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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김산군의 대화재로 봉황대가 소실되다.
영조의 치세가 저물었다. 영조 집권기 동안 유력한 문벌 가문 출신들이 김산 군수로 부임하면서, 구읍 마을에 불어왔던 번영의 바람에 불길한 기운이 묻어온다. 급기야 1786년(정조10년) 4월. 김산군에 대화재가 발생한다.
이 화재 기록에 대해 일성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성록> 정조10년(1786) 4월 23일
경상 감사 정창순(鄭昌順)이 금산군에서 민가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다고 아뢴 데 대해, 하교하기를,
“금산군의 화재를 당한 민호(民戶)가 66호나 된다고 하니, 한창 농사지을 때 집을 잃은 것이 지극히 불쌍하고 측은하다.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규례 이상으로 돌보아 도와주어서 속히 집을 지어 자리잡고 살 수 있게 하도록 하고, 수령을 엄히 신칙하여 직접 살펴 단속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일을 마치게 하도록 하라. 이를 글로 만들어서 행회(行會)하라.”하였다.
1786년 4월의 대화재는 김산군 어느 지역에서 발생한 것일까. 당시 민호 66호 이상되는 마을을 구성한 곳은 김산에서 몇 곳으로 압축된다.
시간을 특정하여 김산 지역의 기록들을 살펴보니 의미심장한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산읍지>에 실려 있는 별봉황대신부(別鳳凰臺神賦)의 내용이다.
이 글은 1792년 봉황대를 중수하고 낙성식을 마친 후, 김산군수 이성순(李性淳,1724~)의 넷째 아들 이면승(李勉承,1766~1835)이 그해 가을 봉황대에 게시한 판상기록이다. 이 글에서는 봉황대가 무너진 시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臺毁於丙午四月二十二日 子之夢適在是夜.
봉황대는 병오년(1786년) 4월 22일에 무너졌고, 자네의 꿈은 바로 이날 밤에 있었다.
또 다음의 구절로 미루어 봉황대가 화재로 무너지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火將焚扵棟宇兮 豈區區如鸞雀 雖吾子其欲留我兮 奈禍伏扵朝夕
불이 장차 집을 태우려 하는데 어찌 난새나 참새처럼 구구하겠는가. 오직 자네가 나를 머물게 하려 하지만 조석으로 숨어 있는 화를 어찌하겠는가.
김산의 화재 시점과 봉황대 붕괴 원인이 화재인한 것임을 기술하고 있어 일성록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직 당시 김산군의 화재 위치에 대한 다른 기록은 발견할 수 없지만, 두 기록을 통해 1786년 4월 20일 전후 발생한 김산군 대화재가 연화지 주변 마을에서 발생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 화재의 여파로 봉황대가 소실되자, 김산사람 정약광(鄭約光)이 봉황대가 무너지는 슬픔을 ‘별봉황대신부’라는 작품으로 표현하였다는 게 저자의 추론이다.
대화재로 인한 구읍(舊邑) 사람들은 충격은 상당하였을 것이다.
당장 급한 것은 거처해야 할 마을의 복구가 우선이었을 것이고, 관청 건물이 피해를 입었다면 이 시설들도 복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수호신같은 봉황대를 잃었다는 슬픔, 그 슬픔을 복원으로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화재의 충격이 채 가지도 않은 다음해, 1787년 1월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고, 흉년이 이어지고, 삼 년 뒤인 1790년 2월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한다. 김산군의 재난 기록을 일성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일성록> 정조 11년 정미(1787) 1월 22일(신묘)
김산군(金山郡)의 민가 24호가 불에 탄 일로 아뢴 데 대해, 하교하기를,“한참 봄인데 살 곳을 잃었으니 극히 불쌍하고 가엾다. -하략-
<일성록> 정조 11년 정미(1787) 5월 22일(무자)
김산(金山)은 구급을 12차 시행하였다. 기민이 도합 3,144구이고, 조는 209석 5두 2승 5홉이다. 3석 7두는 체가곡이고, 33석 4두는 사진곡이고, 31석 7두는 비황곡이고, 91석 2두 2승 5홉은 상진곡이고, 50석은 군수 이우규(李禹圭)의 자비곡이다.
