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농업이 변화하면서 영주와 농업 노동자들의 사회, 경제적 조건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세 전성기 대부분을 통해 촌락 생활이 장원manor-영주가 소유하고 농노가 노동하는- 이라는 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들을 말하기 앞서 이 장원제의 전형적인 형태를 설명해 두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음의 내용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먼저 장원제란 말이 봉건제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장원제는 농노에 의해 대규모 농경지가 경작되는 경제체계를 말한다. 그리고 이에 반해 봉건제는, 대부분의 중세사가들이 사용하는 의미대로라면, 권력이 대단히 분권화 되어있는 정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학자들이 "전형적 형태의 장원"에 근거하여 장원제를 논할 경우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역사적 근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두 개의 장원이 존재한 적은 없었으며, 실제로 많은 장원들이 규모와 기본 성격에서 크게 달랐다. 더욱이 세느 강과 라인 강 사이에 있는 카롤링 왕조 원래의 중심 거주지로 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유럽 지역에서는 장원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지극히 적었다.이탈리아에서는 아직 노예제에 입각한 농경이 행해졌고, 독일 중부 및 동부에서는 자유 농민에 의한 소농지 경작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장원은 카롤링 왕조 시대에 처음으로 분명히 등장했으며, 13세기경에 이르기까지 서북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업적 사회, 경제 조직의 지배적인 형태로 유지되었다. 그것은 로마의 대농장에서 유래된 것이었지만 장원은 로마의 대농장과는 달리 노예가 아닌 농노(serfs:때로는 villeins로 불림)에 의해 경작되었다. 농노들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볼 때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토지에 결박되어 이동의 자유가 없었으며, 영주를 위해 정규적으로 무상 노동(부역)을 해야만 했고, 수많은 굴욕적인 공납을 납부해야 했으며, 영주 법정에서 재판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경작할 수 있는 토지를 배정받았다는 점, 그리고 토지 박탈의 염려 없이 경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노예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므로 농업의 개선이 있을 경우에 농노들은 그로부터 약간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더욱이 영주는 비록 이론상으로는 마음대로 공납을 거둘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농노의 의무는 언제나 일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농노는 그 운명이 비록 지극히 가혹한 것이었지만, 결코 영주의 자의에 전적으로 예속된 존재는 아니었다. 수백에서 수천 에이커에 달했던 장원의 토지는 영주에게 속한 땅과 농노들에게 배당된 땅으로 구분되었다. 영주 직영지demesne로 불리는 전자는 보통 경작지의 1/3 내지 1/2크기였다. 그 땅은 농노들이 일정한 날에 경작했는데 대개 일주일에서 3일 정도였다. 영주 직영지는 커다란 땅덩이 땅덩이가 아니라 길다란 지조地條strips로 이루어졌는데 이 지조는 농민 보유의 지조와 혼재되어 있었다. (교회 보유 지조가 따로 있는 경우도 있었다.) 모든 지조들은 길고 좁다란 것이어서 멍에를 멘 말이나 소가 끄는 무거운 쟁기가 쉽사리 방향을 돌릴 수 없었다. 그리고 각 지조의 경계에는 밭둑만 있을 뿐 울타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체계를 일컬어 개방 경지제 open-field system이라고 부른다. 농노들은 자신의 토지를 경작할 때에도 거의 대부분 공동작업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개 가축과 농기구를 공동으로 소유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목초지도 "공유지"라고 불렸다. 공동 소유의 가축들이 그곳에서 함께 풀을 뜯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작지와 목초지에다 또 농노들은 보통 보통 자신의 작은 텃밭을 더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장원에는 별도의 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영주의 사냥을 위한 것이지만, 돼지 먹이와 땔감 수집을 위해서도 유용한 것이었다. 농노들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경우에도 그 일 또한 공동으로 했다. 실로 장원제는 전반적으로 공동 작업과 결속을 강조하는 체제였다. 공동체 정신은 농노들의 가혹한 생활 조건을 다소나마 완화시켜 줄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고대 로마의 노예에 비해 훨씬 나은 생활을 누렷다 고는 하지만, 그리고 1050년경에서 1300년경 사이에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농노들의 생활 조건은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원시적이고 비참한 것이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보통 나뭇가지를 엮어 진흙을 바른 초라하고 짝이 없는 오두막이었다. 