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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처음으로 펼친 검법(劍法) [1] 단풍잎이 하나둘 떨어지는 늦가을이었다. 천락무예단 객석은 오늘도 입추의 여지가 없이 남녀노소로 꽉 들어 찼다. 관객들은 오전 공연이 끝났건만 점심 먹으러 가는 것도 잊은 채 그 냥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방금 공연을 마친 유현덕취주황학루(劉玄德 醉走黃鶴樓)에 도취된 나머지 한 번 더 관람할 작정이었다. 원나라 때 발달한 이 잡극(雜劇)은 삼국시대 적벽대전(赤壁大戰) 이후 유비가 오(吳)나라로부터 빌린 형주(荊州)를 놓고 주유와 황학 루에서 연회를 겸한 담판을 벌이는 것이 주제였다. 관객들은 검기무의 일종인 이 춤을 매우 좋아했다. 연극 줄거리가 나관중(羅慣中)이 쓴 삼국지연의에 없을 뿐더러 주 역의 연기가 돋보였기 때문이었다. 유청풍은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에 보답하고자 등패무(藤牌舞)를 준 비해 두었다. 등패무는 주역 단독으로 등나무 방패를 들고 춤을 추는 검기무의 일종이었다. 특히 그 춤이 강서, 절강 등 남부지방에서 발달한 연유 로 이곳 남창 사람들은 매우 즐겼다. 이렇게 주연이 추가로 공연하는 것은 대규모 가무단으로서 관객들 의 호응에 대한 보답일 뿐만 아니라 수준을 보여주는 선전을 겸했다. 아울러 유청풍은 자기가 등패무를 추는 동안 다른 동료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유청풍은 남자 탈의실에서 복장을 바꿔 입은 후 분장실로 갔다. 그가 분장실에 막 들어섰을 때 웬 낯선 여인이 먼저 와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소품인 탈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나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유청풍은 감각적으로 초면임을 느낀 것이었다. 분장실은 남녀가 함께 사용하는 곳이라 그런지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가 등패를 내려놓고 동경(銅鏡) 앞에 앉자 여인은 재빨리 그의 뒤로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새로 입단한 분장사랍니다. 신기해서 가면을 하나 써봤어요," 그녀의 음성은 얼굴을 가린 달기( 己)탈과 어울리지 않게 매우 칼 칼한 억양이었다. 유청풍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동경에 비친 그녀의 모습만 힐끗 보았을 뿐 묵묵히 고개를 끄 덕였다. 여인은 예의 쇠를 긁는 듯한 음성으로 애교를 떨었다. "제가 분장상태를 봐 드리죠." 그녀의 손이 얼굴에 닿을 찰나 유청풍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가무단 일을 처음 해보는 모양이군." 여인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잠시 당황한 태도를 취했다. 슬며시 손을 내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동경 속에서 두 사람의 안광이 직선을 이루었다. 여인은 이내 아, 하고 감탄사를 터트리며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그녀는 별안간 유청풍의 허리에 손을 척 들이밀었다. "꼼짝 마라! 수리마제의 전인아, 움직이면 동강 날 줄 알아라." 순간 동경 속에 입이 길쭉한 사악한 노파가 불쑥 나타났다. 가면을 내던진 노파의 손에서 세 치나 되는 날카로운 손톱이 흉측 하게 번뜩거렸다. 예상외로 유청풍은 담담히 말했다. "백탈공조(魄奪蚣爪) 초음방(焦 芳), 제 발로 찾아 왔군." 그러자 입이 길쭉한 노파 초음방은 오싹한 흉소를 터트렸다. "이히히! 숨통을 끊어주마. 이놈, 이리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어느새 기다란 손톱 끝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바로 그 손톱이 사자(死者)도 공포에 질려 헤맨다는 백탈공조였다. 유청풍은 태연히 대꾸했다. "천만에,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방 태도가 너무나 덤덤하여 초음방은 부지불식간 되물었다. "뭐라고? 대체 어떻게 알았지?" 유청풍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분장할 일이 없으니까." 초음방은 영문을 몰라 다시 물었다. "하면 분장실로 왜 왔지?" "탈의실이 붐벼서 북이 울릴 때까지 기다리던 중이야." 오전공연이 끝나면 배역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으레 서둘러 탈의실 로 달려간다. 하나 유청풍은 곧바로 등패무를 추어야 하므로 소품만 바꿔 대기중 인데 북소리가 울려야 무대로 나갈 수가 있었다. 이처럼 주역이 등장 할 때는 반드시 악기로 예고하는 것이 관례였다. 정황을 알게 된 초음방은 귀신처럼 웃었다. "잘 됐다. 점심시간이라 아무도 오지 않겠구나. 이히히히......." 유청풍은 칼로 자르듯 질문을 던졌다. "진성검을 죽이라고 사주한 자가 독혈인가?" 진성검 추양건을 암살한 자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 가운데 셋은 유청풍에게 죽었으며 초음방은 네 번째 대상자였다 . 