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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장 조운검문의 멸화 1 관림(關林). 영웅 관우의 머리가 묻힌 무덤을 일컫는다. 무덤에 수풀 림(林)자를 쓰는 것은 문(文)의 공자와 무(武)의 관우 뿐이다. 삼경 무렵. 하현달마저 구름에 가려서 관림이 괴괴한 적막이 감돌 때였다. 돌연 적막을 깨는 호적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호적소리는 간헐적으로 끊어졌다 이어졌다. 조운검문의 13대 검수인 천조육검의 맏이인 비성도은하(飛星渡銀河) 조운성(朝雲星)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며칠씩 은신하고 있는 그가 이 관림을 택한 것은 무후(武候)의 성지인 이 관림에서는 어느 누구도 병장기를 소지 못한다는 것과, 그 누구도 싸움을 하지 못한다는 불문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호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고 그 소리는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천조육검을 말하는 것이며 특히 성질이 급한 둘째가 자꾸 관림 밖으로 나가보겠다고 하여 진땀흘리며 달래고 있는 중이었다. "형님, 이렇게 앉아 미쳐 죽으나 나가서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발 나갑시다. 제발……." 이제는 둘째가 애원을 했다. 물론 조운성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역시 나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간에 나가서 끝장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는 공포의 대상인 빙요화이다. "형님. 명색이 조운검문의 13대 정수들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내놓고 그녀를 합공한다면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기는 둘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천조육검이 동귀어진으로 마음 먹고 그녀를 합공한다면 결코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겐 죽기 전에 꼭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었다. 바로 야유화를 죽이는 일이었다. 그 옛날 조운검문이 역적과 연루되어 삼족이 극형에 처해 있을 때 벽사천중 오도인이 그들의 삼족을 멸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벽사천중 오도인. 그는 그들에게 있어서 가문의 은인이었다. 한마디로 가문의 구세주이다. 그런 오도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 일은 선악을 떠나서 그들에게는 지상명령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야유화를 죽이는 것을 막고자 빙요화가 그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운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째야, 나 역시 백 번 그렇게 하고 싶다. 물론, 우리가 죽더라도 오도인은 우리의 일의 성패를 떠나서 우리의 후손을 돌봐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문의 은인의 부탁을 들어주지도 못하고 죽는다면 나중에 무슨 낯으로 오도인을 볼 것이며 또 후손들을 본단 말이냐?" 조운성의 말에 둘째는 시무묵해졌다. "나도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오. 그렇지만 여기서 이렇게 죽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소." "물론이다. 하지만 여기서 동쪽으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소림사가 있다. 사천당가가 사파의 마두들과 함께 소림을 친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이긴다는 건 말이 안된다. 따라서 빙요화가 그들에게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운신하기가 편해진다. 설혹 그렇게 안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긴단 말이다." 조운성의 설득에 둘째와 나머지 동생들도 수긍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큰 오산을 한 것이다. 