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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十八 章 血肉 검박하고 단아한 정실. 조그만 서탁을 앞에 두고 남궁린은 무거운 표정으로 포단에 앉아 있었다. 이제 막 연해월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 터였다. 쨍그랑! 연해월은 충격으로 인해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렸다. 바닥에 떨어진 찻잔이 박살이 났지만 연해월은 그런 것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 아버님께서?" 그녀는 남궁린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아버지였다. 비록 자신과는 소원한 관계였지만 피를 나눈 사이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이다. "남극벌과 결탁한 마도수란 자객의 소행이라더구나." 남궁린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남궁린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웅웅 울렸다. 연해월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사마덕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토록 강하신 분이…….' "이번에는 남극벌의 정예들을 이끌고 이미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연해월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내친김에 뿌리를 뽑아 화근을 제거하고 남부무림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계산이다." 남궁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시선을 화원에 준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북파무림맹을 짓밟은 힘이라면 남궁세가도 역부족이다." 남궁린은 천천히 뒤를 돌아 연해월을 바라보았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했으니 지금 네가 할 일은 아이를 지키는 것이다. 알겠느냐?" 연해월은 불안한 표정으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아버님!" 남궁린은 그런 연해월의 얼굴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걱정 마라, 내 비록 살인을 해본 지 오래됐지만 어떻게 살인을 하는 것인지 잊어버리진 않았다." 남궁린의 음성에는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꽉 차 있었다. 쾅! 이때 그의 가신 중 하나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큰일났습니다, 문주님!" 남궁린은 못마땅한 듯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며 묵직하게 말했다. "진중하지 못하고 어인 호들갑이냐?" 가신은 그 자리에 부복하며 비통한 음성으로 보고를 했다. "일흔다섯 개의 기관과 육주비전(六柱秘殿) 중 다섯 군데가 이미 무너졌습니다!" 남궁린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연해월도 두 눈이 한껏 벌어진 채 안색이 백지장처럼 희게 변했다. 가신은 고개를 쳐든 채 치를 떨며 급박하게 말했다. "놈들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이 상태라면 늦어도 반 시진 이내에 내전까지 밀어닥칠 것으로 보입니다!" 연해월은 남궁린을 바라보며 초조한 듯 입을 열었다. "아버님……!" 남궁린이 그런 연해월을 향해 준엄하게 호통을 쳤다. "아직까지 가지 않고 있는 것은 기어코 남궁가의 맥을 끊어놓고야 말겠다는 뜻이더냐?" 연해월은 남궁린의 꾸중에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만이 의미를 알 수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연해월은 마침내 이를 악물고 마지못한 듯 고개를 숙였다. "모쪼록 존체 보중하시길……." 연해월은 미처 할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목이 메었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몸을 돌려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 연해월의 뒷모습을 남궁린은 어두운 표정으로 주시했다. "육주비전이라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코자 내 평생의 심혈을 쏟아 만들어 놓은 죽음의 여섯 관문!" 그는 우울한 시선을 들어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 육주비전을 불과 몇 시진 만에 무용지물로 만드는 자가 이 무림에 존재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남궁린은 피식 한차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얼굴 위로 죽음처럼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렇군! 이제는 천외천(天外天) 무쌍가(武雙家)의 깃발을 내릴 때가 된 모양이로군!" 콰쾅! 쾅! 거세게 폭발하는 지붕과 종잇장처럼 터져 나가는 담들. 불길에 휩싸인 건물들을 뒤로한 채 연해월은 남궁진성을 품에 안고 자욱한 낙진 속을 냅다 뛰었다. 남궁진성은 연해월의 품안에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서워 엄마!" 연해월은 그런 남궁진성을 내려다보며 야무진 표정으로 달랬다. "겁낼 것 없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남궁진성은 연해월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리만 도망치면 어떡해? 