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의 성상(星霜)에 걸쳐 항구도시에 살던 시절 해마다 1~2월이면 봄맞이 설렘 가득 안고 남녘 지방 여기저기를 돌아댕기는 게 매년 빠지지 않는 연중행사의 하나였었는데...늘그막에 남녘에서 한참 벗어난 낯선 지방에 와서 살다 보니 봄맞이 여행은 언감생심 남의 이야기이자 아득히 먼 피안의 일맹키로 느껴진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아직 채 겨울이 가시지 않은 정월부터 2월까지 남쪽 지방, 특히 바닷가를 빨갛게 물들이는 동백꽃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청초했는데, 특히 거제도 안의 작은 섬 내도(內島)의 동백꽃은 잊을 수가 없다. 걸어서 30분 남짓 걸려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섬인 데다 거액(?)의 입장료를 내고 찾아가는 외도(外島)에 비해 외지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기에 자연 그대로의 이곳 동백 군락지는 더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데, 적어도 나의 경험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2월 내도에서 만나는 동백꽃은 나무에 달린 꽃들도 아름답지만 떨어진 꽃들이 섬 전체의 바닥을 뒤덮은 모습은 장관이라 할 것이다. 동백나무 아래는 물론이고 자동차가 없는 도로(내도에는 자동차가 없다) 어디를 가든 동백꽃을 밝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이니 가히 섬 전체가 동백꽃으로 뒤덮혀 있다고나 할까...
무릇 세상의 아름다운 꽃들도 떨어지면 볼품 없어지는 게 자연의 이치라 하나 내도에서 그렇게 지천으로 떨어져 있는 동백꽃들은 어느 것 하나 시들거나 변색되거나 볼품 없게 된 게 없으니...해서리 어느 시인은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제 스스로 꽃 목을 쳐내어 바위꽃으로 거듭난다고 했던가.
동백꽃 별리(別離)/호미숙
낮은 바위 틈새에서 들려오는
뭉크의 절규만큼 처절한 동백의 낙화
겨울 별리의 핏빛 외침이 송곳처럼 박혀
붉은 심장을 통째로 떨구는 몸짓이 처연하다
마지막 생애를 부여잡지 못한 채
댕강댕강 제 스스로 꽃 목을 쳐내어
바위 꽃으로 핀 동백은 한 잎의 추억이기보다
송이에 오롯이 간직한 아름다운 세월이다
자연 상태에서 자라고 번성해 나간 것을 볼 때 내도의 동백꽃은 여수에서 보는 동백꽃에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섬 전체에 지천으로 널린 동백꽃을 보려면 거제도의 내도에 가는 게 좋을 것이니, 우리나라 어디에도 그런 장관을 내도 외에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갈 기회 있다면 내도 건너편의 거제도 남쪽 끝자락에 있는 공곶이도 찾아볼 만하다. 바다가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수십 년에 걸쳐 노부부가 지성으로 가꾼 노란 수선화 들판이 딴 세상을 만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소문만 믿고 비싼 배삯을 내고 또 비싼 입장료를 내면서 외도를 찾지만 거기에 있는 대부분이 자생 동백나무들이 아니라 근래 옮겨 심어 가꾼 것인 데 반해, 내도의 동백나무는 모두 자연상태로 자란 나무들이란 거다.
겨울을 이겨내고 남 먼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동백을 생각하면 으레 거제, 여수, 충무, 제주 등 해안을 낀 남녘 지방을 떠올리지만, 의외로 내륙지방에서도 동백나무는 많이 자란다고 한다. 특히나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이젠 중부지방에서까지 동백나무가 잘 자란다고 하는데...
내륙지방에서는 일찍부터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사의 동백나무 군락지가 유명한데, 500년의 세월 동안 자생해 온 이곳 동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되어 있단다. 원래 방화림(防火林)으로 조성했다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3,000여 그루나 될 정도로 번식하여 지금의 울창한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창, 선운사, 그리고 동백꽃이라 하면 퍼뜩 떠오르는 사람, 시인 미당(未堂) 선생이 있다. 선운사 사하촌(寺下村) 입구에 들어서면 선생의 시비(詩碑)가 서 있는데, 좌파들의 집요한 친일 부역자 공세에 선생의 주옥같이 아름다운 시들은 하릴없이 시들어간 듯하여 보기에 안스럽다.
일제가 영향력 있는 인사들, 특히 마음 여린 예술계 인사들을 집요하게 얼르고 다그쳐 협조를 얻어내려고 하는 건 당연한 전략인데다, 거기에 넘어가는 예술인들이 많았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보면 일제의 꾐이나 협박에 넘어가지 않은 조상을 뒀다면, 그 조상은 틀림없이 학벌도 없고, 유명하지도 않고, 사회적 지도층도 아닌 그야말로 필부필부(匹夫匹婦)였을 터이니 굳이 애써 얼를 필요도 협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조상 둔 게 뭔 자랑이라고들 하는지...
선운사 동구(洞口)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