다시금 호적소리가 들리더니 한 여인이 관림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헛것을 보는가 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어둠과 같은 흑의를 입고 들어서니 하체는 안보이고 오직 사람의 얼굴만이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다가올 수록 사람이 분명하였고 또한 얼굴에 화장을 한 것을 보아 한눈에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요염한……. 조운성을 비롯한 천조육검이 한기를 느끼며 그들도 모르게 표풍태검식(飄風太劍式) 방어자세로 들어갔다. "누구냐?" 조운성이 으르렁거렸다. 여느 인간처럼 겁먹은 자신을 감추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런 반응없이 그냥 다가오고 있었다. "멈춰라! 누구냐고 물었다." 조운성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조급함과 공포에 젖은 음성이었다. 허나 여인은 역시 아무소리 없이 바싹 다가섰다. 일순, 천조육검은 소름이 돋았다. 흑의여인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확연히 들어올 때 그녀가 바로 빙요화임을 알 수 있었다. "얘들아, 내가 누구냐고 물었느냐?" 빙요화의 말투는 아주 친한 친구인 양, 아니 마치 자애스런 할머니의 어투였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말투가 그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빙요화라고 해. 너희들이 조운검문의 천조육검이지?" 순간, 조운성은 신형을 뒤로 뽑아냈다. 그리고 대꾸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싸악-! 나머지 천조육검도 재빨리 동시에 검을 뽑아냈다. 그러나 성질이 급한 둘재가 기어이 일갈을 내뱉었다. "그렇다. 네가 요물이라 일컫는 빙요화냐?" 빙요화는 둘째의 그런 행동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흰손이 까만 저고리 소매 속에서 살며시 나왔다. 일순, 그것을 먼저 본 조운성이 악성을 터트렸다. "뒤로 물러나라!" 그러나 때는 늦었다. 소매 속에서 빠져나온 빙요화의 흰손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따악! 둘째의 뺨에 작열했다. "쿠악!" 둘째가 턱이 돌아가면서 부서진 이빨과 함께 선혈을 토해냈다. 천조육검은 넋을 잃었다. 빙요화가 어떻게해서 둘째의 뺨을 때렸는지 모두들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느낀 것은 오직 빙요화의 소매 속에서 흰손이 번쩍였다는 것만 볼 수 있었다. 천조육검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멍하니 빙요화를 쳐다보았고, 빙요화는 언제 내가 무슨 일을 했더냐는 듯이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천조육검은 그런 표정의 빙요화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그 무표정 속에 결코 그 누구도 읽지 못하는 잔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물론 찰나지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그들에게서 참으로 기나긴 시간이었다. 허나 역시 조운성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육정이산(六丁移山)을 펼쳐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정신이 번쩍 들은 천조육검이 동시에 검을 뽑아들며 육방(六方)을 재빨리 밟았다. 빙요화는 무표정하게 천조육검의 움직임을 마치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엉뚱한 말을 했다. "얘들아,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게 아니냐?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단다." 모두들 빙요화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조운성만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육정이산의 검진은 누가 가두어 놓거나 또는 방어하는 데 쓰이는 전문적인 진법이었다. 빙요화가 그들 검진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진법을 썼으니 빙요화가 스스로 걸어들어오기 전에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그리고 빙요화가 얼마든지 기다릴 수가 있다는 말은, 천조육검이 공격을 못하니 진법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뜻이다. 조운성은 빙요화에게 미리 겁을 먹고 육정이산의 검진을 펼친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그러나 모든 게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이제 그들의 안위는 자신들의 내공과 정신력의 싸움이 되고 말았다. 2 밤하늘의 달은 구름 뒤에 숨어서 그대로 서산을 넘어가고 동쪽의 하늘에 여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밤새동안 긴장 속에 버티고 있는 천조육검에 비하여 빙요화는 일 장 밖에서 불까지 피워놓고 차를 끓여 마시고 있었다. 