할아버지는……?" 연해월은 눈물을 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마라." 그녀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쿠콰쾅! 이때 연해월의 이 장쯤 앞 전면에 세워진 월동문이 통째로 터져 나갔다. 연해월은 안색을 굳히며 걸음을 멈추었다. 콰차차창! 쿠콰쾅! "으아아악! 아아악!" "크아악!" 부서진 담장 너머로 마구 뒤엉켜 혈전을 벌이고 있는 남궁세가와 남극벌 무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백의에 머리엔 흰색의 영웅건을 두른 남궁세가의 무사들, 남극벌의 무사들은 흑의 차림에 가슴엔 남(南)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안되겠다. 후문으로 피해야겠다." 연해월은 발길을 돌려 후문 쪽으로 뛰었다. 이때 담장 너머에서 말을 탄 채 싸우고 있던 남극벌의 무사 하나가 연해월을 발견하곤 큰소리로 외쳤다. "남궁린의 며느리다!" "잡아라!" 콰두두두두! 무너진 담장을 뛰어넘으며 남극벌의 말 탄 고수들이 연해월의 뒤를 쫓았다. 무섭게 치달려오는 말발굽들을 쳐다보며 남궁진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연해월은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다. '잡히면 안돼!' "엄마!" 이미 지척지간을 밀려오는 말발굽들을 보고 남궁진성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아직 세상물정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능력이 없는 남궁진성이다. 남들처럼 엄마의 따뜻한 가슴에 안겨서 재롱이나 피울 나이가 아니던가! 그런 남궁진성이기에 지금의 상황은 견디기 힘든 공포로 다가왔다. 콰두두두두! 남극벌의 고수들이 위압적으로 치달려왔다. "독 안에 든 쥐다!" "잡아라!" 연해월은 그들의 외침에 온몸의 힘이 좌악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땅에 떨어진 칼을 집어들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들……!" 그녀는 달려오는 인마들을 향해 사정없이 칼을 휘둘렀다. "모조리 죽여버릴 테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자 섬뜩한 절단음이 일었다. 슈칵! 슈칵! 단칼에 무사 둘이 말잔등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나머지 무사들이 흠칫하며 말머리를 잡아 틀었다. "뭐야, 무공을 아는 계집이었나?" "그것도 보통 수준이 아니다!" 연해월은 한광을 뿜어내며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죽어! 이 악마들!" 남극벌의 고수들을 미친 듯이 베어 넘기는 연해월을 쏘아보며 인솔자인 무천소(無天小)가 냉소를 터트렸다. "생긴 건 곱상한 계집이 지독한 독종이군그래!" 그는 말등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그렇다면 살려둘 이유가 없지."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대고 있는 연해월의 뒤쪽 허공에서 무천소는 무섭게 검을 내리쳤다. 이를 발견한 남궁진성이 기겁을 했다. "엄마, 뒤에……!" 순간 연해월은 몸을 홱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쉬이익! 검날이 자신을 향해 무섭게 내리쳐오고 있었다. 연해월은 눈을 부릅떴다. 이미 피하기엔 너무 늦어 있었던 것이다. 연해월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리쳐오는 검날을 쳐다볼 뿐이었다. '너무 늦었어!' 쉬이이익! 검날이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연해월은 눈을 꽉 감았다. 어쩌면 이대로 죽는 게 더 마음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까깡! 파란 불똥을 튀기며 연해월을 내리치던 검이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이상한 생각에 눈을 부릅뜬 연해월의 얼굴 앞에는 묵검이 가로막고 있었다. 무천소는 부러진 자신의 검과 상대의 묵검을 쳐다보며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대갈했다. "어떤 놈이 감히!" 순간 무천소는 자신의 검을 부러뜨린 상대방의 모습을 확인하곤 말문을 닫았다. 묵검을 내뻗고 서 있는 흑립의 사내, 그는 바로 위지강이었다. 연해월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깊이 눌러쓴 흑립 밑으로 보이는 얼굴은 그가 아는 그 누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죽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그녀의 충격은 더욱 컸다. 아무리 닮은 사람이라도 이렇게까지 자신의 마음이 두근거린다는 건 도대체가……! "마도수이시오? 경황중이라 실언을 했소이다." 무천소는 위지강을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연해월은 또 한차례 충격으로 말미암아 몸을 흠칫 떨었다. '마도수……! 설마 이 사람이?' 위지강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이 여잘 별전으로 데려가도록!" 위지강의 명령에 무천소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그 계집은 아주 지독한 악종이오만!" 쾅! 위지강의 주먹이 무천서의 턱을 강하게 가격했다. 무천서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멀찌감치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위지강은 망연히 쳐다보는 남극벌 무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신형을 틀었다. "시키는 대로 하라." 