13세기의 한 잉글랜드 농부는 단지 이웃집 오두막 중앙의 기둥 한 개를 부러뜨렸다는 이유로 해서 주택 파손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오두막의 바닥은 대개 차고 축축한 흙이었다. 침대라고 해야 거의 짚덤불에 불과했고, 그외에 가구라 할 만한것은 없었다. 식사는 대개 멀건 죽으로 때웠다. 과일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채소는 양파, 부추, 무,양배추 정도였다. 채소는 모두 멀건 스프로 끓여서 마셨다. 육류는 일년 중 기껏해야 몇 차례, 축제일 또는 말라빠진 소나 돼지가 먹일 사료가 바닥나는 한겨울에 먹을 수 있었다. 식기는 설겆이 할 필요가 없었다. 버리는 음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흉작의 위협이 항상도사리고 있었는데, 흉작이 닥치면 사실 영주보다는 농노가 훨씬 더 큰 피해를 입기 마련이었다. 영주들은 언제나 같은 액수의 수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흉년이 닥치면 농노들은 가진 곡식을 모두 내놓아야 할 형편이었고, 자식들이 서서히 굶어 죽어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아야만 했다. 곳간에 곡식이 조금 남아있어도 자식들이 굶어 죽어간다는것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은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곡식은 이듬해의 종자로 따로 떼어둔 것이기에 손을 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마저 없다면 그들에게는 도무지 장래라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참한 생활조건에 변화와 개선의 조짐이 보였다. 그 하나는 식단의 개선이었다. 중세 전성기에 접어들어 기근이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전보다 한층 건강해 졌다. 이제는 단백질, 특히 콩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을 먹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이유에서 농노 해방이 널리 이루어 졌다. 일단 영주의 주도로 새로운 땅이 개간되기 시작하자, 영주들은 농노들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등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야만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 노동을 이용하는 새로운 지역에는 도망온 농노들이 몰려들었고, 그곳은 농민들에게 부역 대신 고정된 지대를 요구하는 새로운 제도의 시범 지역이 되었다. 그후 심지어 오래된 장원에서조차, 영주들은 부역 대신 지대를 요구함으로써 수익을 올릴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편 농노들은 자신들의 잉여 생산물을 판매함으로써, 돈으로 자유를 살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여러 경로를 통해 13세기를 지나면서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노제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각 지역마다 다른 속도로 진행되었는데,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그 과정이 다소 지연되었다. 따라서 잉글랜드에서는 농민들이 강력한 지방 영주에게 (농노제의 유제라 할) 약간의 부역과 공납의 의무를 지지않을 정도로 농노제 소멸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경우가 거의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의무들이 1789년의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 까지 성가신 문제로 남아 있었다. 해방된 농노들은 계속해서 공동으로 노동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시장에 내다 팔기위해 생산하는 자유 농민이었다. 농업 혁명이 영주에게 가져다 준 이득 영주들은 농업 혁명을 통해 농노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겼는데, 그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그 하나는 영주들이 농노를 해방시킬때 마다 통상 농노의 전재산에 해당하는 많은 현금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노를 해방시킨 후 영주들은 주로 지대에 의지하여 생활했다. 지대 중 상당액은 종전에 영주가 소유는 했으되 경작지로는 사용하지 않았던 토지에 대해서 거두어들인 것 이었으므로 귀족들의 수입은 크게 증가되었다. 게다가 영주들이 부역 대신 지대를 선호하게 되면서, 그들은 지대를 불리기가 훨씬 쉽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지대 수취자가 된 영주들은 이제 종전처럼 일일이 경작지를 감독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좀 더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때로는 십자군에 참여하는가 하면, 더러 국왕의 궁정에 나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증대된 부는 그들의 생활을 향상시켰고, 기동성이 커지자 그들은 삶의 방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귀족들의 생활이 전에 비해 한층 세련된 것은 중세 전성기에 지역간의 격렬한 전쟁이 전보다 줄어든 데도 이유가 있었다. 1100년경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전형적인 귀족이란 이웃과 전쟁을 벌이거나, 힘 없고 자신을 지킬 무기조차 없는 약자들을 노략질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는 거칠고 잔인한 전사였다. 