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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2권 제7장 신비선옹(神秘仙翁)의 등장 ① 담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것들이 제법 머리를 쓰는군." 여기까지는 핏자국만 아니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도망 을 쳤었다. 그런데 지금은 위쪽과 아래쪽으로 마치 '날 잡아봐 라.' 하듯 풀이 누워 있었고, 발자국도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잠시 쪼그리고 앉아 피의 색깔과 양을 살피던 환사는 몸을 일으켰 다. "놈은 위쪽으로 갔소." "확실한가?" 되물음에 추적술과 은신술만은 담사보다 한수 위라고 자부하고 있 던 환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내 목을 걸 수 있소!" "그렇다면야……. 좋아, 모두 놈을 추적한다!" 한데 그때였다. "쯔쯔! 미련한 놈들! 둘 다 죽일 생각을 못하고."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안다. 도약을 하려던 몸이 멈칫하더니, "막주를 뵈옵니다!" 그들은 일제히 왼발은 땅에, 오른발은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꺾었 다. 스슷!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미약한 음향이 들리며 허공에서 천천히 세 개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과연 천면사신과 곽여송, 그리고 혈우 장훈이었다. '팔까지! 놈이 그렇게 강했던가?' 담사의 왼팔이 잘려진 것을 보고 언뜻 놀란 표정을 짓던 천면사신 은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모두 곽장문인께 인사 드려라." 그 말에 곽여송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가……." 천면사신은 짐짓 정색을 하며 말을 막았다. "아니외다. 이제 한 배를 탔으니, 한집안 식구나 마찬가지인 터. 수하된 도리로서 당연히 인사를 올려야지요." '더러운 놈! 이 참에 아예 올가미를 씌우려는 네놈의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소위 정파의 지존(至尊) 중의 한 사람인 곽여송이 정(正)보다 사 (邪)에 가까운 살청막과 안면을 트고 지낸다는 소문이 퍼질 시에 는 청성파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해질 것은 불을 보 듯 뻔한 일!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그로써는 한걸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렁에 발을 집어넣은 격이니. '아들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깊을수록 복수심 또한 깊은 모양이다. 찰나지간에 생각을 마친 그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막주의 말씀이 지극히 옳소. 하지만 지금은 겉치레보다 놈을 잡 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오만." 이어 그는 천면사신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이런 본 장문의 마음을 해량(海量)해 주시길." 지난 한 달 동안 같이 지내면서 겸상(兼床)도 하지 않을 만큼 오 만했던 곽여송이었다. 그것은 비록 서로간에 필요에 의해서 손을 잡았지만, 나는 너희들과 다른 몸이시다,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 구렁이 담 넘듯 슬그머니 넘어가는 곽여송의 태도에 천면사신은 모르는 척 맹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이거 노부가 곽장문의 급한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고, 죄 송하외이다." "별말씀을. 그보다 놈이 위로 도망간 것이 맞소이까?" "확실하오!" 자신감을 보이고 싶은 듯 필요 이상으로 고개를 힘껏 끄덕인 천면 사신은, "담사, 단호삼과 같이 있던 자의 신분은 밝혀졌느냐?" 담사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비봉 추영화였습니다." "추영화!!" 뜻밖의 대답에 곽여송이 부지간 대경하고, 천면사신도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가 이내 예의 표정으로 돌아오며 입을 열었다. "뜻밖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번 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본막의 입장이 참으로 곤란해질 터. 더욱이 추영화가 곽장문인이 본막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곽여송은 급히 물었다. "정말 알고 있소이까?" 천면사신은 눈 깊숙한 곳에서 야릇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만약이외다, 만약…….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지요. 어차피 죽 여야 하니까 말이오." "그럼 빨리 죽이시오! 이렇게 어물거리다 놓치기라도 한다면 큰일 이오." 천면사신은 '정파 놈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는 짓이 우 리와 똑같군.' 하고 생각하면서 추상같이 명령을 내렸다. "담사와 환사는 일급 살객 셋을 데리고 추영화를 추적, 척살하 라!" "복명!" 힘차게 대답한 담사가 몸을 일으킨 즉시 일급 살객인 흑의복면인 들을 향해 '너, 너, 너. 따라 와!'한 뒤 몸을 날릴 때, 천면사신 은 혈우 장훈에게 명령했다. "혈우, 앞장서라!" 문득 곽조웅의 눈에 감탄이 스쳤다. '과감한 결단에 뛰어난 추진력! 얕볼 놈이 아니군.' ② 너 같은 계집이라 했다. 