그렇다고 천조육검이 빙요화의 여유스런 행동에 감히 선수를 칠 수도 없었다. 한눈에도 그녀가 천조육검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서 자신을 공격해달라고……. 천조육검은 고통스러웠다. 시간이 지날 수록 그들의 정신력과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사실 마음먹고 운기조식을 하자면 한 달 동안 물 한 모금 안먹고 버틸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 적이 공격해올지도 모르는 긴장속에서 그들은 눈동자 하나도 돌릴 수 없었다. 그리고 기어코 그들 중 성질이 급한 둘째가 제일 먼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첫째인 조운성이 눈짓으로 저지하였으나 둘째는 이미 진형을 무너뜨리며 검을 허공에 치켜들었다. 육정이산의 진법에서 육정개산(六丁開山)의 진법으로 바꾸자는 신호였다. 그리고 그 행동은 둘째가 선두에 서서 빙요화를 공격하겠다는 의도였다. 조운성은 이미 기호지세에 들어간 둘째의 행동에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니면 모두 쪼개져서 빙요화에게 하나하나 죽임을 당할 뿐이었다. "육합개산!" 조운성의 입에서 벼락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천조육검이 검을 휘두르며 빙요화에게 짓쳐갔다. 빙요화가 싱긋 웃었다. 아니, 그렇게 느꼈을 뿐이지 냉막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일종의 비웃음으로 입꼬리를 치켜 올렸을 뿐이다. 우우웅-! 천조육검의 웅휘한 검위(劍威)가 빙요화를 향하여 태산처럼 밀려갔다. 빙요화의 소매 속에서 흰손이 번뜩였다. 휘이잉- 북풍한설이 몰아쳤고 얼음꽃이 송이송이 피며 천조육검의 검기에 부딪쳐 갔다. 파파파파팡-! 태산같이 밀려오던 웅후한 검기가 쪼개져 나갔고, 빙요화의 설화장(雪花掌) 역시 작렬하면서 무수한 편화(片花)를 만들었다. "우우웃-!" 천조육검은 탄성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순간 무수한 편화를 만든 설화가 사위를 얼리며 곧바로 천조육검을 향하여 쏘아져 갔다. 마치 수많은 수정 칼날이 그들에게 날아오는 듯했다. 밤의 달빛을 영롱하게 반사시키며 쏘아져 가는 설화의 편린들…… 실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빙요화의 무공을 찬탄할 시기가 아니었다. 지금은 목숨을 건 싸움이었고, 천조육검은 상상도 못할 그녀의 설화장에 기가 질려버렸다. 아니, 그녀의 설화편린들이 내뿜는 한기에 얼어가고 있었다. 조운성이 폭갈을 터트렸다. "육합제뢰(六合諸雷)를 펼쳐랏!' "육. 합. 제. 뢰!" 천조육검이 동시에 검을 치켜들며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일제히 검을 가로질렀다. 꽈꽈꽝! 여섯 개의 검기가 하나로 합치며 벽력이 떨어지듯 빙요화의 설화를 때려갔다. 허나 천조육검의 그 가공할 검기는 설화편린에 부딪치며 그 기세가 얼어붙고 있었다. 한편으로 칼날 같은 빙요화의 설화편린의 그 기세는 급격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빙요화의 설화의 편린이 뭉치고 합쳐지며 다시 송이송이 만개하고 있었다. 실로 믿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천조육검은 동시에 죽음이 그들에게 바싹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그들은 다시 내공을 끌어올릴 힘도 없었고 빙요화를 상대로 펼칠 검법도 없었다. 조운검문의 사나이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리개 대신 검을 갖고 자라왔다. 밥을 먹을 때나 뒷간에 갈 때도 그들의 손에선 검이 떠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검인일치(劍人一致)라고 할 수 있듯이 검은 그들의 인생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들은 검을 쥐고 속수무책이 된 자신들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이 더 펼칠 힘과 검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빙요화를 이길 만한 검법이 없다는 것이다. 조운성은 비통하게 소리쳤다. "형제들이여! 육합광만을 준비하라!" 천조육검은 힐끗 맏형을 쳐다보았다. 무인으로서 마지막으로 멋지게 싸우고 죽자는 뜻이다. 육합광만(六合光滿). 천조육검의 최후의 검법이자 빛의 검법이다. 그리고 그 검법은 스스로 자신들을 태워 빛을 내는 촛불과 같은 죽음의 검법이기도 했다. 다혈질인 둘째가 한 발을 내딛으며 호쾌하게 소리쳤다. "이 둘째가 앞장을 서겠소." 조운성은 실색했다. 