이러한 폭력성은 교회의 압력으로 12세기에는 많이 누그러졌다. 폭력성이 완화된것은 당시의 신흥 국가들이 국지적 평화를 좀더 효율적으로 강제하고 귀족 자신들이 좀더 안락한 생활을 즐기기 시작한 데도 원인이 있다. 귀족들은 계속해서 십자군에 참전했을 뿐 아니라 국가간의 전쟁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귀족들간의 사소한 다툼은 빈도가 훨씬 줄어들었다. 기사도chivalry는 분명히 그러한 오랜 전투 정신의 무의식적인 대용물로 발달한 것이었다. 기사도는 군사 활동을 비교적 온건한 행동으로 누그러뜨렸다. 기사도란 말 그대로 "기사 정신"이었으며, 기사 귀족은 말타기에 매우 능숙해야만 했다. 기사도는 또한 명예로운 목적을 위해 싸울 의무를 부과했다. 그러한 목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마상馬上 시합에서 싸울 기회가 마련되었다. 마상 시합이란 일종의 모의 전투로서, 처음에는 몹시 거칠었지만 나중에는 정교한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말 탄 귀족-상층귀족보다 토지를 적게 소유한 "기사"가 그 전형이다-에게는 용감하고 충성스러울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관대하고 신실하며 공손하고 친절할 것이, 그리고 부당한 이익이나 비열한 재물을 멀리할 것이 기대되었다. 귀족의 부의 증대 및 기사도 등장의 부산물로서는 생활조건이 향상되었고, 여성에 대한 처우도 개선되었다. 1100년경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귀족 주택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원시적인 난방 및 취사 방식으로 말미암아 종종 불에 타버리곤 했다. 부가 증대되고 기술이 향상되면서 1100년 이후의 성들은 대개 돌로 지어지게 되었으며, 불에 타는 경우도 훨씬 줄어들게 되었다. 더욱이 성에는 이제 굴뚝과 덮게달린 벽난로(두가자 다 중세의 발명품)가 설치되었는데, 그 결과 중앙의 커다란 홀에 큼직한 화덕을 하나 놓는 대신 각 방마다 독립적인 난방이 되었으므로, 각자의 사생활을 제법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귀족들은 항상 농민들보다 채소를 덜 먹었으며 대신에 육류를 많이 먹었다. 사치품 교역이 증대된 탓으로 후추와 샤프란 같은 값비싼 외국산 향료가 식탁에 오르게 되었다. 식탁 예절은 여전히 형편없었지만-귀족들은 모두 나이프와 스푼만 사용했을 뿐 포크는 없었고 소맷자락에 코를 풀어대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우아한 옷을 걸치고는 남들 앞에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뽐내려 했다. 이 시기에는 몸에 꼭 맞는 옷이 착용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뜨개질과 단추 및 단추 구멍이 바로 이시기에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전성기에 귀족들은 여성에 대한 태도의 역사적 변화에 관해서는 다음의 두가지 이유에서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첫째는 우리가 갖고 있는 증거가 대부분 문학 형태인데, 역사학자들은 과연 문학이 얼마나 실제 생활을 반영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둘째로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의 여성들은 기껏해야 받침대 위에 모셔진 존재였던 반면에, 현대의 여성들은 "받침대 위로" 올라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 생활의 물질적 향상이 남자는 물론 여자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중세 전성기에는 여성에 대한 언어 표현에서 분명 혁명이 일어났다. 12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소수의 여성 성인聖人들을 제외하면 여자들은 문학에서 사실상 무시되고 있었다. 전형적인 프랑스 서사시는 유혈이 낭자한 전투를 묘사하면서 여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남성에게 철저히 종속된 존재로만 잠시 표현할 뿐이었다. 그러던것이 서기1100이 지난 후 불과 수십년만에 여성들은 갑자기 서정 시인과 로망 작가들에 의해 존경의 대상으로 변모하였다. 전형적인 투르바두르 시인은 자신이 연모하는 귀부인을 일컬어, "내가 하는 모든 온당한 일을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으로부터 추론"한다느니, "그녀는 즐거움의 열매를 맺는 나무요, 가지"라고 표현했다. 새로운 "궁정"문학은 극도로 이상주의적이고 다소 인위적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상류계급 여성들이 과거보다 실질적으로 더 많은 존경을 받게된, 한층 부드러운 문화의 가치를 표현한 것이었다. 더욱이 12세기와 13세기 일부 왕실 여성들은 남편이나 아들이 사망하거나 통치할 수 없었던 여러 경우에 처하면 국가에 대해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 햇다.예를 들면 헨리 2세의 아내로 불굴의 의지를 가진 아키텐의 엘레노어는 아들인 리처드1세가 1190년에서 1194년까지 십자군에 참전했을 때, 이미 70세를 넘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리고 강철같은 의지를 지닌 카스티야의 블량쉬는 13세기에 두 차례에 걸쳐진 국가를 통치한 바 있다. 즉 한번은 아들인 루이9세가 아직 어렸을 때, 그리고 또 한번은 아들이 십자군에 참전한 동아네 프랑스를 매우 훌륭하게 다스렸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중세 전성기의 여성들은 아직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중세 전성기는 상류 계급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된 시기였다. 