<일성록> 정조 14년 경술(1790) 2월 2일(계축)
경상 감사 이조원(李祖源)이 금산군의 민가 31호가 불에 탔다고 치계한 데 대해, 전교하기를,“봄이 한창인데 백성들이 처소를 잃었으니 염려스럽다. -하략-
이 세 번의 화재 원인이 무엇인지, 발생 장소가 어디인지는 아직 자료 부족으로 알수 없지만, 봉황대가 곧바로 복구되지 못한 사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위에서 언급한 재난들이 김산군의 읍치인 구읍 마을 주변에 발생한 상황이라면, 동헌과 객관은 화재 피해가 없었을까. 피해가 있었다면 아마 대대적인 복구 작업이 이어질 것이다.
봉황대가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대한 상황 추측은 이정도에서 마치고, 이제 김산 봉황대에 김산 사람의 인식을 살펴보자.
그동안 김산 봉황대를 소개하는 글들은 김천을 방문하는 이방인의 시각에서 쓰여진 작품들이 소개 되었다. 그렇다면 김산 봉황대에 대한 김산 사람들의 시각은 어떠하였을까. 봉황대를 묘사한 김산 사람의 글을 찾고자 많은 자료들을 뒤적이다 의외의 글에서 단서를 발견했다. 김산읍지에 남아 있는 ‘별봉황대부(別鳳凰臺神賦)’ 이다. 다행히 김천시사에 탈초와 번역본이 있었다. 참 고마웠다. 그리고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든다. 왜 일까. 글을 쓴 배경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서사가 비어 있는 연화지’라는 어느 블로그의 뼈아픈 지적이 다시금 밀려온다.
애향심과 우정과 친구의 작품을 전하려는 애틋함을 모두 보여주는 이런 서사가 있는데, 연화지에 서사가 비어 있다니. 누구의 탓일가. 화마에 무너진 김산의 상징물에 대한 옛벗의 간절함과, 이를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이면승의 애잔한 심정을 따라가면서 연화지와 봉황대의 한 자락을 차지하는 서사를 채워보자.
이 작품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별봉황대신부’를 적고 있다. 다음으로 글의 저자가 김산사람 정약광(鄭約光,1761~1793경)임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먼저 간 벗에 대한 이면승(李勉承,1766~1835)의 애잔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먼저 저자인 김산사람 정약광(鄭約光,1761~1793경)을 간략히 살펴보자. 정약광은 본관이 영일이며 자(字)는 동첨(東瞻)이다. 29세 때인 179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나 이듬해 병으로 사망한다.
<유집>을 남겼다고 하나 그에 대한 별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부족한 자료를 1788년 김산군수로 부임한 이성순(李性淳)을 따라와 양사당, 관아, 객관, 봉황대를 수리하거나 중수했던 이면승(李勉承,1766~1835)이 ‘별봉황대신부’의 저자로 소개한 글을 통해 그에 대한 면면을 살펴보자.
此卽邑人鄭上舍約光作也. 臺毁於丙午四月二十二日 子之夢適在是夜. 異哉. 夢幻境也 不可凖. 然夢之前無是事 而有是事扵方夢之日 則夢之不可不凖也. 余遂家大人來遊干兹 子居在迮齒 又五年差遂以文字相來往. 一日袖斯作出以示余. 道夢事甚悉 慨其不能重建. 後七年 君不幸病死 而臺於是成.