둘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 선다는 것은 가상할 만한 일이었으나 최후의 검법이라 일컫는 육합광만의 검법을 시전해보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성질이 급한 둘째가 검진을 지휘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빙요화의 하얀 손이 소매 속에서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조운성은 악성을 터트렸다. "주류육허(周流六虛)를 밟아라!" 천조육검은 각자의 방위를 밟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앞서 나가던 둘째가 조금 빨리 방위를 밟았다. 그것이 그에게 치명적이었다. 쉬익-! 빙요화가 탄지신공으로 허공에 떠있는 설화를 향하여 쏘아냈다. 팟-소리와 함께 설화 하나가 깨져나갔고, 이어서 그 파편이 천조육검의 둘째를 향하여 쾌속무비하게 쏘아져 갔다. 둘째를 비롯한 천조육검이 대경실색하며 검을 휘둘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설화의 파편이 둘째의 전신요혈을 향하여 파고들었다. "우우웃!" 둘째가 검을 휘둘렀다. 빛을 발하는 형광의 검기로 자신에게 파고드는 설화의 파편을 쓸어갔다. 그러나 그가 혼자서 펼치는 형광의 검기는 강력무비한 설화의 파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설화의 편린이 검기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둘째의 검을 얼게 만들었고, 그 검을 쥔 손부터 서릿발이 내린 것처럼 피부가 하얗게 변했다. "둘째야……!" 조운성이 참담하게 동생을 부르며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그 기회를 놓칠 빙요화가 아니었다. 그녀가 허공을 밟는가 했더니 어느새 조운성의 뒤통수를 갈기고 있었다. 앞으로 쏘아가던 조운성은 절망했다. 둘째가 얼어죽는 것을 중지시킬려면 지금 당장 자신의 내공을 주입해야 한다. 그런데 빙요화가 그런 자신의 행동을 읽고 자신의 뒤통수를 노리는 것이다. 진퇴양난이었다. 이미 기호지세가 된 그가 신형을 뒤집어 빙요화를 대적한다고 해도 자신이 무사할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몸을 빙요화에게 맡기고 둘째라도 살려야만 했다. 조운성은 둘째의 명문혈을 찍으며 자신의 진기를 집어넣었다. 이때였다. "우리도 같이 죽자!" 남아있던 천조육검이 형광의 검기를 뿌려대며 빙요화를 향하여 짓쳐갔다. 그리고 그들의 맏이인 조운성의 안위도 생각치 않고 검망으로 빙요화를 에워쌌다. 하기사 그들 자신의 안위는 물론이며 그들 자신의 죽음마저도 도외시한 공격이기에 빙요화로서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빙요화는 조운성을 잡으러가던 신형을 가볍게 틀어 허공으로 치솟았다. 위기일발로 조운성이 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동귀어진이라도 할 그들은 진형이 무너졌다. 아니나 다를까. 빙요화는 빙글빙글 회전하며 쌍장을 냅다 연이어 뿌렸다. 극한의 한빙장이었다. 윙윙윙윙-! 북풍한설이 몰아치듯 엄청난 추위를 동반한 기류가 사위를 얼려가며 천조육검의 정수리를 향하여 밀려갔다. "우우웃-!" 천조육검이 검을 휘두르며 사방으로 퍼져갔다. 그리고 그들은 빙요화의 한빙장 세력권에서 겨우 벗어났다. 그들은 절망했다. 이제 그들은 검진을 형성할 수도 없었고 각자의 무공으로 멀리서 빙요화를 합공할 수밖에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격이었지만…… 빙요화는 여유있는 자태로 천조육검을 바라보았다. 예의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었지만 마치 독수리가 여러 병아리를 놔두고 먹이를 고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때였다. 관림을 뚫고 들어오는 일단의 신형이 있었다. 열두 명의 젊은 여인과 등에 백화도를 찬 도인 하나, 그리고 뒤에 열 명의 도인들이 그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조운성은 그들 중에 모산십이선녀의 하나인 모화연리와 모산십이장로 중 하나인 모종천을 알아보았다. 왜냐하면 모화연리와 모종천은 강호에 뻔질나게 돌아다녀 그 이름과 얼굴이 많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열 명의 도인들 중에 한 노니(老尼)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그 여도인이 모산파의 문주인 자허신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운성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허신니에게 예를 올렸다. "검문의 조운성이 신니에게 문안드립니다." 자허신니가 두 손을 저었다. "우리 예를 차리지 맙시다. 때가 때인 만큼." 그녀는 조운성에게서 눈길을 돌려 빙요화를 바라보았다. 