독혈 방시굉은 바로 이들 다섯 명을 조종한 배후인물로 알려져 있 었다. 적어도 투검 영감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한데 유청풍은 엄희채가 독혈의 외손녀임을 알고 나서부터 의문을 품게 되었다. 비록 그녀가 살수지만 정도의 인물을 살상한 적이 없을뿐더러 자신 있게 독혈과의 관계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초음방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모른다." 유청풍은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뭔가 있어.’ 그는 느긋하게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긴 착한 사람을 모함해서 죽였으니 할 말이 없을 테지." 초음방은 새 주둥이처럼 생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착하긴 뭐가 착해. 추양건 그자는 내 사매 나야봉에게 미쳤던 자 야. 봐라, 내 사랑을 외면하다 결국 죽었잖아." 나야봉은 정부인 갈상태와 공모하여 남편 추양건을 살해한 독부였 는데 얼마 전 춘추고서점에서 유청풍이 격살시킨 바로 그 여인이었다 . 추녀 초음방은 반반한 나야봉에게 사랑을 빼앗긴 나머지 증오심을 못 이겨 추양건을 살해하는 데 기꺼이 동참한 것이었다. 그녀의 표독스런 말 속에는 깊은 열등감과 이성에 굶주린 추녀의 한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삼각관계를 안 유청풍은 그만 기가 막혔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타인 과 공모하여 살해했단 말인가?" 초음방은 되려 당당한 태도로 지껄였다. "흥, 어느 여자가 무시당하고 가만히 있겠느냐?" "자신을 먼저 돌아 봐. 질투를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고......." 초음방은 험악한 강호 물을 먹은 악녀답게 상대방의 의도를 벌써 눈치챈 상태였다. '흥, 뭔가를 캐려는 모양인데 어림없다.’ 그녀는 살기를 번뜩이며 양팔을 직선으로 찔러 넣었다. "건방진 놈, 죽어라!" 쐐액! 일순 외문공부 가운데 가장 무서운 백탈공조가 그의 양 허리를 비 수처럼 파고들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그 초식이야말로 오늘 날 그녀의 악랄한 명성을 있게 한 망자탈조(亡者奪爪)였다. 유청풍은 기민하게 신형을 비틀면서 등패로 재빨리 틀어막았다. "어딜......." 그가 등나무 방패를 다루는 솜씨는 실로 독수리가 선회하듯 유연하 고 날렵했다. 그 동작은 그가 가무를 응용해서 펼친 웅응반선(雄鷹盤旋)이었다. 꽈드득! 순간 등패와 충돌해 반쯤 부러진 손톱은 땅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 초음방은 조각난 손톱을 응시하며 당혹스러워 했다. "아니, 네놈이......?" 유청풍은 등패를 쳐든 채 유유자적한 태도를 보였다. "모르는군. 남만산(南蠻産) 만년등(萬年藤)을......." 무려 만 년 동안이나 열대염우(熱帶鹽雨)에서 굳어진 만년등은 어 떠한 곤충의 침식도 막아내며 보검으로도 절단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 했다. 진기가 담긴 종이도 강철처럼 변하는 터에 뇌운진기를 머금은 만년 등이 백탈공조를 파괴한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화가 난 초음방은 허공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혈광마검이 없는 네놈쯤이야! 백탈공조의 진수를 보여주마." 마치 구름을 탄 듯 그녀는 허공에서 쉴새없이 양발로 걷어찼다. 실로 그 발길질은 소림사 칠십이절기 중 하나인 관음족(觀音足)보 다 훨씬 날카로웠다. 신발을 뚫고 나온 긴 발톱이 시커먼 조영(爪影)을 사방에 뿌려댔다 . 악마의 그것 마냥 흉측하게 생긴 발톱은 그의 상단 요혈을 노리고 무섭게 찔러 들어왔다. 귀백산조(鬼魄散爪)의 한 수가 머리를 파괴할 찰나 유청풍은 번개 같이 옆으로 피했다. 이어 그는 벼락치듯 일갈을 터트렸다. "부러져라!" 동시에 그는 양 소매에서 파앙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양팔을 교차 시켰다. 그가 넓은 소매를 떨치며 장수교횡(長袖交橫)을 시전한 순간 꽈지직! 하며 둔탁한 파열음이 고막을 때렸다. 그 소리는 등패와 발톱이 충돌하면서 만든 굉음이었다. 이때 초음방은 기겁할 정도로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바닥에 내려섰 다. "으헉! 이럴 수가......?" 무적으로 알려진 흉측한 발톱이 처참하게 조각난 것이었다. 더불어 발가락마저 쇳물에 녹은 것처럼 모조리 뭉개지고 말았다. 새카맣게 탄 뭉툭한 발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뇌운진기가 지닌 놀라운 위력이었다. 초음방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부지불식간 뒷걸음질 쳤다. "팔성의 뇌운진기! 네... 네가 벌써......? 으으......." 흐릿한 흉안(凶眼)은 온통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청풍은 그 동안 실전을 통해 뇌운진기를 팔성까지 회복한 것이었 다. 