잠깐 데리고 놀다 나누어 가지면 좋을 계 집이라 했다. 이런 말들은 창부(娼婦)에게도 해서는 안되는 말들이었다. 비록 돈으로 몸을 사더라도 말이다. 그 날 만큼은 입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말…….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또 얼마나 달렸는지 아무 상관이 없다. 문사건(文士巾)이 풀어지고, 내상이 더욱 깊어져 입으로 피가 줄 줄 흐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슴에 하얀 재만 남은 인간에게는 암흑과 절망만이 남아 있을 뿐 이었다. 추영화는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에 무엇이 걸렸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자신 의 몸이 붕 떠오르다가 처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팠다. 빠르게 달린 만큼 아팠다. 재만 남은 가슴을 가진 사람도 아픔을 느끼는가 싶었다. 그래서인 지 웃음이 나왔다. 키득키득. 웃음이 곧 흐느낌으로 변한다 싶은 순간에 이내 통곡으로 변했다. 마음을 아늑하게 만드는 음성이 들려온 것은 추영화의 울음이 잦 아들 때였다. "예쁜 아이야, 무엇 때문에 그리 슬피 우느냐?" "!" 갑자기 들려온 음성이었다. 허나 추영화는 놀라지 않았다. 놀랄 가슴도 없었지만 늙수그레한 그 음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어떤 사 람이 들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묘한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 이기도 하였다. 잠시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있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글자글한 주름이었고, 그 다음에는 눈 꺼풀에 반쯤 덮인 한 쌍의 눈이었다. 눈은 그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다. 한데 추영화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마치 텅 빈 공간 같기도 했다. 또 달리 보니 치매(癡朔)에 걸린 노인들에게나 볼 수 있는 흐리멍덩한 눈인 듯도 같았다. 그런 눈에, 머리숱이 얼마 되지 않는 백발(白髮)에, 흔하디흔한 마의(麻衣)를 입은 노인이 그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추영화가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자, 마의노인은 오른손으로 헝클 어진 그녀의 머리칼을 정갈하게 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알겠다. 어떤 몹쓸 녀석이 네 마음을 상하게 한 모양이구 나." 추영화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허허허, 네 눈에…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단다." 가볍게 대답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름이 많아 잘 알아볼 수 는 없었지만 언뜻 안쓰러워하는 눈빛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쯔쯔! 무척 상심(傷心)이 컸던 모양이구나. 화(禍)가 심장에 침 범했으니." 혼자말처럼 낮은 음성으로 읊조린 그는 머리칼을 만지던 손으로 추영화의 입가에 묻은 피를 훔치며 말했다. "대체 그 녀석이 누군지 말해 주겠느냐? 비록 이 늙은이가 힘은 없다만, 이렇게 예쁜 아이를 울리는 그 녀석을 도저히 묵과할 수 가 없구나." 순간 추영화는 가슴이 뭉클했다. 마치 그녀 나이 일곱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살아오신 것 같 아 마의노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할아버지……." "오냐, 오냐." 마의노인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어서 말해 보렴. 슬픈 일은 나눌수록 무게가 가벼워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배가 되는 법이란다." "예." 나직이 대답한 그녀는 단호삼을 만난 일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이 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왜 이런 쓸데 없는 말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혹이 문득문득 들었지만 일단 말을 꺼내자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때로는 한숨을 쉬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던 마 의노인은 장구한 이야기가 끝을 맺자 입속으로 응얼거렸다. "물이 흐르는 대로 그냥 놔두는 게 나았을지도……." "예? 방금 뭐라 하셨어요, 할아버지?" 추영화가 묻자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죽은 마누라 생각이 나서 그만." 과연 그럴까? 허나 추영화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셨어요?" "아주 오래 전에……. 그보다 애야. 이 늙은이의 생각에는 말이 다. 단호삼이라는 그 아이도 널 마음에 두고 있는 듯하구나." "예? 그럴 리가?" 뜻밖의 말에 추영화의 봉목이 커졌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시무룩 한 표정으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어요." '쯔쯔! 사랑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더니. 이렇게 총 명한 아이가 간단한 이치도 생각 못할꼬.' 