일순, 무표정하던 빙요화가 처음으로 눈살을 찌프렸다. 꽤나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조운성은 긴장 속에 한 가닥의 기대를 가졌다. 아무리 전설적인 빙요화라고는 하지만 모산의 정예고수들을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서릿발 같이 차갑고 무표정하던 빙요화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으로 보아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자허신니가 빙요화에게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대가 빙궁의 요화인가?" 빙요화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 귀찮게 뭘 물어보느냐는 얼굴이다. 한마디로 건방졌다. 그러나 자허신니는 일문의 문주답게 감정을 죽이며 다시 물어갔다. "그대의 족속 중에 하나가 나의 아들을 죽였느냐?" 빙요화는 역시 무표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허신니의 말에 수긍을 한 것과도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얼굴엔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이냐는 표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수양이 깊은 자허신니도 부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린 계집이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순간, 모산십이선녀가 살기등등한 얼굴로 허리에 두른 채대를 일제히 풀어냈다. 일문의 문주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게 그녀들을 분노케 한 것이다. 하기는 당금 무림에서 감히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빙요화는 분명히 자허신니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독하게. 빙요화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정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빙요화! 네가 아직까지 뜨거운 맛을 보지 못했구나!" 십이선녀들 중에 모화연리가 기어코 참지 못하고 빙요화에게 채대를 날려보냈다. 물론 모화연리가 자신의 채대로 그녀를 상하게 만든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공격이 빙요화를 흔들 것이며 그것이 싸움의 초석이 될거라는 예상이었다. 헌데, 그들은 빙요화를 잘못 읽고 있었다. 그녀는 그냥 상상하는 상식의 인간이 아니었다. 또한 그녀의 손속은 상상을 불허하는 잔인함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빙요화의 흰 손이 소매 속에서 번뜩였다. "우웃!" 빙요화를 겪은 천조육검이 제일 먼저 경악성을 터트렸고 이어서 자허신니도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또한 속수무책이었다. 모화연리의 채대가 빙요화의 목을 감아갔을 때 빙요화의 손이 어느새 채대를 움켜쥐고 앞으로 끌어 당기고 있었다. 이어서 빙요화는 모화연리가 채대를 놓고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게 차인신공(借引神功)으로 쾌속하게 끌어 당겼다. 따라서 주위에 있던 그 누구도 그 과정에 개입을 할 수도 없었고 그냥 모화연리가 스스로 벗어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허나, 그건 기우였다. "허억!" 모화연리는 빙요화의 차인신공에 그냥 끌려갔고 기어코 빙요화의 손아귀에 목줄기를 잡히고 말았다. 말이 그렇지 이 일련의 동작은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또한 모화연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갔다. 물론 모화연리는 이미 황천 길로 떠난 뒤였다. 허나 그녀의 죽은 얼굴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신체의 다른 부분은 멀쩡하고 얼굴 부분만 얼 수도 있다. 그러나 순식간에 모화연리의 얼은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변하면서 썩어가는 것이었다. 모두들 모골이 송연해져서 할 말을 잃었다. 너무나 기괴해서 경악도 분노도 표출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딱 한 사람, 자허신니만이 빙요화의 기괴한 무공을 알아 보았다. "전설의 구전빙백신공(九轉氷魄神功)을 시전하다니……." 자허신니는 사랑하는 애제자가 죽었다는 슬픔보다도 빙요화의 가공할 무공에 잠시 넋이 나간 것이다. 그러나 일문의 문주인 자허신니가 아닌가. 그녀는 호승심과 분노, 그리고 복수심에 불탔다. 아들이 죽고 이제는 사랑하는 애제자가 죽었다는 데에 그녀는 이를 갈아붙였다. "계집, 진정 악독하기가 짝이 없구나." 