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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확장과 변화하는 세계
종교개혁을 주도한 개신교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상대로 변화를 촉구하고 나섰고, 마침내 그것을 직접 성취해냈다. 그들은 옳고 그른 것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일사불란하게 교회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중세 교회의 행태에 진저리를 쳤다. 교황 중심의 신정 통치를 의심했고, 중세식 종교와 정치 체제의 변화를 추구했다. 로마교회의 절대 권력은 예상치 못한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분리되고 쪼개졌다. 세속 정치의 행태와 전혀 다를 바 없이 권모술수를 동원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공공연히 벌어져도 별다른 문제 없이 세금이 걷히고, 성직을 매매해도 그런대로 돌아가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누리던 영화는 이미 흘러간 노래가 되었고, 교황권의 정치적 무게는 급변했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 정치가 교회를 압도하는 일까지 빈번하게 일어났다.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이 기대한 변화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루터와 칼뱅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들이 일으킨 신학적 운동은 계속 퍼져나가서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유럽의 영토는 대서양 너머로까지 확장되었고 세계는 변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개혁이 마무리되던 17세기 초반의 상황은 특히 그랬다.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간의 갈등은 피바람을 불러왔다. 오로지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가차 없이 가해지는 박해, 그리고 이단에 관한 논쟁이 계속해서 줄을 이었다. 게다가 지나친 교파 간의 갈등은 대중들에게 종교에 대한 혐오를 유발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냉소적 견해가 일반화되었다. 정치 지형 역시 급격히 변화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장악하던 국제정치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이 주도하게 되면서 유럽은 지중해를 벗어나서 대서양 중심의 세계로 확대되었다.
정치의 변화
16세기 후반은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을 구체적으로 표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행한 시대였다. 개인적 타협이나 병존은 불가능했다. 내부 정비를 모두 끝낸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인들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루터 교인들이 저항하고, 칼뱅주의자들이 거기에 가세하자 혼란은 한층 더 증폭되었다. 사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1555)에 따라서 신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피의 보복은 네덜란드로 번져나갔고, 마침내 30년 전쟁으로 이어져서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위그노들의 참극
독일이 루터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면 프랑스는 칼뱅의 영향권에 속했다. 프랑스 개신교인들은 프랑수아 1세와 그의 누이 나바르의 여왕 마그리트 덕분에 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앙리 2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는 독일에서 밀려드는 루터의 사상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개신교인들을 무수히 화형에 처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개혁에 대한 요구를 잠재우지 못했다. 신앙 때문에 탄압을 받아야 했던 프랑스 개신교인들은 칼뱅의 지도를 받아서 제네바에서 새롭게 세력을 규합했다. 이들은 나중에 프라이부르크와 베른, 그리고 제네바가 맺은 동맹이라는 말에서 위그노(Huguenots)라고 불리게 되었다. 앙리 2세의 죽음으로 권력은 황후 카트린 드 메디치와 장남 샤를르 9세에게 넘어갔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위그노와 가톨릭 교인들이 치열하게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피를 흘리는 충돌이 몇 차례 있었고, 그 때문에 양측은 일촉즉발이었다.
마침내 1562년 예배 중인 개신교인들을 가톨릭 진영이 습격하면서부터 내란이 본격화되었다. 황후 카트린은 이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아들 대신 실권을 장악한 그녀는 권력을 확고히 할 요량으로 딸 마그리트와 위그노 교도 나바르의 왕 앙리의 결혼식을 서둘렀다. 가톨릭과 개신교인들이 화해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한 결혼식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개신교 지도자들이 파리에 속속 모여들었다. 위그노의 지도자 콜리니 제독이 자신의 아들을 부추겨서 승산 없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황후 카트린은 결혼식에 참석한 개신교인들을 일거에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을 알리는 아침 종소리에 맞추어서 가톨릭파 군대가 위그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 센느 강은 핏빛으로 변했고, 루브르 왕궁의 돌계단에는 피가 흥건했다. 축일 당일에만 3천여 명의 희생자를 냈고, 10월까지 계속된 대학살로 인해서 1만 명 이상의 개신교인들이 희생되었다. 개신교인이었지만 국왕이 된 뒤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앙리 4세, 즉 나바르의 왕 앙리가 신앙의 자유를 선언하고 예배의 권리를 허락하는 낭트 칙령(1598)을 발표하기 전까지 프랑스에서는 개신교가 불법으로 간주 되었다.