내심 혀를 차던 마의노인의 눈이 돌연 반짝 빛났다. 멀리서, 거리 로 말하자면 삼십 장 정도에서 옷자락 나부끼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살청막의 아이들인가? 바쁜데… 귀찮게 생겼군.' 그러나 그는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 추영화를 자애로운 눈빛으 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라면 단호삼이라는 그 아이는 곧 죽기 직전이다. 그런 아이가 왜 몹쓸 말을 해 네게 상처를 입히겠느냐? 그것은 바로 널 살리기 위함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네가 떠나지 않 을 테니까 말이다." 순간 추영화의 몸이 전류에 감전된 듯 떨기 시작했다.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가 노래지기를 수차례. "안돼!!"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그녀는 용수철이 퉁기듯 튀어 올랐다. 한데 그때였다. 마의노인이 손을 슬쩍 흔들자 이 장 높이로 솟구친 추영화의 몸이 빨리듯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③ 놀라운 격공섭물진기(格功攝物眞氣)였다. 고정된 물체도 아닌 사람을, 그것도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사람 을 가볍게 끌어당기는 이 마의노인은 바로 장백검유 왕도연의 사 부며, 강호에서는 이미 죽은 자로 되어 있는 신비선옹(神秘仙翁) 이었다. 추영화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신비선옹의 경천동지(驚天動地)한 무공보다 가지 못하게 만든 데 에 대한 놀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어 '왜?'라고 물을 수 가 없었다. 이미 전신 혈도가 찍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 다. 신비선옹은 허허롭게 웃었다. "허허허, 놀란 모양이구나. 허나 다 너를 위함이니라. 내상과 산 공독은 별거 아니다만, 심장을 상하게 하는 화기(禍氣)는 지금 당 장 다스리지 않으면 큰일난다." 말이 끝나는 찰나, 신비선옹은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 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바쁘지만 할 수 없구나." 신비선옹의 음성이 그 자리에 맴돌 때였다. "이상하군. 방금 사람 목소리가 들렸는데 왜 아무도 없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담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주의를 살피 던 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흔적이 끊어졌소." 환청(幻聽)을 들었던 것인가 하던 담사의 고개가 홱! 돌려졌다. "뭐야? 그럴 리가 있나. 어디 한 번 보자!" 환사를 밀치다시피 한 담사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선 자 세로도 알아본 환사보다 확실히 추적술은 한 수 아래인 모양이었 다. 기세 좋게 나선 담사의 얼굴은 금세 곤욕스럽게 변했다. '풀이 누운 모양과 묻어 있는 물기로 봐서는 그 계집은 여기에 엎 드려 울었다. 그리고 흘린 피와 눈물에는 아직 온기(溫氣)가 남아 있다는 것은 방금까지 있었다는 증거.' 그의 눈이 사방을 휘저었다. 사실 이곳은 숲이 끝난 지점이라 시야가 훤히 뚫려 있는 작은 언 덕의 둔덕배기였다. 이런 곳이라면 눈에 보여야 했다. 시간상으로 는. 한데 낮게 깔린 어둠만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 괴이한 것은 여기가 끝이라는 사실이었다. 핏자국이며, 무질 서하게 밟혀 있던 발자국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 른 사람이 데려간 것도 아닌 듯했다. "귀신 곡할 노릇이군."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는 환사와 흑의복면인에게 말했 다. "주위를 수색하라!" 일부러 좀더 많은 흔적을 남기면서 달리던 단호삼은 우뚝 몸을 멈 추었다. 실로 기이한 산세(山勢)였다. 거의 삼각형을 이룬 지형에 두 면은 밑도 보이지 않는 천야만야 (千也萬也)의 절벽이고, 한 면 역시도 허리가 휘어지도록 뒤로 젖 혀서 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벼랑은 몹시 가팔랐으며 바위로 되어 있는 암벽이 었다. 단호삼은 모르고 있지만 기실 이곳은 한천애(恨天崖)라 불리는 천 장절애(天仗絶崖)였다. 잠깐 한천애에 얽힌 전설(傳說)을 보자면, 아주 어리석은 여인 하 나와 현실적인 사내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아주 먼 옛날에 아름답고 현숙한 한 여인은 인물이 출중한 데다 머리까지 뛰어난 사내를 사랑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이야기가 모 두 그렇듯이 두 사람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다음 이야기는 뻔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여인은 몸 받쳐, 마음 받쳐 사내를 출세시켰더니, 사내는 더 출세 하기 위해 돈 많고 못생긴 여인―이야기의 극대 효과를 얻기 위해 못생겼다고 하는 것 같음―과 결혼을 했고, 헌신짝이 된 이 어리 석은 여인은 '사랑하기에 죽음을 택하겠어요.'라는 그 유명한 말 을 남기고 이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뭐, 그렇고 그런 전 설을 가진 곳이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도 몇몇 넋 나간 여인들이 심심찮게 흉내를 내 는 곳이기도 하였다. 