그와 같은 사정을 보여 주는 가장 상징적인 예는 체스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세 도시는 결코 현대 도시의 축소판은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낙후된 상태였다. 도로는 대부분 포장되지 않은 상태였고, 주택에는 채소를 재배하는 텃밭이 딸려 있었으며, 소와 돼지가 외양간과 돼지우리에서 사육되었다. 주요 도시의 대로를 따라 걷던 행인은 양떼와 거위떼로 인해 겨우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위생 상태는 매우 열악해서 동물과 사람의 배설물에서 나는 악취가 진동했다. 게다가 도시민은 종종 화재에 시달려야만 했다. 대부분의 가옥들이 목조 건물인 데다 밀집 되어 있었고 소방 시절 마저 없어서 화재가 났다 하면 도시 전체를 휩쓸곤 했다. 비위생적인 생활 조건과 인구밀집으로 인해 전염병이 쉽사리 번졌다. 또한 경제적 갈등이나 가문간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종종 유혈 폭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도시민들은 그들이 새로운 도시와 새로운 생활방식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 도시의 가장 특이한 경제,사회적 조직은 길드guild였다. 이것은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특수한 이익을 보호,증진하기 위해 조직한 전문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브라이언 티어니와 시드니 페인터의 공저인 <서양중세사>에서 옮긴 중세 기사들의 거처에 대한 묘사이다. 오늘날 서유럽국가들을 관광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식사 시간 이다. 관광객이 많은 도시는 예외지만, 식사시간 이외에 정상적인 식사를 하 기가 극히 힘들다.점심시간이 지나면 레스토랑은 저녁식사 시간까지 닫든가 음료수만을 판매한다. 무심코 점심시간을 놓치면 길가에서 서서 먹는 햄버거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게다가 점심, 저녁 식사시간이 고정된 시각으로 정해 져 있는 것도 아니다. 점심시간은대개 정오 전후로 비슷하지만 저녁식사 시 작시간은 로마가 7시반, 밀라노가 7시, 제네바가 6시로 각양각색이다. 어쨌든 서유럽인은 정각이 되면 반드시 충분한 시간 동안 천천히 식사를 한다. 먹는 것이 그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기업이 신문에구인광고 를 낼 때도 '사원식당 있음'이란 문구가 유력한 선택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된 것은 원래부터 서유럽에서는 먹는 것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일 이었기 때문이다. 풍토적 조건이 열악한 서유럽은 바다나 산에서 나오는 자 연적 산물이 매우 적었다. 또 주곡물인 맥류(麥類)는 매년 연작이 불가능하 였고 사료작물과 윤작이 시작되기까지는 지력회복을 위해 휴경해야만 했다. 빵이 주식이 될 수가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자연의 풀들이 부드러운 상태에 서 생장을 멈추기 때문에 가축의 방목에는 풍족하였다. 18세기 영국의 유명 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토지를 이용하는데 있어서빵이 비싸지만 밀밭 으로, 소고기가 비싸지만 목초지도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밀밭 과 목초지는 상호이행의 관계에 있었다. 가축의 사육은 어패류를 잡는 것처 럼 남들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소의 경우와 같이 성장하는 데 몇 년씩이나 걸리는 가축은 최종적으로는 도살하여 식육으로 쓴다 하더 라도 무계획적으로 사육할 수는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주식, 부식의 구별이 없고, 사람 입에 들어가는 모든 식품을 처음부터 사람의 손을 거쳐 조달해야 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먹는 데 대한 관심은 좋은 싫든간에 높아만 갔다.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우라나라처럼 쌀이나 보리의 입자로 밥을 끓여먹는 것이 없으며 여기에는 제분과정이 필요하였다. 또한 어패류의 섭취방법도 다 르고, 소나 돼지의 경우도 통채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도살 후에도 여러번의 해체작업을 거쳐 편육이나 내장으로 나눠놓기 전에는 요리로 만들 수가 없었다. 아무튼 서양요리의 주류는 유우, 버터, 치즈, 밀가루, 고기, 야 채, 달걀 등을 뒤섞어서 약한 불에 흐믈흐믈하도록 끓이는 방식이였다. 옛날 에는 밀가루를 우유나 산양의 젖을 섞어 끓이는 것이 전부였지만 점차로 섞 는 내용물이 늘어갔던 것이다. 세기경에 위에서 말한 '섞어찌게'가 변용된 것에 불과하다. 요리에 있어서도 재료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까지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탓인지 서유럽에서는 일찍부터 괴혈병이 진귀한 질병이 아니었다. 근세 이후 서유럽인의 해외진출이 사태를 일변시켰다. 알지도 못했던 음식 이 연이어 유입되었다. 16세기에는 아스파라거스(asparagus : 어린싹이 식용 야채로 쓰임), 멜론, 17세기에는 코올리플라워(cauliflower : 꽃양배추. 양배추 의 일종), 가치, 완두콩, 18세기에는 토마토, 사탕무우 등이 서유럽에 첫선을 보였다. 이것이 일반에게 금방 보급된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서유럽의 식 탁은 풍성해졌다. 그 가운데서도 17세기에 등장한 홍차와 커피는 혁명적인 위력을 발휘하였다. 원래 서유럽에서는 우유 종류를제외하면 맥주 포도주 등 알콜음료뿐이였고 사람들은 항상 얼큰하게 취한상태였다. 거기에 취하지 않게 신경을 자극시키는 새 음료가 소개되었다. 처음에는 독성이 있을 것이 라고 배척받았지만 18세기에는 서유럽에 일반화되었다. 또 16세기 말에 서유 럽에 전해진 감자도 역시 처음에는 배척되다가 18세기경 일반화되었다. 