그는 싸늘한 안광을 줄기줄기 쏘아 보냈다. "시간이 되었다. 널 정리하고 무대로 나가야 할......!" 암영이 드리워진 실내에서 오싹한 여운과 동시에 훤칠한 그가 성큼 다가서는 모습은 실로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초음방은 상대방이 이토록 무서운 인물로 돌변할 줄 미처 몰랐었다 . 그녀는 등이 벽에 부딪친 순간 이를 바드득 갈았다. "으드득! 뒈져라!" 파파파팟! 놀랍게도 손톱이 그녀의 손에서 쑥 빠져 나왔다. 부러진 손톱 열 개가 허공을 가를 때 그녀는 벌써 지붕으로 치솟았다. 유청풍은 재빨리 등패를 내던지며 양팔을 쭉 뻗었다. 등패가 손톱을 쳐내며 사선을 그리자 그의 팔목에서 눈부신 광선이 쏟아져 나갔다. "도망갈 생각 마라." 네 줄기 섬광이 번쩍하며 막 통풍구로 사라지려던 초음방은 괴이한 비명을 터트렸다. "꺄아악......!" 두둥둥! 거의 동시에 천지가 떠나갈 듯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여운이 가늘어질 즈음 까맣게 탄 초음방의 시신은 재가 되어 날아 갔다. 유청풍은 네 자루 단검을 팔목에 꽂으며 의아히 여겼다. '상의도 없이 그가 왜......?’ 느닷없이 들려온 북소리는 막(幕)을 올리는 예고타(豫告打)였다. 그 고성(鼓聲)으로 인하여 관객들은 비명을 전혀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북은 단원의 호흡을 맞춰주는 역할도 하므로 반드시 주 역인 유청풍에게 물어본 다음에 울려야 정상이었다. 문득 나지막한 음성이 입구에서 들려왔다. "멋진 화법(花法)이야. 저절로 북이 쳐지던데......?" 음성의 주인공은 온통 북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는 가슴에 장고(長鼓)를 달고 등에는 대고를 졌는데 허리에도 요 고(腰鼓)를 차서 두 눈만 빠끔히 보일 정도였다. 이 사람이 바로 뒷간에 앉아서도 무대와 북소리를 정확히 맞춘다는 그 유명한 고수(鼓手) 노달맹이었다. 유청풍은 안도감을 느꼈다. '다행이다. 내가 준비를 마치고 연습하는 줄 알았구나.’ 노달맹은 유청풍이 대결하는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는 무거운 북을 전신에 잔뜩 달고도 조금 전 유청풍이 신형을 비 켜 굴렀던 동작인 소위 가무의 화법을 흉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흉내는 비틀대다가 끝나고 말았다. 곧바로 탈바가지 안창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안창구는 다분히 비꼬는 투로 말했다. "어이, 준비신호를 받지 않고서 마구 쳐대면 어떻게 해? 킁!" 실상 그 말은 고속 승진한 유청풍을 빈정대는 것이자 동료간 화합 을 질시하는 것이었다. 노달맹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아암, 물론. 앞에서 신나게 달려가는 새카만 후배를 절대 용서하 면 안 되지. 나라고 배알이 없겠나?" 그가 역으로 트는 것 같아 안창구는 납작코를 잔뜩 부풀렸다. "킁, 자네들이 자꾸 이러니까 저 녀석이 우쭐대는 거라구......." 그는 졸지에 납작코가 된 사연을 잊을 수가 없었다. '놈, 모든 여인들이 칭송하던 내 코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상 언젠 가 톡톡히 대가를 받으리라.’ 삼 년 전 유청풍은 천락무예단에서 입단 첫날밤을 맞이했다. 당시 그는 굴욕적인 입단 신고식을 거부하면서 달려드는 선배들을 모두 집어던져 버렸다. 당시 안창구는 천막 지지용 철주와 호되게 부 딪쳐 납작코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킁킁거렸으며 지금까지 남몰래 유청풍을 증오해왔다 . 그런 그가 유청풍과 친근하게 대화하는 노달맹을 좋게 볼 리 만무 했다. 노달맹은 능청스런 표정을 지은 채 소리쳤다. "아, 빨리 끝내고 밥을 먹어야지. 이 후배야, 내 배는 뭐 공기통인 줄 알아? 엉?" 북은 연극의 시작과 끝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들처럼 무 대 분위기를 살려 배역과 관객이 교감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노달맹 역시 식사를 가장 늦게 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 그러다 보니 어언 유청풍과 공감대를 이루게 되었다. 유청풍은 그 말에 화답하듯 한소리 툭 내뱉었다. "북치기 선배의 술기운이 빠지기 전에 마쳐야지." 무심한 그가 술 얘기를 꺼낸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의 화끈한 성격으로 보아 한 잔 사겠다는 암시 같았다. 그 말에 술고래 노달맹의 입은 귀까지 좍 찢어졌다. "크하....... 가뭄이 단비로 변했구나. 손님들은 아마 몹시 긴장할 걸? 신기로 펼치는 등패무를 기대하면서 말이야." 유청풍은 등패를 집어들더니 무대를 향해 빠르게 걸어나갔다. 안창구는 뒤에서 그를 무섭게 흘겨보았다. '저 녀석이 분명히 싸우는 것 같던데? 갑자기 북소리가 들리는 바 람에....... 젠장.’ 그는 유청풍에 대한 약점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바로 조금 전 그가 유청풍과 초음방이 일전을 벌이는 소리를 엿들 을 찰나 노달맹이 북을 쳐댄 것이었다. 