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 프랑스, 1883~1956
샤넬의 초상
Portrait of Mademoiselle Chanel, el,
세계적 패션디자이너 샤넬을 알고 있나? 코코 샤넬은 여성의 아름다운 몸을 옥죄고 있던 코르셋, 페티코트 등의 구식 의상을 역사 속으로 던져버렸어. 이런 불편한 옷들이 여성들의 행동마저도 소극적으로 만들었거든. 샤넬은 여성의 몸을 해방시키고, 그 몸에 새로운 아름다움을 입힌 선구자적 디자이너였단다. 여성 의상에 처음으로 쉬크함의 개념을 도입했던 샤넬은 1923년에는 자신의 브랜드 '샤넬'의 이름으로 새로운 의상을 세상에 발표했지. 역사는 이1923년을 선계 혁명의 시간으로 영원히 담고 있단다.
한편 샤넬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 마리 로랑생 역시 파리에서 전위적인 20세기의 시간을.샤넬과 함께 보내고 있었지. 마리 로랑생은 샤넬과 같은 해(1883년) 태어난 동갑내기란다. 또.두 사람은 디자인회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이기도 했지. 로랑생은 당시 화단에서는 흔치 않은 여성 화가였는데, 특이한 것은 화려한 곡선과 파스텔 색조를 사용한 점이란다. 이 특징들은 당시 유럽 미술계의 주류를 이루던 거친 입체주의와 달리 로랑생만의 작업세계를 이루게 했지. 부드럽고 특이한 색조는 정통 입체주의의 기준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성미의 특성을
새롭게 보여주는 점에서 성공적이었어. 그래서 남성이 주도하던 20세기의 입체주의 가운데 독창적 여성 초상화를 개척했던 것이지.
이 초상화는 샤넬과 로랑생이 르 트항 블루(Le Train Bleu)라는 의상 디자인회사에서 같이
일할 때 샤넬의 요청으로 그리게 됐다는 구나. 이미 로랑생은 여성 화장품의 전설인 헬레나 루빈스타인(Helena Rubinstein)이나 정치운동을 하던 작가 낸시 쿠나드(Nancy Cinard) 등 당대의 거물급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유명해져 있었거든
로랑생이 친구인 샤넬을 어떻게 그렸나 보자. 그림 속 샤넬은 무릎에 포메라니안 강아지를 안고 있구나. 샤넬의 몽환적인 눈빛은 약간의 우울한 고독을 겸하고 있는데, 네가 보기엔 어떠냐? 샤넬은 한쪽 팔에 머리를 기대고 있구나. 이 자세에 맞춰 드레스는 스카프처럼 목선에서 내려와 한쪽 어깨와 가슴 부분을 비우고 흘러내리도록 했지. 연기가 바람에 일렁이듯 대상이 아련해 보이지 않니? 보통 이런 포즈의 노출이라면 육감적일 텐데, 로랑생 특유의 단순화된 신체의 느낌은 샤넬을 나른한 오후처럼 표현했구나. 부드럽고 유연한 곡선, 흐릿하게 번진 경계선들, 가라앉은 분위기는 로랑생 그림의 전형이란다. 하지만 정작 샤넬은 이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돌려보냈다는구나.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샤넬의 성격에 비교하면 이 초상화는 너무 몽환적이고 부드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부드럽고 우울한 내면을 들킨 것 같아서였을까?
당시 파리에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여성 예술가가 있었단다. 샤넬, 로랑생과 더불어 유럽 예술계의 여왕벌로 꼽히던 거투르드 스타인(Gertrude Stein)이란다. 그녀는 미국 출신의 작가(시인)이며 미술품 수집가로 명성을 날렸지. 피카소가 '나의 유일한 여자친구'라며 인정했던 스타인은 미국의 부유한 상속자였단다. 예술을 사랑한 그녀는 일찍이 파리로 옮겨와 시와 소설을 쓰며 막대한 자금으로 미술품을 수집했단다. 특히 마티스의 작품을 대량으로 구입하는 등 다재다능한 활동과 컬렉션으로 스타인은 유럽 예술계의 거물이 되었지. 3명의 걸출한 여류명사들이 동시대 파리에서 맹렬히 활동하며 교우했다니, 이들의 인연이 무척 흥미롭구나. 너는 이 세 사람 중 어떤 여인에게 가장 마음이 끌리느냐?
로랑생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여류화가이지만, 특히 일본에 광적인 팬들을 보유하고 있단다. 1983년 로랑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나가노현에서 로랑생 미술관을 건립할 정도였어. 그리고 약 500여 점의 회화와 참고문헌을 전시할 만큼 열정적 사랑을 보여주었지. 로랑생이 당시 살롱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녀는 시인 아폴리네르의 연인이기도 했단다. 아폴리네르(Guillaune Apollinaire)는 깊이 사랑했던 로랑생과 이별한 뒤에 이런 시를 남겼다는구나. 세월은가고 화가의 그림과 시인의 글만 남았구나.
“햇빛도 흐르고 달빛도 흐르고
오는 세월도 흘러만 가니
우리의 사랑은 가서는 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너라, 좋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 미라보 다리(1912년) 중에서-
두 소녀
Two Young Girls, 도쿄, 브릿지스톤 미술관
할아버지는 파리와 세느 강 그리고 낭만과 이별을 이야기할 때면 꼭 "미라보 다리 위의 여인"이라 불리던 마리 로랑생 떠오른단다. 소녀시절 윙바르 회화연구소에서 소묘를 배우며 만난 조르주 브라크를 통해 자연스럽게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시인이며 영원한 애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 시인 장 콕토(Jean Cocteau) 그리고 문필가며 최대 콜렉터였던 거투르드 스타인 등 예술계의 거물들과 교우하면서 당시 첨단적인 예술 분위기 속에서 활동했다는구
나. 그래서 그녀를 입체파 화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성 야수파 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상주의가 대세였던 시절에, 입체파와 야수파가 신선한 바람으로 등장하던 시절에, 새로운 흐름에 다소간의 영향은 받았겠으나, 로랑생은 여성다운 섬세한 감성을 지키면서 색채와 형태를 단순화한 감각적이며 유연한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했지. 회화뿐만이 아니라 양탄자와 벽지 문양의 도안, 책의 삽화, 발레 무대장치, 의상디자인까지 여류 예술가가 흔치 않던 시절에 당당하게 자신만의 진로를 펼쳐나갔단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로랑생은 항상 "나에게 진정한 재능이 있기를 기도했다고 해.
그림을 보자. 천사같이 아리따운 2명의 소녀가 서로를 감싸 안으며 다정스레 서 있구나, 살결이 너무 고와 투명해 보인다. 소녀들을 묘사한 매혹적인 파스텔 색조의 채색이 유리하고 감미로운 로랑생의 색채 배합을 뽐내고 있는 듯하다. 꿈꾸는 소녀들을 영원한 주제로 그린 로랑생은 온 세상을 아름다운 소녀들의 세상으로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듯하구나. 로랑생은 당시의 어떤 예술운동에도 동조하지 않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지켰는데 이 그림에서도 소녀들의 순수한 마음 외에 어떠한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꼭 보여주고 싶은 서양 명화 101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