프라하의 투척 사건
어렵사리 마련된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파기되었다. 보헤미아 지역의 귀족들이 가톨릭 신앙을 추종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보헤미아의 국왕이 보낸 사절단을 방문했다. 가톨릭의 사절단은 개신교인들의 불평을 무시했다. 그러자 격분한 개신교인들이 사절단을 이층 창밖으로 내던졌다. 사절단 가운데 한 사람이 떨어지면서 소리쳤다. “예수님의 마리아여, 우리를 도우소서!” 그러자 개신교인이 그 창에 대고 외쳤다. “네가 믿는 마리아가 이제 너를 구하는지 두고 보자!” 그때 “마리아가 도와주셨다”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사절들은 다행히 건초더미가 두툼하게 쌓여있는 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말짱했던 것이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절단은 인근의 가톨릭 공국이었던 체코로 달려갔다. 이 일을 계기로 해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잠복해 있던 적대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절단의 수모를 전해 들은 황제는 즉시 개신교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역사상 최대, 최후의 종교전쟁이라고 불리는 30년 전쟁(1618-1648)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갈등에서 비롯되었던 전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치적인 다툼과 약탈로 번지게 되었다. 1620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군대가 보헤미아를 전격적으로 침공해서 개신교인들의 영지를 몰수해버렸다. 그리고는 얀 후스의 근거지였던 프라하 대학교까지 예수회에 넘겨주었다.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전쟁은 1623년부터 1629년 사이에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북유럽의 개신교 제후들이 가톨릭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서 덴마크, 영국, 네덜란드와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개신교 연합군은 가톨릭 군대에 패배했다. 30년 전쟁은 대규모의 유혈사태를 빚은 마지막 국면으로 치달았다. 충실히 가톨릭을 추종하던 프랑스가 개신교 연합군 진영에 합류하고 개신교 진영 가운데 일부가 가톨릭 측으로 넘어갔다. 이로써 30년 전쟁의 성격이 확실하게 규정되었다. 종교가 전쟁의 명분이었지만, 속사정은 정치적 이해가 달려있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1648년에 베스트팔리아(Westphalia) 평화조약이 조인됨으로써 30년 전쟁은 종결되었다. 조약에 따르면 모든 제후들이 자신들의 영토에서 어떤 종교를 따를 것인지 결정할 수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조약과 달리 이번에는 루터교회는 물론 가톨릭, 그리고 칼뱅의 교회까지 합법화되었다. 제후가 원하기만 하면 한 지역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공존할 수도 있었다. 로마의 교황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대목이지만 개신교와 가톨릭 국가들 모두 교황의 불평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조약으로 개신교 국가가 된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강국으로 부상한 프랑스와 몇몇 국가들이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위스에 대한 통제권까지 상실한 신성로마제국은 제국으로서의 수명을 다한 채 지리적 용어로 남게 되었다. 평화조약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유럽에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을 위해서 치른 희생은 간단하지 않았다. 독일 지역만 놓고 보더라도 전역이 초토화되고 1천만 명 이상의 시민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청교도들은 고루하다?
영국 역시 30년 전쟁 동안 상당한 종교적 갈등을 겪었다. 종교개혁자들이 1604년 햄튼 궁정에서 국왕 제임스 1세(James I, 1603-1625 재위)를 알현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제거하고 교회의 개혁을 추진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1천 명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들을 ‘청교도(Puritans)’라고 부른다. 청교도를 엄격한 생활을 고수한 고리타분한 사람들로 단정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가령, 예배 시간에 청교도들의 복장은 단정하고 활기찼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에게 충실했고 가정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했고 사냥과 운동을 즐겼다. 그들이 이렇게 활동적이었던 것은 이웃이나 하나님과의 활발한 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이 평가받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또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성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교회의 습속을 정화하려고 노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청교도들은 제임스 국왕에게 이런 서신을 보냈다. “교회는 마땅히… 인간적 재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에 정해놓은 율법과 규칙에 따라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즐겨 읽던 성서는 1560년 제네바에서 처음 발간되었고 존 낙스(John Knox)가 번역한 <제네바 성서>였다.
제임스 왕은 <제네바 성서>에 포함된 칼뱅의 주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1604년에 열린 햄튼 궁정 회의에서 어느 청교도가 새로운 번역을 제안하자 제임스 왕은 주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47명의 학자들이 33개월 동안 매달려서 성서를 번역해냈는데, 그게 바로 일부에서 성서의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주장하는 <흠정역>(King James Version) 성서이다.