이 글은 읍에 사는 진사 정약광이 지었다. 봉황대는 병오년(1786년) 4월 22일에 무너졌고, 그대의 꿈은 바로 이날 밤에 있었다. 기이하지만 꿈은 허깨비 같은 것이라 따를 수가 없지만 꿈을 꾸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꿈을 꾸던 날 이런 일이 생겼으니 꿈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버님을 따라 이곳에 와서 유람하였는데, 그대는 이곳에 살면서 나이가 들었다. 나와는 오 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글을 주고받았다.
하루는 소매 속에서 지은 것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주며, 꿈 이야기를 매우 상세하게 일러주고 중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7년 뒤 그대는 병으로 죽고봉황대는 이렇게 완공되었다.
그리고 먼저 간 벗 정약광(鄭約光)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嗚呼 成毁存亡 曾未十年 而人物之不可齊如此. 把酒臨風 安得不測愴懷人也. 偶閱遣藳 得所甞示者 見物思人 因文想事 何忍使泯没而無傅也. 臺之毁而有子之夢 臺之成而有子之文, 隨臺之成毁而子之名 將永與之傳矣. 玆用刊揭于壁 因記其事. 是壬子仲冬一日也. 友人 完山 李勉承 識.
아! 이루어지고 무너지고, 있다가 없어진 것이 일찍이 10년이 되지 않았네, 사람이 사물과 가지런히 할 수 없으니 이와 같구나. 술잔 들고 바람 쐬며 어찌 그리워하는 마음에 슬퍼지지 않으리오.
우연히 유고를 보다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글을 얻게 되니, 사물을 보고 사람을 생각하고 글로 인해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어찌 없어져 전해지지 않게 하겠는가.
대가 무너질 때 자네의 꿈이 있었고, 대가 지어지니 자네의 글이 있으니, 대의 성쇠에 따라 자네의 이름은 영원히 함께 전해질 것이네. 이에 글을 새겨 벽에 걸어 그 일을 기록하네.
임자년(1792년) 중동(11월) 1일 완산인 이면승이 기록하다.
이제 다시 봉황대가 무너지는 날로 돌아가보면, 1786년 4월 20일경구읍에 화염이 휩쓸고 가자 그 여파로 봉황대도 소실된다. 김산의 자긍심이었던 봉황대가 무너지는 아픔을 정약광은 봉황대신(鳳凰臺神)과 이별하게 되는 꿈이야기로 각색하여 부(賦)로 적는다.
歲彤馬孟夏二十有二日夜 夢有一神人 被芙蓉之衣 執碧梧之扇 乘鳳凰而翱翔兮 來揖余而繾綣曰, 吾今日將去兮 聊與子而相見, 因歔欷而慷慨兮 若將別而遐舉. 余怪而問曰, 而吾所與居者 惟漁父與樵女, 夫何神人之倐來兮曰, 捨余而將去. 如非九華之靈 無乃高城之神
붉은 말의 해(1786년), 여름(4월) 22일 밤 꿈에, 한 신인이 부용의를 입고 벽오동 부채를 잡고 봉황을 타고 빙빙 돌며 날다가, 나에게 와서 읍하며 견권하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 가고자 하는데, 그대와 즐기어 보고자 하네.”하고, 한숨을 쉬며 탄식하고, 이별을 고하며 날아올랐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묻기를, “내가 함께 사는 사람은 오직 어부와 나무하는 여자뿐인데, 어찌 신인께서 갑자기 와서는 나를 버리고 간다고 말합니까? 구화산의 신령이 아니라면 고성산의 신이 아니겠습니까.”하였다.
*동마(彤馬) : 병오년(1786년)에 해당. *고상(翺翔) : 날개를 펼치고 뜻을 얻은 듯이 노닐음. *견권(繾綣) : 생각하는 정이 두터워 서로 잊지 못하거나 떨어질 수 없다 *초녀(樵女) : 땔 나무하는 여자 *구화산(九華山) : ①중국 안후이 성(安徽省) 남부에 있는 산. 아홉 개의 산 봉오리가 연꽃처럼 보이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 ②김산 관아가 소재한 산.
於是神人指天中之明月兮曰, 吾獨與此而相親.