위지강은 차갑게 말하며 혼이 달아난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연해월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이 남궁진성의 얼굴을 스치는 순간 위지강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지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위지강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걸음을 옮겼다. '저 아이……. 비록 창백하게 질려 있지만 누군가를 많이 닮았구나.' 위지강은 내심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연코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위지강은 한때나마 깊이 사랑했던 여인의 자식이라서 그렇거니 생각하며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위지강이 연해월의 곁을 스치는 순간 그녀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이한 전류가 그녀의 전신에 찌르르 저리게 하는 것이다. '이 느낌은 무엇인가! 어째서 내 가슴이 이토록 뛰고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위지강의 존재를 모르는 연해월, 다만 그녀는 자신에게 밀려드는 자석처럼 당기는 느낌에 당혹감을 느낄 뿐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연해월과 겁먹은 얼굴로 크고 흑백이 뚜렷한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는 남궁진성을 지나 위지강은 멀리 사라져갔다. 우르르릉! 먹장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무섭게 작렬한 번갯불이 지상을 향해 내리꽂혔다. 번갯불은 거대한 거목에 작렬했다. 콰지지직! 우당탕! 부러진 거목이 육중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쏴아아아아!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목의 뒤쪽 넓은 광장 한복판에는 남궁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위지강이, 바로 뒤에는 혈랑팔겁이 서 있었고, 주위에는 남극벌의 무사들이 삥 둘러 에워싸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모두가 치열한 격전을 벌인 흔적이 역력했다. 광장 저쪽의 무너진 담장 너머로 아래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높다란 전각이 한 채 있었다. 전각의 이층 창문에서는 불빛이 흘러 나왔다. 전각의 실내에는 한쪽에 놓여진 침상에 우두커니 기대앉아 있는 연해월과 창가의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남궁진성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남궁진성은 연해월을 향해 조그만 입술을 열었다. "아빠가 보고 싶어!" 그러나 연해월은 실성한 사람처럼 천장만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질문에 연해월이 아무 대답이 없자, 남궁진성은 곧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남궁진성의 두 눈이 문득 창가로 옮겨졌다. 벌떡 일어선 그는 의자에 올라선 뒤 창문을 벌컥 열어제쳤다. 남궁진성의 눈에 광장 안의 광경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연해월을 향해 외쳤다. "엄마! 저기 할아버지가 있어!" 그러나 연해월은 변함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남궁진성은 안타깝게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옥같이 뽀얗고 토실토실한 두 뺨 위로 마침내 이슬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콰콰콰쾅! 한차례 작렬하는 뇌성벽력 속에서 한순간 위지강과 남궁린의 모습이 비쳐졌다. "당신의 아들은 어디 있소?" 위지강의 음성은 낮게 깔렸다. 그러나 남궁린은 그 속에 엄청난 기운이 내포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비록 나직하게 울리는 말이나 그의 귀에는 귀청이 터질 듯이 얼얼하게 들렸다. 남궁린은 조용히 웃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 거라네. 젊은 친구!" 그는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식솔과 집터를 모두 짓밟았으면 됐지 구차한 목숨을 빌미로 하나뿐인 자식놈까지 팔라는 건가?" 남궁린은 허허로운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부탁일세. 이제 그만 편히 쉬게 해주게나." 툭! 남궁린의 무릎 앞에 예리하게 빛나는 비수가 떨어졌다. 남궁린은 위지강을 향해 웃으며 비수를 집어들었다. "고맙네!" 이 광경을 창문에서 쳐다보고 있던 남궁진성의 두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위지강의 담담한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남기실 말은……?" 남궁린은 예리하게 벼려진 비수의 날을 어루만졌다. "이만하면 적게 산 나이도 아니라 죽음 따윈 두려울 게 없지만 손주 놈이 눈에 밟히는구먼!" 그는 비수를 거꾸로 움켜잡았다. "추태를 보일 성싶으면 한칼의 도움을 부탁하겠네." "뜻이 그러하다면 기꺼이 도와주겠소." 쏴아아아아! 남궁린은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그 하늘 한 켠으로 남궁사의 환상이 떠올랐다. '전부 잃어버린 상태에서 너는 홀연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 터이니!' 남궁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잘 있어라, 내 아들아…….' 그는 비수를 잡은 양손을 높이 치켜든 뒤 그대로 힘껏 복부 깊숙이 쑤셔 박았다. 