안창구는 급히 달려왔지만 이 미 실내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북치기 노달맹은 술병을 머리 속에 그리며 유청풍을 따라 나갔다. 그는 신들린 것처럼 경쾌한 행진타(行進打)를 두드렸다. 둥둥둥! 둥다라다라다라... 둥둥둥! 드디어 주역이 입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함 께 자리에서 일어나 함성을 질러댔다. "와아! 그가 나온다!" "거기, 앞사람 좀 빨리 앉으라니까!" 잠시 후 등패무가 시작되자 장내는 숨을 죽였다. 유청풍이 동작을 구사할 때마다 박판 소리가 힘차게 울려나왔다. 흥에 겨운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상체를 들썩거렸다. "얼쑤!" 쿵! 다닥......! 공연이 끝나면 근처 식당은 아마 초만원을 이룰 것이다. [2] "의절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고헌부는 홍오간의 제약소에서 벌어졌던 일을 보고 받은 후 되물었 다. 그의 앞에는 고일두가 앉아 있고 뒤로는 갈곤태와 장구안이 허리를 굽힌 채 서 있었다. 작전을 실패한지라 분위기는 몹시 무거웠다. 믿었던 탕구추와 갈상태가 죽었으며 춘추고서점에서 관리하던 대출 서류마저 몽땅 불타버렸으니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었다. 가장 큰 고민은 와호장에서 수리마제의 맥을 끊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 이었다. 고일두는 답답한 기색을 드러내며 짧게 대답했다. "예." 고헌부는 쓰린 속을 간신히 억눌렀다. '으음, 녀석이 손해를 엄청나게 끼치는군. 이런 게 자꾸만 누적되 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텐데. 문제는.......’ 아무리 와호장이 막강한들 여론을 무시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는 속마음과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아마 의절도 자존심이 몹시 상했을 게야." 그가 듣기 좋은 소리를 할수록 실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제는 뭔가 반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만 될 상황이었다. 고 헌부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이때 정해단이 한 짓으로 넘겨야 제격인데.......’ 그는 장구안을 슬쩍 쳐다보았다. 과연 관계(官界)와 정해단에서 잔뼈가 굵은 저놈이 내 간지러운 곳 을 긁어 줄까 하는 눈빛이었다. 장구안은 기다렸다는 듯 즉시 반응을 보였다. "홍오간을 의식하면 안 됩니다. 수리마제의 맥을 키울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의혹을 품게 되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모두가 탐내는 뇌운진기를 빼앗지 않겠단 말인가? 대체 뭘 믿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할 해답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고헌부가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고헌부는 그의 상념을 자르며 은근히 유도해냈다. "뾰족한 방법이 있나?" 장구안은 다가가 나직이 속삭였다. "도삼겸(屠 鎌)을 아시는지요?" "새외에서 활동하는 오합척(烏哈 ) 말인가?" "예." 도삼겸 오합척은 사타철혈단(沙陀鐵血團)이라는 마적단을 구성하여 청해(靑海), 신강(新疆)은 물론이고 막북에까지 악명을 떨치는 자였 다. 이러한 고수를 초빙하여 유청풍을 먼저 제거하자는 의견이었다. 고 헌부는 의외라는 듯 눈빛을 발했다. "한데......?" 장구안은 넌지시 운을 떼었다. "제가 그 자와 안면을 트고 지내던 사이입니다." 고헌부는 다 알면서도 애매 모호하게 말끝을 죽 끌었다. "글쎄, 공연히 소문에 휘말리면......." 장구안은 열변을 토했다. "오히려 안전합니다. 중원의 인물이 아니라서 비밀을 지킬 겁니다. 만일 무슨 얘기가 돌 경우 제가 나서겠습니다." 고헌부는 다시 한번 뜸을 들였다. "교섭비가 만만치 않을 게야." 이제는 성사시켜 보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장구안은 음성에 힘을 실었다. "그 점은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고헌부는 속으로 주판알을 굴렸다. '녀석, 관직에 있을 때 엄청 긁었다더니.......’ 그는 지그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성공하면 활동비를 좀 지원해 주거라." 그가 아들에게 명을 내린 의도는 안주겠다는 뜻과 똑 같았다. 왜냐하면 와호장의 회계는 장주인 그가 직접 담당하기 때문이었다. 고일두는 능청맞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장구안 역시 태연히 허리를 숙였다. "오직 보답하려는 제 의지입니다. 장주님." "소신껏 하도록......." 장구안은 얼른 절하고 뒤로 물러났다. "예, 명을 시행하겠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는 풀이 죽은 갈곤태를 무시 하고 먼저 걸어나갔다. 갈곤태는 고개를 숙인 채 내심 이를 갈았다. '개종자, 장구안아! 