애를 다하고 계심이 그려집니다.
[2014년 8월 3일 연중 제18주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9. 이성례 마리아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하반기 공개대학 지상중계] II'
순교자 이성례(마리아, 1801~40)와 그의 맏아들 증거자 최양업(토마스, 1821~61) 신부!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시복을 추진하는 대표적 모자 '하느님의 종'이요, 드러내고 또 드러내고 싶은 모범적 신앙 선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좌포도청에서 그 무서운 형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아내요, 그의 아들이다. 그래서 모자의 삶과 신앙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수없이 바쳐온 묵주기도처럼 이들 모자의 이야기는 아무리 되새겨도 부족할 뿐이다.
'모진 육정을 극복한 위대한 어머니'. 이성례는 이 한 구절로 설명될지 모르겠다. 어느 성극은 '엄니 이성례'라고 작품 제목을 정했는데, 이는 찰나의 세상에서 다 듣지 못한 어머니라는 말을 영겁의 천국에서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제목인지도 모른다. 이성례는 20년 동안 여섯 아들의 어머니로 살았지만 맏아들 최양업에게서는 15세 이후로는 어머니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막내 스테파노에게선 어머니라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옥중에서 하느님께 아들을 바쳐야 했다.
이성례는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집안에서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나 18세 때 세 살 아래인 최경환 성인과 혼인해 다리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1827년 무렵부터 서울 낙동으로, 강원도 김성으로, 경기도 부평으로, 안양 수리산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삶과 관련해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 번째로 이성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다고 한다. 기해박해 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기 전 치근거리는 포교를 따끔하게 혼내준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둘째로 이성례는 최경환 성인과 함께 한평생 성가정을 이끌며 진실한 신앙의 삶을 살았다. 1836년 맏아들 최양업을 하느님께 바친 것은 이들 부부의 신심을 잘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예다.
세 번째로 인내와 극기의 정신 또한 뛰어났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 동안 거듭했음에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다.
넷째로 혁혁한 순교의 용덕이다. 기해박해 당시 남편 최경환, 다섯 아들과 체포된 그는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증거했지만 막내 스테파노가 옥중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이에 거짓말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를 하고 집에 돌아온 이성례는 맏아들이 마카오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형조로 압송됐고 전옥서에서 동료들의 권면에 힘입어 다시 용덕을 갖게 됐다. 이 용덕은 스테파노가 굶어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육정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마침내는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행형쇄장(行刑鎖匠, 회자수)의 칼날을 용감하게 받았다. 이에 앞서 그는 자식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뿌리쳤다. 동양 윤리나 사상으로 보자면 이성례는 비정한 어머니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배교를 뛰어넘은 혁혁한 순교의 용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제 이성례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시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신앙 생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라는 점이다. 그는 1836년 2월 6일 경기도 부평에서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돼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ㆍ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마카오로 출발해 조선인 가운데선 최초로 신학 수업을 받았다. 또 1849년 4월 15일에는 상하이에서 조선인 가운데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랴오뚱 차쿠성당에서는 한국 천주교 사제로는 최초로 중국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함으로써 최초의 북방 선교사로 기록된다.
조선에 돌아온 뒤로는 무려 11년 6개월간 박해의 위협을 무릅쓰고 5개도 교우촌을 순방하며 사목했으며 한글로 '천주가사'를 지어 보급했다. 1853년에서 1856년 여름에는 진천 배티교우촌에서 조선대목구 신학교 겸 성당ㆍ사제관에서 거처했으며, 1854년 초엔 조선 신학생 3명을 선발해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로 파견하기도 했다. 1850년대 한글본 「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를 편찬한 활동도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1861년 6월 15일 사목 보고 차 상경하다가 진천공소(경북 문경설도 있음)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했다.
그의 신앙과 영성은 △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ㆍ희망ㆍ사랑 △ 예수ㆍ성모ㆍ성인 신심 △ 선교영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 그의 사상과 의의를 평가하자면 △ 조국애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상가 △ 서양 근대 학문을 수용하고 가르친 청소년 교육자 △ 한글을 사랑하고 널리 보급한 위민(爲民) 사상가 △ 서양음악 수용의 선구자요 천주교리 토착화의 선각자로 집약할 수 있다.
[평화신문, 2013년 12월 15일, 차기진(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정리=오세택 기자]
10. 이재행과 이성례, 정태봉과 정산필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온순하고도 단호하며 곧고 자비로운 성격의 이재행 안드레아(1776-1839년)는 홍주 출신으로 20세가 넘어 가족과 함께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는 더 평온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재산과 고향을 떠나 산속에 은거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이주하느라 가난하게 되어 천한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시련과 빈곤 속에서도 그가 보여준 인종(忍從), 동료애, 모욕을 감당하는 인내심, 언사에서의 신중함, 가족을 가르치고 부양하는 정성 등 많은 덕행은 모두의 칭찬과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순흥의 곰직이마을(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 살았던 그는 1827년 정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잡으러 온 포졸들을 기쁘게 맞이하였고, 기꺼이 안동 관아에 끌려갔습니다.