남궁진성의 두 눈이 더할 수 없이 부릅떠졌다. 어린 나이지만 지금 할아버지의 행동이 무얼 뜻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푹! 섬뜩한 파육지음이 울리고 남궁린의 두 눈이 잔잔하게 떨렸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전신을 세차게 떨고 있었다. 시뻘건 선혈이 바닥으로 흘러 빗물과 뒤범벅이 되었다. 위지강은 경련하는 남궁린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쩡! 이윽고 위지강이 검을 뽑아들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남궁진성이 절박하게 외쳤다. "아, 안돼!" 쉬익! 위지강의 검이 뇌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리쳐졌다. 화악! 핏물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할아버지……!" 콰콰콰쾅! 밤하늘에 뇌성벽력이 터졌다. 창문에 매달린 채 남궁진성은 눈물을 흘리며 처절하게 절규했다. 연해월은 귀를 감싸쥔 채 충격적인 모습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폭우는 시체가 즐비한 폐허 위에도 연해월과 남궁진성이 머물고 있는 전각의 지붕 위에도 쏟아져 내렸다. 세상이 일시에 물에 잠기지 않을까 의심될 정도로 엄청나게 퍼부어지는 빗줄기였다. 연해월은 전각 난간에 우두커니 섰다. 그녀는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틀림없어, 그 사람이야!' 그녀는 처참히 폐허가 돼버린 광장 안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예전의 그가 아니야!' 연해월이 깊은 사념에 빠졌던 이유는 바로 마도수의 존재에 대해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비로소 마도수가 위지강이란 사실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기쁨보다는 가슴 저미는 비애로 가득 찼다. '내 아버지와 시아버님을 죽인 피에 젖은 살인귀 마도수일 뿐…….' 그녀는 옛날 위지강과 보냈었던 즐거운 추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닥불이 지펴진 동굴 안에서의 뜨겁게 사랑하던 장면도 떠올렸다. 갑자기 연해월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아니야. 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어!' 그녀는 내심 애절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심어준 씨앗이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야!' 연해월은 눈물 젖은 얼굴을 발작적으로 치켜들었다. '알아? 당신 때문에 난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녀의 가냘픈 교구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불쑥 나타나면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그녀는 얼굴을 감싸쥐고 서러움에 흐느껴 울었다. "흐흑. 흐흐흑!" "도망가, 엄마!" 불쑥 뒷덜미에 와 닿는 음성에 연해월은 흠칫하며 고개를 쳐들고 돌아보았다. 활짝 열린 문가에 남궁진성이 눈빛을 빛내며 서 있었다. 그는 자그마한 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있었다. "우리를 인질로 해서 아버님까지 해치려는 거야." 연해월의 두 눈이 동그랗게 치켜 떠졌다. 어린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죽더라도 여길 탈출해야만 돼." 남궁진성의 뺨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탈출에 성공하면, 몇 년이 걸리던 그자보다 강한 무공을 익힐 거야." 남궁진성의 말에 연해월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자를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고 말 거야." 남궁진성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내용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살벌하고 소름이 오싹하는 말이었다. 연해월은 거센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 남궁진성은 흐르는 눈물을 쓰윽! 옷소매로 문지르며 비장하게 말했다. "가, 엄마! 그리고 남궁진성은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너무나 의젓하고 의연한 태도에 연해월은 기쁨보다 가슴 저미는 아픔을 또 한번 느꼈다. 마도수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남궁진성. 그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콰콰콰쾅! 한차례의 뇌성벽력이 잠깐 동안 연해월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쪼르르르! 위지강은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굵은 황촉불이 밝혀진 실내에는 탁자에 앉아 있는 위지강과 한쪽에 모여 앉아 우려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혈랑팔겁이 있었다. 위지강은 연거푸 술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이미 술을 마신 지 꽤 오래인 듯 탁자 밑에는 빈 술병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위지강은 다시 술병을 집어들었다. 술잔에 술병을 기울여보지만 술은 몇 방울 떨어지다 뚝 그쳤다. 빈 술병인 것이다. 위지강은 술병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술 가져와." 