또 18세기에는 사료작물 재배가 본격화되었고 방목과 축사내의 사육이 병행되 면서 비육이 가능해짐에 의해 소, 양, 말 등의 도살량이 증대되었다. 18세기 는 모든 점에서 음식혁명이 진행된 시기였고 누구나 스푼과 포크를 사용하 게 되었다. 프랑스요리가 서양요리의 왕좌를 차지한 것은 18세기였다. 당시 프랑스 경제학자 케네는 음식의 사치는 품종개량을 낳았고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다 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왕족, 귀족들은 오로지 미식을 추구하는 데 광분하였 다. 남녀 모두 부엌에 출입하는 것이 유행하였고 파티를 열어도 남주인이나 여주인이 손수 만든 요리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이 최고의 예의였다. 물론 전부 다 부부가 도맡는 것은 아니었다. 솜씨 좋은 요리장은 왕족, 귀족들이 서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들은 직인이라기보다는 예술가 대접을 받았고 종 종 치열한 스카우트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요리비법이나 새로운 요리가 계속 나타났다. 프랑스혁명에 의해 실업자가 된 요리장들이 남몰래 불특정다 수의 손님들에게 요리를 제공하였던 것이 오늘날 레스토랑의 기원이었다. 결혼한 아들들과 그 아이들 그리고 그 손자들까지 합해서-열네살이면 성인취급을 받았던 당시의 사람들은 일찍 결혼했으며 따라서 세대차라는 것이 매우 미약했다- 20,3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한솥밥을 먹으며 살았다. 그리고 밤의 처소로 사용되는 방 하나에서 모두가 사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이러한 한무리의 사람들은 분할되지 않은 상태로 물려받은 상속재산을 최고 연장자의 지도하에 함께 관리했다. 이러한 것이 당시 귀족들의 가족이었다. 저항하기 힘든 상호의존-어느 누구도 잔기 벗대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그리고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심성의 여러 특징 즉 약탈거리와 이득을 찾아 먼 곳으로 모험을 떠나거나 방랑을 하는 취향, 이제는 자신이 친족집단을 이끄는 것을 꿈꾸어 자기 상전과 경합관계에 있는 영주에게서 피난처를 구하는 아들들과 쉬이 죽지 않는 아버지간의 흔한 불화들, 이 모든것들이 가족의 재산공유로부터 오는 제약들로 설명된다. 그러나 가족공유는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었다. 부르고뉴의 연대기 작가인 라울 글라베르Raoul Glaber의 다음글귀는 유명하다. :"1000년에 뒤이은 3번째 해가 다가옴에 따라, 거의 모든 지방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와 갈리아에서 교회 건물을 개축하는 것을 볼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당들이 옛날에 매우 튼튼하게 지어져 개축할 필요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치열한 경쟁심 때문에 인근 교회보다 더 호화스러운 교회를 갖고 싶어했다. 세계 자체가 자신의 노후함을 벗겨내기 위해 진동하고 있었고, 도처에서 '교회의 창백한 외관'에 옷을 입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교좌에 위치한 거의 모든 교회들, 그리고 마을의 조그만 예배당조차도 신자들에 의해서 전보다 더 보기 좋게 중수되고 있었다" 이러한 개선들이 가져온 첫번째 결과들 중의 하나가 인구 증가였는데, 아마 10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했을 것이다. 러셀 J.C.Russell에 의하면, 서양의 인구는 600년경 1470만에서 950년에는 2260만으로, 1348년 페스트 직전에는 5440만으로 증가했다. 베네트 M.K.Bennett에 의하면, 유럽 전체 인구가 700년경 2700만에서 1000년에는 4200만으로, 1300년에는 7300만으로 증가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구의 비약적 증가는 다음으로 기독교 세계의 팽창에 결정적 역활을 했다. 봉건적 생산양식이 갖고 있는 조건들은 기술적 발전을 어느 정도 자극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기술 향상이 낮은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억제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같은 봉건적 조건들은 인구 증가가 초래한 필요들을 총족시키기에 충분한 농업 생산의질적 향상을 불가능케 했다. 생산성의 향상과 수확물의 영양 간가는 여전히 낮았다. 봉건적 토지 경영은 후에 다시 살피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집약적 농법을 불가능케 했다. 아직도 경작지를 확대 시키지 않으면 안 될 판이었다. 10~14세기에 있어서 기독교 세계 팽창의 주도니 모습을 대대적인 개간 운동이었다. 개간 운동의 연대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12세기 이전에는 이에관한 문헌사료가 많지도 않고 농촌 고고학이 미숙하여 그것을 적용하기도 힘들거니와 중세 농촌 풍경이 후대에 자주 변형되거나 파괴되어 그 결과들에 대한 해석도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죠르쥬 뒤비의 지적처럼, "2세기 동안 미미하고도 간혈적이며 여기저기 분산되었던 개척자들의 활동이 1150년에 이르러 보다 왕성하고 협동적이 되었다." 곡물과 같은 주요부문에서 경작지 정복의 결정적 시기는, 화분학이 밝혀주는 것처럼, 1100년에서 1150사이이다. 꽃가루 화석에서 추출된 밀의 화분함량이 12세기 전반부에 급증했던 것이다." 새로운 농경지들이란 옛날 농경지의 확장, 다시 말하면, 황무지와 목초지 부근에 있는 "숲속의 빈터의 점진적 확장"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했다. 