잔혹하게 매를 맞으면서도 그는 관장에게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의 하느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제게 묻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대구 감영에서도 엄청난 형벌과 회유를 받았습니다. 감옥에서 하루 한 차례만 음식을 먹었고, 그 나머지를 가장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부인과 자녀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고통과 슬픔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박사의 안드레아가 “욥 성인을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말에 자극을 받았고, 모든 것을 준비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옥에 갇힌 지 12년만인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 박사의,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63세의 나이에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포졸들이 그들의 시신을 거두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이는 일찍이 없었던 일인데, 순교자들은 그들을 가까이하는 모든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1801-1840년)는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를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칭얼거리면 예수님과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주었습니다.
1839년 포도청 감옥에서 곤장과 칼에도 용맹하였지만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 약해졌습니다. 젖먹이 스테파노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배교한 뒤 얼마 있다가 체포되어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용감히 배교를 취소하였고, 모든 유혹 특히 모정에서 오는 나약한 생각을 끝까지 물리쳤습니다. 기아와 비참으로 말미암아 막내아들을 가슴에 묻으면서도 두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순교 직전 둘째 아들을 불러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하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당고개(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동료 6명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충청도 덕산 출신 정태봉 바오로(1796-1839년)는 내포회장 정산필 베드로의 사촌(또는 육촌)입니다. 선하고 호의적인 성격을 지닌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오촌 아저씨 집에서 자라면서 고아로서 적지 않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자립할 나이가 되자 처자식들과 함께 전라도 용담고을로 이주하였는데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용담에 거주한 지 3년이 지난 1827년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순교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던 그는 때때로 정사각형 나무토막을 턱밑에 갖다 대고 웃으면서 “내가 이와 같이 칼을 받는다면 아마도 내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찌나 영적 독서에 몰입했던지 책을 들면 끝까지 읽고 나서야 책을 덮을 정도로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하였습니다.
용담의 포졸들에게 체포된 그는 문초와 함께 한 차례 다리에 매질을 당한 뒤 전주로 이송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내면서 어린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 이태권 베드로, 이일언 욥, 신태보 베드로 등과 함께 43세의 나이에 전주 장터(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덕산의 양인 집안 출신인 정산필 베드로(?-1799년)는 과격한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부터 유순하고 친절해졌습니다. 주 신부에게 내포지방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기도와 경건한 독서에 열심하였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1798년(또는 1799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현 덕산초등학교 자리)에서 많은 신문과 고문을 받았는데, 곤혹함이나 고통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고, 항상 수감된 동료 신자들을 격려하였습니다. 1799년에 참수(또는 장사형)로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자성월입니다. 기해박해 순교자인 이재행 안드레아와 이성례 마리아의 눈물겨운 신앙실천과 순교, 충남 덕산 출신 정태봉 바오로와 정산필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갈망을 우리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경향잡지, 2010년 9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주임)]
11. 순교자 이성례, 모성 감싸안은 완벽한 신심
[조선을 밝힌 여성 순교자] (4) 이성례 -
소설가 한수산(요한 크리소스토모)씨는 순교자 이성례(마리아, 1800~1840)가 순교의 피를 뿌린 서울 용산 당고개성지에 다녀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린 것들 넷을 밥 빌러 다니는 거지 고아로 남겨두고 순교한 게 옳은 것일까? 내게는 늘 의문이자 혼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자신은 물론 아이들 모두 하느님께 부탁하고 형장으로 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해박해 순교자 이성례.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의 두번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이자 성인 최경환(프란치스코)의 부인이다. 한국 어머니들이 그렇듯, 그 역시 이름 석자가 아니라 누구누구의 어머니와 부인으로 기억된다. 피눈물로 얼룩진 순교의 삶도 남편과 아들 행적 속에서 언뜻언뜻 비칠 따름이다.
이성례는 충청도 홍성 사람이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집안 출신으로, 신심 깊은 최경환과 혼인한 뒤 신앙생활을 하기에 더 적합한 서울로 이주했다. 이때부터 박해 속에서 천주님을 모시기 위해 강원도와 경기도 부평으로 전전했다.
머리에 보따리 이고, 배 고프다고 칭얼대는 자식들 손을 잡고 이리저리 떠도는 남부여대(男負女戴)의 고단한 삶이었다. 그는 산 속에서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과 피로로 기진맥진한 것을 본 게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고난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고통은 마지못해 받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가르침과 모범과 어진 성인들의 행실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구해 받는 것이다(「기해일기」)"라고 말했다.