혈랑팔겁은 아연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잠송이 조심스럽게 위지강에게 다가섰다. "벌써 다섯 동이의 술을 마신 겁니다, 형님!" 위지강이 무심하게 물었다. "내 혀가 꼬부라졌나?"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면 건방떨지 말고 어서 가져와." 잠송은 주청산 등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양어깨를 으쓱 올렸다. 마침내 주청산이 일어나더니 술항아리를 여러 개 안고 끙끙거리며 다가왔다. "이러다간 아무래도 일나지, 암!" 이때였다. 삐익! 삐익!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그들의 주위를 끌었다. 혈랑팔겁은 일순 흠칫했다. "계집이 도망쳤다!" "빨리 추격해!" 여기저기서 경비무사들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호랑평이 무사들의 외침을 들으며 혀를 끌끌 찼다. "클클, 그 여편네가 끝내 말썽이군그래!" 제중인도 위지강을 쳐다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도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부 그대로들 있어." 문득 들려온 위지강의 음성에 혈랑팔겁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모두 일제히 멈칫했다. 동시에 이미 위지강의 모습은 실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위지강이 앉았던 자리엔 그의 음성만이 재차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가 나간다." 타타타탁! 흙탕물을 튀기며 연해월과 남궁진성은 손을 잡은 채 다급하게 뛰었다. "헉!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연해월과 남궁진성은 으쓱한 담장을 낀 길을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남궁진성은 연해월을 돌아보며 헉헉거렸다. "조금만 더 가면 산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 기운 내. 엄마!" 연해월은 엉겁결에 대답을 했다. "그… 그래!"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복잡미묘했다. 이대로 무작정 도망간다는 것이 무언가 허전하기만 한 것이다. 그녀는 위지강에게 무언가 꼭 해줄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으므로 발걸음이 무거워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거지?' 순간 그녀는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퍼억! 넘어지고 말았다. "어억!"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엎어진 연해월을 돌아보며 남궁진성은 놀라 부르짖었다. "엄마!" 남궁진성은 다급히 연해월을 부축했다. "엄마,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그의 동그랗게 뜬 두 눈은 걱정으로 인해 더욱 슬퍼 보였다. 연해월은 그런 남궁진성의 모습을 바라보며 뭔가 말못할 사연이 있는 절박한 표정을 지었다. "천아… 엄마는……!" 삐익! 삐익! 호각소리와 함께 담 길 저쪽에서 몇몇 남극벌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을 발견한 남궁진성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무사들도 이미 두 모자를 발견하고는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저쪽이다!" "잡아라!" 남궁진성은 주저앉아 있는 연해월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놈들이 우릴 발견했어! 빨리 가, 엄마!" 마침내 연해월이 어떤 결심을 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먼저 가거라, 천아!" 남궁진성은 연해월의 느닷없는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남궁진성으로선 지금 연해월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마도수, 위지강이 자신의 친부라는 사실조차도 아직 모르는 그로서는 연해월의 이런 행동이 황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어머니?" 연해월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엄마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다. 어서 먼저 가!" 남궁진성은 절박하게 말했다. "안돼! 어떻게 엄마를 혼자 두고 나 혼자 가란 말야!" 연해월은 좀더 가까워지는 추격자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리곤 자신의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이대로는 못 떠나! 나는 아직 한마디도 못했어!' 연해월은 남궁진성의 멱살을 두 손으로 콱 움켜잡았다. 남궁진성이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어서 가란 말야, 이 바보 녀석아!" 그녀는 담 너머 멀찌감치 남궁진성을 집어 던졌다. 허공을 날아가는 남궁진성의 입에서 애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엄마……!" 연해월은 처연하게 눈물을 흘렸다. 가슴을 칼로 도려내듯 찢어지는 아픔이 전해져왔다. '용서해다오, 아들아! 죽을지언정 엄마는 정말 이대로 떠날 수가 없단다.' 연해월이 담 너머로 눈물 젖은 시선을 주고 있을 때였다. 퍼억! 어깻죽지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면서 연해월은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고 어깻죽지를 감싸고 있는 사이 주변에 몰려든 남극벌의 무사들이 연해월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들 중 하나가 연해월에게 검을 척 겨누며 음산하게 웃었다. "뛰어봐야 벼룩이다. 