한 기녀(妓女)가 보상심리로 사내를 깔아뭉개기 위해 지어낸 이야 기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단호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은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가파르긴 하지만 노력하면 못 오를 절벽도 아니었다. 암벽의 틈새에 두 손을 박았다. 끌어당기는 탄력의 힘을 이용해 뛰어 오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검었다. 언뜻 보았던 손톱 밑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손등에도 검은 반 점이 있었음을 기억한 단호삼은 멈칫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볼 수 없는 얼굴에도 반점이 생겨 있을 것이다. ④ 운공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비천갈독이 서서히 골수(骨髓) 를 침식시킨다는 증거였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렇게도 살고 싶었나 단호삼?' 반 시진. 불과 그것밖에 남지 않은 생명. 그런데도 그는 도망을 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 리(五里)를 달리고도 모자라서 말이다. 추영화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 아니던가 하고 스스로에게 위 안 삼아 자문(自問)을 던지지만 꼭 그것 때문만도 아닌 듯싶었다. 본능이었을 것이다. 살기 위한……. "후후후……." 풀썩 먼지가 솟구칠 메마른 웃음을 흘리던 그는 천천히, 동작 하 나하나를 끊듯이 손을 뺐다. 이제 바쁠 일이 없다는 태도였다. 느릿하게 몸을 돌리던 단호삼의 눈에 언뜻 감탄이 서렸다. 밤하늘. 미웁게만 생각되던 훤한 달빛 아래 총총히 떠 있는 별들. 그 중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 하나가 있었다. 북극성(北極星)이었다. 그 언제였던가? 산사태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다음 날로 기억되었다. 배가 고프다고,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우는 단호삼을 따뜻하게 감 싸안은 채 형이 말했다. "호삼아, 저기 저 별이 보이지? 수많은 별을 지켜주듯이 가장 밝 은 빛을 발하는 저 별은 말야,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거든. 그런데 오늘 생긴 것을 보니 아마도 엄마 아빠 별인 것 같애."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고말고. 언제 이 형이 거짓말하는 걸 봤니?" "형은 거짓말 안 해!" "그래, 맞다. 그러니 우리 호삼이도 형처럼 거짓말을 하면 안된 다." 단호삼은 힘껏 도리질을 했다. "거짓말한 적 없어!" "그랬구나. 착한 우리 호삼이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형이 말을 잘못했다." 그러면서 형은 다시 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착한 사람은 죽어 별이 되어 사람들을 지켜준다고. 우리 엄마 아빠는 누구보다 선하게 살아오신 분이라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 지금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다고 하였다. 그 날 이후로 단호삼은 밤을 기다리는 소년이 되었다. 단호삼은 쓸쓸하게 웃었다. "형은 거짓말쟁이야. 하지만 좋은 거짓말쟁이라고 인정해 주지." 그리고 보니 얼마만에 보는 북극성인가? 어디 북극성뿐이겠는가. 달 가듯 흐르는 구름도, 손에 잡힐 것 같은 세찬 바람도, 땅위에 돋은 풀조차 보지 못하고 살아왔었다. 그만큼 바쁘게 살았노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 다. 시간과 욕심에 쫓겨 살아온 것이다. 허망했다. 위이이잉! 한 줄기 세찬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가만히 손을 움켜쥐었 다가 펴 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잡힐 것 같았던 바람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고 허전함밖에 남지 않았다. 문득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아왔는지 싶었다. 자연 속에 살면서 그 자연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쫓겨왔다는 생각에 단호삼은 씁쓸 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이라도 느끼고 싶어." 오늘밤에 도(道)를 깨우칠 수만 있다면, 내일 아침에 뜨는 해를 보지 않아도 좋다는 공자(孔子)의 말씀이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스르르 감으며 그 자리에 결가부좌(結跏 趺坐)를 틀었다. ⑤ 참으로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몹시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러다가 좀 편안하다고 느낄 순간에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악연(惡緣)이든, 선연(善 緣)이든 간에 자신이 만났던 모든 얼굴들이 거기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다른 모든 얼굴들은 사라지고 하나의 얼굴만이 커다랗게 부각되었 다.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인 여인의 얼굴은 추영 화였다. 왜일까? 지금 이 순간에 왜 부모님과 형의 모습들을 제치고 그녀가 나타나 는 걸까? 불과 사십여 일밖에 함께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의문을 풀기도 전에 추영화의 형상이 연기처럼 사라지며 하나 의 음성이 생시처럼 들려왔다. "호삼아, 이 운기토납법은 호연지기를 길러준다. 