틴들의 성서를 상당 부분 수용한 <흠정역>이 그렇게까지 정확한 번역인지의 여부는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흠정역>은 1611년에 처음으로 인쇄되어 영국인들 손에 전달되었다. <그레이트 바이블>이 비치용이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성서의 내용을 접하게 된 것은 이 새로운 번역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국의 현안을 해결하기에는 새로운 성서의 발행만으로는 부족했다. 햄튼 궁정 회의가 끝나고 난 뒤에 일부 청교도들이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청교도들의 청원 내용과 상반된 정책이 채택되고 박해가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1607년에 두 개의 소위 ‘분리주의자’ 교회가 네덜란드로 도망쳤다. 이 집단 가운데 한쪽은 안전 문제 때문에 다시 두 패로 갈라졌다. 한쪽은 서쪽으로 항해를 떠나서 새로운 대륙에 도착했다. 그들은 메사추세츠 해안에 정착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순례자들(Pilgrims)이다. 네덜란드를 떠나지 않은 나머지 반쪽은 교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재규정했다. 두 번째 집단의 지도자는 존 스미스(John Smith)였다. 암스테르담에서 스미스는 성서를 통해서 유아세례가 아니라 신자의 세례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미스와 추종자들은 신자의 세례를 받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만일 유아세례가 소용이 없다면 스미스의 공동체에는 올바르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 전혀 없었다.
1609년에 스미스는 결단을 내리고 스스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에서 영국 침례교회가 처음으로 생겨났다. 또 스미스는 그리스도의 보편적(일반적) 구속을 강조하는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보편적 침례교인’으로 알려졌다. 스미스가 세상을 뜨자 막역한 친구였던 토머스 헬위즈(Thomas Helways)가 그의 추종자들을 이끌게 되었다. 그들은 1611년경에 영국으로 귀국해서 런던 부근에 영국 제일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땜장이 설교자, 번연
영국 침례교인 가운데는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이 특히 유명했다. 존 번연은 베드포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엘스토우(Elstow)에서 태어났다. 번연이 채 십대가 되기 전에 제임스 왕의 아들 찰스는 모든 교회로 하여금 영국 국교회 방식의 예식을 따르도록 지시했고, 이로 인해 영국 전역이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청교도를 지지하는 군대를 조직했다. 청교도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5년이 지나지 않아서 크롬웰은 영국 전체를 장악했다. 크롬웰의 군대는 영국의 개혁을 반대하는 국왕 찰스와 대주교를 참수했다. 크롬웰은 공화정을 이끌면서 청교도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려고 노력했다. 1658년에 크롬웰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공화정은 위기를 맞았다. 아들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은 아버지가 물려준 나라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결국 1660년에 찰스 2세가 국왕의 자리에 복위되었고, 비국교파는 박해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번연 역시 국교회의 허락 없이 설교했다는 이유로 1670년에 투옥되었다가 자신의 대표작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을 집필했다.
아버지에게서 금속의 땜질을 하는 가업을 물려받은 번연은 어려서부터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결혼 전까지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던 번연은 결혼을 통해서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부인이 결혼할 때 가져온 두 권의 책, 「평범한 사람이 천국에 이르는 길」과 「경건의 훈련」을 부부가 함께 소리 내어 읽곤 했다. 그렇게 해서 서서히 믿음의 길에 들어서게 된 번연은 1655년에 결정적으로 회심을 경험했다.
“하루는 들녘을 거닐고 있었다. …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너의 의는 하늘에 있다.” 게다가 나는 내 혼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사실상 나는 내 발목을 죄고 있던 쇠사슬과 마음을 옥죄던 괴로움 그리고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던 족쇄로부터 해방된 것이다.”(존 번연, 「죄인의 우두머리에게 넘치는 은혜」)
회심한 번연에게 설교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의 설교는 아주 인기가 좋아서 광고가 나가기만 하면 평일 아침 7시에 1,2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오곤 했었다.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이며 번연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사람들이 어째서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한 번연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가는지 묻는 찰스 왕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제가 가진 모든 학식을 그 땜장이가 가진,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능력과 바꿀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번연은 결혼한 지 10년 만에 부인을 잃고 어린 네 명의 자녀를 홀로 맡아서 기르게 되었다. 얼마 후에 재혼을 했지만, 번연은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고 설교를 하지 않겠다는 요구를 거절했다고 해서 12년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1672년 신교 자유령으로 석방되었지만, 1675년에 또다시 투옥되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위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목회에 힘쓰던 번연은 런던을 다녀오다가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맞은 후 열병을 앓다가 1688년에 세상을 떠났다.