언젠가 호되게 뒤통수를 쳐주마.’ 고헌부는 사기가 떨어진 갈곤태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갈총관." 눈이 마주친 순간 갈곤태는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렸다. "예, 장주님." "청풍이 암살하려는 자에게 미리 귀띔을 줘서 함께 대비하도록.... ..." 장구안의 능력을 불신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반면 갈곤태를 신임 하는 것 같은 어투였다. 감읍한 갈곤태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그 동안 파악해 두었으니 확실히 조치하겠습니다." 그는 돌아 나가며 흉광을 번뜩였다. '살길은 오직 하나 뿐, 내가 먼저 청풍을 삭!’ 고헌부는 그런 모습을 흡족한 눈초리로 응시했다. '소모품들은 계속 경쟁을 붙여야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뛰거든.’ 그러한 면면을 고일두는 가만히 앉아서 배우고 있었다. 부자만이 남자 고일두가 먼저 물었다. "위강을 그냥 놓아두실 겁니까?" "원래 고지식하니까 당분간 지켜보자꾸나." 그만한 인물을 포섭하려면 약간의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는 지시였 다. 고일두도 그런 뜻을 알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예." "무림이 청풍을 주시하는 만큼 너무 전면에 나서지 마라." "암암리에 수하들을 통제할 겁니다." "오냐. 앉아서 조직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해. 그 다음 무림의 흐름 을 감각으로 느낄 때 본문을 물려주마." 고헌부는 자신이 살루문의 문주임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자리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아들이 경영수업을 착실히 쌓도록 암시를 준 것이었다. 고일두는 흥분을 억누르며 돌아 나갔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의 뇌리에는 무림을 딛고 선 자기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헌부는 목침을 힘껏 움켜쥐었다. '녀석이 예상을 깨트리는군.’ 단목 목침은 소리 없이 바스러졌다. [3] 꽁꽁 얼어붙은 겨울 동안 무림에는 두 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유청풍이 음양야혼귀와 공모하여 제약소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밝 혀졌다. 이들 세 명은 추양건에 대한 복수라는 명분 아래 정해단과 살루문을 상대하여 싸우는 척 하지만 실상 무림고수들을 무참히 죽이 는 살수들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주모자격인 유청풍이 새로운 수리마제라는 것이다. 한데 어째서 무림은 천락무예단을 근거로 활동 중인 이들 세 명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피차 견제하기 때문이었다. 유청풍 등 세 명을 제외하고 무공을 모르는 천락무예단원을 공격할 경우 물의가 빚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력이 막강한 조직도 명분을 잃어 대세를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그 점을 우려하여 위해 정해단이나 살루문, 그리 고 홍오간은 물밑에서 조용히 음모를 진행 중이었다. 또 한 가지는 정체 모를 남녀 고수가 각각 정해단과 살루문을 암암 리에 탐지한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음양야혼귀와 무공수준이 비슷한 이들 남녀는 이십대 초반이라는 점 외에 알려진 바가 하나도 없었다. 엄희채는 천락무예단원들을 휴가를 보낸 후 노방과 함께 종적을 감 추었다. 혹한기의 겨울에는 어느 무예단이나 교대로 휴가를 가는 것이 관례 여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락무예단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제약소 사건 이후 무림의 심상치 않은 시선이 집중되자 안전을 고 려한 조치였다. 아마 지금쯤 음양야혼귀는 한 명 남은 원수를 추적하고 있을 것이 다. 이번만큼은 유청풍에게 기회를 빼앗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유청풍은 그 기간 동안 강남의 어느 산중에서 천지광락세를 수련했다. 그는 노출된 투검술만 갖고 활동할 수가 없다고 판단한 것 이었다. 겨울 내내 사라졌던 엄희채가 며칠 전에 나타났다. 파란 싹들이 머리를 내민 삼월 초순 경 천락무예단은 호광성(湖廣 省) 악주부(岳州府:구 악양)로 위치를 옮겼다. 악주부는 동정호(洞庭湖)와 성도(省都) 무창부(武昌府) 사이에 자 리 잡은 유명한 관광지여서 관객유치 장소로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술시(戌時) 무렵 공연을 끝마친 유청풍은 악주 성내로 향했다. '엄희채를 만나야 알겠군. 독혈이 왜 하수인을 제거하는지를 알아 야겠어.......’ 인구 오만여에 불과한 작은 도시 악주는 늘 인파로 북적거렸다. 