그리고 대성(大 成)을 하게 되면 하늘에 닿을 선각자(先覺者)가 된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나[我]도 없고, 너[他]도 없는 무 (無)의 세계, 즉 무아(無我)에 들어야 하며, 무아란 바로 비어 있 음[空]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무한(無限)이며, 영원(永遠)이다. 그 속에 천지간의 모든 기운을 담은 뒤에 삼라만상(森羅萬象), 운 하성신(雲霞星辰)의 도리(道理)를 깨우쳐야 무극(無極)에 이른다. 무극은 곧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니, 못 할 것이 없다 하였다. 그 러나 이론이 그렇다는 것이지 천하에 누가 있어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겠느냐? 더욱이 나는 이 운기토납법을 익히지 않았다. 그 이 유는 가르침을 준 사람을……." 그 뒷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 순간 단호삼은 아무것도 느 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공령(空靈)! 혼(魂)이 허공을 부유(浮游)하며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바 람 같기도 했으며, 구름 같기도 했다. 또 어찌 보면 대해(大海)로 흘러 들어가는 강물인 것 같았다.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도 없었다. 한데 어느 순간 단호삼의 몸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투명한 아지랑이 같은 파동(波動)이 생기기 시작했 다. 시간이 점차 지날수록 그 현상은 눈에 띄게 또렷해졌다. 그리 고 그와 반비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가 운데 얼굴에 있던 검은 반점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였다. 비천갈독! 해약조차 없다는, 오대독물이라는 비천갈독이 배출되고 있는 것이 다. 천고제일의 심공이라는 조화선공이 아니면 결코 해낼 수 없는 기현상! 이제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시간만 지나면 비천갈독은 완전히 배출 될 정도로 흐릿하게 변했다. 허나 세상사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라 가만히 있어도 복이 덩굴째 굴러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엇을 얻 고자 해도 그 뜻을 잘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후자(後 者)를 두고 불가에서는 전생에 쌓은 업보(業報)가 많아 후생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설파하면서 공덕(功德)을 쌓으라 하였다. 아무튼 단호삼 역시도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았는가 보다. 달에 박히듯 몇 개의 점이 생겼다 싶은 순간, "앗! 놈이 비천갈독을 배출시키고 있다!!" "어찌 저런 일이?!" 각기 다른 음색을 지닌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두 개의 인영이 쏜살같이 내리꽂히듯 떨어지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 을 뻗었다. 꽈릉! 패액! 막강한 진경(眞經)이 담긴 장풍과 번쩍이는 검기가 단호삼에게 쏘 아졌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공세였다. 있다면 무자비한 진력과 직선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즉 천면사신과 곽여송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 다. 놈은 죽었다고! 이들이 이렇게 자신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무릇 무인이 운기(運氣) 시에는 누가 옆에서 손가락만 건드려도 진기가 역행(逆行)되어 피를 토하며 전신이 뒤틀리다 종래에는 죽 고 만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주화입마(主禍入魔)란 것이었다. 장력과 검기가 막 단호삼을 가루로 만들 찰나였다. 돌연 단호삼의 몸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더니 결가 부좌를 튼 상태 그대로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밀려나는 것이 아닌 가. 마치 장풍과 검풍이 떠민 듯했다. 순간, 꽈꽝! 벽력음이 터지며 흙먼지가 풀썩 시야를 가렸다. 단호삼은 죽이지 못하고 애꿎은 땅만 때린 것이다.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 전, 심유한 음성이 들렸다. "진정 끈질긴 자들이군, 살객들은……." "!" 사람이 너무 놀라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하게 되면 말문이 막히면서 입이 딱 벌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천면사신과 곽여송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입을 벌리는 대신에 얼굴 근육이 잘게 경련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뒤에 드러난 단호삼의 모습은 의연하기 그지없 었다. 칠 척에 가까운 장신에 떡 벌어진 어깨. 잘록한 허리. 머리에 투구를 씌우고, 철갑(鐵甲)을 입히면 영락없이 만마만인 (萬馬萬人)을 호령하는 대장군 감이었다. 누가 보아도 절로 감탄성을 터뜨릴 풍모였지만 곽여송의 눈에는 아들을 죽인 원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을 잡고 어떻게 비천갈독을 배출했느냐? 운기 도중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느냐 하는 말 따위는 하고 싶지 않 았고,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한마디는 짚고 넘어갈 일이었다. "본 장문은 곽여송이다!" 