이에 신인이 중천의 명월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는 오직 저 달과 친하다네.”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余昔在於江南兮 擅高名於四隣. 枕黃金之高陵兮 帶靑錢之方塘.
내가 전에 있었던 강남은 사방에 높은 이름 떨쳤고, 황금의 높은 언덕을 베고 누우면, 방당에서 출중한 인재들이 둘러싸고 있었네.
*청전(靑錢) : 재능이 출중한 급제자를 일컫는 말. 당나라 장작(張鷟)이 진사(進士)에 등제(登第)하자,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건미도(騫味道)가 그의 문장을 마치 청동전(靑銅錢) 같다고 칭찬한 뒤로 그를 ‘청전학사(靑錢學士)’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61 張薦列傳》
二水流於階除兮 三山峙而藩墻. 中余立而翼然兮 允塵邈而不忘.
이수는 섬돌을 돌며 흐르고, 삼산은 우뚝하게 울타리와 담장이 되었기에, 나는 가운데에 서서 나는 듯하였으니, 참으로 속세의 모습이라도 잊을 수 없네.
若溯余之攸起兮 所不談乎六籍 盖鳳凰之高飛兮 自天降而翼翼
지난 날의 흥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육경을 말하지 않더라도, 대저 봉황은 높이 날다 하늘에서 내려와 가지런하였네.
*육적(六籍) : 육경(六經). *익익(翼翼) : 정돈된 모양.
捿軒皇之阿閣兮 舞虞帝之韶楽 及軒虞之殂落兮 悲哀鳴而靡托
헌황제의 아각에 둥지를 틀고 우황제의 소악에 맞춰 춤추다가, 헌황제와 우황제 돌아가시니, 슬피 울며 의탁할 곳 없었네.
*아각(阿閣) : 4층으로 된 명당(明堂)을 말하는데, 황제(黃帝) 때 이곳에 봉황이 깃을 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帝王世紀》 *소악(韶樂) : 우순(虞舜)의 음악.
嗟孔聖之道不行兮 捲雙翩而邈邈 帝眷顧扵江左兮曰, 形勝之可居
아! 공자의 도가 행해지지 않아 두 날개 접고 아득히 날아가다가, 상제가 강좌를 돌아보시고 말하기를 “좋은 경치가 살 만하다.”하여
先令靈鳥翱翔兮 下春塘兮水碧 初伴逶迤之洲鷺兮 櫬嬋娟之他蕖
먼저 영조를 높이 날게 하고, 춘당의 푸른 물에 내리게 하니. 처음엔 비실비실한 왜가리 짝하다가, 고운 빛 연꽃을 가까이 하였네.
*위이(逶迤) : 구불구불함. 비실비실함
曾聯翩而上下兮 臺遂起於其上 雖灵禽之己遠亏 名以志乎不忘
일찍이 날개 펄럭이며 오르내리더니 그 위에 대가 세워져, 비록 령조는 이미 멀어졌지만, 뜻으로 이름 지어 잊지 않았네.
效少昊之記官兮 類岐山之名嶂 若夫風煙之佳麗兮 冠神洲之山河
소호씨가 기록한 것을 본받으니 기산의 높은 이름과 비슷하여, 대저 경치의 아름다움이 신주의 산하에서 으뜸이었네.
*기산(岐山) : 주나라 문왕이 나라를 세운 곳.
彼鳷鵲與黃鶴兮 罔不失其峨峨 惟騷人與曠客兮 競就我而吟哦
저 뭇 새와 황학 들이 그 우뚝함을 잃지 않고 잡아두니, 시인과 관광객들 나를 쫓아와 노래하길 다투네.
携綠壶而挈榼兮 泛彩舫扵駐驢 惟靑蓮之曠達兮 最好余而知余
술병과 술통 들고와 나귀 세우고 채방을 띄우는데, 푸른 연잎 넓게 펼쳐있어 나를 좋아하고 나를 아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네.