오 늘도 무창의 황학루(黃鶴樓)로 가려는 사람들과 여기서 남행하여 동 정호를 보려는 관광객들이 길을 가득 메웠다. 유청풍은 대강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엄희채가 유숙하는 객잔이 악양루(岳陽樓) 부근에 있기 때문이었다 . 숲 속 여기저기에서 돗자리를 깔고 고성방가를 지르는 관광객들이 보이는가 하면 때때로 야릇한 신음소리도 흘러 나왔다. 길에는 관광객인 듯한 수십 명이 비틀거리며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 바로 그때 섬광이 번뜩였다. 슈아아악! 유청풍은 양손으로 땅을 짚은 채 납작 엎드린 자세를 취하며 한 바 퀴 빙그르르 돌았다. 발에 채인 여덟 명은 발목이 부러져 뒤로 벌렁 쓰러졌다. 그 순간 그들은 이선(二線)에서 공격하던 동료들의 칼에 맞아 숨막힐 듯한 비 명을 질러댔다. "캐애액......!" 이선의 무리들이 멍한 찰나 제 삼선을 이룬 무리들은 그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어 곧장 공격해 들어왔다. 쐐애애액! 시퍼런 검날들이 달빛에 번뜩였다. 이미 물구나무를 선 유청풍은 또다시 한 바퀴 돌았다. 그가 발끝으 로 아직 일선에서 비틀거리던 여덟 명의 손목을 가격하자 그들의 검 은 허공으로 퉁겨 나갔다. 일순 처절한 단말마가 밤 공기를 갈랐다. "캬아악!" 허공에서 공격하던 삼선의 무리들은 검에 목을 찔린 채 나무토막처 럼 나뒹굴었다. 어느새 검을 빼앗아 든 유청풍은 주저앉은 자세로 번 개같이 휘둘렀다. "타앗! 천지광락세!" 천지광락세는 전임 검무자 동방노야가 전수한 검기무의 품세였다. 번쩍! 눈부신 광선이 휘황찬란한 달무리를 만들었다. 막 공격을 가하던 이선의 암습자들은 그 속에 갇혀 보이지 않았다. 유청풍이 검을 거두고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들은 추풍낙엽처럼 후 드득 쓰러졌다. "크으윽!" 유청풍의 동작은 실로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어둠에 잠긴 사위는 삭막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번개같은 동작에 비하여 그가 삼성의 공력만 운용했던 터라 시신들 은 하나도 타지 않았다. 유청풍은 자세를 가다듬은 후 전방의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세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넋이 나간 듯한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광경을 불가사의 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강서쌍웅과 낯설은 육순쯤 된 노인이었다. 오 척 단구의 그 노인은 그새 시퍼런 쌍낫을 들고 있었다. 유청풍은 그들을 향해 싸늘한 안광을 뿜어냈다. "이봐, 계속 서투른 짓 할 건가?" 의표를 찔린 궁판과 궁설은 경악에 찬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다 유청풍의 귀신같은 검술에 넋을 잃었던 것이다. 겁에 질린 강서쌍 웅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우측으로 돌렸다. 이때 노인은 언제 놀랐는가 싶을 정도로 평정을 되찾은 한편 차디 찬 눈초리로 유청풍을 흩고 있었다. 이때 궁판은 슬며시 변죽을 울렸다. "흐흐흐! 너도 익히 들었을 텐데? 고명하신 도삼겸 오합척님을 말 이야." 용기를 얻었는지 궁설은 덩달아 박자를 맞추었다. "이놈아, 죽음을 각오해라!" 오 척 단구의 도삼겸 오합척은 어깨를 쫙 펴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 다. "네가 유청풍이란 놈이냐? 나와 함께 의절에게 가자." 날카로운 모습에 비해 그의 말투는 매우 투박스러웠다. 유청풍은 냉소를 쳤다. "흥, 마적인 네가 그의 부하란 말이지?" 오합척은 자못 거드름을 피웠다. "뻔뻔스러운 놈. 의절을 모함한 사실을 천하가 다 안다. 위대하신 대통좌께서 분개하고 계신다." 유청풍은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탐화몽포의 강북총령(江北總領), 아부가 지나쳐." 비밀에 싸여 있는 정해단의 서열이 드러나자 오합척은 흠칫했다. '윽, 저 놈이 내 신분을 어찌 알았을까?’ 오합척은 사타철혈단이라는 마적단의 두목으로 서부 변방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는 옥문관을 넘나들며 무수한 고수 및 요인을 살상함은 물론, 쓸만한 남녀노소를 잡아다 토로번(吐魯番)에 있는 인 간시장에 내다 파는 흉악스런 자였다. 세인들은 그가 커다란 쌍 낫으로 인간을 마치 짐승 도살하듯이 죽 여서 도삼겸이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다. 이십 년 전 이에 격분한 중원의 고수들은 추살대를 조직했다. 일류고수 삼십 명으로 짜여진 추살대는 일 년여 추적 끝에 돈황(燉 煌) 부근에서 오합척을 포위 공격했으나 오히려 사타철혈단의 역습을 받아 전멸 당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고수들은 오합척이 구사하는 쌍삼색혼(雙 索魂) 삼초식 을 겁낸 나머지 아예 피해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제 정해단의 남 부총령이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인 놈이 누구야?" 