살객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호삼의 눈에 언뜻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뜻밖이군." 낮게 중얼거린 그의 눈이 옆으로 옮겨졌다. "당신도 청성 문하요?" 단호삼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어처구니없 는 일이었다. 천면사신이 대답을 하기 전에 성격이 불같은 곽여송이 신경질적인 음성을 토했다. "미친, 그는 천면사신이다!" 이놈인가 하면 저놈이고, 저놈인가 하면 이놈이다. 아무리 명석한 단호삼이라 할지라도 잠시 헷갈릴 수밖에 없었고. 그때 허공에서 후루룩 떨어지는 흑의복면인을 보는 순간, 그는 깨 달았다. 믿기 어렵지만 살청막과 청성이 손을 잡았다는 것을 말이 다. '아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건가? 경 우를 따져 보지도 않고?' ⑥ 단호삼은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곽여송의 입장에서 볼 때는 복수겠지만, 단호삼에게는 아무런 의 미도 없는 일일 뿐더러 따지고 보면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무런 은원(恩怨)도 없는 사람이 죽이겠다고 덤벼드는데 가만히 앉아 당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성 자(聖者)일 것이다. "이놈은 본 장문 혼자 상대하겠소." 갑작스런 곽여송의 말에 천면사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그들간의 묵 계는 공염불로 그칠 것이다. 묵계는 다름아니라, 무림맹이 녹림칠십이채를 치고 나면 정사(正 邪) 중간에 위치한 살청막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그것이 강북을 평정한 뒤가 될지, 앞이 될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 실이었고, 이를 염려한 천면사신은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단호 삼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곽여송에게 접근하였다. 살청막을 비호(庇護)해 주는 대가로 단호삼을 죽여주겠다고 말이 다. 때마침 단호삼의 행방을 몰라 애를 태우던 곽여송에게는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 서로간에 밑질 일이 없는 그들은 이렇게 손을 잡았다. '일을 마무리지어 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멍청한 놈들이 실패하 는 바람에 어렵게 되는군.' 그렇다고 수하들을 시켜 죽여 줄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할 수 없 지 않은가. 찰나지간에 생각을 마친 그는 웃음 띤 얼굴로 흔쾌히 응낙했다.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지요. 하지만 그 전에……." 말을 흐린 그는 단호삼을 쳐다본 채 입을 열었다. "혈우!" 이름이 불려지기가 무섭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장훈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혈우 장훈이었다. "흐흐! 오랜만이다, 단호삼." 순간 단호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세월이 흘러 얼굴은 많이 변했지만, 저 독사 같은 번들거리는 눈 만은 죽어 백골이 되었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너, 너는……?" 장훈은 짐짓 혀를 찼다. "끌끌. 너무 그렇게 반색을 하니 내 마음이 아프구나. 네놈이 죽 는 꼴을 봐야 하니 말이다." 뉘우치는 말이 아니다. 어른이 되었으면 철부지 때의 잘못을 후회 해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단호삼의 마음이 좀 달라졌을 것 이다. 피는 피를 부른다는 강호무림의 철칙에 환멸을 느끼던 차였기에. 단호삼의 굵은 눈썹이 용틀임했다. "더러운 놈!" 조금도 변하지 않은 장훈을 보자 좀 전에 느꼈던 평정한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걷잡을 수 없는 살심(殺心)만이 가득했다. "죽이고 말겠다!" 이 시린 살음을 토한 그가 백혼검을 뽑을 때, 단호삼의 심기(心 氣)를 흩트릴 목적으로 장훈을 내세웠던 천면사신은 내심 하얗게 웃으며 곽여송에게 전음을 보냈다. (곽장문인, 이제 손을 써도 될 것 같소.) 정신이 번쩍 든 곽여송은 천면사신의 깊은 심계(心計)에 감탄할 사이도 없이 막아섰다. "놈! 네 상대는 본 장문……." "좋을 대로!" 말을 자른 단호삼은 벼락같이 손을 쓰기 시작했다. 파츠츠츠! 해일이 일었다. 육지를 덮쳤다가 되돌아가는 역해일은 단해일검이 었다. 앞을 가로막는 곽여송을 단숨에 죽여버릴 생각인 모양이었 다. 뼈를 엘 듯한 검기가 번갯불같이 빨랐고, 끊임없이 미세하게 움직 이는 백혼검은 사방을 차단하여 곽여송이 피할 곳을 모두 봉쇄하 였다. '비겁하게……. 사파 놈은 어쩔 수 없군. 허나 무공 하나만큼은 높이 사주지.' 곽여송은 다짜고짜 손을 쓴 단호삼의 행위에 분노가 솟았지만 마 음 또한 은근히 떨렸다. 그렇다고 구경만 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곽여송은 굳은 얼굴로 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처음이었다.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검을 쥔 것은. "차앗!" 우렁찬 기압을 터뜨린 그는 왼발을 반 보 가량 뒤로 뻗어 중심을 잡고 벼락같이 마주쳐갔다. 파파팟! 눈을 뜨기조차 어려운 광채가 부챗살처럼 퍼졌다. 분광검법(分光劍法)! 빛조차 가른다는 쾌검식(快劍式)인 분광검법은 난파풍검법과 청성 을 대표하는 절대검학이었다. 