*설합(挈榼) : 술통 *채방(彩舫) : 예전에 대궐에서 정재를 베풀 때에 선유락에 쓰는 배를 이르던 말
嗟伊人之不可復覿 望鲸波而愁余 江東流而不盡兮 唯盛衰其不可常
아. 저 사람들 다시 볼 수 없구나. 일렁이는 물결 바라보며 나를 근심하지만, 강은 동으로 끝없이 흐르며 성쇠는 정해진 게 없구나.
呉花草而冷烟兮 晋衣冠而夕陽 乃胡元之末運兮 帝醉醒於鶉次
오나라 화초도 차가운 연기되었고 진나라 의관도 석양에 저물었구나.
원나라도 마지막 운에 이르렀고, 상제도 순차에 취했다 깨어나는구나.
*순차(鶉次) : 성차(星次)의 이름인 순수(鶉首)를 나타냄.
眞人起於浙江兮 千一淸於塘水 述雨露之霈澤兮 載山下之圖誌
진인이 절강에서 일어나니 천년 만에 못의 물 맑아지고, 우로의 은택을 기록하여 산하의 지지도에 등재하였네.
*천일(千一) : 황하수가 1천 년 만에 한 번씩 맑은데, 이 물이 맑으면 천하가 태평하고 성인이 난다는 전설이 있다.
吁嗟乎天命之難諶亏 萬事悲扵煤閣 紛胡馬而纒洛亏 恐餘波之流及
아! 안타깝게도 믿기 어려운 것이 천명이라. 집을 태워 만사가 슬프고, 호마가 분주하게 단단히 메여 있어 여파가 미칠까 두려워했네.
*천명지난심(天命之難諶) : 《서경(書經)》 함유일덕(咸有一德)에 “아, 믿기 어려운 것은 하늘이요, 무상(無常)한 것은 명이로다.[嗚呼 天難諶 命靡常]”라는 말이 나온다.
嗟吾身之靡托兮 惓局蹙而誥曲 睠鰈域之一區亏 保皇明之日月
아! 이 몸 의지할 곳 없고, 상황이 막혀서 삼가고 완곡하게 고하며, 조선의 한 구역 돌아보니 명 황제 일월을 보전하고 있었네.
*접역(鰈域) : 가자미 형국과 같은 지역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春秋凜於報壇兮 禮敬修扵望闕 儘兹土其可居兮 聊逍遙而托吾
오래도록 대보단에 늠름하게 모시며, 경건히 망궐례 수행하기에, 이 땅이 살만하다 여기고, 오로지 소요하며 나를 의탁 했었네.
循太師之東出兮 法孔聖之乘桴 矧彼湖嶺之所交兮 乃有州名之相孚
기자가 동쪽으로 나아간 것을 따르며, 공자의 ‘승부’를 법으로 삼으니
저 영호남이 교차하여 고을 이름이 부합하는 바가 있었네.
*태사(太師) : 상(商)나라 태사(太師)였던 기자를 말함. *승부(乘桴) : 난세를 피해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말함.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탄식한 공자(孔子)의 말이 실려 있다.
金湧黃於門外兮 錢溢碧扵塘陬 臺之高而慣眼兮 宛江南之名區
금이 문밖에서 누렇게 솟아나고, 돈이 넘쳐 연못 모퉁이가 푸르르고, 대가 높이 눈에 들어오니 강남의 경치 좋은 곳으로 완연하였네.
爰居爰處兮 盖亦有年 噫風俗之尚雅兮 最誰與我而好焉
여기저기 거처하며 편안한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아! 풍속이 일찍이 우아하여, 나와 함께 좋아한 이 중에 누가 최고였던가.
*원거원처(爰居爰處)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여기에서 편안히 거하고 저기에서 편안히 처하며 여기에서 즐거이 웃고 저기에서 즐거이 말하도다.[爰居爰處 爰笑爰語]”라고 하였다.