화전에 의한 개간으로 관목지대는 줄어들었으나 큰 나무가 많은 삼림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개간도구가 빈약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중세의 주요한 개간 도구는 큰 도끼가 아니라 손도끼 였다) 영주들이 자신들의 사냥터를 보호하고 싶어했고 촌락 공동체들도 중세 경제에 매우 긴요했던 산림 자원을 지나치게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기 떄문이다. 토지의 정복은 또한 늪지를 건조시키고 간척지를 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일찍이 비약적 인구 증가를 경험했던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그러한 방식의 토지 정복이 1100년경 도처에 작은 방파제를 구축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간혹 전혀 새로운 토지가 개간을 통해 획득되었고 거기에 새로운 촌락이 건설되기도 했다. 우릳르은 사회적 국면들에서 각별한 중요성을 띠고 있는 그런 현상을 후에 다시 살필 것이다. 중세 서양인들 대부분이 숲의 기슭을 종종 갊의 지평으로 삼았다 하더라도, 중세 사회를 정체의 자회요 부동의 세계요 숲속의 한 모퉁이에 얽매인 세계로 상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세인들의 유동성은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그것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물질적 현실로서건 심리적 실재로서건 소유권은 중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농민으로부터 영주에 이르기까지 각 개인과 가문은 다소간 광범위한 임시적 점유권이나 용익권만을 갖고 있었다. 중세인들 각각은 주인을 모시거나 자신의 토지(농민 보유지나 영주의 봉)를 폭력으로 강탈할수 있는 보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자를 상전으로 섬겼지만, 법률 자체도 농노나 봉신으로부터 그들의 소유지를 강탈하고 그 대신 그들에게 이와 동등한 등가물이나 때로는 원래의 가치보다 훨씬 떨어지는 등가물을 양도할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영주에게만 인정하고있었다. 영국으로 건너간 노르만의 영주들, 동부 지방에 정착한 독일의 기사들, 알비 십자군을 이용하여 남불에서 또는 이슬람교도 재정복 기간 동안 스페인에서 봉을 차지한 일-드-프랑스의 봉신들, 모레 지방이나 성지에 있는 영지를 서로 분할 점령한 온갖 부류의 십자군 병사등 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을 쉽게 떠났는바, 그들은 거의가 고향을 갖지 못했기 떄문이다. 농민의 토지는 영주의 몰수 가능한 양여물에 불과했다. 토지도 윤작 순서에 따라서 촌락 공동체에 의해서 재분배되기 일쑤였다. 이와 같이 농민들은 영주의 의지에 따라서만 그들의 토지에 정착할 수 있었고, 따라서 농민들은 처음에는 탈주라는 수단이나 나중에는 법률적 해방을 통해서 영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건 집단적으로건간에 농민의 이주는 중세 사회와 인구통계학상의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였다. 도로상에서 기사들과 농민들, 정규적 여행을 하거나 수도원을 탈출한 성직자들(종교회의에서는 수도승들의 탈출을 막기위해 탈출금지법을 제정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이며, 저명한 학교와 대학을 찾아가는 학생들(12세기의 한 시구는 타향으로 가는 것이 학생들의 필수적인 몫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며, 순례자들과 온갖 부류의 방랑자들을 만날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을 고향에 붙들어매어놓을 수 있는 물질적 혜택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정신 자체도 그들을 도로상으로 내밀었던 것이다. 그러한 유배지에서 인간은 영원한 순례자에 불과했는바, 이것은 "모든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복할 필요도 없이 바로 교회의 가르침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거의 내지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떄문에 그들은 쉽게 고향을 떠났다. 순례자들의 배낭속에 들어 있는 물품을 초라했다. 오랫동안 화폐가 희귀했던 시대에 극빈작들은 호주머니에 동전 몇닢만을 가지고 있었다. 거부들은 그들 재산의 대부분을 담은 금고와 약간의 귀금속을 가지고 여행을 했다. 후일 여행자들과 순례자들에게 짐들이 거추장스러워질 때(쥬엥빌과 드의 동료 사르브뤼크 Sarrebruck방백이 금고를 가지고 1248년에 십자군 원정에 나섰을떄, 그들은 금고를 옥손Auxonne까지는 마차로, 거기서 아를르까지는 손 강과 론 강을 통해서 배로 운반했다), 십자군 정신뿐만 아니라 여행의 취향도 약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중세 사회도 정착 사회가 되었으며 도보 여행과 기마 여행의 시대인 중세가 곧 종말을 고할 것이다. 중세말까지도 중세인들의 방랑벽이 없어진것은 아니지만 14세기부터는 떠돌이들이나 저주받은 자들만이 방랑했다. 중세초에는 방랑자들이 정상적 인간이었으나, 후대로 갈수록 정착민들이 정상적 인간으로 간주되는 경향이었다. 그러나 방랑에 대한 이러한 싫증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중세는 여행자들로 가득했고 그때마다 화상에 묘사되었다. 이같은 방랑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홀장이나 그리스어 (?)자형의 단장이었다. ---이것은 곧 상징적인 것이 되었다. 은둔자들이며 순레자들이며 거지들이며 병자들이 이것을 짚고 다녔다. 떠돌이들은 또한 맹인으로 상징되었는바,우화시에 등장하는 자들이 그러한 사람이었따. "어느날 콩피에뉴 근처의 한 도로에 세명의 맹인들이 안내자도 없이 여행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가 나무로 만든 동냥그릇을 들고 있었다. 