오합척은 윽박지르듯 물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긴장을 풀지 못 하고 있었다. 유청풍은 그런 그를 더욱 질리게 만들었다. "이봐, 오합척. 오고족(烏古族)을 규합하여 막북(漠北) 무림을 장 악할 모양이다만 망상에 젖지 마라." 오합척은 펄쩍 뛰었다. "대체 어떤 놈이 그딴 모함을 하는 거야?" 폭탄 터지는 듯한 음성에 나뭇가지가 부러져 후드득 떨어졌다. 오 합척은 부지불식간 궁판과 궁설을 획 돌아보았다. 이때 궁판과 궁설은 부동자세를 취한 채 전면만 바라보았다. '공연히 아는 척 하다가 낫질 한 번에 골로 가는 수가 있거든.’ 유청풍은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저렇게 흥분하는 것은 곧 사실이라는 증거지.’ 그의 입에서 간단하게 답이 나왔다. "누가 했겠어? 사타철혈단의 주력이 오고족 아니냐?" 오합척은 가슴이 저려왔다. '정말 귀신같은 녀석일세. 아무도 모르는 본족의 비밀을 어떻게 저 리 잘 알고 있을까?’ 오고족은 몽고족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부족 가운데 한 갈래였다 . 거란족인 요(遼)와 여진족이 주류를 이루는 금(金)은 중원을 통일 한 후 자신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몽고 동북부 지역의 부족을 오고족 이라고 불렀다. 칭기즈칸이 중원을 장악하고 족명(族名)인 몽고를 국호로 정했을 때 오고족은 핵심 세력에서 밀려 옥문관 밖으로 쫓겨났다. 칭기즈칸을 배출한 니론(尼論:니룬) 부락은 서부초원지대에서 살았 던 달탄족(達 族)의 중심부족이었다. 이들은 원으로 국호를 바꿔 세 계를 지배할 때까지 핵심적인 실세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렇게 황제를 배출한 족속만이 정권을 잡으며 그 족속의 명칭에 종속되는 전통은 몽고족의 오랜 관례였다. 하지만 오합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순 돌궐(突厥) 계통의 부족만을 융성시켜 국가를 유지하려는 칭기즈칸의 깊은 의도가 숨어 있다고 여겼다. 그것은 니룬이 순수하 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러한 추정이 가능했다. 오늘날 명나라가 대륙을 차지했어도 오합척은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고족을 주력으로 사타철혈단을 조직했으며 언 젠가 정해단이 무림을 석권하면 막북 무림의 종주가 되려는 야망을 키워 왔었다. "네 마음대로 꾸며대지 마라!" 이윽고 오합척은 내심을 감춘 채 단호히 부정했다. 유청풍은 빙긋이 웃었다. "너는 사타라는 말을 사용할 자격이 없어." 사타라는 말은 원래 돌궐을 뜻한다. 그러므로 오합척이 속한 오고족은 사타와 무관한 것이다. 그런 그가 사타라는 용어를 표방한 의도는 은근히 정통성을 강조하 여 막북을 삼키려는 속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버티다 못한 오합척은 결국 우회적으로 실토하고 말았다. "고래로 지자단명(知者短命)이다. 그래서 높은 자리로 올라갈 사람 은 짐짓 바보짓을 배우는 거야. 흐흐흐......." "너야말로 진짜 바보구나. 장구안의 술수에 넘어가 강남총령의 관 할지역까지 들어와서 설치니 말이야." 오합척은 유청풍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가만, 저런 녀석을 막료로 거두면... 장차 대업을 순조롭게 진행 할 수가 있겠군.’ 그는 슬쩍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우리가 공격하리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유청풍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야밤에 남자들끼리 수십 명씩 몰려다니는 유람객은 없으니까." 유명한 관광지가 거의 그러하듯 술에 취한 유람객들은 으레 기생들 과 희희낙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암습자들은 혼란스런 분위기만 조성했을 뿐 이러한 점을 소 홀히 다룬 것이었다. 오합척은 내심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타고난 감각과 판단력이 대단하군!’ 그는 포옹하듯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내가 보건데 너는 가무나 하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무엇 때문에 사서 고생하느냐? 원하면 내가 빼주마." 상대방 흑심을 눈치 챈 유청풍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묵계는 비밀이 생명인데, 청중이 너무 많아." 오합척은 갑자기 쌍 낫을 휘둘렀다. "까짓것 응하기만 한다면 내가 입을 봉해 놓으마."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넉자로 늘어난 쌍 낫은 섬뜩한 빛을 뿌려댔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날 그의 명성을 가름하는 쌍 낫, 도삼겸이었다. 옆에서 듣던 강서쌍웅은 기겁을 하고 놀랐다. '헉! 우리를 죽이려 하다니.......’ '윽! 사태가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하는 거야?’ 