자허신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조육검의 조운성이 소리쳤다. "인간이 아닌 요물에게 강호의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 순간,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모화연리가 빠진 십이선녀들이 일제히 채대를 휘두르며 빙요화에게 짓쳐갔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십이장로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짓쳐갔다. 물론 이미 조식을 취했던 천조육검도 검을 일제히 뽑았다. 칼날 같은 무수한 채대가 하늘을 갈랐고 바위를 깨뜨리고도 남을 웅휘한 장영(杖影)들이 폭풍처럼 빙요화에게 덮쳐갔다. 아무리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빙요화이지만 그 위세에는 그녀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파파팡! 빙요화는 신형을 뒤로 날리며 쌍장을 연이어 발출했다. 그녀의 오음마공(五陰魔功)과 칼날같은 채대, 그리고 무수한 장력(杖力)이 격돌하였다. 꽈꽈꽈꽝! 고막을 찢는 굉음이 터졌고 그 소리의 여운을 따라 빙요화는 허공을 가르며 재빨리 벗어나고 있었다. 이때 천조육검이 일제히 폭갈을 터트렸다. "어디 가느냐? 요물!" 이미 빙요화의 길목을 예견했다는 듯이 천조육검이 검을 휘두르며 그녀를 막아섰다. 그러나 당황할 빙요화가 아니었다. 그녀는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면서 신뢰하격(迅雷下擊)의 수법(手法)으로 천조육검의 검기를 내쳤다. 따따땅! 금속성 소리가 나며 천조육검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그리고 일제히 울컥! 선혈을 토해냈다. 한편, 빙요화가 땅에 착지할 때 바로 정면에 자허신니가 우뚝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적이지만 칭찬할 만하구나. 내 일장을 받아라!" 자허신니가 쌍장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빙요화의 빙백장에 대적되는 양수공이었다. 양수공(陽手功). 원양대진력(元陽大眞力)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전형적인 극양(極陽)의 장력이다. 따라서 극음(極陰)에 속하는 빙백장과는 상극이었다. 사위를 온통 태울 듯한 열화의 장력이 빙요화에게 밀려갔고, 빙요화 역시 조금의 망설임이 없이 쌍장을 내밀었다. 꾸아앙! 두 개의 상극되는 장력이 격돌하며 뜨거운 불길과 뼛골이 시려운 한기가 서로 얽히고 설키며 휘돌아 갔다. 이어서, 푸시시시시…… 두 줄기의 기둥이 엇갈리며 서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절정의 신공을 소유한 자허신니와 빙요화였지만 그녀들은 쌍장을 내민 채로 서로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들을 보는 사람은 서로들 버금가는 실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빙요화는 이미 세 무리의 집단 공격을 받은 후였고 또한 그녀의 숨은 점차 고르게 변해갔던 것이다.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천조육검의 조운성이었다. 조운성은 검을 휘두르며 쾌속하게 빙요화에게 쏘아져 갔다. 사실 그녀들의 장력권 안에 낀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 잘못하면 자허신니도 다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상태에서 그냥 좌시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자허신니가 빙요화를 감당치 못할 거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판단이 섰다고 해도 모산파의 제자들로서는 감히 장문인의 싸움에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조운성의 의도를 읽은 천조육검이 그 즉시 뒤따르고 있었다. 사실 천조육검은 자허신니의 안위보다도 어떻게해서든지 이번 기회에 빙요화를 처치하는 게 먼저였다. 빙요화는 쌍장을 내민 채 자신에게 쏘아져 오는 천조육검을 힐끗 바라보았다. 결코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으나 이번 싸움에 자신도 얼마간에 상처를 받을게 뻔했다. 빙요화는 턱을 치켜들며 입술을 모았다. 그러자 그녀의 인후(咽喉)에서 기묘한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요요요요요……" 고막을 찢는 그 굉음은 하늘을 가르며 관림 밖으로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순간이었다. 퍼퍼퍼펑! 하늘에 푸른 섬광이 작렬하였고 그 섬광과 함께 하얀 인영들이 하늘을 가르며 빙요화가 있는 곳으로 쾌속하게 떨어져 내렸다. 