의복은 초라해 보였다. 그들은 이렇게 세늘리스로 가는 길을 따라 거닐고 있었다." 교회와 모랄리스트들은 이 같은 떠돌이를 경멸했다. 종종 그런 단순한 방랑벽이나 공허한 호기심을 포함한 순례(중세적 여행의 한 형태) 그 자체가 의심받기가 쉬웠다. 호노리우스 아우쿠스토두넨시스는 일찍이 12세기에 그런 순례를 비난하고 만류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저서 『교리 문답』에서 한 학생이 "예루살램이나 다른 성지에 가는것이 무슨 소용있나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선생이 "여행에 드는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것이 더 낫다"라고 대답한다. 그가 인정한 유일한 순례는 참회를 명분과 목적으로 하는 순례였다. 사실 애초부터 참된 순례란 욕망 충족의 행위가 아니라 참회 행위였다. 순례는 종교상으로 중죄를 저지른 모든 사람들을 징계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보상이 아니라 책벌이었던 것이다. "호기심이나 허영심"에서 순례를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교리 문답』의 한 선생이 말한것처럼, "그들이 순례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이득은 마음에 맞는곳이나 아름다운 건물을 관광하는 것 아니면 그들이 바라는 허영심을 채운는 것이다." 방랑자들은 불행한 사람들이었고, 여행은 허영에 불과했다. 순례의 가엾은 현실은, 비록 여행중에 굶어죽거나 이교도한테 학살당한 십자군 원정군들의 그런 비극적이 경우까지는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자 전기』에서 언급되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십상이었다. "1100년경 한 프랑스인이 고향을 휩쓰는 전염병을 피하기도 하고 성자의 묘지를 참배하기도 할 겸해서 부인 및 자녀들과 함꼐 생-쟈크-드-콩포스텔을 향해 떠났다. 팜플로나시에서 그의 부인이 죽고 여관주인이 그의 모든 돈과 그의 아이들을 태우고 다니던 말까지 강탈해갔다. 그때 저 가엾은 아버지는 자녀들 중에 둘은 무등을 태우고 나머지 아이들은 손으로 끌고 다녔다. 당나귀를 갖고 있던 어떤 사람이 그를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아이들을 태우고 다닐수 있도록 그에게 당나귀를 건네주었다. 그 프랑스이 셍-쟈크-드-콩포스텔에 도착해서 그 성자를 다시 만났을떄, 후자는 전자에게 자기를 알아보겠냐고 묻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사도 쟈크이다. 여기까지 올수 있돌고 당신에게 당나귀를 준 것은 나였고, 또 당신이 돌아갈 수 있도록 당신에게 당나귀를 다시 주겠따.'그러나 저 기적 같은 당나귀의 도움조차 받지도 못하고 뒤처져버린 당나귀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사실 여행에는 시련과 장애물이 없지 않았다. 물론 이용 가능한 곳이면 어디서든지 수로가 이용되었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로마시대의 훌륭한 도로들은 게르만의 침략으로 거의 사라지거나 황폐화되어 존재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중세사회의 필요에 적합하지도 않았다. 수송은 특히 짐바리 동물이나 고풍스런 마차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급할 것이 없었던 도보 여행자들과 기사들에게 있어서 포장된 쭉 뻗은 로마의 도로는 군사,행정 도로였던 관계로 그리 도움이 되지도 못했다.---그들은 강탈적인 기사가 있는 성채를 피하거나 아니면 성소를 방문하기 위하여 일부러 우회로를 택했다. 그들은 시장이 열리는 도시며 순례지며 다리며 걸어서 건널수 있는 얕은 시내며 고개등과 같은 몇몇 지점들로 빠지는 통로나 소로 또는 오솔길을 따라 여행했다.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숲속에는 비록 발자국이 나 있긴 했지만 위험하고 공포스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니콜레트가 "울창한 숲속에 있는 오래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그 지방을 관통하는 7개의 소로가 교차하는 도로에 도달했다." 그떄 숲의 모퉁이나 바위꼭대기에는 산적들이며 기사들 혹은 농노들이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쥬엥빌이 론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글륑Glun의 암석'이라 불리는 한 성채를 발견했는데, 이곳은 로제르Roger가 불리는 한 성주가 순례자들과 상인들을 강탈한 혐의를 받고 있던 터라 왕으로부터 파괴 명령을 받은 성채였다. 상품들이며 때로는 단순한 여행자들이며 다리들이며 언덕이며 시내들에는 막대한 세금이 부과되었다. 마지막으로 도로상태가 좋지 못해 여행자들이 빠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들구지를 끌고 가려면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했다. 기욤 도랑쥬의 조카이자 무훈시 『님프의 마차』에 나오는 베르트랑 같은 주인공은 그가 마차꾼으로 행사하려고 했을때 바보 취급을 받았다. 중세의 여로는 절망적으로 길고 느린 것이었다. 여행자들 중 가장 시간을 다투는 상인들의 경우에도 하루에 갈수있는 여정은 도로사정에 따라서 25내지 60킬로미터 정도 였다. 볼로냐에서 아비뇽까지는 2주가, 샹파뉴정기시장에서 님까지는 22일이, 피렌체에서 나폴리까지는 11내지 12일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중세 사회는, 마르크 블로크가 지적한 것처럼, "영속적인 동시에 불규칙적인 일종의 브라운 운동"에 의해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중세인들은 거의 모두가 상호 대조되는 두 종류의 지평 사이를 움직였다. 하나는 중세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개간지들의 제한된 지평이고, 다른 하나는 전체 기독교 세계의 머나먼 지평이다. 