그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오금을 달달 떨었다. 오합척은 태연히 도삼겸을 번쩍 치켜들었다. 사악, 하는 음향을 동 반한 시퍼런 한기가 밤 공기를 갈라놓았다. 도삼겸이 막 내려그을 찰나 유청풍의 음성이 먼저 들렸다. "이봐, 그렇다고 같은 편을 처치한단 말인가?"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합척은 냉정한 음성을 토해냈다. "대를 위해 소는 희생하는 법이니까." 그때 유청풍이 본론을 꺼냈다. "정해단에서 날 홍오간에게 넘기려는 의도가 뭐냐?" 협상으로 착각한 오합척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 "상부 지시다. 하지만 다른 놈으로 대체가 가능하지." 노련한 그는 완전히 한 편이 되어야 자세히 말할 모양이었다. 유 청풍은 일소에 붙여 버렸다. "신뢰가 오락가락 하면 되겠나?" 우습게 거부당한 오합척은 눈썹을 말아 올리며 훌쩍 날아올랐다. "약은 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은 온통 쌍날의 그림자로 가득 찼다. 쉬아아악! 상중하 어디에도 피할 곳은 없어 보였다. 유청풍은 검을 수직으로 세우면서 크고 작은 원을 그렸다. "어딜!" 일순 수십 개의 불꽃과 함께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 언뜻 낫은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조금 짧은 낫이 맹렬히 밑으로 파고들었다. 누가 봐도 유청풍의 무릎은 절단될 것만 같았다. 오합척은 흐뭇한 흉소를 날렸다. "흐흐흐! 이것이 쌍삼삭혼의 위력이야." 곧바로 긴 낫이 상단을 후리며 공간을 점유했다. 유청풍은 신형을 수평으로 유지한 채 검을 바로 세웠다. 동시에 그는 천지가 떠나갈 듯한 일갈을 터트렸다. "가라!" 카카카캉! 검과 낫이 충돌하며 하얀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속에는 부러 진 낫 날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조각난 낫 날은 방망이에 얻어 맞은 것 마냥 갑자기 방향을 바꿔 오합척을 향해 날아갔다. 번쩍거리는 파편 조각을 본 오합척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허억!’ 하지만 그는 머뭇거릴 새가 없었다. 부러진 두 개의 낫 날은 무서운 회오리를 일으키며 눈앞으로 다가 오는 것이었다. 혼비백산한 오합척은 재빨리 땅에 엎드렸다. "아니, 저게......?" 그러나 그것이 최대의 실수였다. 위로 지나칠 것 같던 낫 날은 만근 바위인 양 돌연 뚝 떨어지는 것 이었다. 순식간에 오합척은 목과 허리가 잘라졌다. "켁!" 이상스럽게 세 동강이 난 시체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유청풍은 뇌운진기를 조정할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때 강서쌍웅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틀렸어, 튀자!" "제길, 설마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두 사람은 재빨리 언덕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의 머리가 막 사라질 즈음 싸늘한 음성이 가로막았다. "모함에 앞장 선 놈들." 섬광이 번쩍 하는 순간 빗살 같은 도풍(刀風)이 지나갔다. 짧은 비 명 후 곧 퍽, 하고 썩은 박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컥!" 두 개의 머리를 날려버린 도의 주인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림자처럼 날아간 그는 등조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둑 밑에 있 던 그를 보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하던 유청풍은 빽빽한 송림을 노려보았다. "장구안, 쥐새끼 마냥 숨어 있을 건가?" 어둠 속 노송 뒤에 숨어 있던 장구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윽... 귀신보다 더 무서운 놈.’ 이미 넋이 반쯤 달아난 그는 곧장 송림 속으로 도망갔다. "병신 같은 오합척, 큰소리를 치더니만......." 유청풍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해단의 수뇌를 차례로 끌고 오라는 뜻에서 보내 주마.’ 그는 아직 장구안이 와호장으로 투항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내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가고 나서 얼마 후였다. 날씬한 인영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허리에 쌍륜화극을 찬 교영은 하얀 이를 악물었다. "저런 간교한 자를 살려두면 피해가 더 커지겠어." 장구안이 사라진 쪽을 흘겨보는 그 인영은 바로 고혜원이었다. 그녀는 망해파에서 당했던 치욕을 씻기 위해 늘 벼르던 터였다. 휭! 찬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그녀의 신형은 장구안을 쫓아갔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