빠르기로만 따지면 천하에서 둘째가 라면 서러워할 이 분광검법은 오직 장문이 된 후에 익힐 수 있었 다. 차차창! 귀청을 찢는 날카로운 소성 속에 피가 풀썩 피어 올랐다. "음!" 묵직한 신음을 토하는 사람은 뜻밖에도 단호삼이었다. 길게 그어 진 그의 가슴에서 새빨간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지만 다행이 뼈는 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은한 통증에 단호삼의 눈이 커졌다. 암습도 아닌 정면 대결에서 손해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더욱이 그 누구도 막지 못했던 단해일검이 깨어졌다는 사실이 더 놀라게 하였다. 상대했던 누구보다 곽여송이 강하다는 점도 있지만 평상시의 단호 삼이라면 낭패를 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자 신이 사하립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하립의 검은 살검지도(殺劍之道)! 이는 지독한 살기가 있어야만 제 위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그러 나 사하립이 염려한 대로 그에게는 살심이 없었다. 비록 순간적으로 살심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 는 언제나 인후한 성격이 자리하고 있어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단호삼이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는 순간, "분광앙천(分光仰天)―!" 문득 곽여송의 신형이 흐릿해지고 불쑥 거대한 검 하나가 벼락같 은 기세로 쏘아졌다. 콰콰콰! 검에서 나는 음향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굉음이 들렸다. 마치 폭포수가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 같았다. 검기가 닿지도 않았 는데 땅에 균열이 생겼다. '일파의 지존(至尊)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내심 대호성을 발한 단호삼은 훌쩍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멀면 그만큼 위력이 삭감되는 법이니까. 허나 다음 순간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신검합일된 분광앙천식의 위력은 조금도 변함없이 쏘아져 들어오 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가속도가 붙은 듯, 느낄 수도 없을 정도 로 빠름을 보였다. 단호삼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강호 출도 이후 이처럼 무자비한 검세는 처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곽여송의 팔다리를 끊어주고 빙글거리 는 장훈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움치고 뛸 여건이 아님 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단호삼은 입술을 잘끈 씹으며 백혼검을 떨쳤 다. 번쩍! 검극에서 또 하나의 검이 생기며 마주쳐 갔다. 절혼검이 만든 검 강이었다. 사하립에게 천하제일검이라는 영광된 휘호를 선사한 무 적의 검식이었다. 그러나, ⑦ 꽝! 금속성끼리 부딪혔는데도 벽력음이 난다는 것은 검강(劍 )끼리의 충돌 때문일 것이다. 파파팟! 부서진 검강의 파편들이 천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장내에 고수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호신강기로 전신을 보호하며 분분히 물러나야만 했다. 가만히 있다가는 구멍 뚫린 시체가 될 테니까. "크윽!" 억눌린 듯한 신음과 함께 한 사람이 피분수를 뿜으며 뒤로 날아갔 다. 단호삼이었다. 이 장을 날아가다 암벽에 부딪히는 순간, 또다시 피분수를 울컥 토한 그는 대책 없이 떨어져 내렸다. 퍼억! 형편없이 땅에 처박힌 그의 모습은 혈인(血人)을 방불케 하였다. 거북이 등짝처럼 쩍쩍 갈라진 피부는 시뻘건 피를 철철 흘렸다. 땅바닥을 두 손으로 짚고 사발 만한 핏덩이를 토하는 단호삼을 보 는 곽여송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놈! 진정 무서운 놈이다. 살려두었다가는 후환을 두려워해야 할 정도로!' 자신의 상식으로는 대책이 없는 놈이었다.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할 놈이 비천갈독을 스스로 배출시키지를 않나, 분광검법의 이대절초 중의 하나인 분광앙천을 받아내고도 아직도 안 죽지를 않나. 따질 것 없이 당장 달려가 단호삼의 목을 치고 싶었지만 그 역시 도 성치 않은 몸이었다. 사실 단호삼에 비한다면 별거 아닌 검상(劍傷)과 별거 아닌 내상 을 입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별거 아닌 내상이 말썽이었다. 내장이 뒤틀려 올라온 응혈을 토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피란 혈관에 있어야만 제 기능을 유지하며, 일단 혈관 밖으로 나 온 피는 죽은피다. 죽은피를 뱉어내면 괜찮지만 삼키게 되면 세맥 (細脈)에 악영향을 끼치는 법이다. 한데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곽여송은 천면사신에게 자신의 약한 면모를 보이기 싫어 응혈을 토하지 못하고 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암암리에 운기를 해 죽은피를 한곳으로 모으는 수고까지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 뱉어내겠다는 심사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 서. 하지만 이 짧은 순간 자신의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음을 그는 모 르고 있었다. 천면사신. 곽여송의 등을 보는 그의 시선은 갈등을 빗고 있었다. '저놈이 저렇게나 강할 줄이야. 