고단한 남부여대의 피난생활
최양업 신부는 당시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행한 가르침을 이렇게 회고했다.
"어머니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 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 주셨다."(「최양업 신부 서한」 173쪽)
이성례는 세상의 덧없음과 후세의 영원함에 대해 자주 말했다. 내세사상이 강했기에 그 궁핍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 고난은 1838년께 경기도 안양시 수리산 뒤뜸이로 들어가 교우촌을 일구면서 잠시 멈춘다. 그는 남편과 함께 수리산공소를 일궜다. 비록 협소하고 궁벽한 곳이었지만 곡식을 가꿀 수 있었기에 교우들이 모여 들어 담배농사를 지었다.
기해일기는 "남편을 정성으로 공양하고 열심히 수계하였다. 40일 봉재(封齋, 사순절의 옛말) 때면 재를 지키면서 남긴 식량과 돈을 모았다가 남편과 의논한 뒤 가난한 교우에게 주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기해년(1839) 대박해가 일어나자 서울서 포졸들이 내려와 공소를 급습했다. 남편 최경환은 이 날을 기다리기라도 한듯 포졸들에게 "아직 동이 트지 않았으니 식사를 해서 기운을 돋구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이성례는 포졸들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가 끝나자 최경환은 오랏줄에 묶여 서울로 압송됐다. 이성례도 젖먹이를 포함해 아이들 5명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갔다. 남녀 교우 30여명이 그 뒤를 따랐다.
"곤장에도 용맹했으나 모정에는…."
최양업 신부의 3째 동생 최우정(바시리오)의 장남 최상종(빈첸시오)이 1939년에 기록한 할머니 이성례의 순교 과정은 이렇다.
포장(鋪裝)은 남편과 함께 붙잡혀 온 이성례를 다그쳤다.
"너는 여인으로서 흉악한 남편 인도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 뉘우치면 용서할 것이다."
"죄인은 남편의 인도를 받습니다. 본래 천주는 만유(萬有)의 대군대부이시니, 충심으로 공경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목숨은 바칠지언정 진주(眞主)는 배반하지 못하겠나이다."
이성례는 몸이 헤어질 정도로 매를 맞았다. 수십 명은 겁이 나서 매 한 대를 맞기도 전에 배교한다고 말하고 풀려났지만, 그는 수개월 동안 문초를 받으면서도 배교를 거부했다. 남편은 이미 장렬하게 순교했다.
그의 마음을 흔든 것은 체포될 때 업고 들어간 젖먹이에 대한 모정이었다. 굶주림과 고문 탓에 젖이 나오지 않자 젖먹이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큰아들 양업은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상태이고, 그 밑으로 의정(14)ㆍ선정(9)ㆍ우정(7)ㆍ신정(5) 등 어린 자식들은 고아 아닌 고아가 돼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어머니로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배교한다"고 말하고 풀려났다.
최양업은 훗날 어머니 순교 행적 가운데 배교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했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살덩어리와 핏덩어리가 더럽게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고 한마디 함으로써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성례는 큰아들이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형조로 압송됐다. 그는 그곳에 갇혀 있는 용감한 신자들의 격려에 힘을 얻어 배교를 취소했다. 배교를 뉘우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젖먹이 막내아들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터였다.
배교를 취소하고 순교 자청
둘째 아들 의정(야고보)은 옥사장이 눈을 감아줘 감옥에 가끔 드나들었다. 구걸한 돈으로 음식을 장만해 어머니께 갖다 드렸는데 이마저도 관노의 자식들이 중간에서 가로챘다.
이성례는 철 모르는 어린 자식들이 부모없이 외롭게 버려질 것을 생각하자 육정에 다시 몸을 떨어야 했다. 아이들은 감옥에 찾아와 "어머니, 어머니"하면서 목놓아 울었다. 그는 또 다시 모정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야고보를 불러 타일렀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절대 잊지 말아라. 하느님 계명을 잘 지키고, 서로 화목하게 살거라.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최양업)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이성례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머니한테서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 야보고는 옥에서 눈물로 작별인사를 했다. 이성례는 마음이 흔들릴까봐 아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거지나 다름 없는 4형제는 동냥으로 구한 돈 몇 푼과 떡을 망나니에게 내밀며 부탁했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게 해주세요."
어린 자식들의 눈물겨운 부탁에 망나니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성례는 1840년 1월 31일, 나이 39살에 용산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부모의 순교로 고아가 된 4형제는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먼 발치서 바라보았다.
그의 순교는 실로 초인적이다. 끊을 수 없는 모정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형장으로 향했다. 그 열절한 순교혼은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2코린 4, 18)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한수산씨는 융합적 사고로 그의 순교를 평가한다.
"그에게 모성(母性)과 신성(神性)은 서로 부딪히는 게 아니라 완벽한 하나였다."
[평화신문, 2007년 9월 23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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