계집!" 그는 다른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몇 명은 꼬마 놈을 추격해!" 파파파팟! 대여섯 명의 무사가 신형을 날렸다. 연해월에게 검을 겨눈 무사는 차갑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목숨을 붙여줬으면 얌전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감히 도망을 쳐?" 또 다른 무사가 연해월의 뒤쪽에서 맞장구를 쳤다. "도대체가 관을 보기 전엔 눈물은커녕 콧물 한 방울도 안 흘릴 계집이군그래!" 연해월은 그들의 말은 무시한 채 냉정하게 말했다. "마도수를 만나게 해다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만나서 할말이 있다. 그 사람에게 데려 가다오." 검을 치켜든 무사가 비릿한 미소를 입술에 달았다. "그으래?" 패액! 그의 검이 허공에서 연해월의 목을 향해 빠르게 내리쳐왔다. "그렇다면 저승에나 가서 만나보도록!"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팍! 검을 내리치던 무사의 손등에 한자루 비수가 날아와 깊숙이 쑤셔 박혔다. 그는 손목을 움켜쥐고 고통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그의 동료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암습이다!" "어떤 놈이냐?" 쏴아아아아! 그들의 눈에 폭우 속에 서 있는 위지강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전신은 흠뻑 젖어 있었다. 위지강을 발견한 연해월의 봉목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모두 돌아가라." 위지강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무사들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위지강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들은 이만……." "추격대가 꼬마놈도 곧 잡아올 겁니다." 마침내 그들은 위지강과 연해월을 남겨둔 채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쏴아아아아! 폭우는 속절없이 계속 쏟아져 내렸다.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위지강과 연해월은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흑립 아래 감춰진 위지강의 표정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연해월도 무어라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그런 미묘한 표정이었다. 꼭 할말이 있었건만 무엇 때문인지 그녀의 입은 제대로 떨어지질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그렇게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위지강이 움직였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연해월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위지강을 지켜보면서 연해월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마침내 위지강은 연해월의 바로 앞에 섰고, 연해월은 중심을 잃고 가녀린 교구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우뚝 서 있는 위지강의 가슴에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닿았다. 위지강은 일순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흠칫했다. 그러나 연해월은 이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위지강의 발 밑에 쓰러진 연해월의 몸으로 폭우는 여전히 무심히 쏟아져 내렸다. 위지강은 쓰러져 있는 연해월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더없이 슬퍼 보였다. 이렇게 그녀에 대한 감정은 오직 그만의 것이었다. 위지강은 우울한 시선을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 홀로 높은 누각에 이르나니 바람은 잔잔한데 이별의 시름은 하늘 끝에서 피어오르네. 빗물 속에 엎어진 연해월은 정신을 잃고 있었다. ― 풀색과 산 빛에 석양이 비추이고 난간에 기대인 마음 뉘라서 알까. 위지강은 늘어진 연해월을 두 손으로 안아들었다. ― 한잔 술 앞에 놓고 잔 잡아 노래 부르지만 억지 즐거움은 도리어 흥이 없고 시름만 깊어가는구려. 연해월을 안아든 위지강은 뒤돌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잊은 적이 있던가! 잊으려 한들 잊혀질 사람이던가! 폭우 속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갔다. ― 아아… 도솔천을 나는, 줄기줄기 내 사랑이여……. * * * 콰두두두두! 남궁진성은 사색이 된 채 맹렬히 치달려오는 말발굽을 바라보았다. 마상의 인물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잔뜩 겁먹은 얼굴의 남궁진성을 쳐다보며 징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의 험상궂은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바로 악마의 웃음이었다. 두두두두두! 지척지간을 치달려오는 말발굽들 밑에 엎어진 채 남궁진성은 절박하게 외쳤다. "엄마, 무서워! 엄마……!" 쿠쿠쿠쿠쿠! 미친 듯이 달려온 말발굽들은 마침내 남궁진성을 거세게 짓밟아버렸다. "엄마……!" 남궁진성이 마지막으로 부르짖는 애절한 절규가 허공 가득 울려 퍼졌다. 순간 피보라가 허공 높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아… 안돼, 아가야!" "아… 안돼!" 