이 기회에…….' 곽여송을 죽인 뒤 단호삼에게서 비천갈독조차 배출시킬 정도로 뛰 어난 조화선공과 만천검결을 얻고 싶었다. 허나 그의 갈등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차피 단호삼은 죽을 것이고, 곽여송은 단호삼이 무얼 가지고 있 는지 모르니까 말이다. 잠시 참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다. 토혈을 한 단호삼은 백혼검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겨우 일어난 듯 휘청했으나 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으며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죽일 기회였는데 왜 보고만 있었지? 정파인이라 그런 건가?" 꿈보다 해몽이 좋다 하더니……. 곽여송은 뻔뻔스럽게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 다. "당연하지! 본 장문이 어찌 반항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공격하겠 느냐?" "존경스럽군."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단호삼은 백혼검을 땅에서 뽑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으니 그냥 보내 주시겠구려." 일순 곽여송의 낯빛이 싹 변했다. 폼 한번 잡다가 개망신을 당하 는 순간이었다. "그, 그건……." 그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자, "농담이오, 농담. 아직 일초식을 펼칠 여력이 남아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곽여송의 얼굴이 구겨졌다. "본 장문은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준비하라!"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어 볼 심사인 모양이었다. 순간 단호삼은 이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더니. 어쩜 그리 똑같지. 당신 아들도 부 끄럼을 모르더니……." 말을 놓았다, 높였다 제 마음대로였다. "닥쳐라, 이놈! 그 말 한마디로 네놈을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후후후, 토씨도 똑같애. 당신 아들도 그런 말을 하다가 죽었지, 아마." "으으……!" 곽여송은 코와 귀에서 허연 김이 피어 오를 정도로 분기탱천했다. 옷자락이 찢어질 듯이 요동쳤다. 이상하지 않은가. 곽여송을 화나게 만들어 단호삼이 무얼 얻을 거라고 자꾸 약을 올 린다 말인가? "곽장문인, 놈은 지금 격장지계를 쓰고 있소." 천면사신의 충고에 곽여송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활한 놈! 그런 하책(下策)으로 감히 본 장문을 우롱하다니." 단호삼은 풀썩 웃었다. "후후후, 격장지계를 쓴들 당신에게 죽을 것이 뻔한데 내가 왜 쓸 데없는 심력을 낭비하겠소." "!" 그랬다. 지금 단호삼의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기 어려웠 다. 말을 할 때마다 피가 뿜어지고, 서 있는 것조차 힘겨운 듯 전 신이 연신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일초식을 펼칠 여력이 남아 있다는 것도 허장허세인 것 같 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젠장, 죽이면 다 끝날 일에 골치 아프게 시간을 끌 것 없다!' 가장 간단한 방법을 선택한 곽여송은 비쾌하게 허공으로 몸을 뽑 아 올렸다. 까마득히 올라간 그의 몸이 멈칫한다 싶은 순간에 섬 전처럼 단호삼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쌔액! 대기(大氣)가 갈라지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검만이 있었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검의 숫자가 하나씩 늘어났다. '내 뜻대로 분광검법의 최후 초식을 펼치는군. 과연 자부심을 가 져도 좋을 만치 대단해. 하지만 만천검결보다 못하고, 절혼검보다 못해.' 단호삼은 분광검법의 최후 초식인 분광굉천(分光轟天)이 열두 개 의 검으로 늘어나며 지척으로 다가오자 백혼검을 천천히 들어올렸 다. 백혼검이 부르르 떨렸다. 무형의 압력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검신 이 버들가지처럼 휘어졌다. 전신 혈관이 미친 듯 요동을 치며 오 관(五官)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사 아저씨, 제게 힘을…….' 사 아저씨가 천하제일검이라면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한 것이 못내 가슴 아팠던가. 그래서 분광검법과 비교하기 위해 곽여송을 부추겼고, 지금 미련 스럽게도 절혼검을 펼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내심 외치며 백혼검을 쭉 밀어 올렸다. 아니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다. 허나 백혼검을 반도 뻗기 전에 단호삼은 천둥이 치는 듯한 울림을 들었고, 순간 자신의 몸이 한없는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 다. 그리고 최후로 들은 산 자의 음성은 천면사신의 놀라는 소리 였다. 끝도 보이지 않는 한천애를 내려다보는 곽여송의 눈에 눈물이 맺 혔다. 아들아, 이 아비가 네 원수를 갚았다. 부디 지하(地下)에서나마 편히 눈을 감거라. 아들아, 넌 죽은 것이 아니다. 언제나 이 못난 아비의 가슴에 살아 숨쉬고 있다. 사랑한다. 내 아들아……. |
첫댓글 잼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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