번연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오렌지의 윌리엄과 제임스 국왕의 딸 메리가 영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명예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명예혁명’은 영국을 엘리자베스가 추구하던 ‘중도’의 입장으로 다시 돌려놓았다. 관용법(Toleration Acts, 1689) 덕분에 39개 조항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움 없이 예배할 수 있었다. 이로써 영국에서의 청교도 운동은 마침표를 찍었지만 새로운 대륙에 정착한 이들 덕분에 청교도들의 꿈은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세계관의 변화
유럽은 일단 변화의 물결을 타게 되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변화는 교회 안팎에서 모두 전개되었는데,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신적 질서를 탈피한 인간화(혹은 개인화)였다. 중세의 로마 가톨릭은 교황을 최고의 권위로 강조했고, 종교개혁 시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이제 근대의 시기에는 이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되었다. 오직 합리적인 것만이 옳고 유용하고 구속력을 갖게 되었다. 철학이 신학보다, 자연이 은총보다, 인간적인 것이 기독교적인 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교회 내부의 변화는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역할에 대한 이해에 초점이 맞춰졌고 외부에서는 이성의 능력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리스도는 모두를 위해서 죽었다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의 유명한 설교자였다. 1500년대 후반 어느 학자가 칼뱅이 제시한 예정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에 맞서 칼뱅의 주장을 적극 옹호했다. 그런데 아르미니우스는 미처 논쟁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패배했다. 논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쪽의 견해를 검토하다가 상대방이 더 옳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구원받을 자를 선택했다고 간주하는 칼뱅의 예정론은 근거가 부족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한 제한적인 속죄에 불과할 뿐이었다. 자비한 하나님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주장을 일부 수정했다.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지와 협력할 수 있는 은혜(선행 은총)를 허락한 후로는 인간이 자기의 구원을 주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르미니우스가 내린 결론은 칼뱅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혼란을 초래했고, 마침내는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 사후에도 예정론에 대한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칼뱅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려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칼뱅주의자들과 맞서 다음과 같이 구원에 대한 다섯 개의 신조들을 요약한 「항변」(Remonstrance)을 공개적으로 출판했다.
1.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선한 의지를 상실했기에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2.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자를 예지된 믿음으로 선택하거나 불신앙을 근거로 유기하신다.
3. 그리스도는 예정된 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
4.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 편에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5. 한번 중생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고, 종국에는 반드시 구원에 이른다는 성도의 견인에 관한 가르침은 성 경적 근거가 모호하다.
아르미니우스의 신조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런 항목들은 구원에 충분한… 것을 제시한다. 이보다 더 많은 것이나 더 적은 것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네덜란드의 모리스 왕자는 갈등을 끝내고 싶었다. 왕자는 종교보다는 정치적 이유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아르미니우스와 추종자들 대부분 로테르담과 경쟁 관계에 있는 암스테르담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1618년 11월 13일, 왕자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130명의 칼뱅파 목사들을 도르트에 초청했다. 그들의 임무는 당연히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르트 교회회의(Synod of Dort)는 철저히 정치적인 의도에 따라 진행되었지만, 나름대로 균형 잡힌 칼뱅파의 신조를 천명하려고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칼뱅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파의 신조에 일일이 응답했다. 그들의 답변을 통해서 칼뱅주의의 다섯 가지 핵심 교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 인간은 본디 영적으로 죽었다. 자연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2,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적인 결정과 무관하다.(무조건적 예정: Unconditional predestination)
3,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를 믿는 이들만을 위해서 속죄한 것이다.(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4, 하나님이 누군가를 중생시킬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불가항력적 은총: Irresistable grace)
5, 모든 신자는 종말의 때까지 신앙 안에서 보존될 것이다.(성도의 견인: Persevearance of saints)
칼뱅파는 이와 같은 신조를 근거로 삼아서 아르미니우스파 성직자들의 직책을 박탈하고 대대적으로 박해를 가했다. 하지만 예정론은 원래 칼뱅이 구축한 신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고, 그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도르트 교회회의가 끝나고 나자 예정설은 칼뱅 신학의 핵심으로 부각해있었다. 1625년까지 박해를 피할 수 없었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신조는 영국 성공회의 일부 진영에, 나중에는 침례교회와 웨슬리의 감리교회, 그리고 구세군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발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