빙요화에게 쏘아져 가던 천조육검이 그녀를 지척간에 두고 자신들도 모르게 잠시 멈칫했다. 하기는 하늘에 섬광이 터지고 많은 인영들이 떨어져 내리니 그럴만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그들에게 천추의 한을 남겼다. "타앗!" 최초로 빙요화의 입에서 폭갈이 터졌고, 그녀는 쌍장을 내밀어 자허신니를 뒤로 밀려가게 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신형을 뒤로 길게 뽑아냈다. "앗!" 천조육검은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이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빙요화는 그들의 사정권 밖으로 벗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하얀 인영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리고 그 하얀 인영들이 빙궁의 몽중수예빙하녀(夢中授藝氷河女)라는 것을 알았다. 3 이미 해가 중천에 떴어도 남을 오시(午時)였건만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가려 관림 주위는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어둠은 더욱 짙어갔고 기어코 빗줄기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자허신니를 비롯한 모산파가 규칙없이 서있었고, 그 뒤에 천조육검이 그냥 일렬로 서있었다. 그러나 규칙없이 서있는 모산파는 백화원무(百花圓舞)라는 진법을 펼치고 있었으며 천조육검은 성사만리(星射萬里)라는 검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허나 서있는 신형은 그들의 어쩐지 안정감이 없었다. 그랬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상을 입고 있었다. 그에 반하여 그들 앞에 포진하고 있는 백의여인들이 있었으니 바로 빙궁의 몽중수예라고 하는 빙녀들이었다. 허나, 그들은 하나같이 싱싱한 꽃을 연상케 하였다. 다만 너무 차갑게 보인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빗줄기는 갈 수록 굵어졌고 백의를 입은 빙녀들의 옷은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건 여인의 나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인의 나신을 보고 뇌살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적당히 가린 여인의 몸, 보일 듯 말 듯한 여인의 비소(秘所), 투명히 비치는 여인의 피부……. 빙녀들의 모습이 바로 그와 같았으며, 또한 지금 그녀들의 자태야말로 뭇 남자들을 뇌살시키고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핏 보기에 그렇지 자세히 보면 그녀들의 뇌살적인 자태에는 모골이 송연한 음모와 잔인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에 터질지 모르는 전율이 흐르는 가운데에 모산파와 천조육검을 괴롭히는 게 있었다면 그건 사정없이 쏟아붓는 빗줄기였다. 지금까지 두 번의 격돌이 있었고 그때마다 모산파와 천조육검은 조금씩 내상을 입었다. 거기에는 빙녀들의 무서운 의도가 있었다. 아무리 기괴하고 고강한 무공을 가진 빙요화와 빙녀들이라고는 하지만 모산파와 천조육검을 한꺼번에 처치하려면 그들도 상당한 대가를 치뤄야만 한다. 따라서 빙요화와 빙녀들은 자신들은 조금도 다치지 않고 단 한 번의 기회에 그들을 깔끔하게 처치하려고 했다. 그렇다고 결코 그녀들이 모산파와 천조육검을 편하게 놔두지는 않았다. 그들의 진력을 야금야금 소진시킬 목적으로 산발적으로 공격을 했고, 마치 결판을 내겠다는 듯이 전력을 다하여 대대적으로 두 번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천조육검의 조운성은 빙요화와 빙녀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무공의 수위가 한 수 아래인 그들이 먼저 공격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직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의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변하는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 수록 빗줄기가 쎄어졌고 그들의 안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언제 어느때 적이 공격을 행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은 점차 불안함을 느꼈다. 이제 빙요화와 빙녀들이 다시 공격을 해온다면 그건 마지막 공격일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독 ㄳ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