연해월은 큰소리로 외치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의 전신은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흠뻑 젖어 있었다. 연해월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지독한 악몽이었다. 그녀는 지금 화려한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연해월의 한쪽 어깨는 누군가가 붕대로 칭칭 동여매 놓은 상태였다. 연해월은 붕대가 감겨진 어깨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감싸쥐며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이때 주위를 둘러보던 연해월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쪽 창가의 탁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위지강을 발견한 것이다. 쏴아아아아! 밖에는 아직도 빗줄기가 사정없이 퍼부어대고 있었다. 연해월은 조심스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저……." 위지강은 술잔을 비운 뒤 탁자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다시 불필요한 행동으로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도록!" 위지강은 뚜벅뚜벅 문으로 다가가 막 손잡이를 잡았다. "잠깐만요, 위지강!" 막 문을 열려던 위지강은 뒷덜미에 닿는 연해월의 절박한 음성에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연해월은 침상 밑에 내려선 채 초조하고 절박한 얼굴로 물었다. "성… 성아는……? 위지강은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도망친 아들 말인가?" 이내 돌아선 그는 문을 열면서 차갑게 말했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야." 연해월이 나가려는 위지강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부탁이에요, 위지강!" 쏴아아아아! 폭우가 쏟아지는 문가에 위지강은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연해월은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애절한 음성으로 빌었다. "그 아이는 내 전부예요… 지금까지 그 아이만 보고 살아왔어요." 그녀는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그 아이를 살려줘요… 그 아이마저 없으면 난 죽어요……." 그러나 위지강의 태도는 무심하기만 했다.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마라, 연해월!" 위지강은 연해월의 간절한 청을 무시한 채 문밖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나마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마지막 인내의 벽마저 허물어진다면 너까지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 위지강은 말은 냉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연해월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는 두 눈에 싸늘한 독기를 품었다. "그래, 그럼 어서 가서 죽여버려!" 연해월은 이성을 잃은 듯 창백한 얼굴을 발딱 쳐들고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다른 사람에게 죽는 건 싫어! 당신 자식이니까 당신이 가서 직접 죽여버리란 말야!" 발걸음을 옮기던 위지강이 벼락을 맞은 듯 거센 충격으로 우뚝 멈추었다.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위지강의 그런 모습을, 연해월은 파랑 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전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마침내 위지강은 서서히 돌아섰다. 그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음울하게 말했다. "누가 부창부수(夫唱婦隨) 아니랄까 봐 그 동안 잔꾀가 제법 늘었구나, 연해월!" 위지강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듯하자 연해월은 냉소를 머금었다. "내가 지금 잔꾀를 부린다고 생각해요?" "아닌가?" 연해월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믿든 말든 자유지만 내 일생 중에 딱 한번 잔꾀를 부렸다면 그건 바로 내 뱃속에 자라고 있는 다른 사내의 핏줄을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혼인식을 올렸을 때였어." 연해월은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두 눈에서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내가 왜 이 사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해야만 하지? 아니야, 그래도 얘기해야 돼.' 말을 하면서도 연해월은 마음속으로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남을 속이거나 기만한 적은 한번도 없어." 위지강의 얼굴이 서서히 바위처럼 굳어져갔다. "못 알아들었으면 한번 더 말해줄까?" 연해월은 두 눈에서 불꽃을 쏘아내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 아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 아들이야. 우리 두 사람의 자식이란 말이야, 알겠어?" 콰콰콰쾅! 위지강의 뒷머리에서 뇌성벽력이 일었다. 그는 충격으로 인하여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