幸子居之莽蒼兮 時與子而聮翩 今吾來而子莫省兮 子亦不可謂眞知我
다행히 자네가 사는 곳이 아득하여 때때로 자네와 잇달아 날아다녔는데, 지금 내가 와도 자네는 살피지 않으니, 자네 역시 진실로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없네.
*연편(聯翩) : 잇달아 날아다님.
余扵是瞿然而稱謝 唉然而感慨曰 子是鳳凰之靈也
내가 이것에 두려워하며 사례를 표하고, 한탄하며 감개에 젖어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바로 봉황의 정령이구나.
吾與子而共托兮 結江山之幽盟 今胡爲而跼蹐兮 遽告別而將行
나는 자네와 함께 의지하여 강산의 그윽한 맹세를 맺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조심스럽게 걸어와 갑자기 이별을 고하며 가고자 하는가.
*국척(跼蹐) : 황송하거나 두려워 몸을 굽히고 조심스럽게 걸음
雖象人之莫我知兮 亦何足懷夫不平 苟余情其信芳兮 雖糞壤而難凂
재주 없는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어찌 불평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나의 정은 믿음이 향기로와 똥 덩어리로도 더럽히기 어렵다네.
*상인(象人) : 나무인형. 아무 능력이나 재주가 없는 사람.
况吾逍遥而共逰兮 豈可謂全不能知
하물며 나와 소요하며 함께 놀았는데 어찌 모른다고 하겠는가.
乃神曰, 余不爲此也. 盖自吾之在此 閲年久而屢危
마침내 신이 말하기를, 나는 이 곳에 있지 못하겠네.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위험을 보았네.
幸金候之哀我兮 重緝修而扶持 樑畫龍而桷鳯兮 更生色乎軒楣
다행히 김 군수가 나를 슬피 여겨 거듭 수리하여 부지하여, 들보에는 용을 그리고, 서까래에는 봉황을 그려, 색과 처마를 다시 새롭게 했었네.
*김후(金候) : 1771년 봉황대를 중수한 김산군수 김항주(金恒柱,1722~)로 추정.
今纔逾扵十稔兮 又傾仄而將圯 惟危邦之不居兮 固聖訓之所示
지금 겨우 곡식이 열 번 익었는데 또 기울어 무너지려 하네. 생각해보니 위태한 나라에서 살지 않는 것이 한결같이 성인들이 가르침이네.
火將焚扵棟宇兮 豈區區如鸞雀 雖吾子其欲留我兮 奈禍伏扵朝夕
불이 장차 집을 태우려 하는데 어찌 난새나 참새처럼 구구하겠는가. 오직 자네가 나를 머물게 하려 하지만 조석으로 숨어 있는 화를 어찌하겠는가.
固顕晦之有数兮 豈無期扵重覿
명암에는 운수가 있으니 어찌 다시 보는 것을 기약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현회(顯晦) : 벼슬과 은둔 등 명암에 관한 일
因倐起而擧袂兮 指南雲之漠漠 余亦驚而寢寤兮 起彷徨而頭擡
그리고 갑자기 일어나 일어나 소매를 들어 남쪽 구름을 가리키며 멀어졌기에, 나 역시 놀라 잠에서 깨어나 방황하며 머리를 들었다.
朝來童子自湖而臺頹. 噫嘻異哉. 神固先覺.
아침이 되자 동자가 호수에서 와서 대가 무너졌다고 하는데, 아! 매우 이상하구나. 신이 한결같이 먼저 깨달았구나.
色斯舉矣 臺其重起 神無遐去 去且何之
색리들이 이것을 받들어 대를 다시 일으킬 것이니, 신이여 멀리 가지 마오. 가면 어디로 가리오.
神固扵我處兮 必欲其去. 噫吾知之莫及兮 處濁世而不能違.
신은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는데 반드시 가려 하네. 아 내가 아는 것이 미치지 못해,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 어길 수 없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