후자의 지평에서 중세인들은, 아랍문화를 탐내는 12세기 영국의 성직자들처럼 갑작스럽게 영국에서 셍-쟈크-드-콩포스텔이나 톨레도로 갔따. 10세기말 게르베르는 아우리악에서 렝스나 카탈로니아 지방의 비쉬, 혹은 라벤나나 로마로 여행할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십자군들처럼 플랑드르에서 아크르로 갔고, 많은 독일 이주민들처럼 라인강 유역에서 오데르강이나 비스툴라강 유역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중세 기독교도들이 보기에 진짜 모험가들은 기독교 세계의 변경을 넘어가는 사람들, 즉 아프리카나 크리미아 지방으로 상륙하거나 저 멀리 아이아세까지 침투해간 선교사들과 상인들 뿐이었다. 해로는 육로보다는 빨랐다. 순풍이 불때는 하루에 300킬로미터까지 항해할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위험은 육지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어쩌다가 만나게 되는 빠른 항해는 절망적인 적막감이나 역풍과 역류등에 의해서 상쇄되기도 했다. 이집트를 항해하던 쥬엥빌의 경우를보자: "바다에서 매우 이상한 사건이 벌어졌다. 저녁만도 시간 무력 바르바리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있을떄 우리들은 꼭 공처럼 생긴 둥근 산에 이르렀다. 우리들은 밤새 항해를 했으므로 50마일은 족히 갔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날이 새었을때 우리들은 어제 보았던 그 산앞에 되돌아와 있음을 발견했다. 이와 똑같은 일이 두세번 반복하여 일어났다." 이러한 지연은 해적들과 폭풍우에 비한다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것이었다. 쥬엥빌은 '모험 상인들'이 어리석을 정도로 무모하다는것을 곧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성품을 갖고 있거나 대죄를 지은 상태에서 무모하게 그런 위험한 지경에 뛰어드는 자들을 얼빠진 놈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는 심해 속에 빠져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꺠닫지 못한 채 저녁이면 잠이 들기 때문이다." 진부하긴 하지만 생동감 있는 중세의 여행담 중에서, 폭풍우에 휩싸인 범선의 성공담보다 더 큰 인기를 끈 것은 없을 것이다. 상징적이건 현실적이건간에 항해에 관한 일화들은 성자 전기에서 가장 꾸준하게 등장했다. 우리들은 이 여행담이 세밀화나 유리창 그림에 묘사된 것을 많이 볼수 있다. 가장 널리 퍼진 기적담들은 성자가 개입하여 폭풍우를 진무하거나 조난자를 구출하는 성자의 기적에 관한 것들이었다. 쟈크드 보라진의『성자 전기』에 등장하는 성자 니콜라스는 그러한 예의 전형이다: "어느 날 선원들이 바다에서 조난당해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하느님의 종 니콜라스이시여, 우리가 당신에 관해서 들은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그것을 지금 실행해보십시오.' 그러자 성자 모습을 한 어떤 사람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들이 불러 지금 내가 여기 와 있느니라!' 그리고 그가 돛과 밧줄과 그 밖의 선구들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주기 시작하자 즉각 폭풍우가 그쳤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는 숲이며 도로며 바다등이 중세인들의 감수성을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그것들은, 그것들의 현실적인 면모나 실제적 위험을 통해서보다는, 그것들이 표상하는 상징을 통해서 중세인들의 감수성을 움직였다. 숲은 어둠의 상징이거나, 방랑하는 음유시인이었던 알렉산더('황야의 알렉산더')의『유년기의 노래』에서처럼 환상이 깃들인 속계였다. 바다는 우주이자 그것에로 이끄는 유혹물이었으며, 도로는 참구와 순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동성연애자 왕은 대답했다. "그래라 중전을 살려주되 죽음보다 더 치욕스럽고 더 고통스런 벌을 주도록 하라. 짐에게 그런 방법을 가르쳐주는 자는 더욱 총애를 받으리라." "폐하, 그러면 저의 생각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100명의 동료들이 있습니다. 이쇠를 저희들에게 넘겨주십시오. 어떠한 귀부인도 이보다 더 비참한 종말을 맞지는 못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희들이 입은 누더기들은 진물이 나는 상처에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녀는 폐하 곁에서 다람쥐 모피로 된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대리석으로 장식된 방에서 쾌락을 맛보았습니다. 그녀는 맛좋은 포도주와 명예와 쾌락을 즐겼습니다. 그런 그녀가 이 문둥이들의 집을 보고 저희들의 누추한 소굴로 떠밀려 들어갈 때, 아름다운 금발의 이쇠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저 아름다운 기사나무불을 아쉬워할것입니다!" 왕은 그의 말을 듣고 일어나 잠자코 서 있었다. 드디어 그는 왕비에게로 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외쳤다. "폐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에게 차라리 화형을 내려주십시오" 왕은 왕비를 일으켰다. 이벵은 그녀를 데리고 갔다. 100명의 문둥이들이 그녀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녀가 울부짖는 것을 보고 모두들 안됐다 싶었다. 그러나 이벵만은 기뻤다. 이쇠가 떠나갔다. 이벵이 그녀를 끌고 갔던 것이다. 도시 밖으로 저 혐오스런 행렬이 내려가고 있었다" |
출처 : <http://ccasper.x-y.net/middle1.htm> |
첫댓글 옛날에 네이버지식인에서 본 글이네요. 상당히 좋은 자료입니다.